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흔히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등은 도적이다’라고 말했을 때 ‘도적 & 의적’ 이라 말한다.
부자들의 집만 털고 그것으로 활빈하면서 ‘정의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할 정도로 대의를 가진 모습으로 의적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일어선 의적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하는 도적인가! 우리는 결론을 미리 ‘그들은 도적이다’ 라고 내리면서 시작하려 한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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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
후대인인 우리가 그들의 그러한 모습이 당시 모순에 저항하는 모습이었으므로 ‘의적’이라 평가내린 것 뿐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산으로, 바다로 나가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저항의 젖줄이었던 민중은 어떠한 형식으로 대항해 왔는가, 진정한 도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속에서 올바른 민중의 자리매김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이 논문에서 규명하려 한다.
상징적으로 대표되는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등의 도적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 속에서 그들의 존재 여부와 그들이 활동하게 되었던 시대적 배경들을 살펴보고 조선후기의 시대적 상황과 그러한 상황에 대처해 가는 민의 모습을 알아보도록 하자. 대표적인 도적의 모습;
① 홍길동"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홍길동은 소설속에서 적서차별로 인한 가부장적 봉건 가정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집을 뛰쳐나와 농민들과 함께 봉건 지배와 싸우는 활빈당 행수가 되어 활동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민에 대한 억압이 없는 율도국을 건설하여 스스로 왕이 된다. ‘홍길동전’을 통하여 다음의 세가지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첫째, ‘홍길동전’에서 드러나는 작가 허균의 저작의도에 대해 알아보며,
둘째, 홍길동이 단지 소설상의 인물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홍길동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가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허균 역시 실제로 서자였고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늘 의혹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자들에 대한 차별대우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정신적 상태는 ‘홍길동전’의 사상적 지향을 규정짓는데 큰 작용을 하였다.
소설의 주제는 사회적인 주제이다. 소설은 적서차별로 인한 가부장적 봉건사회의 모순을 벗어나 이조봉건 사회의 계급모순, 즉 광범한 농민과 봉건지배층들과의 계급모순을 홍길동의 형상을 통하여 표현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소설은 반봉건적․진보적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에도 제한성은 있다. 그것은 홍길동이 율도국을 정복하고 율도당이 되는데, 이 이상적인 왕국을 ‘어진 임금’이 다스림으로써 봉건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는 홍길동을 소설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홍길동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임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알 수있다.
“귀손이 길동의 행동이 허황하다 는 것을 알면서도 죄인을 숨겨주게 했다면 법조문을 적용하는 것이 아주 옳습니다. 만약 길동이 도적질한 물건을 뇌물로 준 것이라면 이 법조문을 해당시킬순 없습니다. 길동을 마지막까지 심문한 다음에 죄를 결정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연산군 일기>> “영의정 한치형, 좌의정 성준, 우의정 이극균이 계문하기를 ‘강도 홍길동을 채포하였으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거니와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기로 이보다 큰 일이 없사옵니다. 청하옵건데, 그 도당을 끝까지 잡도록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 실록>> 위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홍길도의 신원에 관한 내용이라든가 그의 활동에 대한 것을 전혀 없고 단지 다른 인물들과 연관되어 그의 이름이 사료에 기록되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면 왜 홍길동은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그의 개인적인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홍길동의 신원이 사료에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으나 판서 같은 고귀한 혈통을 비록 절름발이로라도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홍길동과 연류되어 붙잡힌 엄귀손이 관인 신분이었음을 볼 때 그가 완전한 천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중의 길동은 “일찍이 사람을 죽이고 망명도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의 길동도 무언가 가정내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서 ‘강상의 변’이라 불릴 정도의 일을 저지르고 도주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사환가의 곁가지는 아니더라도 양반이나 중인의 얼자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 때문에 어떤 심각한 가정적인 갈등이 야기되었던 것이 아닐까 가정해 볼 수 있겠다.
역사상의 홍길동은 신분적 모순 갈등으로 일찍이 체제의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관헌에게 쫓기는 몸, 법밖의 사람이 되어서 춥고 배고픈 유민들을 결집하여 강력한 농민 저항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우리는 ‘홍길동전’을 통하여 역사상의 홍길동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도적떼였다는 결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행동을 사회적 산물로 규정내리듯 홍길동의 경우에도 그의 모든 행동은 그가 살았던 봉건사회의 모순에서 비롯 되었기 때문이다. 즉, 홍길동이라는 도적은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②임꺽정"
임꺽정 난은 15세기 말 이래의 황해도에서의 권세가에 의한 겸병 확대와 상품 시장권 확대로 인해 토지 및 상권에서 유리된 농민 및 소상인, 백정․천인 계층이 삶의 방편으로써 일으킨 농민항쟁 이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임꺽정 난의 전모와 임꺽정 개인의 존재적 성격을 기사를 중심으로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임꺽정난의 특징에 대해 서술해 보도록 하겠다.
