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Russia, Russian Federation.
러시아는 남아메리카(South America) 대륙보다 크고 미국 면적보다 1.8배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대륙보다 2배 이상이나 크다.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러시아는 국토의 1/4은 유럽에 속해 있으며, 나머지 국토의 3/4은 아시아에 속해 있다.
2002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인구의 78%가 유럽에 살고, 나머지 인구가 아시아에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면적은 1709만 8242㎢로 구소련의 약 4분의 3에 해당되고, 인구는 1억 4242만 3773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모스크바(Moskva)이다.
러시아연방공화국 이전의 구소련은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에 의하여 탄생된 사회주의 국가로서 정식명칭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이었다.
유럽과 아시아북부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면적은 세계 제1위로서 2240만 2200㎢이었고, 인구는 세계 제3위로 2억 8450만 명(1988년 1월 기준)이었다.
대부분의 영토는 북위 45°이북, 즉 파미르고원과 북극 사이에 있어 추운 지역이며, 얼어붙은 불모지가 상당히 많아서 농경지대는 전체 국토의 13%에 지나지 않았다.
토양·동식물분포·지형·기후 등을 기준으로 동토지대(凍土地帶)·삼림지대·초원지대·흑토지대(黑土地帶)로 나누어졌고, 천연자원이 풍부해서 미국에 버금갈 정도였고, 전 세계 공업생산고의 약 20%를 생산하는 세계 제2위의 공업국이었다.
전체인구의 약 45%가 농촌에 거주하고, 노동인구의 약 28%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전체생산물의 약 16%가 농업생산물이어서 농업국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공용어는 러시아어이나, 약 150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약 200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전 인구의 70%가 넘는 러시아슬라브족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러시아정교를 신봉하였다.
이 러시아슬라브족은 다시 전 인구의 약 53%를 차지하는 대러시아족, 그리고 소러시아족(우크라이나인) 및 백러시아족으로 나누어졌으나 1992년 새로이 구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연방공화국 주민은 러시아인(83%)과 독립된 국가들이 떨어져 나간 결과 200여 개의 소수민족에서 얼마간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의 분포도 다양하여 전체인구의 약 82%가 러시아정교를, 약 14%가 회교를 각각 신봉하고 있다.
로마가톨릭이 약 1.5%, 유대교가 약 1.5%, 개신교가 약 0.5%를 차지하고 있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조 2358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8,447달러이다.
형성 과 변천
러시아 이전의 구소련은 사회주의연방공화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당독재체제로서 소련공산당이 최고권력기관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및 사법부를 이끌어갔고, 소련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관은 정치국이었으며, 정치국의 제1인자가 구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구소련을 통치하였다.
구소련의 입법부는 연방최고소비에트로 불리며, 연방소비에트(750명, 임기 5년)와 민족소비에트(750명, 임기 5년)의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방최고소비에트 안에 상설위원회격인 간부회가 있었으며, 이 간부회의 의장이 국가원수가 되었다.
연방최고소비에트는 각료회의, 즉 내각을 선출하고, 각료회의의 의장이 수상으로서 행정부를 통솔하였다.
각료회의는 약 100명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10여명이 각료회의 간부회를 구성하였으며, 사법부는 각 구성 공화국이 모두 지방법원·중간단계법원·최고법원이라는 3급법원제도를 채택하였다.
연방 전체를 관할하는 연방최고법원이 있었는데, 이것은 연방최고소비에트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1988년 6월 이후 권력구조의 개혁으로 인민대의원회의와 최고회의를 창설하고 의장을 투표로 선출하는가 하면 당기관에 임기제를 도입하였다.
구소련의 경제는 철저한 중앙통제경제 또는 명령경제로 이루어져왔다.
경제계획은 행정부내의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가 담당하였다.
국가계획위원회가 전국적인 경제계획과 관련해서 산업의 각 부문을 관리하는 전문부서들, 예를 들면 강철공업성·석유성·철도성·방직공업성 등의 생산목표를 설정하였다. 이 성들은 전국의 모든 산하공장을 지휘, 감독하였다.
1988년 9월 이후 경제부문에 대한 당의 간섭이 완화되었으나 1986년 국민총생산은 2조620억달이고, 1인당국민소득은 7,400달러였다.
주요수출품목은 원유·천연가스·농산물 등이며, 주요수입품목은 기계류·철강제품 등이었다.
1987년의 경우 수출액은 1,158억 4,000만달러, 수입액은 1,032억 5,800만달러에 이르렀다.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연방공화국이 형성된 1995년 수출액은 778억달러이고, 수입액은 579억달러로 여전히 구소련 보다 훨씬 밑도는 경제규모를 나타내고 있다.
구 소련은 혁명 당시 ‘계급없는 사회’를 표방하였으나 그것은 이론상으로나 실제상으로도 실현되지 않았다.
구 소련당국은 ‘계급간의 적대감’은 사라졌고, 다만 ‘계급간의 차이’가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구 소련에서는 ‘계급투쟁’은 끝났으며,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 노력만이 남았다고 하고, 구 소련당국은 소련에 노동자와 농민 및 인텔리겐치아라는 세 ‘사회그룹’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모든 성인들은 그가 종사하는 일에 따라 이 세 그룹 중의 하나에 속하며, 어린이는 그를 부양하는 사람이 속한 그룹에 속하였는데 인텔리겐치아 그룹은 엘리트·일반인텔리겐치아 그리고 화이트칼라노동자로 구분될 수 있었다.
어린이는 7세가 되면 8년제의 초급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졸업하면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첫째 학업은 그만두고 직업을 가지는 길, 둘째 2년제 직업학교에 진학하여 좀더 나은 직업훈련을 받는 길, 셋째 2년제 일반학교에 진학해서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할 준비를 하는 길 등이었다.
고등교육기관은 대학·연구소, 기타 고등교육을 위한 센터의 세 종류가 있었는데, 이를 종합적으로 ‘부지(vuzy)’라고 하였고, 부지의 대종은 의사·엔지니어·교사·관리자 등의 양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연구소이며, 학자를 양성하는 대학교는 소수이었다.
부지의 교육연한은 5년이었으며, 학비는 면제되고 전원이 생활비를 지급받았다.
대외관계를 보면 1945년 10월 24일 구 소련 당시에 국제연합에 가입하였으며,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다.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중심회원국이었으며, 북한·폴란드·불가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몽고·동독 등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시리아·인도·아프가니스탄·앙골라·콩고·모잠비크·에티오피아·남예멘·이라크·베트남등과우호협력조약을체결하였다.
구 소련은 1985년 3월 고르바초프(Gorbachyov, M.) 등장 이후 이른바 개혁(Perestroika)과 개방(Glasnost)이라는 목표를내걸고권력구조·경제관리·대외정책 등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왔다.
이와 같은 목표를 내건고르바초프(Gorbachev, M.)의 6년에 걸친 개혁은 무질서, 범죄의 증가, 지식인 이탈, 생산격감, 민족분리주의 요구증가 등을 가져왔으며, 이로 인하여 일어난 8월 쿠데타는 1991년 12월 25일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을 공식적으로 해체시키고 옐친(Yeltsin, B. N.)이 이끄는 러시아연방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옐친 대통령은 가이다르 내각을 중심으로 개혁을, 특히 가격 자유화를 출발점으로 하는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등, 권력구조에 큰 변화를 주는 ‘새 헌법’안을 인민대표회의에 내놓기도 하였다.
보수세력의 반대는 완강하였다.
보수세력은 가이다르 총리 서리에 대한 인준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가이다르 내각의 총사퇴와 심지어 옐 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구국 전선’을 출범시키고 소련의 단계적 부활을 목표로 활동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옐친은 고르바초프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고르바초프는 옐친에 반대하는 투쟁을 선언하였다.
옐친 대통령 세력과 반 옐친 대통령 세력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격화되어 갔으며, 러시아 정치에는 위기가 조성되었다.
다행히 타협이 성립되어, 1992년 12월에 가이다르 총리 서리는 퇴진하고 산업계 관료 출신의 체르노미딘(Victor Chernomyrdin) 부총리가 총리로 기용되었으며, 옐친이 제출한 새헌법안에 대해서는 1993년 4월 11일에 국민투표를 실시해 채택 여부를 결정하기로 합의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150만 명 규모의 독자 군대를 창설할 것임을 선언하는 포고령을 1992년 3월에 발표하였다.
스스로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뒤따라 마련된 ‘러시아 국방에 관한 법’은 국방과 관련해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줄였다.
1993년에도 개혁 세력과 보수세력 사이에 정치적 투쟁이 계속되었다.
첫 싸움은 보수세력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4월 11일로 예정된 ‘새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좌절시킨 것이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옐친을 탄핵하려 하였으나 탄핵안은 부결되었다.
여기서 타협이 이루어져 옐친 대통령에 대한 신임여부, 옐친 대통령의 개혁 정책에 대한지지 여부, 옐친 대통령의 임기 단축과 대통령 선거의 조기 실시에 대한 지지 여부, 현 의회의 임기 단축과 새 의회조기 구성에 대한 지지 여부 등 4개 문항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1993년 4월 25일에 실시된 국민투표는 대체로 옐친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옐친 대통령과 그의 개혁, 새 의회 조기 구성에 대한 지지와, 대통령 임기 단축에 대해서는 반대가 모두 절반을 넘어섰던 것이다.
힘을 얻게된 옐친은 1993년 9월 21일에 기존의 최고회의 및 인민대표 회의를 해산시키고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 실시와, 새 헌법안을 확정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보수파는 의회를 중심으로 반 옐친 운동을 펴면서 의회의 포고령을 통하여 루츠코이(Alecsandr Rutskoi) 부통령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선출하고 공무원과 군인은 모두 이 정부를 따르라고 명령하였다.
이 쿠데타는 곧 바로 진압되었다.
이 사건을 고비로 더 힘을 얻게 되자, 옐친은 1993년 12월 12일에 새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와 새 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를 동시에 실시하였다.
우선 새 헌법안은 여유 있게 통과되었다.
국가의회라고 할 수 있는 DUMA선거의 결과는 옐친에게 만족스럽지는 못하였다.
가이다르가 이끄는 개혁 세력 중심의 ‘러시아의 민주적 선택’ 당이 원내 제1당이 되기는 하였으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집결체인 자유민주당과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뜻밖에 많은 의석을 확보하였기 때문이었다.
국가회의와 별개로 연방회의도 구성되어 전자를 하원으로 하고, 후자를 상원으로 하면서 양원제는 여전히 유지되었는데, 연방회의는 정치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새 헌법을 통해 훨씬 더 강화된 권한을 확보한 옐친은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가속화시켰다.
1994년 7월 발표된 제2단계 민영화포고령이 대표적 조처였다.
1994년 11월에는 급진 개혁파인 추바이스(AnatolⅡ Chubais)를 사유화 담당 부총리로 기용함과 동시에 시장경제에 밝은 실무형 관료를 내각의 요직들에 포진시켰다.
시장경제로의 이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1992년과 1993년에 인플레이션은 극심하였으며, 게다가 물자의 부족 역시 극심하여져 일반 국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다.
국내총생산은 계속 떨어져 1996년의 경우에는 마이너스 6%를 기록하였으며, 인플레이션은 겨우 잡히기 시작했다고 해도 1996년의 경우에는 21.8%를 기록하였다.
일반 국민들의 경제생활은 개선되지 않은 반면에 극소수의 신흥 부유층이 출현하였다. 빈부의 격차가 두드러지게벌어지게 된 것이다.
사회적 안정은 크게 흔들려 살인과 폭력, 특히 마피아로 상징되는 조직 폭력이 난무하였다.
1992년, 인구 10만 명당 연평균 피살자의 수가 상시적(常時的) 내전 상태인 레바논의 20명에 육박하는 16∼17명으로, 세계에서 둘째에 이르렀다. 관리들의 부조리와 부패 및 안일무사도 보편화되었다.
옐친은 1996년 7월에 실시된 대통령의 직선의 결선투표에서 게나디 주가노프(Gennadi Zhuganov) 공산당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재선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체르노미르딘 총리가 이끄는 ‘우리 집은 러시아’라는 이름의 정당 등의 도움을 받았다.
재선으로 새롭게 5년의 임기를 시작하게 된 옐친은 1997년에 1988년 1월부터 루블화 가치를 1,000배 올리는 화폐계획안을 포함하여 러시아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몇 가지 조처들을 발표하였다.
‘깊은 병’에 걸려 있는 러시아 경제가 그러한 조처들로 개선되기는 어려웠다.
1997년 말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가 러시아에 밀어닥치면서 1998년 8월에 러시아는 루블화의 평가절하와 루블화 표시 외채에 대해 90일간의 지불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98년 물가상승률이 약 80%를 기록한 데서, 그리고 러시아의 89개 지역에서 식량부족 현상이 일어났고, 일부 지역의 경우 기아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시되는 사실에서 실증적으로 나타났다.
