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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사마의 [Sima Yi, 司馬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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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Sima Yi ]

중국 삼국시대 위(魏) 나라의 정치가이자 군략가로, 서진(西晋) 건국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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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중달()이며, 하내군() 온현() 효경리(, 지금의   ) 출신으로, 경조윤()을 지낸 사마방()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중국 삼국시대에 위() 나라의 조조(, 155~220, 로 추존), 조비( 재위 220~226), 조예( 재위 226~239), 조방( 재위 239~254, 이라고도 함) 등 4대()를 보필하며 공을 세워 무양후()에 봉해졌다. 손자인 사마염(, 236~290)이 서진(西)을 세운 뒤에는 선제()로 추존()되었고, 묘호()를 고조()라 하였다.  


후한() 안제(, 재위 106~125) 때 정서장군(西)을 지낸 사마균()의 후손으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학()의 가르침을 늘 깊이 간직하고 따랐다()"고 전해진다. 


형인 사마랑()을 포함해 가문의 8형제가 모두 총명해 이른바 '사마팔달()'이라고 불렸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사마의()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조()가 이를 듣고 등용하려 했지만 병이 들었음을 내세워 거절했다. 하지만 208년( 13년) 승상()이 된 조조는 사마의를 압박해 문학연()으로 삼았고, 그 뒤 그는 황문시랑() 등의 벼슬을 지냈다. 


조조가 위왕()으로 봉해진 뒤에는 태자중서자()가 되어 조비()를 보좌했다. 당시 사마의의 건의로 둔전제()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위()의 국방을 강화하고, 농업생산력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중용되었으며, 224년에는 상서()로 임명되었다. 226년 조비가 죽자, 조진()ㆍ진군()ㆍ조휴() 등과 함께 보정대신()으로 명제() 조예()를 보좌하였다. 


231년 조진이 죽은 뒤에는 대장군()의 지위를 이어받아 제갈량(, 181~234)이 이끄는 촉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238년에는 요동()의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구검(), 호준() 등과 함께 이를 정벌하여 요동() 지역을 위()에 병합하였다. 


239년 명제()가 임종할 때 조진의 아들인 조상(,  ?~249)과 함께 애제() 조방()의 보좌를 부탁받았다.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로 전임시키며 군권()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그는 오()의 공격을 물리치며 기병() 중심의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그 뒤 병이 든 것처럼 꾸미며 은인자중()하였으나, 249년( 10년) 조상()이 애제()와 함께 고평릉()을 방문한 틈을 타서 정변()을 일으켜 조상()을 살해하고, 위()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뒤 안평군공()에 봉해졌으나, 251년( 3년)에 병으로 죽었다. 


하내군() 온현() 효경리() 사람으로 자는 중달()이다. 삼국() 시기 위()나라의 걸출한 정치가이자 군사가이다. 일찍이 위나라의 대도독(), 대장군(), 태위(), 태부()를 지냈다. 모략가로서 기이한 책략을 내어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가장 저명한 전공은 2차례 제갈량()의 북벌()을 막고, 요동()을 평정한 일이었다. 둔전()과 수리() 등 농촌 경제 발전에도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시호는 선문()이다. 차남 사마소()가 진황()에 봉해진 후에 선왕()으로 추봉되었고, 사마염()이 황제가 된 후에 선황제()로 추증되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촉나라는 위나라로 진격하지 못했다. 덕분에 위나라는 외부에서 오는 압력은 약해졌지만 그 대신 내부에서 동란이 일어났다. 


239년, 사마의는 어명을 받고 관중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낙양으로 돌아오라는 명제의 조서를 다섯 번이나 받았다. 사마의가 급히 낙양의 궁궐에 이르니 명제 조예의 병이 시각을 다투고 있었다. 조예는 사마의의 손을 잡고 여덟 살 난 태자 조방()을 보며 이렇게 당부했다. “후사를 기탁하려고 급히 돌아오라고 했소. 경은 조상()과 함께 태자 조방을 보필해 주시오.”


