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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역사,(국외) 각지역.

흉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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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묵특'


흉노는 중국 북방 유목민족 중 최초로 제국을 이루었다. 
2대 선우인 묵특 대에 이르러 제국을 형성했는데, 농경민족에게는 흉악무도한 침략자로 불렸다. 
묵특은 훌륭한 말과 엄격한 군령으로 단련된 군대를 가지고 한과 대치하였고 한은 우호적 관계를 위해 묵특에게 황실의 여인까지 바치기도 했다.


흉노,.. 유목민족 중 최초로 제국을 이루다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 중 최초로 제국을 이룬 세력은 흉노이다. 

흉노는 진한 시대, 대제국을 이루었던 중국의 농경 사회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와서 끊임없이 위협을 주었던 거대한 세력이나 오늘날 이들의 맥을 잇는 나라가 남아있지 않고 역사기록도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민족이다. 알타이어계로 돌궐어의 원시적인 형태의 언어를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서적에서 흉노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사기》로, 진나라의 몽염이 하남을 정복한 기원전 215년 이후이다. 

사마천은 흉노열전을 따로 두고 흉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흉노는 2대 선우()인 묵특 대에 이르러 제국을 형성하였는데, 흉노에게 '용감한 자'라는 뜻의 그의 이름은 농경민족에게는 '흉악무도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바뀌게 된다. 

용감한 흉노 묵특은 농경민족에게는 흉악무도한 침략자에 다름 아닌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서 고조선을 '교만하고 사납다'고 했던 표현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선우는 '탱리고도선우()'의 약칭인데, '탱리()'는 하늘, '고도()'는 아들, '선우()'는 대군장의 뜻이다.

진시황은 통일의 기세를 몰아 몽염의 10만 대군으로 하여금 오르도스 지역, 즉 하남을 평정하게 하고 흉노를 황하 북쪽으로 몰아낸 뒤 장성을 쌓았다. 

흉노에게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되찾기 위해 부족체제를 넘어 긴밀하게 결집했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묵특 선우 때에 대제국을 이루었다


기병을 훈련시켜 세력을 확장하다

묵특 선우(기원전 209~174년 재위)는 1대 선우 두만의 큰 아들로, 아버지 두만이 후처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묵특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다음, 월지를 급습하여 제거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타고 돌아와 아버지를 죽이고 2대 선우에 올랐다. 

그는 소리나는 화살인 명적을 가지고 1만 기병을 훈련시켰는데 부하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표적에 화살을 쏘도록 훈련을 시켰다. 

처음엔 자신의 명마를, 다음엔 자신의 부인을 쏘았다. 

멈칫거리는 자는 목을 베었다. 

마침내 사냥터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두만 선우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고, 1만 기병은 한 명도 주저 없이 두만을 향해 활을 쏘았다. 

묵특의 기병은 훌륭한 말, 강고한 훈련, 엄격한 군령으로 단련된 정연한 군대였다. 

동쪽으로는 동호를, 서쪽으로는 월지를, 남쪽으로는 백양, 누번을 무너뜨리는 등 진한교체기에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한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리며 대치하게 되었다.

한나라와 대치에서 승리를 ..화친을 맺다

통일을 이룬 한고조는 측근인 한왕 신(한신과 동명이인)을 북방에 배치하고 흉노 토벌을 명했다. 

흉노 토벌이 어렵다 생각한 그는 화평을 시도했고 고조가 이를 책망하자 흉노에 투항해 버렸다. 

묵특은 기원전 200년 그의 인도를 받아 40만 대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해 들어가 현재의 산서성 동쪽의 평성에 이르렀다. 

한고조 역시 직접 32만의 대군을 일으켜 이에 맞섰으나 백등산에 쫓겨 들어가 7일간 포위당한 후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한고조는 묵특의 왕비에게 선물을 주어 겨우 장안으로 도망쳤다. 

