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간쑤성[甘肅省]에 있는 도시.
중국 간쑤성 서부 주취안지구[酒泉地區] 허시저우랑[河西走廊] 서쪽 끝, 당허강[黨河] 유역 사막지대에 있다.
란저우[蘭州]와의 거리는 1,137km, 둔황석굴[敦煌石窟]과는 25km 거리이다.
연평균기온 9.4℃, 연평균강수량 32.9mm이다.
중국 간쑤성 둔황. 둔황의 동굴지대는 5층 높이이고 길이 1.8km이다.
돈황은 장안과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에게 비단길의 시발지이자 마지막 기착지였다.
동서양의 민족과 종교가 교차하여 독특한 세계적 문화특성을 보였다.
서역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당의 문화는 국제적으로 성장하였고, 이는 당 황실 능묘의 화려한 유물들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 692년 : 설총, 이두를 정리, 《화왕계》를 지음 698년 : 고구려 유민, 진국(뒤의 발해)을 세움 704년 : 김대문, 《계림잡전》,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악본》 저술 727년 : 혜초, 《왕오천축국전》 저술 추정; 발해, 일본에 첫 사신 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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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세기 초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둔황군[敦煌郡]을 두고 부근에 위먼관[玉門關]·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설치하는 한편, 둔전병(屯田兵)과 한인(漢人)의 식민을 투입함으로써 둔황은 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변경도시로 변모하고, 서방과의 접촉지를 차지하여 한인·페르시아인·투르크인·인도인 등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성을 띤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
5호 16국시대의 한족의 국가 서량(西凉:400∼421)이 둔황을 국도(國都)로 삼았던 사실은 그 발전상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4세기 중엽에는 이미 이 지방의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 불교도 융성하여 첸포동[千佛洞]으로 불리는 유명한 석굴사원의 조영(造營)이 시작되었다.
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樂尊)에 의하여 시작된 석굴사원의 조영사업은, 그 뒤 북위(北魏)·서위(西魏)·북주(北周)·수(隋)·당(唐)·5대(五代)·송(宋)·원(元)에 이르는 13세기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서량이 멸망한 뒤, 둔황은 북량(北凉)·북위의 지배를 거쳐 수·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실크로드의 두 갈래 통상로, 즉 톈산남로[天山南路]와 톈산북로[天山北路]가 차지하는 교통상의 중요성이 바뀌어, 남로에 대신하여 북로가 중요성을 더해가자, 둔황은 그 번영을 북동쪽의 상락현(常樂縣:지금의 安西縣 부근)에 빼앗기고, 명칭도 과주(瓜州)로 바뀌었다.
대(對)서역 방어의 거점으로서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고, 당대(唐代)에는 다시 사주(沙州)로 고쳐 병력을 주둔시킴으로써 방어 및 동서무역의 요지로 삼았다.
8세기 말에는 토번(吐蕃)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9세기 중엽 이후는 당나라의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의 지방정권을 받게 되었다.
독립하여 금산국(金山國)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11세기 초 다시 서하(西夏)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부터 둔황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원대(元代)에 사주로(沙州路)의 치소(治所)가 되고, 명대(明代)에 사주위(沙州衛)가 되었으나 그 벽지화(僻地化)는 피할 수 없었으며, 또 과거의 불교 사찰이나 석굴사원도 쇠미해져서 청말(淸末)에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Aurel Stein)이 둔황 모가오굴[敦煌莫高窟]을 찾았을 때는 도사(道士)와 몇 사람의 라마중만이 살았다고 한다.
1987년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1900년 석굴사원의 석굴군(石窟群) 중의 하나인 둔황 모가오굴에서 2만 점의 고문헌(古文獻)·회화류(繪畵類)가 발견되어, 그것이 1907년 및 1908년에 스타인 및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등에 의하여 반출됨으로써, 세계의 동양학 및 불교미술 연구에 기여하였다.