1999년에 들어서서는 1월초부터 금융기관의 파산이 줄을 잇고, 루블화의 폭락이 거듭되는 등 금융위기가 더욱 깊어졌다.
대외 부채의 일부에 대해서는 채무 불이행(디폴트)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1996년에 심장수술을 받은 이후 옐친의 건강은 그가 언제 사망할 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불안정하다.
의회에서는 하야 권고안이 제출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위신을 크게 격하시켰다. 옐친은 1998년 11월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총리에게 내정을 이양하고, 자신이 국방과 외교 등에 주력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것이 러시아의 국내정치를 결코 안정시키지는 못하였다.
옐친 이후를 내다보면서 1998년 말 이후 많은 정치인들이 여러 정당들을 새롭게 창당하고 있어서 러시아의 국내정치는 더욱 혼미해져 갔다.
2000년 말 푸틴이 정권을 잡으면서 정치적으로는 어느정도 안정을 잡아가고 있다.
대외적으로 볼 때 러시아는 지난 날 구 소련을 구성하였다가 1991년 12월 21일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10개국과 함께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을 형성하였다.
회원국들은 서로 이해가 다른데다가 이 연합의 장래에 회의를 품어 연합의 유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1992년 5월 11개 회원국들 가운데 러시아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6개국만이 집단안보 협력협정을 맺자 연합은 협정 서명국과 협정 비서명국으로 양분된 데다가 1992년 10월에 아제르바이잔이 회원국들 가운데 처음으로 탈퇴하고, 1992년 11월에 카자흐스탄 공화국이 제의한 공동경제 동맹결성안이 우크라이나 등 분리 지향적 회원국들의 반대로 거부되면서 연합의 존속에 대한 회의는 더욱 커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한 공화국인 체첸공화국이 1994년 12월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국가연합에 속한 다른 국가들 내부의 민족분쟁에 자극을 주었고, 또 회원국들 사이의 민족분쟁에 대해서도 자극을 주었다.
소수 민족들은 거의 모두 독립을 지향하려는 분위기 속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러시아 연방공화국은 체첸을 전격적으로 침공하여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소수민족들의 독립요구의 도미노현상을 막으려 하였다.
소수민족들의 독립요구는 러시아 연방공화국 안에서도 독립국가연합 회원국들 각자의 내부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독립국가연합 내부의 회교도 국가들은 슬라브계 국가들에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도 독립국가연합은 여전히 유지되어 왔다.
탈퇴하였던 아제르바이잔이 1993년 9월에 다시 가입하였고, 가입을 거부당하였던 그루지야가 1993년 12월에 받아들여졌다.
독립국가연합은 최고 협의기구로 국가원수평의회를 두고 연2회 이상 회의를 연다.
1993년 10월에는 모든 회원국들이 경제공동체 형성에 찬성함으로써 연합의 존속에 힘을 실어 주었다.
실무 기구로는 회원국 장관들로 구성되는 각료 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연4회 이상 회의를 연다.
러시아 연방공화국과 벨라루시 공화국 사이에는 1998년 말부터 통합이 협의되고 있다.
독립국가연합이 유지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연합을 중시하는 러시아의 입장이다.
러시아는 연합에 가입한 나라들이 러시아의 안보에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결국 독립국가연합은 옐친의 슬라브 중심주의의 산물로서 고르바초프개혁에 대한 대중적 염증과 공화국들의 독립요구에 바탕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여 그것은 구성국가들의 자주와 평등옹호 속에 러시아패권주의를 내장한 것으로서, 공동체적 결속보다는 공화국이기주의에 바탕한 경제적 생존전략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독립국가연합은 당초 러시아·벨라루시·우크라이나 등 슬라브민족주의에 바탕하여 출발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분열현상을 보여, 슬라브계와 비슬라브계(특히 회교권), 러시아민족과 다른 소수민족들간의 암투로 발전, 경제문제와 관련하여 연합은 물론, 러시아 자신의 장래마저 불안 속에 놓이게 하고 있다.
1992년 러시아 연방공화국은 출범 당시부터 친서방 외교노선을 표방하였다.
옐친은 러시아가 서방문명국들과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로부터 자신의 개혁정책에 대한 정신적 및 재정적 지원을 받아 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 및 일본 등 부유한 서방 선진국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려면 그들과 우호적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계산하였던 것이다.
친서방 외교노선의 핵심은 미국과의 우호 및 협력관계의 발전에 있었다.
1994년 1월 13일에 미국 클린터(Bill Clinton) 대통령이 자신의 대통령직 취임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하고, 옐친 대통령과 더불어 모스크바 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이 문서는 두 나라가 탈냉전의 세계적 분위기 속에 평화를 더욱 확산시키기로 다짐하였다.
1994년 9월 27일에 옐친은 미국을 방문하고 클린턴 대통령과 더불어 유럽안보문제를 논의하였다.
제2단계 핵무기감축협정(START Ⅱ)의 일정을 앞당겨 핵탄두를 해체하기로 합의하였으며, 러시아군과 나토군사 사이에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앞선 1993년 11월 2일에 러시아 연방공화국 국가안보위원회는 신(新) 군사독트린을 승인하였다.
탈냉전시대에 러시아는 특정 국가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러시아 국익을 저해하지 않은 나라는 동반자로 여기고, 군사력의 사용은 방어에 한정하며 핵무기는 전쟁수단이 아니라 침략 억지를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중요하다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옐친의 친서방, 친미외교는 서구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믿음 아래서 러시아의 외교 정치 행위를 미국의 그것에 종속시키고 있었다.
서방 세계는 러시아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옐친의 친서방 외교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른바 유라시아주의자들의 비판이 힘을 얻게 되었다.
독립국가연합의 회원국들 및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에 대해서도 무게를 실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유라시아주의자들은 서방 세계와의 관계 강화를 앞세우는 이른바 대서양주의자들의 외교는 결과적으로 러시아를 미국 또는 서방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으며, 러시아 외교에서 자율성을 감소시킨 반면에 타율성을 증대시키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옐친은 이 나라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점에서 1997년 중요한 기록들을 남겼다.
우선 3월에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열린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는 2007년까지 냉전시절 두 나라가 가졌던 핵무기 최고 보유량의 80%를 줄인다고 합의하였다.
두 나라는 또 나토의 동유럽 확대를 지지하되 동유럽의 어느 나라에도 나토의 상주국이나 핵기지는 주둔시키지 않는다고 합의하였다.
이어 4월에 모스크바에서 중국과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두 나라는 세계의 다극화를 선언하고, 미국이 단독적 패권을 행사하지 못하게끔 두 나라가 공동으로 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후속 정상회담이 11월에 베이징에서 열렸다.
여기서 4,300㎞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정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의 불씨로 남았던 국경분쟁이 해소되었다.
러시아는 11월 초순에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일본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나라는 2000년까지 두 나라 사이에 2차대전을 공식으로 마무리짓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최대 현안인 북방 4개섬을 둘러싼 영토분쟁을 해결하기로 합의하였다.
러시아는 미국과는 여전히 탈 냉전시대에 걸 맞는 우호와 협력 및 평화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중국 및 일본과의 관계도 돈독히 함으로써 그것에 바탕을 두고 미국을 공동 견제하려는 입장을 취한 셈이다.
1998년 말에 미국이 이라크를 기습 공격한 사건은 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 대한 견제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무력함을 다시 드러내게 된 러시아가 마치 그것에 반발이나 하는 듯 미국을 강하게 비난함으로써 두 나라는 긴장을 보여 주게 된 것이다.
전반적으로 러시아는 ‘핵을 가진 제3세계’로 조롱될 만큼, 즉 초강대국 미국과 강대국 제1군 일본·중국 및 독일에 이어 영국 및 프랑스와 더불어 강대국 제2군에 속한 것으로 자위할 정도로 위신이 실추되었다.
그만큼 러시아의 국제 정치력 영향력은 떨어지고 있다.
러시아가 미국과 유럽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는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중국과 일본을 빼 놓고는 적극적인 정책을 펼 여력이 크게 줄었고, 그것에 비례해 영향력 역시 크게 줄어들었다.
한반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에 대한 종래의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으나 뜻대로 되고 있지 않다.
러시아를 외교적으로 경시하거나 심지어 괄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현재 줄어들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일정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실질적 강대국으로 다시 도약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우호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노력은 계속해서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광복 이전 우리와 러시아의 관계
우리 나라와 러시아와의 관계는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 1246년에 고려인이 몽고의 수도인 캐라코람에서 러시아 수스달공국의 제로슬라프(Jeroslav)대공과 만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 조선조 효종 때에는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두번에 걸친 나선정벌(羅禪征伐, 1654·1658)이 실행된 사실이 있었다.
모두 단발적인 접촉으로 끝나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된 것은 아니다.
1800년대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860년부터 한러수호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에 거점을 확보하게 된 1884년까지, 제2기는 1884년부터 청일전쟁이 끝나 한반도에서 일본과 직접 대립하게 되는 1894년까지, 제3기는 1894년부터 러일전쟁에 패함으로써 한국을 부득이 포기하게 되는 1905년까지이다.
1905년 이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는 사실상 두 나라 관계는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제1기(1860∼1884)의 관계
러시아가 우리 나라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러청북경조약(露淸北京條約, 1860)으로 약 40만 평방 마일이나 되는 연해주지역을 획득함으로써 국경을 서로 맞대면서부터이다.
이 무렵 러시아의 주 관심은 우리 나라 영내에서 해군함대를 위한 부동항(不凍港)을 얻는 데 있었다.
1854년에는 일본과 개항교섭업무를 맡았던 푸티아틴(Putiatin,E.) 제독이 거의 한달 가량 동해상에 머물면서 두만강 입구를 측량하고 영흥만도 답사하여 그 내만(內灣)인 송전만(松田灣)을 포트 라자레프(Port Lazarev)라고 명명한 일이 있다.
1857년에는 영토문제 해결을 위하여 청나라로 가던 도중 거문도에 정박한 사실이 있기도 하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한반도의 부동항에 대한 관심표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부동항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 것은, 러시아가 연해주라는 광대한 지역을 얻기는 하였지만 중심지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육로로 이 지역과 통교하기 위해서는 2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대지가 황폐하여 식량도 자급자족할 수 없을 뿐더러 강마저도 연평균 173일이나 얼어붙어서 하천교통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들로서는 아시아 영토와의 왕래 및 교역업무는 해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연해주의 유지와 나아가 아시아 침략을 위해서도 해군력을 증강해야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함대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항만이 필요하였다. 물론, 1860년에 건설한 블라디보스토크항이 있기는 하였지만 연간 4개월(12∼3월)이나 얼어붙어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크게 부족하였다.
러시아는 부동항 대상지를 일본령으로 정하고, 1855년 러시아영토가 된 쿠릴열도(Kuril列島, 千島列島)와 일본령인 남부 사할린과의 교환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1861년에는 대마도(對馬島)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 계획은 영국과 일본의 견제로 좌절되었으며, 진출방향도 한반도로 바뀌게 되었다.
1864년 5명의 러시아인이 경흥으로 찾아와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고, 1866년에는 러시아군함이 원산만에 들이닥친 일도 있었다.
러시아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철수하였는데 이는 영국과 청의 견제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러시아는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의혹을 사게 될까 염려하여 한반도침투에 신중을 기하게 됨으로써 그 기선을 일본과 미국에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로 하여금 경계심까지 가지게 해버렸다.
러시아의 신중한 태도와 청나라의 사주에 의한 우리 나라의 경계심은 두 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나서도 20년간이나 수교를 막았던 중대한 요인이었다.
제2기(1884∼1894)의 관계
러시아의 우리 나라에 대한 태도는 1880년을 전후하여 크게 바뀌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원군의 실각으로 쇄국정책에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은 청나라가 이리분쟁(伊犂紛爭)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서 1876년 우리 나라와 강화도수호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였다.
우리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구미열강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이홍장(李鴻章)의 권유에 따라 1882년 미국을 비롯한 영국·독일 등과 수교를 맺게 되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우리 나라에 대한 청나라의 압제가 강화되자, 고종은 구미열강의 힘을 빌려 이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역이용 당하였다.
영국은 한영조약의 비준을 거부하고 한영신조약을 강압하였다.
이에 고종은 영국·미국의 반대세력인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된다. 한편 러시아로서도 종래의 신중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미국 등 적대세력이 한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영국·미국 등이 몇 개의 항만을 확보하게 될 것이고 이는 러시아에 대한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를 아시아진출을 위한 기회로 보고 우리 나라와의 수교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묄렌도르프 (Möllendorf,P.G.)의 주선으로 1884년 7월 7일 한러수호조약(韓露修好條約)이 체결되었다.
러시아는 이로써 한반도에 있어 영국과 대등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뒤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개화파가 거세되고 수구파가 득세하게 되어 청나라의 압박이 더욱 강화되자, 다시 묄렌도르프가 주선하여 한러밀약(韓露密約)이 맺어졌다.
러시아는 그렇게 원했던 영흥만이라는 부동항을 얻게 되고, 영국을 앞서게 되었다.
