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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운장(雲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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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의 인물. 유비 휘하의 무장. 는 운장(雲長), 본래 자는 장생(長生). 하동군 해현 사람.

삼국시대를 언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중 하나로, 지금도 역대 왕조를 비롯하여 민간에서도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인물. 그의 명성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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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남다른 무용, 충의와 의리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역대 후대 왕조의 제왕들이 공자의 문묘와 함께 무묘에 그의 신위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기렸으며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될 정도로 깊은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세간에는 삼계해마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三界解魔大帝神位 願天尊關聖帝君), 통칭 관성제군(關聖帝君)로 추존되었다


정사에 서술된 관우의 초창기 행적은 매우 부실한 편이다.

정사 관우전에 따르면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유비가 향리에서 사람의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정사 장비전에 따르면 젊어서부터 관우와 장비는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고 한다.

관우의 초창기 군사적인 기록 역시 부실하긴 마찬가지이다. 조조가 그를 얻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였고, 유비가 기반없이 방랑하던 시절, 동탁토벌전, 공손찬 휘하 서주에 있었을 때부터 유비 일파는 장수에 대한 고평가를 공공연히 들었으니 관우에게는 무척이나 화려한 전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촉한의 개국공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들의 초창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확인이 불가하다. 

다만 사서상으로도 몇가지 짐작가는 사항들은 있는데 예컨데 동탁 토벌전에서 조조군이 서영군에게 궤멸당했을 때 소수의 병사들만 조조 휘하에 남았는데 서영이 하루종일 싸워서 조조군을 끝내 절멸시키지 못하고 산조를 공격하기 어려우리라 여겨 군사를 물린 행적이 있다. 이때 조조군 휘하에는 유비 일행이 들어가서 종군하고 있었는데 유비 일파는 끝까지 여기서 살아남아 이후 고당현을 거쳐 유비는 평원상이 된다. 또 공손찬군에서도 유비 일행이 수차례 공을 세운 것이 확인되며 조조에 의탁하다가 다시 소패에 들어가 흩어진 병사를 모으고 있을 때 여포군의 명장인 장료고순이 공격하여 유비군이 3월부터 9월까지 반년간 소수의 병력으로 버틴 행적들이 있다. 당시 유비 휘하에 있는 장수라곤 관우, 장비에 간옹이 있고, 공손찬군에 있을 당시 조운, 전예가 참여했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수준이었으므로 유비, 관우, 장비 삼인방이 각지를 돌아다니는 상황에서도 인상깊은 활약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산시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관우는 폭리를 탐한 소금 상인을 죽여 관리에 의해 쫓겨나 유주로 달아났다고 한다.

  • 관우가 어떤 마을에서 숨어있던 가운데 성문을 지키던 보초병들에게 들킬 위험에 처했다.

    • 그러자 어떤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서는 관우에게 옆에 있는 연못에서 세수를 하라고 권했다. 관우가 노인의 권고에 응했더니 그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그러자 어떤 할머니가 갑자기 관우의 얼굴에 흰 천을 씌우더니 이를 냅다 두들겼다(!) 그 때문에 관우는 코피가 터져 그 피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이때 경비병들이 관우의 얼굴을 보더니 "이 사람은 우리가 찾는 인물이 아니네~"라고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어 관우라는 이름을 자칭했다.

  • 관우가 어느 도성의 관문을 지나가야 할 때였다. 그 때 경비병들이 관우의 체격을 보고 의심하여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 때 관우는 급한 김에 자신이 지나려고 하는 관문을 보고 "성은 관(關)이오."라고 대답했다. 이후 시간을 끌던 가운데 관문 위를 날던 새에서 깃털이 떨어지기에 "이름은 우(羽)요."라고 둘러댔다. 그가 하늘을 보자 긴 구름이 둥둥 떠다니기에 "자는 운장(雲長)이오."라고 대답했다.

관우가 고향을 떠난 뒤 호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중조산에 올라 약초를 캐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호씨는 마을에서 이름난 명의가 되었고, 장성한 두 아들이 고향을 떠나 관우와 재회할 때도 호씨는 중조산에 남았다.

산시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당시 소금의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소금은 주요 수입원이자 세금원이었기 때문에, 염호는 마을 제일의 재산이었다. 탐관오리의 횡포를 막고 소금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결과 의리가 중요했고, 이러한 환경이 관우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 19세의 관우가 악덕 지주를 죽이자 관리들은 본보기로 삼기 위해 관씨 성을 가진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관씨 성 사람들은 살기위해 하나 둘 마을을 떠났지만 힘든 피난길을 가기에 관우 부모는 너무 연로했다. 결국 아들에게 짐이 될까 두려운 노부부는 집 앞마당에 있던 우물에 몸을 던졌다. 이후 관우 사당이 조성되며 관우를 향한 마음은 그 부모에게까지 닿았고 당시 우물이 있던 자리에 탑이 세워져서 현존하고 있다.

송락의 균량우필에 관우 할아버지의 묘비에 대한 기문인 관후조묘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한다. 강희제 17년(1678년)에 관우의 고향 해주 상평촌의 선비 우창(于昌)이란 사람이 탑묘(塔廟)에서 글을 읽었는데 그 묘는 관후(관우)가 살던 옛집이었다. 그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관후가 비석을 바꿔 세우라(易碑)라고 쓴 커다란 글자 2개를 주었다. 놀라서 깨어보니 우물을 파단 사람이 커다란 벽돌을 주워 깨뜨렸는데 벽돌 위에 글자가 있었다. 우창이 급히 주워 모아 판독하니 바로 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양대의 이름과 자, 생몰년의 간지(干支)가 대충 씌어 있었기에 산을 두루 헤매어 무덤을 찾아냈다. 그래서 급히 해주 태수 왕주단(王朱旦)에게 알리자 주단이 관후의 조부 묘비기를 지었는데, 기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후(관우)의 조부는 석반공(石磐公)으로 이름은 심(審), 자는 문지(問之)이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2년(90년) 경인생(庚寅生)이고 해주 상평촌 보지리(寶池里)에 살았다. 공은 충목(沖穆, 온화하고 씩씩함)하고 도(道)를 좋아하였다. 《주역(周易)》과 《춘추(春秋)》로 아들을 가르쳤다. 환제(桓帝) 영수(永壽) 3년 정유(157년)에 죽으니 향년은 68세이다. 아들의 이름은 의(毅), 자는 도원(道遠)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고 환제 연희(延熹) 3년 경자(160년) 6월 24일에 후(侯, 관우)를 낳았다. 후는 커서 호씨(胡氏)에게 장가들고 영제(靈帝) 광화(光和) 원년 무오(178년) 5월 13일에 아들 관평을 낳았다.


서주에서

초기기록이나 계한보신찬 등에서 나오듯 유비를 따라 그 기세가 호랑이 같이 장렬하여 많은공을 세웠다던 관우, 장비는 어느새 주변으로부터 만인지적의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유비는 서주를 여포에게 빼앗기고 조조에 의탁해 예주목이 되었는데 어떤사람(정욱전에 보면 정욱으로 나온다.)이 유비는 영웅이므로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곽가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곽가는 유비를 현명한 이를 해쳤다 할 것이므로 죽이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뒤 이은 곽가전 부자에 따르면 곽가는 유비 일행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유비는 웅재(雄才)가 있고 뭇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그를 위하여 사력을 다합니다. 저 곽가가 보건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며 그가 꾀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길 ‘하루에 적을 놓아주었다가 수세(數世)에 걸쳐 우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의당 일찍이 조치하셔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배송지는 위서와 부자가 다르다 하였는데 아마도 곽가가 유비를 몇번 응대하여 생각이 바뀐것일수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 일찍부터 관우와 장비는 만인지적으로 불리었다. 

이후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소패로 돌아가 여포의 장수 장료고순과의 전쟁을 열세인 상황에서 반년쯤 진행하다가 조조의 도움을 받아 서주에서 여포를 잡아 죽일수 있었다. 관우도 이 전쟁에서 이들을 상대로 싸웠는데 이 때 일화로 명제기 주석 헌제전, 관우전 주석 촉기&위씨춘추에 두씨 일화가 있다. 여포의 휘하 장수 진의록이 여포의 사자로 원술에게 갔을 때, 한나라 종실의 여자를 배필로 얻었다. 진의록의 전처 두씨는 하비에 남았다. 조조가 유비와 함께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하면서 관우도 종군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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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가 조조에게 여쭈길, 여포가 진의록을 시켜 구원을 청했다며 그의 처를 취하여 아내로 맞겠다고 하니 조조가 이를 허락했다. 여포가 포위되었을 때, 관우는 두씨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조조에게 여러 차례 청하자, 조조는 두씨가 얼마나 미인인지 관심이 생겼다. 여포가 막 격파되려 할 때 또 여러 번 청하자 조조는 그녀가 남다른 미색이리라 의심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맞아들여 확인했다. 여포 토벌 후, 두씨가 미인임을 알게 된 조조는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녀를 머물게 하니 관우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화양국지의 기록에서는 관우가 두씨를 청하면서 자기 처가 자식이 없다고 덧붙인다. 즉 당시 관우는 아내가 있으면서 자식을 얻으려고 두씨를 원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화양국지 기록은 여포가 포위된 곳이 복양이고 여포가 진의록을 보내 구원을 요청한 사람도 장양이라고 잘못 적었고 다른 기록에서는 다 아내로 원한다고 적어 배송지가 아예 인용하지 않았다. 

이해 대해 삼국지집해 관우전에서 청나라 학자 반미(潘眉)가 '화양국지에선 관우가 처가 자식이 없다고 하는게 다르다'라고 언급한 것이 나오나 이는 위에 나온 관우조묘호기와 모순되는데 거기에는 관평은 178년생이므로 이미 관우에겐 자식이 있었던게 된다. 애시당초 배송지도 주석을 추가하면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집어넣지 않은듯 하다.

촉기에 따르면 당초 유비가 허도에 있을 때 조조와 함께 사냥한 적이 있는데, 사냥 중에 무리가 흩어지자 관우는 유비에게 조조를 죽이도록 권했으나 유비가 따르지 않았다. 이때 유비는 동승과 함께 헌제의 밀조를 받아 조조를 암살하려 하고 있었는데 관우의 발언은 이 계획이 배경이 되었던것 같다. 

이후 원술을 토벌하러 동쪽으로 떠난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갔다. 200년, 조조가 동쪽을 치자 유비는 대패해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조조는 이전부터 관우를 매우 인상깊게 보았는지 그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관도대

관우는 조조 휘하에 있을때 장료서황 등과 친했는데 처음에 조조는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다고 생각해 장료에게 의중을 묻게 했다.

당초 조조는 관우의 사람됨을 크게 여겼으나 그의 심신(心神)에 오래 머물 뜻이 없음을 살피고는 장료에게 말했다.

관우는 관도대전에서 선봉장의 역할을 맡는다. 순유전에 따르면 순유의 견해를 받아들인 조조는 백마를 포기하고 회군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가 연진에서 황하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노리는 척했다. 순유는 치중대를 이끌고 황하를 돌아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원소가 군사를 나누어 연진으로 출격시키자 조조는 경기병을 파견하여 백마를 습격하고 안량을 죽였는데 원소가 대장 안량을 보내 동군태수 유연을 백마에서 공격하자, 조조는 장료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 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들 중 관우를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조가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


관우가 안량을 죽이게 되자 조조는 관우가 필시 떠날 것임을 알고 포상을 더욱 무겁게 베풀었다. 관우는 하사받은 것을 모두 봉해 놓고 작별을 고하는 서신을 올린 후 원소군에 있던 유비에게로 달아났다. 좌우(左右)에서 이를 추격하려 하자 조조가 말했다.

삼고초려부터 남군공방전까지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를 따라 유표에게로 나아갔다. 제갈량전에 따르면 유비가 삼고초려 이후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

208년,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니, 유비는 번성으로부터 장차 남쪽으로 가 장강을 건너려 하며, 따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타고 가게 해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선주전에 따르면 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여 만에 이르고 치중(輜重, 짐수레)이 수천 량(兩)으로 하루에 10여 리 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파견해 배 수백 척에 타게 하고, 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조조가 추격하여 당양 장판에 이르렀고, 유비는 한진으로 비스듬히 나아가다 때마침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구에 도착했다.

촉기에 따르면 이때 하구(夏口)에 있으며 강가를 전전함에 이르자 관우가 분개하며 말했다.

적벽대전 당시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비는 번구에 주둔하며 주유를 혼자 만나게 되었는데 주유는 자신의 일이 바쁘다며 유비가 자기네 진영으로 알아서 오라고 통보해버린다. 이에 유비는 관우와 장비에게 동맹으로서 가봐야 동맹의 뜻이 맞다고 말하고 주유의 진형으로 떠났다. 아마도 이 둘에게 이런 대접에 납득이 필요했다는 간접증거일 것이다. 주유에게 겨우 3만명밖에 없다는 얘기를 듣고 실망한 유비는 이후 주유의 태도에 심히 부끄러움과 기쁨을 느꼈다. 

강표전에선 여기에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의 계책으로 삼았다는 말을 집어넣었으나 손성은 유비가 이미 도주했는데 훗날의 계책을 품을 마음이 없을것이라며 이가 오인들이 아름답게 꾸미는 말이라고 하였는데 배송지는 손성의 이 말을 덧붙였다.

자치통감 역시 유비가 주유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관망했다는 내용은 제외하였다. 산양공재기 등에는 이후 유비가 조조의 군세를 격파하면서 진군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관우 역시 유비 휘하에서 참전했을것이다.

이후 선주전을 보면 유비군과 주유군은 조조를 뭍으로 이어가며 추격하였고 마침내 조인이 지키는 남군을 포위하였다. 이를 남군 공방전이라고 하는데 이통전에 따르면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놓았다. 조인이 도주하면 그냥 유비군과 주유군은 남군을 접수하면 그만이니 굳이 조인의 퇴각로를 끊어놓을 목적은 아니었을테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조인의 구원군을 막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는 다른 위나라 장수들의 전에 보인다. 서황전, 문빙전, 악진전 등 각각의 전에 따르면 서황은 또한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쳤다. 문빙은 악진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를 격퇴하고 전공을 올려 연수정후에 올랐고, 봉역장군의 관위가 더하여졌고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수에서 공격, 그 배를 형성에서 불태웠다. 악진은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남군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 두보, 정양장 양대를 모두 대파했다. 기록을 보면 이들 장수들은 관우뿐만 아니라 유비와 주유의 포위망 자체를 공격하여 와해시키려는 목적이 있음을 할 수 있다. 관우는 지속적으로 이들에게 얻어맞아가면서 북쪽에서 이들의 본디 목적인 남군포위망 와해를 막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기를 1년, 결국 조인은 이통의 구원을 받아 도주한다. 이통전에는 이통이 관우를 공격해서 조인을 구출했다고 나오는데 이건 국내 인터넷상에 퍼진 사서 번역본의 오류이다. 원문에서는 이통이 공격한 것을 그것(之)라고 말할 뿐, 이게 관우라고 직접 적어놓지는 않았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이통이 공격한 것을 관우가 아니라 포위(圍)라고 적혀있다. 어쨌거나 이통 역시 조인을 구출했을뿐 포위망을 와해시키는데는 실패했고 마침내 남군공방전은 유비-주유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유비는 강남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하니 관우를 양양태수 탕구장군으로 삼아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전 주석 헌제춘추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는 손유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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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니대치부터 유비 입촉까지

선주전에 따르면 212년, 유비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조가 오를 정벌하니 오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진이 청니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선주전에서만 언급되는 것이 청니 대치인데, 여기서는 단지 유비가 관우의 대치 상황, 승패의 결과 예측만 말했을 뿐, 직접적으로 청니에서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악진전, 문빙전에서는 악진(+문빙)이 관우를 격파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의 시기가 209년 남군 공방전 때 기록인지, 아니면 212년 청니 대치 때 기록인지 정확하게 적혀있지 않아서 혼란을 준다. 노필의 삼국지집해에서는 이를 청니 대치 시기로 보았고, 중국군사통사(1998년 출판)에서는 이를 남군 공방전 시기로 보았다. 중국어 위키백과 등지에선 남군공방전의 시기로 보는 듯 하며 본 위키도 이쪽 기록에 따른다.

한편 이때 관우는 의외의 인물을 받아들에게 되는데 바로 양의 였다. 그는 부군(傅群)을 저버리고 양양태수였던 관우에게 나아갔는데 관우가 명하여 공조(功曹)로 삼고, 양의를 사자로 보내 서쪽으로 유비에게 나아가게 했다는 기록이 양의전에 있다.

유비의 입촉당시 유비가 서쪽으로 익주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로 임명했다. 이때 계한보신찬 주석에 따르면 유비는 촉으로 들어올 때, 반준을 형주치중(荊州治中)으로 임명하여 남아 지키면서 주의 행정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역시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선주전에 따르면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 강주, 강양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승심이 강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선주전에서만 언급되는 것이 청니 대치인데, 여기서는 단지 유비가 관우의 대치 상황, 승패의 결과 예측만 말했을 뿐, 직접적으로 청니에서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악진전, 문빙전에서는 악진(+문빙)이 관우를 격파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의 시기가 209년 남군 공방전 때 기록인지, 아니면 212년 청니 대치 때 기록인지 정확하게 적혀있지 않아서 혼란을 준다. 노필의 삼국지집해에서는 이를 청니 대치 시기로 보았고, 중국군사통사(1998년 출판)에서는 이를 남군 공방전 시기로 보았다. 중국어 위키백과 등지에선 남군공방전의 시기로 보는 듯 하며 본 위키도 이쪽 기록에 따른다.

한편 이때 관우는 의외의 인물을 받아들에게 되는데 바로 양의 였다. 그는 부군(傅群)을 저버리고 양양태수였던 관우에게 나아갔는데 관우가 명하여 공조(功曹)로 삼고, 양의를 사자로 보내 서쪽으로 유비에게 나아가게 했다는 기록이 양의전에 있다.

