임꺽정 林巨正.
임꺽정의 출생과 의적 행적을 칭송하는 인물전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장길산과 임꺽정(林巨正, ? ~1562)을 꼽았다.
성호가 3대 도적으로 이들을 꼽은 것은 비단 대도(大盜)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고 본다.
백정출신이 부자들을 향해 칼을 들다"
난의 주동자였던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었지만,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다양했다. 상인, 대장장이, 노비, 아전, 역리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임꺽정은 자신만의 리더십으로 이들을 이끌었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는 처음에는 구월산·서흥 등 산간지대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고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지면서 평안도와 강원도, 안성 등 경기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관군들이 일찍이 임꺽정의 세력이 커질 때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정과 비밀리에 결탁되어 관에서 잡으려고 하면 그 사실을 미리 알려줬기 때문이다. 결국 관에서는 선전관(宣傳官)이라는 무장을 내세워 추적하게 했지만, 임꺽정과 그의 무리들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들어가고 나간 것을 헷갈리게 만들어 추적을 불가능하게 했다. 결국 추적에 나선 선전관은 구월산에서 임꺽정 무리들의 발자국을 발견했지만, 들어간 것을 나간 것으로 잘못 알고는 화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임꺽정 무리들의 약탈 대상은 이른바 부자들이었다. 관청이나 양반, 토호의 집을 습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도로 가져갔고, 심지어 과감하게 관청을 습격하는 등 공권력을 향해 항거하기도 했다. 이는 임꺽정 무리들이 일개 좀도둑이 아닌 농민저항 수준의 반란이었음을 말해준다. 민중들이 관군의 동향을 미리 알려주고 그들의 활약에 환호를 지른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도적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세와 현상금에 눈이 먼 관리들"
당시 왕이었던 명종은 이들을 ‘반적(叛敵)’이라 부르며 반란군으로 규정했다. 단순한 도적이 아닌 체제도 뒤엎을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왕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신출귀몰한 임꺽정이 잡히지 않자 그에 대한 현상금은 높아만 갔다. [명종실록]에 실려 있는 임꺽정 기사는 상당부분 가짜 임꺽정을 진짜로 둔갑시켜 출세를 해보려는 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1561년 1월 3일에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 강원도 순경사 김세한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보고했으나, 그들이 잡은 인물은 형인 가도치였다. 이들은 임꺽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세에 눈이 멀어 가도치를 때려 죽이면서까지 진실을 덮으려 했지만, 발각되어 중형을 받았다. 이사증의 뒤를 이은 인물이 의주 목사 이수철이다. 이수철은 임꺽정과 한온을 붙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했으나 그가 잡은 인물은 윤희정과 윤세공이라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임꺽정 무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나 고문에 못 이겨 죄를 거짓 자백한 후 사형을 당했다. 당시 의주 목사 이수철도 이들이 임꺽정과 한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온갖 고문을 동원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었고, 늙은 노파를 잡아다가 임꺽정의 아내라 하며 인두질을 해댔다. 사실이 드러난 이후 이수철은 파직처리 당했지만, 이들 외에도 임꺽정을 잡아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한 관리들은 넘쳐났다.