영국은 밀약의 대략을 탐지하자, 그렇지 않아도 아프가니스탄의 펜제(Pendjeh)위기로 러시아와의 대결을 계획하던 터라 1885년 4월 거문도를 점령해버렸다.
이 사건은 한러밀약 실현을 위한 주일러시아공사관의 서기관 스페예르(Speyer, A.)와 우리 나라 외교부의 교섭(6월)을 무위로 끝나게 해버렸다.
우리 나라와 러시아는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우리 나라로서는 러시아의 새로운 영토적 침략을 영국의 힘을 빌려 막았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이이제이(以夷制夷)에 성공하였던 셈이다.
청나라의 압제를 제거하기 위하여 끌어들인 러시아가 영국에 의하여 견제됨으로써 더 심한 청나라의 속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영국은 거문도철수의 선행조건을 청나라에게 알려주며 영국과 러시아간의 조정역까지 맡겼는데, 이는 청나라의 대한종주권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켜주는 외교적 지원이었다.
이런 상황하에 1885년 10월 3일 우리 나라에 온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1886년 8월 ‘제2차한러밀약사건’을 조작하여 병합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러시아와의 충돌가능성 때문에 자제해서 1886년 10월 ‘이(李)·라디겐스키협정’을 맺음으로써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청나라의 압력은 이처럼 강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거문도사건을 계기로 동아시아지역 방위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러시아함대는 동해를 벗어나기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중립국의 항구를 기지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별도로 저탄지(貯炭地)를 확보하지 않는 한 그들의 함대는 방어역할 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그래서 육군에 의지하는 새로운 방위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조처가 바로 1886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시베리아철도건설계획이다.
대한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노선도 확립하게 되는데, 1888년 4월 26일 프리아무르 총독 코르프(Korf)와 외무성 아시아국장 지노비예프(Zinoviev)의 회담은 러한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이 회담은 후자가 각서형식으로 정리한 문건에 코르프가 동의, 서명하는 절차를 밟았는데 이 두 사람의 결정이 청일전쟁 개전 때까지 러시아의 대한정책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거문도사건이 있은 지 3년 후에야, 그것도 국장급의 모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당시 러시아가 평가한 우리 나라의 비중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는 관심의 대상이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중요한 나라는 아니었다.
러시아가 한반도병합을 기도할 경우 청나라와의 관계악화는 물론이고, 영국과의 관계도 악화시켜 영국과 청나라의 연합을 촉진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라디겐스키회담이나 1888년의 한러육로통상장정(韓露陸路通商章程)도 그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제3기(1894∼1905)의 관계
러시아의 대한 기본노선은 이 기간 중 시베리아철도 착공(1891.5.31.)이 일본으로 하여금 청나라에 대한 개전을 서두르게 함으로써 바뀌게 되었다.
시베리아철도는 거문도사건 직후 전략적인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재무상 비시네그라드스키(Vishnegradski)의 반대로 착공이 지연되었으나 위테(Witte,S.Y.)의 등장과 더불어 프랑스의 금융지원을 받아 이 철도가 군사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착공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를 완성해서 태평양연안에 접근하기 전에 청나라와의 관계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면 바로 아시아침략이 개시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로서는 청일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한반도를 둘러싼 종래의 대일정책을 급격히 바꾸게 되었다.
개전 직후에는 국외중립을 지켰지만, 전세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일본의 강화조약문이 1895년 3월 25일 이홍장에게 수교되자 강경한 태도로 돌변하였다.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은 명백히 러시아의 철도를 겨냥한 것이며, 그들의 여순(旅順) 출현은 결과적으로 한반도 전체의 병합이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청일전쟁의 개전은 두 가지 점에서 러시아의 대한정책을 크게 바꾸어놓았으니, 첫 번째는 종래 국장급회의로 결정되던 대한정책을 각료회의의 논의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한반도문제에 관한 한 일본과의 협조가 아니라 일본에 대하여 열강과 공동간섭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바로 위테의 입안에 따라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조인 후 6일 만에 전격적으로 제기한 대일(對日) 3국간섭이다(1895.4.23.).
일본은 러시아 등의 열강에 굴복,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게 되었다.
우리정부에서는 노골적인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멀리하는 정책)을 써서 친일파 각료들을 제거하고 친러파를 중용하였다.
일본은 약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민비(閔妃)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10.8.)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 나라 국내의 거센 반발과 국제적인 압력에 부닥치게 되고, 이어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2.11.∼1897.2.20.)으로 일본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러시아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입장이 된 반면, 러시아는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활동과 이권획득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96년 5월 14일 러시아·일본 양국의 주한공사들 사이에 합의된 베베르(Weber,K.)·고무라(小村)각서는 러시아의 우위가 인정된 것이었다.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 참석을 이용해서 모스크바에서 성립된 로바노프·야마가타(山県)의정서(일명 모스크바의정서, 1896.6.9.)는 한반도에서의 양국의 지위를 협의한 고위층간의 타결이었다.
유리한 입장의 러시아가 일본과 타협한 것은 태평양연안에서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일본을 잠시 안정시키려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위테는 이미 그보다 일주일 전에 대관식에 참석한 이홍장과 러청비밀동맹(露淸秘密同盟)이라는 대일본공동방위동맹을 맺어 동청(東淸)철도부설권을 획득하였고, 6월 1일부터는 고종의 사절로 모스크바에 간 민영환(閔泳煥)과도 로바노프·야마가타의정서와는 상반되는 목적을 가진 ‘조선사절에의 회답요점’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교행각과 아울러 서울에서도 러시아공사관으로 온 고종을 상대로 이권획득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4월 니시첸스키(Nisichensky)라는 자의 명의로 함경북도 경원·종성일대의 광산채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같은해 8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상인 브린너(Brynner,Y.)의 명의로 압록강·두만강유역과 울릉도 삼림채굴권을 얻게 되었다.
동해의 포경권에도 손을 뻗쳐 울산·성진 등지의 어장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아관파천 시기의 러시아는 우리 나라의 군사·재정에 관한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만주방위를 위한 완충지대의 역할밖에는 부여하지 않았다.
일본과의 평형을 유지하며 자국세력의 거점을 마련한 뒤, 친위대 및 군대의 훈련을 관장하고 재정고위직을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데 그치려 하였다.
1896년 8월 스트렐비트스키(Strelbitski)대령이 내한하였으며, 같은해 10월말에는 푸티아타(Putiata)대령 등 교관단일행이 민영환 등과 함께 서울로 왔다.
우리 나라 사절에게 약속하였던 차관제공을 미루고, 이것이 불신을 사게 되어 러시아의 한반도에서의 세력이 한때 흔들리는 위치에 있었다.
경제적으로 일본에 훨씬 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테의 모든 관심이 만주횡단철도에 집중되어 이홍장과의 교섭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백이 영국·프랑스 등의 열강에 이용당하였던 것이다.
고종의 환궁도 러시아에 대한 실망을 말해준다.
위테가 그의 비서장 로마노프(Romanov,P.M.)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이 대한진출을 결심하고 알렉세이프(Alexeiv,K.A.)를 파견함에 따라 사태는 다시 바뀌었다.
“한러은행설립을 준비하고 세관관리를 러시아인 수중에 넣으라.”는 위테의 훈령에 따라 1897년 9월초 서울도착과 함께 우리 나라 세관관리상태를 파악하고,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Brown,M.)의 부정행위 증거를 포착, 축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0월 25일 그는 재정고문 및 총세무사로 임명되었고, 11월 10일까지는 세관의 모든 업무를 접수하였다.
이로써 러시아의 약세는 완전히 만회되었다.
그렇지만 위테의 이러한 대한정책도 자르의 신임이 외상 무라비에프(Muraviev)로 옮아가게 되고, 그의 제의에 따라 1897년 12월 19일 뤼순·다롄(大連)을 점령하게 되자 다시 한번 크게 바뀌게 된다.
아시아정책이 한반도 중심에서 만주중심정책으로 바뀌게 되고, 그 반영으로서 러시아의 양보를 의미하는 1월의 제의가 1898년 4월 25일 로젠·니시(西)협상으로 매듭지어졌다.
러시아는 훈련교관과 재정고문을 자진 철수시켰고, 개점한 지 2개월밖에 안 되는 한러은행도 해체시켰다.
로젠·니시협상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우위만을 인정해주었지만, 그것은 결국 일본의 외교적 우위마저 인정해주는 셈이 되어 한반도에서의 러시아의 기반은 크게 약화되었다.
만주중심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반도를 일본을 견제하는 완충지대로서의 가치만으로 인정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러시아가 일본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한반도에서 대일견제력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이미 국제적 압력과 내부적인 ‘금융 및 산업위기’가 겹쳐 모든 사태를 1898년 중반으로 묶고 더 이상의 진전을 자제한다는 ‘신정책’이 확정된 상태였다.
1899년 3월의 포경합동조약안이나 1899년 9월 1일과 1900년 3월 30일의 마산포(馬山浦)의 조차기도는 자르의 재가를 받은 것이기는 하였지만, 정책담당자의 최종적인 결정에 의한 조처는 아니었다.
의화단란(義和團亂)의 만주파급은 이러한 러시아의 자제정책을 계속 고수할 수 없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이를 기화로 만주를 점령하고, 한편으로는 연합국과 더불어 북경교섭을 벌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의 지방관리와 단독교섭을 하여 만주를 보호령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러시아는 일본의 견제조처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그 선수조처로서 열강보장하의 한반도중립화안을 일본에 제의하게 되었다.
1900년 8월말 친러파였던 주일한국공사 조병식(趙秉式)이 일본외상 아오키(靑木)에게, 1901년 1월 7일 주일러시아공사 이즈볼스키(Izwolski)가 가토(加藤)외상에게 각각 제의하였다.
이것이 일본에 의하여 거부되자 러시아는 다시 1901년 7월 일본에 행정 및 재정고문과 경찰총감의 파한권(派韓權)을 인정하는 한반도중립화안을 주한일본공사에게 제의하였다.
이것은 영국에 자극을 주어, 일본의 동맹제의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영국으로 하여금 1902년 1월 이른바 영일동맹을 체결하게 하여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약세에 놓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러한 상황을 초강경책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만주철병은 위테가 실각하고 베조브라조프(Bezobrazov)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조브라조프의 ‘전진정책’이 사태를 지배하는 가운데 러시아는 무모하게도 우리 정부에 대하여 1896년 브린너가 획득한 압록강 삼림이권의 이용을 통고하고, 이어 용암포(龍巖浦) 점령을 단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일전쟁이 개시되었으며, 러시아는 여기에서 패전하였다.
포츠머스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에게 한반도의 보호만을 승인하였지만, 이는 한반도에 있어서 러시아의 대일견제력 상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일본의 한국병합까지 가능하게 해준 것이었다.
1905년 이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러시아와 우리 나라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광복 이후 우리와 러시아의 관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그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고 그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게 되었다.
38도선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전통적인 욕심을 고려한 미국이 구상하고 제의한 것이다.
소련은 이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잠정적으로 제안된 분단이 굳어지게 된 데는 소련의 책임도 있다.
북한을 자신의 세력 속에 고정화시키려는 소련의 야심은 결국 북한에 소비에트체제를 이식시켰기 때문이다.
구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
구 소련은 1945년 8월 8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10일에는 함경북도 웅기에 상륙하였다.
함경북도·함경남도의 주요지역을 장악한 다음 평안도로 들어와 8월 24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에 들어온 구 소련 제25군은 직접통치방식을 회피하고 간접통치방식을 택하였다.
평양에 들어오기 전에 자체적으로 수립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를 일단 인정하고, 그 기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개편하여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북한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하수인으로 이용하였던 것이 바로 구 소련파 한국인이었다.
개최된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는 우리 나라에 대한 의정서가 발표되었다.
주요내용은 한반도 전역에 통치권을 가지는 한민족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 그리고 이 정부를 미국·영국·중국·구 소련 4개국이 5년 이내 신탁통치한다는 것이었다.
구 소련은 이 모스크바공식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구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을 때도 자신의 처지를 고수하고 비타협적인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결국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미·소의 대립은 점점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되고, 따라서 남북분단은 고정화되었다.
1948년 9월 9일 북한에는 김일성(金日成)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구 소련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라는 점령 초기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구 소련은 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북한에 대하여 계속 많은 경제원조 및 군사원조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구 소련의 원조가 남침준비의 원천이 되었다.
스탈린(Stalin, I. V. )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였을 때, 그들은 미국의 불개입을 전제하고 있었다.
트루먼 (Truman, H. S. ) 행정부는 국제연합의 이름 아래 서방국가들과 함께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반격으로 북한이 붕괴의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 때, 구 소련은 중국의 참전을 적극 권유하였고, 중국의 참전과 더불어 전선이 교착되자 휴전을 제안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구 소련은 1951년 6월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고, 휴전협상이 개시되어 1953년 7월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전쟁에서의 중국의 개입과 1958년까지 계속된 중국군의 북한주둔은 구 소련과 북한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증대된 반면, 북한의 구 소련의존도는 줄어들게 되었다.
