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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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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장보고의 출생과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완도 근처의 어느 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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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흥덕왕 때의 장수. 어릴 때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의 소장이 됨.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무역을 활발하게 함.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간 후 그곳에서 군인으로 출세했어요. 돌아와서는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해상 무역을 장악해 명성을 떨쳤읍니다.


훗날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려 할 때 신하들이 그가 ‘해도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부분이나, 시절을 함께 보낸 정년()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청해진으로 온 부분, 그리고 무엇보다 청해진이 그의 연고지였던 점으로 보아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장보고()의 다른 이름은 궁복(), 궁파()이다. 신라에 있을 때는 신분이 낮아 성이 없는 궁복이라 불렸을 것이다. 

 

활을 잘 쏜다는 의미가 있는 이름이다. 그러다 중국에 가서 ‘궁’자와 한자가 비슷한 장씨라는 성이 붙고, ‘복’이라는 이름과 소리가 비슷한 ‘보고’로 바뀌었던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기록에는 장보고(), 그러니까 재물을 많이 획득했다는 의미로 한자의 표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신분이 올라가면서 이름도 진화했다. 

신라의 무장으로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궁파()’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이라는 성과 보고()라는 이름은 당나라로 건너간 뒤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등 일본의 문헌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 혹은 ‘’로 되어 있다. 친구인 정년()과 함께 일찍이 당나라 서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을 지냈으며, 장보고와 정년은 용맹하고 씩씩해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이들을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828년 흥덕왕(, 재위 826~836)에게 당나라의 해적이 신라인을 노략하여 노비로 사고파는 행위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하고 오늘날의 완도인 청해()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청했다. 


왕이 허락하자 1만 명의 병사로 청해진()을 설치하고 대사(使)로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당나라에 견당매물사(使)와 교관선()을 보내고, 일본에는 회역사(使)을 보내며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에 신라에서는 왕의 사촌인 김균정()과 조카인 김제륭()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결국 김균정이 살해되고 김제륭이 희강왕(, 재위 836~838)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 뒷날의 신무왕)은 청해진으로 와서 장보고에게 의탁했다.


 838년 상대등 김명()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민애왕, 재위838~839), 김양() 등이 병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김우징을 찾아와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839년 장보고는 김우징, 김양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 공으로 장보고는 신무왕(, 재위 839)에게 감의군사(使)로 임명되었으나,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인 문성왕(, 재위 839~857)이 왕위에 올랐다. 문성왕이 즉위한 뒤 장보고는 진해장군()으로 임명되었다. 


845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둘째왕비로 보내려 했으나 중앙의 귀족들이 섬사람[]의 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장보고는 청해진에 웅거하여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846년(문성왕 8) 문성왕은 염장()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851년(문성왕 13)에는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삼국유사》에는 신무왕이 자신을 도와주면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장보고에게 약속했고, 이를 어기자 장보고가 왕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본 교토의 적산서원은 일본 천태종의 시조를 모신 곳이다. 이곳에 활을 든 장보고(, ?~846)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중국 산둥반도 영성시의 적산법화원에서도 장보고의 영정을 찾을 수 있다. 


9세기 서남해안의 해적을 평정하고 당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국제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는 우리 역사서보다 중국과 일본 역사서에 더 상세히 소개된 국제적인 인물이다. 


