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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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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조선 연산군 때 활동한 도적으로 ≪홍길동전≫의 모델이 된 인물. 


조선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도적떼의 우두머리이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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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설 《홍길동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다. 


조선 중기 광해군 때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허균이 지었다. 


부패한 사회를 개혁해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허균의 혁명적인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이 소설은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최초의 사회 소설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모델이 되었으며, 명종() 때 임꺽정( 또는 ), 숙종() 때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도적’으로 꼽히기도 한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판서()의 서자로 태어나 학대를 받으면서도 병서()ㆍ검술()ㆍ천문()ㆍ지리 등을 배운 뒤 도적을 모아 활빈당()을 조직하고 그 두목이 되어 8도의 방백()ㆍ수령들이 착취해들인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도술()로 관가를 괴롭혀 주다가 조정의 회유에 응하여 병조 판서가 되었다. 


후에 율도국()에서 이상적 왕국()을 건설했다. 


조선 신분제도의 사회적 모순과 그것에 저항하는 허균의 이상주의()를 구현한 인물이다. 


조선의 세종 대왕이 즉위한 지 15년째 되는 해에, 판서 벼슬을 하는 양반 홍문과 노비 출신의 첩 춘섬 사이에서 홍길동이 태어난다. 


길동은 비범함이 남달라 영웅호걸이 될 만한 아이였으나 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났기에 벼슬길에 오를 수 없는 신분이었다. 


어느덧 여덟 살이 된 길동은 모두에게 칭찬 받는 아이였으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는 처지였다. 


친척들과 종들마저 길동을 보고 종의 몸에서 난 천한 아이라고 하니 길동은 그것이 너무나도 원통할 뿐이었다. 


길동은 사내로 태어나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알릴 수도 없는 자신의 신세를 명확히 인식하고, 어차피 병조 판서 벼슬을 받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집을 나가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명예나 수치를 잊고 살 결심을 한다. 


그러던 차에 길동 모자를 향한 홍 판서의 사랑이 날이 갈수록 커지자, 홍 판서의 첫 번째 첩 초낭이 그것을 시기하여 길동 모자를 없앨 궁리를 한다. 


초낭은 무녀와 계략을 짜고 관상녀를 불러 홍 판서에게 길동을 모함하는 소리를 전하게 한다. 그리고 초낭은 본부인 유씨 부인과 맏아들 길현을 꼬드겨 길동을 없앨 마음을 갖게 만든다. 


결국 초낭은 자객을 사서 길동을 죽이기로 한다. 이때 길동의 나이 열한 살이었는데, 체격이 크고 용감했으며 유교 경전은 물론 천문과 지리, 주역에도 통달해 바람과 구름을 부리고, 둔갑술까지 익히고 있었다. 자객을 잡아 일의 시작과 끝이 어찌된 것인지 알게 된 길동은 그길로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집을 떠난다. 


길동은 하염없이 걷다가 산속에서 도적 떼의 소굴을 발견한다. 마침 길동이 도착한 날이 두목을 뽑는 날이었고, 시험에 통과하여 도적 떼의 우두머리가 된다. 며칠 후 길동은 지혜와 술법을 써서 도적 떼를 이끌고 합천 해인사의 재물을 훔친다. 


산채에서 사흘 간 잔치를 벌인 뒤 부하들에게, 앞으로는 조선 팔도를 다니며 못된 벼슬아치들이 힘 없는 백성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훔쳐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이고, 선량한 백성의 재물에는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되며 우리 무리를 가난한 백성을 돕는다는 뜻의 '활빈당'이라 하겠다 말했다. 


길동은 자신의 키와 비슷한 크기의 허수아비 일곱 개를 만들고는 주문을 외워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홍길동이 전국 팔도에 동시에 나타나게 되었다. 가짜 길동들은 팔도를 누비며 못된 벼슬아치나 양반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흉년에는 관아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살렸다. 홍길동이 팔도를 누비고 다니며 소동을 피워도 잡을 재간이 없었다. 


결국 나라에서는 길동의 형인 길현을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하여 길동을 잡아 오라고 명한다. 전국 팔도에서 여덟 명의 홍길동이 잡혀 한양으로 올라간다. 임금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나라의 현실을 고한 다음 길동은 사라지고 만다. 다시 한 번 길동을 잡아들이라는 임금의 명령이 길동의 형 길현에게 떨어졌다. 


길동은 순순히 형 길현에게 잡힌다. 한편, 나라에서는 길동이 탄 수레가 남대문 안으로 들어오면 길동을 죽이기로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길동은 술법을 써서 도망을 쳤다. 그 후 길동을 잡을 길이 없자 결국 임금은 길동의 요구대로 길동을 병조 판서에 임명한다. 


길동은 궁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큰절을 올리고 병조 판서의 벼슬을 받은 후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사라진다. 그 후 나라 안에서 다시는 길동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고, 임금은 길동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거두었다. 


길동은 조선을 떠나 300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성도라고 하는 섬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요괴에게서 세 여인을 구하고 세 사람을 모두 부인으로 맞았다. 세월이 흘러 길동은 아버지 홍 대감이 돌아가실 것을 알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길현과 유씨 부인과 어머니를 만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버지의 유해를 성도에 모시고 돌아온 길동은 삼년상을 정성껏 치른다. 성도 근처에 율도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새 왕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길동은 율도국을 정벌하고 율도국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 다음 왕의 자리에 올라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길동의 나이 72세가 되었을 때 왕위를 왕자에게 물려주고 왕비와 함께 산으로 들어가 지내다가 어느 날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홍길동전()』은 비범한 재주와 능력을 지닌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적서차별()의 문제점이라든가 관리들의 치부행위 등 지배층의 무능을 비판한 사회소설이다. 또한 일반 독자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주인공의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홍길동에게 도술적인 능력을 부여하고 마침내는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영웅이 되는 영웅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연산군 때 활약한 실존 도둑이었다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허균()에 의해 소설로 재탄생되어 현재까지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 홍길동. 홍길동이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어필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설 『홍길동전』의 파급효과 때문일 것이다. 