서림의 배반으로 체포된 반적의 우두머리"
명종은 선전관과 금부 낭청에게 임꺽정을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릴 정도로 두려워했다. 조선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꺽정의 난이 진압된 것은 1562년 1월,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서였다. 남치근이 구월산 아래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모아 임꺽정 무리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며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어서 임꺽정 무리 가운데 일찍이 체포되었던 서림(徐林)이 길잡이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체포 작전이 시작되었다. 서림의 배반으로 궁지에 몰린 임꺽정은 산을 넘어 도망치고 급기야 한 촌가로 숨어들었다. 촌가를 관군이 포위하자 임꺽정은 집 주인인 노파에게 집 밖으로 뛰쳐나가라고 위협했다. 노파가 “도적이야” 하고 외치며 문 밖으로 나가자 군인 차림으로 변장을 한 임꺽정이 노파를 뒤쫓으며 “도적은 벌써 달아났다”고 외쳤다. 임꺽정을 알아보지 못한 군사들은 일제히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러는 북새통에 임꺽정은 군사가 탄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났지만 심한 상처를 입어 멀리 가지 못했다. 멀리서 임꺽정을 알아 본 서림이 “임꺽정이다”라고 외쳤고 이후 관군들은 수많은 화살을 그를 향해 날렸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서림이 배반한 것 때문이다. 서림아, 서림아, 네가 어떻게 투항할 수 있느냐...” 1562년 1월 8일, 임꺽정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들은 명종은 “국가에 반역한 임꺽정 무리가 모두 잡혀 내 마음이 몹시 기쁘다”고 말하며 공을 세운 자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임꺽정의 난은 역대 반란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기적으로 지속되었고 조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중추부 영사 윤원형등 당대 최고의 실권자가 모여서 황해도를 휩쓰는 도적떼를 없앨 대책을 세운 것이 1559년(명종 14년) 3월 27일이었다. 이후 관군에 의해 소탕된 것이 1562년(명종 17년) 1월 초였으니 무려 3년이 넘게 관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황해도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3년 이상 지속된 것에는 여러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임꺽정의 난에 대해 [명종실록] 편찬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말이다. 임꺽정을 흉악범으로 기록해 놓은 [명종실록]이지만, 사관(史官)은 그 본질을 읽고 있었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무렵 조선사회는 동맥경화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른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였고 이 때의 왕이 명종(明宗)이었다. 실제 명종대의 진정한 대도는 임꺽정이 아니라 실권자였던 문정왕후의 혈육 윤원형(尹元衡)이었다.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이자 문정왕후의 동기간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임꺽정은 우연하게 출연한 도적이 아닌 것이다. 사실, 임꺽정이 활약했던 황해도 지역의 지방 관리들은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친정붙이들이었다. 임꺽정 난이 기록상 보이기 시작하는 1559년 황해도 지역은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지경이었다. 가난과 전염병으로 쪼들린 농민들은 살 곳을 잃고 떠돌아 다니다가 도적이 되는 것이 기본 수순이었다.
임꺽정, [林巨正]소설 로 다시부할;
임꺽정은 사실은 소설이나 드라마로 더 친숙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이전 [명종실록]을 비롯한 역사 기록물들은 임꺽정과 그 무리들을 약탈과 살인, 방화를 서슴지 않는 인간들로 묘사하였다. 의적은커녕 대낮에 민가 30여 곳을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살해하거나 심지어 배를 갈라 위엄을 보이는 잔혹한 무리들이었다. 임꺽정이 의적으로 부활한 데는 벽초 홍명희(1888~1968)의 공이 가장 컸다. 사회주의자이자 독립투사였던 홍명희는 신간회 부회장을 역임한 인물로 분단된 이후에는 북한에서 부수상을 역임할 만큼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홍명희는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방편으로 민중의 결집을 원했고 그런 의식 속에서 [임꺽정]이라는 대하소설을 썼다.
"림꺽정이란 넷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밧든 백정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엇슴니까. 그가 가슴에 차 넘치는 계급적○○의 불낄을 품고 그때 사회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만 하여도 얼마나 장한 쾌거엿슴니까." 16세기중반 황해도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표적인 농민무장대의 활동. 이들의 활동기록이 보이는 것은 1559년(명종 14)부터이다. 본래 황해도는 사신들이 중국으로 오가는 길목이어서 그 비용을 대느라 다른 도에 비해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또 임꺽정이 활약한 봉산·재령에서는 바닷가에 있는 갈대밭마저 권세가들이 차지하여, 갈대로 삿갓과 삿자리를 만들어 생활해 나가는 백성들은 갈대를 사 써야 했다. 임꺽정은 본래 경기도 양주에서 버들고리를 만드는 고리백정 출신으로 갈대밭이 많은 황해도로 옮겨왔다가, 신분에 따른 억압과 권세가들의 경제적 침탈에 분노해 수탈당하는 사람들을 모아 무장했다. 여기에는 노비를 비롯해 양인층도 참여했다. 이들은 황해도 구월산의 험준한 산간에 본거지를 만들고, 황해도뿐 아니라 경기도·강원도 일대에 걸쳐서 활약했다.