이후 한고조는 묵특에게 황실의 여인을 선물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 바치기로 하였다.

중국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매년 옷감과 음식을 보내주며 관시()를 여는 대신, 장성을 경계로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했다. 흉노가 우위에 선 화친이었다.

묵특, 한나라에 영향력을 

한고조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였다. 

묵특은 고조의 왕비인 여태후에게 청혼의 편지를 보냈다. 

여태후는 크게 노하여 흉노를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어찌하지 못했다. 

문제 즉위 후 흉노 우현왕이 한나라를 침공하는 것을 질책하는 사신을 보내자 묵특은 오히려 한나라 관리들이 흉노를 침범했기 때문이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묵특은 월지는 물론, 서역의 여러 나라를 점령하여 북방 유목민족을 최초로 하나의 제국 안에 통합했음을 알리며 넌지시 문제를 협박했다. 

편지를 받은 문제는 답장을 통해 우현왕을 책망하지 말 것을 당부했으며, 선우에게 옷 수십 필을 선물로 주었다.

한 무제, 흉노와의 전쟁에 밀려나다

조공을 통한 평화정책이 확실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던 가운데 한나라는 국력이 신장된 무제 시기에 강경책으로 선회하여 흉노를 선제공격하게 된다. 

이는 흉노를 복속시켜 천하를 지배하려는 무제의 야심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문경지치()라 불리는 문제와 경제의 평화 시기를 거치면서 축적된 풍족한 재정도 이러한 정책 전환을 가능케 한 중요한 배경이었다.

무제 시기의 흉노 공략은 위청과 곽거병이 기원전 119년 흉노를 쳐서 하남을 차지하고 대승을 이루는 등 우세를 보이는 듯했으나, 기원전 99년에는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는 등 다시 밀리다가 기원전 89년에는 천하의 한 무제도 흉노에 대한 전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흉노 측도 내부의 권력 분쟁으로 분열되어 무제 사후 호한야 선우가 한에 항복하면서 한과 흉노와의 전쟁도 일단락되었다.

흉노와의 전쟁은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승리한 경우라도 전쟁 승리 하사금으로만 400억 전 정도가 지불되어야 했다. 

전쟁에 소요된 비용은 왕조의 전체 정상 수입을 몇 배 이상 초과하는 막대한 양이었다. 

여기에 고조선과 남월, 서남이 지역과의 무한 전쟁이 덧붙여져 결국 한 무제는 약 70여 년 동안 쌓아왔던 국부를 탕진하고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염철 전매와 평준균수법 등을 시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간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소금과 한나라 때에 널리 보급된 철제농기구로 인해 농민들의 삶에 절대적인 수요가 있었던 철을 국가가 독점 판매하게 됨으로써 민생에 많은 불편을 끼치게 되었다.


흉노의 풍습을 이해하고 본질을 설파하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문제 때 흉노에 파견된 사신 중항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문제가 종친의 딸을 공주로 삼아 묵특의 아들인 노상 선우의 연지(왕비)로 보낼 때 공주를 호위하여 흉노 땅에 이르렀다. 

중항열은 흉노가 한나라의 비단, 무명, 음식 등을 좋아하며 의존하게 되자 예리하게 이를 비판하는 건의를 서슴지 않았다.

"흉노의 인구는 한의 군 하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과 다르기 때문인데 지금 선우께서 풍습을 바꾸어 한의 물자를 좋아하시면 한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게 채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거든 그것을 입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돌아다니십시오.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중항열은 흉노의 풍습을 잘 이해한 최초의 중국인이자, 풍습의 본질과 교류의 의미를 예리하게 설파한 멋진 세계인이었다. 

유목민족들의 농경민족화, 혹은 중국화의 문제는 이후의 유목 민족들에게도 끝없이 던져진 난제 중의 난제였다.


흉노의 피해

한무제에 의한 흉노 북벌은 흉노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첫째는, 인구의 손실이었다. 