『홍길동전』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크며 당시의 사회상을 적절히 반영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주목이 되는 소설이다. 


『홍길동전』이 반영하는 사회상은 서얼차별이 점차 심화되는 현실의 세계이다. 홍길동은 바로 이러한 서얼의 대변자이다. 원통하고 답답한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칼을 잡고 월하에 춤을 추며 장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더니, 이때 승상이 명월을 사랑하여 창을 열고 기대어 있는데 길동의 거동을 보시고 놀라 말하기를, "밤이 이미 깊었거늘 네 무슨 즐거움이 있어 이러하느냐?" 길동이 칼을 던지고 크게 엎드려 말하였다. 


"소인이 대감의 정기를 타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사오니 이만한 즐거움이 없사오되, 평생 서러워하기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못하여 상하 노복이 다 천히 보고, 친척과 고구()도 손으로 가리켜 아무의 천생()이라 이르오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사오리까?" 이어 대성통곡하니, 대감이 마음에 가엾게 여기시나 만일 그 마음을 위로하면 이것 때문에 방자할까 하여 꾸짖어 말하기를 "재상의 천비 소생이 너뿐 아니다. 자못 방자한 마음을 두지 말라. 일후에 다시 그런 말을 번거로이 한다면 눈앞에 용납치 못하리라." 


1500년(연산군 6)을 전후하여 서울 근처에서 활약하던 농민무장대의 지도자. 양반지주층을 중심으로 토지소유가 확대되면서, 토지를 잃고 지배층의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자기가 살던 곳에서 도망쳤다. 


이들은 산속으로 피해 무장대의 기본성원이 되어 양반지주나 관청을 습격했는데, 지배층들은 이들을 「도적」이라 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연산군 통치기간에는 전국 곳곳에서 이러한 농민무장대가 일어났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홍길동이 이끄는 무장대였다. 


홍길동은 양반관리의 복장을 하고 스스로 「첨지」라 하면서 무장한 많은 농민을 지휘해 여러 고을의 관청들을 습격했다. 결국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취조당한 기록이 남아 있다. 


뒤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홍길동전>으로 소설화되기도 한다. 


서자의 울분이 내포 되었을수도 있음이라, 분명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대감'이라 불러야 하는 서얼의 신세. 그 하소연에도 아버지는 "모두가 그러한데 왜 너만 원통하다 하느냐"면서 냉정하게 길동을 물리치는 장면이다. 


『홍길동전』에서 갈등이 가장 증폭되는 부분이자, 길동이 명문 재상의 아들이면서도 스스로 도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홍길동전』은 적서차별이 점차 심화되는 16세기 후반 이후 조선사회의 모순을 기본적인 모티브로 설정하여 소설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을 모티브로 하여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백성들의 욕망 등을 함께 펼치고 있다. 


『홍길동전』은 영웅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소설 곳곳에는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장치들이 설정되어 있다. 홍길동은 판서()인 아버지와 시비() 출신인 어머니 춘섬 사이에서 출생한다. 주인공에 대한 이러한 환경 설정은 홍길동이 필연적으로 신분문제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인물임을 암시한다. 


조선시대 서얼의 존재는 양반의 취첩() - 양반이 원래의 부인 이외의 다른 여성을 배우자로 맞아들이는 것 - 을 허용하는 사회적 구조에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서얼()은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그다지 큰 차별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조선사회에 명분과 신분차별을 옹호하는 성리학 이념이 강하게 정착되면서 반상의 구분, 적자와 서얼의 차이가 보다 분명해졌다. 과거제도에서 서얼을 배제한 것은 적서차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선시대 젊은이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인 과거제도의 응시자격 박탈은 한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없애는 가혹한 조처였다. 이러한 흐름은 성리학의 이념이 보다 확고히 자리를 잡으면서 그 정도가 심해졌다. 


『홍길동전』의 경우처럼 아버지가 있으되 아버지라고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홍길동은 ≪홍길동전≫의 유행과 더불어 조선 후기까지도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00년 음력 10월 22일의 기록에 홍길동에 관한 내용이 처음 등장한다. 실록에는 이날 영의정 한치형(), 좌의정 성준(), 우의정 이극균()이 “듣건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참에 그 무리들을 다 잡아들이도록 하소서”라고 왕에게 건의하여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음력 10월 28일에는 의금부()에서 홍길동에게 접대를 받고 그에게 집까지 주선해 준 엄귀손()의 처벌을 건의해 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반역이나 강상()의 죄를 저지른 중죄인을 왕명에 따라 조사ㆍ처벌하는 의금부에서 홍길동 사건을 담당했으며, 홍길동이 무반()인 엄귀손과 결탁하여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홍길동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에는 ‘길동()’으로, ≪홍길동전≫에서는 ‘길동()’으로 한자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홍길동전≫에 대해서도, 그것을 허균이 지었다는 기록을 남긴 이식()의 ≪택당집()≫에는 ‘홍길동전()’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본에 따라 ‘길동()’과 ‘길동()’의 표기가 모두 나타난다. 따라서 ‘길동()’과 ‘길동()’은 홍길동의 이름을 소리에 따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다른 글자를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홍길동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민중 영웅이다. 역사상의 실존인물이며 허구적 소설의 주인공이다. 역사에서는 반역자, 또는 강도로 기록되어 있으나,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인 일본 오키나와의 율도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역사상 홍길동은 

조선 초 15세기 중엽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신분이 첩의 자식이라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국법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혔다. 