"임꺽정난의 전모"
임꺽정이 활동했던 16세기중엽, 훈구파의 농장확대와 그에 따른 사유지 겸병등은 큰 문제로 부각된다. 이 시기 임꺽정이 활동했던 황해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지역은 낮고 습한 지역이 많아 갈대가 무성했던 지역으로 이를 보여주는 사료는 다음과 같다.
“사헌부가 계(啓)하기를 황해도 황주, 봉산, 재령, 안악 등지는 소금기가 많은 습지여서 오직 갈대만이 무성한데 거민(居民)이 이것으로 생업의 재료로 삼은 지가 오랜 데 계축년(癸丑年) 사간원에서 계(啓)하여 빈민에게 환급하길 청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는데 지금 봉산민 80여명이 살길이 없다고 정장(呈狀)하여 호소하여 왔는데 과연 측은합니다. 청컨데 전번의 사간원의 계에 의거하여 내수사(內需司)에 속(屬)하게 하지말고 민에게 주어 취리(取利)케 하십시오. 비답(枇答)에 이르기를 봉산 등지의 관노전(官盧田)이 내수사(內需司)에 속하는 것이 타당하므로 이미 명령에 의하여 속하게 하였다.”
“황해 일로에서 들리는 바로는 개간지가 많이 호우에게 돌아가고, 천택(川澤)의 이익이 빈민에게 돌아가지 못하며-(중략)-붕(朋)이 작위(作威)하여 벽황(闢荒), 방류(防流)하여 민력을 탄상(誕傷)하며 어량(漁梁)을 광(廣)암한다 하는데 민리를 침탈하는 것을 관찰사께서 봉공
(奉公), 안법(按法)하여 사문(私門)을 무두(懋杜)하여 생민(生民)으로 하여금 왕토(王土)를 공유하게 하십시오.”
위에서 보여지듯 황해도 지역의 이런 지역적 배경에 따른 병폐는 민들에게 더욱 가중한 부담을 주었고 이런 배경으로 인해 임꺽정난의 필연성을 살펴볼 수 있다. “황해도에서 도적이 크게 번성하여, --(중략)-- 일로요충지(一路要衝地)가 도적이 늘 왕래하는 것이 되어 봉산(鳳山)은 도적의 본거지가 되었다.” “광악한 무리들이 대당(大黨)하여 황해도에서부터 재물을 약탈하여 혹은 개인에게 팔고 혹은 서울 안에까지 연결하여 일반 민가에서 방자하게 약탈을 하고 있다.”
“병조판서 권철(兵曹判書權轍)이 계하여 말하기를 황해도의 포악한 적(賊)이- (중략)- 지금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적세(賊勢)가 날로 번성하여 심지어는 관호(官號)를 칭하고 열읍(列邑)에 출입을 하며- (중략)- ” 위의 자료들에서 이들의 활동이 단순한 약탈의 행위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과 관리 사칭 등의 행위에서 그 대담성과 절박성을 엿볼 수 있다 하게 하였다.
임꺽정의 존재 임꺽정은 양주에서 유기를 만드는 고리 백정출신으로 이들은 개성과 서울에서 상업활동을 가하였다. 이들 무리는 수공업 특산물의 생산과 판매를 배경으로 활동하였으므로 상인으로 변장, 화물속에 무기를 숨겨 운반하는 등으로 반란의 범위를 확대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임꺽정의 난은 황해도의 봉산, 서흥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3년간에 걸쳐 전개되다가 1562년 1월 임꺽정의 서흥에서 체포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난은 갈대밭을 배경으로 수공업자, 소상인등이 연합하여 지배층의 농장과 사유지의 확대 및 수탈에 대항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 임꺽정 난의
특징;
임꺽정 난은 16세기 사회의 전반적인 모순 속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직접적으로는 15세기 말 이래의 권세가에 의한 황해도의 본격적인 해택(海澤)개간과 지역시장권과 서울시장권이 포섭되면서 발생했던 사회․경제적 제모순과 관련이 깊었다. 당시의 사관도 “도적이 생기는 것은 도적질 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도적이 되어 하루라도 연명하려는 자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농촌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유리된 몰락 농민들이나 소상인들 그리고 신분적인 천대에 불만을 품은 백정․천인들이 모여들어 도적 집단을 이룬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공격대상은 그들을 괴롭히는 지방관이나 양반․토호들이었다. 또한 교통로, 국가 수취 운반로, 상업 유통망 등을 집중적으로 노려 국가의 농민 수탈구조에 대한 간접적인 공격을 통해 봉건 지배질서에 저항하였다. 봉건지배질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녔던 임꺽정의 난은 특히 “민과의 긴밀한 유대로써 1559년과 1562년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활동하였던 점이 특징으로 보여진다.