간쑤성의 목화산출기지이며, 석유·금·전력·화학·식유(食油)가공 등 소규모의 공업과 주변에서 나는 밀·잡곡·대마(大麻)·유채 등의 농산물을 산출한다.
란신철도[蘭新鐵道:蘭州∼烏魯木齊]가 북쪽으로 지나며, 215·313·112국도는 티베트·칭하이[靑海] 등 성·자치구와 통한다.
교육기관으로는 80개의 소학교와 14개의 중학교가 있다.
오늘날 둔황에는 후이족[回族]의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고 있으며, 지금은 석굴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이 모이는 명소가 되었다.
주요 문화유적으로는 둔황석굴, 웨야천[月牙泉], 위먼관, 양관 등이 유명하다.
스타인의 돈황유서 사취.
스타인은 중국 서북부에서 네 차례에 걸쳐 탐사를 진행하였다.
제3차 탐사는 1913년에서 1916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서, 활동범위는 주로 타림분지 남·북부와 하서 남·북부 등이었다. 탐사를 마친 후, 그는 『서역고고도기 西域考古圖記』 『아주복부고고기 亞洲腹部考古記』 『스타인서역고고기 斯坦因西域考古記』 등을 연달아 저술하였다.
롯지는 회의석상에서 "돈황 천불동 미술은 방대하면서도 우아하며 아름답다."고 보고했는데, 그 말에 돈황 고찰에 대한 스타인의 야심은 더욱 커졌다.
1907년 3월 12일 새벽, 돈황에는 처음이었던 스타인은 천불동에서 발견된 장경동에 대해서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원래 계획은 돈황에서 열흘만 머무르며 천불동을 간단히 고찰하고, 식량과 음료수를 약간 보충하고 난 후, 로브노르사막으로 가 고고학 발굴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돈황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돈황에 살던 우루무치의 이슬람 상인 베그(Z. Begg)로부터, 몇 년 전 왕원록이 막고굴에서 장경동유서를 발견한 일에 대해 듣게 되었다.
장경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러한 보물이라면 한 번 힘써 정탐해 볼 만하다."며 지체하지 않고 천불동으로 달려갔다.
3월 16일, 스타인은 천불동에 도착했다. 당시 장경동은 이미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으며, 열쇠는 천불동 주지 도사인 왕원록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이때 왕도사는 두 도제를 데리고 외출하여 탁발하던 중이었으므로, 천불동에는 어린 중 하나만 남아 있었다.
장경동에 들어갈 수 없었던 스타인은 하는 수 없이 잠시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돈황의 지방관 왕모(王某) 및 주둔군 수령 임모(林某)를 만난 후, 안서·남호(南湖)로 가 탐사를 진행하였다.
5월 15일에 스타인은 다시 돈황으로 돌아왔으나, 이때는 마침 천불동에서 묘회(廟會)가 열려 참배객들이 많았다.
스타인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거나 군중을 분노케 할까 두려워 감히 손을 쓰기 어려웠으므로, 현성에서 며칠 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돈황 사람들은 오늘날에 이르도록 아직 불교에 귀의하고 있다.
우리가 돈황에 간 날은 마침 예불을 드리는 기간이라 시민과 촌민 등 천불동에 참배하러 온 사람이 천을 헤아렸다.
그것으로 비록 절 건물은 쇠잔하였으나, 여전히 예불을 드리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곳의 벽화와 조상(彫像)에 더욱 욕심이 났지만, 촬영과 그림 그리기 외에는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릴까봐 감히 더 바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5월 21일, 스타인은 탐사대를 데리고 다시 천불동에 왔다.
스타인의 말에 의하면, "왕도사는 이미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는 좀 기괴한 사람이었으며, 지극히 교활하고 기민한 사람이었다.