스탈린의 죽음과 그에 따른 소련지도자들의 내분도 구 소련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거기에다가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1서기 흐루시초프(Khrushchyov, N. S. )가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1인독재체제를 비난하고 서방과의 평화공존을 옹호하자, 김일성은 이러한 상황이 자신의 권력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감지하고 이에 다각적으로 대처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 소련과 북한의 갈등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구 소련은 1953년 9월 북한에 대한 원조협정을 체결하고 2억5000만달러의 전후복구비를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북한을 구 소련의 영향권내에 묶어두지는 못하였다. 1960∼1961년 중소분쟁이 심각하게 노출되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당하자 북한은 중국을 선택하였다.
북한은 중국과 협력해서 구 소련의 수정주의·유화주의노선을 비난하게 되고, 구 소련은 북한에 대한 경제·군사·기술원조를 단절해버렸다.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새로운 지도층의 등장은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구 소련은 1965년 5월 군사원조협정을 체결하고 그동안 끊겼던 군사원조를 재개하였다.
1966년 2월에는 경제기술협정(1966∼1970)이, 1967년 3월에는 북한군사력강화를 위한 협정이 맺어졌고, 1967년 10월에는 경제·과학·기술조정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두 나라 사이의 무역량은 늘어났으며, 평양화력발전소 및 김책제철소(金策製鐵所)의 확장과 기타 건설계획에 대한 구 소련의 원조가 재개되었다.
이런상황 속에서 북한은 중소분쟁에 대한 중립을 선언하게 된다.
구 소련의 이념노선에 반대하면서도 공리적인 타산으로 인하여 구 소련측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구 소련은 북한이 1968년 1월 미해군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1969년 4월 미해군 정찰기 EC·121기를 격추시켰을 때, 그 비합리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북한은 1969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공산당대회에 불참하고, 1970년 3월 조소공동해양연구의 불참을 발표하였다.
1970년대 초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되자, 북한은 거의 완전한 중립으로 바뀌게 되고, 구 소련은 이를 활용하려고 하였다.
1971년 11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북한의 경제사절단에게 1971∼1975년 동안의 추가 경제·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이어 ‘공산주의지도 아래에서의 조선통일’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1972년에는 북한의 외상 허담(許錟)의 방문을 받아들여 브레즈네프(Brezhnev, L. I. )와 회담하였다.
구 소련도 공식사절단을 북한에 파견하였으며, 북한은 1970년대의 긴장완화와 다원화 속에서 대외관계의 새로운 좌표를 설정한다.
중국과 구 소련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익을 추구하려는 태도, 즉 ‘자주노선’을 추구하게 된다.
구 소련은 이러한 눈치외교를 배척하기도 하고 북한의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별종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고성능 항공기의 공급 및 김일성의 구 소련방문을 거절하기도 하였고, 북한군인들의 판문점에서의 미군장교 살해에 놀라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구 소련은 1976년 말부터 북한에 대한 지원을 격감시켰고, 무역량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유대관계에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1976년 7월 만기가 된 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유효기간을 5년간 연장하였으며, 1978년 양국의 외교관계수립30주년에는 우호적이며 협조적인 관계를 공개적으로 다짐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도 이러한 기본적인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1982년 8월 15일 구 소련이 북한에 보낸 광복37주년기념축하전문에서 “1945년 8월 구 소련군은 일본군국주의군대 가운데 가장 강한 관동군을 참패시켜 한국민을 일제식민지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켰다.
”고 명시한 데 대하여, 김일성은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구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군사개입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하였다.
1984년 김일성은 구 소련을 방문하여 구 소련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Chernenko, K. )와 회담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1982년 이후 소련과 북한 사이에는 도서발행분야협조협정(1982. 10. )·과학기술협조협정(1984. 10. )·철도협정(1985. 2. )·국경협정(1985. 4. )·영사협정(1985. 4. )·과학기술정보교환협정(1985. 8. )·관광교류협조협정(1985. 8. )·경제기술협조협정(1985. 12. )·원자력발전소건설협정(1985. 12. )·쌍방간의 인적교류협정(1986. 1. )·수산분야협조협정 (1987. 5. ) 등이 체결되었다.
1986년 구 소련의 대북한 수출액은 11억3550만달러에 이르렀으며, 그 주요품목은 원유와 밀이었다.
수입액은 6억7650만달러에 이르렀으며, 주요품목은 압연강제·미곡 등이었다.
구 소련과 한국과의 관계
38도선 이북 지역에 대한 구 소련의 점령과 북한정권 수립으로 인하여 구 소련과 한국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성격을 지닌 채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개시된 북한의 남침에 있어서 구 소련의 역할이 지대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적대의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제1공화정의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여, 결국 1953년 10월 1일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기본적으로 반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구 소련의 팽창정책을 동맹조약으로 견제하려던 미국의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호불신관계는 제2공화정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군정에서도 대외적으로는 친미정책, 대내적으로는 반공정책을 강화하였다.
구 소련 관영통신은 군사정부를 비난하였고, 군사정부도 구 소련과의 접촉을 고려하지 않았다. 제3공화정이 출범한 이후에도 이와 같은 관계는 계속되었다.
구 소련은 한일기본관계조약을 미국이 주도하는 동북아시아판 나토(NATO)라고 규탄하였다.
1965년 2월 코시긴(Kosygin, A. N. ) 구 소련수상은 평양을 방문하고 공동성명을 통하여 같은 취지를 명확하게 밝혔다. 구 소련은 또한 한국군의 베트남참전도 비난하였다.
1966년 6월 한국의 주도 아래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가 창설되자 미국의 후원 아래 반공적인 군사동맹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적대감 속의 한소관계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닉슨(Nixon, R. M. )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미국의 세계정책이 바뀌고, 구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강대국관계도 바뀌게 된다.
한국도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구 소련도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한국과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관계를 개선하려는 징후를 보였다.
1971년 8월 김용식(金溶植)외무장관은 국외에서 구 소련이 한국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구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고, 당시의 박정희(朴正熙)대통령도 1972년 5월 16일 비슷한 취지를 밝혔다.
무역법도 고쳐 구 소련을 포함한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교역도 허용하였다.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외교선언을 통하여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에 대하여 문호를 개방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그들도 호혜적인 조처를 취하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구 소련의 한국에 대한 태도도 점차 바뀌었다.
한국도 아시아집단안전기구의 회원이 될 수 있으며, 남북한의 국제회의 및 유엔동시가입 실현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1973년부터는 대한민국여권을 소지한 사람들에게 소련입국을 허용하였다.
국제연극협회 총회에 참석하는 연출가 및 유니버시아드체육대회에 참석하는 38명의 한국선수단을 입국시켰다.
비공식이지만 양국의 무역계약이 맺어졌고, 다양한 형태의 문화교류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중국과 북한이 ‘2개의 조선정책’을 고취하는 것이라고 공격하였지만, 한국과 구 소련은 은밀한 관계의 접촉을 계속하였다.
구 소련은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입국을 계속 허용하였다.
1975년 9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아마추어레슬링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단, 국제연합협의회에 참가하는 한국대표단에 입국을 허용하였다.
1978년 4월 대한항공 소속의 여객기가 실수로 구 소련영공을 침입하여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하였을 때에도 구 소련은 호의적으로 처리해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서 구 소련정부에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구 소련은 그 뒤에도 국제회의를 취재하는 기자들,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단, 세계정치학회에 참석하는 학자들에게 입국을 허용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개선과 악화가 교차되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기가 구 소련영공을 침입하였다는 이유로 소련공군기가 이를 격추시켰다.
이 사건은 구 소련에 대한 전통적인 불신과 적대감을 환기시켜주었다.
1984년 5월 김일성의 구 소련 방문과 구 소련과 북한의 군사유대강화는 구 소련이 북한의 군사모험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구 소련과 한국의 관계개선 움직임이 있었다.
1982년 가을에는 구 소련정부의 문화관계 관리가, 1986년에는 구 소련의 체육부장관이 각각 서울을 방문하였다.
두 나라 사이의 간접무역규모도 계속해서 확대되어왔다.
1988년 제24회서울올림픽대회에는 788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고 예술단이 서울에 왔다.
서울올림픽 참가와 한국경제에 대한 높은 평가에 힘입어 두 나라 사이의 교역관계는 증대되고 있으며, 1988년에는 상호영사업무까지 취급하는 무역사무소를 개설하였다.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남북한 관계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고르바초프(Gorbachev, M. )가 취임하면서 구 소련은 개혁과 개방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고르바초프는 국제관계 전반을 탈냉전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 나라와 관계 개선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제1차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이해 10월에는 한·소국교가 수립되었고, 곧 바로 12월에는 제2차 한·소 정상회담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데 이어 1991년 4월 제3차 한·소 정상회담이 제주도에서 열렸다.
구 소련은 또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도록 지원하였다.
구 소련의 이러한 대한정책은 북한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1986년 김일성은 구 소련을 방문하고 고르바초프와 회담하면서 구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는 것은 2개의 조선을 고착화시키는 일이라고 경계하였으며, 그 뒤에도 같은 뜻을 여러 차례 표시하였다.
러시아와 남북한 관계
1991년 12월에 구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구 소련을 계승하였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면서 연해주와 사할린의 한인 동포 6만여명을 포함, 15만여명의 교포가 살고 있어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러 관계의 발전은 1988년 한국 제6공화국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북방정책과 고르바초프가 1988년 9월 크라스노야르스크연설을 계기로 적극화된 한국과의 경제협력의사가 맞물리면서 급진전되었다.
1990년 9월 30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30억달러의 차관제공(1993년 5월 현재 14억7000만달러 제공)을 포함하여 자원·과학기술·수송·통신 분야에 걸친 각종 협력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1992년 11월 옐친의 한국방문 시 체결된 한·러 기본조약은 한·러관계가 단순한 관계정상화를 넘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동반자관계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한·러관계 진전에 따른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역내국가들과의 관계개선 노력은 러시아가 앞으로 아·태 지역의 일원으로 부상하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고 있다.
동시에 러시아의 국내적 정치정세불안, 아·태지역에서의 강대국간 경쟁의 지속 등은 러시아의 이 지역정책과 관련하여 지속적인 문제로 남을 것이다.
교역관계를 보면 1989년의 경우 러시아는 한국으로부터 섬유·신발류 2억800만 달러를 수입하고, 어류·석탄·원목을 3억9200만 달러 상당 수출하였다.
한·러교역액은 1991년 12억2600만 달러, 1992년 8억6000만 달러, 1993년 약 15억7000만 달러(수출 6억, 수입 9억7000만), 1994년 11월 현재 19억6000만 달러(수출 8억3000만, 수입 11억3000만)이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러시아 수출액은 46억 9000만 달러이며, 수입액은 113억 1000만 달러이다.
구 소련과 북한은 1948년 10 월 12일에 수교한 이래 사회주의형제국으로 관계를 맺어왔으나, 구 소련해체 이후 러시아가 구 소련이 체결한 모든 조약의 의무를 계승한다지만, 북한의 폐쇄성에서 오는 한계 때문에 쌍방관계는 원활한 편은 아니다.
1990년 러시아는 북한으로 원유·면화·직물류·공업설비 등 15억1700만달러를 수출하고, 북한으로부터 마그네샤크링카·의류·강철·축전지 등 10억4700만달러를 수입하였다.
2014년 현재 북한의 대 러시아 수출액은 8217만 달러이며, 수입액은 1017만 달러이다.
러시아는 ‘2개의 코리아’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우선 한국과의 우호증진을 위하여 두 나라 수뇌부 사이에 공식방문이 뒤따랐다.
1994년에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문하였으며, 1999년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문하였다.
1998년에는 외교적 분쟁이 발생하였으나 한국 쪽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경질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였다.
러시아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버리지 않고 있다.
1999년에 크라신(Krassin) 외무차관이 북한을 방문하여 두 나라 사이의 방위동맹조약을 연장하였다.
러시아 안의 우리 문화
이주 개요
구 소련 정부가 1979년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구 소련에 거주하는 한인은 38만9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인구조사방법상의 문제, 타민족과의 혼인, 그리고 그 자녀들이 자라서 구 소련인으로 등록하는 일 등으로 볼 때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중에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Uzbek)와 카자흐(Kazakh)의 두 공화국에 사는 한인이 각기 16만3000명과 9만5000명(1979년 기준)으로, 합계 25만8000명이 되어 전체 한인의 3분의 2를 차지하였다.