“안심하시옵소서. 선제(조비)께서도 폐하를 소신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조예가 죽자 태자 조방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소제()이다. 사마의와 조상은 조예의 유언에 따라 조정의 대권을 쥐고 소제를 보필했다. 사마의는 문무를 겸비한 비범한 인재였다. 조조가 집정할 때 둔전제를 시행했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를 폐위시킬 때도 여러 가지 계책을 내놓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조비의 신임을 얻어 군정 대권을 쥐었다. 반면에 조상은 아무런 재능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종실이라는 것만을 믿고 사마의를 밀어내고 조정 대권을 독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나이가 많고 명망이 높기 때문에 조상은 마음대로 전횡을 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 그의 의견을 듣는 척했다. 그러나 나중에 심복인 하안()과 등양() 등을 올려놓아 조정의 중추 기관을 장악하게 한 후, 소제에게 청하여 사마의를 태부로 올려놓았다. 직위상으로는 승격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그런 다음에 조상은 동생 조희()를 중령군()으로 임명하여 황궁의 경호부대인 금군을 통솔하게 하고, 조훈()도 무위장군으로 임명하여 일부 군권을 장악하게 했다.


당연히 사마의는 조상이 조정 대권을 쥐고 흔드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중풍에 걸려 어쩌지 못한다며 아예 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그러면서 암암리에 다른 계획을 꾸몄다. 조상은 사마의가 꾀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때 마침 심복 이승이 형주 자사로 부임해 가게 되자, 사마의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척하면서 병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게 했다. 이승이 사마의의 태부 부중에 가보니 중병에 걸려 침을 질질 흘리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승은 돌아와 조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마의는 숨이 붙어 있을 뿐 이미 시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며칠을 못 넘길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조상은 희색이 만연해 사마의를 더 이상 경계하지 않았다. 새해가 되자, 소제는 전례대로 제사를 지내러 고평릉()으로 갔는데 조상과 동생 조희도 따라갔다. 조상 등이 황제의 어가를 모시고 남문으로 나가 고평릉을 향해 멀리 떠나가자, 사마의는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를 불렀다. 그러고는 심복 군대들을 거느리고 가서 황태후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성문을 닫고 무기고를 점령했다. 또한 조상과 조희의 군영을 접수하고 그들 형제의 직무도 해제시켰다.


사마의의 주청서를 중간에서 가로챈 조상은 이를 황제인 조방에게 바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때 사마의가 시중 허윤, 상서 진태를 보내서 조상이 속히 돌아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군권을 내놓는다면 용서해 준다는 명령을 전하게 했다. 


조상은 하는 수 없이 고스란히 군권을 내놓고 낙양에 있는 자기 부중으로 돌아왔다. 사마의는 소제 조방을 황궁으로 영접하고 그날 밤에 군대를 풀어 조상의 저택을 포위하게 했다. 그러고는 높은 누각에서 조상 형제의 거동을 주시하게 한 다음 며칠 후에 조상이 역모를 꾀한다는 보고를 올리게 했다. 그것을 구실로 조상과 형제들, 그리고 가문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조상이 죽은 다음에 사마의는 승상이 되어 위나라 군정 대권을 전부 다 장악했다.


1. 조조 휘하의 관직에 오르다.

하내군() 온현() 효경리 사람으로, 자는 중달()이다. 권문세족 출신으로 4대에 걸쳐 위나라의 통치자를 보좌하여 조정을 장악한 권신이 되었고, 서진(西) 왕조 건립의 기초를 닦았다.

동한 말기 201년에 조조가 그에게 일을 맡기려 하자 중풍을 핑계로 사양했다. 그러나 208년에 조조가 억지로 승상부의 문학연()으로 임명하자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여러 자리를 거친 다음 승상주부(簿)에 이르렀다. 손권이 조조에게 사신을 보내 동한(, 후한())을 대신하여 자립하여 새로 나라를 세우라고 권했을 때 사마의도 함께 종용을 했다. 결국 조조는 위나라 왕이 되고 그의 아들 조비는 태자가 되었다.</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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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나라의 권신이 되다

219년에 조비의 태자중서자()에 임명된 사마의는 매번 큰 회의에 참석하여 남다른 대책과 묘안들을 제안하여 조비의 큰 신임을 얻었다. 


220년에 조조가 죽자 장례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했고, 조비가 동한을 대체하여 문제()로 즉위한 후에는 상서우복야(), 무군대장군()에 올랐다. 조비가 출정하거나 순시를 할 때면 그는 허창(, 지금의 허난()성 쉬창시)에 남아 후방을 지켰다.

