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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 . 집자 성교서. 집자 성교서는 홍복사(弘福寺)의 승려 회인(懷仁)이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 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 끝에 집대성한 것이다.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 비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獎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을 이루고 있다. [감형 3년(672) 12월 8일 경성법려건립(京城法侶建立)] 변이나 .. 더보기
손준. 손침. 손정 孫靜. 1. 손준. 삼국 시대 오나라 오군(吳郡) 부춘(富春) 사람. 자는 자원(子遠)이고, 손견(孫堅)의 동생 손정(孫靜)의 증손이며, 손공(孫恭)의 아들이다. 처음에 무위도위(武衛都尉)와 시중(侍中)을 지냈다. 손권(孫權)의 총애를 받아 어림군(御臨軍)을 맡았다. 손권이 죽고 손량(孫亮)이 즉위하자 제갈각(諸葛恪)과 함께 정치를 보좌했는데, 무위장군(武威將軍)에 올라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 건흥(建興) 2년(253) 제갈각을 죽이고 승상대장군(丞相大將軍)이 되어 권력을 잡은 뒤 부춘후(富春侯)에 봉해졌는데, 권력을 전횡하여 조야(朝野)의 반발을 샀다. 사람됨이 교만하고 음해하기를 좋아해 사람을 많이 죽였다. 얼마 뒤 병사했는데, 종제(從弟) 손침(孫綝)이 권력을 이었다가 패한 뒤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 더보기
손량 孫亮.손휴 孫休.손량 孫亮.손호 孫皓. 1.손량 孫亮.중국 삼국시대의 오(吳)나라 제2대 황제(재위 252∼258). 손권(孫權)의 아들. 손량의 옹립에 공이 컸던 손준(孫峻)이 정권을 잡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손림(孫綝)이 정권을 잡았다. 257년 손량이 친정(親政)을 선언하고, 외척 전(全)씨와 의논하여 손림을 죽이려다 반대로 폐위되어 회계왕(會稽王)으로 지위가 떨어졌다. 자(字)는 자명(子明). 손권(孫權)의 아들. 손권의 맏아들 손등(孫登)이 죽자 손화(孫和)와 그의 동생 손패(孫覇) 사이에 태자문제를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어린 손량이 태자가 되어 252년 손권이 죽은 뒤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 결과 손량의 옹립에 공이 컸던 손준(孫峻)이 정권을 잡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손림(孫綝)이 정권을 잡았다. 257년 손량은 친정.. 더보기
손권孫權.Sūn Quán(형제"손책 [孫策].손견 [孫堅] 1. 손권孫權.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안후이, 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을 토벌 진무하고, 타이완, 하이난섬 방면에도 원정군을 보냈으며, 랴오둥의 공손씨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자는 중모(仲謀), 시호(諡號)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周瑜)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江南)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荊州: 湖北省襄陽縣)에는 유표(劉表)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華北)에는 조조(曹操)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조상의 본적은 오군(吳郡) 부춘(富春)이고, 하비(下邳)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모(仲謀)이다. 삼국(三國) 시대 동오(東吳)의 건립자로 부친.. 더보기
훈민정음, 1 훈민정음 가장 합리적인 글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세계 문자사상 가장 진보된 글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전에 우리 민족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로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란 뜻이며, 세종대왕이 1446년 제정 · 공포한 한국의 국자(國字) 또는 그것을 해설한 책의 이름을 말한다. 훈민정음은 세계에 표기했다. 따라서 우리말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가 요구되었는데, 세종대왕은 남의 나라 글자인 한문을 빌려 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자를 만들게 되었다. 한문은 우리말과 서로 통하지 않았으며, 배우기에 상당히 어려운 글자였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이 배우기 쉬운 새로운 문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불편을 덜.. 더보기
훈민정음. [訓民正音] 훈민정음" 업제학 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의 명으로 새로 창제한 훈민정음을 설명한 한문해설서. 목판본. 전권 33장. 1책 국보 제70호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 9월 상한(上澣)에 완성되었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 이라고도 한다. 내용은 세종어제(世宗御製) 서문과 훈민정음(새 글자)의 음가(音價) 및 운용법(運用法)을 밝힌 예의편(禮儀篇)이 본문처럼 되어 적은 바로 훈민정음을 만들었읍니다. 이제 훈민정음에 대해 알아볼까? 1446년(세종 28) 집현전 대있고 이를 해설한 해례편이 제자해(制字解) · 초성해(初聲解) · 중성해(中聲解) · 종성해(終聲解) · 합자해(合字解) · 용자례(.. 더보기
암행어사. 암행어사"조선시대 왕의 측근의 당하(堂下 : 정3품 하계 통훈대부 이하) 관원을 지방군현에 비밀리에 파견해 위장된 복장으로 암행하게 한 왕의 특명사신. 당하 관원 중에서 임시적으로 특명해 이들을 비밀리에 보내면서 수령의 득실(得失 :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과 백성의 질고(疾苦 : 고통이나 어려움)를 탐문해 돌아와서 임금에게 사실대로 아뢰는 것을 직무로 하였다. 암행어사란 용어가 처음 보이는 것은 중종 4년(1509)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암행어사 제도가 시행된 것으로 본다. 그 후 400년 간 수많은 암행어사가 임명되어 지방 수령, 방백들의 부정 행위를 방지하다가 고종 29년(1892)에 전라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이면상을 마지막으로 없어지게 됐다. 암행어사는 국왕이 단독으로 선택하여 임명했는데, .. 더보기
의적 과 도적.? 우리들은 흔히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등은 도적이다’라고 말했을 때 ‘도적 & 의적’ 이라 말한다. 부자들의 집만 털고 그것으로 활빈하면서 ‘정의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할 정도로 대의를 가진 모습으로 의적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일어선 의적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하는 도적인가! 우리는 결론을 미리 ‘그들은 도적이다’ 라고 내리면서 시작하려 한다. ‘의적’ 후대인인 우리가 그들의 그러한 모습이 당시 모순에 저항하는 모습이었으므로 ‘의적’이라 평가내린 것 뿐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산으로, 바다로 나가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저항의 젖줄이었던 민중은 어떠한 형식으로 대항해 왔는가, 진정한 도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속에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