좌절과 울분 속에서 출가하여 양반으로부터 차별받던 소외된 민중을 규합하여 활빈당을 결성한 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봉건적 조선왕조의 핍박을 받던 중 관군에 체포되어 남해로 유배되었으나 탈출하여 무리를 이끌고 오키나와로 진출하였다. 


그곳에서 조선에서처럼 민중을 대변하는 민권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홍길동전』은 작자 허균의 체험이 다분히 형상화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주인공 홍길동이 서얼로 설정된 것은 작자의 체험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허균은 아버지 허엽이 판서직을 역임하고 형, 누나 모두 학문과 문장으로 명망을 떨친 명문가의 기대주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신분적 특권을 스스로 박차버렸다. 오히려 그는 스승인 이달이 서얼이라는 점 때문에 차별 받고, 서양갑·심우영 등 명문가의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만으로 좌절 당하는 현실을 결코 좌시하지는 않았다.


양반이 첩을 두는 것을 관행적으로 인정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서얼은 양산되었고, 의식 있는 서얼들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기회를 자주 갖게 되었다. 한 개인으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같은 처지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서로 간에 힘을 북돋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얼은 능력 면에서는 적장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대개 첩을 두는 양반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첩을 두게 마련이고 이때에 맞아들인 첩은 어느 정도 용모나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원래의 정실부인보다 뛰어난 규수가 첩으로 들어왔고, 이러한 부모를 둔 서얼은 단지 신분만 천했을 뿐이지 지적 능력에서 정실 자식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얼들은 점차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비관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고 서얼 제도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홍길동전』의 구체적인 모델이 된 광해군 5년(1613)의 '칠서지옥()'으로 불리는 사건은 서얼들의 불만이 체제 변혁까지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칠서', 즉 '일곱명의 서자'가 현실개혁에 뜻을 품기 시작한 직접적인 동기는 1608년에 제기한 그들의 서얼허통() - 서얼들도 관직에 등용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 - 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있었다. 

1613년 봄 서인의 영수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위시하여 서양갑·심우영·이경준·박치인·박치의·허홍인 등 7명의 서자가 조령() 에서 은상()을 살해하고 은 7백 냥을 강탈한 죄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국문 도중 이들이 몇몇 무인들과 결탁해 역모를 꾸몄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하자 때문에 차별 받는 현실을 바꿔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있기 전부터 스스로 강변칠우() - 강변을 중심으로 모이면서 사회변혁을 도모했던 일곱 명의 친구, 여기서는 7명의 서얼을 의미함 - 또는 죽림칠현() 중국의 위나라, 진나라 초기에 노장사상을 숭상하여 자연을 벗삼아 살았던 7명의 선비 - 을 칭하면서 서로 간에 교분을 형성하면서 시국을 탓하였다. 한편으로 중앙의 관리들과의 교유를 통하여 자신들의 입장이 정치권에 반영되기를 기대하였다. 

허균은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관리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지녔던 허균은 이들의 처지에 크게 공감했으며 나아가 서얼들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 사상의 동반자임을 확신한 것으로 보인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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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론」과 같은 글은 신분 차별 없이 인재의 폭넓은 등용을 주장한 허균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1513년 음력 8월 29일 호조()가 경기도와 충청도의 양전()을 건의하면서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이 또한 회복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를 거두기가 실로 어렵다”고 보고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500년 음력 12월 29일 의금부의 위관(한치형이 “홍길동이 옥정자()와 홍대() 차림으로 첨지(, 중추부의 정3품 관직)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했으며, 이를 방조한 권농()과 이정(), 유향소()의 품관()들을 모두 징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홍길동이 충청도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관부를 무시할 정도로 큰 세력을 떨쳤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홍길동이 당상관()의 의장()을 하고 관부에 드나들며 지방 수령의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사건을 의금부에서 강상죄로 다룬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중종 때 활동한 순석() 일파, 명종 때 활동한 임송() 일파와 임꺽정 일파도 홍길동을 본떠 당상관의 복장을 하고 관부에 출몰했다. 

홍길동 사건에 대한 의금부의 조사는 1500~1501년 두 해 동안 이루어졌는데, 수많은 사람이 그와 관련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홍길동 개인의 신분이나 행적 등에 관해서도 분명히 확인되는 내용은 없다. 다만 엄귀손과 마찬가지로 의금부의 조사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적의 이름 활빈당" 한말에 
남부지방에서 봉기(蜂起)한 농민군 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쳤던 집단. 동학농민운동 (일명 동학혁명) 후에 남아 있던 농민군은 1896년 의병운동에 가담한 후, 흩어져 화적()으로 지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희망을 걸었으나 여의하지 않자, 1899년부터는 여러 가지 이름의 집단을 만들어 저항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들 중 활빈당은 《홍길동전()》을 사상 배경으로 삼고, 각지에 출몰하여 부호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주는 활빈() 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평등의 실현, 빈부격차의 타파, 국정혁신을 목표로 하였고, 구국안민책()으로 
① 곡물수출을 금하고 외국상인의 출입을 막을 것, 
② 영세한 행상인에 대한 징세를 폐할 것, 
③ 전지()를 황폐하게 하는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④ 균전법()을 실시할 것, 
⑤ 곡가를 안정시킬 것, 
⑥ 악형()을 폐하여 인정()을 시행할 것, 
⑦ 농사에서 폐해를 제거할 것, 
⑧ 철도부설권을 외국인에게 주지 말 것 등을 주장했다. 그 조직으로, 전체를 통솔하는 노사장() 밑에 각 지방에 유사()를 두었으며, 1년에 한 번의 대장()과 수시로 열리는 장()을 의결기관으로 삼았는데, 1905년 이후 의병()에 흡수되었다. 
1900년 2월경 충청남도 내포() 지방의 신창·예산·대흥·청양·정산·홍주·덕산·해미·법성·보령·남포 등지에서 봉기한 뒤, 충청북도·경기도·강원도·영남·호남 등 남한 각지로 그 세력이 파급되어 1904년까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활빈당이라는 당호()를 확실하게 고증하기는 어렵다. 