그가 보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으나, 신과 사람에 관련된 일에 대한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으므로 쉽사리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중략)
성급하게 대장서(大藏書)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스타인은 "천불동 벽화의 사진 촬영을 위해 왔다."며 장경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의 중국 통역사 장효완을 왕도사에게 보내 거래를 주선하도록 하였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장고문이 스타인에게 와서 말하기를, "왕도사에게 스타인이 몇몇 사경(寫經)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고 하였다.
스타인이 아낌없이 성금을 기탁하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장고문이 꺼내자, 왕도사는 곧 스타인이 경서의 일부분을 보는 데 동의하였다.
하지만 장고문이 "스타인은 사실 경서의 일부를 사고자 한다."고 말하자,
왕도사는 즉각 불안, 초조해 하면서 방금 스타인이 경서의 일부를 보아도 좋다고 동의했던 것마저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스타인이 "나는 수중에 있는 돈을 모조리 동원해 그와 그의 사원을 유혹하였으나, 종교에 대한 그의 정서나 뭇사람의 분노를 일으킬까 두려워하는 마음, 혹은 양자가 지니고 있는 알 수 없는 외경심 등을 이겨내기에는 아직 부족했다."고 말한 바와 일치된다.
금전으로는 장경동의 문을 열 수 없었으므로 스타인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왕도사의 인도로 동굴 및 그 보수공사를 참관하기를 청하자, 왕도사는 스타인에게 점차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스타인이 성승(聖僧) 현장(玄奘)을 거론하여 왕도사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스타인은 기회가 온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을 현장의 충실한 신도라며 크게 과장하였다.
"나는 나의 매우 제한된 중국어로 나 자신의 현장 숭배에 대해 서술하였고, 내가 어떻게 그의 족적을 따라 인도로부터 험한 산과 황량한 사막을 넘어 여기에 도달했는지, 그 경과에 대해 설명하자 그는 분명 감동을 받았다."
이리하여 왕도사는 특별히 스타인을 당승고사가 그려진 벽화 앞으로 데려가 그에게 친절히 강해하였다.
왕도사가 사람을 시켜 그린 벽화 중에는 특별히 스타인에게 유리한 그림이 한 폭 있었는데, 그 그림에는 거센 물살이 흐르는 한줄기 강변에 현장(玄奘)이 서 있었다.
곁에는 불경을 실은 그의 말이 서 있고, 커다란 거북 한 마리가 현장을 향하여 헤엄쳐오며 그를 도와 불경을 싣고 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이날 밤이 이슥해지자, 장고문은 스타인의 천막으로 와 처음으로 그에게 작은 경전 두루마리를 건네며, "이는 왕도사가 옷 속에 감춰뒀던 것으로 방금 막 나에게 살짝 건네 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효완은 그중 하나를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가 밤새워 식별연구를 진행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장효완은 놀란 기색으로 스타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고하였다.
일부 경전 두루마리에는 윗부분에 제서(制書)가 있는데, 어떤 제서에서 표명한 바에 따르면, 분명 불경은 현장이 인도에서 친히 가져와 산스크리트어에서 한문(漢文)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스타인 역시 매우 놀라 장고문을 시켜 왕도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왕도사 또한 이 말을 듣고 난 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효완은 오로지 한 가지 해석만이 이치에 닿는다고 말하였다.
즉, 저승에 있는 현장이 친히 이때를 택해, 이 신성한 불경을 스타인 앞에 내보여 멀리 인도에서 온 정성스러운 이 신도와 제자에게 그것들을 인도의 고향으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장효완의 반쯤은 신적인 이러한 말의 영향으로 왕도사는 결국 스타인에게 장경동의 문을 열어주었다.
스타인은 "도사가 들고 있던 희미한 등잔불 속에서 나의 눈앞이 홀연 밝아졌다.
두루마리들은 단단히 한층 한층 어지럽게 땅 위에 쌓여 있었다.
높이는 10피트 정도였는데, 후에 재어 보았더니 근 500평방피트 정도 되었다.
작은 방은 약 9평방피트 정도로, 두 사람이 서서 들어가면 꽉 들어찰 정도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동굴은 너무 작고 어두워 글을 읽기에는 불편했다.
