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 역사 (국내)

서희.

728x90

서희" 

고려의 문신으로 이예와 함께 한국 외교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

외교관 이미지에 너무 고착된 나머지 그 능력과 명성에 비해서는 의외로 대중들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고 있는 측면도 있다.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 이상으로 대국을 보는 시야나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전략가이자, 


원칙과 책임의식을 지닌 훌륭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ins class="adsbygoogle"

     style="display:block; text-align:center;"

     data-ad-layout="in-article"

     data-ad-format="fluid"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data-ad-slot="8283195497"></ins>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script>


포스 넘치는 철혈 군주 광종 앞에서도 바른 말을 잘했던 강직한 재상 서필의 아들이다.그리고 아버지를 쏙 빼닮았는지 아들 서희도 거란  소손녕을 찾아 단신으로 담판을 짓고 오는 패기를 보이는데.. 서희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전전하였고, 982년에 북송으로 가서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 돌아왔다. 이 때 송태조는 서희의 품격을 보고 감탄하여 '검교(檢校) 병부상서'라는 정3품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 지금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이니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군세가 강성한 것만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 땅을 할양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게다가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끝없이 욕심을 부려 자꾸만 땅을 떼어달라 하면 우리 국토를 모조리 줄 수 있겠습니까? 적에게 국토를 할양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그들과 싸워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겠습니다.


 993년에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중군사 자격으로 북방에 참전했다(1차 여요전쟁 ). 이 때 소손녕은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자기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며 빨리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윽박질렀는데, 이에 조정은 항복하자는 의견으로 모았다. 거기에 항복 방식을 두고 그냥 화친하자는 화친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요에 떼어준 후 화친하는 할지론으로 갈렸다.

 

80만 대군은 뻥이었다. 이 당시 소손녕의 군대는 많아봤자 6만을 넘기 힘들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추측이다. 당시 거란의 원정은 도통(都統) 이상이 지휘하는 원정과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으로 크게 구분이 가능한데, 도통이 지휘하는 원정군은 15만 명 이상인 경우가 많았으나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은 최대 6만 명 정도였다. 


소손녕의 당시 직책은 동경(東京) 유수로 도통이 아니었으니 그가 지휘할 수 있는 병졸의 수는 최대 6만(그보다 적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뻥카가 먹혔던 건 최전방 봉산성에서 윤서안(尹庶顔)의 선봉대가 이 병력에게 크게 패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가 동원할 수 있는 병졸의 수는 6만보다 많았지만 전투 가능한 병력을 동원하고 집결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을 벌어주는 데 실패…게다가 전투 이후 고려가 파견한 사신 이몽전(李蒙戩)에게 소손녕이 다짜고짜 무조건 항복이나 하라고 큰소리를 쳐댄 통에 고려 정부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서경 이북을 할양하는 안(할지론)으로 논의가 굳어져 서경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거나 버리고 있었다. 이 때 소손녕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한 서희는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고, 곡식을 내다버리는 짓을 멈추게 했다. 사실 군신들이 사태를 조금만 더 냉정하게 파악했다면 소손녕의 군대가 80만일 수 없다는 것 쯤은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80만이나 되는 병력은 당장 병참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장기전에 돌입하면 소손녕의 군사들은 무너지기 십상이었다. 이렇듯 그는 오랫동안 군을 유지할 수 없었으므로 전쟁을 속전속결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수양제가 113만 명을 동원하였던 고구려 원정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손녕이 고려로 넘어와서 벌인 전투는 몇 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하면 80만 치고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의심을 해야 옳았다.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유방과 대도수가 거란군을 막아내자, 조정은 할지론에서 강화론으로 돌아섰다. 또한 안융진 전투 이후 더 이상의 공세적 군사행동이 어렵게 된 소손녕이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서희는 이때다 하고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응답하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서희가 홀로 일어나서 "신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성종은 강가까지 나가서 서희의 손을 잡으며 그를 전송했다. 회담은 처음부터 서희와 소손녕의 기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ins class="adsbygoogle"

     style="display:block; text-align:center;"

     data-ad-layout="in-article"

     data-ad-format="fluid"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data-ad-slot="8283195497"></ins>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script>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라고 하며 서희에게 절을 하라고 하지만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지만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라고 되받아쳤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의 인품에 감탄하여 서로 맞절을 하고 동서로 마주 앉았다고 한다. 사실 협상은 현대 국가에서도 협상 전의 기 싸움이 적어도 결과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기 싸움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당시 거란의 주적은 고려가 아닌 연운 16주를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이던 이었고, 고려 침공은 송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사전 정지(整地) 작업이었다.