1886년 (고종 23)에 충청북도 음성에서 활빈당 당호로 소집단의 당적()이 일시 활동한 바 있고, 17세기 초반에 저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허균()의 「홍길동전」에도 나온다. 

활빈당은 13개조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자연평등’과 ‘빈부타파’ 및 ‘국가혁신’을 외쳤다. 그들은 축재한 사람들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회에 활력을 넣겠다는 소박한 공상적 사회주의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충청남도의 내포 지방과 충청북도의 보은 지방, 전라도의 지리산 지방 및 익산·고산·여산·장성·순창·담양·운봉·정읍·남원·함평·영광·무주·구례 등지와 경상도의 경주·하동·양산·언양·울산 등지에서의 활동은 치열하였다. 

가축을 살해해 활인()을 시키는 것은 어진 일이며, 비록 남의 재물을 빼앗기는 해도 활빈()을 했으니 의로운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위정자들이 규정한 표략( : 협박하여 빼앗음)이나 노략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활빈당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의 부패한 위정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피지배층으로부터는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활빈당 이들의 활동 지역이 동학혁명·남학당()·영학당() 등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지역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활빈당은 수십 명으로부터 크게는 700∼800명 으로 조직되었고, 해상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육혈포()로 무장한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화승총과 도창() 및 구청제군총() 등을 소지하였다. 기타의 군총도 약간 소지했으나 일반적으로 원시적 무기를 사용하였다. 

활빈당에는 동학혁명군과 화적() 출신들이 많이 가담해 있었다. 

출신지는 일정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모인 혼합부대였다. 또한, 활동 범위도 제한된 지역이 아니라 각지를 기동적으로 움직여 다니는 게릴라부대였다. 이러한 점은 이전의 화적이나 민란 부대가 지방적 한계를 넘지 않았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제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관에서 식별하기 어려웠고, 그 만큼 활동이 쉬웠다. 

활빈당은 위정자들에 의해 모욕적으로 낙인찍힌 일반 도둑의 무리나 폭도 혹은 비도()가 아닌 정치적 성향을 띤 의군()이었던 것이다. 

활빈당은 농민이나 행상인의 금품은 빼앗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 그 세력을 대중 속에 뿌리박을 수 있었다. 활빈당의 투쟁 대상은 지배층이었고, 탐관오리와 부정축재한 부호였다. 그들의 전곡() 과 원한이 사무친 관아는 좋은 공격 목표였다. 관아나 부호를 기습하거나, 요구조건을 미리 통지하고 통고 시각에 나팔을 불고 총을 쏘면서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악질 수령과 부호들을 경우에 따라서는 처치하기도 하였다. 금품은 주로 전곡을 탈취당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예외적으로 큰 절을 습격, 비축해 놓은 곡식을 빼앗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활빈당의 목적이 부자의 재물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풂으로써 생계의 수준을 균등히 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가 크게 놀라서 각지의 지방군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세력은 점차 확산되어갔다. 1900년 에서 1904년 에 걸친 5년 동안은 활빈당 활동의 최고조기였다. 당시의 모든 반봉건·반제 운동이 활빈당의 투쟁으로 결집되어 기세가 대단하였다. 

홍길동의 역사적 실체가 왜곡됐으나,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는 홍길동 연구팀(장성군, 연세대학교국학연구회, 전남매일, 유구대학, 오키나와관광국, 석원도문화원)의 3년에 걸친 끈질긴 노력 끝에 그 베일에 싸인 비밀이 밝혀졌다. 조선에서 뱃길로 3000리나 떨어진 일본 최남단의 섬 오키나와에서 후반부 삶을 살았던 그곳에는 민권운동의 선구자 홍길동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서 있다. 

이러한 홍길동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학술연구의 성과가 총체적으로 정리되었으며 500여 년 전의 일본과 한국 간의 교류사를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에 장성군은 홍길동 생가터 주변에 18,843m² (5,700여 평)의 부지를 사들였으며, 생가터 발굴 작업 및 철저한 고증을 거쳐 생가를 복원하였고 2004년 5월 3일 홍길동 전시관을 개관하여 새로운 관광지로 발전하고 있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1440년(세종 22) 장성군에서 태어난 역사상 실존인물 이었음이 밝혀지면서, 홍길동 출생지를 복원한 관광마을이다. 

아치실마을 입구에서 약 2백 여m를 올라가면 홍길동 캐릭터를 담은 안내판이 있으며 울창한 대나무숲과 삼나무편백으로 둘러싸인 생가터가 있다. 생가 울타리는 유사시에 화살로 사용할 수 있는 시누대이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해주지만은 않는다. 