왕도사는 곧 스타인이 두루마리 몇 개를 동굴 전실(前室)의 작은 방으로 옮기도록 허락해 주었는데, 참배하러 오는 남녀 신도들에게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창문은 종이로 발라버렸다.
후에 왕도사는 두루마리를 하나하나 작은 방으로 옮겨 스타인과 장효완으로 하여금 연구하도록 하였다. 두루마리가 갈수록 많아지자,
스타인은 장효완을 시켜 두루마리들의 편목을 만들려고 했던 원래의 계획을 포기하였다.
동굴 속에는 불경 외에도 수많은 견화(絹畵)와 백서(帛書)들이 있었다.
스타인은 "나는 큰 꾸러미 하나를 열었을 때 더욱 경악하였다. (중략)
꾸러미 속에는 거친 면포로 만들어진 것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갖가지 견화·지화(紙畵)·번개(幡蓋)·금증(錦繒)·자수(刺繡)로 된 공양물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화견(畵絹)과 화포(畵布)들은 대개 사원의 깃발들이었다.
두루마리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을 펼쳐보니 모두 제불(諸佛)보살상이었다.
보살상 중에는 순수하게 인도화법만을 쓴 것도 있었고, 인도화를 본으로 하여 중국화 기법을 섞은 것도 있었다."고 말했다.
왕도사는 '경(經)'은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나, 불화에 대한 흥미는 별로 없었다. 스타인은 장효완과 함께 경을 읽는 한편, 왕도사의 심리에 영합하는 아첨을 몇 가지 늘어놓아 큰 공덕전(功德錢) 헌납을 허락받았다. 스타인이 불경과 불화들을 골라 곁에 둔 것을 보고서도 왕도사는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날, 세 사람은 날이 저물도록 바빴다. 동굴을 떠날 때도 스타인은 왕도사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당승이 말을 끌고 경전을 싣고 인도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 앞을 다시 지나갈 때, 스타인은 일부러 멈춰서 재차 그 그림에 대한 왕도사의 주의를 끌었다.
장효완도 그들 뒤에 서서 있는 힘껏 세객(說客)의 수완을 다하여, 스타인은 앞으로 사원에 매우 굉장한 공덕전을 헌납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스타인은 이전에 이미 약간의 돈을 사원에 헌납하였다).
왕도사가 여전히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스타인은 장고문이 혼자 가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효완의 재권유와 속임수로 마침내 왕도사는 스타인의 요구를 승낙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스타인은, "한밤중이 되자 충실한 장고문은 스스로 큰 두루마리 한 꾸러미를 나의 막사로 안고 왔다.
모두 첫날에 골라냈던 것으로, 나는 극도로 흥분되었다. 장고문과 도사는 이미, 내가 중국 국토를 떠나기 전까지는 이와 같은 '발견품'의 내력은 우리 세 사람 외의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에는 장고문 혼자 운송하게 되어 이레 밤을 더 옮겼는데, 얻어낸 물건이 점점 더 무거워져 나중에는 차량으로 운반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였다.
이쯤 되자, 왕도사는 자신이 했던 모든 행동 일체가 갈수록 후회스러워졌으며, 그가 몹시 신성시했던 그 두루마리들을 잃어버린 것이 무서워졌다.
스타인에게 이 '경(經)'을 그에게 건네주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였다.
이 '경'들이 모자라기라도 한다면 시주들이 분명히 발견하게 될 것이니 그는 반드시 시주들과 의논해 보아야 한다며, 그전에는 더 이상의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날 밤 왕도사는 곧 용도(甬道) 위의 경서 두루마리를 전부 장경동으로 옮기도록 하고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이 때문에 스타인은 크게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스타인은 이미 수많은 진귀한 회화와 비(非)한문사권 및 기타 문물들을 자신의 수중에 넣었으며, 이틀 밤 동안 손에 넣은 것들을 천막에서 자신의 저장실로 미리 운반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왕도사는 돈황의 오아시스로 규칙적인 탁발을 나가게 되었다.