226년 위나라 2대 황제 명제가 즉위한 후 조비는 조서를 내려 조진진군과 함께 정치를 보좌하도록 했다. 사마의는 손권의 군사를 물리친 후 표기장군으로 승진하고 여기에 형주(, 지금의 후난()성 헝양() 일대)와 예주(, 후난성 부근)의 군대 일도 감독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완(, 지금의 허난성 난양()시)에 주둔했다.

명제 태화() 원년인 227년에 본래 촉나라의 장수로 신성(, 지금의 후베이성 팡()현) 태수 자리에 있다가 항복한 맹달이 모반을 일으키자 사마의가 신속하게 신성으로 진군하여 성을 함락하고 맹달의 목을 벴다.


3. 제갈량의 북벌을 막다

한편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 위를 공격했다. 태화 5년인 231년 명제는 사마의를 옹주(, 지금의 산시(西)성 서쪽)와 양주(, 지금의 간쑤()성 량저우) 두 군을 감독하는 도독으로 삼고 서쪽 장안(, 지금의 시안(西))에 머물며 촉한과의 전쟁을 지휘하도록 했다. 


제갈량이 여러 차례 싸움을 걸어왔으나 사마의는 나가 싸우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그때그때의 상황에 잘 대처했다. 별다른 전과 없이 지쳐가던 제갈량이 명제 청룡() 2년인 234년에 군중에서 병으로 죽자 촉한군은 후퇴했다. 공을 세운 사마의는 태위 에 올랐다.

명제 경초() 2년인 238년에는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요동의 공손연을 대파했다. 이때 사마의는 양평 을 기습하여 공손연을 포위 공격한 끝에 그의 목을 베고 마침내 요동의 4개 군을 다시 통일했다.


4. 국권을 한손에 쥐다

이듬해에 명제가 죽고 제왕(조방(재위 239~254)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명제의 명을 받은 사마의는 권신 조상과 함께 어린 조방을 보좌했다. 벼슬은 시중()에 안팎의 군대를 감독하는 도독중외제군(), 녹상서사(錄)가 더해졌다. 이후 태부()로 승진했다.

그러나 얼마 후 사마의와 조상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고 두 사람 간의 알력이 갈수록 깊어졌다. 사마의는 치밀한 계산 끝에 병을 핑계로 권력의 일선에서 일단 물러섰다.

가평() 원년인 249년 그는 제왕 조방과 대장군 조상이 낙양성(, 지금의 허난성 뤄양시 소재)을 나서 명제 조예()의 무덤인 고평릉()에 간 틈을 타서 모든 성문을 폐쇄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고평릉의 정변’이라 한다. 이어서 그는 황태후의 명령을 사칭하여 조상 형제의 모든 관직을 박탈한 후 그들이 저항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낙양으로 돌아오도록 유인했다. 그 다음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조상 형제와 그 무리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로써 조정의 대권이 모조리 사마의의 손에 들어갔다.


5. 서진(西) 왕조 건국의 기초를 세우다

가평 3년인 251년에는 위나라 세력을 앞장세운 양주(, 지금의 장쑤성 양저우시)의 장수 왕릉()이란 자가 군사를 일으켜 반발했으나 이내 평정되었다. 위나라를 대체할 사마씨의 서진(西) 왕조 세력 기반이 이렇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사마의는 이후 상국(, 재상) 자리를 받고 안평군공()으로 봉해지는 등 권력을 독단하다가 향년 73세로 죽었으며, 시호는 선문()이다.

그의 차남 사마소가 진왕()으로 봉해진 후 선왕()으로 추봉되었고, 그의 손자인 진 무제(사마염이 즉위한 후 선제()로 추증되었다.


6. 업적에 대한 평가

사마의는 평생 여러 차례 대외 정벌에 나섰는데, 제갈량의 북벌을 두 차례 막아낸 것과 요동을 평정한 공을 가장 높이 평가받는다.

군사 이외의 방면에서 그는 궁궐 수리를 중단하는 등 근검절약에 앞장서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인재 선발에서는 등애왕기, 주진 등을 발탁하여 천하를 멀리 내다보고 경략하는 인재라는 평가를 들었다.

경제 방면에서는 둔전을 일으키고 치수사업을 벌여 농촌 경제 발전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로써 관중 지역에 더 많은 식량을 공급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훗날 통일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는 평을 받았다.