당시 흉노의 전체 인구는 약 100만에서 150만 정도로 추산되었다. 

기원전 128년에서 119년 사이에 이르는 10년 동안에 한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힌 흉노인의 숫자가 200,000명 이상이었다. 

이는 전체 흉노 인구의 15~20%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였다.

둘째는, 가축의 손실이었다. 

목축은 흉노의 유목 생활 경제의 근간이었다. 비록 중국 사료의 과장이 있기는 하지만, 한군에 의한 가축류의 노획은 수천 만 마리에 이른다, 

전쟁 중 도망에 지친 가축의 유산율까지를 감안한다면, 이는 흉노 경제의 파탄을 의미한다.


셋째는, 영토의 손실이었다. 

흉노는 중국과의 전쟁에서 먼저 허난과 하서의 비옥한 초지()를 잃어 목축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러허(), 차하르 성() 등 동북 지방을 빼앗기고 흉노에 복속되어 있던 서역 소국(西)들이 한의 영향하에 들어갔다. 

이는 정치적인 판도의 축소뿐만 아니라, 조공의 감소와 교역로의 상실을 초래하여, 국력의 쇠퇴 원인이 되었다.


흉노의 쇠퇴

한무제의 북벌로 인해 흉노의 약화는 뚜렷하였다. 

중국 변방에 대한 침공이 중단되고, 실크 로드상의 주요한 경제 요새들이 한에 차츰 복속되었다. 

차제후(, B.C. 101∼96) 선우로 시작되는 40년간은 남서 지방의 비옥한 영토와 톈산과 중가리아, 투르판, 야르칸드, 쿠처() 등 서역 지대를 잃었다. 

이는 국가 수입을 감소시켜 흉노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조공과 세금도 물론 중단되었다. 

필연적 결과로 권력 내부 투쟁도 더욱 치열했는데, 중국의 이간책으로 관료와 귀족, 왕자들 간의 알력과 갈등도 심화되었다. 

선우 호한야(, B.C. 58∼31)와 좌현왕() 질지(, B.C. 56∼36)와의 대립은 흉노의 내분을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기원전 60년에 흉노의 허려권거() 선우가 병사하자 우현왕 도기당()이 집권하여 악연구제() 선우가 되었다. 

악연구제는 흉노의 일축왕()과의 정쟁()에서 패배하게 되자, 자기 휘하의 기병 수만을 이끌고 중국에 투항하였다. 뒤이어 기원전 58년에는 허려권거의 아들 기후책()이 호한야() 선우가 되자 군사를 일으켜 한에 투항한 악연구제를 토벌하였다.

악연구제는 패하여 자살하였으나, 중앙 정부의 약화와 혼란을 틈타 흉노의 각 군장()들은 독립하여 제각기 선우라 칭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호한야 선우 외에도 도기(), 호게(), 차려(), 오자()의 네 선우가 서로 권력을 놓고 다투는, 소위 '오선우 쟁패 시대'가 짧은 기간 계속되었다. 

기원전 56년에 네 선우가 차례로 패망하고 호한야 선우가 겨우 국가 권위를 회복하였다.

이번에는 도기의 사촌 동생인 서쪽의 휴순왕()이 자립하여 규진() 선우가 되고, 호한야의 형인 동쪽의 좌현왕 호도오사()도 독립하여 질지(, B.C. 56∼36) 선우로 칭했다. 

기원전 54년부터는 질지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졌다. 질지는 규진의 도전을 물리친 후 여세를 몰아 호한야를 공격하였다. 

호한야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중국과의 화친과, 중국에의 복속을 제안해서 질지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국가 의회(Toy)에서 호한야의 건의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수치스러운 패배 의식으로 단정한 질지는, 그의 선우위()를 부정하고 군사 공격을 단행하였다. 

호한야는 질지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남쪽으로 도망가 한의 선제()에게 항복하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 

그 대가로 호한야는 중국 북서쪽 오원군()의 변경 지대를 맡아 통치하였다. 