키르기스(Kirgiz)·타지크(Tadzhik)·투르크멘(Turkmen) 등의 공화국을 비롯, 사할린(Sakhalin)섬과 극동의 하바로프스크(Khabarovsk)·연해주지방·러시아(Russia)공화국의모스크바·레닌그라드(Leningrad), 캄차카, 로스토프(Ros·tov) 지역, 우크라이나(Ukraina), 카프카스(Kavkaz) 지방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1860년대부터 1936년까지 한인들의 러시아(구 소련 포함) 이주역사에 관해서 ≪재소한인의 역사 Ocherki po istorii Sovetskikh Koreitsev≫(1965, 알마아타)라는 책을 쓴 구 소련거주 한국인 학자 김승화에 따르면, 농민 13가구가 1863년 겨울밤에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Ussuri)강 유역으로 이주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이주민의 숫자는 그 뒤 점차 증가하여 1865년에는 60가구, 1866년에는 100가구에 달하였다.
1867∼1869년 사이에 우수리지역을 방문한 러시아 탐험가 프르제발스키(Przhevalsky,N.M.)는 우수리강유역의 티진헤(Tizinhe)·얀치헤(Yanchihe)·시디미(Sidimi)마을에 1,800명 정도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869년에는 대홍수와 흉작으로 말미암아 4,500명의 함경북도 주민들이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대량 이주하였다.
1870년 연해주의 한인수는 8,400명에 달하였고, 1872년 사마르키(Samarki)강가에 블라고슬로벤노에(Blagoslovennoe)라는 최초의 한인마을이 세워졌다.
러시아는 이 지역을 개발시킬 목적으로 처음부터 이주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부유한 농부들의 땅을 소작하면서, 러시아 행정관리의 지시에 따라 우수리강과 아무르강 유역에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였다.
1884년 우리 나라와 러시아간에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이어 1888년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의 문제가 거론, 합의되었다.
1884년 이전에 이주한 사람들은 러시아국적을 취득하고 극동지방에서의 거주가 허가되었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전체 이주민의 20∼30%, 즉 1,845가구 9,000명으로서 일정한 토지를 분배받고 그 뒤 20년 동안 인두세와 토지세를 면제받았다.
1884년 이후에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2년간의 유예기간을 주어 귀환하도록 하였다.
우리정부는 지속적으로 러시아이주를 억제하였으나, 이주는 계속되었다.
1910년의 일제강점과 1919년의 3·1운동 이후 많은 농민·독립지사 및 항일우국지사들이 이주하였다.
1910년 우수리지방의 한인수는 러시아시민권 소유자가 1만7080명, 비소유자가 3만6996명으로 전체 5만4076명에 이르렀다.
1923년에는 시민권취득자가 3만4559명, 비시민권자가 7만2258명으로 전체 10만6817명으로 크게 늘었다.
1920년대말 구소련거주 한인수는 25만명에 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이주농민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연해주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이 85%나 되었다.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으므로 이들 중 80% 이상이 소작인이나 고용노동자로서 일하였다.
이들을 포함한 한인 농민들에 의하여 1905년 최초로 쌀농사가 시작되었다.
러시아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니콜스크·우수리스키(Nikolsk·Ussuriyskiy) 등의 도시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인들의 러시아문화에의 동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치적인 권리 없이 차별대우와 압박을 받아온 한인들은 두 방향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방향은 노동운동에의 참여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에 대한 항일투쟁이었다.
항일투쟁의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였으며, 한인들은 그 근교에 신한촌(新韓村)을 형성하였다.
그곳에 학교·교회·신문사·자치회관 등을 설립하였고, 축구경기나 연주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이들 학교는 대부분이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소련지역의 한인들을 위한 학교가 1922년 45개에서 1927년 267개로 늘어났던 것은, 높은 교육열과 독립운동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로는 홍범도(洪範圖)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노동운동에의 참여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주로 독립운동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에 10월혁명에 참가한 사람은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1918년 4월 이동휘·박애·김립·김 알렉산드라 페트로프나(Kim Alek·sandra Petrovna)에 의하여 하바로프스크에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이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얼마뒤 상해(上海)의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Irkutsk)의 전러시아 고려공산당으로 양분되고 만다.
1922년 말 구 소련이 성립되면서 극동지역의 소비에트화가 사회의 전영역에서 이루어졌다.
1923년부터 농업·산업 및 소비자코뮌이 결성되었고, 극동에 거주하던 한인들 대부분도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927년에 출간된 ≪10월혁명 10주년과 소비에트 고려민족≫은 극동건설에 한인들이 기여한 점을 서술하고 있다.
1927년 대규모로 시작된 콜호즈(kolkhoz : 集團農場)의 조직은 1932년에 완결되었다.
1930년대 극동의 한인 집단농장들은 실질적인 진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포스예트(Pos’yet)지역 주민의 95%가 한인들로 구성되었으며, 경작지의 36.5%가 쌀농사를 지을 정도였으며, 어업과 산업분야에서도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졌다.
‘붉은 한국인’이라는 콜호즈에서는 1929년까지 부유층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문화분야에서도 1932년 한인극장이 세워지고, 1923년부터 발행되던 한인신문 ≪선봉 先鋒≫이 1937년까지 계속 간행되었다.
1937년 가을 극동지역의 한인들은 스탈린정권의 무자비한 소수민족 조처에 따라 거의 대부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동당하게 되었다.
이들이 강제 이동되기 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는 1926년 약 5만2000명의 한인들이 이미 정착하여 있었다.
그들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하여 그곳으로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알마아타(Alma Ata)에서 간행되고 있는 한인신문 ≪레닌기치≫에 의하면, 1928년 한인 수십가구가 극동지역으로부터 카자흐공화국의 크질오르다(Kzyl·Orda) 변두리로 이주하고 최초의 쌀농사집단인 카즈리스(Kazriz)와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을 조직하였다고 한다.
통계에 따르면, 1939년 카자흐공화국에 대략 4만5000명, 우즈베크공화국에 7만3000명의 한인이 더 늘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민족학자 자릴가시노바(Dzarylgasinova,R.)에 의하면, 1939년 중앙아시아와 카자흐공화국에 18만2000명의 한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1927년 구 소련 극동지역에 거주하던 17만명 가량의 한인들이 거의 모두 중앙아시아로 옮아간 것이 된다.
중앙아시아로 이동된 대부분의 한인들은 처음에는 시르다리야(Syr Dar’ya)강과 아무다리야(Amu Dar’ya)강유역, 카자흐공화국의 카라탈(Karatal)산맥의 계곡과 일리(Ili)강유역 및 우즈베크공화국 등에 정착하였다.
일부는 우즈베크공화국의 타슈켄트(Tashkent)시 남쪽 베카바드(Bekabad)에 자리잡았다.
카자흐공화국에서 한인들이 정착한 곳은 크질오르다와 우슈토베(Ushtobe)지역이었다.
그들은 주로 토지경작에 종사하면서 자신들의 거주지역에 한인집단농장을 형성해갔다.
우즈베크공화국의 카라칼파크(Karakalpak)자치공화국의 쿤그라드(Kungrad)에 있는 아반가르드(Avangard)·노비비트(Novyy Byt)·프라브다(Pravda)는 가장 유명한 집단농장이었으며, 주로 쌀과 목화경작을 전문으로 하였다.
정착 초기의 한인들에게는 세금이 면제되고 농기구·비료·건축자재, 심지어 자금지원까지 있었다.
그들은 관개수로를 건설하고 부지런히 일하여 짧은 기간 안에 미개척지를 농토로 바꾸었다.
이곳에는 극동으로부터 이주된 이들 외에 그 뒤에 들어온 세 집단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첫 번째는 1945년 이후 북한으로부터 온 산림노동자와 어부들이다.
두 번째는 구 소련에 유학한 북한지식인들 가운데 정치적 이유에서 귀국을 거부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수지만 문화적 주체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세 번째는 사할린에서 온 한인들이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일제 말기 이른바 <국가동원법>에 의하여 강제 연행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제는 광산과 벌목에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하여 남한지역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납치해갔으며, 정신대의 일원으로 여인들도 얼마간 끌려갔다.
일제 말기 사할린거주 한인 수는 무려 6만 명이나 되었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구 소련의 참전으로 사할린은 구 소련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인들은 피난했거나 미소귀환협정에 의하여 1946∼1949년 사이에 모두 귀환되었으나, 한인들은 그 협정의 결함과 일본의 책임기피로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다.
1946년 5월 사할린 전역에는 대략 4만3000명의 한인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들은 무국적자로 있다가 1948년 7월 소련국적이나 북한국적 취득권유에 따라 대부분 신분증명서를 발급받았으며, 제2세대는 거의 소련시민권을 얻었다.
1985년 말 사할린에는 4만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 중 대략 70%가 구 소련시민권을, 나머지는 북한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있는 이산가족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무국적자로 남아 온갖 차별대우와 압박을 감수한 사람들도 수백 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할린의 구 소련시민권소지 한인들은 여러 통로를 통하여 중앙아시아로 이주해갔다. 이들은 사할린 동포에게 보내는 한국 방송을 듣고 그 소식과 가요 등을 중앙아시아에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2년 구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연방공화국으로의 계승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고, 우리 나라도 1990년 한·소 국교수립에 따라 재 러시아 한인의 존재도 실질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1995년 1월 기준 재 러시아 한인동포는 10만6852명이고, 재 러시아 체류자도 점점 늘어나 1,473명에 이르고 있다.
생활상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한인들은 1937∼1956년에 이르는 약 20년간 여행이나 거주지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지정된 지역에서 밀집하여 생활터전을 닦아왔다.
이는 이질적인 유목문화 풍토 속에서 한인들이 생존, 번영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적응력을 마련해주었다.
1959년까지만 해도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70% 이상이 농촌에 거주하였다.
1960년 이후 도시진출이 급증함에 따라 도시거주인의 비율이 59%로 바뀌었다.
도시거주 인구비율을 보면, 우즈공화국에는 1959년 20%에서 1970년에는 58%로 변했고, 타슈켄트지역에는 62%, 키르기스공화국에는 64%, 투르크멘공화국에는 71.7%, 그리고 타지크공화국에는 89.8%의 한인들이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자흐공화국에서도 1979년 한인들의 8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도시거주 인구비율은 소련에서 유태인 다음으로 높은 것이다.
그 주요원인은,
첫째 교육적 동기에서 젊은이들이 보다 나은 사회진출을 위하여 대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려는 데 있다.
둘째 경제사정이 호전됨에 따라 그들의 활동영역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집단농장에서 생활하며 스스로를 ‘고려사람’이라 부르는 1·2세대 한인들과, 도시에서 살며 자신들을 소련한인 (SovietskieKoreitsy)이라 칭하는 2·3세대 한인들로 나누어진다.
구 소련거주 한인들은 1960년대의 도시진출경향과 또 다른 민족들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생활모습들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주택은 외형은 변하였지만 방 한두개는 온돌로 되어 있으며, 소수 노인들은 전통한복을 지켜왔다.
세시풍속으로 설·단오·추석에 성묘를 하고 잔치를 벌이며, 첫돌·혼례·환갑·장례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치러지고 있다.
식생활에서는 간장·된장·고추장이 기본을 이루고 김치·두부·설렁탕·만두·국수 등이 애호되고 있다.
아울러 디딜방아·맷돌 등의 옛 생활도구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한국어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전통생활양식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지켜졌고,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다지 바뀌지 않아 그 뿌리의 깊음을 알게 해준다.
≪레닌기치≫에서는 매년초 그리고 매달초에 달력을 발행하는데, 거기에는 24절기와 한식·삼복 등이 음력으로 함께 명기된다고 하였다.
카자흐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의 고려사람들은 개장(국)이라 하여 보신탕을 즐긴다고 한다.
한국음식이 인근민족들 사이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특기할만하다.
시장에서는 한국김치가 상품으로 팔리고 있으며, 한국음식이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도 진행되었다.
혼합사료산업을 위한 국립과학연구소의 카자흐스탄지부에 연구원으로 있는 리 스타니슬라프(Li Stanislav)의 연구결과는 간장과 된장이 우유보다 높은 칼로리를 가지고 있고 더 쉽게 소화된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한인들이 종사하는 직업과 사회활동은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의 이동과 그 뒤 1960년대부터의 도시진출경향에 따라 상당히 변하였다.
중앙아시아로 이동된 한인들은 자연조건이 달라 전과 같은 다양한 직종을 가지지 못하고 시골에서 주로 쌀농사를 지었다.
문화와 생활면에서 같은 국영농장이나 집단농장에 살면서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민족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극동에서부터 해온 쌀·보리·콩·채소 등의 경작을 계속하고, 오늘날에는 대규모의 목화재배에도 성공하였으며, 한편 그들에게 전혀 생소한 케나프와 같은 식물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민족들과 같이 사는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서는 가축사육도 중요한 직종의 하나가 되었다.
한인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낙농에 익숙해 있으며, 또 마초재배에도 종사한다.
국지적이기는 하지만 우즈베크공화국의 안디잔(Andizhan)이나 호레즘(Khorezm)에서는 원예도 행해지고 있다.