일주일 후 그가 천불동에 돌아왔을 때는 그 비밀이 아직 새어나가지 않았으므로, 왕도사의 명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왕도사는 다시는 소심하게 굴지 않았다.
스타인은 이 틈을 타 왕도사를 속이며 말하길, "이 경전 두루마리들은 여기에 유폐되어 있으니 조만간 산실(散失)될 것이다.
내가 그것들을 구해내어 서양학자들이 연구하도록 제공하는 것은 매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행동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쌍방 간에 "사원 건물 수리에 필요하다는 형식으로 돈 한 꾸러미를 도사에게 수고비조로 바친다."고 약속하였다.
때마침 스타인의 심부름꾼인 톨디(Toldi)가 호탄에서 천불동으로 왔다.
그는 스타인에게 처리가 필요한 170통의 편지가 포함된 대량의 우편물을 가져다주었다.
돈황의 지방관리가 스타인에게, 난주(蘭州)의 총독이 명령을 내려 스타인의 고고학 발굴 중 외교예절에 지방관이 반드시 주의할 것을 지시했다고 알려주었다.
게다가 돈황에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이미 사람들의 경계심을 일으키게 되었으므로, 스타인은 돈황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6월 13일, 그는 낙타와 말, 새로 추가된 5대의 마차로 편성된 장대한 대오를 인솔하여 돈황 유물을 가득 채운 채, 천불동을 떠나 안서를 향해 출발하였다.
4개월 후, 스타인은 안서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왕도사에게 쪽지를 하나 써, 장효완이 그 쪽지를 가지고 비밀리에 천불동에 한번 다녀오도록 하였다.
스타인이 말하기를, "이번에도 왕도사는 여전히 내가 청한 바를 장고문이 대신 할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줘 많은 중문(中文)과 티베트어 사본을 내게 보내주었고, 이를 유럽의 학술적 수요를 위해 제공하였다.
16개월 이후, 모든 사본으로 가득한 상자 24개와 그림과 수예품 등 미술 유물들로 가득 찬 다섯 상자를 무사히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안치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참으로 무거운 부담으로부터 풀려나는 것 같았다."라며, "이로써 나는 마지막으로 안심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1914년, 스타인은 세 번째 중국 '탐사'에서도 다시 천불동에 가 왕도사를 통하여 돈황 두루마리를 큰 상자로 5개나 속여 내왔다.
스타인은 스스로 "왕도사는 오래된 시주나 마찬가지로 나를 환영해주었다. (중략)
왕도사는 틈을 봐 그의 장부 계산을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상면에는 내가 사원에 시주한 은전의 총액이 적혀 있었다.
석굴사 앞의 새 사원과 참배객이 머무는 숙소를 가리키며 그것들이 모두 내가 바쳤던 돈으로 지은 것이라며 매우 의기양양하게 보여주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스타인이 이때 얻은 두루마리의 대부분은 돈황유서가 북경으로 운반될 때 왕도사가 몰래 감추어 보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그중 일부분은 그 곳의 관리가 약탈해가거나 민간에서 산실되어, 당시에는 이미 다른 이가 팔고 있었다.
『스타인서역고고기』에는 "당대 불경 두루마리 한 꾸러미는 1914년에 어떤 이가 나에게 가지고와 판 것이다.
나는 감주에 가는 도중과 신강으로 가는 길에서도 석실에서 흩어져 나온 적지 않은 두루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스타인은 이때 훔쳐간 두루마리의 수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두 번째로 이곳을 순례한 결과, 큰 상자로 5상자는 너끈히 될 만큼인 600여 권의 불경을 가지고 갈 수 있었다.
물론 상당한 액수를 또 희사해야만 했다."
이렇게 스타인은 돈황 문물을 약탈하여 크나큰 실질적 혜택과 지대한 명예를 얻게 되었다.