제갈량의 숙적이자 조조가 경계한 책사.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 칠순의 나이에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라 끝없던 난세를 평정하고 삼국을 통일한 최후의 승자,



삼국지는 하나의 역사이고 난세시대입니다. 난세하면 영웅, 영웅하면 난세!

그런만큼 영웅들은 많았고 그 중에는 일명 우리가 부르는 명책사, 명장군,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공명, 사마의, 강유,방통등은 그냥 이름이 알려진 무장들일뿐입니다.

예를 든다면 조조에게는 희지재, 곽가, 정욱, 유엽 등을 예로 들수있습니다.

희지재는 조조의 초반 지지를 위해 힘쓰다 일찍 죽습니다. 왜 희지재가 뛰어난 책사이냐. 라고 물으신다면 곽가를 보시면 알게됩니다. 곽가 또한 저 4인물들같이 유명한 전략가입니다. 


하북토벌전에 나서기까지 엄청난 공을 세웠고, 하북토벌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이루었지요. 그런데 이 뛰어난 곽가는 희지재의 후임이였습니다. 그만큼 희지재가 곽가보다 뛰어났다. 정욱은 적은 수의 숫자로 적을 기만합니다. 그리고 유엽은 이전과 같이 벽력거 같은 무기를 만들어 조조에게 큰 힘이 됩니다.

발명이란 것을 한다는 자체가 똑독한거죠. 마치 공명의 아내 황씨부인이 똑똑하다가 알려진 것처럼 말이죠.(황씨부인-박씨전을 참고해주시는것도..)


그리고 원소또한 많은 모사들이 잇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호족집안 벼슬아치들이다 보니 권력투쟁이 상당히 심햇습니다. 그들은 독독햇고, 그래서 원소는 패망합니다.

너무 관리들이 똑똑하다 못해 영악해서 패망한것입니다.

그리고 손가 쪽도 만만치않습니다.


무장이엿다가 공부를 열심히 하여 '괄목상대'라는 사자성어를 남긴 여몽이 있고, 촉오 동맹의 중심에 잇는 노숙이있습니다. 


노숙은 손오가 싸우면 두 나라 모두 위에 패망할 것을 예측하고 모든 일을 게획합니다.

사실상 이렇게 보면 삼국정립 자쳬를 노숙은 에상을 햇다 보면 됩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않은일이죠. 그리고.. 정치를 올바르게 한 장소, 장굉 등 많은 사람들이있었습니다.

촉입니다. 

촉은 이름잇는 장수들들 빼고 그다지 좋은 장수가 많이없습니다.

그 이름잇는 장수들이 뒤어나 촉이 연명할수 잇었지만 촉은 알다시피 중심지가 촉(변두리)입니다.

사람들은 변두리인 약소국 촉보다는 중원에 위치한 위를 더 선호했지요.

촉쪽은 아직 군소국 정니다.


그만큼 변두리 졲은 아쉬울분이죠. 예를 든다면 다들 서울이라 외치고 변두리쪽은 찾지않는 것이 그예이지요. 그만큼 발전의 차이가 크니말이죠..

일단 사마소가 진왕을 받고 사마염이 통일을 함.


사마의. 그는 조조 시절 문학연(학생들을 가르치는 승상부 관속의 자리) - 승상부 주부(승상부의 관속)을 거치며 조조의 직속 (당시 조조의 직속으로는 사마랑, 가규, 양수, 조엄, 온회, 장제, 왕릉 등이 또 있음)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를 종군하다가 조비 시절 무군대장군 (정2품의 잡호장군) 직을 수여 받습니다. 가장 사마의와 케미가 잘 맞는 황제, 조예가 황제에 오르니다.