유비의 입촉당시 유비가 서쪽으로 익주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로 임명했다. 이때 계한보신찬 주석에 따르면 유비는 촉으로 들어올 때, 반준을 형주치중(荊州治中)으로 임명하여 남아 지키면서 주의 행정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역시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선주전에 따르면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 강주, 강양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승심이 강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다시 저에게 5백 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 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 수경 역주에서 이르길 현에 관우뢰(關羽濑)가 있으니, 소위 관후탄(關侯灘)으로, 남으로 감녕(甘甯)의 옛 보루와 마주했다. 관우가 밤에 감녕이 배치하는 소리를 듣고 이르길 "(이것은) 흥패(興霸)의 소리구나."라고 한 이후 마침내 건너지 못했다.

노숙전에 따르면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여 각각 병마를 백보 밖으로 주둔시키고, 단지 장군들만이 단도를 갖고 함께 만났는데 주석 오서에 따르면 노숙이 관우와 회담하려고 하던 때, 제장은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주의를 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노숙이 답해 말했다.

오늘과 같은 사태에 있어서는 서로 뱃속을 드러내 보이고 대화치 않으면 아니 되오. 유비는 국사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시비를 바로 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또한 관우가 더불어 명령에 거스를 수 있겠소!

그리고는 관우를 만나러 나갔다.

노숙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관우는 주군인 유비가 오림에서 갑옷을 벗지 않으며 열심히 싸워 얻은 땅을 왜 강탈하느냐는 관우의 항의에 그 자리에서 자기 주장을 늘어놓아 관우가 대답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즉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인데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고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라는 요지였다. 

이는 관우의 질문인 "우리도 형주에서 같이 위군이랑 싸웠는데 형주에 지분이 있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피땀 흘려 얻은 땅(특히 유비네가 먹은 형남 4군)은 왜 침범한것인데?"의 대답은 되지 못하며 오히려 '형주는 모두 오나라땅'이라는 억지 주장에 가까웠다. 이는 노숙 문서 익양대치 부분에 잘 나와있다.

노숙이 이렇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한 사람이 말했다.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 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노숙은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 질타했는데 언사와 안색이 매우 절절했다. 관우는 칼을 잡고 일어나서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관우는 이 사람을 눈빛으로 떠나가도록 했다.


선주전에 따르면 마침 조조가 한중으로 들어갔다. 이 해, 조공이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유비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오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이후 217년 노숙이 죽고 여몽이 이 지역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는데 여몽전에 따르면 당초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되어 처음으로 육구에 이르러서,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관우는 병마를 조련시키면서 때를 엿보고 있었으며 그 동안 오나라는 익양대치 후에도 계속해서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양국의 결속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노숙이 죽자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듣고 서주를 공격하는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라고 판단 하여, 상대적으로 형주를 공략하기 쉬울거라 여기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고 관우는 이를 방비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 병력을 다수 배치해놓았으며 강릉성을 새로 수축하고 둔영과 관측소를 준비해 놓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한다. 이렇게 관우가 대비를 철저히 하니 당초 예상과 달리 여몽은 관우의 방비를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어 고심하게 된다.

이때 손권은 관우에게 관우의 딸 과 자신의 아들의 혼담을 주선하지만 관우는 유비와 손부인과의 일과 익양대치로 감정이 상해있는 상태라 사신을 상대로 모욕적인 언사를 날리고 단박에 거절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한 일이 있었다. 이전부터 계속 형주를 노리던 오나라였기에 익양대치로 종결시킨 노숙도 없는 마당에 오나라 내부에서도 관우를 공격하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218년, 경기위황김의가 허도에서 난을 일으켜 전자와 조정을 장악하고 마침내 유비를 불러 조조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그를 치려고 했다. 이때 관우가 강성했으므로 조조는 업에 머물게 왕필에게 허도를 지키게 하였는데 이들이 왕필을 죽이고 관우를 부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219년, 유비가 한중공방전의 승리로 한중왕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 가절월로 삼았다.

황충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 마초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이제 곧바로 동렬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장비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들으면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시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비시를 보내 관우를 전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관우는 황충이 후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해서 말했다.

대장부는 평생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제수되었던 관직을 거부하였다.
비시가 말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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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업을 세우는 자가 임용하는 인물에게 하나의 기준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전한의 고조와 어릴 적부터 친한 교분이 있었고, 진평(陳平)과 한신(韓信)은 초나라에서 도망쳐 뒤에 한나라에 도착했지만, 관직의 순서를 정하는 논의에서는 한신을 가장 높은 지위에 있게 하였고, 이 때문에 소하와 조참이 원한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왕(漢王)은 일시적인 공로에 근거하여 한승(漢升:황충)을 높은 신분이 되게 했지만, 마음속의 평가가 어찌 군후(君候)와 동등하겠습니까! 

게다가 한중왕과 당신을 비유컨대 주군과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생각해 보면, 관호(官號)의 높고 낮음이나 작위와 봉록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그를 마음으로써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일개의 관리로써 명령을 받아 이를 시행하는 사람이지만, 만일 당신이 임명을 받지 않아 곧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 때문에 이와 같은 거동을 애석해 할 것이며, 아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는 크게 깨닫고 즉시 임명을 받았다.

 화하를 진동시키다

한편, 219년 촉군의 연승으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조인은 관우를 토벌할 목적으로 형주 번성에 진수하고 있었으나 218년 10월 남양인들이 요역에 고통스러워하자 후음이 태수 동리곤을 붙잡고 관원, 백성들과 더불어 모반하고 관우와 연합했다. 이후 219년 봄 정월,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했다. 이는 무제기의 기록인데 이에 관우는 후음과 연계하여 북진을 하여 이 일은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손오와의 동맹이 수복되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며 촉의 기세가 치솟는 가운데, 조조 최후의 대규모 원정이었던 한중전 패배로 위왕 조조는 그 권위가 추락했다. 각지에서 손랑, 허유 등의 반란이 일어나 중원에 혼란이 일자 관우는 그 틈에 형주의 군세를 이끌고 양양, 번성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한다. 이에 대해선 조인이 먼저 관우를 치기 위해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위의 선제공격을 막기 위해 북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어쨌거나 조조는 급히 오대장 중 한 명인 우금에게 최정예의 7군을 주어 구원토록 하고 서황을 완에 주둔시켰다.

당시의 전투에서 위군과 우금, 방덕은 번성에서 북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주둔했으며 방덕전에 따르면 이렇게 번성 북쪽으로 치고 올라간 관우와 방덕은 직접 교전하여 관우를 노리고 화살을 날려 그 이마에 적중시켰으나 관우는 죽지 않았다. 그 무렵,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으니, 관우의 군중에서는 그를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모두 두려워하였다. 당시 번성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방덕의 형(방유)이 한중에 있었으므로 이를 의심하였다. 이른 의심에 방덕은 이렇게 거듭 말하면서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나는 국은을 입은 몸이니, 죽음으로 의를 다하겠소. 내가 직접 나서서 관우를 치고자 생각하고 있소. 올해 안에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관우의 손에 죽겠소

온회전에는 아예 온회가 관우를 경계하면서 지금 강물은 불어나는데 조자효(조인)가 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우는 용맹하여 전쟁을 잘 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위험하다며 관우는 용맹하고 전쟁을 잘하므로 이 기세를 타고 들어오면 근심이 될 것이라고 홍수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관우가 수몰로 적을 격파하는 것을 계획하고 치고 올라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우금전에 따르면 그 말대로 이해 가을, 큰 장맛비가 내렸다. 열흘동안 비가 내렸고 한수(漢水)가 범람해 평지에 물이 차올라 수 장(丈)에 이르렀고 우금 등의 칠군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고, 이미 군사를 빼고 배로 대기하던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투항한다. 수해를 피한 관우는 배 에 타서 허우적대거나 제방으로 올라간 위군을 모조리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때 형주자사 호수와 남향태수 부방도 관우에게 항복하였다. 살아남은 3만 군사 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여기서 남향군은 본디 형주 남양군의 일부인데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접수하면서 남양의 서쪽을 갈라 새로 만든 군이다. 서쪽으로는 무관상용이 있고 동쪽으로는 얼마전 후음이 진압된 이 있다. 남향태수가 잡혔다는 것은 이 지역을 이끌던 행정관과 그 휘하 병력들이 관우에게 사로잡혀 해당 지역이 공백상태에 빠졌다는 얘기가 된다. 즉 조조 치하 형주는 얼마전에 있던 반란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남쪽의 관우 말고도 서쪽의 상용에서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괜시리 관우가 유봉과 맹달에게 번성으로 지원을 오라고 한 것이 아닌것이다.

방덕전 기록에 따르면 관우는 물을 피해 제방에 올라간 방덕을 비롯한 여러 위군들을 사방에서 큰배로 화살을 쏘아 모조리 쏴 공격하고 일출때부터 아침을 넘어 정오가 지날때까지 온종일 격렬하고 치열하게 방덕의 군세와 싸웠다. 방덕은 갑주를 몸에 두르고 활을 잡고 나섰으니, 쏘는 화살마다 빚나가는 것이 없었다할 정도로 손수 활을 쏘아 분전했지만 결국 방덕이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으며 결국 방덕이 장수 한명과 오장 두명을 거느리고 조인에게 돌아갈 목적으로 탄 작은 배가 뒤집혀 그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방덕은 항복하려는 동형동초 등의 목을 베고 분전했으나 결국 사로잡히게 된다. 

관우는 방덕의 형제가 한중에 있다며 자신의 장수가 될 것을 정중하게 권유했지만, 방덕은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는다.

위왕께는 정병 백만이 있으며, 위의를 천하에 떨치고 계신다. 네 유비 따위는 범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대적이나 가능할 줄 아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귀신이 될 생각이니, 적의 장수 따위가 되지는 않을 셈이다!

방덕은 이렇게 욕을 퍼부었고 투항을 거부하다 처형된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7군이 주둔한 번성 북쪽은 면수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 남양군 등현 북서쪽 인근이다. 즉 관우는 배후에 있는 번성의 공격을 차단하면서 7군과 육전으로 홍수가 날 시기까지 격렬히 싸움을 벌이면서 잡아두다가 홍수가 나자 싸우고 있던 육군을 위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잡아두며 은근히 빼고 배가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북쪽 육지가 물에 잠긴 타이밍에 면수에 있던 수군을 보내 홍수를 피하지 못한 위군에게 재차 공격을 가했다는 의미가 된다. 전술적 운용에서 관우가 천시를 이용해 조인, 우금, 방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편 이에 맞추어 허도 인근 예주 양국, 예주 영천군 겹현, 낙양 인근 사례 홍농군 육혼현의 군도, 반 조조세력들이 혹은 멀리서 관우의 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다. 또 이 틈을 타 조조의 본거지인 성에선 위풍이 많은 사람이 연루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비에게 진압되었다. 위풍의 난은 사료가 없어서 어떤 성격의 반란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관우 진격 이후 혼란한 틈을 탄 공격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또 만총전에 따르면 관우가 파견한 별장(別將)이 이미 겹 아래에 있어, 허도로부터 이남의 백성이 어수선했다는 것이라고 한다. 

금석문인 위광해장군여군비(魏橫海將軍呂君碑)에서 이르길 관우가 변방을 흔들며, 유씨의 백성을 공경하였고, 홍수가 퍼지고 넘쳐 번성을 띄우고 가라앉게 해, 평원의 모든 병사는 겉으론 깔보나 몰래 내통했고, 맹장의 날랜 기병들은 물에 빠져 잠기거나 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재앙을 일으켜, 악한 이들이 들끓어, 어떤 이는 성을 유지하며 배반했고, 어떤 이는 무리를 거느리고 깃발을 등에 지며, 스스로 곧 문에 대적했다. 중인(中人) 이하는, 모두 다른 마음이 생겼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관우는 면수인근에서 여상이 지키는 양양과 조인, 만총이 지키는 번성을 수륙양면으로 모두 포위하였다. 후일 오나라에서 양양까지 당도조차 못하고 후퇴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완벽한 적기로 인식했을지도. 번성은 5,6장 가량 수몰되었는데 이건 무려 15미터에 가까운 높이다. 구원을 보낸 최정예 병력은 폭우로 인해 수몰되었고, 총사령관은 사로잡혔으며 그의 무리들은 수도 근방을 위협했다. 당시 관우의 이름은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관우에게는 방덕에서 이마를 화살에 적중당한 일화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일찍이 관우는 화살에 맞아 왼팔을 관통 당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비록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몹시 흐리며 비오는 날이면 늘 뼈가 아팠다. 의원이 말했다.

화살촉에 독이 있어 이 독이 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응당 팔을 갈라 상처를 내고 뼈를 깎아 내 독을 제거해야 하니 그 연후에야 이 통증이 없어질 것입니다.

관우는 이내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르게 했다. 이때 관우는 때마침 제장들을 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함께 하고 있었는데, 팔에서 피가 흘러 대야에 가득 찼으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잔을 끌어당겨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위나라의 반격

당시 조조가 받던 압박감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번성 등이 함락되면 허창과 너무 가까운 위치인걸 생각해 도읍을 옮기는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이때 사마의와 호군 장제는 조조의 의견에 반대하며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필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사람을 보내 손권이 그 배후를 치도록 권할 만합니다. 강남을 떼어내어 손권을 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번(樊)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라며 손권을 이용하여 이 어려움을 해결하자고 한다. 유비와 손권의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에 조조는 용기를 얻고 손권에게 연락을 취하자 장제전에 의하면 손권은 '즉시' 움직였다고 한다. 동맹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조조는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宛)에 주둔했다. 8월, 조조는 서황을 2차 구원병으로 파견시켰으나 환계전에 따르면 서황은 조인을 구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서황전에 의하면 이 때 마침 한수가 크게 범람하여 관우가 번(樊)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또한 양양에서 장군 여상을 포위했으나 서황이 이끌던 병사들은 다수가 신병이었기에 관우와 쟁봉(爭鋒)하기 어렵다고 여겨 양릉피로 나아가 주둔했다. 오주전 기록으로는 이때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조조는 이에 동남방면의 장료를 관우쪽으로 전진배치시킨다. 당시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온회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온회는 손권은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오히려 장료마저 소집될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물론 오와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 오군이 합비로 올 일은 절대 없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면 이 조치는 대들보 빼서 기둥으로 쓰는 모양밖에는 안된다. 심지어는 자신마저 서황의 뒤를 이어 남하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조의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였다.

218년 김의경기위황길본의 난이 일어났을때 그들이 호응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관우라는 점에서조조 입장에선 도저히 편안히 잘 수가 없는 것이었다. 번성이 뚫리면 그 다음은 완까지 일사천리고 만약 한중에서 숨을 가다듬고 있던 유비까지 가세한다면? 그렇게 될 경우 어떤 꼴이 날지 모골이 섬뜩했을 것이다.

급박한 것은 번성의 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인은 군기를 다독였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여전히 성내에 물이 가득차 빠지지 않고 있었다. 번성은 완전히 물에 잠겨서 도저히 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군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지원군 역시 수몰되었으므로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에 번성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자도 있었으나 어떻게든 이곳을 사수하여야 된다는 만총의 말에 조인은 제장들을 다시 모아 결사의 각오를 말하니 모두가 감격하여 다시 군사들의 사기가 올랐다. 

실제로 조인의 이런 끈질긴 항전, 오군의 침공으로 뒤가 끊길까 하는 염려에 관우는 섣부른 북진을 하지 못하였다. 번성에 발이 묶여 당시 한중공방전과 7군의 패배, 그리고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던 조조에게 대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되고 만다. 만총의 판단이 적절했던 셈.

한편 관우는 상용에 있는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유봉과 맹달은 아직 점령하지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보낼 여지가 없다면서 군악대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형국이었고 미방의 사인이 병량보급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관우는 3만 포로의 식량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영릉군의 상관에 있던 오의 병량고까지 약탈해가며 포위망을 유지시켜 점령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

한편 촉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우가 처음 출군해 번성을 포위했을 때 크기가 소만큼 한 검은 돼지가 그의 발을 깨무는 꿈을 꾸고는 아들 관평에게 말했다. "내가 올해 쇠약해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이 돼지 꿈 내용은 연의에서도 나오지만 부하들이 길몽이라고 해석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전략에서 이르길 관우가 번을 포위하여, 손권이 사신을 보내 그를 도움을 청하며, 사신이 급히 나아가지 말도록 권하고, 다시 주부를 파견해 먼저 이르러 관우에게 알리게 했다. 관우는 그가 느린 것에 성냈고, 또한 스스로 이미 우금 등을 잡았기에, 곧 욕하면서 

담비새끼(옥편玉篇, 여우와 담비)가 감히 이와 같은데, 만약 번성이 함락되면, 내가 너를 멸할 수 없겠는가!

손권이 이를 듣고, 그가 자신을 가벼이 여김을 알아, 거짓으로 손수 편지를 써 관우에게 사과하며, 몸소 가는 것을 허락했다.

배송지는 '이미 형주와 양주는 서로 겉으로는 가깝지만 속으로는 사이가 나빠서 손권이 관우를 습격하며, 군대를 숨겨 몰래 출발했습니다. 여몽전(呂蒙傳)을 살피면 정예병을 배 안에 숨겨, 범인에게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옷을 만들게 했다고 이르니, 이를 근거로 말하자면, 관우는 손권에게 구원을 청하지 않았고, 손권도 필시 관우에게 마땅히 간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서로 도와주는 것을 허락했다면, 무슨 까닭에 그들의 거동을 숨겼겠습니까?'라고 이 기록을 비판하였다. 자치통감의 경우 관우의 손권에 대한 외교적 모욕에 대해선 혼인사자 모욕만을 기록하였다.

10월, 서황이 이끄는 지원군은 다시 조인의 구원을 꾀한다. 서황은 최악에 상황에 처한 조인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용의주도하게 관우를 살피며 전투를 피하고 지원을 기다렸다. 이에 대한 제장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그때 의랑 조엄이 그들을 잘 다독여 내분은 피할 수 있었다. 조엄은 당장 싸우자는 서황 휘하의 장수들을 설득하고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북쪽의 지원군 또한 도착하여 힘을 합쳐 크게 싸웠다고 조엄전에 전한다. 

촉기에 따르면 서황은 관우와 싸움 도중 사사로이 만나 평상시같이 이야기했다. 이때 서황이 외치길

관운장의 목을 얻는자는 천금을 내리리라!

관우가 놀라고 당황하여 물었다.

대형(大兄), 이 무슨 말이오!

