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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김구 金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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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金九

 

1876(고종 13)-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지휘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했다. 

 

광복 후에는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암살당했다. 

 

독립운동가인 김구가 쓴 자서전이다.

 

‘백범’은 김구의 호이다. 

 

1947년 처음 책으로 만들어진 이후 10여 종의 책이 더 나왔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를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4세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과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안태훈()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과도 함께 지냈다.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솟구치는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영천암()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 청년회(Evert)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 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이준()·전덕기()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였다.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西)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 고취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 및 상해병공창 송식마()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역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西]시안[西]과 안후이성[] 푸양[]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손수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3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 실패의 시련을 맛보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 지금의 삼성강북의료원 건물)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으며, 4·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를 남겼다. 

 

1947년 12월 15일 도서출판 국사원()에서 아들 김신()이 펴낸 초판본을 필두로 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10여 본이 각 출판사에서 의하여 중간되었다. 

 

전기문학의 현대적 고전으로 독립운동의 증언서이다. 

 

 

 

상해()와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직을 지내오며 틈틈이 써놓은 이 책 친필 원본은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회에 보존되어 있던 친필본을 김지림()이 윤문하여 이 책이 간행되었다.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어 유서 대신으로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기록한 만큼 비장감이 넘치는 감동을 준다. 

 

상·하편과 말미에 수록된 「나의 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편은 김인()·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머리말을 1929년 5월 3일 상해에서 기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책 서두에 실린 ‘저자의 말’은 1947년 개천절로 명기되어 있어 『백범일지』가 근 20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된다. 

 

과장이나 수식이 없이 사실대로를 밝히는 데 주력한 이 전기에서, 상해 집필의 상편이 「우리집과 내 어린 적」·「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하권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 곧 이봉창()의사의 1·8일왕()저격의거와 윤봉길()의사의 4·29상해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중국 각처로 표류하다가 충칭으로 옮겨가 제2차세계대전 중에 집필한 것으로서 칠순을 앞둔 망명가의 회고기록이 되고 있다. 

 

하권에는 「3·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 등의 제목 아래 광복군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국제연합군의 힘으로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의 투쟁역정을 엮고 있는데 하권에서 보이는 임시정부의 환국이나 삼남() 순회 대목의 기술은 1945년 말 또는 1946년 초에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상·하편 뒤에 붙은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정치이념」·「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등 세 편의 글로 된 완전독립의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김구 민족이념의 역사적인 문헌으로 정평이 있다. 

 

특히, 이 문헌은 엄항섭()이 엮은 『김구선생 최근 언론집』 (1948)에도 수록되어 있어 민족통일의 교본으로 보급되어 왔다. 

 

광복 후 국사원에 설치된 출판소에서 김지림·김흥두()가 편집 실무와 보급을 맡아 나오게 된 『백범일지』 초판본의 반응이 예상 밖이어서 이듬해 1948년 3월 1일자로 재판본도 잇달아 나오게 되었다. 

 

권두 22면의 화보와 본문 400면 B6판 세로쓰기 국·한문 혼용의 초판본 체재에 담긴 한 개인의 자서전임에도 쉬지 않고 읽히는 만년 베스트셀러로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이 1989년 초여름 TV드라마로 방영될 만큼 큰 감동을 주는 것은 민족주체성의 교본과도 같기 때문인데, 원본을 토대로 한 미국 컬럼비아대학 소장의 김구가 미주 동포에 보낸 필사본 외에도 내용을 다소 늘여 베껴둔 김구의 친필 아닌 필사본도 나돌고 있어 한국 서지학사에 있어서 특기할 책이라 하겠다. 

 

1997년 6월 12일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다.

 

1947년 조선인쇄회사() 간행. 현재 10여 본이 각 출판사에서 중간되고 있다. 

 

민족이념의 역사적인 문헌이며 독립운동의 증언서이다. 

 

 

 

상하이[]와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직을 지내던 필자가 항일운동의 최전선에서 방어할 각오로 유서를 대신하여 기록한 것이다. 

 

상·하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상편은 인()·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1929년 5월 3일 상하이에서 머리말을 기록하였다. 

 

서두에 실린 ‘저자의 말’은 1947년 개천절로 명기되어 있어 이 책이 20년에 걸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상하이에서 집필한 상편은 <우리집과 내 어린 적>·<민족에 내놓은 몸> 등으로, 하편은 <3 ·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 등으로 구성되어 지은이의 파란만장한 조국 광복 투쟁사를 엮었다. 