일본의 《쇼쿠니혼코우키()》에는 842년 정월에 신라사람 이소정() 등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장보고가 죽고 그의 부장인 이창진()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염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를 토벌했다는 사실을 전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장보고가 죽은 연대를 문성왕 8년(846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장보고가 죽은 연대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당나라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는 두목()은 [번천문집]에 장보고 편을 따로 만들어 장보고의 일대기를 소상히 다루었다. 그는 장보고를 안녹산의 난 때 활약한 곽분양에 비유하며, 명철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또한 일본 불교 천태종의 중흥조인 엔닌()은 자신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당나라를 여행할 당시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갔던 인연을 소개하며 “평소에 받들어 모시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고결한 풍모를 들었습니다. 엎드려 우러러 흠모함이 더해갑니다.”라는 편지를 남겨 장보고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신당서], 일본의 [일본후기]∙[속일본기]∙[속일본후기],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모두 전한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기록이 가장 간략한 편이다. 우리 역사상 드물게 보이는 국제적인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장보고는 한반도 남쪽 끝자락의 어느 섬에서 “아주 미천한 사람”으로 태어났다.또 다른 사료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대적할 자가 없다.”라고 할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다. 몇 살 어린 정년과 성장기를 함께 보냈는데,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고 수영에도 능했다. 특히 정년은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가면서도 물을 내뿜지 않았다고 한다. 


무예가 출중하고 명민하기까지 했던 이 두 청년은 신분 상승의 길이 막혀 있던 신라 대신, 개방적이었던 당나라를 택했다. 젊은 시절 어느 무렵인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라는 군직에 올랐다. 


당나라가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이었다고는 하나, 낯선 타국에서 군대의 중간 지휘자가 되었음은 용맹과 무예가 그곳에서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당나라에 머무는 신라인들의 신임을 쌓아 이후 재당신라인 조직을 건설하는 기반을 닦았던 시기도 이 무렵이다. 무령군이라는 군단명이 처음 생긴 것이 805년이니까 아무리 빨라도 805년 무령군 소장에 올라 821년 무령군의 군대감축이 시행될 무렵 군대를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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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닌의 [입당구법순례기]에 


824년 일본에 도착한 장보고가 엔닌을 배에 태워 당나라로 돌아갔다 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장보고는 당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무역 활동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당나라에서 생활하면서 장보고는 신라 사람들이 해적에게 붙잡혀 와 노예로 팔리는 현실을 수없이 목격했다.  


당의 조정은 신라인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금지한 바 있으나, 중국 연안지대 곳곳에서 자행되는 신라노예 매매는 뿌리 뽑히지 않고 있었다. 


828년 장보고는 귀국하여 흥덕왕에게 간청했다.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으로 도적들에게 잡혀와 노비가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들을 붙잡아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흥덕왕은 그를 청해진 대사로 삼고 군사 1만 명을 주었다. 


신라의 정식 관직에는 대사라는 명칭이 없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평민 출신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어렵자 장보고에게만 준 예외적인 관직이거나, 장보고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사용하던 별칭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추정된다. 


김헌창의 반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고 난 신라 조정에서 과연 해안지대의 군사기지에 1만 명이라는 군사를 보낼 수 있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는데, 이는 현지 주민 1만 명을 장보고가 규합한다는 것에 대한 양해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완도 앞에 있는 작은 섬 장도를 중심으로 그에 인접한 장좌리·대야리·죽청리 일대에는,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던 부두시설·토성·우물터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9세기 당대 최고의 국제 무역항이 있던 흔적들이다. 완도에 성을 쌓고 항만시설을 갖춘 장보고는 선박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했을 것이다. 


장보고의 군사들은 황해로 출동해 해적을 소탕했다. 해상을 안정시키고 나서 당과 일본을 잇는 중계 무역에 뛰어들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재일신라인 사회와 재당신라인 사회를 연결하는 무역망을 구축했고, 이러한 중계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당시는 국가의 엄격한 통제 아래 행해지던 조공무역의 시대였다. 그러나 장보고는 당나라와 신라, 일본 삼국에서 모두 국가 조직과 별도로 움직이던 독립 무역선단이었다. 