서황이 말했다. 이는 나라의 일이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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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서황이 지원을 기다린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서황의 병사들이 대부분 신병이라 관우의 강병을 베겨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서황전에 따르면 이후 서황은 참호를 파며 언성의 배후를 끊으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촉군은 둔영을 불사르고 후퇴했으며 서황은 언성을 점령하면서 영을 연결시키면서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곳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조조는 직접 서황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지만 환계의 조언에 따라 은서와 주개를 파견하고 12영(營)의 군사들이 서황에게 지원군으로 도착해 전투가 시작되자 서황은 그간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무색하리만치 어마어마한 싸움을 보여주었다. 

서황전에 따르면 이때 관우의 군대는 위두에 둔(屯)이 있고 또한 별도로 사총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널리 소문을 퍼뜨리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급히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여기에 항복했던 호수와 부방도 죽었다.

동시에 만총은 백마(白馬)를 물속 깊숙이 잠기게 하여 제품으로 삼고는 군사들과 함께 맹세했다. 마침 서황(徐晃) 등의 구원병이 도착했으므로 만총은 (이들과 함께) 전력을 다해 싸워서 공을 세웠으며 만총은 승진하여 안창정후(安昌亭侯)로 봉해졌다. 이렇게 밖에서는 서황, 번성 안에서는 만총이 안팎으로 공격하여 관우는 결국 번성포위망을 걷어내 버릴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관우의 군사가 번성에서 물러났으나 전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관우가 이끄는 촉나라의 배는 면수를 점거하여 양양은 완전히 포위되어 연락이 끊겼다. 아직 위군은 관우를 완전히 몰아낼수 없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오히려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의 수군이 면수를 장악하였고 (번성포위망에 있던 병력이 양양으로 물러간 탓인지) 양양은 완전히 위군과 연락이 끊겨 굳건히 포위되었다. 이 상황에서 위군이 정면에서 관우를 격파하려면 3가지의 단계를 겨쳐야만 했다. 

우선 1차적으로 면수의 수군을 격파해야 하며 그 후에는 성공적인 도강 작전을 펼쳐서 건너서 군사를 반대편에 주둔시켜야 하고 그 다음 양양을 포위하고 있는 관우군 주력을 격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군사작전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는 가만 놔두었을시 양양이 관우의 손아귀에 들어갈 공산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곧 손권이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고 남군을 친다는 소식이 들렸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관우의 최후

이렇게 서황과 만총이 관우의 번성 포위망을 풀어내고 있을 무렵, 후방에선 동오의 대도독 여몽이 거미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몽전에 이르길 이때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병을 많이 남겼는데 관우가 자신의 뒷치기를 두려워 한다고 알아챈 여몽은 계책으로 병 치료를 명목으로 건업으로 돌아갔다. 관우가 이를 믿고 점차 병사를 번성으로 보냈다. 당초 여몽을 대신하여 육구에 도착한 육손이 관우에게 관우를 치켜 세우는 편지를 보내자 오만해진 관우는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편지에서 육손이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 적극적으로 협력을 약속하였는데 관우는 이 말을 듣고 오판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위에서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삼국지집해 여몽전에 수록된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여기서 상관은 익양대치 시 서쪽 촉한이 취한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청릉현 옆이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해서,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다라고 했으니 해당관은 양측의 경계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 상관과 번성은 수백리가 넘으니 관우가 직접 취하진 않았을것이며 관우 휘하의 관리들이 이를 취했을것이다.

손권이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여몽이 심양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인의 복장을 해 입고 밤낮으로 가서,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과 미방이 모두 항복했다. 호삼성은 이를 보고 미방과 사인의 투항이 없었다면 관우가 오의 기습을 알았을리라 평가했다.

당시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고 장군 부사인이 공안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여몽전 오록에 따르면 사인은 본디 항복할 마음이 없었고 오군의 항복사자인 우번을 내치기까지 했으나 우번이 편지를 보내 내응이 있었으니 이렇게 대응하지 못할 지경으로 포위된 것이며 이대로 있어봐야 살길은 없고 죽도록 싸워봤자 당신의 일족만 멸살될 것이며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협박하니 눈물을 흘리며 항복하였고 우번이 이는 속이는 병사이니 사인을 응당 끌고 가야한다고 주장하여 남군으로 끌고갔다고 한다. 여몽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고 하며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자 소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저항없이 항복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만 항복한것이고 다른 남군 사람들에게 항복은 너무나도 의외였기 때문에 여몽을 치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번은 한참 미방에게 받은 기물로 주변사람들과 성밖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여몽에게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뿐인데 성안의 사람들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는가?'라고 진언했고 여몽은 그제서야 남군으로 들어가 마침 반격을 준비하던 성안의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관우가 양양의 포위를 풀고 퇴각하자 조인을 비롯한 위군은 그런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추격을 반대하였고 조조 역시 관우를 장수들이 추격할까 걱정하여 추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추격을 포기했다며 조엄전에 전한다. 한편 오나라의 장수 장흠은 함대를 이끌고 면수로 들어갔다. 단 장흠전에는 면수로 들어갔다가 나온 기록만 있어 실제 관우의 수군과 교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동시에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손에 넣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고 오주전에 전한다. 관우는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중을 두루 다니게 하며, 집집마다 묻게 하고, 혹은 손수 글월을 써서 신의를 보였다. 관우의 사람이 돌아오자, 사적으로 서로 참여하여 묻고는,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평시보다 과하게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관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거기에 관우군의 처자들이 일종의 인질이 되었는지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

수경주에 이르길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에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관우는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때는 12월,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더 이상 도망 못가도록 붙잡았으며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했다. 

이때 손권은 장군을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을 붙잡아 손권이 관우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려 하자 좌우에서 말했다.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이에 관우를 참수했다. 이는 촉기의 기록인데 배송지는 이 기록에 대해 손권이 있는 강릉과 관우가 죽임을 당한 임저는 200~300여리나 거리가 된다며 그르다 평가했다. 이후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내고 제후의 예로 그 시신을 장사지냈다.

사후

장남 관평은 관우와 같이 죽었기 때문에 차남 관흥이 관우의 후사를 이어 작위를 계승했고 약관의 나이에 시중, 군감군이 되었지만 일찍 죽었다. 관흥의 적자 관통이 후사를 이었지만 또 요절하고 관통이 후사가 없어서 관흥의 서자 관이가 후사를 이었다.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장비마초방통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관우의 시호는 장무후(壯繆侯)라고 했다. 시법에서 장(壯)은 뛰어난 무장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목(繆)의 의미가 좀 나쁜데 명분과 실리가 없다는 의미다. 명나라 학자 정민정은 목(繆)이 곧 화목할 목(穆)과 의미가 통하고 옛 시호에서 둘을 혼용한 예가 많으니 화목할 목(穆)의 시법인 덕을 펴고 의로움을 지켰다는 뜻으로 보았다.

촉기에 따르면 방덕의 아들 방회는 종회등애를 따라 촉을 정벌했고, 촉이 격파되자 관씨 일가를 모두 멸족시켰다.

청나라 시대의 지리지 강릉현지에 따르면 관평의 아내는 조운의 딸 조씨로 관월을 낳았다. 조씨와 관월은 형주가 함락되자 익주로 피신하지 못했지만 여몽이 배려해준 덕분에 오나라에서 관(關)씨에서 문(門)씨로 성을 바꾸고 평민이 되어 공안에 숨어 살았다. 이후 서진의 사마염이 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자 칙서로 관씨로 복권하여 이어져왔다. 다만 강릉현지는 위의 관후조묘호기와 같이 너무 후대의 기록이라는 문제가 있으며 그나마 금석문 기록인 관후조묘호기보다도 신뢰성이 높다고는 볼 수 없다.

당나라 시대의 익주명화록에 따르면 촉왕이 조충의에게 명하여 관장군이 옥천사를 세우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2001년, 관우의 67대손 관중진이 나타났다. 그가 가지고 있는 족보에 따르면 관중진은 관우의 장남 관평의 후손이다. 익주에 있던 차남 관흥의 자손들은 방회에 의해서 몰살되었지만 형주에 남아있던 관평의 자손들은 계속 대를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호북성 공안현에 관우의 후손들이 사는 집성촌이 있다. 이 족보는 내용이 충실해서 중국 당국에서는 조작된 흔적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연의

삼국지 반기 내지는 그 자체의 진 주인공.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무예와 충의를 표현하는 장면이 여럿 추가되어 활약은 더욱 화려해졌다. 그에 비해 정사에서 관우의 실책은 대부분 연의에서 삭제, 또는 변경되었다.

연의에서 관우는 신장 9척에 수염 길이가 2자였으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슬,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외모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사에서 관우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아름다운 수염말고는 없었다. 경극에서 관우는 충의를 상징하는 붉은 얼굴로 표현되는데 경극의 설정을 가져온 것 뿐이다.

관우가 고을의 악덕 지주를 살해했기 때문에 해현에서 추방되어 탁군으로 왔다는 설정인데 마침 만난 유비, 장비와 뜻이 맞아서 도원결의를 맺어 의형제가 된다. 정사에서 그들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실제로 의형제 수준으로 가까운 사이였긴 했다. 연의에서는 관우가 162년에 태어났다는 설정이라서 나이 순으로 유비가 맏이, 관우가 둘째, 장비가 셋째가 된다. 그런데 관우는 사실 유비보다 1살 더 많았다는 관후조묘비기의 기록도 있기 때문에 관우가 유비보다 한 살 많지만 유비가 황족이고 인덕도 커서 큰형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나오는 판본도 있다.

유비 삼형제가 동네 대장간(…)에서 각자 병기를 만드는데 유비는 쌍고검, 장비는 장팔사모, 관우는 무게 82근의 청룡언월도를 주문해서 전용 무기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월도 자체는 삼국지 시대에 없었으니 청룡언월도는 연의의 창작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유비 삼형제는 공손찬의 부장 격으로 참전한다. 화웅에게 다른 장수들이 줄줄이 당하자 관우가 나선다. 원소는 무명의 마궁수 주제에 나서냐며 관우를 나무라지만 조조의 허락을 받아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죽이는 장면이 묘사 된다. 관우가 화웅을 베어 온 이야기는 연의의 창작일 뿐이다. 정사에서 화웅은 호진 휘하의 부장에 불과한 장수였고 그나마 손견에게 죽었다는 기록 한줄이 역사에 나온 전부다.

호뢰관에서는 연합군의 여러 장수들을 쓰러트린 여포와 맞선다. 유비, 관우, 장비가 서로 힘을 합하여 적토마를 탄 여포를 후퇴시킨 이 싸움은 삼영전여포라 불리우며 연의 내에서도 가장 인기높은 장면 중 하나로 독자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정사에서는 찾을 수 없는 연의의 창작이다. 애초에 유비가 반동탁 연합에 참가했다는 기록 자체가 정사에는 보이지 않고, 영웅기에만 짧게 언급되는 실정이라 당시 유비 일행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알수가 없다.

공융이 황건적 관해에게 성이 포위되자 태사자가 직접 유비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관우와 관해가 90여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죽이고 공융을 구출한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유비가 공융에게 구원군을 보낸 것은 사실이나 유비 삼형제가 직접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관해가 관우와 창칼을 들고 직접 맞선다는 장면도 허구이다. 덕분에 관해의 무예는 과평가되어 삼국지연의의 수혜자가 되었다.

조조군과 유비군이 합쳐서 여포를 공격할 때 정사에는 관우가 진의록에게 소박맞은 전처 두씨를 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관중은 이를 윤리적으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관우에게 고고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두씨에 대한 부분을 삭제했다.

유비가 조조 밑에 있을 때 허도에서 조조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 조조가 헌제의 활을 빌려 사슴을 맞추는데, 헌제의 화살을 보고 모두 헌제에게 만세를 부르는 순간 조조가 헌제 앞을 가로막으며 환호를 받는다. 격분한 관우가 무례한 조조를 살해하려 하지만 유비가 말린다. 실제로도 정사에서 한창 사냥을 하던 도중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관우가 유비에게 조조를 살해하라고 권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헌제 대신 만세를 받던 조조의 모습에 분개하여 암살하자고 권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정사에는 조조가 사냥 도중 헌제 대신 만세를 받았었다는 언급이 없다.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한 후 서주를 장악하고 관우는 하비성을 지켰는데 조조군에 관우의 하비성이 포위되자 조조는 장료를 보내 관우에게 항복을 권유시킨다. 장료는 관우에게 항복하지 않고 죽기를 고집한다면 이는 세 가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러자 관우는 장료에게 세 가지 조건을 걸고 항복을 약속한다. 

조조는 관우가 항복하겠다면서 군사를 물리라고 청하자 조조는 그 조건들을 모두 들어주겠다며 정말로 군사를 물렸는데, 이에 조조의 부하들이 이틈을 타 관우가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반발하자, 조조는 "그럴 사람이라면 도망가라고 해라, 붙잡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정사에선 이러한 세가지 죄, 세가지 조건에 대한 내용이 없고 그냥 관우가 조조에게 포위되어 항복한 장면만 등장한다.

모종강본에서 추가된 장면이 있는데 조조가 관우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관우, 감부인미부인을 한 방에서 재우려고 하자, 관우가 촛불을 들고 문 밖에 나가 서서 한 숨도 자지 않고 아침까지 두 부인을 지켜, 조조를 감탄시켰다. 그러나 이는 정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조조가 관우와 함께 헌제를 알현하였다. 당시 겨울이라서 조조가 관우에게 수염 주머니를 선물했는데, 헌제의 요구에 응하여 관우가 주머니의 매듭을 풀어 수염을 보이자 관우의 아름다운 수염에 감탄한 헌제는 관우를 미염공(美髥公)이라고 칭했다. 이 장면은 창작이지만 그래도 정사에서 제갈량이 수염이 아름다운 관우를 염(髥)이라고 부르긴 했다.

조조는 관우를 붙들어매려고 금은보화와 미녀 열명, 좋은 저택, 높은 관직, 그리고 적토마를 준다. 관우는 금은보화는 봉인해두고 미녀는 형수님들을 위한 시녀로 일하게 하며, 적토마는 형님에게 돌아갈 때 편하겠다며 기뻐한다. 정사에서는 조조가 관우를 붙들어 매려고 하사품을 베풀었다고만 나오고 하사한 물품들이 자세히 나오지 않으며 특히 적토마를 준 것은 거짓이다. 정사에서 여포는 적토마를 탔지만 관우는 적토마를 타지 않았다. 그외 받은 물품을 모두 봉인하고 조조에게 서신을 남기고 유비에게로 간 것은 연의나 정사나 같다.

관도대전에 참전한 관우는 조조를 위해 원소군의 장수인 안량(顔良)을 벤다. 이는 정사에서도 등장하는 사실이다.
다만 정사에서는 관우와 장료가 선봉에 나섰을때 관우가 안량을 멀리서 발견하고 적진을 뚫고 안량을 벤 것인데, 연의에서는 관우가 후방에서 대기하다가 조조의 구원요청을 받고 출전하여 안량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어서 관우는 문추(文醜)도 베는 공을 세운다. 하지만 정사에 따르면 관우는 안량만 베었을뿐, 문추까지 벤것은 아니다. 즉, 관우가 안량을 참한 것은 사실이나 문추를 무찌르는 장면은 연의의 창작이다.

관우가 안량과 문추를 베는 공을 세우자 조조가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에 봉한다. 원본에서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판본에서는 이 부분이 수정되어 나온다. 조조가 처음에 관우를 수정후(壽亭侯)에 봉했으나 관우는 사양했다. 그래서 조조가 한(漢)+수정후(壽亭侯)로 작위의 문구를 바꾸니 그제서야 관우가 받았다.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한나라에 항복했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도 잘못 알려졌지만 사실 정사에서 관우가 봉해진 한수정후는 한수(漢壽)+정후(亭侯)이다. 한수는 그냥 지명이고 지금의 호남성 상덕현 지방이다.  또한 정후는 관내후 가운데 최하 등급이다. 조선의 선비 이덕무도 삼국연의를 논하면서 '예전에 내가 한수는 지명의 이름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것으로 보아 이런 얘기는 조선에서도 잘 알려진 이야기였던 듯하다.

이후 원소의 신하인 진진을 통하여 하북에 있는 유비의 소식을 듣게 되자, 관우는 당초에 약속한 대로 조조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조조는 피객패를 걸어서 접객을 피하려 했다. 장료 역시 병을 핑계로 관우를 만나주지 않는다. 이에 관우는 조조로부터 받은 물건을 모두 집에 보관한 뒤, 조조에게 투항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개인적인 물건들만 챙겨서 두 부인과 함께 하북을 향해 출발한다. 

조조의 부하들은 관우를 죽여버리겠다고 하지만 조조는 어쩔 수 없다며 늦게나마 그를 전송하기 위해서 관우를 쫓아간다. 조조는 노자로 쓰라면서 황금을 선물하였으나, 관우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내 조조는 다시 전포를 선물하였다. 조조의 호의를 두번씩이나 거절할 수 없었던 관우는 전포를 받았으나, 만약을 위해 말 위에서 청룡언월도 끝에 전포를 걸쳐 받고 떠났다. 선물을 칼끝으로 받은 관우의 버릇없는 태도에 조조의 부하들은 불평을 내뱉었지만, 조조는 혼자인 관우가 다수인 우리를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부하 장수들을 달랬다.

연의에서는 관우가 감부인, 미부인과 함께 유비에게 돌아갔다고 하지만 정사에서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정사에서도 유비의 처자가 관우와 함께 잡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미부인은 이후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다만 감부인은 형주까지 유비를 따라왔으니 감부인만은 데려왔을 수도 있다. 사실 조조가 서주에서 유비의 처자를 모두 잡아들였는데 감씨가 여인 혼자의 몸으로 유비가 있는 하북으로 갔다고 보긴 어렵다.

조조가 관우가 이별을 고하지 못하도록 여러 날을 두고 고의로 관우를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에 관우는 미처 통행증을 받지 못했다. 관우는 조조를 떠나 하북의 유비를 찾아서 필마단기로 천리 길을 떠나는데 다섯 관문을 지나면서 여섯 장수를 참한다. 

동령관 - 공수 : 명예로운(?) 첫 피해자. 통행증이 없는 관우에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하자 관우에게 끔살당했다. 

낙양 - 한복, 맹탄 : 공수의 죽음 소식을 듣고 2인 작전을 펼치나 관우의 적토마가 너무 빨라서 실패했다. 

사수관 - 변희 : 관우와 동향인 보정 스님이 변희의 계략을 관우에게 누설했다. 