소손녕: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은 우리 영역 안에 있다. 그래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우리 땅이다. 그러니까 그 영토를 내놓아라! 서희: 그건 말이 안 된다!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고려라고 이름을 지었고, 수도가 평양인 것도 고구려를 이으려는 것이다. 그러니 따지고 본다면 거란의 동경도 우리의 땅인데 누가 누구한테 침략을 한다는 것이냐? 


소손녕: 그…으래? 그건 그 쯤으로 해 두지. 그럼 왜 우리 요나라랑 더 가까운 위치이면서 송나라하고만 교류를 하는 거냐? 서희: 요나라와 교류를 못 한 건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래.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을 우리한테 준다면 그 때는 요나라와 막힘 없이 교류할 수 있을 거야. 내 말을 믿으라고. 이 회담으로 요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도 일대인 강동 6주를 얻게 되었다. 


위의 대화는 꽤나 간략하지만 서희가 거란 진영에 머무른 시간은 7일이었다. 사실 소손녕의 목적은 고려의 항복 내지는 협조였다. 당시 요는 송과 전쟁 중이었으므로 배후의 고려가 송을 돕는답시고 뒤에서 치고 들어오면 골치가 아팠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고려를 확실하게 눌러두거나, 적어도 송과의 관계를 접게는 만들어야 했다. 


서희는 이걸 간파했고, 이 부분에서만큼은 고려가 갑질을 해도 괜찮으리라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실제로 요가 이 정도로 입장을 양보한 것도 꽤나 이례적이다. 일부 도서에서 서희의 명분론의 승리라고 칭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쪽이 아니라, 그 뒤의 '왜 우리랑 통교하지 않고 송이랑만 노느냐'와 '사이에 여진족이 끼어서 그랬다'로 봐야 한다. 그 뒤 고려는 잠시나마 송과 진짜로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쓰면서 거란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당시 우왕좌왕하며 영토할양 및 화친론을 내세운 신하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생각하여 유리한 위치를 이끈 서희의 정세파악과 협상능력을 중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위인전이나 교양 역사서에선 소손녕이 멍청해서 서희한테 말빨로 발렸다거나, 혹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에 무턱대고 일리가 있다며 물러났다는 내용을 싣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 몇 마디에 자기 나라 영토를 떼어주고 좋아서 간다는 건 말이 안된다. 정말 그랬다면 거란 성종부터 소손녕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소손녕은 당시 거란의 의도를 충실히 대변했을 뿐이다. 서희는 그런 거란의 전략을 잘 파악하고 맞대응한 것이다. 거란은 주적인 송을 치기 전 고려와 협상을 맺어 배후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일 뿐 고려에서 국력을 소모할 생각이 없었다. 80만으로 병력을 과장한 것도 그런 계획의 일환이었고 소규모 전투만 반복하다 안융진 전투 이후론 지속적으로 협상을 요구했다. 


송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전연의 맹을 맺게되자 당연히 고려와의 관계도 재설정할 필요성을 느꼈고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사대하겠다고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2차례에 걸쳐 침략을 감행했다. 


강동 6주를 얻음으로서 압록강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고 이 지역은 북방방어의 중심지로서 고려-거란 전쟁 때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윤관의 9성 정벌 이후 보주를 얻게 되면서 압록강 이남이 완전히 고려의 영토에 편입된다. 이 회담 이후 이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주변 일대를 요새화한 인물도 바로 서희였다. 서희의 원래 구상은 강동 6주를 되찾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압록강 너머까지도 염두에 둔 듯한데, 


<고려사절요>에는 

소손녕과 협상하고 돌아온 뒤, 거란에 사신을 보내려는 성종에게 "제가 소손녕과 이야기 하기로는 압록강 안팎으로 우리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을 몰아내고 옛 땅을 수복한 뒤에 거란과 국교를 맺겠다고 약속하고 왔습니다만,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의 땅만 되찾았을 뿐입니다. 


압록강 바깥의 땅까지 마저 회수하고 나서 거란과 국교를 맺어도 늦지 않을 겁니다."라고 아뢰었지만, 성종은 "그럴 때까지 거란이 기다려주지 않을 텐데? 괜히 시간 끈다고 트집 잡혀서 전쟁 나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다."라며 거란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弊使)로 보내 국교를 맺었다고 한다.


서희가 여러 모로 보통 인물이 아니었던 셈. 강동 6주는 애시당초 거란의 영토도 아니었다. 본래 이 곳은 발해의 영토였으나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거란의 중앙 세력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해서 이곳은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되었다. 발해의 지배층 대부분이 거란에 끌려가거나 고려에 투항한 후 그곳은 미개발 상태로서 여진 세력이 뚜렷한 정치적 구심점도 없이 살고 있었다. 