장보고는 단순히 삼국의 특산물을 사고파는 중계 무역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슬람 상인들이 당나라까지 가져온 서역의 물품들을 신라와 일본에 전했고, 당시 인기 있었던 자기를 직접 청해진에서 생산해내기도 했다. 장보고에게 청해진을 허락했던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흥덕왕의 사촌 동생인 상대등 김균정과 흥덕왕의 조카인 김제륭이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 


이 싸움에서 김균정이 죽고 김제륭이 희강왕이 되었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가족과 함께 청해진으로 달아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김우징은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를 건의할 때 시중으로 있었던 인물로, 그때의 인연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왕실의 권력 다툼을 피해 몸을 맡길 만큼 장보고의 청해진은 독립적이고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안 되어 김명과 김이홍 등의 반란으로 희강왕이 자결하고 김명이 민애왕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청했다. 


“김명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임금과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였으니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이오. 바라건대 장군의 군사를 빌어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해주시오.” 장보고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옛사람의 말에 의로움을 보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지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838년 청해진의 군사가 왕경에 이르렀다. 장보고는 근거지를 지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고, 5천 명의 군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정년이었다. 왕경에 이르기까지 몇 번의 전투가 있었으나 중앙군은 청해진 군사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청해진군은 도망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이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신라 최초의 군사 쿠데타였다. 평민 출신인 장보고가 이끄는 군대가 신라의 왕을 바꾼 것이다. 신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6개월쯤 지나 등창으로 죽자 문성왕이 왕위를 이었다. 


문성왕은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또한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섬사람의 딸을 어찌 왕실의 배필로 삼을 수 있겠느냐며 반발했다. 또 다른 얘기로는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군사를 부탁하며 왕위에 오르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가, 왕위에 오른 김우징이 약속을 지키려 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다고도 전하다. 장보고는 감의군사가 되었고 식읍 2,000호를 받았다. 


감의군사는 상징적인 군사 최고 지휘권자인 듯하나 새로 만들어진 자리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또한 식읍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러한 특별대우는 김유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어쨌든 장보고는 크게 분노했다. 이후 그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군사행동을 일으킨 구체적인 정황은 전하는 바 없다. 실제 반란을 일으켰든 그렇지 않든 신라 조정에서는 장보고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이때 염장이 나섰다. 거짓으로 장보고에게 접근한 염장은 술에 취한 장보고를 칼로 찔러 죽였다.

 


[삼국사기]"

장보고가 846년에 죽었다고 전하지만, 엔닌의 기록에 따르면 841년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의 허망한 죽음 뒤 그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염장이 진압했고, 청해진은 염장의 통제 아래 놓였다. 장보고의 심복들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떠나고 계속되는 완도 주민들의 반발로 결국 851년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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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궁복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고 헤엄을 잘 쳤다. “쳇,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면 뭐 해.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데.” 천민 출신이었던 궁복은 신라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나라로 건너가 군대에 들어가면서 이름을 장보고로 바꾸었다. 타고난 지혜와 용맹함으로 장보고는 남보다 빨리 높은 자리에 올랐고, 마침내 무령군 소장이 되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어린 아이들에게 힘겨운 일을 시키는 사람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바로 신라인이었다. 장보고가 물었다.

 

“신라의 아이들이 어찌 이 곳에 있느냐?” “장군님, 이놈들은 저희 주인이 돈을 주고 산 신라 노예입니다.” 그 말을 들은 장보고는 아이들을 신라로 돌려 보내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놀다가 해적들에게 잡혀 왔다는 것을 알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참을 고민한 장보고는 결국 신라인을 위해 다시 신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왕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흥덕왕은 당나라의 벼슬을 포기하고 돌아온 장보고를 어여삐 여겨 그에게 청해진 대사를 맡겼다. 장보고는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키는 한편 바다에 울타리를 세웠으며 육지에 성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일본과의 무역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런데 무역선이 오가는 바닷길에 해적들이 들끓어 온갖 횡포를 부렸다. 하지만 장보고가 청해진에 버티자 해적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 그리하여 장보고는 당나라와 일본의 무역 중계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힘과 돈을 갖춘 바다의 왕 장보고에게 권력의 유혹이 뻗쳤다. 