형양 - 왕식 : 호반이 자신의 아버지인 호화와 관우가 아는 사이인 것을 알게 되어 관우에게 왕식의 계략을 누설했다.

동군 - 유연 : 안량과 문추가 쳐들어 왔을 때 관우에게 구원받은 적이 있었기에 관우를 막거나 위협을 주지 않아서 목숨을 건졌다. 

활주 - 진기 : 하후돈의 부장이자 채양의 조카로 황하 나루터를 지키고 있었다. 


이 오관육참 에피소드는 정사에서 보이지 않는 허구이다. 민담 등 연의 이전의 삼국지 문화에서부터 등장한 창작 장면인데 천리행 노선도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게 구불구불하고 아무 필요도 없는 길을 간 것이며 관우에게 죽은 장수들도 전부 실존하지 않았던 가상 장수들이다.

관우가 여남에서 장비와 만나는데 장비는 관우가 의리를 저버리고 조조를 섬겼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장비의 오해를 풀기위해 관우는 장비가 북을 세 번 치기 전에 마침 추격해 온 채양의 목을 벤다. 정사에서 채양은 유비에게 격파당해 죽은 장수였는데 연의에서는 이런 장면의 희생양으로 바뀐 것이다.

오관육참 후 황건적의 잔당이었지만 관우를 경모하던 주창이 관우의 심복이 된다. 그러나 주창은 가공인물로 주창의 존재는 익양대치 당시 노숙에게 항의한 이름없는 장수에 기반한 듯한데 이후 관우를 시립할 시종의 모습으로 송나라 이전에 그 모습이 정립되었다. 또 관정이 자신의 차남 관평을 관우의 양자로 삼는 것을 제안했고 유비도 관우가 아들이 없다고 거들자 관우가 이를 수락하여 관평이 관우의 양자가 되어 따라가게 된다. 정사에서 관평은 관우의 친아들이었다.

관우, 장비가 삼고초려 당시 유비에게 불만을 토로하거나 박망파에서 제갈량의 지휘를 가볍게 보는 묘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정사에 있는 수어지교 일화를 부풀린 것으로 삼고초려에 관우와 장비가 동행했다는 기록이 없고 박망파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도 제갈량이 아니라 유비였다.

연의의 창작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화용도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조운, 장비에게 패퇴하는 조조의 길목을 차단하라고 명을 내리나 관우에게는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이에 관우가 불만을 표시하자 제갈량은 관우에게 명을 어겼을 경우 죽음으로 보상하겠다는 내용의 군령장을 쓰게 한 뒤에야 화용도로 보낸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조조가 죽지 않을 운세이니 관우가 과거의 은의를 갚으라고 화용도로 보냈다고 말한다. 관우는 화용도에서 조조와 만나나 오관육참에서 자신을 용서해준 조조를 생각했고 군령과 정의 사이에서 번민하며 괴로워하다가 결국 조조를 보내주었다.

중국소설사략에서 루쉰은 이 부분을 매우 칭찬하였고, 중국 고전 소설을 철저하게 평가한 학자 왕궈웨이도 삼국지연의는 순문학이 될 수 없지만, 화용도의 구절만은 대문학자가 아니고는 쓸 수 없다며 극찬하였다. 워낙 유명한 일화이기 때문에 정사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화용도 일화는 연의의 창작이다.

정사에서 남군 공방전은 주유군과 유비군이 연합하여 함께 싸워 남군을 점령하고 주유가 유비에게 땅을 빌려준 것이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주유군이 열심히 싸워 놓은 것을 유비군이 집어 먹은 것으로 변경되었다. 정사에서의 남군 공방전 상황은 악진, 서황, 문빙, 이통 등이 조인과 합세해 손유 연합군의 포위를 풀려고 했는데, 관우가 이를 막기 위해 길을 막아 싸우지만 격퇴당해서 물러났다. 전투가 끝나고 이통이 포위망을 뚫고 조인을 구출했다. 연의에서는 이 과정이 나오지 않는다. 정사에서 남군 공방전이 끝난 이후 유비가 형주를 얻고 관우의 공을 으뜸으로 언급한 것은 연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연의에선 유비가 형주 남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조운, 장비, 관우 등의 장수들에게 나누어서 형남4군을 공략하게 하는데 관우는 장사성 공격의 임무를 맡는다. 관우가 황충과 일기토를 벌이는 도중 황충이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관우는 황충을 죽이지 않고 정정당당히 승부하자 말하고 돌아간다. 다음 날, 둘은 또 일기토를 벌이는데 황충이 화살이 없는 상태에서 화살을 쏘는 척을 한 뒤 이에 관우가 피하는 동작을 취하자 그때 화살을 쏘아 관우의 투구를 맞추어 어제의 은혜를 갚는다. 이 장면은 연의에서의 창작이고 실제 형남 4군 공략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이들은 조운과 제갈량이다. 

그래서 이후 정사에서 관우가 자신과 동렬에 임명된 황충을 인정하지 않는 장면이 연의에서도 거의 그대로 나와서 모순이 된다. 그래서 몇몇 판본은 오히려 마초가 유비에 의탁하고 한게 뭐 있느냐며 마초를 까는것으로 바뀐다.

형주를 점령한 유비는 입촉하고 관우는 형주에 진수한다. 정사에서 관우는 반준과 불화했지만 연의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정사에서 관우는 유비에게 투항한 마초에게 호승심을 느꼈고 마초와 비교해서 자신을 띄워주는 제갈량의 편지를 받고 기뻐하여 손님들에게 보여주기까지한다. 연의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목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손권의 관솔을 내쫒은것은 동일하지만 익양대치 사건 자체가 아예 등장하질 않는다. 따라서 이 당시 관우가 감녕의 별동대가 강을 지키고 있는것을 보고 도강을 단념한 일화 역시 연의에서 보이질 않는다. 단도회는 형주를 탈환하고 관우에 이에 응하지 않을시 관우를 죽이려는 노숙의 책략으로 각색된다. 실제 정사에서도 단도회 자체는 일단 노숙쪽이 먼저 제의하고 관우가 이에 응해 참여한게 맞고 나눈 대화 자체도 의외로 연의에서도 비슷하다. 관우가 "오림의 전쟁은 좌장군께서 친히 시석을 무릅쓰시고 협력하여 적병을 깨부수었거늘 어찌 헛수고만 하고 한 척의 땅도 가질 수 없겠소? 이제 족하께서 다시 땅을 찾으러 오신 것이오?"라고 하자 노숙이 그에 대해서 정사와 비슷하게 "우리 주군께서 장판에서 격파된 유황숙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 아닙니까? 어찌 그런식으로 말씀하십니까?"이라는 논리로 반박하자 관우가 화답하지 못하는 사이 주창(정사에선 이름없는 장수)가 정사와 같은 논리로 반박하자 관우가 호통을 쳐 물러나게 하는것까지는 거의 같다. 

여기에서부터 나관중이 관우에서 버프를 거는 각색이 나오는데 원래 노숙이 연회장에 복병을 숨겨두었는데 회담 도중 끼어든 주창을 관우가 참견한다며 쫓아버리자 주창은 기회를 틈 타 연회장을 빠져나와 미리 대기시킨 관평 등에게 연락하여 배를 접응토록 한다. 관우는 술주정을 빙자, 노숙을 붙잡고 인질극으로 빠져나오고 복병들은 노숙이 다칠까봐 감히 움직이지 못하여 계략은 실패하는데 이에 노숙과 여몽은 관우를 칠 것을 결의하고 손권 역시 격노하여 관우를 치려다가 조조의 침공으로 그만둔다. 이후 조조가 장로를 처 한중을 점령하자 유비측이 이를 두려워해 강하, 장사, 계양을 양도한다는 큰 줄기 자체는 정사와 같다.

손권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키자며 사자를 보내오자 관우의 대답은 "호랑이의 새끼를 의 새끼에게 줄 수 있겠느냐."였다. 이는 관우빠인 모종강조차도 "손권이 개라면 관우와 의형제를 맺은 유비는 손부인과 혼인을 했으니 호랑이 형과 개 누이가 혼인을 맺은 것이고, 호랑이 시동생에 개 형수가 있는 셈이다."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의외로 이 장면은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정사에선 그저 관우가 손권의 혼인사자를 모욕했다는 것으로만 나올 뿐, 손권이 거짓으로 지원을 해준다고 해놓고 안 왔다면서 담비 새끼라고 욕한 기록은 있으나 이것도 배송지가 '그랬다면 지원명목으로 들가면 되지 기습을 할 필요가?'라고 의문을 표한 기록이다. 

번성 공방전에서 관우가 양성을 공격하다가 오른쪽 어깨에 독화살을 맞게 된다. 명의 화타가 스스로 찾아와서 관우를 치료하는데, 관우는 바둑을 두며 담소하는 가운데 화타에게 자신의 팔을 맡긴다. 관우는 살을 절개하며 피가 흐르는 상황에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바둑에만 열중했다. 이 장면은 정사에도 등장하는 사실이긴 하나 양성을 공격하다 화살에 맞은 상처를 치료한 것이 아니라 예전에 맞은 화살 때문에 통증이 가시질 않아 치료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의원 역시 화타가 아니였으며 관우는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에 부상을 입었었다.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는 데는 주로 오른팔을 사용하므로 관우를 부각시키기 위해 변경한 것으로 여겨진다.

번성 공방전에서 계속 관우가 문무를 갖춘 지장이라고 언급하는 장면이 많다. 그러다가 마침 비가 내리자 관우는 수공을 계획하여 번성을 수몰시킨다. 정사에서는 관우의 수공이 아니라 그냥 수재(水災)였다. 다만 정사 방덕전에 살펴보면 관우가 배를 타고 공격했다는 문구가 있다. 따라서 관우가 가만히 있다가 이득을 본 것이 아니라, 큰 비가 와서 범람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이에 따른 준비를 했을 수도 있으며 당장 온회는 수해에 조인이 대비하지 못하는사이 관우가 이 기세를 타고 조인을 공격할 것을 우려했으며 방덕전, 우금전, 조엄전 등에는 관우가 수군을 준비해 면수를 장악하고 위군을 공격한 정황이 있다.

정사에서는 관우가 손권이 고의로 자신에게 지원을 늦게 보내자 이에 격분하여 손권을 오소리라고 모욕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연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관우가 우금과 포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촉과 오의 상수 경계 영릉에 있던 상관 군량고의 쌀을 마음대로 가져갔다는 기록도 연의에서는 삭제되어 나오지 않는다.

오나라측에서 배신을 때리고 관우도 서황에게 패퇴하자 관우 등은 맥성에 고립된다. 유봉과 맹달에게 요화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연의는 관우 등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지지만 결국 맥성을 빠져나와 도주하는데, 여범이 점을 쳐서 복병을 매복시켜 사로잡는다. 이것은 연의에서 살짝 편집한 것으로 정사에서는 오주전, 오범전을 종합하면 이때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도주했다, 

당초 손권은 오범에게 그가 정말 항복하려는 것이냐고 질문했는데 오범은 관우가 도주할 기미가 있으며 투항한다는 말은 거짓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에 손권은 반장을 시켜 관우의 길을 끊도록 했으며 정찰하는 자가 돌아와 관우가 이미 떠났다고 보고했다. 오범이 이에 관우는 사로잡힐것이라는 예측을 했고 과연 그리되었다. 우번전에 따르면 우번 역시 이때 관우의 운명을 점쳤다고 한다.

나관중본에서는 맥성에서 도주하다가 궁지에 몰린 관우와 관평이 이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고 하늘이 부르는 소리에 맞춰 승천한다. 해당부분은 다음과 같다.

관우는 아들 관평 등과 더불어 맥성 북문으로 탈출한다. 이르는 곳마다 오나라 복병들과 맞닥뜨리면서 결석(決石) 땅에 도달한다. 때는 5경에 가까운 시각인데도 순간 함성소리가 들리면서 다시 복병들이 공격해 왔다. 돌아보니 뒤쪽에는 주연과 반장의 정병이 기습한다. 관우는 반장의 부하인 마충과 맞닥뜨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린다.

"운장은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옥황상제의 조칙이 있으니 범부와 승부를 겨루지 말라."

관우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깨닫는다. 마침내 싸움을 하지 않고 무기와 말을 버린 채 관우와 관평 부자(父子)가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가정본)

이는 관우 신앙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모종강본부터는 관우 부자가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정상적인 장면으로 변경되었다. 정사에서 손권에게 관우를 살려주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데, 연의에서는 좌함이라는 가공인물이 관우 부자 참수를 권유한다. 관우의 적토마는 마충에게 하사되었으나 풀과 물을 먹지 않고 스스로 굶어서 죽었다. 당연하지만 정사에서 관우는 적토마를 타지 않았으니 그냥 문학적 연출이다.

연의에서는 관우의 유령이 유비의 꿈에 나오는 등 죽고도 유령으로 계속 등장하는데 당연하지만 모두 허구다. 우선 죽은 관우의 유령이 당양의 옥천산에 나타나서 예전 오관육참에서 도움을 받았던 보정 선사와 만난다. 보정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크게 깨달은 관우는 사라진다. 이 부분은 익주명화록에서 관장군이 옥천사를 세우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는 기록을 보고 창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관우의 유령이 여몽에게 빙의하여 손권을 꾸짖는다. 놀란 손권이 장수들을 거느리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린다. 그러자 여몽은 칠공분혈로 죽어버렸다. 사실 정사에서 여몽은 병으로 죽었다. 이 장면은 의로운 관우의 인상에 맞지 않고, 또한 비현실적이라는 점 등에서 최근에는 삭제하고 있는 판본도 많다. 

손권의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내고 조조가 상자에 담긴 관우의 목에 말을 걸었는데 갑자기 관우가 입을 열고 눈을 움직이면서 수염과 머리카락을 모두 곤두세운다. 조조는 아연실색하여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 의를 조조가 높게 평가하여 손권이 보내준 목에 나무를 깎아 직접 몸을 만들어 붙여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관우의 차남 관흥은 정사에서 요절했지만 연의에서는 요절하지 않고 장포와 함께 이릉대전에 참전한다. 관우는 이릉대전 도중 유령으로 나타나 아들 관흥에게 도움을 주어 관흥은 아버지의 유품인 청룡언월도를 되찾게 된다. 제갈량의 북벌 도중 월길과의 싸움에서 위기에 처한 관흥을 구출하고 장포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또 유령으로 등장한다.

가족 관계

  • 정사에 기록된 인물

    • 관평 - 관우의 장남.

    • 관흥 - 관우의 차남.

    • 관우의 딸 - 실존인물이나 민간 전승에서는 관은병, 관삼소저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 관통 - 관우의 손자, 관흥의 적자.

    • 관이 - 관우의 손자, 관흥의 서자.

  • 야사나 민간전승에 기록된 인물

  • 위인

    관우關羽:떠돌이 무사에서 신이 되기까지

    어느나라 못지 않게 중국 역시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고전 역사들에 바탕한 민족주의가 있고, 그 속에는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관우는 신격화될 만큼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유명한 위인 중 한명이다. 물론 여기서의 민족 개념은 근대 이후 창안되어 통용되는 서양식의 민족 개념이라기보다는 진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전한 때 정립되었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중국인들의 중화사상 또는 한족의 개념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다.

    중국인들은 관우를 관공이라고 높히며 매우 존경한다. 사후 약 2천 년인 오늘날에도 관우는 수많은 팬들이 있으며,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각종 게임, 영화, 드라마, 그리고 만화 등 여러 창작물에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들은 관우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종교적으로 신봉할 정도다. 더불어 관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들도 상당히 많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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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는 중국에만 한정된 것이며, 한국과 일본에서는 삼국지 속 잘 알려진 영웅으로 취급하거나 무속의 경우 일종의 신령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이라고 꼽히는 장수들 중에서 전적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는 많다. 관우 역시 마찬가지다. 관우의 명성에 비해 정사에서는 패배한 기록이 많다는 점 때문에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이 관우에 대해 남긴 평가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용맹스럽고 무서운 장수라는 이야기 뿐이다. 그것도 조조, 정욱, 곽가, 주유, 여몽 같이 걸출한 인물들이 인정했다는게 특이점으로, 사후 수백년간 용맹한 장수들은 관장지용이라고 불리며 관우와 장비에 버금간다는 소릴 들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가 받은 만인지적이라는 칭호는 그저 무예가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용맹과 병법이 뛰어난 장수에게 주는 것이다. 이는 그가 보여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또, 관우의 능력을 평가한 이들은 실제로 그를 써본 사람들이나 그를 직접 적대해본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를 평가한 이들은 대부분 군사를 잘 썼으며 딱히 관우와의 다른 이해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관우를 이용해야 한다든가 경계해야 한다는 말만 가득하다.

    그 중 주유의 평가는 가장 인상 깊은데, 그는 직접 관우 장비를 써 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내가 관우 장비를 부리면 서촉을 평정하고, 조조 역시 도모해볼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타국의 군사적 1인자가 저런 평가를 내릴 정도에다 여몽까지도 '관우는 용맹하고 군사를 부리는게 보통이 아니라 대적하기 어렵다'고 손권에게 이야기했다. 이 외에 유엽도 '촉나라는 소국이고, 장수는 관우뿐이다'라고 했는데 용력이 아닌 장수로서도 높게 평가받았다. 

    • 하비의 수비를 맡았다가 조조에게 항복한다.

    • 조조 휘하에서 원소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장료와 동행하여 안량을 참살하고 원소의 제장들이 아무도 관우를 상대하지 못하여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안량을 참살한 것은 그의 공이지만 사령관이라기보다는 돌격대장으로서의 전공에 가깝다.

    • 당양 장판파에서 패한 유비를 구원했다.

    • 주유가 남군을 공격할 때 문빙, 악진에게 깨지고 조인의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이통이 포위망을 뚫고 조인을 구출한다. 사실 그 당시 뛰어난 장수들인 문빙, 악진, 서황, 만총, 이통 등과 연이어 싸워야 했으니 별 수 없이 패했다는 견해도 있다.

    • 사람보는 눈 하나만큼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유비가 다름아닌 형주를 관우에게 맡긴 것에서부터 유비군 내에서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 익양대치에서 관우는 도강을 시도했으나 감녕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단념하고 관우뢰를 설치한다. 이는 관우가 결국에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으니 실패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고, 감녕은 수적 출신이라서 수전에 능했고 애시당초 강을 건너 공격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부담이 큰 작전이므로 관우가 신중하게 행동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당장 후일 조인도 주환을 상대로 무리한 도강 작전을 펼치다가 크게 패배한다.