조선정부는 황해도 각 고을의 수령을 무관으로 교체해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병력을 동원해 토벌에 나섰다. 60년 정부군 500여 명이 평산 어수동에서 임꺽정 무장대를 포위했으나 도리어 패배했고, 이듬해 남치근을 토포사로 하여 대규모 토벌을 감행한 결과 서흥에서 임꺽정을 체포할 수 있었다. 임꺽정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이런 활동은 16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격화된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민중의 바람을 드러낸 것이었고, 따라서 민중의 호응 속에 3, 4년씩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임꺽정 자신이 가장 천대받던 백정 출신이고 그의 부대에는 당시 최하층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속해 있어,
봉건지배질서를 깨뜨리려는 성격도 드러나 있다. 임꺽정 무장대는 진압되었으나 이후에도 유민집단의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시 태생이다. 아버지가 백정이라 마을 사람들이 홀대하여 동네 우물물도 먹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임꺽정은 양주 불곡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먹고 자랐는데, 그 물에 광물질이 많아서 기골이 장대해졌다. 주변 사람들의 홀대를 참지 못해 열아홉 살에 의적이 되었는데, 얼굴에 털이 많아 털북숭이로 보였다. 평안도의 한 장사꾼이 수십 명의 짐꾼을 데리고 도적 산을 넘으려는데, 온 얼굴이 털북숭이인 임꺽정을 주막에서 보고 음식을 어떻게 먹나 궁금해서 국수를 사 주었다. 그러자 임꺽정은 수염을 양 갈래로 갈라서 두 귀에 걸치고 순식간에 국수를 먹어 치웠다. 장사꾼은 신기해하며 몇 그릇을 더 사 주었다. 도적 산을 넘어도 될 만큼 사람이 모여 장사꾼이 고개를 넘는데, 수십 명의 도적이 나타나 재물을 빼앗았다. 그런데 우두머리가 임꺽정이었다. 임꺽정은 음식을 사 준 장사꾼을 알아보고는 재물을 돌려주면서 재를 넘게 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임꺽정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임꺽정의 의적 활동에 관한 이야기는 고향인 경기도 양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해진다. 백정의 아들로서 마을 사람들의 홀대를 참지 못해 의적이 된 사연을 주로 이야기한다. 민간에 전승하는 이야기에는 임꺽정이 의적으로 인정을 갖추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문헌설화로는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임꺽정의 포악함과 추포(追捕)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내용을 설화로 수용하는 예도 있다. 실존 인물이며 의적으로 추앙받는 임꺽정에 대한 인물전설이지만, 민간에서 널리 회자하지는 않는다. 홍명희 소설을 통해 얻은 정보를 구연하는 때가 많다. 다만 민간설화는 의적에 초점을 두어 임꺽정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었음을 강조하면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는 시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기록된 문헌설화에는 『기재잡기』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여 민가에 횡포를 부리고 사람을 살상하는 포악한 도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추포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면서 징치의 대상으로 부각하고 있다. 의적에 관련된 이야기이지만,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 체포되었다는 가사 외에 그 행적이 전해지는 예가 매우 드물다. 근래 벽초 홍명희의 소설이 큰 인기를 끌면서 그 내용이 민간에 설화로 전승되는 양상을 보인다.