위나라 최고의 황제라고 할수 있습니다. 정략이나 군략이나 둘 다요. 이 시기에 사마의는 표기대장군(정1품의 관직으로 대사마, 대장군 바로 아래, 즉 군부 서열 3위라고 할수 있습니다.)의 직에 올라 제갈근을 막고 맹달을 토벌합니다. 그리고 228년 석정전의 패배로 대사마였던 조휴가 사망하여 대장군의 직위에 올랐고, 얼마 못가 계한(촉)을 막던 새로운 대사마 조진이 계한 정벌을 실패하면서 사망하여 군부 랭킹 1위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 이후 제갈량의 4,5차 북벌, 호박거자직의 난이 있었고, 이것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사마의는 중앙으로 불려와 태위(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으로 삼공 중 하나이며, 군부의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전까지(가후-종요-화흠)는 태위와 겹치는 대사마직이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명예직에 가까웠으나, 대사마가 명예직이 된 (공손연한테 감) 상태에서 태위는 제 역할을 다시 찾게 됩니다. 이 시기에 사마의는 역모를 꿈꾸고 있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물론 그 아들 사마사가 아내 하후휘로부터 非魏之純臣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젊음과 능력을 겸비했던 최고의 황제 조예가 사망하고 사마의는 조상과 함께 탁고지신이 됩니다. 그리고 조상, 이 인물은 유재시거를 따르려고 했다며 평가되기도 하는데 사마의와 반대되는 인재 등용 사상입니다. 이것은 아들인 사마사와 하후상의 아들 하후현의 중호군 시절 행적만 봐도 비교가 가능하지요. 조상 아래에는 하후현, 하안 등이 버티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정책 입안, 사상 발상에 대한 천재이나, 


리더쉽이 부족한 인물들. 여기서 조상이 등양, 이승과 같은 인물들과 어울리고 하안까지 주색을 탐하게 되면서 그들의 악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들은 사마의를 태부(태위보다 항렬상은 높으나 황제의 선생으로 명예직에 불과)로 올렸으며, 그들의 파벌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이에 장제, 왕릉, 고유 등 조정의 원로들과 함께 사마의는 247년 고평릉의 쿠테타를 일으켜 조상을 주살합니다.


51년 절친한 친구로 보여졌던 왕릉의 난 (사실 난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만큼 왕릉의 목적, 사마의와 왕릉의 태도, 왕릉이 내세운 이유, 난이 실패한 후의 처리 등등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며, 실제 전투는 없었습니다.)을 진압한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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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가 한 것으로 평가되는 모든 것은 그의 장남 사마사의 짓입니다. 그의 자는 자원. 굉장한 야망가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하안, 하후현 등과 함께 이름 날렸던 그는 산기상시 등 명예직을 거쳐 정4품의 중호군이라는 실권직에 앉게 되는데, 중호군은 인재를 선발하는 직입니다. 


하후현과는 상반되는 태도를 보이며 그는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순한 신하 을 뽑습니다. 이후 사랑하던 아내인 하후휘로부터 비위지순신 (위나라의 충신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들었고, 하후휘는 그에게 독살. 247년 고평릉의 쿠테타에 대해서 방현령은 사마사가 1등공신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마사는 하안/하후현 등에 의해 조상파의 일원이기도 하였는데(사실 사마의와 조상의 사이는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고, 조상의 악행이 이어질수록 그가 사마의를 무서워한 것 뿐임) 이 때 정보를 캐낸 사마사는 피도 눈물도 없이 하안을 죽입니다. 이후 사마의 사망, 그리고 사마사가 무군대장군(역시 정2품의 관직으로 사마의대에 생겨난 잡호장군)직에 오른 후 1년 뒤 대장군직에 오릅니다. 


반조상파 부하, 노식의 막내 아들 노육, 영천사대부 순욱과 종요의 아들/손자내미들 순의, 순찬, 종회, 종육과 장수 석포, 등애, 우송, 왕기 정도가 사마사파로 분류할수 있으며 하후현, 이풍과 당시 군권을 지닌 제갈탄, 문흠, 관구검이 반사마사파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사마사는 그러나 동흥전에서 그와 비슷한 포지션인 제갈각에게 대패합니다.(제갈각은 독선이미지가 있지만, 이시기에는 최고의 전략가. 물론 1년이 안되 몰락) 사마소를 이용해 정치적 입지를 다졌으며, 제갈탄을 정동장군/독양주제사에서 진동장군/독예주제사(서류상 항렬은 같지만, 양주는 대오전선 최전방이고 예주는 그 뒤기 때문에 진동장군은 정동장군의 서포트 역할)로 강등시키며 적을 제거합니다. 


하후현/이풍/장즙(하후현은 명예직, 이풍은 당시 중서령으로 실권직으로 제갈탄과 함께 떡밥 덩어리)등이 사마사 주살을 논의하였으나, 그들은 사마사에게 걸려 모두 처형되었고, 이를 말미암아 사마사는 황제 조방을 폐위, 조모를 옹립합니다. 