옛날부터 선철()들은 명확히 그런 줄은 알아서 혹은 초야()에서 인재를 구했으며, 혹은 병사들의 대열에서 뽑아냈고, 혹은 패전하여 항복한 적장을 발탁하기도 하였다. 혹은 도둑의 무리에서 고르며, 혹은 창고지기를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임용한 사람마다 

모두 임무를 맡기기에 적당했고, 임용당한 사람들도 각자가 지닌 재능을 펼쳤다. ··· 예로부터 지금까지 서얼 출신이라 하여 어진 인재를 버리고 어머니가 개가했다고 하여 그 재주를 쓰지 않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어머니가 천한 출신이고 개가()한 자손은 모두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 

변변치 않는 나라로서 두 오랑캐 사이에 끼어있으니, 모든 인재가 국가의 쓰임이 되지 않을까 염려해야 할 판에 도리어 인재등용을 막고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다"고 하니, 이것이 월() 나라로 가면서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웃 나라에 알리지 못할 일이다. 

한 부인이 원한을 품는 것도 걱정스러운데 원망하는 남정과 홀어미가 나라 안에 반이 넘으니 화평한 기운을 이루기는 또한 어렵다. 

허균은 「유재론」에서 서얼이라 하여 능력 있는 인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점임을 지적하고, "원망하는 남정과 홀어미가 나라 안에 반이 넘는다"는 표현으로서 서얼 차별이 사회 문제가 될 것임을 강력히 경고하였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뒤 활빈당의 투쟁은 의병운동 대열에 흡수되어 반일 무장투쟁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 점은 의병투쟁 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다른 민중봉기군 보다 주목받는 것은 반봉건·반제국주의적 투쟁 목표와 선명한 행동 및 조직 활동에 있다. 그들은 투쟁과정에서 선언서와 13개조의 강령을 발표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선언서와 강령인 「13조목대한사민논설()」은 바로 활빈당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들은 개항 이후의 외국자본의 침식과 일제의 주권 침해를 통박하면서 정치적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고, 이에 대한 시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빈부의 타파 및 국가혁신을 지상적 이상()으로 하고, 이것을 지배층에서 이루어준다면 다시 초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근왕적 왕도사상이 농후한 것은 반봉건성의 제약임에는 틀림없으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 이상에서 볼 때 활빈당의 활동은 동학의 일관된 혁명적 요구들을 이어받은 것으로 주목된다. 

그러면서도 그 조직성과 투쟁력 및 선명성은 진일보한 민중항쟁의 형태로서 한국근대 사상 반제·반봉건 투쟁의 대표적 표본이었다. 홍길동의 어린 시절은 문무, 특히 병법에 능한 비범한 아이라는 측면에 초점이 모아진다. 홍길동의 어린 시절은 문무, 특히 병법에 능한 비범한 아이라는 측면에 초점이 모아진다. 

위 인용문의 무술이나 축지법, 둔갑술 등 각종 도술에 대한 관심은 유가사상보다는 조선시대에는 비주류 사상으로 밀려난 도가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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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사상은 주류적 흐름인 성리학에 밀려났지만, 김시습이나 서경덕처럼 도가사상에 깊이 심취된 학자들도 있었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서경덕의 수제자인 점을 고려하면 가계적()으로도 허균과 도가사상은 연결 고리가 있으며, 홍길동과 함께 도술에 능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우치의 사례에서도 이 시기에 도가사상이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율도국의 왕이 된 홍길동이 칼을 잡고 춤을 추며 불렀다는 노래 또한 도가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칼을 잡고 우수에 비겨서니, 남명() - 남쪽 바다 - 이 몇 만 리뇨. 대붕()이 날아가니, 부요풍() - 회오리 바람 - 이 이는도다." 마치 도가사상을 대표하는 경전 『장자』의 첫 편 「소요유()」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허균 자신도 또한 「장생전」에서, "내가 젊은 시절에 협사()들과 친하게 지냈고, 장생과도 해학을 주고받을 정도로 아주 친하게 지냈으므로, 그의 잡기 놀이를 모두 구경하였다. 슬프다 그는 신이었거나 아니면 옛날에 말하던 검선()과 같은 부류가 아니냐"고 술회한 것으로 보아 호협한 기상을 가진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에는 5편의 인물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천첩의 서얼 출신 이달을 비롯하여 아전 남궁두, 비렁뱅이 천민 장생, 몰락한 양반 엄처사, 의업에 종사한 중인 장산인 등 모두가 성리학 중심의 조선사회에서는 철저히 소외된 인물이었다. 

허균의 캐릭터를 통해 볼 때 홍길동의 출현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홍길동전 의 등장인물: 홍길동" 
탐관오리의 횡포와 못된 양반들의 등쌀에 지친 조선 시대 백성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인물이다. 영웅호걸의 기상을 지녔으며 일찍이 무예와 도술을 익혀 조선 팔도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 

서얼로 태어난 신분의 한계 때문에 뜻을 펼 수 없는 것을 한탄하지만 결국에는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용기와 지혜를 가르쳐 주는 인물이다. 

홍문" 
홍길동의 아버지로 조선 시대 세종 대왕 때 벼슬이 이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으며 성격이 강직해 모두가 우러르는 인물이다. 가문과 체통을 중시해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양반상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춘섬" 
홍길동의 어머니다. 홍문의 첩이 되어 길동을 낳은 후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는 전형적인 조선 시대 여인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 춘섬의 고통은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홍길동과 더불어 엄격했던 조선 시대 신분 제도가 낳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길현" 
홍길동의 배다른 형으로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는 인물이다. 우애도 깊어 멀리 떨어져 사는 아우 길동을 그리워하는 따뜻한 성격을 지녔다. 