“모여서는 도(盜)가되고 흩어져서는 민이 되며 출몰(出沒)이 무상(無常)하여 구포(驅捕)할 수 없다”라고 하듯이 관의 공격이 있으면 일반 민중과 구별할 수 없었으니 이것은 또한 민중의 지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민중을 지지기반으로 하였던 점이 원동력이 되어 3년이라는 장기간의 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임꺽정 난은 16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격화된 사회․경제적 모순을 민에게 전가시키는 지배층과 훈구파 정권말기의 권문세가에 의한 농장과 사유지 확대에 대한 농민층 저항의 하나였고, 3년이라고 하는 장기적 활동을 하였던 임꺽정 집단은 봉건 지배층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사회경제적 모순이 소멸되지 않은 이유로 이후에도 황해도,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민들의 투쟁은 장길산, 홍경래 등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임꺽정 난의 전모 및 임꺽정 개인의 존재적 성격과 임꺽정 난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에게 있어 임꺽정이란 인물은 여태까지는 16세기 중엽, 황해도 일대의 도적집단의 한 우두머리라는 상징적․영웅적 의미로 이해되어 왔지만, 이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도적 활동에서 개인 및 지역 등의 요소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여러 모순이 중첩되면서 토지 또는 상품 유통권에서 유리된 민들이 삶의 방편을 위해 ‘도적’이라는 형태로 봉건 지배층에 저항 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사회․경제적 모순의 일단이다.
③장길산"
소설속에서의 장길산"
*17세기 조선 숙종대는 정치적으로 환국의 시기로 정국이 불안정 했으며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심해졌다. 이러한 시기 ‘장길산’이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도적의 출현은 우연이 아닌 필연인 것이었다. 이러한 논의에 앞서 장길산이란 인물에 대한 진위여부를 따지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밝힐 것은 영웅화된 인물 장길산이 아니라 그가 속하고 그와 함께했던 당시 민중이기에 장길산이란 인물에게 약간의 대표성을 부여하여 그의 인물됨이나 행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장길산의 생시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소설에서는 광대패의 아버지의 주술을 하는 어머니를 양부모로하여 성장하고 그의 성장에서 광대패의 삶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광대패로 도처를 돌아다니며 민중의 삶을 함께 느끼로 가렴주구와 외압속에서 고통받는 당시 모순을 깨뜨리려는 의지를 키워온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몸이 날렵하고 지력을 갖춘 장길산은 그 풍겨오는 외모에서도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며 그의 실천을 이끌어내는 정신세계는 민을 주체로한 ‘정의’의 실현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를 뒷바침해주는 사상은 불교의 <미륵사상>과 민간신앙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 사료속에서의 장길산" 실제사료를 통해서 장길산의 모습들을 살펴보자. 먼저 장길산은 본래 곤두박질을 잘하는 광대라는 기록이 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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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연간에 교활한 도적 장길산이 해서(황해도)지역에 출몰하였다.
길산은 본래 ‘창우(倡優)’로써 근두(筋斗)박질을 잘하는 자로써 용맹스럽고 민첩하기가 비상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적들의 우두머리(窩主)가 되었다”
<
<이익, 성호사설 인사문(人事門)>>
장길산의 출생이나 성장환경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지만 장길산이 활동하던 숙종연간의 사회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숙종연간은 정치적으로는 붕당정치의 균형이 깨져 정권교체가 거듭되어 혼란스러웠고 경제적으로는 지주제가 발달하고 상품화폐경제가 크게 진전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신분이동이 활발해지고 농민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봉건지배층들은 각종 명목으로 민들을 착취하였고, 지방의 향리나 지주층들도 농민수탈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또 흉년 등의 자연재해와 괴질 등의 질병이 나도는 등 민의 생활은 피폐할대로 피폐해졌다. 그리하여 이 시기 민은 유망과 도적 활동 등의 형태로 지배층에 저항한 것이고, 장길산은 그 도적 집단 중 한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숙종실록에 장길산의 활동에 대한 간략한 기사가 나온다.