    • 그가 유일하게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준 번성 전투는 홍수의 덕을 보았다. 그러나 전장의 지형지물과 기후를 잘 이용하고 대비하는 것은 지휘관의 필수적인 덕목이다. 게다가 정사 온회전에는 조인이 적지에 고립되어 대비를 못했다는 구절과 관우가 전쟁을 잘하므로 이 기세를 타고 조인을 공격할 것을 우려했다는 기록이 있고 방덕전을 살펴보면 관우가 배를 타고 제방으로 피한 위군과 하루종일 큰 배를 타고 화살을 쏘아가며 격렬한 교전을 펼치면서 공격했다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관우가 어느 정도 물난리를 예상하고 그에 따른 대비를 했을 수도 있다. 이는 관우가 수군을 준비해 수륙양진으로 기세를 타고 올라 갔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 번성에서 수해에 빠진 7군을 궤멸시켜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참살했다. 조조가 천도를 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위나라에 반항하던 반란군 세력은 관우의 인수를 받아 허창에까지 이르렀다는 기록까지 있는데, 그만큼 당시 관우군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관우가 번성에서 싸운 장수는 번성에 주둔 중이던 조인과 만총, 여기다가 투입된 장수가 각종 네임드들인 방덕, 우금, 서황, 여몽, 육손, 주연 등이다.[42] 여기에 장료도 투입 예정이었고, 조조 자신도 증원하려고 했다. 반면 관우 쪽 네임드 장수는 관우말고 없었고 상용에 요청했던 원군도 유봉에게 거절당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 관우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수 있고 또한 그만큼 홀로 어려운 싸움을 수행해야 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당시 관우가 향했던 진격 루트만 봐도 그의 공격이 위나라의 수도에 인접하여 조조가 천도를 논할 정도로 위협을 가했고 그의 공격에 위나라 내부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관우가 아니더라도 위나라로서는 네임드를 보내서라도 막아야 되는 면이 역시 존재한다.

    • 오랜만에 관우가 서황과 대면하여 사담을 나누는데 갑자기 서황이 관우 공격을 명하자 관우는 놀라고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서황과 번성 내부의 협공에 밀려 번성 공략에 실패했다. 그러나 번성에서 물러나고도 여전히 면수를 장악했고 양양은 아예 연락이 끊길 정도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 타이밍도 사실 나쁘지 않았다. 남양 일대의 대규모 반란의 혼란상을 잘 이용했으며 실제로 남양의 반란은 북방의 전예가 내려와서 남양일대를 위무해야 될 정도로 거대했다, 관우는 이와 동시에 후방의 반란군 세력을 더욱 이용하는 전략적인 면모를 보였고 후방에서 일어난 반란은 관우가 북상하면서 더욱 거대해져 결국은 위나라의 상당수 관원들이 모두 집결하고 손권과 손을 잡은 후에야 이 난리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러면서도 후방에 대한 대비 역시 철저히 했으니 전략적 식견 역시 나쁘지 않다. 

    • 육손의 편지에 그를 경시한 것에서 보이듯, 지나친 자만심과 미방에서 보이듯 인사에서의 문제가 흠이고 그 흠 때문에 결국 패사하게 되지만, 동시에 여몽의 심리전으로 군대가 와해되어 맥성에 고립, 거짓 항복 후 탈출을 시도하다 생포되어 처형된다.

  • 단순히 연의의 여포같은 맹장 타입이었으면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유비군내에서 관우는 주로 비상시에 최고 사령관인 유비의 별동대 및 대체재로 여겨졌던 듯 하다. 유비는 자신이 병력을 이끌지 않을 때에는 대부분 별도의 군을 관우에게 통솔하게 했다. 서주에선 하비에 진수하게 했고 형주에선 별도의 수군을 이끌게 하고 이후에도 형주에 진수시키면서 독자적인 군권을 주었다. 

    많이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관우는 전성기 형주의 1/3도 안 되는 강릉, 무릉, 영릉 삼군의 병력으로서만 천하를 진동시켰다. 북쪽에선 위가 있고 동쪽엔 오가 있고 전선이 2중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오에서는 여몽이 기회를 엿보았고 위도 조인이 지키고 언제든 서황, 장료등이 치고 내려올지 모르는데다 주요 참모, 장수진은 익주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 관우가 손권과 외교를 잘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그 동맹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방어하기 유리한 양번에 집착했다.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다면 강릉보다는 막기 쉬울것이라 판단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관우가 전장에서 보여준 능력을 생각하면 정치와 외교 문제만 없었다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실제로 번성까지 위협하고 면수를 장악해 양양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단계까진 성공하기도 했고.

    삼국의 형세가 정립된 이후 한 지역을 진수하는 일개 장수 가운데 세력의 2인자로서 제후급, 준군벌급으로 세력을 갖추고 한 지역을 진수한 장수는 거의 관우 정도이다. 비율로 봤을때 위나라의 수춘에 주둔한 사령관들 역시 만만치 않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력상의 비율이나 세력내에서의 위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 관우는 여기서 홀로 유비의 익주 진공 이후 상대적으로 역량이 떨어지는 2선급 장수들을 수습해서 홀로 뭐든지 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물론 유비 역시 이걸 모르지 않아서 상용을 점거하고 행여나 있을 원군요청에 대비케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관우의 역량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형주에 누가 오던지 관우라면 막을 수 있다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 실제로 여몽은 관우가 진수하고 있는 형주지역을 정면으로 뚫어낼 생각을 하지도 못했으며 육손을 이용해서 관우를 안심시키고 진수된 병력들을 북쪽으로 실어오르게 하고, 위나라와 손을 잡고, 배신할 마음을 품은 미방을 몰래 회유하여 방어선을 약하게 하고 나서야 간신히 형주를 뒷치기 할 수 있었고 그나마 남군을 점령하고도 내부적인 저항에 직면에야 했다. 분명 이런 여몽의 계략은 대단한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이 정도의 사전준비와 내부에서의 배신 계획 없이는 관우가 원정나간 형주도 정면에서 함부로 치지 못했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다. 

    관우는 결국 조인을 격파하지 못하나 이것은 전적으로 당시 관우가 지니고있던 형주군의 역량미달 때문의 문제도 만만치 않다. 관우의 후방에 있던 미방과 부사인, 반준은 각각 후방에서 물자를 지원하는 일을 맡거나 치중종사임에도 관우가 만족할만한 보급을 해준바가 없다. 물론 이건 관우의 행정적 보급능력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단순히 치고 넘어갈수도 있다. 그러나 위나라의 장수들과 비교해보자. 예컨데 장료가 창희를 토벌할때 시간이 지체되자 우금은 군량을 계속 보내주어 마침내 함락시킨다. 

  • 양번 당시에도 조인이 수세에 몰리자 조조는 정예 7군과 우금, 방덕, 서황을 보내고 이들이 격파되거나 구원에 실패하자 조조 본인도 증원을 간데다 장료와 하후돈마저 부르기에 이르고 관우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서황에게도 계속 지원병력을 보내고 손권까지 동원해 관우의 뒤를 치려는 계획까지 짠다. 

  • 단 한명을 상대하기 위해서 위나라가 이렇게 동원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는 사례는 후일 촉의 제갈량과 강유, 오의 제갈각 정도를 제외하면 없으며 이들도 관우가 받은 지원보다는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위나라를 상대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비가 미리 상용에 진수시켜둔 유봉과 맹달은 서로 군악대 가지고 싸우기만할 뿐 관우의 지원 타이밍을 아예 씹어버린것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상황이다. 보급과 지원에 있어서 관우군과는 완전히 천지차이인 것이다. 

    조조군의 자잘한 전투성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증원에 힘입어 얻은 승리가 꽤 되며 조조군은 조조의 지휘하에서 지속적으로 물량의 지원을 통한 승리를 거둔바가 꽤나 많다. 번성공방전도 이와 비슷한 예라고 할 것이다. 당장 위나라 최고위 상장 하후연의 예를 보더라도 단독 전투로는 마초에게 대파당한 적이 있고 조조가 장안에서 밍기적 거리면서 지원이 끊기자 한중공방전에서 필사적인 저항을 해보았으나 결국 살해당한다. 

  • 조조는 그런 그의 군재를 폄하하면서 자신의 책임문제를 은폐하려 했지만 실제로 무도방면을 유비가 차지하지 못한건 전쟁 초기, 한중군 총사령관 하후연의 신속한 전술적 조치 덕분이었고 장합이 수많은 병력을 장비에게 날려먹어 한중군 전력이 약화된 와중에도 유비의 총력전에 수개월 이상 버티며 조조가 그나마 한중에서 유비와 싸울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이런 마당에 관우가 결국 번성을 얻지못하고 서황에게 뚫린걸 단순히 장수의 역량문제로 국한 될 수 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만한 문제다. 동맹과의 마찰이 예상되는, 상관의 쌀을 털어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는데 더 말할게 없을 것이다.

    특이 사항으로는 관우는 하북 사람이면서도 수군에 일가견이 있어 형주에서 적벽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수군을 이끌고 있었고, 번성공방전때도 수군을 능숙하게 이용하였다. 정사 삼국지가 알려지면서 갈수록 위나라 제일의 장수라면서 조인에 대한 평가는 올라가는데 그 조인을 시기와 때를 잘 맞추어 번성에 몰아넣은 관우의 전투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저평가 되는 경우가 있다. 

  • 장군으로서 조인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 장마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사 온회전에도 나오고 위나라 군사들은 장마에 맞추어 총공세를 펼친 관우의 수군을 당하지 못했다. 당시 위와 촉의 국력을 생각하면 조인의 병력이 관우보다 적었을리도 없고 위나라 군대가 장마에 당했다고는 하지만 장마가 조인, 우금, 방덕, 만총에게만 영향을 주고 거기서 싸우던 관우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리는 없는 것이다. 단독으로 관우와 맞섰을때 조인은 관우를 상대하지 못했고 결국 우금, 방덕, 서황의 지원을 받아서야 관우를 상대할 수 있었다.

    관우는 홍수 이전에도 위나라 최고 명장인 조인과 맹장 방덕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오자양장의 일원인 우금과 정예 7군 군세와 대등하게 맞서 싸웠고 홍수가 발생하자 조인을 번성에 몰아놓고 우금을 격파하여 사로잡았고 포로로만 무려 3만명을 잡았으며, 방덕을 참살했다. 상대편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홍수를 이용해 적을 격몰시켰는데 이런 연이은 명장들 상대로 원정에서의 대전공은 삼국이 정립된 삼국시대 전체로도 그렇게 흔하지 않다. 

  • 앞서 언급햇듯이 정사 온회전에 조자효(조인)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 홍수를 대비하지 못하고 있고 관우의 용병이 빼어나니 큰 위험이라고 온회가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즉, 당시 홍수는 위나라 참모진 측에서도 걱정하고 있는 바였고 조인은 방덕을 배치하면서 관우의 적진 깊숙히서 이에 대비없이 싸우고 있다는 증좌로 볼 수 있다. 

  • 우금전에는 우금이 홍수가 온 다음에야 고지로 올랐으나 이미 피할 길 자체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고 방덕전에 보면 방덕이 홍수가 나자 그제서야 제방위로 올라가서 저항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말인 즉슨 위나라군이 진작에 강물이 불어날 타이밍을 계산에 넣었다면 다른 고지로 후퇴해 수몰까지는 피할 수 있었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결과는 관우의 육군은 수몰 타이밍에 맞추어 그곳을 피했고 위나라 군대는 그냥 수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관우가 진격할때부터 이를 염두에 두거나 적어도 어느 타이밍에 육군을 빼야하는지는 위나라 장수들보단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양번을 공략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와야한다, 후일 몽골과 송나라가 그랬듯이. 그런데 논자들이 간과하는 지점은 '그럼 대체 관우가 수군을 끌고 올 때 위나라 번성의 수군은 어디로 증발했느냐? 관우가 육상에서 싸울때는 나름대로 대응을 해놓고서는 정작 홍수에서 배를 타고 관우가 전장을 휘저었는데 위나라는 뭘했기에 7군과 번성 주둔군이 수몰될 동안 아무런 대비도 안했느냐?'느냐에 대한 대답은 없다는 것이다. 

  • 위나라 수군이 있었다면 7군이 그렇게 큰 피해로 수몰되진 않았을텐데 말이다. 기껏해야 방덕이 번성으로 후퇴할때 조각배를 탔다는 기록 정도가 위나라 수군에 대한 기록의 전부고 양번 공방전이 끝날때까지 면수는 관우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는 두 가지로 밖에 해석이 안 되는데 조인과 방덕 등이 홍수나 면수 방어를 위한 수군 방비에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즉 수군 같은걸 준비 안했다-나 관우의 수군에 면수가 장악 당할 정도로 완전히 밀리거나 격파되었다는 두가지 결론 밖에 나오지 않는다. 

  • 조인과 방덕같은 명장들이 양번을 방어하기 위해선 수군을 준비해야 했다는 사실을 모를리가 없으니 이미 육상에서는 관우가 방덕 등과 치열하게 맞서는 동안 위나라의 수군은 그 두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격멸되었거나 소멸되었다는 결론뿐이다. 이는 홍수 이전부터도 관우는 육상에서는 화살을 맞고도 태연히 병력을 지휘하면서 용맹을 펼치고 있었고 수상에서는 면수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얘기가 된다. 심지어 온회는 조인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서 고립되고 있다'는 표현까지 썼는데 이는 당시 조인이 이끄는 병력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미 홍수 이전부터 관우의 병력이 우세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결론인 것이다.

    관우를 격파하고 번성의 포위를 푼 서황 역시 처음에는 구원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주개, 은서의 군사를 지원받고 12영의 군세를 지원 받아서야 관우의 포위망을 번성 내부의 만총과 함께 격파했는데 이때 관우가 급히 이끌던 보기는 겨우 5천으로, 적어도 수만의 병력을 계획하고 계속 지원해준 위나라의 동원력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오나라의 그 명장이라는 육손이나 주연도 후일, 관우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가지고 양번 공략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독으로 위나라 전체의 명장들을 상대해낸 관우의 역량이 장수로서는 폄하될 이유가 없다, 

  • 그것도 홈그라운드가 아닌 원정병력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심지어 서황의 번성 포위망 격파 이후에도 양양의 포위는 풀리지 않았고 관우는 여전히 양번을 흐르는 면수를 장악하고 있었다. 후세의 일이지만 이 면수 수로를 완전히 장악당한 송나라가 몽골과의 양양공방전때 얼마나 힘든 싸움을 했어야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관우는 열세의 전력에서도 이런 위협적인 판도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남군 공방전은 결국 손유 연합군이 이겼고 익양 대치는 입촉하느라 관우는 이런 전력이 분산된 어려운 상황에서 버텨낸것이었다. 번성 공방전은 외교에 문제가 있었지 위나라가 자랑하는 조인을 성에 몰아넣고 우금을 때려잡고 방덕을 참살하고 양양에 공성 걸어놓고 위나라에서 최고 실적을 자랑하는 서황과 대치했고 서황 역시 조조가 각지에서 병력을 끌어다가 지원하고 12진영의 지원병을 끌어다 주기전까지 번성구원에 실패하고 싸울 생각을 못했다. 

  • 남양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서 양번 방어선이 크게 흔들렸었고 북벌의 최대호기에서 여몽 이후 다시 온건 유화책으로 가는척했던 오나라가 동맹을 깨고 뒷통수를 칠줄은 몰랐을터, 더군다나 미방의 배신, 유봉과 맹달의 의뭉스러운 움직임까지...

    관우의 몰락은 용맹이 부족해서도, 지략이 부족해서도 아닌 정치력 부재와 조직관리 문제였으니 전선을 맡은 장군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전역을 책임지는 사령관의 역할은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요립은 관우의 용병 능력에 대해 개인의 용맹만 믿으며 군사를 부리는 법도가 없다고 평했다. 관우와 동시대 사람이자 같은 세력 소속의 사람이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해당 발언은 관우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기 보다는 요립의 신세한탄 속 한 구절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과해서 판단해야 한다. 유비가 자신을 요직에 배치하지 않았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상황에서 이소와 장완이 찾아오자 작심하고 유비를 포함한 여러 인재들을 다 까고 있을때 나온 평가였던 것

  • 무력

  • 관우의 전체적인 모습은 문무를 겸비한 걸출한 명장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관우는 당시에 난립하던 자기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문맹 장수는 아니었다. 물론 지장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였지만, 각종 기록에 관우가 학문을 좋아하고 옛 경전을 즐겨 읽어 출중하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정사에서 관우가 학문을 좋아하고 춘추좌씨전을 외운다고 나와있다. 관우는 옛일의 사례들을 참고할 목적으로 춘추를 읽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연의에서 관우가 단도부회에서 지략을 쓰고 빠져 나온 것은 허구다.

    • 정사에서 여몽이 병을 핑계로 건업으로 돌아가고 대타로 온 육손이 편지를 보내자 이에 속아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했다. 단 여몽, 육손은 오에서 손꼽히는 지략가다.

    • 연의에서 관우가 번성에서 수공을 쓰는 지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그냥 수재(水災)였고 관우의 수공인지는 나와있지 않다. 다만 정사 방덕전에 따르면 관우가 배를 타고 공격했었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가만히 있다가 이득을 본 것 같지는 않고, 나름 예상을 하고 준비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 군사 지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관우를 본다면 어떨까? 여러 가지 면을 볼 때 관우는 고대의 정치인으로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렵다. 


      민정과 행정에선 인심과 신의를 대대적으로 베풀었다고 쓰여진 기록으로 보아 어느 정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다. 특히 오의 형주 침공 초반에 미방의 배신을 제외하면 큰 민심이반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관우를 지원하려던 낌새마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민생 관련 내정 측면에선 최선을 다한 것 같다. 