홍명희(洪命熹)가 지은 장편소설. 대표적인 역사소설의 하나이다. ≪조선일보≫에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연재되다가, 일제의 ≪조선일보≫ 강제 폐간 조처로 다시 ≪조광 朝光≫에 옮겨 연재했으나 미완성으로 끝났다. 미완성으로 끝난 부분은 화적편(火賊篇)의 마지막 일부로 작품 전체 분량에 비추어 대략 10분의 1 정도 분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표제는 연재 초기에 <임꺽정전 林巨正傳>이었으나 1937년 연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면서 <임꺽정>으로 바뀌었다. <임꺽정>은 전체 구성이 봉단편(鳳丹篇)·피장편(皮匠篇)·양반편(兩班篇)·의형제편(義兄弟篇)·화적편(火賊篇) 등 모두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꺽정>은 작품 전체가 단행본으로 간행된 적은 한 번도 없고, 광복 전에는 조선일보사에서 의형제편과 화적편 일부가 4권으로 출간된 적이 있으며, 광복 후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역시 의형제편과 화적편 일부가 출간된 바 있다. 1992년 사계절출판사가 봉단편·피장편·양반편을 포함하고 광복 전에 간행된 단행본과의 대조과정에서 발견된 누락 부분을 되살려 전체 10권으로 새롭게 펴내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연산군시대와 명종시대에 이르는 16세기 중반 전후의 조선 중기의 역사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면서, 특히 이 시기에 봉건적 질곡을 뚫고 일어선 평민 이하 하층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 근대 역사소설에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째, 종래의 역사소설이 철저히 왕조사 중심이거나 근거 없는 야사에 의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역사 왜곡과 함께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 주었던 것에서 벗어나, 충실하게 민중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탁월한 안목을 보여 준다.
둘째, 당시의 상·하층에 두루 걸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관습을 충실히 재현해 내고 있다.
셋째, 소설 속에 부려쓰고 있는 낱말과 문체에서 우리 고유어를 풍부히 되살려 내고 있으며, 일본어 번역투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 입말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 내고 있어, 연재 당시에도 ‘조선말의 무진장한 노다지’라고 평가받기도 하였던 소설 문체의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넷째, 봉건적 요소에 저항하는 반봉건적 움직임의 강한 생명력을 드러냄으로써 건강하고 낙천적인 민중정서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소설은 당시 역사소설의 양대 흐름을 지배하던 이광수(李光洙)류의 교훈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이나, 박종화(朴鍾和)·김동인(金東仁) 류의 야사에 기댄 영웅주의적이고 부정확한 역사소설의 경향을 뛰어넘어 민중 정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역사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역사소설의 전통은 최근 황석영(黃晳暎)의 <장길산 張吉山>이나 김주영(金周榮)의 <객주 客主> 등을 낳게 하는 문학사의 밑거름이 되었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백정 출신인 도적 임꺽정의 활약을 통해 조선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린 대하(大河)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은 1928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폭넓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일제 말에 초판이 간행되자 전(全) 문단적인 찬사를 받으며 우리 근대문학의 고전이라는 정평을 얻었다. 해방 직후에는 『임꺽정』 재판이 간행되어, 식민지 시기 일본어로만 교육을 받다가 해방 후 처음 한글로 교육을 받게 된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며 널리 읽혔다. 그러나 그후 작가 홍명희가 월북하여 북에서 고위직을 지낸 까닭에, 그의 소설 『임꺽정』은 남한에서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었다. 따라서 전설적인 문호의 고전적인 걸작으로 희미하게 명성만 전해져 오던 『임꺽정』은 1985년에야 다시 출판되어 독서계에 비상한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 무렵부터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출판과 연구가 허용되자, 홍명희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임꺽정』의 문학사적 위치도 새롭게 평가받게 되었다. 임꺽정은 홍길동에 이어 그 이름이 관공서의 민원서류 견본에 기입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지만, 홍명희가 『임꺽정』을 집필하기 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홍길동이 조선시대 허균(許筠)의 소설로 유명해졌듯이, 임꺽정은 홍명희가 역사소설의 주인공으로 선택하여 그의 활약을 소설화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상의 유명 인물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홍명희가 생각한 임꺽정은 도적이 아닌 민중의 영웅이었다. 실존하는 인물에 역사적 해석을 달리하여 새로운 역사 인물을 재창조한 것이다. 1928년부터 10년간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소설 임꺽정은 민족해방운동이자 현실적 저항 운동의 일환이었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식민지 시기에 발표된 한국 소설들 중 가장 규모가 큰 대하소설이다.