초낭" 
곡산의 기생 출신으로 홍문의 총애를 받는 첩이다. 홍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길동을 해칠 계략을 짜는 간악한 인물이다. 교활하고 시기와 질투심이 강한 성격으로 길동과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로 등장한다. 2004년 5월 3일 개관하였다. 부지면적 6,248㎡, 건축총면적 602.14㎡의 지하 1층(사무실)·지상 1층(전시관) 건물이다. 

홍길동 관련 국내외 학술자료 600여 점, 홍길동생가터에서 출토된 유물 10여 점, 생가 모형, 홍길동 캐릭터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홍길동 관련 영상물을 상영하는 영상관이 마련되어 있다. 

생가터 주변에 축령산휴양림, 금곡 영화촌, 추암관광공원, 장성댐과 632년 창건된 고찰 백양사 등 관광지가 있다. 

생가터에서 200m 더 들어가면 암탉골(밤골) 입구 개울가에 홍길동이 어려서 먹고 살았다는 길동샘이 있다. 1997년 홍길동 사업의 하나로 생가터 가는 길을 홍길동로라 이름하였으며 생가터 발굴 작업 및 철저한 고증을 거쳐 생가 복원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장성군에서는 생가터에 양반촌, 양민촌, 승마훈련장, 민속무예광장, 민속놀이터 등을 조성하고 있다.  

홍길동은 소설 속 허구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선 연산군 때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선조실록> 등에 도적 홍길동이 등장하며, <증보 해동이적>이라는 문헌에는 ‘조선 중엽 이전에 홍길동이 장성 아차곡에 살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아치실마을이 홍길동의 출생지로 추정되어 장성군이 아치실 마을 일원(면적 23만 409㎡)에 홍길동테마파트를 조성하였다. 

홍길동전시관은 홍길동테마파크 내에 있는 전시관으로, 2002년 복원한 홍길동생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홍길동테마파크에는 홍길동생가터·산채체험장·청소년야영장·분수광장 등도 있다. 

"홍길동전 헤처보기
1) 홍길동의 세상" 《홍길동전》의 시대 배경인 조선 시대에는 신분 제도가 엄격했다. 재주가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도 양반이 아니면 과거를 볼 수 없어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양반이더라도 어머니가 양반이 아니면 그 아들은 양반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었다. 

본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적자, 어머니가 첩인 아들을 서얼이라 했다. 서얼은 '서자'와 '얼자'를 말하는 것으로 '서자'는 그 어머니가 양민, '얼자'는 그 어머니가 천민인 아들을 뜻한다. 이들은 양반의 자손이어도 차별 대우를 받았다. 

조선 시대에 양반가의 서얼로 태어난 홍길동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패한 사회에 도전한다. 

《홍길동전》이 쓰일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막강한 권력을 쥔 지배 계층에 압박과 설움을 당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백성들은 홍길동 같은 영웅의 탄생을 간절히 원했다. 

백성들은 신출귀몰한 도술과 둔갑술로 부패한 양반과 탐관오리들을 혼내 주는 홍길동을 통해 통쾌함을 느꼈다. 탐관오리의 재물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치는 것은 의롭지 않은 행동이다. 그러나 양반과 상민을 구분 지어 엄격하게 차별하던 조선 시대에 대범하게 양반과 관리에 맞선 홍길동은 민중의 영웅이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양반 출신이었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애정을 보였다. 허균이 바라던 세상은 누구나 부족함이 없이 잘사는 세상, 양반과 상민, 적서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이었다. 

홍길동이 이상의 나라 율도국을 세우는 것으로 표출된다. 부정부패나 신분 차별이 없는 나라, 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 율도국은 고통받던 백성들이 간절히 원하는 이상의 땅이었다. 

홍길동은 이처럼 차별과 억눌림 속에서 살아온 백성들의 소망이 만들어 낸 영웅이다. 홍길동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원하던 것을 모두 이루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고 싶었던 한을 풀었고, 당시 사회 제도 하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벼슬자리에 오르고, 마침내는 한 나라의 왕이 되기까지 한다. 

조선의 엄격한 신분 제도 아래서는 입 밖에도 낼 수 없었던 꿈을 홍길동은 백성을 대신해 이루어 낸다. 이로써 홍길동은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열망을 간직한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2) 허균,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이나 불, 호랑이나 표범보다 훨씬 두려운 것인데 윗자리에 있는 자들은 백성을 업수이 여기면서 모질게 부려먹는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한 말이다. 
조선 광해군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 작가였던 허균은 정치를 하는 자들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핍박을 하면 언젠가는 아래로부터 혁명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일이라고도 했다. 

당시 조선에서 서얼이라는 이유로 인재를 버리는 풍습을 못마땅히 여기며 한탄했다. 

《홍길동전》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작가 허균의 꿈과 이상이 반영된 작품이다. 

광해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으면서도 조선 사회의 병폐를 정면으로 비판했던 허균은 결국 처형을 당한다. 

3)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이 발표되기 전까지 소설은 백성들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쓸 당시까지도 한글은 '언문'이라 불리며 아낙네나 천한 백성들이 읽는 글이었는데, 지배층의 언어였던 한문은 하나의 권력이었으며 한문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문화를 즐길 수도 누릴 수도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차별이라는 것을 잘 알았던 허균은 《홍길동전》을 한글로 지어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읽혔다. 그런 점에서 《홍길동전》은 진정한 한글 소설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글 소설 대부분이 지은이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데 반해 《홍길동전》만은 유일하게 지은이와 쓰여진 연대가 알려져 있다는 점도 의의가 크다. 

