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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張飛 .1 장비 張飛 .1탁주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장비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하고 서화도 뛰어났다. 청나라 시대의 역대화기록에 따르면 장비는 줘저우인(탁주 사람)으로 미인도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유비가 처음 거병할 때부터 관우와 함께 그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기록이 매우 부실하다. 장비의 출신 성분을 두고도 말이 많은데 전부 추측일 뿐 검증된 바가 없다. 참고로 연의와 다르게 정사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여하튼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장비전에 따르면 젊어서부터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가 향리에서 사람의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 더보기
관우關羽(,guān yǔ) 관우關羽.자(字)는 운장(雲長, 원래의 자는 장생(長生))이다. 시호(諡號)는 장목후(壯繆侯, 壯穆侯라고도 쓴다)이다. 오래전부터 중국의 민간에서 충의(忠義)와 무용(武勇)의 상징으로 여겨져 무성(武聖)이나 관성제군(關聖帝君), 관제성군(關帝聖君) 등으로 숭배되었고, 줄여서 관성제, 관제군, 관제, 성제 등으로도 불린다. 《삼국지연의》에는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유비(劉備)·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때문에 미염공(美髯公)이나 관이야(關二爺) 등으로도 불린다. 중국 하동군 해현(河東郡 解縣,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윈청시[運城市]) 출신으로 이곳은 중국 최대의 염호(塩湖)인 해지(解池)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漢) 나라에서는 소.. 더보기
조운趙雲. 조운趙雲.삼국 시대 촉(蜀)나라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 자룡은 자고, 이름은 운(雲)이다. 처음에는 공손찬(公孫瓚) 수하에 있었는데, 공손찬이 원소(袁紹)에게 망한 뒤 유비(劉備)에게 귀순했다. 유비의 경호원으로 여러 번 유비를 위기에서 구해 냈다. 조조(曹操)가 형주(荊州)를 취했을 때 유비가 패주하자 감부인(甘夫人)과 아두(阿頭, 劉禪)를 구하기 위해 조조의 대군을 혼자 휘젓고 다니며 호위해 구출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도 이때 생겨났다.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옮겼다. 조자룡은 유비와 함께하면서 무장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처음에는 하북 지역 최대 세력가 원소 밑에서 일했지만, 원소가 실력보다는 출신과 배경을 보고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 더보기
조조 1. 조조(기원전 200∼154년)는 자가 맹덕(孟德)이며, 패국(沛國) 초(初 = 현 안휘성(安徽省) 호현(毫縣)) 사람이다. 잉촨[潁川:河南省]에서 태어났다. 주로 형명(刑名:법가)의 학(學)을 익혀 관에 나아가 태상장고(太常掌故)에 임용되었고, 진(秦)나라의 박사 복생(伏生)에게 사사하여 《상서(尙書)》를 배웠다. 그 무렵 한제국(漢帝國)은 밖으로는 흉노의 압박, 안으로는 제후의 세력증대가 큰 문제였다.그는 흉노에 대한 정책으로서 북변방비를 위한 둔전책(王)에 대한 회유책으로서 그는 장안에서 참형되었다.영천(潁川, 지금의 하남성 우현) 출신으로 한나라 경제의 중요한 모사(謀士)였다. 그는 일찍이 지현(軹縣, 지금의 하남성 제원현 남쪽)에서 장회(張恢)를 스승으로 모시고 신불해와 상앙의 형명(刑名) 이론을.. 더보기
조조曹操 조조曹操.자(字)는 맹덕(孟德), 아명(兒名)은 아만(阿瞞)ㆍ길리(吉利)이다. 패국(沛國) 초현(譙縣, 지금의 安徽省 亳州市) 사람으로 후한 헌제(獻帝, 재위 189~220) 때에 승상(丞相)을 지냈으며, 위왕(魏王)으로 봉해졌다. 아들인 조비(曹丕)가 위나라 황제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되었다.조조(曹操)의 자는 맹덕(孟德)이고 소명(小名)은 아만(阿瞞)이다. 패국(沛國) 초현(譙縣, 안휘성 호현) 사람으로, 아버지 하후숭(夏候嵩)이 환제 때 대환관 조등(曹騰)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조등의 성을 따라 조씨 성으로 고쳤다. 위무제(魏武帝). 후한 말기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 자는 맹덕(孟德)이고, 묘호는 태조(太祖)며, 시호는 무황제(武皇帝)라 추존되었다. 본성은 하후(夏.. 더보기
張飛.도원결의.. 張飛.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 유비·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었고 후한 말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가 되고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유주(幽州) 탁군(涿郡) 사람으로 자는 익덕(益德)이다. 삼국시대 촉한(蜀漢) 시기의 명장(名將)으로 벼슬은 거기장군(車騎將軍), 사례교위(司隸校尉)를 지냈고, 서향후(西鄉侯)에 봉해졌다. 뒤에 범강(範強), 장달(張達)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후주(後主)가 환후(桓侯)로 추봉하였다. 자는 ‘익덕(益德)’으로 《삼국지연의》에는 ‘익덕(翼德)’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 시대 촉나라 탁군(涿郡) 사람. 자는 익덕(益德)인데, 보통 익덕(翼德)이라 쓴다. 시호는 환후(桓侯)다. 후한 말기에 관.. 더보기
幸州大捷" 행주산성 幸州大捷" 행주산성.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는데,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水原城)에 머물다가,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일본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할 때였으므로 그 병력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1월 말의 벽제관(碧蹄館)에서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 여러 겹으로 성(城)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 더보기
권율 장군. 권율 장군.조선 중기의 명장. 금산군 이치(梨峙)싸움, 수원 독왕산성 전투, 행주대첩 등에서 승리했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전공을 세웠다. 1537(중종 32)∼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명장.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 전투에서 왜군을 대패시켰다.본관 안동. 자 언신(彦愼). 호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호 충장(忠莊).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