“이 무렵에 도적의 우두머리 장길산이 양덕(陽德-황해도)지역에 숨어있었으므로 포도청에서 장교를 보내어 습격하여 체포토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숙종 18년 1692년 12월 정해조>>
“극적(劇賊)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데가 없다. 여러 도를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중략)-- 여러 도에 밀칙하여 소재를 상헤히 탐지하여 따로이 군대를 풀어 체포하여 후환을 없앨 방도를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숙종 23년 국청(鞠廳)에 내린 하교>>
장길산이 적어도 숙종 13년 경부터 활동한 도적임을 말해준다. 황해도 지방이 본거지이나, 여러 도를 왕래할 정도로 활동 범위가 넓고, 처음 체포 조치를 내린 (숙종 18년) 후에도 여전히 엄존할 정도로 큰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숙종을 비롯한 당시 권력집단에게는 커다란 걱정거리로 받아들여져 중앙정부에서도 체포에 나설만큼 중요한 인물로 대두되었다.
장길산은 또한 승려 세력과 연합하여 난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사승 운부(師僧 雲浮)는) 불경으로 승배(僧輩)를 가르쳐서 그 중에 뛰어난 자 옥여(玉如), 일여(一如), 난정(卵定), 대성법주(大聖法主) 등 백여인을 얻어 그 술업을 전하여 8도의 승려와 체결하고, 또 장길산의 무리와 맺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성(鄭姓) 최성(崔姓) 양인을 얻어서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고 정씨를 세워 왕으로 삼고 뒤에 중원을 공격하여 최씨를 세워 황제로 삼는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이영창등추안(李榮昌等推案)--숙종 23년 정월>
당시의 도적세력이란 산간(山間)을 중심으로 그 근거지를 잡고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이므로 산간의 승려세력 중 사회개변을 희망하는 민중적인 불교관을 가지는 세력, 즉 미륵신앙으로 대표되는 불교세력과 결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장길산의 무리는 아울러 상업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무사 최형기가 가서 (장길산을) 잡는데 응모하여 파주에 이르니 상고(商賈) 수십명이 말을 몰고 지나갔다. 그 고발자가 말하기를 [모두 도둑의 무리이다]라 하여 드디어 모두 잡아 가두었다. 말은 모두 건장한 암컷이었다.”
<<이영창등추안>>
마상(馬商)이 주축을 이루는 사정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말을 소유할 정도로 재부와 기동력을 가진 도적의 무리였음도 확인할 수 있다. “장길산은 혹 서수라(西水羅)에 있다고 하고 혹 벽동해천동(碧潼蟹川洞)에 있다고 하는데, 마기(馬騎) 5천 보병(步兵) 천여가 모두 효용(驍勇)하기 때문에 옥여(玉如) 등이 이미 체결하였다.”
<<이영춘등추안>>
“길산의 말 가운데 [만약 대사(大事)를 일으키려면 선사(禪師)를 기다릴 것도 없이 오직 나의 기병(騎兵)을 들어도 족히 장구(長驅)할 수 있다]하였다.”
장길산의 무리는 이처럼 군대를 방불케 하는 규모가 큰 세력을 이루었고, 장길산의 그의 부대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또 병자년에 이르러 역초(逆招)에 이름이 드러났으나 끝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장길산은 숙종전기간을 통해 끝까지 잡히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평가" 그의 무리들은 사상적으로는 불교계와 많은 연계를 맺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객가 등 상업활동이 빈번했던 당시 경제사를 반영해 볼 때 뒷받침되어 있었다. 그의 무리들이 어떠한 계층들로 구성되고 그들의 활동경로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기술되어 있지는 않으나 당시 민중으로부터 호응을 받으며 활동영역을 넓혀나가면서 민중의 봉기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 시대적 모습과 민의 대응 이 글에서는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시대별로 그때의 시대적 배경과 그에대한 민중의 대응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15세기 사회경제적 배경과 민의 대응"
역성혁명을 통해 개창된 조선은 중앙집권화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는데, 그 지배구조는 고려후기 이루어진 농업생산력의 발전위에서 이루어진 사회변동의 결과로 볼 수있다. 농업생산이 늘자 농민의 재생산 기반이 안정되고 읍치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자연촌이 성장하였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들이 개간되면서 다른 지방에 가더라도 농사를 짓기가 더 쉬워졌기 때문에 농민의 유망이 늘어났다. 때문에 농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중첩적으로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유동성이 커져 토지에 얽매이는 정도가 낮아졌다.
