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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 과 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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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1562) 

임꺽정 부대는 가난한 백성들의 재물에는 손을 대지 않았으며, 빼앗은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임꺽정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지배층에게는 두려운 존재로, 민들에게는 정의로운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1920년대에 홍명희는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들을 모아 소설 《임꺽정》을 썼다. 사진은 1928년 11월부터 신문에 연재된 소설 《임꺽정》이다.  

임금인 명종이 직접 어명을 내려서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의 5도에 대장을 정하여 임꺽정을 잡도록 하였다. 또한 모든 관청에 명을 내려 자잘한 업무는 모두 쉬게 하고 임꺽정을 잡는데에 주력하라고 명할 정도로 임꺽정의 악명은 자자했 임꺽정은 체포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국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3년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다. 

조정의 독촉을 받던 장수들과 포상을 노리던 고을 수령들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엉뚱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 임꺽정과 한패라 하여 벌주고 고문하다가 사람 잡는 일도 여럿 있었다. 또한 이렇게 허위사실로 함부로 백성을 죽이거나 허위보고를 올리는 이들도 파직당하거나 유배당하는 등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그 긴 여정도 서림을 앞세운 관군에 눌려 그의 무리는 차츰 힘을 잃어갔다. 결국 임꺽정은 토포사 남치근에게 잡혀 죽고 말았다.  임꺽정이 의적이라고 단정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간 설화에서는 의적으로 많이 묘사되어 지지만 꼭 관아와 관군만 골라서 약탈을 하지 않았기때문이다.(일반 백성과 행인들도 약탈대상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의적으로 비쳐진 부분을 보면 그 때 당시의 사회가 얼마나 상막한 사회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양대군이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되자, 많은 관리들이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관직을 버리고 숨어 버리거나 목숨을 걸고 새 왕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반역 사건이 여러 차례 일어나고, 그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세종실록》 

26년" 신이 듣자오매, 죽은 경성부사 김후의 처가 토산에 사는데, 떼도둑 40여 명이 밤을 타고 갑자기 와서 포위하고 칼을 뽑아 든 놈, 몽둥이를 가진 놈이 김후의 처첩과 노비들을 협박하여 재산을 빼앗고 계집종을 때려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28년" 평안도에 도적이 많아 대성산에 떼 지어 모여서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공공연히 다니면서 약탈하고 있다. 감영의 관리나 아전들과 내통하여, 관청에서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나 먼저 도망하여 피하니…" 

우리 민족의 글인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민본 정책이 펼쳐진 세종 대에도 나라 곳곳에 도적이 들끓고 있었다. 세종 8년에는 서울의 관청과 민가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일어났다. 들끓는 도적이란 누구인가? 바로 민이다. 중앙 정부가 민본 정치를 강조하고 조세 제도를 고쳐도 농민들의 생활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세종이 공법을 실시했지만, 양반 지주의 기름진 토지는 낮은 등급으로, 가난한 농민의 척박한 토지는 높은 등급으로 매겨지기 일쑤였다. 중앙 정부에서 만든 좋은 제도도 실제로 조세를 거두는 지방 관리들이 변질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시대에는 이를 피하기 위해 지방관을 임명할 때 연고지를 피한다거나 임기제를 두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으나 투명한 정치를 이루기는 어려웠다. 세종이 죽고 그의 큰아들인 문종이 왕이 되었다. 병약하던 문종은 2년 만에 죽었고, 그의 어린 아들인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권은 약해졌다. 

이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를 내몰고 왕위를 빼앗았다. 그가 바로 세조다. 조정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가 많았다. "신하로서 왕을 바꿀 수 없다."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 이런 말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숨는 사람, 목숨을 걸고 세조를 몰아내려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 차례 반역 사건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 난에는 늘어난 세금 부담으로 불만이 높던 농민들도 적극 가담하였다. 

난은 대규모 봉기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손해를 본 관료와 지주층의 반발도 만만찮았다. 함경도의 세력가였던 이시애는 조정에 맞서 난을 일으켰다.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강력한 정책을 펼쳐 나갔다. 퇴직 이후에도 토지를 보유하도록 하던 과전을 현직에 있을 때만 보유하도록 하였다. 호적 조사로 인구를 철저히 파악하여 세금을 더 확보하였다.