      그러나 민생을 제외한 나머지 정치 분야에선 아쉬운 모습이 많았다. 외교에서 그러한 면이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우방국 최고 수장이었던 손권을 모욕한 예다. 이는 위나라에 맞서 결속을 다져도 모자를 판에 악감정만 증폭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물론 손권이 먼저 지원군을 보낸다고 해놓고선 고의로 늦게 보냈다는 점, 혼인 제의 역시 그 꿍꿍이를 알 수 없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정이야 어찌됐든 최고 책임자로서 악감정은 접어두고 영리한 대처를 했어야 했는데 본인 성질을 못 이기고 거칠게 행동한 셈.

      내부 조직 관리 역시 물음표가 남는다. 특히 미방과 사인 처벌 사건에서 그러한 의문점이 두드러진다. 두 사람에게 군수물자를 날려먹고 보급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실책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상급자인 관우가 그에 대해 처벌을 논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후방에서 수비와 보급의 중책을 맡고 있는 두 사람에게 처벌에 대한 불안감으로 딴 마음을 품을 시간적 여유를 줬다는 점에서 용인술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당시 위와 오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관우의 입장에선 절대로 후방에 근심을 남겨두지 말았어야 했다. 따라서 미방과 사인을 처벌하려는 의도를 잠시 감추고 꺼내지 말던가, 아니면 신속히 처벌하여서 두 사람에게 딴 생각을 할 시간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최소한 그 처벌에 있어서 공과 과의 명확한 선을 정해놓아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불안을 최대한 억제하는게 필요했다.

      특히 미방은 유비를 서주부터 따른 창업 공신이자 당시 형주의 2인자로서 주요 거점을 지키던 핵심 인사였다. 관우 정도 위치의 책임자라면 고위 인사를 함부로 처벌하려 했을 때 일어날 반발과 파장 정도는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배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내부 조직의 불안만 더 가중될 위험성을 간과한 것이다. 즉, 이른바 '조직 내부의 정치역학'을 다루는 영역에서 관우의 실책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관우의 일화를 종합해보면 관우는 일반 민중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한 사회의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상류층, 지식인층과는 척을 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정치인으로서의 관우는 자신의 성격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 유비가 인정한 능력있는 인재 반준과 화목하지 못했다. 노숙과의 회담에서는 오히려 노숙의 말빨에 밀렸다. 외교 관계를 다루는 것은 그다지 뛰어난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상대국의 군주인 손권을 대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보였다. 다만, 손권 역시 지원군을 고의로 늦게 보내거나 느닷없이 관우 본인에게 혼담을 제의하며 딸을 사실상 인질로 내놓으라고 하는 등 어그로를 끈 것도 있다. 

    • 미방과 사인 등 다른 부하들과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 병사들에게 잘 대해주거나 봉수대나 성채를 쌓으며 대비한 것을 보면 군정의 사령관으로써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것 같다. 번성 전투에서 물자 부족 현상을 겪었다. 단 이 문제는 군수물자를 대는 미방과 사인 두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처음엔 미방을 제외한 남군사람들은 항복의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여몽을 역습하려다가 우번의 간파로 인해 실패, 이후 여몽이 점령군의 군기를 엄정히 단속하여 고향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후히 베푸는 정치를 하자 여몽의 통치에 백성들이 관우로부터 이탈했다.

    • 인의지사 유비를 제치고 관우가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된 데에는 그의 용맹 뿐만 아니라 충의와 신의로 대표되는 그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관우가 신격화된 것이 따지고 보면 그의 충의지사의 모습 때문이다.

      • 관우는 유비와 같은 침상을 쓰고 은혜가 형제와 같을 정도로 군신의 관계를 뛰어넘어 평생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 조조 밑에서 원소군의 최고 장수 중 하나인 안량을 베는 엄청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관직, 보화를 모두 내놓은 채, 유비를 찾아 길을 나섰다. 당시 유비는 근거지로 삼았던 서주를 잃고 원소의 객장 신분으로 잔여 세력을 추스리고 있을 뿐, 헌제의 밀서를 받았다는 정치적 입지를 제외하면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유비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주군의 부하가 된다는 것이었으나 관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옛 주인에게 돌아갔다.

      • 연의에서 유비와 떨어져 있는 동안 형수님들을 잘 돌봐준 것은 창작이다. 정사에서는 선주전에 유비의 처자가 관우와 함께 잡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형수들의 행방에 대한 언급이 없어 유비에게 같이 데려갔는지조차 불분명하다.

      • 연의에서 여섯 장수를 베며 오관을 돌파하며 천리길을 달려 유비에게 향하는 장면도 창작이다.

      • 연의에서 화용도에서 조조를 보내주는 장면은 관우의 의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나관중의 창작이다.

      • 정사에서도 유비는 관우의 충의에 보답하고자 관우가 죽은 일로 인하여 위에 대한 북벌을 미루고, 그 병력으로 오히려 오를 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

      사방장군 에피소드에서 보이는 유비와 관우와의 관계

      보통 이 에피소드를 관우의 굳센 자부심으로 인한 오만으로 보는것이 전통적인 해석이고 실제로 그러하다. '그래도 관직을 거부하지 않고 비시의 말을 듣고 깨우쳐서 관직을 즉시 받았으니 뭐 반발이랄것도 없지않나? 살짝 툴툴거렸다가 비시가 잘 타이르자 어험~ 하면서 넘어간건데 그냥 일종의 헤프닝 정도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관우가 이치에 맞는 말은 알아듣는 사람이라며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근데 좀만 찾아보면 흥미로운 지점은 이 당시 제갈량이 보였던 걱정이나 그에 대한 유비의 반응이다. 제갈량은 관우의 반응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간언하는데 유비는 의외로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곧바로 비시를 보내 관우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는데 여기서 중요한것이 바로 내(유비)가 직접 관우에게 이 상황을 이해시키겠다면서 비시를 보낸것이다. 즉 여기서 파견된 비시의 말은 유비에게 직접적으로 언질을 받았거나 비시가 유비의 뜻을 알아서 파악하고 관우에게 말한것으로 비시의 말은 비시의 조언이기도 하지만 실제론 유비 자신이 관우에게 간접적으로 한 말이기도 한 것이다.

      후에 관우가 죽었을때 '유비가 관우가 죽었는데 복수하지 않을리가 없다'라는 말까지 적국의 참모인 유엽에서까지 나왔다. 다른말로 하자면 유비에게 있어서 관우라는 존재는 그만큼 '일반적인 군신의 관계를 넘어서 서로 한마음으로 같이 함께하는 영혼의 동반자'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유엽의 경우 어쨌든 상하관계이므로 '부자관계'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정사의 표현대로라면 그 은혜는 서로 형제와 같았다. 어쨌거나 비시의 입을 빌려 유비가 관우에게 하는 말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내가 한승(황충)을 너랑 같은 반열에 올려서 네가 화낼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한고조가 한신을 최고 반열로 올렸다고 오랜시간 같이 있던 소하나 조참이 화냈다는 얘긴 없잖지 않은가? 나는 네가 그런면에서 그렇게 화내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한승이 일시적으로 큰 공을 세워 관호를 높이 올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한승과 같은 취급을 하는게 아니야, 운장이 나한테 있어서는 더 소중한 존재야. 우리 사이가 그런 군호와 봉록의 차이로 이제와서 흔들릴거라고 생각친 않아, 우린 언제나 그랬듯이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한다. 그러니까 부탁이다, 이 관직을 받아줘라, 그렇지 않으면 너 역시도 마음속으로는 후회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살펴줬으면 한다'

      그리고 관우는 이 말을 듣고 즉시 관호를 받는데 흥미로운건 비시(의 입을 빌린 유비)의 말에선 황충이 충분히 높이 올릴만한 큰 공로를 세웠지만 관우 자신과 대등한 공을 세웠으니 인정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더 중요하게 나오는건 다른 누구보다도 유비(나)한테 있어선 관우(네)가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단순한 이익같은 것으로 서로를 재단할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관우는 언제 황충을 비하했느냐는 듯이 그걸 받아들인다. 

    • 관우가 화가 풀린 이유는 물론 그 말이 이치에 맞는 말이기도 해서였기도 하지만 '항상 관우 자신만을 가장 최고라고 생각하던 유비'가 '어느새인가 자기보다는 덜 신경쓰고 있던 급이 낮은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보고 있는게 아니냐'(장비는 자신보다 급이 낮다고 할 수는 없고 자신과 함께 처음부터 유비를 섬겼으니 제외)는 불만과 서운함, 질투를 풀어주는 말이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관우는 제갈량이 처음 들어왔을때도 유비와 제갈량의 정이 날로 깊어가는걸 보고 장비와 함께 질투한적이 있었다가 유비의 말로 풀어진적이 있었고 명망이 높은 마초 상대로도 그가 들어오자 '마초는 어떤 사람이냐?'라고 제갈량에게 묻고 '관우 당신보단 못할것.'이라는 말에 기뻐했다. 

    • 그가 평생 보여준 자부심과 오만은 '그가 평생을 두고 사모하고 충성을 바친 유비의 세력에서 내가 가장 그에게 총애받는 사람이고 천하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그 사람(유비)에게 있어선 언제나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갈량은 그 질투(...)를 직접 받아보고 관우 상대로 별명을 부를 정도로 친분을 가지면서도 항상 조심했던 사람 입장에서 정말로 그런쪽으로 우려했을 수 있다.

      유비의 숙적이었으나 한편으론 그를 자신과 대등한 영웅으로 인정하고 두텁게 대했던 조조 밑에서의 관우는 오만한 모습을 보여준적이 없다. 항상 장료나 서황같은 같은 항장들과만 교분을 가지며 몸가짐을 삼갔고, 조조가 곧바로 눈치를 챘을 정도로 유비를 그리워하고, 조조의 은혜를 부담스러워해 한숨을 쉬었지만 '언젠가 은혜를 갚고 함께 죽기로 약속한 유장군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줬지 조조나 그 아랫 사들에게 함부로 했다는 기록은 없다. 

    • 이렇게 보면 손권에 대한 그의 적대감이나 대놓고 무시 같은것도 손오동맹 과정에서 손권측이 보여줬던 '감히 내가 최고라고 인정하고 충성을 바치는 사람(유비)을 홀대한 것'에 대한 앙심에 가까운 것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비에게 있어서도 그게 딱히 틀린것은 아니었을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관우가 죽고 나서 유비가 반대하는 여론들을 뿌리치고 결국 선택한게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와 관우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비와 관우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번성 공방전 시점에서는 벌어져 있었으리라는 주장이다. 이는 관우가 조조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데도 유비가 전혀 지원하지 않았고, 관우가 죽은 후에 슬퍼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관우가 죽은 후에 작위를 내리지도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참고 번성 공방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북벌 초기에는 압도적인 전과를 올렸으니 지원이 필요하지 않았고 관우가 죽은 것은 결과론일 뿐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설명 쪽이 결과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 거대 세력인 조조와의 전쟁을 시작한다면 북벌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원군을 보내서 전력을 보강하거나 한중 방면 등에서 협공하는 식으로 지원하는 편이 자연스럽고, 초기에 대승을 거둔 시점에서 보더라도 조조가 대군을 동원해서 다시 반격해올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서 관우가 죽은 후에 관우의 죽음에 분노해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켰으며 타국에서조차 유비와 관우는 부자의 관계와 같으므로 복수를 하지 않을리가 없다고 할 정도였으므로 그가 관우와의 관계가 벌어졌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한 다른 근거들로 따져도 유비가 관우를 추봉하지 않았고 관우가 장목후(혹은 장무후)로 추존된 것은 유선의 재위 말기의 일이라는 점은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이 시호를 받은 것도 같은 시점이라는 점에서 유비와의 관계를 의심할 이유로 보기는 어렵다. 유비 생전에 유비보다 먼저 죽은 신하들 중 시호를 받은 것은 오로지 법정 뿐으로 익주평정에 많은 공을 세워 그토록 유비가 죽음을 애석해 했던 방통도 시호를 받지 못했다. 

    • 유비가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면서도 왜 공신들에게 작위를 내리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번성 공방전 시점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수수께끼이다. 다만 상용에 있던 유봉이 관우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유봉이 죽음에 이르는 한 원인이 되었으므로 여차하면 상용의 유봉, 맹달이 지원할 것이라 여겼을 수도 있고, 실제 관우는 한 지역에 진수하는 도독으로서 그런 지원을 요청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또 유비는 황제에 즉위한 이후 이릉대전을 치루고 성도로 귀환하지 않고 백제성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미처 그럴 여유가 없었을 가능성도 크다.

    • 성품

    • 동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관우를 굳세고 자부심이 강한 오만한 성격이라고 평가했다. 그를 형처럼 따랐던 장비와 가장 대비되는 점인데 장비가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어 군자는 예우하고 소인에겐 가혹했다면 관우는 아랫사람들에겐 관용을 베풀었지만 기득권층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트러블을 일으킨다.


      오늘날에 등장하는 삼국지 관련 창작물이나 관련 논의에서 관우의 부정적인 면모를 드러낼 때는 주로 관우의 오만함을 강조한다.

    • 제갈량으로부터 마초보다 관우가 낫다는 답장을 읽어보고는 아주 기뻐하여 주변의 빈객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 황충이 자신과 동렬에 놓이자 황충을 노병이라며 자신과 동렬로 두지 않으려 했다. 물론 비시가 지적하자 곧바로 반성하는 대인배 기질을 보이기도 했다. 손권이 정략혼을 하러 권하러 오자 그 사신을 모욕하며 쫓아냈다. 아무리 손권에게 악감정이 있다고 하더라고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한 지역을 진수하는 사령관으로써 외교적 자질이 떨어진다. 

    • 관우가 평소 미방을 업신여겼다는 서술이 분명히 있다. 단 미방의 경우는 명백하게 자기 자신이 군법에 연루될 죄를 지었다. 동맹국 군주 손권에게 오소리 새끼라고 비방하는 등 함부로 대했다. 단, 당시 손권이 관우에게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언질을 준 후, 고의로 지원군을 천천히 보낸 것이기 때문에 욕이 튀어나올 만한 상황이긴 했다. 

    • 소인에게는 온화했던지라 관우는 우금과 3만의 포로들을 살려두었고 이들도 먹여살리려고 했다. 이는 군량과 포로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포로들을 집단 학살했던 다른 역사적 인물들의 사례에 비춰보면 확실히 관용적인 태도였긴 했지만, 그 해결책이 동맹국이었던 오나라의 군량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여몽이 언급했듯, 백성에게 너그러운 정치를 펼쳤다고 볼 수 있지만 그위에 있던 지방호족은 지나치게 엄격하게 다룬면이 있다. 

    •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반준. 관우의 성격적 특징으로 보통 오만함을 주로 손꼽는 경우가 많지만 관우가 보여주는 중요한 일관적인 특성중에 하나가 바로 언행이 완전하게 일치되어 희노애락의 속마음이 겉으로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몇번이나 두씨를 준다 약조한 조조가 약속을 깨자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했고 조조를 죽이지 않아 화를 당한 주군 유비를 상대로 대놓고 '제 말을 그때 들었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겠습니까?'라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 조조 밑에 있을때도 조조가 눈치 챌 정도로 불편한 심기가 있어 장료에게 속을 떠보라고 시켰을때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조조를 떠나 유비 곁으로 어떻게든 가겠다는 속을 드러내 장료조차 이걸 말하면 혹시라도 관우가 죽지 않을까 걱정했을 정도였으며 이후 조조가 더 무겁게 은상을 배풀어도 그걸 봉인하고 애당초 약속대로 홀연히 떠난다. 

    • 형주에선 대놓고 유비에게 총애받는 제갈량을 질투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또 제갈량에게 마초보다 그대가 낫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황충과 같은 대우라는 점에서 화를 내기도 하지만 비시가 깨우쳐주자 바로 화를 풀기도 한다. 여기에 정치 문제에서도 나오는 얘기지만 사인과 미방의 실책에 대해서도 직설적으로 질책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고, 직설적으로 손권세력과 마찰을 빚고 아랫사람에겐 관대했기에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3만포로를 먹여살려야 한다는 입장에 처하자 주저없이 상관의 쌀을 가져오기도 한다. 

    • 번성공방전 당시 서황과의 대화에서도 서로 친했기에 사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서황이 이것은 나랏일이라며 태도를 싹 바꾸자 당황하려 두려워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담대한 영웅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관우는 무쇠처럼 굳은 사나이기도 했지만 항상 생각과 마음, 신념이 몸과 하나가 되어 있어 감정과 생각이 직설적으로 나가는 사나이였다. 사실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관우지만, 동시대엔 관우보다 더하게 오만하거나 성격이 나쁜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관우의 오만한 성정이 특히 더 돋보인 것은 관우의 이런 솔직한 면모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 의외로 자신이 인정한 자들에게는 진중하거나 친근한 태도를 보였고 잘못된 것을 듣고 시정할줄 아는 풍모가 있었다, 장료와 서황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장료에겐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인 유비에 대한 충정을 토로했고 비록 섬길 마음은 없었으나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그가 베푼 재물, 벼슬도 받지 않은채 홀연히 떠났다. 

    • 서황과 적으로 만나서도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다가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황한 기록도 있다. 처음엔 제갈량을 못마땅히 여겼지만 나중에 형주에 진수했을때 제갈량과 딱히 갈등이 있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을 보는 제갈량의 안목을 믿고 마초를 평가해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그의 칭찬에 기뻐했다. 

    • 황충을 노병이라며 못마땅히 했지만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비시의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는 면도 있었다. 적의 장수 방덕을 잡고 그를 높게 평가해 회유하고 장수로 삼으려는 태도도 보여주었다. 이런 면모가 그가 국사의 풍모가 있었다는 평가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 손권 관련 옹호

      손권은 유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단으로 손부인을 데려가고 유선을 납치하려 했으며 더 깊게 생각하자면 손가와 유가는 원래부터 원수지간이다. 촉한의 유비는 유표와 형 동생하며 지낸 적이 있었고 유비는 유표의 후사 문제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유표와 어느 정도 의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문제는 유표가 동오의 손권에게는 뭘로도 갚을 수 없는 커다란 원한이 있다는 점. 유표가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을 죽게 했기 때문이다. 형주의 점유는 이미 선대인 손견, 손책 때부터 손권 자신이 부친의 원수인 유표를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적벽 이후 바로 형주를 공격했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손가의 오래된 염원이기도 했다.한마디로 손권에게 형주 쟁탈은 단순한 땅따먹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인 손견의 넋을 달래줘야 한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었다. 