 

 상·하편 뒤에 수록된 <나의 소원>은 완전 독립의 통일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민족이념을 그리고 있다. 

 

김구는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살았던 인물이다. 

 

 

 

조선 말기에는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 활동에 참여했고, 한일 강제 병합으로 나라를 빼앗긴 뒤부터는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최고 지도자인 주석으로 활동했다.8 · 15 광복 후에는 남북의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두희’라는 육군 장교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백범 일지》는 그가 한창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쓴 일기이다. 

 

《백범 일지》는 상 · 하 두 편과 일기 끝에 수록된 <나의 소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편은 김구가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있을 때인 1929년에 쓴 글이다. 

 

지나간 생활과 독립운동을 돌아보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김인과 김신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썼다. 

 

 

 

하편은 1932년에 그가 중심이 되어 만든 한인 애국단의 활동과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이어진 독립운동을 기록하고 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조국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그가 산남 지방을 돌아볼 때의 기록도 덧붙였다. 그리고 <나의 소원>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 국가를 바라는 김구의 마음이 담겨 있다. 

 

《백범 일지》는 김구가 직접 쓴 원본과 김구 측근의 필사본, 그리고 여러 간행본들이 전하고 있다. 

 

《백범 일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구의 삶과 애국심을 느낄 수 있다. 독립운동가 김구()의 자서전. 1947년 12월 15일 도서출판 국사원()에서 아들 김신()이 펴낸 초판본을 필두로 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10여본이 각 출판사에서 앞을 다투어 출판되고 있다. 

 

 

 

전기문학의 현대적 고전으로 독립운동의 증언서이다. 

 

상해()와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직을 지내오며 틈틈이 써 놓은 이 책 친필 원본은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에 보존되어 있는데, 김지림()을 통한 친필본의 윤문으로 이 책이 간행되었다.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어 유서 대신으로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기록한 만큼 비장감이 넘치는 감동을 준다. 

 

상ㆍ하편과 말미에 수록된 <나의 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편은 김인()ㆍ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머리말을 1929년 5월 3일 상해에서 기록한 것으로 나와 있고, 이 책 서두에 실린 ‘저자의 말’은 1947년 개천절로 명기되어 있어 ≪백범일지≫가 근 20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된다. 

 

과장이나 수식이 없이 사실대로를 밝히는 데 주력한 이 전기에서, 상해 집필의 상편이 <우리집과 내 어린 적>ㆍ<기구한 젊은 때>ㆍ<방랑의 길>ㆍ<민족에 내놓은 몸>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면 하권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 곧 이봉창()의사의 1ㆍ8일왕() 저격의거와 윤봉길()의사의 4ㆍ29상해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중국 각처로 표류하다가 충칭으로 옮겨가 제2차세계대전 중에 집필한 것으로 칠순을 앞둔 망명가의 회고기록이 되고 있다.

 

 

 

하권에는 <3ㆍ1운동의 상해>ㆍ<기적 장강 만리풍()> 등의 제목 아래 광복군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국제연합군의 힘으로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의 투쟁역정을 엮고 있는데 하권에서 보이는 임시정부의 환국이나 삼남() 순회 대목의 기술은 1945년말 또는 1946년초에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상ㆍ하편 뒤에 붙은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ㆍ<정치이념>ㆍ<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등 세편의 글로 된 완전독립의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김구 민족이념의 역사적인 문헌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 문헌은 엄항섭()이 엮은 ≪김구선생 최근 언론집≫(1948)에도 수록되어 있어 민족통일의 교본으로 보급되어 왔다. 

 

 

 

광복 후 국사원에 설치된 출판소에서 김지림ㆍ김흥두()가 편집 실무와 보급을 맡아 나오게 된 ≪백범일지≫ 초판본의 반응이 예상 밖이어서 이듬해 1948년 3월 1일자로 재판본도 잇달아 나오게 되었다. 

 

권두 22면의 화보와 본문 400면 B6판 세로쓰기 국ㆍ한문혼용의 초판본 체재에 담긴 한 개인의 자서전임에도 쉬지 않고 읽히는 만년 스터디셀러로 되고 있다. 

 

이 책이 TV드라마(1989년)로 방영될 만큼 큰 감동을 주는 것은 민족주체성의 교본과도 같기 때문인데, 원본을 토대로 한 미국 컬럼비아대학소장의 김구가 미주 동포에 보낸 필사본 외에도 내용을 다소 늘여 베껴둔 김구의 친필 아닌 필사본도 나돌고 있어 40년 한국 서지학에 있어서 특기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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