왕위를 놓고 다툼이 심했던 당시, 장보고는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우징을 신무왕에 오르게 하였다. 하지만 몇 달 뒤 신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장보고는 이번에는 사위로 점찍어 두었던 김경응을 문성왕에 앉혔다. 그러나 신하들이 천민 출신인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을 했다. 


결국 문성왕은 장보고를 없애기 위해 자객을 보냈고, 846년 한때 바다를 주름잡았던 장보고는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완도 장좌리 장보고 당제 유래전설의 원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까투리섬>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엄 장군과 장 장군이 있었다. 

엄 장군은 완도읍 가용리 엄나무골에서 살았고 장 장군은 완도읍 장좌리 안의 장도에 살았다. 이들 두 사람은 재주와 도술이 서로 엇비슷하여 이따금 내기를 즐기기도 하였다. 하루는 엄 장군이 장도에서 건너다보이는 동쪽 까투리여(섬)에 해 뜨는 시각을 기하여 누가 먼저 기를 꽂나 내기를 하자고 했다. 


장 장군은 해 뜨기 전 까투리로 변신해 섬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마음이 음흉한 엄 장군이 매로 변신해 까투리로 변한 장 장군을 잡아먹고 말았다. 


지금도 고금면 상정리 서쪽 바다에 있는 이 섬은 ‘까투리여’, ‘까튼여’ 또는 ‘같은여’라고 불리고 있다. 장도에는 장보고가 쌓았다는 토성 유래전설도 남아 있다. 


장좌리 장도 인근의 공존할 수 없는 두 토착 해양 세력이 힘 대결을 벌이다 한쪽이 패망하며, 그 배경이 까투리섬이라는 점에서 <장보고전설>속의 까투리섬 유래전설은 장좌리 장도 송징당제 유래전설과 동일한 서사 원리로 되어 있다. 


동일한 서사구조가 각기 다른 인물전설과 결합하여 지명과 신앙 유래전설로 각각 분화했다고 볼 수 있다. 신화적 세계관과 미의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장보고전설>의 하위 유형인 까투리섬의 지명유래전설이 장좌리 장도 당제 유래전설로 존재하는 <송징전설>보다 신화적인 친연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텍스트로서 더 오랜 시원을 보여 준다. 


통일신라 말기 진골 귀족들의 왕권 다툼이 격렬해짐에 따라 약화된 중앙정부의 틈새를 비집고 청해진 세력을 기반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려 하였으나, 기득권 세력에 의해 패배한 장보고와 관련하여 완도를 포함한 서남해안 지역에 전승되는 설화이다. 


장좌리 장도에 거점을 둔 장 장군이 엄 장군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는 줄거리는 염장에 의해 살해당한 장보고의 최후를 상기시킨다. 염장의 변신체는 매로 나타나며, 이 매는 장보고의 변신체인 까투리의 포식자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까투리와 매의 대립 항은 역사적 인물인 장보고와 염장 사이의 정치적 맥락과 연결된다. 


포식관계에서 약자인 까투리는 신라 골품사회에서 최하부에 위치했던 장보고의 정치적 소외를 상징하며, 매는 왕을 정점으로 한 진골 세력의 기득권을 의미한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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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투리란 설화적 상징 속에는 지배 권력의 희생양으로서의 장보고에 대한 설화 담당층의 인식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 또 다른 볼거리,


https://happyday6200.blogspot.com            


https://happyday2162.blogspot.com                                     


https://happyday2100.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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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bumin2110/187 


http://blog.naver.com/happyday2162/221511275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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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channel/UCfgPqvH1s_8mwfICMcBq2Zw


https://support.google.com/youtube/thread/1721344?msgid=4797194


https://www.youtube.com/channel/UCrFjsn71IQ2H96NLh4-xusg/live


https://youtu.be/HRlLFVcDdBs?t=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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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0ezy25PUk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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