      정사에서 관우가 평소 미방 등에 대해 업신여겼다는 서술이 분명히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방의 경우는 명백하게 자기 자신이 군법에 연루될 죄를 지었던 것이고, 미축전에서도 미방이 평소 사적인 원인으로 관우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언급할 만큼 처신이 좋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를 관우가 이를 질책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미방이 오와 내통한 시점은 관우의 북정 당시 관우가 '돌아와 죄를 묻겠다'고 하기 전에 남군의 물자를 태워먹은 중죄가 있어 관우가 크게 질책한 시점이다. 즉 관우가 적과 대치하기 이전 시점부터 미방은 배신할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상급자로서의 관우가 그에 대해 처벌을 논하는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후방에 놔둔 두 사람에 대해서 군수물자를 제대로 대지 않은 것에 대해 죄를 물을것이라고 언급한 면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방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질책하여 불안감을 키웠다며 관우의 용인술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형주와 익주를 손에 넣은 이후 유비군은 법률인 촉과(蜀科)를 만들었으며, 이에 따른 명확한 일처리와 법률로서 행정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처벌을 확실히 제시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 미방은 형인 미축과 함께 과거 서주 호족 출신으로 벼슬을 버리고 유비를 따른 사람이며 한때 유비의 인척이기도 하였으니 오래 같이 지낸 동지였다. 비록 '공신 미축의 동생'이라는 것 외엔 유비군내에서도 존재감이 부족하고 큰 실수를 여러번 했더라도 배려심을 가지고 좀 더 다독이고 정신적으로 위로할수도 있는 면이 분명 존재했다. 이는 인사상 관우의 실책인 부분이고, 높은 직책에 있던 이들에게는 냉정하고 오만하게 굴었던 관우의 성격적 결함으로 보는 것이 맞을것이다. 본디 관우는 원래 힘있고 빽있다고 그런거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 정사에도 나오지만 성정 자체가 일단 자기보다 아랫사람엔 너그럽고 온화한 사람이지만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강하게 나오는걸 서슴지 않은 사람이고 미방 입장에선 그래도 '내가 그래도 누군데 그렇게 법대로 처리해버리면...'하면서 불만이 있을수 있다. 관우는 애초에 그런 사정봐주고 하는거랑 거리가 먼 인물인 만큼 ('처벌을 받고 싶지 않다면 똑바로 하라'는 경고성 멘트의 성격도 있었겠지만) 이 부분에서 관우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안에서 처음부터 수비하려하고 오군의 항복 사자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다가 내통자 미방으로 인해 미리 대비하기도 전에 오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눈물을 흘리며 마음에도 없는 항복을 하고 항복하고서도 미방과는 달리 '억지로 항복한 것이니 사인은 남군으로 끌고 가야한다.'라는 소리를 듣고 후에도 귀한 대접 같은 일을 받은바 없는 사인 의 예도 있다. 정말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질책했다면 미방과 달리 사인이 본인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오와 내통하지 않고 자기 한계내에서 소임을 다하려고 했다는게 설명되지 않는다. 

    • 여기에 미방이 남군성을 들어 바쳤을때 이 당시 유비세력이 과거와 달리 명확한 법처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사람들이 관우의 처리가 사리에 맞지 않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시 그 휘하 관원들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두려워했을것이고, 미방이 남군태수인 만큼 미방 휘하 남군성 중요 인원들이 미방의 편을 들 수도 있었거나 미방이 그들의 협조를 구하며 포섭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정작 항복 과정에선 미방 혼자 배신하여 누구도 미방의 배신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오히려 남군측에서 여몽에게 역습을 가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 당시 강릉의 전황을 보면 미방빼곤 아무도 항복할 생각이나 오나라가 처들어 온다는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거의 미방의 독단적인 배신이었고, 여몽 상대로 반격을 준비하다가 우번의 진언으로 진압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 지경인건 미방빼고 다른 남군성 관리들이나 사람들이 미방이 관우가 관수물자를 태운 죄과를 처벌한다고 설마하니 오나라로 배신할 정도로 신변을 위협당할 처벌은 아니었다 생각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합비 공방전 당시 서로 사이가 나빴던 장료악진이전은 손권이 처들어오자 불편한 감정은 일단 뒤로 미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물며 자신의 잘못한 일이 있음에도 관우가 질책한다며 내통을 계획한 미방의 일과 비교가 안 될 수가 없다. 

      사실 형주의 한나라 소속 태수들 가운데 손권이 공격해오자 항복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 모든 사람들이 관우와 사이가 안 좋아서 손권에게 항복한 것은 아닐 것이며 오히려 손권에게 저항하거나 협력하지 않으려 하거나 촉으로 탈출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미방은 유비의 인척이고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숙장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손권과 내통하고 촉에 모반하여 항복한것에 의아해하며 분노했고, 또한 그 이유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정사는 미방의 항복을 당대 관우의 관계에 주목해서 설명한 것이다. 정사 관우전만 보면 미방/부사인 간에 불화가 있었고 관우의 업신여김에 원한이 있던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한 기록 이 남아 있고 오서쪽 기록을 보면 미방이 항복한 이유가 더 분명해지면서 단순히 관우의 오만한 성격을 견디지 못해서로만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비슷한 불화를 겪은 사인이 처음엔 항복하지 않으려다가 항복한 이유도 공안이 고립되었으니 덧없는 저항은 그만두고 항복하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사를 종합해보자면 미방은 관우와 분명 사이가 별로였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본인이 잘못을 저질러 관우에게 처벌을 받게 되자 두려워하면서 오의 손권과 내통했다고 되어 있다. 사실 큰 처벌이 두려워서 항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도의적으로는 비난을 받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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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레 연의 이미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적어도 정사 기록만 보면 관우가 딱히 더 강하게 처벌하려고 했다고 보기 어렵다. 추측으로 재단하는거 보다는 기록을 보면 그렇다. 오죽하면 투항한 오나라에서도 미방은 두고두고 까였을 정도였는데 관우가 그 정도로 가혹하게 대했다면 미방을 두둔하기 위해 그에 대한 말이 있어야겠지만 그런건 정사에는 없다. 같이 보급에 소홀한 사인의 경우엔 적어도 항복에 대한 당위성은 미방보다 있었던 편이었고 최소한 이후 조롱을 당한 기록은 없다. 적어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이가 틀어졌다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내통해 형주 방어선을 무력화시킨 미방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어찌보면 사인의 항복이 미방의 내통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인만큼 동급으로 보는거 자체가 사인에게는 억울한 일일 것이다.

      차라리 제갈량 사후 위연처럼 양의가 싫어서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움직인 사례를 개인 감정에 기인한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언정, 미방의 경우는 관우에게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보다는 당시 전황 상 처벌을 피하기 위해 본인의 살 길을 찾아갔다고 보는 게 좀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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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비는 친한 형님이 물려준 땅을 함부로 남에게 내줄 수 없는 노릇이고 손권으로서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줘야만 했다. 굳이 관우가 아니어도 형주 문제로 인한 촉한과 동오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그 자리에는 삼국지에서 가장 욕을 안먹기로 소문난 조운을 앉혀놔도 결과는 다를 게 없는 상황이였다. 다만 유비로서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영토였기 때문에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앉힌 것일 뿐이였다.

      손권의 형주 침략 전, 이미 형주 분쟁으로 유비와의 동맹이 거의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손권의 혼인 제안은 꿍꿍이가 어떻든 겉으로나마 동맹 강화에 목적이 있었긴하다. 앞서 유비의 뒷통수와 손권의 손부인을 통한 납치 시도 그리고 익양대치를 통해 험악해질 때로 험악해진 두 가문 사이의 화친을 위한 목적일 수도 있지만 위의 손씨와 유씨 집안 사이의 문제도 있었고 관우를 손권이 동맹으로서 손부인이 유비 옆에서 군사와 관리를 거느리고 위협을 가하고 오라버니의 위세를 믿고 행패를 봤던걸 똑똑히 봤던 사람이라 혼인동맹이랍시고 손권이 무슨짓을 할 지 모르는데 결혼동맹을 마뜩치 않게 봤을 공산이 크다. 

    • 당장 손오동맹을 이끈 제갈량마저 법정과의 자리에서 손부인의 패악이 크다고 한마디 했을 정도였고. 거기에 어쨌든 이런 혼사를 얘기할거면 관우의 주군 유비에게 먼저 얘기해야지 관우에게만 통보식으로 얘기하는건 안 그래도 형주에서 독자적인 군권을 지닌 관우를 떠보는 것과 동시에 주군 유비를 무시하는 행위인데 관우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 무리밖에 되질 않는다.

      형주 침탈은 멸망 때까지 오라는 국가의 방향을 결정지었던 사건으로 어제의 적도 오늘의 아군이 되는 난세에 이같이 중대한 결정을 단순히 손권이 관우에 대한 개인 감정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건 지나치게 단편적인 생각이다. 손권이 관우를 배신한 이유는 관우가 손권을 업신여겼던 탓도 있겠지만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 노숙의 대를 이어 군권을 잡은 여몽 또한 서주 라인보다는 장강을 포함하는 강릉 지역을 차지하는 것을 손권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손권은 여몽이 처음 노숙의 뒤를 이어 부임하자마자 손권에게 말한 것을 받아들인 것에서 볼 수 있 듯 형주를 공격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손권 세력은 관우를 잠재적 위험 세력으로 보고 있었고, 손권이 합비에서 패배한 이후론 관우를 치자는 여론이 팽배해 있었다.

    • '충성스럽고 의로우며 신급의 엄청난 무예에 신령이 돕고 인자하며 용맹스럽고 위엄이 당당하신 관씨 성을 가지신 성스러운 대황제 폐하'이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거창한 칭호. 칭호가 너무 길어서 줄여서는 관성대제(關聖大帝), 관제(關帝)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칭호를 올린다는 것이 관우에 대한 옛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저것도 완성본이 아니고 최종 호칭은 광서제 5년(1879년)에 추봉된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이다(...)

      본래 관우는 조익이 지적했듯이 장비와 함께 남북조 시대에는 관장지용이라고 해서 용맹한 장수의 이름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주로 쓰였고 신으로서의 위상은 지역신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조 양나라 말기 후경의 난(548~552)때 난을 진압하던 육법화가 후경의 부장 임약을 대파한 일이 있었는데 많은 강릉의 신들이 육법화를 도왔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때 관우의 신령도 그를 도왔다고 한다. 당 고종 의봉 원년(676년)에 관우를 옥천사의 가람 수호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관우 혼령이 옥천사 아래에 머물면서 이 지역의 흥망과 농사의 풍작을 좌우했다는 전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북송에 들어서 민간과 관에서 관우에 대한 신앙이 급속도록 퍼진것으로 보여지는데 우선 관우의 고향이었던 산시는 소금이 많이 나는 지역이었고 이 지역 상인들은 소금으로 부를 얻었다. 중국의 상인 집단 가운데서도 으뜸인 관우의 출신지인 진상(晉商), 산시 상인들은 신용을 으뜸으로 여겼고 관우가 가진 신의, 의리와 충실함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관우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삼았고 이후 이들이 전 중국에 퍼지면서 관우는 상인들의 재물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한다. 

    • 송나라 시기 서민 문화의 발전으로 삼국지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각지에서 꽃을 피웠고 관우의 이야기 역시 중요 인기 소재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시기 삼국지 이야기엔 파천황적 서민 이미지인 장비의 인기가 높았지만 관우의 이야기도 퍼져나갔고 상인들이 재물신으로 여기는 풍조로 인해 일종의 신성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관에서도 이런 분위기에 맞추어 관우를 국가의 수호신으로 삼기 시작했는데 1096년 송철종은 관우를 현열왕으로 봉하고 뒤를 이은 송휘종은 충혜공으로 봉하였다. 이후 숭녕지도진군, 무안왕 등으로 높여 국가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어느덧 민간에서는 관우의 혼령이 치우를 물리쳤다는 전설도 나타났다. 이를 '관운장대파치우(關雲長大破蚩尤, 관우가 치우를 박살내다)'라고 한다. 황제 때 치우를 물리쳐 해주 염지에 장사지냈는데 치우 혼령의 행패가 심하니 장천사 를 불러 관우의 혼령을 불러 치우를 격파하면 된다 하여 대신 여이간을 옥천산에 보냈고 관우는 옥황상제에게 신묘한 군사를 통솔하여 해주로 가서 치우를 격파했다는 것이다. 

    • 관우가 숭녕진군이 된것은 이 공이라는 전설이다. 위에서도 나왔지만 해주는 관우의 고향이며 염지는 소금호수를 뜻한다. 치우 관련으로 언급되는 관우에 대한 이 지역 민간전승도 그렇거니와 이는 관우가 이 지역 소금상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들의 신으로 숭배받았던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래 중국에서는 궁중에서 군신(軍神)을 제사하는 습관이 있었다. 한나라는 치우를 군신으로 섬겼고 당나라는 강태공을 군신으로 섬겼다. 원나라에서는 마침내 관우가 치우와 강태공을 앞질러 군신의 자리에 올랐다.


      재밌는것은 이미 송나라 시기부터 민간에 떠돌던 관우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인 주창이 이 시기에 관우를 보필하였다 하여 벼슬을 추숭받았다는 것이다. 이 시기 그려진 관우의 그림 에도 주창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하는 등 연의에 나오는 관우의 일화들은 이미 북송 시기에 그 원형이 완성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있고 이런 민간의 분위기에 맞추고 유교적 충의에도 맞는 관우를 나라의 수호신, 군신으로 모신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관우를 재물신, 군사 관련 직종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풍조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생긴 것이다. 이후 명, 청에서도 관우를 황제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높게 추숭해 오늘날의 관우신앙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근세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관우는 나라의 공적인 차원에서 강조한 호국신의 이미지와 민간에서 소금과 관련된 재물신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재물과 복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의미가 컸다. 현대에는 중국에서 군인으로부터 경찰 등 무(武)와 관련된 직종은 물론, 상인,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거의 만능 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민간층에서 폭넓게 사랑받는 신이다.

      덤으로 함께 처형된 맏아들 관평도 '알충왕(謁忠王)'이었다가 청나라 시대에는 '영후태자(靈侯太子)'라는 호칭으로 덩달아 신격화가 되었으며, 가공인물인 심복 주창도 항상 관평과 함께 좌우를 시위하는 형태로 '위령우용공(威靈愚勇公)'이라 불리고 있다.

    • 중국은 성인의 무덤을 일컬어 림(林)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 무덤에 수풀 림(林)을 붙이는 경우는 딱 두 사람에게 한정된다. 하나는 공자의 묘인 공림이고, 또 하나가 바로 관우의 묘인 관림이다.

      베이징에 위치한 역대제왕묘에는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와 공신의 위패가 모셔졌는데, 관우의 경우 신하의 신분이지만 황제의 칭호를 받은지라 지위가 애매했던 모양인지 공신 위패 중에서 관우만 따로 건물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요재지이에 등장하는 설화가 하나 있다. 요괴가 매우 날뛰는데 관성제군은 대체 뭐한다고 안 도와주냐고 욕하던 한 서생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검은 얼굴의 무시무시한 신장이 내려와 요괴를 해치우고는 자신이 주창이라는 것을 밝힌 뒤 관성제군은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라며 관성제군을 욕했던 서생을 혼냈다. 그 서생은 이후로 다시는 관성제군을 욕하지 않고 열렬히 제사를 지냈다. 이 외에도 관우의 인기에 힘입어 나온 설화도 무지막지하게 많다. 주판을 관우가 발명했다는 민간 설화도 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마을이 변방이든, 마을이 궁핍하든 지나가는 모든 마을에 관제묘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관우 신앙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작게는 가게 안이나 마을에, 크게는 각 도시별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제묘(關帝廟)가 존재한다. 또한 관우의 무덤도 중국 내에 다섯 개 이상된다. 참수되어 조조에게 보내진 관우의 수급이 묻힌 낙양 관림(關林)과 머리없는 관우의 몸을 묻은 당양의 관릉(關陵)은 물론이고 관우 옷 무덤, 관우 공적 무덤 등등 확장판이 널려 있다.

      중국 연합 준비은행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한 10원 짜리 지폐에 관우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게다가 문화대혁명의 물결 속에서도 관우 신앙만큼은 다른 문화 파괴 행위에 비하자면 멀쩡하게 살아남았단 걸로도 그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최근의 관우라는 인물의 캐릭터 해석에 있어서 창작물에서 관우가 이렇게 저렇게 표현되니 그걸보고 중국에서 관우의 신성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나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군신(軍神)이자, 재물신인 관우의 위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중국드라마 삼국에서 해석된 '오만한 관우'상을 보고 한국인들이 단편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 관우의 오만에 대해선 이미 300년전 삼국지연의를 재정립한 모종강부터가 관우가 손권 혼인 거부건으로 '호랑이 자식을 개새끼에게 줄 수 있는가?' 라는 모욕을 주어 욕한 발언을 가지고 '그럼 니 의형은 개새끼와 결혼한 셈이냐?'라고 협평으로 깠고 나관중본에서 관우가 신으로 승천하는 장면을 참수당하는 장면으로 바꾸어 놓는등 신으로서 표현되던 관우의 위상을 다시 재창작했다. 그러나 모종강본이 삼국지 독서계를 장악한 청나라 시기였음에도 관우 신앙은 오히려 더 성행하였다. 

      중화권의 유명 삼국지 만화 화봉요원에서 관우는 적장과 일기토를 함과 동시에 군대를 자유자제로 지휘하는 궁극의 신인으로 묘사되고 정사에서 관우가 황충에게 했던 노병 발언을 가지고 "이 우는 노졸 따위와는 같은 열에 서고 싶지 않소. 허나 마지막 남은 촛불이,대지를 불태우며(燎原) 태양과 같이 찬란히 빛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소! 지금 우리 눈 앞에는,천년의 기회가 펼쳐져 있으니까! 이 마지막 한 걸음,관 모는 그대를 위해 남겨두겠소!"라고 삼국과는 다른 방향성으로 관우라는 인물을 어레인지 하고 있다. 굳이 하나의 창작물에서 나오는 관우 캐릭터로만 그 사람들이 '관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편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것이다.