이 작품은 「봉단편」·「피장편」·「양반편」 각 1권씩과, 「의형제편」 3권, 그리고 말미가 미완으로 남은 「화적편」 4권을 포함하여 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은 임꺽정을 중심으로 한 화적패가 아직 결성되기 이전인 연산조 때부터 명종 초까지의 정치적 혼란상을 폭넓게 묘사하는 한편, 백정 출신 장사 임꺽정의 특이한 가계와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소설 중에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인 주인공의 전기 형식을 띤 작품들이 많고, 그러한 작품들은 흔히 주인공의 탄생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임꺽정』의 서두 「봉단편」에서는 연산군 때 유배지에서 달아나 함흥 고리백정의 사위가 된 홍문관 교리 이장곤과 그의 처 봉단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임꺽정은 봉단이의 사촌 돌이의 아들로서 「피장편」의 중간 부분에서야 등장한다. 그리고 「피장편」과 「양반편」에서는 봉단이와 돌이의 삼촌으로 선견지명이 있는 갖바치(피장) 양주팔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가 된 임꺽정의 성장 과정과 아울러 도처에서 화적패가 출몰하지 않을 수 없도록 어지러웠던 그 시대 지배층의 정치적 혼란상을 소상히 그리고 있다. 이와 같이 작가는 의도적으로 주인공 임꺽정의 전기 형식을 피하고, 그 시대의 사회 현실을 일견 장황할 정도로 폭넓게 그려보이고 있다. 이는 역사의 주체가 한 사람의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중들이라 보는 민중사관을 보여 주고 있으며, 나아가 역사적 인물인 임꺽정의 등장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사전 준비를 튼실히 한 것이라 평가될 수 있다.
「의형제편」은
'박유복이', '곽오주', '길막봉이', '황청왕동이', '배돌석이', '이봉학이', '서림', '결의'의 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장을 제외한 각 장의 소제목이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의형제편」에서는 후일 임꺽정의 휘하에서 화적패의 두령이 되는 주요 인물들이 각자 양민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청석골 화적패에 가담하기까지의 경위를 그리고 있다.
「의형제편」은 각각 한 사람의 두령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자체가 독립된 한 편의 중편소설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완결된 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각 장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건은 거기에 등장하는 다른 두령들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관되고, 그리하여 마지막 장인 '결의'에서 일곱 두령들이 의형제를 맺는 데에 이르기까지 각 장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의형제편」은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에 비해 훨씬 더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화적편」은 '청석골', '송악산', '소굴', '피리', '평산쌈' 그리고 미완된 '자모산성'의 6장으로 되어 있다. 이는 임꺽정을 중심으로 한 청석골 화적패가 본격적으로 결성된 이후의 활동을 그린 것으로서, 작품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는 청석골 화적패의 대장으로 추대된 임꺽정이 상경하여 서울 와주(窩主)의 집에 머물면서 여자들과 외도를 일삼아 가족과 불화를 겪기도 하고, 두령들이 가족을 동반하고 송도 송악산 단오굿 구경을 갔다가 본의 아니게 살인을 하게 되어 파란을 겪는다든가, 화적패들이 지방 관원들을 괴롭히거나 토벌하러 나온 관군과 대적하는 등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마지막의 '자모산성'장은 화적패들이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해 자모산성으로 피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임꺽정』은 이 부분에서 연재가 중단되어, 주인공 임꺽정이 관군에게 잡혀 죽는 최후 장면은 그려져 있지 않다. 연재 초기의 '작가의 말'에 의하면 홍명희는 『임꺽정』 연재를 시작할 당시부터 작품 전체를 몇 개의 편으로 나누되, 각 편이 독립성을 지니는 형태가 되도록 구상했다고 한다. 그러한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임꺽정』의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의형제편」, 「화적편」은 각기 별개의 장편소설로 읽힐 수 있을 정도로 독립성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의형제편」(3권)은 8장, 「화적편」(4권)은 6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개개의 '장' 역시 각기 한 편의 중편소설이라 해도 좋을 만큼 독립성이 뚜렷하다. 