서희는 거란과 고려가 힘을 합쳐 여진족을 몰아내고 통상로를 만들면 자연히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할 것이라 말했는데, 거란 영토를 할양받은 것이 아니고 고려가 압록강 이남의 서 여진 세력을 밀어내고 강동 6주를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고 이를 거란 황제가 하사하는 식으로 형식만 갖추겠다는 뜻이다. 앞뒤로 적을 만들 순 없었던 당시 거란 입장에선 이 정도면 충분했다.  


서희를 우리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외교관이 아니라 국정 설계자였어요. 이건 다른 거에요. 앞으로 있을 모든 (거란과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공을 세운 사람은 서희에요. 거란 전쟁을 대비해서 우리가 싸울수 있는 전략적 토대를 만들어 놓은 것. 그래서 위대한 국정 지휘자지,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를 내밀게 아니라구요. 


서희는 유명한 담판으로만 대중적으로 알려져서 '최고의 외교관' 정도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외교에만 뛰어났던 인물은 아니었다. 한 번은 성종과 함께 해주에 갔는데 성종이 서희가 묵는 장막에 들어오려고 하자 서희는 "신의 장막은 존귀하신 왕께서 들어오실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라고 거절했고 또 성종이 술을 가져오라고 명하자 서희는 "신이 가진 술은 임금께 드릴 만한 술이 못 됩니다"라며 술을 가져가지 않았다. 


결국 성종이 직접 어주를 가져다가 천막 밖에서 서희와 술을 마셔야 했다


성종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정우현을 오히려 감찰어사로 등용했고 정신을 차리게 해 준 서희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서희의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을 보여주는 일화. 국제 정세 파악 능력과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데 더해 이런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까지 갖춘 강직한 관료였기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강화 사신으로 담판하러 갔고 거란군 진지에서도 담대한 행동과 함께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ins class="adsbygoogle"

     style="display:block; text-align:center;"

     data-ad-layout="in-article"

     data-ad-format="fluid"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data-ad-slot="8283195497"></ins>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script>


공빈령 벼슬에 있던 정우현이라는 사람이 정치에 관한 일곱 가지 문제에 대해 논평한 글을 성종에게 올렸는데 이 글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성종은 재상들을 모아 "이거 좀 건방시러워서 손 좀 보고 싶은데 어때?" 라고 물었고 재상들 역시 왕의 의견에 찬성했는데 서희는 홀로 이렇게 말했다. 


회담 이후 이 지역을 요새화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성종 15년부터 자리에 눕게 되었고 개국사라는 절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직접 문병을 가고 서희의 쾌유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997년에 되려 성종이 먼저 승하했고, 서희는 성종이 죽은 이듬해인 998년에 57세로 사망. 아들인 서눌(徐訥)도 재상 자리에 올라서 이 집안은 살아서는 3대가 재상을 지낸 빵빵한 집안이 되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왕과 함께종묘에 배향되는영예를 누렸다. 


보통 거란의 1차 침입을 물리친 인물로 등장하지만, 위의 임용한 교수가 언급했듯이 사실상 대(對)거란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1등공신이라 할 만한 인물이 바로 서희다. 이후의 거란 전쟁 동안 양규나 강감찬 같은 명장들의 활약이 컸지만 서희가 이 지역을 요새화하지 않았더라면 이들도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을 것이고, 거란 전쟁 동안 개경이 몇 번이고 함락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외교관의 대명사로 손꼽힐 만큼 협상과 언변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장기적인 전략적 안목과 대국을 보는 시야를 갖춘 탁월한 전략가이자 명재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외교관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긴 하지만, 서희에 대해 그저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만 내세우는 것은 어쩌면 서희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심심해서 그때까지의 역사 인물 모두를 인재풀로 하는 드림팀 내각 설정놀이를 할 때, 항상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판서 자리에는 서희를 넣었다고 한다.서울 서초구 서초2동 외교안보연구원에도 그의 흉상이 있다. 


대한민국 외교관의 롤 모델인 셈. 거꾸로 중국 학계에서 서희를 대하는 입장은 다소 박하고 싸늘하다. 