나라의 창고는 가득해졌으며 왕권은 강화되었다. 흔히 태평성대로 알려진 세종 때에도 민의 저항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에서는 갈수록 민의 생활이 어려워졌음을 알 수 있다. 세조는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민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나랏일은 왕과 한명회를 비롯한 몇몇 대신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들은 세조가 왕위를 빼앗고 이를 지켜 내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많은 땅과 노비를 받았고, 세조 때는 물론이고 그가 죽고 난 다음에도 오랫동안 높은 관직을 나누어 맡았다. 이들을 훈구 대신이라고 불렀다. 

훈구 대신들은 점차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으며, 이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들은 중앙의 막강한 권세를 이용하여 백성을 강제로 끌어다가 개간한 땅을 자신의 농장으로 삼기도 하였다. 훈구 대신들이 지방에서 이러한 일을 벌이자, 피해를 받게 된 지방 사대부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훈구 대신들은 연고가 있는 지방 수령과 짜고 공물을 정해진 양의 몇 배로 거두어들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군역 제도도 점차 흐트러졌다. 힘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군역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들의 몫이 남은 이들에게 집중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생활이 어려워져 세금을 낼 능력이 없는 농민들은 몰래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깊은 산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었고, 어떤 이들은 사람이 찾지 않는 섬으로 떠났다. 또 어떤 이들은 도적이 되었다. 그저 군사를 거느리고 체포하기만 하면, 수없이 도적이 일어나 다 붙잡지 못할 지경에 이를 것이다." 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홍길동이라는 도적이 나타나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홍길동은 관리 복장을 갖추고 대낮에 관청을 드나들었고, 수령을 윽박질러 관청의 재물을 빼앗기도 하였다. 고급 관리에게 뇌물을 바친 뒤 버젓이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명종 때에는 임꺽정이라는 더 큰 도적이 일어나 황해도 일대에서 여러 해 동안 활동하였다. 신분 차별에 불만을 품은 천민과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으로 구성된 임꺽정 부대는 황해도 구월산을 근거지로 삼아 양반을 공격하고, 관청을 습격하였다. 심지어 왕에게 보내는 진상 공물을 빼앗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황해도 농민들의 세금을 줄이는 한편, 서울의 최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제압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내려간 토벌대는 도적을 잡기보다는 백성을 약탈하기에 더 바빴다. 그러자 백성들이 더욱 임꺽정을 싸고돌았다. 그를 잡는 데 무려 3년이나 걸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임꺽정의 활동을 기록한 사관은 "조정이 재물을 밝히지 않고 수령 또한 이러한 사람을 임명한다면, 칼을 잡은 도적은 송아지를 사서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떤 시대나 사건을 이야기할 떄 이를 대표하는 사람을 우선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하면 김유신을 떠올리고,임진왜란을 말하면 이순신을 연상하고, 한글 창제에서는 세종대왕을 떠올린다. 이렇게 주인공을 먼저 찾는 버릇은 위대한 예술작품을 대할 떄도 마찬가지이다. 

불국사에 가면 이를 김대성이 만들었다는 설명문을 우선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국사를 김대성이 혼자 만든 것은 아니다. 그 멋들어진 탑은 석공의 작품일 것이고 법당은 어떤 목수가 만들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피와 땀을 적시면서 기와를 나르고 돌을 날랐던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그들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도적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조선 명종대, 아니 조선시대를 통틀어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도적 중에 임꺽정이 있다. 홍명희의 소설로 더욱 유명해진 그는 원래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백정이었다. 

어린아이에게도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소인이라고 불러야 했다. 남들이 다 입는 명주옷도 걸칠 수 없는 채 평생을 패랭이를 쓰고 살아야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임꺽정은이러한 운명을 받차고 나와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과 그들의 체제에 정면으로 대항해 싸웠다. 