영국 국왕은 그에게 인도 왕국의 무사 작위(2년 후에 다시 기사 작위로 승격되었다)를 주었다.
왕립지리학회에서는 그에게 금질(金質)상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독일은 거액의 현금으로 그의 성과를 축하하였으며, 부다페스트에서 그는 큰 공을 세운 똑똑한 사람으로 받들어졌다.
그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영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 것으로, 스타인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소원을 이루었다.
금상첨화로, 스타인을 크게 도와 돈황 문물 약탈에 수훈을 세웠던 고문 장효완 역시 그가 얻고자 갈망하던 표창을 받게 되었다.
카슈가르 영국 영사관의 한문비서(漢文秘書)가 되었던 것이다.
스타인의 귀국 후, 연구상의 편의를 위해 '문서 부분'은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기로 하고, 인도 측은 약간의 견본만 취하여 보관하기로 하였다.
이와 반대로 '도화(圖畵) 부분'은 인도박물관이 소유하게 되었고, 대영박물관은 약간의 견본만 취하여 보관하게 되었다.
어느 학자가 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스타인이 약탈한 각 유물들을 검토한 바에 의하면, "대영박물관에 남겨진 소위 '약간'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될 수 있는 대로 정수만 골라간 것이었고, 인도박물관에 남겨진 '약간'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1973년에 영국도서관 동방부와 영국박물관 분립에서는 원래의 박물관 동방도서 및 사본부에서 보존하기로 했던, 스타인이 취득했던 문헌들을 신축 영국도서관 장서루로 옮겨 보존하도록 하였다.
영국 소장 돈황유서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그 상세한 상황과 수량을 알 수 없었다. 1954년에 영국 대영박물관 도서관은 소장하고 있던 돈황 한문 두루마리를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공개하고 내다 팔았다.
마이크로필름은 모두 6,980개의 두루마리를 수록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옛 티베트 문자 및 기타 민족의 문자로 된 두루마리는 포함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문 두루마리 역시 불완전한 것이었다.
자일즈(Herbert Giles)는 1957년에 대영박물관 소장 『돈황한문사본주기목록』을 편성하였다.
이 목록에는 모두 8,102개의 돈황 한문 두루마리가 수록되었으나, 영국소장 돈황 한문 두루마리의 수록 상황을 완전하게 반영하지는 못했다.
영국도서관의 주먹구구식 목록은 현재 S.11604까지 번호를 매기다가 중단된 상태로, 사실상 1척 넓이도 되지 않는 작은 조각 수백 편이 여태 번호도 매겨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이로써 영국이 소장하고 있는 돈황 한문 두루마리는 약 12,000권에 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에 소장된 돈황의 옛 티베트 문자와 기타 중앙아시아의 옛 민족 문자로 된 두루마리들은 원래 총 약 2,000여 권으로 추정되었는데, 근년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추정 총수가 3,000권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영국 소장 돈황유서는 모두 15,000권 정도로 확정지을 수 있겠다.
돈황이 중국 역사에 등장한 것은 한무제 때이다.
元鼎 6년(기원전 111), 한무제는 당시 서북쪽 개척과 서역 정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동쪽으로부터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의 하서사군을 설치하였으며, 비로소 이 지역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돈황'이라는 이름은 이때 붙여진 것으로, 춘추시대에는 과주(瓜州)라고 불렸던 곳이었다.
당시 사군(四郡) 중 가장 서쪽인 돈황 지방에는 흉노가 들어오기 전에 월지(月氏)족이 살고 있었다.
흉노를 물리치기 위한 전략을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한무제는 서쪽으로 도망친 월지와 연합해 흉노를 협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으로 인해 기원전 138년에 멀고 먼 서쪽의 월지에게로 갔던 사람이 장건(張騫, ?~기원전 114)이다.