이후 합비신성에서의 승전으로 문흠/관구검의 대두. 사마사에게 안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마사의 악행이 얼마나 심한 정도였냐면, 이후 관구검/문흠의 난에서 그들은 표문에 " 사마사를 사마부로 갈아치우고 그 밑을 사마소가 보좌 "라고 할 정도입니다. 이후 관구검/문흠이 난을 일으키자 눈이 아픈 상태로 종군하였고, 문앙(문흠의 아들로 무예만 본다면 조운 그 이상급)의 무예를 보다가 눈이 튀어나와 사망.


그 다음은 사마소, 어렸을 때 여린마음을 지녔고, 친분도 없던 하후현을 옹호할 정도로 착했으나, 사마사의 죽음 이후 타락(어쩔 수 없는, 사마사가 이미 해놓은 게 있기에 목날라감)합니다. 이후 제갈탄이 난을 일으키자 26만 대군을 이끌고 그를 도우러온 손침(당시 오나라의 실세, 제갈각과 손준의 뒤를 이음)까지 모두 물리쳤으며, 이에 노골적으로 반발한 조모(똑똑했으나 힘이 없었던 황제)를 시해하였고, 촉한을 멸망시키고 진을 세운 후 사망.


사마염은 천하를 통일 진을 완성하였으며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았고 삼년상을 부활시킵니다.

조비는 위나라의 유선 정도입니다... 그가 더 살았다면 위나라 망했을 겁니다. 문재로는 뛰어나나 황제의 자질은 그 아들 조예의 100분의 1도 채 못미칩니다.


조예 대에 조조를 섬기던 인물들 - 동소, 한기, 위진, 종요, 화흠, 왕랑, 조진, 조휴 - 같은 왠만한 인물들은 다 죽었으며, 조상파벌의 악행은 도를 뛰어넘었으니 사마의 쪽으로 붙는게 당연합니다. 


조조를 섬기던 인물 중 살아있던 인물 - 사마부, 정충, 고유, 왕릉, 장제, 노육 -과 순씨, 종씨, 진씨 등 왠만한 사대부 출신들 이정도는 모두 사마의 파벌에 붙었읍니다 조예의 요절이 위나라 멸망의 최고 원인입니다.


7.촉의멸망.

제갈량 사후. 잠시 위.오.촉은 안정기를 가집니다.

위에서는 조씨 vs 사마씨 분쟁이 계속되고 있었죠. 촉은 강유가 북벌 준비에 정신이 없었고요.


10년 정도인가? 그 이후로 강유가 몇차례 북벌을 시도하지만 다 실패합니다. 위에서는 조씨가 약해지고 사마씨가 강해지죠. 결국 사마씨가 권력을 다 장악하고 촉을 멸한 후 진을 건국. 오을 멸망시킵니다.


8.마의 대인물들중...

연의에선 제갈공명


정사로는 곽가나 사마의가 아닐까 합니다.</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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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모사,책사 네임벨류 공적 많은 양반들 많져


위 : 조조 순욱 순유 곽가 가후 사마의 양수 종회 희지재 가충 사마의 화흠 왕랑 유엽 양부 등등


오 : 주유 노숙 여몽 주방 제갈근 제갈각 육손 육항 고옹 우번 등


촉 : 제갈량 방통 법정 장완 비의 양의 미축 강유 등


원소 : 곽도 전풍 허유 저수 심배 등


여포 : 진궁


그 외 세력 수하로 : 관정 경무 왕윤 복완 채옹 정현 교현 등이 있네요


재야의 명사 : 석광원,최주평,관녕,병원


박사 : 초주 마균 등등


머리 좋은 장수들 많지만 , 공적이 적거나 열전이 적어 능력치가 적게 측정된 거입니다.


공명 - 사마의 - 방통 - 강유순


주유 , 곽가 , 육손 , 순욱 , 유엽


책사만 뽑으래도 100명이 넘습니다.


관우 , 여몽 , 서성 , 장료 , 황충


무장이긴 하지만 기본적 병법을 통달한 무장들입니다.




** 또 다른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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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appyday2100.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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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bumin211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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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hyun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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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upport.google.com/youtube/thread/1721344?msgid=4797194


https://www.youtube.com/channel/UCrFjsn71IQ2H96NLh4-xusg/live


https://youtu.be/HRlLFVcDdBs?t=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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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0ezy25PUk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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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R9Q6KlBpA4


https://youtu.be/xpqCHcEUv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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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8XwBMKaPK0Hr1 = 트윗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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