조선 정부에서도 그의 활동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그 기세는 대단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의적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임꺽정과 함꼐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고 있다 그의 주위에는 임꺽정을 임꺽정으로 만들어주고 관군의 칼에 찔려 이름 모를 산과 들에서 죽어갔던 사람들이 많았다. 또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임꺽정을 지원했고, 임꺽정이 죽은 후에도 그를 잊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임꺽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임꺽정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름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임꺽정이 죽어서 의적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 아픔을 함께 공감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떄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임꺽정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담한 도적들" 

임꺽정과 그를 따르는 도적들은 당시 정부의 온갖 부패상을 배경으로 등장한 자들이었다. 지배층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도적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농한기에 활동했다.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다가 추수가 끝나면 무리를 지어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을 끝낸 뒤에는 반드시 흩어졌다. 

각자 혼자 몸으로 민가가 조밀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 흩어져 활동했다. 

이렇게 일반 백성들과 밀접하게 연걸되어 활동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더욱더 끈질기고 과감할 수 있었다.그들은 양반과 토호의 집을 습격하여 백성으로부터 약탈한 곡식등을 빼앗았다. 뿐만 아니라 서울과 평양을 잇는 도로를 지키고 있다가 서울로 가는 토지세와 진상물과 공물을 탈취하였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조선 정부에 적대감을 보이는 행동이었다. 아울러 그들의 행동이 평범함 좀도둑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느 것이었다. 적어도 조선 정부의 농민 수탈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떄에 따라 그들은 살인과 방화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백성에게 원성을 사고 있던 양반이나 토호를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복이 무서워 감히 고발하지 못했따. 관리들도 보고 듣는 것이 많았지만 체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나아가 도적들은 수령들을 골려주거나 관권에 도전하는 행위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들은 관원을 사칭하고 여러 읍을 출입했는데, 어떤 수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그들을 접대하기까지 했다. 또 그들의 종적을 말하는 양반 등이 있으면 모조리 잡아서 배를 갈라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임꺽정 일당은 관아를 습격하여 옥을 부수고 동료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서흥부에 갇혀 있는 처자와 죄수들을 구출하기 위해 대낮에 관청의 문을 포위하는 과감함을 보인 것이다. 이들은 수령의나졸을 죽이고 관아를 부순 뒤 잡혀 있던 일당을 뺴돌렸다. 그리고 계획이 누설되어 관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을 때 수가 많은 관군과 용감하게 싸워 오히려 관군을 물리치기까지 했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백성에게 더 무서운 관군 임꺽정 일당의 활동이 위세를 더해가자 중앙 정부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선전관 정수익을 파견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일이 실패로 끝나자 정부는 곧바로 또 종 2품의 무신 두명을 순경사로 내려보냈다. 황해도로 간 이사증, 강원도로 간 김세한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각기 정예 군사 50명을 뽀아 거느리고 도적을 잡기 위해 내려갔다.또 1561년에는 토포사를 파견하여 임꺽정을 체포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황해도에 토포사 남치근, 

강원도에 김세한을 파견하면서 군고나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 그리고 이튿날 팔도의 감사. 병사와 개성 유수에게 도적을 잡으라는 왕명을 내렸다. 아울러 다음날에는 남치근과 순검사 백유검에게 황해도 도적들을 잡을 것을 특별히 당부하였다.이와 같이 중앙 정부가 적극적인 진압에 나서면서 임꺽정의 주력도 거의 꺽이게 되었다. 임꺽정은 아직 잡히지 않았지만 일당 중에 사납고 날랜 자들은 거의 섬멸되고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면서 임꺽정 일당역시 많은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임꺽정은 마지막으로 구월산성에 들어갔다. 가장 정예의 심복들만 임꺽정을 따라갔다. 본진을 재령에 두고 있던 관군은 차츰 포위망을 좁혀들어왔다. 그 사이에 부하들은 하나둘씩 투항하여 최후에는 5,6명 밖에 남지 않았다. 남치근은 황주에서 해주에 이르는 곳의 장정들을 모두 징발해 문화에서 재령까지 샅샅이 수색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진압책이 전개되어 결국 임꺽정은 1562년 1월 3일 서흥에서 토포사 남치근에게 체포되었다. 무려 3년에 걸친 활동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임꺽정을 잡으면서 정부의 작정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도적 몇명을 잡기 위해 조선 정부가 동원한 군사는 매우 많았다. 그리고 군사들은 도적을 잡는데 효괒거으로 힘을 활용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본연의 임무보다는 다른 데 더 능한 군대였다. 도적을 잡는 것보다는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데 훨씬 더 익숙한 솜씨를 발휘했다. 