『임꺽정』은 당시까지 한국 문단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긴 소설이었으므로, 홍명희는 처음부터 각 편과 각 장이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도록 유념하여 구성을 특이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10권에 달하는 대하소설을 읽는 데 부담을 느끼는 독자들은 『임꺽정』 중 가장 뛰어난 부분으로 평가되는 「의형제편」만 읽는다든가, 그중에서도 신세대들이 좋아하는 '황천왕동이'장이나 '이봉학이'장만 읽어도 얼마든지 작품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역사소설 『임꺽정』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 민중성과 리얼리즘의 면에서 탁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역사소설들은 지배층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궁중 비화(秘話)나 권력투쟁을 다룸으로써 통속적인 흥미를 자아내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전기 형식을 취함으로써 역사의 주체를 민중이 아닌 위대한 개인으로 보는 영웅사관을 답습하고 있다. 이와 달리 『임꺽정』은 주인공 임꺽정을 비롯하여 다양한 신분의 하층민들을 등장시켜, 당시의 민중 생활을 폭넓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의도적으로 임꺽정의 전기 형식을 피하고, 청석골의 여러 두령들도 그에 못지 않게 큰 비중을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다. 이와 아울러 주목할 것은 주인공을 결코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은 점이다. 임꺽정은 휘하의 두령들과 마찬가지로 남다른 능력과 함께 인간적인 약점도 지닌 인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서양의 리얼리즘 소설에 비해 볼 때 우리나라 역사소설들은 등장인물들의 일상적인 삶과 생활 환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 등한하다고 지적된다. 그런데 『임꺽정』은 식민지 시기는 물론 오늘날의 역사소설들에 비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세부 묘사가 정밀하고, 조선시대의 풍속을 탁월하게 재현하고 있다. 다양한 계층의 인간들이 등장하여 밥 먹고, 옷 입고, 뒤 보고, 배탈 나고, 장기 두고, 아기자기한 부부의 정을 나누는 등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묘사가 매우 풍부하여, 그 자체만으로도 독특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뿐만 아니라 『임꺽정』은 '조선 정조(情調)'를 적극 표현함으로써 민족문학적 개성을 탁월하게 성취한 작품이다.
홍명희는 『임꺽정』을 집필하면서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조선 거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의 대립을 지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임꺽정』 연재가 시작되던 1920년대 후반 우리 문단에서는 좌·우 양 진영의 문학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국내의 사회운동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노선으로 분열·대립하고 있던 것과 상응하는 현상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홍명희는 신간회 운동을 통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민족 협동 전선을 추구했듯이, 『임꺽정』을 통해 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의 대립을 넘어선 진정한 민족문학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연재 초기에 홍명희는 "임꺽정이란 옛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받던 백정 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가슴에 차 넘치는 계급적 분노(忿怒)의 불길을 품고 그때 사회에 대하여 반기(反旗)를 든 것만 하여도 얼마나 장한 쾌거였습니까"라고 하면서, 이러한 인물은 "현대에 재현시켜도 능히 용납할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계급 모순에 저항하는 임꺽정의 반역자적인 면모에 강한 매력을 느껴 창작에 임한 것이다. 그 점에서 『임꺽정』은 계급의식의 표현을 중시하던 당시의 프로문학과 다분히 친화성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홍명희는 『임꺽정』에서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을 의도하였다. 그 결과 이 작품은 하층 민중의 삶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이를 포함한 민족 공동체의 아름다운 전통을 적극 재현함으로써, 민족문학적 색채가 농후한 역사소설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임꺽정』은 식민지 시기 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의 대립을 지양하고 양자의 장점을 종합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될 만하다. 