동북공정과 관련해서, 

서희가 고려를 고구려의 후계라고 소손녕에게 일갈한 것을 두고 "일개 장군 나부랭이가 뭘 알기나 하고 떠든 말이었겠냐"며, 소손녕이 서희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린 것은 전략적인 퇴각  내지는 소손녕의 실수이고, 서희가 고려가 곧 고구려다 운운한 것은 서희의 허풍 내지 거짓말이라고까지 몰아세우기도.  송 태조도 서희를 보고 그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검교병부상서(정3품) 관직을 주었고 중국의 송사고려도경에서 일관되게 "고려는 원래 고구려다"라고 적고 있다는 점을 보면 이는 꽤나 악의적인 평가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 활약한 정치인 겸 외교관. 중인 출신이었으나 왜구의 침입 때 군수를 끝까지 따라가 그 충성심을 인정받아 중인 신분에 벗어났다. 세종시대에 대일외교의 최전선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조선과 일본 양국의 문물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참고로 이 사람도 서희와 함께 국립외교원에 동상이 같이 세워져 있다.


 [생애 및 업적]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936년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서희는 그로부터 6년이 지난 942년 내의령이었던 서필의 아들로 태어났다. 

960년(광종11)과거에 급제한 서희는 여러 벼슬을 거쳐 내사령의 최고 벼슬까지 올랐다. 조정에서 중책을 맡은 서희는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겼다. 


서희는 972년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고려와 전혀 왕래가 없던 송나라와 처음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때 송나라 태조는 서희의 공적을 인정하여 '겸교병부상서'라는 벼슬을 주었다. 

서희의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지어 거란이 물러가게 한 일이다. 

거란은 고려의 북진 정책과 고려가 송나라와 국교를 맺은 것을 트집잡아 고려에 쳐들어왔다. 거란은 봉산군을 빼앗은 뒤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였는데, 고려가 국경을 침범하므로 정벌한다.'며 위협을 해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쪽과 서경(평양) 이북 땅을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봉산군만 공격했을 뿐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적장 소손녕의 속셈을 꿰뚫어 본 서희는 거란과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주장하여 왕의 허락을 얻었다. 그 뒤 안융진을 공격했다가 패한 소손녕이 고려의 대신과 만나기를 청해 오자 서희는 협상을 하기 위해 거란 군영으로 들어갔다. 소손녕이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자 서희는 뜰에서 절을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만 하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하고 당당하게 맞서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담판을 짓게 되었다.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신라를 계승했으면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땅을 함부로 침범하고 있다는 점과 거란을 제쳐놓고 바다 건너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는 점을 비난했다.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어받아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고, 옛 고구려의 영토에 있는 거란의 도읍 동경도 고려의 땅이며,그 동안 고려와 거란 사이에 여진이 가로막고 있다. 교류를 하지 못했다면서 오히려 압록강 동쪽에 있는 여진의 영토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


서희의 조리있고 기개가 있는 말솜씨에 설득당한 소손녕은 서희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서희는 국제 정세에 대한 통찰력과 당당한 태도, 조리있는 말솜씨로 고려의 승리를 이끌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ins class="adsbygoogle"

     style="display:block; text-align:center;"

     data-ad-layout="in-article"

     data-ad-format="fluid"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data-ad-slot="8283195497"></ins>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script>


994년 평장사에 오른 서희는 3년간에 걸쳐 압록강 동쪽에 살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과 귀화진, 귀주(구성),곽주(정주),흥화진(의주) 등에 강동 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우리 민족의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또 다른 볼거리,


https://happyday6200.blogspot.com            


https://happyday2162.blogspot.com                                     


https://happyday2100.tistory.com             


https://goodlucks6200.tistory.com            


http://blog.daum.net/bumin2110/187 


http://blog.naver.com/happyday2162/221511275079


https://www.facebook.com/hyunbong


http://www.youtube.com/channel/UCfgPqvH1s_8mwfICMcBq2Zw


https://support.google.com/youtube/thread/1721344?msgid=4797194


https://www.youtube.com/channel/UCrFjsn71IQ2H96NLh4-xusg/live


https://youtu.be/HRlLFVcDdBs?t=16


www.youtube.com/channel/UCrFjsn71IQ2H96NLh4-xusg


https://youtu.be/0ezy25PUkTU


sHJs6yThSUehE1-F9wSC3w


rtmp://a.rtmp.youtube.com/live2rtmp://a.rtmp.youtube.com/live2


https://youtu.be/gR9Q6KlBpA4


https://youtu.be/xpqCHcEUvaU


goodday >유튜브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ins class="adsbygoogle"

     style="display:block; text-align:center;"

     data-ad-layout="in-article"

     data-ad-format="fluid"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data-ad-slot="8283195497"></ins>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script>


@nt8XwBMKaPK0Hr1 = 트윗트


'인물. 역사 (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마의 [Sima Yi, 司馬懿 ]  (0) 2017.11.09
이성계 李成桂,  (0) 2017.10.23
장보고.  (0) 2017.10.22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0) 2017.10.22
김구 金九, 2  (0) 2017.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