황해도의 백성들은 이들 순경사와 토포사들로부터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많은 군대를 동원해온 토포사, 순경사들은 여러 달 항해도에 머무르게 되었따.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토벌을 빙자해 백성들을 마구 체포하고 구금하며 재산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이 때문에 황해도는 도적과 토벌대의 횡포로 인해 한도가 텅 비었다 고 할만큼 인적이 드문 곳이 되어버렸다. 특히 이들 중에서도 남치근의 행패는 악명이 높았다. 그는 무위만을 능사로 삼아 살육을 자행하고 양반에 대해서도 함부로 매를 띠리는 등 위엄을 부렸다. 힘없는 백성들로서는 한시도 편히 마음을 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장수들은 많은 군대를 거느린 채 순찰을 다니며 백성의 식량을 빼앗아 군량으로 삼았다.뿐만 아니라 이들은 서로 공을 세우기 위해 가짜 임꺽정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과 강원도 순경사 김세한은 임꺽정을 체포했따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실은 임꺽정이 아니고 임꺽정의 형 가도치였다. 이사증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진 고문으로 협박하여 허위 공초를 받아냈던 것이다. 또 의주 목사 이수철도 온갖 형구로 참혹한 형벌을 가하여 임꺽정과 임꺽정의 아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낸 다음에 이들을 잡았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그리고 이를 숨기기 위해 임꺽정의 부하 서림을 매수한 뒤 거짓 증언까지 하도록 했다. 당시 관서 지방의 관찰사와 병사가 모두 왕비의 친정붙이였다. 그래서 각 고을의 지방관들은 임꺽정을 잡으면 굉장한 상이 내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상을 노린관리들이 가짜 임꺽정을 만드는 사이 무고한 사람들이 무수한 매를 맞으며 죽어갔다. 그러나 이는 황해도만의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서울 도성에서도 큰 혼란이 일어났다. 

임꺽정 일당이 서울에 숨어 있다는 소문이 돌자 정부는 서울에 대한 경비를 강화했따. 장졸들은 도성의 안팎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도둑을 잡는다는 핑계로 온갖 횡포를 부렸다. 그들은 민가를 출입하며 약탈을 자행하고 놀라서 도망하는 자를 도적이라 지목해 마구 잡아들였다. 장졸들은 무조건 사람들을 많이 잡아들이는 것을 공으로 여겨 힘없고 무고한 평민들은 무던히도 괴롭혔다. 이렇게 조선의 관리들은 도둑을 잡는 능력보다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능력이 뛰어났고, 그 때문에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도적이 되는 백성들" 1559년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그 근방에는 임꺽정을 두목으로 하는 도적들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임꺽정, 의적이 되다용기가 없어서 도적은 차마 못 되고 체념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임꺽정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 존재였다. 백성들은 임꺽정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 관리들의 횡포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임꺽정의 활동은 적지 않은 만족을 주었다. 임꺽정은 서슬이 시퍼런 관리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심지어는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물을 가로채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약자를 대신해 포악한 강자들을 응징하는 의리의 화신으로 비쳐졌다. 그가 무자비한 살상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무고한 자신들마저 관으로부터 치해를 입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만큼 현실은 그들에게 고통이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끝까지 잡히지 않고 관리들을 괴롭혀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활동을 아름답고 훌륭한 것으로 기억하고 싶어했다.임꺽정은 죽었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는 영원히 의적으로 살아남았다.

실제 활동보다는 임꺽정의 이름 석 자를 통해 만족을 얻었던 민중들에 의해서 그의 삶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그려졌다. 의적 임꺽정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임꺽정이 아닌 민중이 그를 의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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