기원전 55년경 흉노의 세력은 완전히 양분되어 더욱 약화되었고, 중국에 대한 공격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질지의 돌파구는 서쪽이었다. 

우선 호한야를 격파하고 선우 왕정을 차지한 질지는, 기원전 51년 서진을 계속하여 정령(), 오갈()과 신장()성의 견곤()을 병합하였다. 

오손의 침공 위협에 시달리던 추(Chu)강과 카자흐스탄 남부의 강거()를 복속시킨 후 오손을 공략하고 아랄 해에 이르는 광대한 중앙 아시아 흉노 국가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41년, 새로운 국가의 수도를 추강과 탈라스 강변 사이의 견곤에 건립하고 성을 쌓아 방어에 임했다. 

이로써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 동서 유럽을 잇는 투르키스탄 지역에 투르크계 인종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서 페르가나, 박트리아 지역까지 흉노에 속해졌고, 질지는 남서 경계가 멀리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연결되는 파르티아()에 대한 공략을 준비하였다.

질지의 웅대한 꿈과 서역 통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광대한 정복지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 체제가 채 정비되기도 전에 중국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렸다. 

강거와 오손의 지배권을 장악한 중국은 마침내, 기원전 36년 강거에 있던 질지 선우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흉노 군대와 복속 국가에서 차출한 중국의 70,000 군대가 탈라스 강변의 흉노 도성()을 에워싸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결국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질지를 포함한 흉노 지배층 1518인이 살해됨으로써 흉노의 본류는 거의 소탕되었다. 

그 후 흉노는 호도이시()가 여 선우(輿, A.D. 18∼46)가 되어 등극할 때까지 소극적인 입장에서 한과의 조심스런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질지가 서진한 후 동쪽 흉노의 고토는 스스로 중국 치하에 들어간 호한야에 의해 지배되다가, 호한야의 사후(B.C. 31) 그의 아들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흉노는, 오랜 소강 상태로 힘을 축적하여 다시금 중국 변방에 대한 간헐적인 공략을 재개했다. 

이에 후한()을 건국한 왕망()은 여러 차례 흉노 토벌군을 파견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중국 북부 변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후한의 광무제()가 등극하는 24년경에는, 북방의 유력한 유목 민족인 팽총(), 노방() 등이 흉노와 연합하는 형세를 보였다.

광무제는 다시 흉노와 화진책을 쓰며 교역과 선물로 선린 관계를 도모했다. 

흉노 선우 여는 스스로 선대()의 묵특과 비교하면서, 중국에 대한 강경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강경책의 일환으로 여 선우는 중국 변경의 거물인 노방을 한의 황제로 선포하여, 중국 황제가 흉노의 선우에게 복속되었음을 상징적으로 과시했다. 

그의 재위 동안 영토는 계속 확장되어, 동으로는 만주, 서로는 카슈가르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통치하였다.

흉노의 운명은 46년 선우 여의 죽음으로 또 한번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계속된 가뭄으로 가축의 반 이상이 죽고, 막대한 인명 피해가 생겨 심각한 정치, 경제적 혼란 상태가 야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의 조카인 우현왕 비()가 그 부친이 선대 선우(18대 선우 , B.C. 8~A.D. 14)였음을 내세워 자신의 선우 계승권을 주장하였다. 

그의 요구는, 우현왕으로서 이미 흉노 남부에 수립된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에 매우 위협적이었다.

46년 선우 자리는 여의 아들 포노()가 승계하였다. 

이에 따라 비는 48년 남쪽의 8개 흉노 부족의 추대로 50,000에 달하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독자적인 선우로 등장하였다. 

그는 중국에 복속되어 스스로 호한야() 선우라 칭하면서 북방의 포노 선우와 대립하였다. 

이로써 흉노는 48년을 기점으로 여 선우의 북흉노와 비가 지배하는 남흉노로 양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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