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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정전의 신위" 선왕 중에 특별한 공(功)과 덕(德)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의 신위"현재 종묘에 모셔진 신위는 19실에 19대의 왕들과 왕비들이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선왕 중에 특별한 공(功)과 덕(德)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에 봉안된 신주들은 문조(文祖)를 제외하면 전부 실제로 국왕으로 즉위하여 활동하였던 인물들이다. 다만 문조의 경우 헌종의 아버지로 추존되어 종묘에 봉안되었는데, 친진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왕조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종묘에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대한제국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중국에 대하여 제후국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예제의 원칙상 5묘제, 즉 5대의 신주[태조와 현왕의 4대 조상]만이 종묘에 봉안해야만 했다. 그런데 위 표에서 보듯이 현재의 종묘에는 19대의 신주가 모셔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선왕 중에 특별한 공(功.. 더보기
태종 이방원, 이방원" 조선 제3대 왕(재위 1400∼1418).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구세력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도전 등을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즉위 후, 의정부(議政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최고의 법사(法司)인 의금부(義禁府)도 설치하였다. 자 유덕(遺德). 휘 방원(芳遠). 태조의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 더보기
정도전 鄭道傳" 정도전 鄭道傳"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민본사상"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 더보기
유성룡柳成龍 유성룡柳成龍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유운룡(1539-1601)이다. 부친인 유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ㆍ황해도관찰사ㆍ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자는 이견(而見), 호가 서애(西涯)로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풍산 류씨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받들어진다. 본관.. 더보기
황충 황충 남양(南陽, 지금의 허난성 난 양 사람으로 자는 한승(漢升)이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武將)으로 본래 유표(劉表; 142~208)의 부하로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는데, 후에 유비(劉備)에게 투항했다. 더불어 유비를 도와 익주(益州)의 유장(劉璋; ?~219)을 공격하기도 했다. 219년 황충은 정군산(定軍山)에서 조조(曹操)의 부하인 하후연(夏侯淵)을 참수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었고, 그 후에 후장군(後將軍), 관내후(關內侯)로 봉해졌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조운(趙雲)과 더불어 촉한의 ‘오호장군(五虎將軍)’으로 일컬어진다. 유비의 군대로 편입되다형주(荊州,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자사 유표(劉表, 142~208)의 휘하에서 중랑장(中郎將)을 맡아, 유표의 조.. 더보기
운장(雲長) 후한 말의 인물. 유비 휘하의 무장. 자는 운장(雲長), 본래 자는 장생(長生). 하동군 해현 사람. 삼국시대를 언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중 하나로, 지금도 역대 왕조를 비롯하여 민간에서도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인물. 그의 명성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남다른 무용, 충의와 의리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역대 후대 왕조의 제왕들이 공자의 문묘와 함께 무묘에 그의 신위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기렸으며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될 정도로 깊은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세간에는 삼계해마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三界解魔大帝神位 願天尊關聖帝君), 통칭 관성제군(關聖帝君)로 추존되었다 정사에 서술된 관우의 초창기 행적은 매우 부실한 편이다. 정사 관우전에 따르면 망명하여 탁군.. 더보기
장비 [張飛 ] 삼국 시대 촉나라 탁군(涿郡) 사람. 자는 ‘익덕(益德)’으로 《삼국지연의》에는 ‘익덕(翼德)’으로 표기되어 있다. 시호는 환후(桓侯)다. 후한 말기에 관우(關羽)와 함께 유비(劉備)를 섬겼다. 헌제(獻帝) 건안(建安) 중에 조조(曹操)와 형주(荊州)를 다투다가 유비가 장판(長坂)에서 패하자 20명의 기병(騎兵)으로 추격병을 막으니 조조의 군사가 감히 접근을 못했다. 유비가 익주(益州)를 공격할 때 제갈량(諸葛亮)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 군현(郡縣)을 점령하고 파서태수(巴西太守)가 되었다. 위나라의 장합(張郃)이 파서를 함락시키자 가서 격파했다.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옮겨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다. 용맹스럽고 무예가 뛰어나 관우와 함께 ‘만인적(萬人敵)’으로 불렸다. 형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고 오.. 더보기
장비 張飛 .1 장비 張飛 .1탁주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장비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하고 서화도 뛰어났다. 청나라 시대의 역대화기록에 따르면 장비는 줘저우인(탁주 사람)으로 미인도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유비가 처음 거병할 때부터 관우와 함께 그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기록이 매우 부실하다. 장비의 출신 성분을 두고도 말이 많은데 전부 추측일 뿐 검증된 바가 없다. 참고로 연의와 다르게 정사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여하튼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장비전에 따르면 젊어서부터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가 향리에서 사람의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