따라서 조선은 권농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지역적인 차이를 줄이는 한편 전국의 토지와 호구를 군현단위로 파악하고 이에 기초하여 각종부세와 신역을 거두어들이고자 하였다.
민에게 부과되는 세는 전세, 공물, 군역과 요역이 있다. 전세는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에 의해 매겨지는데, 그 운영과정에서 양반 지주들의 신분상의 이익이 관철됨으로써 농민들의 전세수탈이 가중되는 한편 전세에 덧붙는 여러가지 부가세도 운영과정에서 농민들의 부담을 무겁게 하였다.
군역과 요역도 신분적 차별이 적용되었고, 이 때문에 농민들은 농사도 제때 짓지 못하고 식량과 도구, 운반기재까지 모두 자신이 마련해야 했으므로 부채에 시달려 가산을 탕진하기도 하였다. 공물은 이 무렵 농민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인식되었는데, 본래 해당 지방의 특산물에 한하기로 된 것이였으나 그 지방의 생산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할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물을 운반하는 과정에서도 썩고 변질하는 경우에 다시 마련해야 했고, 대납으로 그 피해가 더 커지기도 했다.
15세기 중엽이후에는 대토지 소유의 발전에 따라 날이 갈수록 전세를 국가에 내지 낳는 현상이 많아졌는데, 이를 막기 위하여 국가는 전세 수탈을 강화하는 한편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농민들이 병역에서 빠지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는 결국 농민의 부담은 더욱 가중시켰다. 때문에 이러한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노비로 꾸미거나 반당이라 칭하여 권세가에 투탁하기도 하였고, 심한 경우는 토지를 잃고 유리하여 다시 농촌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도적이 되어 지배층에 저항하기도 하는 등의 대응 방식을 보인다.
15세기의 중요한 항쟁으로는 1426년 서울 방화 항쟁,
1428년 신백정 항쟁,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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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 - 1447년 대성산 농민항쟁,
1467년 이시애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함경도 농민 전쟁,
15세기 후반기의 전라도․황해도의 농민항쟁 둥이 있다. 이중에서 함경도 농민전쟁을 살펴보면, 함경도 지방의 농민들은 호구조사사업과 호패법의 시행, 그리고 함경도 농민들에게만 부과되었던 신세포와 매잡이, 공물부담, 그리고 서울로 오가는 여진인들의 짐을 운반해주는 부역부담과 그들에 대한 여행도중의 뒤치다꺼리 등이 큰 부담과 고통이었으며, 함경도 지방의 토호들은 함경도 출신자를 차별할 뿐만 아니라 호패법의 실시를 계기로 지신들이 차지하던 관하민을 빼앗기게 되어 중앙정부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함경도 농민전쟁은 이처럼 고조된 농민들의 불만과 토호들의 정권욕이 가세하여 일어난 것이었는데, 남한 학계에서는 이를 ‘이시애의 난’으로 정치사적인 면에서만 바라보고 있으나 그 같은 토호들과 달리 농민들이 일선에 나선 진정한 까닭은 봉건 정부의 가렴잡세와 고을원들의 가혹한 착취를 없애고 사회적 예속에서 벗어나자는데 있었다.
함경도 농민전쟁이 지도부인 토호들의 배신과 전술상의 착오로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함경도 농민들의 원성을 자아내던 신세포의 폐지, 그해의 공물, 전세, 신상 등의 면제, 양전사업의 보류 등의 일련의 양보를 얻어낸 것은 그 성과라 할 수있다.
"나라의혼돈시대"
- 16세기 사회경제적 배경과 민의 대응"
15세기 후반 이후 수조권을 매개로 한 토지지배가 무너지면서 소유권에 바탕을 둔 토지지배가 더욱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관료는 물론이고 향촌의 재지 사족과 향리들도 개간과 매득을 통해서 토지를 집적하여 농장을 개설해 나갔다.
이같은 토지를 둘러싼 대토지 소유자들과 중소토지 소유자들간의 대림이 첨예화되었으며, 본래 자작농으로서 전세, 공물, 부역의 부담자였던 양인들은 소작농 또는 사노비로 몰락하여 지대와 신공을 부담하기도 하고, 또한 양인 중 일부는 백정, 염간등으로 전락하여 양인의 최하층을 구성하게 되었다.
대부분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공사 노비들도 크게 늘어났다.