도시거주 한인들의 직업면모는 ≪레닌기치≫에 소개된 내용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당기관이나 노동조합·대학교·정부관리·교육기관·관영기업체·공장·병원·연구소·기사·기술자·과학자·예술가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당기관이나 노동조합·대학교·정부관리 및 교육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이 거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구 소련 전체인구 중에서 당원은 10%에 미치지 않는 데 비하여, 타슈켄트 거주 한인 4만명 중에서 30%가 당원이라는 사실도 주목할만하다.
이것은 중앙아시아 거주 도시한인들이 추구하는 직업성향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직업들은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요구하는데,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인들의 높은 비율을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시골거주 한인들의 쌀농사와 그들이 소속해 있는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의 생활상도 주목할만하다.
중앙아시아에 쌀농사를 도입시킨 것이 바로 한인들이고, 이들은 다른 민족들에게 쌀농사문화를 가르쳐주고 보급하였으며, 쌀이 소련의 주요곡식 중의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1983년 구 소련의 쌀생산량은 대략 300만톤에 달하였다.
그 중 80만톤이 카자흐공화국에서, 50만톤이 우즈베크공화국에서 생산되었는데 한인이 그 주요생산자들이었다.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한인농민으로서 아반가르드국영농장에서 일하는 김만삼이 유명하다.
그는 크질투(Kzyltu) 국영농장의 일원인 사하예프(Sahayev,I.)에게 쌀농사를 가르침으로써 터키계 민족들에게 벼문화를 전파하였다.
그는 1944년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크질오르다는 카자흐공화국의 ‘쌀의 수도’로 불린다.
구 소련정부는 1950년대 이래 쌀농사를 위한 연구기관을 조직하여 그 연구개발에 힘써왔다.
한인들도 거기에 참여하여 많은 기여를 하였다.
고 모이세이(Ko Moisey)는 우즈베크공화국의 우즈베크쌀농사과학연구소의 쌀농사기술과정 부장이자 농업과학의 후보자로서 이 연구소에서 30년 넘게 일하여 왔다.
그는 벼의 보급에 관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한 블라디미르(Han Vladmir)는 경제과학의 후보자로서 같은 연구소에서 당서기로 일하여 왔다.
벼교배종연구가인 신 알렉산드르(Sin Aleksandr)는 1959년 그의 러시아인 동료와 함께 우즈로스(Uzros)·7·13과 크리미살라(Krymysala)를 교배시켜 새 품종 우즈로스·59를 개발하였다.
1968년에는 러시아인 동료와 함께 새 품종 우즈베크스탄·5를 개발하였다.
카자흐공화국의 발하슈(Balkhash)호수 남쪽에 있는 카라탈 쌀실험농장의 소장인 황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는 맛있고 생산력 높은 품종을 개발해왔다.
그는 알라쿨스키(Alakul’skiy)·우슈토빈스키(Ushtobinsky)·카라탈스키(Karatal’skiy)의 새 품종을 개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는 카자흐농업연구소에서 쌀뿐만 아니라 보리·옥수수 등의 작물연구도 계속하였다.
한인들에 의해서 많은 쌀농사 전문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이 주도되어 왔던 것이다.
카자흐공화국에는 탈디쿠르간(Taldy·Kurgan)·침켄트(Ckim·kent)·알마아타, 그리고 크질오르다의 네지역에서 쌀농사가 행해지고 있다.
탈디쿠르간지역의 우슈토빈스키국영농장·프라브다국영농장·프룬제 (Frunze)실험농장이 주로 한인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침켄트지역에는 보스호드(Voskhod)·콤뮤니즘(Kommunizm)·카자흐공화국국영농장이 손꼽힌다.
크질오르다지역의 쌀생산은 카자흐공화국 전체의 4분의 3에 이른다.
그 중 한인들이 주로 일하는 농장은 아반가르드국영농장·제3인터내셔널집단농장·기칸느(Gigant)집단농장·칼리닌 (Kalinin)국영농장 등이다.
우즈베크공화국에는 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호레즘지역·시르다리야지역·타슈켄트지역에 쌀농사가 주로 개발되어 있다.
카라칼파크의 19개 국영농장 가운데 전레닌공산주의청년연맹 국영농장이 한인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다.
호레즘지역에는 알호레즈미(Al Khorezmi)·베고바트(Begovat)·굴리스탄(Gulistan)·얀기아리크(Yangiaryk) 국영농장이 손꼽히며, 많은 한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타슈켄트지역에서는 ‘10월혁명 40주년’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농장의 몇 개 여단, 자르야콤뮤니즈마(Zarya Kommunizma)농장·김병화농장·세베르니 마야크(SevernyyMayak)농장·아훈바바예프(Akhunbaba·yev)농장에서 한인들이 지도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타지크공화국에서는 ‘구 소련국경수비대창설 60주년’이라는 이름의 국영농장, 수르호브(Surkhob)농장 등지에서 한인들이 일하고 있다.
투르크멘공화국에서는 ‘제22차전당대회’국영농장에 강 클리멘트(Kang Kliment)가 관리인으로 있으며, ‘제23차전당대회’국영농장에는 안 아나톨리(An Anatoliy)가 한 여단의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한인들은 쌀농사에만 종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목화·삼베 등을 전문으로 재배하는 한인농장도 있는데, 타슈켄트 부근의 폴리토트젤(Politotdel)집단농장이 좋은 예이다. 이 농장 전체인구 1만7000명 중 한인이 8,000명에 달하였다.
1975년에는 농장건립 50주년을 맞아 레닌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25개 마을로 편성되어 있는 농장의 관리인은 황만금이고 김학천(KimNikolay)이 문화부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 농장은 경작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업과정이 기계화되어 있었다.
이곳 한인들은 근면하기로 정평이 나 있으며, 정부의 생산목표를 매년 초과달성하였다고 한다.
농민들의 월급은 평균 250루불로 도시인들에 비하여 약간 떨어지나, 개인소유의 땅에 농작물을 재배하여 별도의 부수입을 올리므로 도시인들보다 더 잘살았다고 한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와 같은 한인들의 1980년대 말까지의 구 소련에서의 적응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성공적이었지만 소련이 해체되면서 많은 변화가 있게 되었다.
구 소련이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으로 나뉘어졌고, 그에 따라 지역적으로 삶의 터전도 바뀌어 이들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1980년대 말까지 구 소련에 자리를 잡아갔던 한인들은 1990년대 구 소련의 해체로 새로운 체제와 생활환경에 적응하는 데 많은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음이 잠정적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상황이나 실상은 제대로 파악되어지지 않고 있다.
언어·문자생활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이름은 많이 러시아어화 되어 있다.
이는 한인들이 극동에서 점차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가던 1920년대 이후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선 성(姓)의 변화가 눈에 띄는데, 엄씨와 이씨가 각각 렘(Lem 또는 Rem)과 리(Li) 또는 니(Ni)로 쓰이고 불리는 것은 함경도방언의 발음에 기초하여 시릴자모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다음 논(Non)·프본(Fvon)·학(Khak)·헨(Khen)·혼(Khon)과 같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성이 보인다.
이들은 음역(音譯)과정에서 발생한 듯하다.
아가이(Agay)·마가이(Magay)·유가이(Yu·gay) 등 ‘가이’가 붙은 성도 있다.
이것은 한인들이 처음 등록할 때에 ‘가(家)’자와 함께 함경도식 어미 ‘이’를 붙여서 성을 대는 바람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성을 러시아어로 음역하여 새로운 성씨를 만든 특이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유고프(Yugov)는 남쪽을 뜻하는 러시아 유그(Yug)와 러시아어 어미 오브(ov)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남씨(南氏)의 변형이다.
1930년대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어온 이래 한인들은 정착생활을 해나가면서 점차 러시아식 이름을 쓰게 되었다.
여성이름으로 마리야(Mariya)·예카테리나(Ye·katerina)·나데즈다(Nadezhda), 남성이름으로는 콘스탄틴(Konstantin)·미하일(Mikhail)·알렉산드르(Aleksandr) 등이 한국식 발음에 따라 약간씩 변형되어 쓰였다.
그 외 다른 민족들의 영향으로 게르만(German)·에벨리나(Evelina)·모이세이(Moisey) 등의 비러시아식 이름들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특기할만한 것은 돌림자의 사용이다.
한인들 중에는 이러한 전통관습을 지켜 자식들의 러시아식 이름을 아디크(Adik)·알리크(Alik)·아론(Aron)·아르투르(Artur) 등과 같이 ‘아’자 돌림으로 붙이기도 한다.
구 소련에서는 조직체나 공장·거리 등에 국가를 위하여 크게 기여한 인물의 이름을 붙이고는 한다.
한인들의 성명이 중앙아시아의 조직체나 거리에 붙여지기도 한다.
폴리토트젤집단농장 학교의 한 개척자집단은 이동휘라는 이름을 취하고 있으며, 크질오르다에는 홍범도거리가, 타슈켄트지역에는 김병화콜호즈가 있다.
타슈켄트 남부에도 김병화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노동영웅인 민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Min Aleksandr Pavlovich)도 거리이름으로 되어 있다.
한인들의 한국어사용도 점차 바뀌어갔다. 1세대와 2세대, 특히 농장지역에서는 우리말을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반면, 3·4세대들에게는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거주 한인들 사이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한인들의 도시진출 경향에서도 드러나는 것이지만, 젊은 세대는 사회적 진출을 위해서는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야 하므로 우리말을 거의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통계에 의하면 1926년 재소한인 중의 98.9%가 우리말을 사용했던 반면, 1970년 우즈베크공화국에서는 74%로 떨어졌다.
1979년에는 38만9000명의 한인 가운데 55.4%만이 우리말을 모국어로 사용하였고, 러시아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한인들이 47.7%로 늘어났다.
이와 아울러 한인들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비율도 5% 가량 되며, 한인 남성과 러시아여인 사이의 결혼이 가장 흔하다.
한인들이 점차 전문직업인과 지식인계층으로 성장해가는 추세를 고려하면 러시아어가 한인들의 공용어로 될 전망이 높다.
우리말 사용의 이러한 변동에는 한인들이 우리말 교육을 소홀히 한 측면도 없지 않다.
1936년의 강제이동 이전 극동지역에는 한인들을 위한 소학교 132개, 중학교 18개, 고등학교 3개를 비롯한 많은 교육기관이 있어서 젊은 세대의 한국어교육이 활발하였다.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뒤에는 사정이 변해서 카자흐공화국에서는 1937년부터 10년간 한인들의 교육이 러시아어로 진행되었다.
그 뒤 1940년대말부터 1950년대로 들어오면서 그 사정이 약간 호전된다.
김남석과 헤가이(Khegay,M.)가 공동으로 ≪조선어 교과서≫ 2만부를 발행하였다. 1949년 모스크바에서는 김병하가 ≪조선말본 제2학년용≫을, 그리고 마주르(Mazur,Y.M.)가 그것을 개정하여 ≪조선어교수강령 조선소학교 1∼4학년≫을 펴냈다.
김남석이 편집하고 헤가이가 1955년 개정한 ≪조선어교수방법재료집≫도 크질오르다에서 출판되었다.
≪조선어교과서≫의 재판이 나오지 않는 실정 아래 한인들의 우리말교육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1980년대 폴리토트젤농장에 있는 1∼10학년 과정의 엥겔스학교에는 전체 900명 가운데 700명이 한국계 학생인데 한국어반에 9학년생 10명만이 일주일에 1시간씩 두 번 수업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타슈켄트의 니자미사범학교 한국어교육과는 1954∼1964년까지 존속하다 폐지되었다.
1985년 9월부터 부활되어 5년에 걸쳐 총 80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중앙아시아에는 한글신문·한국어방송·한인극장이 있어 한국어교육 및 한인들의 문화활동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글신문을 보면, ≪레닌기치≫와 사할린지역 당위원회 기관지인 ≪레닌의 길로≫가 한글로 발행되었다.
≪레닌기치≫는 소련에서 한글로 출판되는 것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재소한인문제·한인문학·어학 등의 이해에 없어서는 안 될 신문이었다.
10월혁명 이전 극동지역에서는 이미 ≪해조신문≫·≪대동공보≫ 등이 간행되어 항일투쟁, 한인사회의 문제를 비롯한 여러 중요한 뉴스를 한인들에게 제공해주었다.
혁명 이후 이 신문들은 더 이상 간행되지 못하였다.
소련의 성립과 더불어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공산당 지역위원회의 한국부 기관지로 ≪선봉≫이 창간되었다.
1923년 이 신문은 볼셰비키 극동지역위원회의 기관지로서 하바로프스크에서 주 2회 발행되었다.
1932년 극동지역에서는 ≪선봉≫을 포함하여 ≪문화≫·≪새세계≫·≪로동자≫·≪로동신문≫·≪적성 赤星≫ 등 한글로 된 6개 정기간행물과 7개 신문이 나올 정도였다.
이 중 ≪선봉≫은 5개년계획의 성취를 위한 노동자동원과 문화활동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성과 이백조가 주필을 맡았다.