홍명희는 신간회 운동을 추진하던 그 정신으로 『임꺽정』을 창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당시 좌·우를 막론한 전(全) 문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임꺽정』은 서구 리얼리즘 소설의 예술적 성과를 충분히 흡수하고 있으면서도, 이야기 투의 문체를 취하여 구수한 옛날 이야기의 한 대목을 듣는 듯한 친숙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전래의 민담이나 전설 등이 적재적소에 삽입되어 흥미를 돋우고 있으며, 관혼상제·세시풍속·무속 등 조선시대의 풍속들이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동시대의 여러 학자와 문인들이 찬탄한 대로 『임꺽정』에는 한문 투가 아닌 우리 고유의 인명이나 지명, 토속적인 고어와 속담들이 풍부하게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임꺽정』의 등장인물들은 결코 현대인들처럼 그려져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조선시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순박하고 인정이 넘치며 밑바닥 삶의 고난을 해학으로 넘기는 민중적 지혜를 지닌 인물들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월탄(月灘) 박종화(朴鐘和)가 『임꺽정』에는 조선 사람이라면 잊어버릴 수 없는 "구수한 조선 냄새"가 배어 있다고 한 것은 정곡을 얻은 말이라 하겠다. 『임꺽정』은 동양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아울러 서양 근대문학의 성과를 충분히 섭취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임꺽정』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전문학으로부터 영향 받은 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수호지』나 『홍길동전』과 같은 의적 소설의 계보에 속하며, 독립된 이야기들이 모여 한 편의 대하 장편소설을 이루는 구성 방식이 『수호지』와 유사하고, 야담과 야사에서 소재를 취했으며, 이야기 투의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명희는 소년 시절부터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 소설들을 탐독했으며, 당대의 유수한 한학자로서 평소 많은 한문 서적들을 섭렵하였다. 이와 같은 남다른 소양이 『임꺽정』의 창작에 큰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임꺽정』이 성취한 근대적인 장편소설로서의 예술성을 간과하기 쉽다. 등장인물을 각 계층의 전형으로서 형상화하고, 서술적 설명이 아니라 장면 중심의 객관적 묘사에 치중하며, 극도로 치밀한 세부 묘사를 추구한 점 등은 우리 고전소설의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요소로서, 서구 리얼리즘 소설의 성과를 섭취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홍명희는 일찍이 동경 유학 시절부터 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 등의 러시아 소설들을 탐독했으며, 나쓰메 소세키(頁目涑石, 1867∼1916)나 일본 자연주의 작가들의 소설도 많이 읽었다. 특히 러시아 소설에 심취하여 당시 일역(日譯)된 러시아 작가의 작품들을 모조리 사 모았을 뿐더러, 러시아에 유학하여 그 나라 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때 러시아어까지 배웠다고 한다. 평론 「대(大) 톨스토이의 인물과 작품」을 보면, 그가 톨스토이의 위대한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30년대에 홍명희는 당시 부르주아 리얼리즘 소설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던 『발자크 전집』도 독파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임꺽정』이 식민지 시기의 어떤 소설보다도 근대 리얼리즘 소설의 원리에 충실한 작품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홍명희의 술회에 의하면, 흔히 『수호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는 『임꺽정』의 독특한 구성 방식조차도 실은 러시아 작가 알렉산더 쿠프린(Aleksandar Kuprin, 1870∼1938)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임꺽정』에 대해 우리 고전문학의 전통을 계승한 측면만을 들어 그 가치를 운위하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임꺽정』은 동양 고전문학의 전통과 서양 근대문학의 성과를 훌륭하게 통합한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 식민지 시기 대부분의 역사소설가들은 왕이나 지배층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홍명희는 왜 최하층 천민인 백정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을 썼을까? 그리고 대부분 주인공의 전기 형식으로 소설을 전개해 나갔는데, 『임꺽정』에서는 왜 주인공 임꺽정의 일대기가 아니라 청석골 일곱 두령들의 이야기를 두루 다루고 있을까? 홍명희는 다른 역사소설가들과 달리, 진정한 역사는 궁중 비화가 아니라 민중의 사회사요, 역사란 소수의 고독한 영웅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중들의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보는 민중사관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임꺽정』에서 그는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를 폭넓게 그리고, 여러 인물들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비중 있게 그리려 한 것이다.