이에따라 봉건적 착취와 억압이 16세기에도 더욱 강화되었다. 전세, 공물, 부역노동의 수탈과 그 밖의 신역과 가렴잡세에 의한 착취가 가혹화 되었으며, 상업의 발달로 쌀과 베에 대한 지배층의 욕구가 더욱 커지면서 부세 운영과정에서 공물 방납과 방군수포를 통해 쌀과 베를 집중적으로 수탈당하였다. 이러한 부세수탈과 지배층의 토지 집적의 심화로 농민의 유망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유망한 농민들은 다른 지방에 가서 소작을 하거나 지방장시를 무대로 상업에 종하기도 했다.
유리와 도망은 농민을 토지에 묶어두고 수취하던 봉건사회의 조건하에서 가장 초보적인 형태의 저항방식으로 봉건 사회의 전시기를 통해 나타난다. 하지만 대다수의 유리된 농민들은 도적의 무리에 들어갔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홍길동 집단과 임꺽정 집단등이다.
임꺽정 도적 집단은 황해도 구월산과 서흥․신계의 험준한 산간 지역을 근거지로 삼는 한편 관군의 추격을 피하여 평안도의 성천․양덕 ․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둥지로 활동무대를 옮길 만큼 기동성을 발휘하였고, 민의 지지뿐만 아니라 각 고을의 관리들과도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여 관군의 동향을 먼저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3-4년의 장기간 동안 활동할 수 있었다.
이들은 가장 천대 받는 천민출신의 지도하에 그와 유사한 신분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아주 강력한 대오를 꾸렸다는 점, 소극적 방어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배층에 타격을 입혔다는 것등에 큰 의의를 갖는다. 이것외에도 민의 대응방식에는 국문벽서투쟁, 거화, 산호투쟁 등 다양한 형태가 보인다.
‘거화’는 농민들이 밤에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가 관리들의 부정수탈에 항의 하는 횃불시위였으며, ‘산호’는 수령이나 서리들의 학정에 바대하여 농민들이 동헌이 보이는 마을 뒷산에 올라가 큰 소리로 그들의 비리를 고발하는것이다.
이시기는 그 전시기에 비해 봉건적 억업과 차별을 가장많이 받고 있었던 노비, 백정 등 최하위 신분의 참여가 있었다는 것과 농민들이 하나의 집단을 묶어 용감하게 대항했다는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17세기 사회경제적 배경과 민의 대응"
17세기는 농업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로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고, 경지면적의 확대, 상업적 농업경영, 임노동의 고용등을 통해 인신적 지배 예속의 관계에서 경제적 예속관계로 전화되고 농촌사회의 계급분화가 촉진되는 시기였으며, 두차례의 전란으로 조선 사회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변화하는 싱황속에서도 지배층에 의한 민들의 억압과 착취는 계속 강화되어 나갔다.
중간착취를 없애 농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국가재정을 확대하려는 입장에서 마련된 대동법은 수공업과 상픔유통관계를 발전시켜 사회적 생산이 장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이후에도 공상, 삭선과 지방관정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공물의 수탈이 광범하게 행해져, 그 수탈의 총량이 이전과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또한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상당한 양의 국가 수세지로 확보하는 한편 삼수미, 대동미, 5결수포 등을 새로은 전세항목으로 착취하였으며, 군포, 신포, 가포의 수탈, 노비신공의 수탈, 고리대에 의한 착취 등으로 이 시기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더욱 강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들의 저항을 억누르고 양인과 노비를 장악하기 위해 호패법, 난전 금지법, 노비추세법, 5가작통법 등을 실시하였으며, 재지사족들은 향약을 실시하여 농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시켜나갔다.
이같은 억압과 착취의 강화는 민의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는데, 1601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삼남 농민항쟁, 1607년의 경기도와 황해도의 농민항쟁, 1690년의 장길산 등이 17세기의 대표적인 농민 항쟁으로 꼽고 있다.
특히 장길산 부대는 산간지대의 농민과 노비 신분이 대거 참여한 것이 특징으로서 지방에 분산되어 고립적으로 싸우던 제한성을 극복하고 더 큰 집단으로의 조직성을 지향하여 임꺽정을 능가할 정도로 치밀하게 조직된 점, 그리고 천민 출신의 지휘자가 항쟁을 전개하였고 노비 신분의 대거 참여는 노비제도의 붕괴과정을 촉진시켰다는 점에 그 의의를 설정할 수 있다.