    • 한국

      역사

      한국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관제묘가 지어지는 등 명군에 의해 관우 신앙이 한국에도 전파되었다. 이 당시에 관우가 전장에서 나타나 왜군을 베었다...는 이야기도 꽤 퍼졌는데, 아무래도 언월도 들고 설친 명군을 보고 설레발을 친 듯 하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유격 진운홍이 울산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숭례문 밖에 머물렀는데 후원(後園) 위에 있던 오래된 집을 이용해 관왕묘를 세우고 소상(小像)을 설치하면서 조선에 장인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이 남묘의 시초로 1598년의 일이다. 

    • 이 시기 명군에 의해 지어진 대표적인 관왕묘가 임란중 진린이 세운 전남 완도군 고금면 묘당도의 관왕묘인데 1666년 조선 현종 때 관왕의 양옆에 이순신 장군과 진린 장군의 초상을 모셨다. 일제 때 관왕묘는 폐허가 되었으며 이후 사당은 이순신의 사당이 되고 관왕묘비만 남았다. 이외에도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이 함께 싸운 남해안 일대에는 이순신의 사당과 관묘 등이 세워졌다. 1599년에는 조선 조정에서도 공식적으로 관왕묘의 건립이 논의되었고 1601년 8월에 가서야 일단락되었다. 

      임진록에서는 관우 신령이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꿈에 나타나 만력제는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의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니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라고 한다. 전란중 관우의 음덕(陰德)으로 임진왜란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믿음이 명나라 병사들과 같이 싸우던 조선의 병사들에게도 퍼져나가 민간신앙으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기담서인 임방(1640~1724년)이 지은 천예록에서도 관우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관우의 신령이 한강을 건너던 한 선비의 꿈에 나타나서, "잠시 후면 어떤 나무 상자를 들고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그들에게 내가 그대 손에 그려준 문양을 보여주면 그들이 알아서 정리될 것이다. 그리고 궤짝을 쌓아두되 절대 열어보지는 말고 신속히 조정에 보고하여 속히 태워 없애 버려야 한다. 이는 나라의 대사이니 결코 처리가 잘못 되어선 안된다"라고 말했는데, 놀라서 깨어난 선비가 자기 손을 보니 과연 관우가 써준 문양이 있었다. 

    • 이후 정말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무 상자를 나루터에 내리려 들 때, 선비가 그들에게 문양을 보여주니 놀라서 혼비백산하다가 전부 물에 달려가서 빠져 죽었다(…). 이후 선비는 주변사람들에게 상자를 절대 열지말고 대기하면서 지키라고 명한후 근처 관청에 자기 얘기를 들려주고, 놀라 달려온 병조의 관헌들과 함께 불에 상자를 태워 없앴는데, 타면서 드러난 상자의 안에는 나무로 된 군사와 군마의 모형들이 가득 들어있었다고 한다. 

    • 이 모형들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로서 요사한 자들이 환술을 부려 도성을 혼란하게 하려는 수작이 드러났다는 기술로 보아 모종의 사악한 주술을 걸려는 세력이 있었던 모양.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관우 신앙은 더욱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조선 19대 국왕 숙종은 본격 관우 빠돌이로 신하들에게 관우 신앙을 강요했다. 관왕묘에 지내는 제사를 정례화하여 국가 차원으로 관우를 섬겼고 자신의 뜻대로 모든 지방의 관왕묘에 정기적으로 향축을 하도록 명하게 된다. 당시 좌의정 서종태는 숙종에게 관우 신앙을 자제하라고 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숙종은 숙종 18년인 1692년에 시 2수를 지은 후 어필 목판을 내려 동묘와 남묘에 걸어 두도록 했고, 1701년에 숙종은 모든 지방의 관왕묘의 제식을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하였으며, 매년 경칩과 상강일에 향축하도록 하였다.

      영조는 영조 22년인 1746년에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라는 현판을 써서 두 관왕묘에 걸도록 했다. 정조도 관왕묘에 관심을 기울여, 1786년에 친히 관묘악장(關廟樂章)을 지어 처음으로 관왕묘의 행례(行禮)에 쓰게 하였다. 1832년에는 순조가 남관왕묘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이후 고종 황제도 관우 신앙에 마음이 많이 기울었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 관우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로 추존했다. 고종대에는 북묘와 숭의묘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북묘는 1883년(고종 20)에 만들어졌고, 숭의묘는 1903년에 완성되었다. 

      대한제국기인 1908년에는 칙령 제50호 향사이정에 관한 건(享祀釐正件)이 통과되면서 관왕묘에 대한 국가의 관리가 없어졌다. 기존의 조선 예절은 너무 번잡하여 근본을 잃게 되었으며 이른바 유신(維新)을 지향하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제실(帝室)에 관계되지 않는 제사는 궁내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 칙령의 요지였다. 이 칙령에 따라 숭의묘, 동묘, 남묘, 북묘 및 지방 관왕묘의 제사가 폐지되었고, 숭의묘와 북묘는 국유로, 동묘, 남묘 및 지방 관왕묘는 해당 지방 관청으로 넘겨 백성들의 신앙에 따라 따로 관리하도록 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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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기 대한제국은 말이 제국이지 사실상 통감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일제가 조선의 법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같이 폐지된 것 같다. 이후 서묘는 1909년 동묘에 합사(合祀)되었고, 북묘는 1910년에 헐어버려 흥인지문 밖에 위치한 동묘만 남게 되었다. 

    • 관우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무당 진령군이 명성황후의 앞일을 몇개 기똥차게 맞추자 명성황후는 그녀를 거의 숭배자 수준으로 믿게 되어 황실의 돈을 엄청나게 탕진했다. 해방 전후의 정치인 여운형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당시 명성황후 가 아꼈던 무당 진령군이 여씨 집안을 관우를 죽인 여몽과 같은 성씨 쓰는 집안이라고 저주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안 그래도 정계에서 멀어진 여씨 집안은 출세길이 아주 막혀버려 정치 문제에 신경이 크게 곤두서버리게 된다. 

    • 이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구습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여운형은 어려서부터 미신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이 관우 사당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미신이 퍼져있었는데도 예전부터 관우를 모시는 사당에 들락날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을미사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당 진령군도 죽었다고 한다.

      대한제국 사람인 증산 강일순이 독자적으로 작성한 주문 운장주에서는 관우를 정의로운 신격으로 인정하여 요사한 것들을 쫓아달라고 청하는데, 증산교계에서는 무척 중요하다. 운장주 때문에 증산교인들에게 관우는 중요한 신격되었고 관우 신앙이 사그라든 현재 국내에서 전해지는 관우 신앙은 대부분이 증산 계열 종교인들이나 무속인들이 유지한다고 보아도 된다.

      사실 본격적으로 관우를 신으로 모신 한국의 신흥종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20년 박기홍, 김용식등이 창시한 관성교(關聖敎)라는 종교인데 관우를 숭배하던 종래의 숭신단체(崇神團體)와 무당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동묘가 관성교의 본부였다. 이후 동묘가 서울특별시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동묘 안에 세워졌던 관성교의 건물이 철거되자, 현재에는 제도로서의 관성교는 소멸되고, 다만 신봉자들이 개별적으로 동묘에 참배하고 있다. 

    • 이 종교는 19세기경 등장한 이른바 명성경이라는 서적을 경전으로 삼았는데 1960년대에는 종로, 동대문, 청량리 등지의 포목상인들이 중심을 이루어 포교활동이 활발했으나 신앙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조직기구가 미약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체제는 거의 소멸되었다. 또 해방 직전인 1945년에 계룡산에서 수행하던 김진하가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던 중 '경문'을 받고 관우의 높은 덕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조직했다는 무량천도가 있는데 1990년대부터 자체적인 신격을 모시며 관제에 대한 신앙은 하지 않는다.

      사실 한국의 무속계 신흥종교의 경우 이들이 신으로 삼는 주 대상이 부처님, 단군, 관우인 경우가 상당수 있다. 

    • 지금도 관우를 모시는 관제묘가 다른 곳도 아닌 서울특별시 한복판에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서울 지하철 6호선 환승역인 동묘앞역 인근에 있는 동묘가 바로 관제묘. 임진왜란을 거친 뒤에 만들었으며 선조 34년(1601) 도성내 동서남북에 각각 관왕묘가 세워졌는데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가 소요 비용과 친필 현판을 보내줬다고 한다. 

    •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크고 화려한 동관왕묘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한 채 남아 있다. 동묘에는 고종이 추증한 관우의 시호인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가 현판에 적혀 있다. 동관왕묘는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전쟁 이후에 명나라와 조선에서 우호를 다지면서 굉장히 공을 들여서 지어졌기 떄문에 상당히 수준 높은 문화재다. 

    • 원래 동대문 밖에 동관묘, 남대문 밖 도동에 남관묘, 명륜동에 북관묘,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묘, 종로네거리 보신각 뒤에 중관묘의 다섯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동관묘만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고 남관묘는 일제가 목멱산(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헐어버린 것을 지금의 사당동으로 옮겨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다른 세 곳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동관묘는 특히 성균관의 문묘와 나란히 무묘(武廟)라 불릴 만큼 격이 높았는데, 춘추로 치러지는 대제(大祭) 때에는 임금이 손수 무복(武服)을 입고 참례를 할 정도였으며 지방에도 성주, 안동, 남원, 강진의 네 곳에 조선 조정이 공식적으로 세운 관왕묘가 있었다.  

    • 동관왕묘는 크게 5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중심건물은 관우상이 있는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6칸 크기이며 지붕은 조선시대 전통 양식과 달리 정(丁)자와 일(一)자가 합쳐진 공(工)자 모양을 띠고 있다. 한국 양식이 아니라 중국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관우상은 정전 중앙에 있으며 앞쪽 좌우로는 형주에서 관우를 모신 관평, 조루, 주창, 왕보가 관우상을 호위하듯이 서 있다. 

    • 특히 관우상은 황금색의 금동제로 구리 약 2.4t을 들여 만든 높이 2.5m의 거대한 동상이다. 정전 좌우에는 위패가 있는 동무와 서무가 들어서 있는데 이는 문묘의 건물 배치와 같다. 동, 서무에는 삼국지와 관련한 대형 그림인 '삼국지연의도'가 걸려 있는데 유관장이 도원결의하는 모습, 장비가 장판교에서 조조의 대군을 막는 장면 등이 묘사돼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삼국지연의도 5점을 2년간의 보존 처리를 통해 복원, 전시한 바 있다. 동묘의 출입문인 외삼문과 안쪽의 내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 서울 남산에도 관우를 모신 곳이 있다. 남산공원길 북측 순환로를 걷다 보면 와룡묘(臥龍廟)란 곳이 있다. 서울 지방 문화재 5호로 지정된 곳인데 그 이름대로 제갈량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신격을 모신 사당이다. 안에 들어가보면 처음 눈에 띄는 건물이 역시 '와룡묘'인데, 와룡묘 안에는 제갈공명 소상이 오른쪽, 관우의 소상이 왼쪽에 안치됐다. 일제 강점기에 동묘의 지부를 자처하며 관우의 소상을 모셨다 하니,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관우에 대한 민간 신앙이 꽤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와룡묘를 기도처로 삼아 찾아오는 무당들이 제법 있다.

      종교로서의 체제는 이제 한국 일반에는 잘 남아있지 않지만 일종의 풍수지리와 길흉화복을 다스리기 위해 관우나 삼국지 인물들의 동상을 구입하는 경우가 지금도 종종 있다. 물론 주된 판매 대상은 관우. 네이버에 '관우상'이라고 치면 최고 50만원대의 관우상도 판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인인 우리야 중국인이 아니고 그렇기에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정사 삼국지나 삼국지연의 정도만 보고 관우를 판단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관우야말로 자신들의 영웅이며 신이자 전설이며 역사이다. 

    • 당장 관우가 지켰던 강릉(오늘날의 후베이성 징저우시)을 보자, 오늘날 위에 보이는 거대 관우동상까지 지은 그곳에서는 예전부터 옛 관우의 관저에 관제묘를 지어 그를 기렸으며 연의는 뺨칠 관우에 대한 전설들이 널리 전승되고 있는데 한 예로 당시 관우의 고함소리에 이곳에 있던 바위들이 모두 놀라 북쪽을 향해 솟았고 백성들이 ‘관우의 고함소리에 놀라 산속의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솟았네, 마치 제갈량의 팔괘진을 보는 것 같으니 이에 놀란 여몽의 병사 수만명이 퇴각했네’라고 민요를 지어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 심지어 조조의 본거지였던 한단에서조차 관우가 조조와 지혜 대결을 벌여 간교한 조조의 속임수를 바로 통찰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으며 산시성 난중탸오산(南中條山)에선 80m에 달하는 관우 동상을 세우고 이를 제작하는데만 1억위안, 우리돈으로 180억원 가량을 들이고 정부 지원 없이 현지 민영기업이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 실제 중국인인 장위안조차 '관우는 중국에서 위인이며 제사를 지낼 정도로 좋아한다.'라고 하는 마당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물론 장위안은 다른 예능인 '영웅 삼국지'에선 관우보다도 악비가 더 영웅적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악비 역시 불멸의 영웅으로서 중국에선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그런 그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특이한 일이 아니다.

      모 사이트에서는 관우를 아냐 모르냐가 유무식의 척도가 된다고 한다.

    • 에도 시대에 삼국지가 인기가 있었는데 각종 전통 예술 작품의 소재로 인기가 많았다.

      일본 전국시대의 츠가루번 다이묘 츠가루 타메노부가 관우를 좋아했다. 특히 관우의 길고도 아름다운 수염을 좋아했다고 한다.

      가부키의 여러 공연 중에서도 관우극이 있다.

      일본에서는 요코하마 중화가의 관제묘와 고베(神戸) 난킨마치(南京町)의 관제묘가 저명하다.

    • 미방 관련 옹호

    •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관우를 존경하여 관공(關公), 관노야(關老爺)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원나라 시대 초기 판본인 삼국지통속연의에서는 아예 도원결의 때부터 유비는 현덕, 관우는 관공, 장비는 그냥 이름으로(…) 불린다. 이런식의 삼형제의 호칭은 황제로 즉위한 유비의 호칭이 선주로 바뀌는 것만 제외하면 세 명이 죽을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 여러 시대를 거치며 관우는 급이 승격된다.

    • 북송 상부(祥符) 연간에 칙령으로 관성묘(關聖廟)를 수축했다.

    • 송철종 소성(紹聖) 3년(1096년)에 옥천사(玉泉祠)의 현판을 하사하면서 현열왕(顯烈王)이라 했다.

    • 송휘종 숭녕(崇寧) 원년(1102년)에 충혜공(忠惠公)으로 추봉하고, 대관(大觀) 2년(1108년)에 무안왕(武安王)으로 가봉(加封)했다.

    • 송휘종 선화(宣和) 5년(1123년)에 칙령으로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으로 봉하여 무성왕묘(武成王廟)에 종사(從祀)하게 했다.

    • 남송 송고종 건염(建炎) 3년(1129년)에 장목의용왕(壯繆義勇王)이라 가봉하였고, 송효종 순희(淳熙) 3년(1176년)에 영제왕(英濟王)으로 가봉했다.

    • 원문종 천력(天曆) 연간(1328년 ~ 1329년)에 현령(顯靈)이라고 가호(加號)하였다.

    • 명나라 홍무제 초년에 본래의 봉호대로 전장군수정후(前將軍壽亭侯)라 하였고, 20년에 순천부(順天府) 정양문(正陽門) 밖에 묘(廟)를 세웠다.

    • 정덕제 4년(1509년)에 유도묘(留都廟)의 현판을 충무(忠武)라 하사했다.

    • 가정제 10년(1531년)에 한관제수정후(漢關帝壽亭侯) 라 하였다.

    • 만력제 6년(1578년)에 협천호국충의대제(協天護国忠義關聖大帝) 42년(1614년)에 삼계복마대제 신위원진천존 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 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이라 했다.

    • 천계제 4년(1624년)에 칙명으로 봉사(封祀)하는 축문에 '제(帝)'라고 하라 했다.

    • 숭정제 3년(1630년)에 진원현응소명익한천존(眞元顯應昭明翼漢天尊)라 했다.

    • 순치제 9년(1652년)에 칙령으로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라 했다.

    • 옹정제 3년(1725년)에 증조부는 광소공(光昭公)으로, 조부는 유창공(裕昌公)으로, 부친은 성충공(成忠公)으로 추존.

    • 건륭제 원년(1736년)에 산서관부자(山西關夫子), 건륭 31년(1767년) 존호 영우(靈佑) 추가.

    • 가경제 18년(1813년)에 존호 인용(仁勇) 추가.

    • 도광제 8년(1828년)에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라 했다.

    •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북송 : 현열왕(顯烈王), 충혜공(忠惠公), 무안왕(武安王),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 남송 : 장목의용무안왕(壯繆義勇武安王), 장목의용무안영제왕(壯繆義勇武安英濟王)

    • 원나라 : 현령의용무안영제왕(顯靈義勇武安英濟王)

    • 명나라 1 : 전장군수정후(前將軍壽亭侯)

    • 명나라 2 : 협천호국충의관성대제(協天護国忠義關聖大帝)

    • 명나라 3 :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

    • 명나라 4 : 진원현응소명익한천존(眞元顯應昭明翼漢天尊)

    • 청나라 1 :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

    • 청나라 2 : 충의신무령우인용위현관성대제(忠義神武霊佑仁勇威顕開聖大帝)

    • 관우는 단기로 적진에 들어가서 백마전투에서 적사령관인 안량의 목을 베거나 조조군 최강인 조인을 고립시키고 우금의 7군을 격파하고,

    • 서황과 맞붙어서 조조가 겁먹고 수도이전을 고려할정도로 대단한 장수입니다.


    • 여포는 전위,장료나 문앙처럼 초월적인 무예를 보인 사례는 없습니다.


      그리고 적토마를 관우가 탄적이 없어요.


      여포가 탄건 정사에도 나오는 애기지만 관우가 얻지 못합니다.


      정사의 내용만 따지면 관우가 훨씬더 강한 무장입니다.


      조운은 뛰어난 무장 입니다. 조조군 천명기병과 교전해서 아두를 구출한적 있습니다.


      그냥 교전없이 피해서 데리고 오는거지만 그만큼 충성심이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건 맞고 한중에서 조조를 상대로 그리고 기곡전투후퇴할때 그용맹함을 떨친 인물입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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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사에는 오호대장군 없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관우,장비,마초,황충이 사방장군으로 임명되고 조운은 익군장군이라는 새로운벼슬을 만들어서 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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