1937년 강제이동과 함께 ≪선봉≫은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되고, 대신 1983년 5월 카자흐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지역신문으로 ≪레닌의 기치≫가 새로이 창간되었는데, 이것이 ≪레닌기치≫의 전신이며 1978년 사옥을 알마아타로 옮겨 1980년대까지 그대로 존속하였다.
순한글 가로쓰기에 4쪽인 ≪레닌기치≫는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한 주 5회 발행되었다.
1938년 6월 21일 1만호발행을 기념하여 카자흐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의 표창장을 받았다.
신문발행부수는 1973년 1만3500부였으나 1979년 1만1000부로, 1987년에는 9,603부로 떨어지졌다.
이 신문사에는 주필·부주필·편집국장이 있었고, 그 밑에 생활부·농업부·문화 및 문예부·공업부·서한·대중사업부의 5개 부서를 두었다.
타슈켄트에 지사가 있었으며, 두샨베(Dushanbe)·첼리노그라드(Tselino·grad)·프룬제 등에 주재기자가 나가 있었다.
이외에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기사를 쓰는 지역기자들이 있었다.
1989년 주필은 한 인노켄치(Han Innokentiy), 부주필은 윤수찬과 조영환이었다.
이 신문은 한글출판물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소련에서 우리말과 글의 존속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제4면 문예란에 한달에 한번씩 한인 문인들의 작품을 실어 유일한 작품발표지 역할도 하였다.
한국어방송은 1984년 5월 알마아타의 카자흐방송국을 통하여 처음 시작되었다.
1989년 한국어방송부의 부장은 최영근, 기자에 박용준·최미옥, 아나운서에 김옥려 등이 일하였다.
1990년 수·금·일요일 주 3회 오후 2시 40분부터 3시까지 20분간 방송하였다.
방송내용은 당의 결정사항 보도, 뉴스분석, 소비에트 생활방식, 노동자들의 성공사례 등으로 짜여 있고, 한인 예술가나 문인들이 출연하기도 하며 유행가와 한국음악을 들려주기도 한다.
수많은 청취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1987년 3월부터는 일요일에 한국어교육방송도 내보내주고 있다.
연극 및 가무
중앙아시아에는 한인극장도 있는데, 그 공식명칭은 ‘카자흐공화국 국립한국인음악·희극극장’이었다.
이 극장의 연원도 극동지역부터 시작되었다.
강제이주 이전 극동지역 한인들의 활동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는 여러 문화활동과 함께 연극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그 결과 1920년대 블라디보스토크 담배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한인극단이 처음으로 탄생하였다.
당시 연극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한 사람은 김익수로서, 그는 러시아극단과 접촉하면서 러시아문학과 연극에 정통하였으며, 영화제작에도 관여하였다.
하나의 한인극단은 태장춘·이길수·이함덕·김해운 등에 의해서 1924년 신한촌에서 창립되었다.
이 극단은 ‘젊은 노동자’극단과 접촉하면서 한인들의 문화활동을 주도하였다.
세번째 극단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제8자치학교의 극단이다.
연성용·최길춘·이건희가 이 극단에서 활약하였다.
최길춘·이건희 두 사람은 뒷날 우즈베크공화국에서도 활약하였다.
그밖에 푸칠로브카(Pucilovka)라는 마을의 농민학교에서 박일·김진·조명희가 활약한 한인극단이 있었고, 교사훈련연구소에 한인극단이 있었다.
이런 속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연성용과 염사일의 주도하에 30명의 단원을 둔 ‘한국인노동자극단’이라는 전문극단이 탄생하였다.
당시 변모하는 사회상황을 묘사한 <황무지>가 첫 작품으로 무대에 올려져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1931년 지역당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재조직되고 1932년 9월에는 소련정부의 결정으로 ‘한인극장’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그 뒤 1937년까지 전문배우가 등장하였으며, 이정림 극본의 <춘향전>과 <심청전>이 각각 1935년과 1936년에 공연되었다.
1937년 한인들의 강제이주와 함께 단원을 포함한 전체 한인극장이 크질오르다로 옮겨졌다.
1942년에는 우슈토베로 이전되었다가 1959년에 다시 크질오르다로 되돌아갔다.
1969년 한인문화의 중심지인 알마아타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기에는 김진·김해운·이함덕·최봉도 등의 배우와 채영·최길춘·연성용 등의 연출가가 활약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주로 전쟁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었다.
한인극장창설 50주년인 1982년에 이르기까지 이 극단이 공연한 작품 수는 180편이 넘었다.
1982년 9월 1일부터 15일까지 극단창설 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모스크바의 아카데미야 소극장에서 있었다.
한진의 <춘향전>·<살아 있는 부처>·<토끼의 모험>, 태장춘의 <38선 남쪽>, 카자흐인의 서사시인 <코블란디> 등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김 블라디미르·정 소프야·문공자·김조야·조규화·김 보리스·리 베니아민으로 구성된 아리랑가무단이 한국의 민요와 노래를 불러 갈채를 받았으며, 리 림마(Li Rimma)의 무용도 호평을 얻었다.
이 극장은 또한 50년 동안의 예술활동 공로로 명예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1982년 알마아타에서 출판된 김 요시프(Kim Josif)의 ≪소비에트 조선인극장≫은 이 극장의 역사, 소련사회에서 가지는 의미, 이 극장의 작품들, 극장발전에 기여한 배우 및 감독 등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1989년 단원은 100명이 넘었고, 4세대에 걸친 배우들이 일하였다.
그 중 전문적인 연구수업을 받은 사람만도 70명이 넘었으며, 이 극장의 배우를 길러내는 교육기관도 중앙아시아에 셋이나 되었다.
타슈켄트의 오스트로브시키 연극예술연구소의 한인배우부는 1960년에 이어 1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알마아타음악연구소는 14명의 배우를 교육시켰다.
알마아타연극예술연구소는 1975년 14명, 1984년 15명의 한인학생을 배출하였다.
교과과정은 무대표현·대화기법·한국어·민족문화와 역사·연기개선연습 등으로 짜여 있었다.
이 극장에 의하여 공연된 작품에는 재소 한인들이 겪어온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잘 드러났다.
1938년에 공연된 태장춘의 <행복한 사람들>에서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뒤 그곳 이웃주민들과의 삶이 묘사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과 1947년에는 <홍범도>가 공연되었다.
1920년대 볼셰비키 편에 서는 극동 한인들의 갈등이 많이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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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7년 태장춘과 채용의 <빨치산들>, 1962년 채용의 <새벽>, 1963년 채용과 염사일의 <잊을 수 없는 날들>, 1966년 맹동욱의 <북으로 가는 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최근의 작품경향을 보면 1985년 <춘향전>·<심청전>·<양반전>·<흥부와 놀부> 등의 한국 고전과 한진의 <쇠를 처먹는 자>, 김 아나톨리(Kim Anatoliy)의 <할머니와 나>가 공연되어 고전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1986년 이후로는 동시대의 주제가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1986년에 한진의 <폭발>, 강 겐리예타(Kang Genriyetta)의 <가을에는 벚나무꽃이 피지않는다>, 이사베코프(Isabekov,D.)의 <상속자들>, 김 아나톨리의 <선녀의 오솔길> 등이 공연되었고, <춘향전>·<심청전>과 같은 고전도 공연되었다.
1987년 전반기 공연작품은 <아리랑고개>·<흥부와 놀부>·<장의자 長倚子>·<너 먹고 나 먹고>·<춘향전> 등이었다.
공연물로는 그밖에 러시아 및 외국의 작품과 이웃민족인 터키계 및 카자흐계 민족들의 작품도 공연되곤 하였다.
1989년 극장의 단장은 이 발렌틴, 부단장은 박 알렉산드르이고 문 빅토르는 무대장치를 담당하였다.
단장의 부인 이정희는 사할린출신으로 배우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발음지도도 맡았다.
이 한인극장은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집단농장이나 농촌 등을 순회하면서 1년에 250회 이상의 공연을 가졌다.
모든 공연이 한국어로 진행되어 각 지역의 동포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알려주고 민족긍지를 높이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여 왔다.
우즈베크공화국과 카자흐공화국에는 한인극장 외에 한인들로 구성된 몇 개의 소규모 가무단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가야금·아리랑·아침노을·도라지가무단이 그들이었다.
가야금가무단은 1969년 우즈베크 국립 카라야쿠보프 필하모니아에 부설되었다.
단장은 진 페트르(Cin Petr)였고, 26명의 한인 배우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아리랑가무단은 한인극장의 후견 아래 활동하고 있었으며, 매년 카자흐공화국·우즈베크공화국과 중앙아시아의 다른 지역들 및 사할린·코카사스·우크라이나지역 등으로 공연여행을 다녔다.
김 블라디미르가 예술감독이었며 한 야코프가 단장직을 맡았다.
규모가 작은 아침노을가무단은 1972년 탈디쿠르간에서 발족된 후 줄곧 성장하여 카자흐공화국 전역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며, 여러 예술축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강 타챠나 이바노브나(Kang Tat’yana Ivanovna)가 예술단장이었며,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단원으로 일하는 젊은이들을 이끌었다.
도라지가무단은 우슈토베의 한 국영농장 소속이었다.
폴리토트젤 집단농장의 문화궁전이 가무단을 재조직하려고 하였고, 한인들이 많은 여러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에서도 소규모 가무단이 예술활동을 전개하여 왔다.
문학활동
구 소련내 한인들의 문학활동은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우리 나라와의 어떤 접촉 없이 반세기가 훨씬 넘는 기간 동안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가꾸고 형성해왔다.
신한촌 시절의 연성용·채용·태장춘 등의 희곡작가와 조명희·조기천·한 아나톨리(HanAnatoliy)·김기철 등의 작가가 구 소련 극동지역의 한국문학을 창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 빈곤이나 정치적 이유로 새 삶을 찾아 그곳으로 이주했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조명희의 공로는 주목할만하다.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동된 뒤, 즉 1938년부터의 한국문학은 강태수·김광현·김기철·김남석·김두칠·김 보리스·김세일·김용택·김종세·김준·김증송·김 파벨(Kim Pavel)·남철·리 바실리(Li Vasiliy)·명철·박 미하일(Pak Mikhail)·박성훈·연성용·양원식·오 블라디슬라브(O Vladislav)·원일·이은경·이종희·임하·장윤기·전동혁·정상진·조정봉·주송원(Cu Aleksey)·차원철·최 예카테리나·한상욱·한 아폴론(Han Apollon) 등에 의해서 주도되어왔다.
구 소련내 한인작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며 소련 전역에 잘 알려져 있는 인기작가는 김 아나톨리이었다.
1940년 카자흐공화국의 튤카바스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1971년 고리키문학연구소를 졸업하였다.
사할린에서 군복무중 시를 쓰기 시작해서 1964년 사할린의 ≪레닌의 길로≫ 신문에 두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는 주로 소설을 썼는데, <묘코의 들장미 Myoko’s Sweet·Brier>와 <물색 Water Colour>이 1973년 아브로라사(Avrora社)에서 출판되었다.
러시아어로 작품을 쓰고 있다.
그의 작품은 1910년 이후 극동지역 한인들의 생활모습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새벽의 오얏맛 The Taste of Blackthorn at Dawn>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의 단편집 ≪푸른 섬 The Blue Island≫(1976)과 ≪다람쥐 The Squirrel≫(1984)는 모스크바에서 간행되었고, 1987년에는 ≪바다의 신부 Bride of the Sea≫가 나왔다.
인간을 동물로 바꾸어 인간의 잔인한 성격을 보이려 한 ≪다람쥐≫는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초판 10만부가 불과 이틀 만에 매진될 정도였다.
1985년까지 11권의 작품집을 출간하였으며, 영어·독어·프랑스어 등 8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이밖에 부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PuVladimir Nikolayevich)가 투르크메니아 작가연맹의 제2서기로 일하면서 소설·수필·동화 등 많은 작품을 러시아어로 발표하였다.
한인작가들의 문학작품과 활동을 보면 몇 가지 경향이 드러난다.
소설에서는 레닌주의, 조국으로서의 구 소련, 제2차세계대전을 다룬 것과 극동 및 중앙아시아에서의 생활체험을 소재로 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다음 서정적인 작품이 약간 있으며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은 드물다.
시에서는 일상생활과 사회적·윤리적 문제를 다룬 작품과 서정시가 가장 많다.
중앙아시아의 자연과 생활, 소련과 제2차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시도 적지 않았다.
반면 어린이를 위한 것이나 극동생활을 다룬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발표지면은 거의 ≪레닌기치≫ 문예면에 국한되어 있고, 그래서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그 분량이 매우 적다.
이러한 발표지면의 문제는 한인작가들의 노력에 의하여, 1982년 이래 알마아타에 있는 자주시(Zhazushy)출판사가 한인작가의 작품을 매년 1권씩 한글로 간행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시선집 ≪해바라기≫(1982)와 연성용의 ≪행복의 노래≫ (1983), 김준의≪숨≫(1985), 김광현의 ≪싹≫(1986), 그리고 1987년에는 김기철의 ≪붉은별들이 보이던 때≫·≪금각만≫ 등의 단편집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발표지면과 출판횟수는 한인작가들의 문학활동에 여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어교육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해서 한글로 작품활동을 하는 젊은 문인들의 수가 점차 줄어가는 현상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학 연구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한국어교육은 여러 가지 면에서 미흡하지만, 러시아의 한국학연구는 상당한 역사를 지니며 다방면에서 왕성하였다.