2. 『임꺽정』은 분명 근대적인 리얼리즘 소설인데도, 읽어 보면 다른 작품들과 달리 구수한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홍명희는 『임꺽정』을 쓸 때 무엇보다도 '조선 정조'를 표현하는 데 유념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임꺽정』의 등장인물들은 현대인들과 달리 순박하고 인정이 많으며 민중적인 지혜를 지닌 인물들로서, 조선시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임꺽정』에는 조선시대의 풍속들이 다채롭게 묘사되고 있으며, 전래의 설화나 야담 등이 자연스럽게 삽입되어 있다. 그리고 문체 면에서도 토속적인 고어와 속담들이 풍부하게 활용되고 있는가 하면, 이야기 투의 서술 방식을 활용하여 구수한 옛날 이야기의 한 대목을 듣는 듯한 친숙한 느낌을 준다.
3. 『임꺽정』은 민족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리울 정도로 높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이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계층의 독자 대중에게 대단히 흥미롭게 읽히는 소설로 알려져 있다. 『임꺽정』의 흥미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임꺽정』의 흥미의 비결로는 우선 뛰어난 인물 형상화 솜씨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생생하고 흥미로운 대화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도처에 세심하게 깔린 복선과 빈틈없이 짜여진 사건의 전개가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을 놓을 수 없게 한다. 또한 조선시대 민중들의 시시콜콜한 일상 생활의 묘사가 독특한 흥미를 자아낸다. 뿐만 아니라 10권짜리 대하소설이면서도 각 편, 각 장이 독립된 이야기로 되어 있어서, 독자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언제 어느 부분을 펼쳐 읽어도 빨려 들어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이와같이 소설 전체를 '편(篇)'(또는 '부(部)')과 '장(章)'의 단위로 구분하고, 편별·장별로 독립성을 추구하는 구성 방식은 황석영의 『장길산』을 비롯한 해방 후의 대하소설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에 널리 유행한 『퇴마록』 등 판타지 소설들은 편별·장별 독립성을 추구한 면에서 『임꺽정』의 구성 방식을 더욱 뚜렷하게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7월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참가차 평양을 방문하여 북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洪錫中)을 만났다. 환영 만찬장에서 자리를 함께 한 남의 작가 황석영과 북의 작가 홍석중은 각기 성장 과정에서 홍명희의 『임꺽정』에 흠뻑 빠져들었던 추억을 이야기하였다. 두 작가가 다 일찍이 초등학교 시절에 『임꺽정』을 읽고 심취하여 그 영향이 내면화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한 역사소설의 대표작인 황석영의 『장길산』과 북한 역사소설로서 남한에 소개되어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홍석중의 『황진이』가 각기 그 나름의 개성을 지닌 작품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유사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두 작품이 『임꺽정』의 심대한 영향하에서 씌어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임꺽정』은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작가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품이다. 홍명희는 동시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학자로서도 높이 평가되었을 정도로 조선사와 조선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식민지 시기의 어떤 작가도 홍명희처럼 조선조 말에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나 종들까지 합해 식구가 수십 명인 대가족 속에서 조선시대의 언어와 풍속을 몸소 체험하며 자란 인물은 없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학습에 의존하여 역사소설을 써야 하는 오늘날의 작가들에게 『임꺽정』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모범이요, 역사소설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분단 이후 60년이 지나는 동안 남북한의 언어와 문학은 극도로 이질화되어 통일이 되어도 민족문화의 동질성을 찾기 어려우리라고 우려하는 말들이 자주 들린다. 그러한 상황에서 통일 시대 남북의 작가와 독자들이 다 같이 심취하고 영향받을 수 있는 문학작품을 든다면, 그 가장 적절한 예가 바로 홍명희의 『임꺽정』일 것이다. 그 점에서 홍명희의 『임꺽정』은 통일 시대 우리 민족이 되돌아가 거기서 새로 출발할 필요가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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