《홍길동전》은 서포 김만중이 지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 후대 소설 창작에 큰 영향을 주었고, 서민들에게 널리 읽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후대 판소리계 소설 등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홍길동의 최대 위기는 의붓어미인 초낭이 '특자'라는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 하는 대목이다. 뛰어난 무술로서 특자를 제압한 길동은 특자는 바로 베어버리지만 의모()인 춘낭에 대해서는 어쩌지를 못하고 부친에게 엎드려 절하고 오히려 자신이 집을 떠나는 길을 택한다. 

"소인이 이제로 집을 떠나가오니 대감 체후만복()하옵소서. 소인이 다시 뵈올 기약이 아득합니다"고 하면서, "목숨을 도망하여 천지로 집을 삼고 나가오니 어찌 정해진 거처 있사오리까 마는 평생 원한이 가슴에 맺혀 씻을 날이 없사옵니다"하고 하소연하는 길동 앞에서 부친은, "오늘로부터 네 원한을 풀어줄 것이니, 네 나가 사방에 돌아다닐지라도 부디 죄를 지어 부형에 근심을 끼치지 말고 쉬이 돌아와 나의 마음을 위로하라"는 뜻밖의 말을 전한다. 

도망자의 신분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비로소 길동의 한을 풀어준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 한 장본인이 부친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목숨을 살려주는 장면을 통해서는 조선사회를 지배하는 효의 관념이 여전히 투영됨을 볼 수 있다. 

홍길동이 도적으로서 성공한 후에도 부형이 고난에 처하자 스스로 체포를 당하는 길을 택하는 장면이나, 율도국 정벌을 계획할 때 부친상을 당하자 삼년상을 모두 마치고 군사훈련을 하는 장면에서 효의 가치가 지배적이었던 당시 사회상이 나타난다. 

홍길동은 서얼차별이라는 '현실의 장벽' 속에서 뜻하지 않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현실의 도피 수단으로 도적이 된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선택이지만, 한편으로는 도적이 되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임을 잘 보여준다. 특히 홍길동이 연산군대에 실존했던 도적이라는 점과 『홍길동전』에 영향을 준 『수호전』의 주인공 또한 도적인 점, 1613년 은상을 약탈한 도적들이 허균과 친분이 있었던 서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설 속의 주인공은 별다른 선택 없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도적의 우두머리가 된 홍길동은 부정축재로 재산을 모은 해인사나, 탐관오리가 수령으로 있는 지역 등을 집중 약탈하는 의적()이 된다. 그들 무리의 이름은 백성들을 살려준다는 뜻으로 '활빈당()'이라 한다. 

홍길동은 사회적으로 고통을 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탐관오리를 통쾌하게 물리침으로써 민중들에게 대리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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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홍길동, 장길산 등 의적들이 매 시기마다 등장하는 것은 도적을 통해서라도 탐관오리들의 부패상을 응징하려는 민중들의 열망이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짜임새 있게 사회상을 반영하는 소설 『홍길동전』의 후반부는 허구적인 상황이 설정되면서 예리한 사회의식을 조금씩 방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소설이라는 공간을 이용하여 작자가 소망했던 바를 파격적으로 실현해 나가기는 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홍길동이 백룡의 딸을 납치한 요괴와 싸워 승리한 후 그녀와 결혼한다는 것이라든가, 포도부장을 물리친 후 병조판서를 제수받는 것, 

홍길동이 현재의 유구국 오늘날 '일본 오키나와 부근' 으로 추정되는 율도국으로 건너가 율도국 왕을 제압하고 왕이 되는 내용은 동화적 요소가 강해지면서 사회소설이라는 『홍길동전』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든다. 왜 하필 홍길동은 가상의 공간인 율도국의 왕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결국 홍길동은 현실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공간, 즉 이상세계에서만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신분차별이 엄격한 당시 사회의 높은 벽을 끝내 넘어설 수는 없었던 허균의 모습을 대변한 것은 아닐까? 

허균의 꿈과 좌절" 
허균은 선조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활약한 문장가·사상가·개혁가였다. 한국사에는 수많은 인물이 역사의 무대를 장식하며 명멸해갔지만 허균처럼 극적인 삶을 산 인물도 흔하지는 않다. 

허균은 1618년 역적 혐의를 받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자료는 한결같이 허균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광해군 10년(1618) 윤 4월 29일의 평가를 보자.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찢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허균이 얼마나 기피인물로 낙인찍혔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개성이 강하였고, 과격하고 독단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이러한 기질을 인정하였다.  

허균이 자기 형에게 올린 편지인 「가형()에게 답해 올리는 글」(『성소부부고』)을 보면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현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아우는 본디 성품이 방탕하여 세속에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마음이 또한 편협하여 참고 용납하질 못하니, 벼슬하면서 일을 처리할 적에도 간혹 엉성하게 꿰맞추는 실수를 면치 못하고, 일이 글러진 후에야 마음속으로 자책한 적이 자주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유분방한 그의 기질은 성리학 중심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새로운 변혁을 꿈꾸는 요인이 되었다.  

허균이 살았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조선사회는 보수와 개혁의 갈림길에서 고민하였고, 허균은 이러한 시기를 살면서 개혁의 길을 택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허균은 1568년(선조 2) 당시의 명문 경상도관찰사 허엽()의 3남 2녀 중의 막내아들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허균이 태어난 곳은 조그마한 야산이 이무기 - 용이 되지 못한 구렁이 - 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교산(), 즉 '이무기의 산'이라고 불려왔다. 