19세기 말엽 한국이 외세의 각축장으로 변하자 러시아도 여기에 가담하면서 한국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89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극동대학교가 설립되어 한국연구가 개시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외교관·지리학자·과학자들이 뒷날의 한국학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많이 남겨놓았다.
비추린(Bichurin,N.Y.)이 1900년에 저술한 ≪조선기술 朝鮮記述≫이나 쿠너(Kuner,N.V.)의 ≪조선입문≫같은 책이 그런 것으로서 은둔의 나라 한국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은 피상적이고 일반적인 사항의 서술에만 그쳐 학술적인 연구를 통한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1900년에는 러시아 재무성에서 1876년부터 1899년까지의 우리 나라 산업·풍속·교육·종교의 모습을 조사한 ≪한국지≫가 나왔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소련의 한국학은 1917∼1939년과 1945년 이후의 두 시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시기에서는 홀로도비치(Kholodovich)가 레닌그라드에서 ≪한글사전≫을 펴내어 한국학의 기반을 마련한 시기로서 레닌그라드는 한국학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혁명투쟁에 관한 저술들이 다수 출판되었다.
1939년 이후의 스탈린치하에서는 한국학연구는 사실상 중지상태에 놓여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레닌그라드의 동양학연구소가 모스크바로 옮겨지고, 그 뒤 1950년대 중반 스탈린격하운동 전개와 함께 한국학은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들었다.
스탈린이 죽은 뒤 1956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0차공산당전당대회는 소련의 한국학연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과학원의 동양학연구소에 일본·한국학과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서 황동민이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고, 이로부터 한국학연구는 모스크바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현재 동양학연구소의 소장은 프리마코프(Primakov,J.)이며, 한국계의 게오르기 김(Georgiy,F.Kim)이 제1부소장을 맡고 있다.
이밖에도 ≪오늘의 아시아와 아프리카≫지의 총편집국장, 소일친선협회 중앙위원회 부회장 및 러시아동양학자연맹의 부위원장직도 겸직하고 있다.
동양학연구소 한국학과에는 한국역사를 전공하는 티아가이(Tiagay,G.)가 게오르기 김의 후임으로 한국학과 과장을 맡고 있고, 소련한국학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카자케비치(Kazakevich, I.)·바닌(Vanin, Y.), 민속학전공의 자릴가시노바 등의 연구·교수진이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모스크바대학에서 강의도 하면서 전공분야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모스크바대학교의 아시아·아프리카대학에서도 한국학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대학 극동학부 부장인 한인 박준호가 한국사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 태생인 그는 1941년 모스크바대학 역사·철학·문학부를 졸업하고 1947년 석사학위를 받은 뒤 같은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한국사연구를 시작하였다.
1961년에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1년 이래 극동학부의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삼국사기≫ 역주작업은 주목할만하다.
그는 1955∼1959년 사이에 <신라본기와 사회경제 제문제>라는 서문을 붙여 <신라본기> 12권을 제1부로 완역하였다.
1980∼1985년 사이에는 <역사가로서의 김부식>이라는 논문과 <고구려본기> 10권, <백제본기> 6권, 연표·해설 등으로 짜여진 제2부를 완성하여 1988년에 출판하였다.
제3부 <삼국사기 지(誌)>는 1990년대에 작업 중에 있었으나 출판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사연구 업적으로 재소 한인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소련과학원 정회원이 되었다.
레닌그라드의 러시아과학원 동양학연구소에서도 한국학연구는 활발하였다.
이 연구소는 1918년 동양고전 필사본을 보관하는 박물관으로 출발하였으나, 그 뒤에 연구소로 발전하였고, 1956년부터는 모스크바 소재 동양학연구소 지부로서 운영되었다.
이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는 트로체비치(Trotsevich,A.F.)와 니키티나(Nikitina) 두 여교수는 언어학자 홀로도비치의 제자들이다.
트로체비치는 1969년 <춘향전>을 번역하였고 1975년 ≪한국중세전기문학≫을 펴냈으며, 1985년에는 <인현왕후전>·<창선감의록>·<구운몽> 등의 한문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레닌그라드에서 ≪선행과 축복받은 사람들의 주해(註解)≫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니키티나는 <홍길동전>을 번역하였고, 1982년에는 7∼10세기 신라시대의 시를 다룬 ≪제사의식과 신화에 관련된 한국고대시≫를 저술하였으며, 향가의 연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 연구소의 희귀본도서관은 동양 22개국의 70개 언어로 쓰여진 100만권의 장서를 자랑하고 있다. 그 중 한국서적으로 250권의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다.
≪동의보감≫, 15세기의 ≪동문선≫ 26권, 그밖에 칠언절구·칠언율시·오언절구 등의 한시 46권(130부)등이 포함되어 있다.
레닌그라드 소재 러시아과학원 민족학대학에서는 한국문화 및 민속학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오노바(Ionova)가 1982년 모스크바에서 출판한 ≪한국의 풍습과 그 사회적 역할≫은 그 좋은 예이다.
한국문학을 번역하여 소련에 소개함으로써 한국문학연구에 공헌한 사람들이 있었다.
박일은 1962년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을 러시아어로 번역, 출간하여 소련에 널리 소개하였다.
조브티스(Zhovtis,A.L.)는 박일의 번역작품에 매혹되어 한국의 시문학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어를 모르는 형편이면서도 박일 및 여러 한국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김삿갓·박인로·정철 등의 고전시와 재소한인시인들의 작품을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로 옮겼다.
유물
러시아 내의 한국유물 수집과 소장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84년 조선주재 러시아공사로 온 베베르가 민비로부터 받은 찻잔·찻잔받침대·도자기 등 270여점이 그 시초였다.
이 유물들은 레닌그라드 소재 민족지학 및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도 자개패물함·고려자기·한복 등을 포함하여 수집품은 2,000점에 이르고 있다.
1957년 북한에서 보낸 병풍도 여기에 소장되어 있다.
실제로 전시되어 있는 것은 100여점에 지나지 않는다.
모스크바의 국립동양미술박물관을 비롯하여 키예프·타슈켄트 등지의 박물관에도 한국유물이 다소간 소장되어 있다.
러시아(Russia)의 정식 국가 명칭은 러시아 연방이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해체와 함께 1991년 12월 25일에 성립되었다.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이고 2009년 7월 기준으로 인구는 1,454만 명이다.
주요 도시로는 인구 475만 명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구 140만 명인 니즈니노브고로드, 인구 140만 명인 예카테린부르크등이 있다.
러시아는 국토 면적이 1,708만㎢로써 한반도의 78배, 미국의 1.8배에 달하는 세계 최대 영토 보유국이다.
국토 면적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국토의 동쪽 끝인 추코트반도와 서쪽 끝인 칼리닌그라드지역간의 시차는 총 11시간이나 된다.
러시아는 긴 겨울과, 짧고 서늘한 여름을 가지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는데, 모스크바 부근은 겨울철 평균기온이 영하 10℃이고, 여름철 평균기온이 영상 16℃이다.
러시아의 서부 및 서시베리아는 평원지역이고, 동시베리아와 남부 캅카스 지방은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러시아의 인구는 2012년 7월 기준으로 약 1억 4,314만 명이고,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0.46%이다.
종교 분포는 러시아정교회가 75%, 이슬람(Islam)교가 5%, 그 외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등이 있다.
민족 구성은 러시아인이 80%에 달하고, 타타르(Tatar)인이 4%, 우크라이나인이 2%이며, 그 외 140여 개 소수민족이 8.41%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인은 약 20만 명에 이른다.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은 2006년 기준으로 남자가 60세이고, 여자는 74세이다.
러시아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러시아어이지만 각 민족공화국은 고유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국과 러시아의 시차는 모스크바가 서울보다 6시간 느리고, 3월~10월동안 섬머타임(summer time) 적용시 5시간 느리다.
러시아의 정부 형태는 대통령중심제의 연방공화제로서 7개 연방단위로 묶인 총 83개의 연방구성체이다.
국가원수는 2012년 현재 푸틴대통령이며, 행정부는 내각 총리 1명, 제1부총리 2명, 부총리 7명, 장관 18명으로 이루어진다.
의회는 상·하 양원제로 상원은 임기가 2년으로 168석이고, 하원은 임기가 4년으로 450석이다.
러시아의 주요 정당으로는 통합러시아당, 공산당, 자유민주당등이 있다.
러시아의 국내총생산은 2012년 기준으로 62,357십억 달러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은 US$14,068이다.
물가상승률은 11.7%이며, 교역 규모는 4,455억 달러에 이른다.
이 가운데 수출은 2,818억 달러로 주요 수출품은 석유, 석유제품, 천연가스, 원목, 금속, 화학제품 등이고, 수입은 1,637억 달러로 주요 수입품은 기계, 장비, 소비재, 의약, 식품 등이다.
한국의 대(對) 러시아 교역 규모는 2009년 기준으로 99억 8,000만 달러이며, 이 가운데 대 러시아 수출은 41억 9,000만 달러이고, 대 러시아 수입은 57억 9,000만 달러이다.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는 2010년 8월을 기준으로 4,813억 달러이고, 화폐단위는 루블로서 2010년 9월 기준으로 1 미국달러는 약 29.5 루블에 해당된다.
러시아의 행정구역은 2개의 연방시, 21개 공화국, 46개 주, 9개 지방, 4개 자치구, 1개 자치주 등 총 83개의 연방 주체로 이루어져 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2010년 7월을 기준으로 총병력이 102만 7,000명이고, 국방예산은 492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의 2.95%에 달한다.
병역제도는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러시아 개관
국명 | 러시아 연방(RF, Russian Federation(영어), Российская Федерация(러시아어)) |
---|---|
위치 | 동부 유럽 및 아시아 중북부, 동경 100° 00", 북위 60° 00" |
면적 | 1,708만㎢(한반도의 78배, 미국의 1.8배), 세계 최대 영토 보유국 |
민족 | 러시아인(80%), 타타르인(4%), 우크라이나인(2%) 및 140여개 소수민족(8.41%) |
언어 | 러시아어, 문맹률 0.6% |
문자 | 키릴 문자(Cyrillic alphabet, Кириллица)를 모체로 한 러시아 문자 |
기후 | 대륙성 기후(모스크바 부근은 겨울 평균기온 영하 10℃이고, 여름 평균기온 영상 16℃) |
인구 | 1억 4,314만명 – 143,141,938명 (2012년 7월 1일) |
수도 | 모스크바(Moscow, Москва)(2009년 7월 기준 인구 1,454만 명) |
국가형태 | 연방공화제 |
정부형태 | 대통령중심제 |
행정단위 | 7개 연방 단위로 묶인 총 83개 연방 구성체 |
종교 | 러시아 정교(이외 이슬람, 가톨릭, 기독교, 유대교 등) |
교육 | 6세~15세 의무교육 실시 |
GDP | 67,588 십억루블(2013년전망), 62,357십억(2012년), 54,369십억(2010년) |
화폐단위 | 루블(Ruble, рубль, 1 미국달러=약 29.5 루블, 2010년 9월 기준) |
러시아는 우랄 산맥을 기준으로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는데, 우랄산맥은 북극해 연안에서 카자흐스탄 국경까지 뻗어 있다.
유럽에 속한 러시아는 넓은 평야 지대가 많아서 인구와 산업이 밀집해 있으며, 중앙 아시아에 속한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지역에는 사막과 초원이 분포되어 있으며, 아시아에 속한 시베리아 지역에는 침엽수림이 분포되어 있어서 미개발 지대가 많은데, 최근에는 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전체 국토의 40%를 차지하는 동부는 저지평원이 펼쳐져 있다.
러시아는 영토가 광활한 만큼 다양한 지질구조가 발달하여 거의 모든 종류의 자원을 갖고 있다.
러시아의 지질은 대부분 오래된 기반암인 결정편암인데, 이 기반암은 대부분 평원지대이다.
러시아는 지표가 계속 얼어 있는 영구 동토층이 국토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 의 기후
러시아에는 툰드라, 타이가, 혼합림, 초원, 사막 등 다양한 기후가 분포하고 있는데, 국토의 대부분은 냉대 기후에 속한다.
러시아의 기후는 매우 한랭하고 긴 겨울과 짧고 서늘한 여름을 가지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여서 봄과 가을은 빠르게 바뀌는 여름과 겨울 사이에 짧게 지나간다.
모스크바 부근은 겨울철 평균기온이 영하 10℃이고, 여름철 평균기온이 영상 16℃이며, 9~10월 사이에 첫눈이 내린다. 강수량은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이 500㎜ 이하이다.
러시아의 군사·안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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