또한 부패한 지배층의 생활을 폭로 고발하는 글을 써 붙이는 괘서투쟁, 국문벽서투쟁, 거화․산호투쟁, 궁가의 토지약탈에 반대하여 공동으로 항의하는 항의신소, 공동상소, 악질관료를 추방하기 위해 공자와 맹자의 신주를 파괴․소각하는 항쟁, 양전 사업에 반대하는 성토 시위, 정감록의 비기 등을 퍼뜨리는 유언비어 유포 등이 여러지역에서 계속적으로 벌어졌다. 이는 두차례의 전란에 의병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위하여 싸워나갈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함과 동시에 그 힘의 축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 볼 수 있다.
- 18세기 사회경제적 배경과 민의 대응"
이 시기에는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른 토지의 상품화의 진전으로 소수의 서민들은 소작지를 넓혀가면서 상업적 농업을 통해 부농인 서민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반면 대다수의 농민들은 부농들에게 소작지 마저 빼앗겨 빈농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러 농민층 내부에서는 부농과 빈농이라는 계급 분화가 촉진되었으며 또한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 강화되어 지주제가 훨씬 확대․강화되었고 이것은 소유분해현상과 함께 계급 대립 격화의 원인이 된다. 또한 사족 중심의 신분제적 향촌지배 체제가 크게 동요함으로써 신분관계도 크게 변하였다. 18세기 봉건제 위기의 심화는 조세 수취과정에서 여실히 들어난다.
현물납에서 화폐납으로의 변화는 상품화폐관계에 편승한 수탈로 바꾸어 수탈 방식에 있어 양적 뿐만 아니라 질적 변화가 나타나고 더불어 조세도 점차 토지에 집중되어 간다. 특히 전정에서의 비총제(比總制), 군정의 군총제(軍總制), 환정의 환총제(還總制)는 수세 업무를 군현의 수령과 향촌 지배계층에 전적으로 위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상호보장적 관계 속에서 농민에 대한 무제한적 수탈이 가능했다.
이에따라 부농은 신분상승 등의 방법을 통해 빠져나가고 몰락해가던 빈농층에게 조세가 가중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세 편중은 관과 민 나아가 지주와 전호, 빈농과 부농사이의 계급대립을 첨예화 시켰다. 이러한 사회현실 속에서 17세기 말엽을 고비로 농민도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차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이러한 농민의 의식이 성장하는 데는 지식을 습득하기가 쉬워지고 생활의 폭이 넓어진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정원외의 교생이 늘어나고 서당이 늘어나 농민 자제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점차 확대되었으며, 서울 등 도시지역에서는 소설책 등을 돈을 받고 빌려주는 세책점이 등장하여 지식이나 예술에 접할 수 있는 길이 넓어졌다. 또한 장시의 발달로 농민들은 장시에 모여 서로 인근의 사정을 아는 것은 물론 세상의 물정을 깨치기도 하였고, 상업망이 확대됨에 따라 다른 지역의 사정을 접하는 기회도 늘어났다. 그리고 공동노동을 통헤서 서로의 결속을 높여가기도 한것이 그 배경으로 보여진다.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무렵에 초기에는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지역의 농민항쟁이 활발했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도적 집단 형태의 저항이 차츰 저항의 주류에서 벗어나고, 18세기 후반부터는 농민들의 일상적인 삶에 토대를 둔 저항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농민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하거나 집단적으로 항의하고, 감영에 의송을 올리거나 서울로 올라가 격쟁을 하여 왕에게 알리려 하였다. 또는 공공연히 위정자를 비방하고 괘서로 수령의 비리를 폭로하거나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훔치고 훼손하고 벌목조차 엄히 금지되어 있던 솔밭에 불을 지르는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수령을 쫒아내려 하였다. 더 나가 수령을 면전에서 능멸하거나 직접 위해를 가하여 수령의 위신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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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농민투쟁에 있어서도 일시적인 투쟁에서 항상적 투쟁으로 그 성격이 변하고 있고 사회계층도 확대되었으며, 재인 화척으로 불리는 천민들의 ‘재단’, 유리한 인민들의 ‘유단’, 숙천지역처럼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 ‘폐사군단’ 등 ‘단’이라는 조직을 묶어 항쟁한 점은 특징으로 들 수 있으며 도시빈민들의 투쟁도 본격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19세기 사회 경제적 배경과 민의 대응"
이 시기는 조선사회가 농업, 수공업, 상업, 공업등 모든 경제 분야에서 서서히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발전하면서, 그 사회를 지탱해 왔던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는 시기이다.