허균은 자기가 태어난 강릉 외갓집이 있던 자리를 설명하면서, "개울 동쪽의 산줄기는 오대산 북쪽으로부터 용처럼 꿈틀거리면서 내려오다가 바닷가에 와서 사화산의 수()자리가 우뚝 솟았다. 그 아래로 예전에는 큰 바위가 있었고, 개울이 엇갈리는 곳의 밑바닥에 늙은 이무기가 엎드려 있었다"고 하여 자신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에 비유한 적이 있다. 

묘하게도 주인공과 용의 인연은 『홍길동전』에도 나타난다. 

승상(홍판서)이 난간에 기대어 잠깐 졸더니, ··· 문득 청룡이 물결을 헤치고 머리를 들어 고함하니 산학()이 무너지는 듯하더니, 그 용이 입을 벌리고 기운을 토하여 승상의 입으로 들어오거늘, 깨달으니 평생 대몽()이라. 

허균은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던 홍길동과 용을 연결시킴으로써, 자신은 비록 이무기에 머무를지라도 홍길동만은 소설의 세계에서나마 꿈을 이루는 용이 될 것을 바란 것은 아닐까? 허균에게는 맏형 허성()과 중형 허봉()이 있었다. 이들 또한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했으며, 성리학과 문장, 외교활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5세 위의 누이 허난설헌은 일곱 살부터 시를 훌륭하게 지어 소문이 자자했으며 여자 신동이라고까지 불렸다. 

허난설헌의 시재()와 다정다감한 성격은 허균에게도 영향을 주어, 1606년 허균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 난설헌의 시집을 주었다. 

주지번은 난설헌의 시에 감탄하여 본국으로 가져가서는 중국의 역대 시문을 모은 책에 난설헌의 시를 수록하였다. 명문재사()의 혈통을 이은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밑에서 자라면서 난설헌과 함께 중형의 벗인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달은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조선중기 삼당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시재가 뛰어났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자신의 높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주인공을 서얼로 설정한 것은 좁게 보면 스승의 불행을 몸소 체득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넓게 보면 당시 조선사회가 안고 있던 사회문제를 과감하게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모로 삶을 마감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자유인 허균의 꿈은 사라졌지만, 그의 소설 『홍길동전』을 통해 허균은 영원한 꿈을 이루고 있다. 

허균이 살던 당시 조선사회는 밖으로는 임진왜란으로 민족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안으로는 붕당정치가 격화되어가는 시점이었다. 

허균은 「유재론」이나 「호민론」과 같은 글을 통하여 신분이나 배경보다는 능력이 있는 인재의 등용을 줄곧 주장해왔다. 그리고 개혁성향을 지니고 실천하는 인재의 등용만이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회개혁 의지는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의 창작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사회개혁을 이루려던 그의 꿈은 '역모'라는 그물망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자유분방하고 진보적인 그의 사상은 당시에는 '역모를 위한 준비'로 평가절하 되었지만, 사회성 짙은 소설 『홍길동전』으로 부활하면서 그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홍길동전』은 서얼로 태어나 끝내는 율도국의 왕이 되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통하여,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신분차별의 벽을 넘어 보려는 성향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소설이자 영웅소설로 해석된다. 특히 저자 허균이 조선시대에 엄청나게 기피인물이 될 만큼 당시 사회체제를 비판하고 이러한 체제에 대해 적극 저항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소설은 보다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작자와 소설 속 주인공의 캐릭터에서는 너무나 유사한 점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평소 허균은 서얼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보여 주었고, 1613년 칠서지옥과 같은 사건을 직접 경험하면서 『홍길동전』의 창작 의욕을 보다 불태운 것으로 여겨진다. 신분차별을 받고 있던 자신들의 울분을 실력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서얼들의 집단행동은 자유분방하면서도 개혁성향이 짙었던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제 서얼들은 초능력적인 도술과 검술을 겸비한 홍길동으로 화려하게 재탄생한 것이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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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은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 허균의 모든 고민과 정렬을 쏟아 부은 걸작이었다. 역모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 『홍길동전』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은 사회의 모순에 직접 저항하는 지식인의 책무를 허균 스스로가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허균과 홍길동은 실존인물과 소설 속 인물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폐쇄된 사회의 문을 열어보려 한 선구적인 인물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의문인점들; 
1.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 아니라는 의문점들...? 첫째 허균의 문집에 『홍길동전』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 둘째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면 역모죄로 체포되었을 때 불온한 사상을 담은 『홍길동전』이 틀림없이 언급되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허균이 저자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조선중기의 학자인 이식의 『택당집』이나 조선후기의 학자 황윤석의 『이재난고』와 같은 글에 분명 허균이 저자임이 밝혀져 있고 내용 또한 허균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허균을 저자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2. 『홍길동전』은 중국 『수호전』의 비슷한점들...? 중국 『수호전』의 경우 다양한 이력을 지닌 108인의 영웅호걸이 등장하지만 『홍길동전』에서는 양반집 서자 홍길동이 사회적 모순 때문에 대도()가 되는 설정이다. 대도의 연원은 『수호전』 보다는 연산군대의 실존도둑 홍길동이나, 허균이 주목한 서얼들의 은상 살해 사건이 『홍길동전』과 보다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설사 『수호전』에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홍길동전』은 저자 허균의 사회비판 의식이 창작욕과 맞물려 나온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3. 허균은 『홍길동전』 이외에 다른 인물 전기도 썼읍니다.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에는 스승 이달()의 전기인 「손곡산인전」을 비롯하여, 「엄처사전」의 엄처사, 「장산인전」의 의인() 장씨, 「남궁선생전」의 남궁두(), 「장생전」의 장생()의 전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재능은 있지만 신분이 미천하여 불우한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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