18세기부터 발달된 상품화폐경제가 더욱 확대되고 이러한 성장은 농업내부의 생산 관계를 사회체제를 변혁시키는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발전으로 인해 조선 봉건사회는 전면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토지 집중화 현상은 지주와 전호 농민의 대립을 극대화 시켰고 토지와 생산자 대중에 대한 봉건 국가의 지배와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세도정치가 출현하여 지배계급내의 갈등과 대립이 더욱 심화되고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봉건권력의 도덕적 기반마저도 붕괴시키게 된다.
세도가들은 매관매직을 통해 부를 축척하고 정권을 잡은 자들은 관직의 임기를 자주 교체하고 이러한 관직의 불안정한 상태는 관리들에 의한 탐학행위를 더욱 조장하여 농민수탈이 더욱 가중되게 한다. 또한 상품경제는 지배층의 사치를 자극하여 국가 재정의 지출을 증대시켰고 이렇게 증가한 지출을 매꾸기 위한 대동미의 중앙 상납분 증가, 환곡 총액 증가, 지방행정에서의 각종 잡세부과, 환곡, 고리대 등의 실시는 봉건 권력의 농민수탈을 강화시킨다. 이는 19세기 만성적인 전정, 군정, 환정이라는 삼정 수탈의 한 계기로 이어진다.
18세기 삼정문란은 19세기에 와서 극대화 되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쌓여만 가는 봉건말기의 모순에 대해 1800년의 인동 농민항쟁, 1808년 북청과 서천 농민항쟁, 1811년 해주․황주 농민항쟁, 1862년 전국적으로 발생한 농민항쟁에서 그 정점을 이루게 된다.
19세기의 농민항쟁 성격을 잘 살펴볼 수 있는 평안도 농민항쟁은 조선왕조 지배층에 의해 자행된 ‘서북민 차별 정책’으로 평안도 지역이 다른 지방에 비해 상품화폐관계와 자본주의적 관계가 현저하게 발전하여 무역 상인과 광산업, 금속 가공업의 기업주가 출현하였고, 이들이 봉건국가의 무역의 독점과 산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억압하는데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된 점등 평안도 지역의 특수한 사정이 지적된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농민과 더불어 토호, 상인, 향리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처지와 이해관계가 같지 않은 각 계층들이 세도 정권에 반대하는 항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평안도 농민전쟁에서 그 특징은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면밀한 계획과 장기간의 준비에 기초하여 목적 지향성있게 조직․전개된 항쟁으로서 자연발생적인 항쟁과는 구별된다는 점, 농민들이 봉건제도의 일부 변경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현존 봉건정부의 타도와 새로운 정권의 수립을 지향한 점등이라 할 수 있겠다.
19세기의 농민항쟁은 봉건사회에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기에 아래로부터의 변혁의 길을 전망케하는 것임과 동시에 농민층이 모순을 해결하면서 스스로를 변혁주체 세력으로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상징적인 도적의 모습들을 살펴보고 그러한 도적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와 도적은 실제로 생존권 위협에 대한 저항과 봉건지배 질서를 거부하는 민중저항의 한 형태로써 우리는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속에서 우리가 중요시 보아야 할 것은 농민의 저항이 벽서․거화 등의 소극적이고 비조직적, 산발적인 모습에서 도적이나 농민항쟁등 점차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모습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억압받는 현실을 양반이나 관리의 처벌등으로 풀려했던 초기의 모습에서 점차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들이 봉건 질서의
모순임을 깨닫게 되면서 봉건지배 질서의 해체를 위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민중의 성장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의식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지배층에 의해 강요되어진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맹종에 거부하고 17세기 말부터는 민중구원사상으로 등장한 미륵신앙을 신봉하면서 살주계(殺主契), 검계(劍契) 등을 조직하여 봉건통치에 저항하였고, 19세기에 들어오면 각종 예언이나 도참 등의 형식을 취한 정감록(鄭鑑錄) 사상에 영향을 받아 조선왕조를 부정, 나아가서는 동학과 천주교에 귀의하여 봉건적 지배질서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여 더 이상 지배이데올로기에 매몰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사유세계를 형성하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도적의 모습은 이후 본격적인 농민항쟁과 의병의 전단계로 우리는 우리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적
<농민항쟁’이라 했을 때 도적에 적극적으로 포함되었던 유리된 농민이나 천민, 소상인 등의 민중들은 농민항쟁의 기본축이었으며 그들은 바로 시대 변혁의 축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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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적의 사회사를 통해 도적의 올바른 모습을 찾고 민중의 성장과 자리매김을 어느정도 할 수 있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역사의 주인이 바로 민중이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해 볼 수 있지 않았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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