그는 도중에 흉노에게 잡혀 10여 년 동안이나 억류된 끝에 겨우 월지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월지는 풍요로운 땅에 매료되어 더 이상 흉노에게 적개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한과 월지의 군사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으나, 장건의 여행은 실크로드의 개척과 서역의 모습을 알리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한무제는 기원전 127년 위청(衛靑)을 시켜 흉노를 토벌하고, 기원전 121년에는 소년장군 곽거병(霍去病)을 시켜 기련산 아래에서 무찌른 흉노를 하서 지방에서 완전히 내쫓아 이 지역을 평정하였다.
이 사군을 연결하는 길은 중국과 서역 교류의 간선이 되었는데, 앞서 말했듯 사군은 후에 양주, 감주, 숙주, 사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장 서쪽에 위치한 사주, 즉 돈황은 그때부터 한족이 이민족과 접촉하는 최전선의 군사적 요충으로서 서역 지배의 거점이 되었다.
현재의 성 이름인 '감숙(甘肅)'은 감주와 숙주를 합하여 대표 명칭으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은 남쪽으로 기련을 베고 서쪽으로 서역을 잡고 있어 한나라 왕조 서쪽 변방의 주요한 진지였고, 중서 교통과 남북 양도를 이어주며 무역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집산지이자, 동서양 문명의 정화가 모이는 중추적인 곳이었다.
한나라 때의 서역 경영은 한 편의 연극과 같다.
돈황은 한나라 정부가 연출한 연극의 무대 뒤였고, 또 정부가 서역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눈과 귀이기도 했다.
한나라가 누란(樓蘭)·고사(姑師)를 격파하고, 오손과 연합하여 대완을 정벌하고, 흉노와 전쟁을 벌이고, 멀리 강거(康居)까지 원정한 것들은 모두 돈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돈황과 하서 기타 지방은 모두 서북쪽 구석에 치우쳐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서진(西晉) 시대 8명의 황족인 사마량(司馬亮), 사마위(司馬瑋), 사마륜(司馬倫), 사마경(司馬囧), 사마영(司馬潁), 사마애(司馬艾), 사마월(司馬越), 사마옹(司馬顒)이 일으킨 '팔왕의 난(八王亂)'이나 서진 말기 영가 연간에 흉노가 일으킨 '영가의 난(永嘉亂)'과 같은 여러 난리를 피할 수 있었고, 지역 내에서 오랫동안 안정적인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서 지역은 특히 돈황 불교가 흥성하였는데, 이는 물론 돈황이 비단길의 요충지로서 중국 한족이 모여 사는 곳 중 가장 먼저 불교와 접촉한 지방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형세와도 매우 큰 관계가 있었다.
동한 시대 이후 사회적·민족적 갈등과 계급투쟁은 날이 갈수록 첨예하고 복잡해졌으며, 16국 전란 시기에는 정권이 수시로 교체되었고, 통치자들은 새로운 사상적 도구를 찾아 백성에 대한 통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을 뿐 아니라, 통치자 자신도 스스로를 마취시키기 위해 마음속의 신령이 도와주기를 기원하였다.
하서 지방 불교의 흥성은 우선 불경 번역 방면에서 드러났다.
불교의 광범위한 전파로 인해 하서 지방에는 적지 않은 고승들이 출현했는데, 양주 사람인 보운(寶雲)·지암(智嚴)·축도만(竺道曼)·도태(道泰), 주천 사람인 혜람(慧覽), 장액 사람인 저거경성(沮渠京聲), 금성 사람인 현창(玄暢) 등이 있다.
그들은 주사행(朱士行)과 법현(法顯)처럼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곳과 황막한 사막을 걸어 서쪽으로 가 경을 구하고 성인의 유적을 참배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대량의 산스크리트문이나 호어(胡語)불경을 가지고 왔는데, 하서 경내에 굴을 파고 절을 지어 신도를 모아 경을 강설하기도 하였고, 경전의 번역과 저술에 종사하기도 하여 불교의 중국전파와 발전에 공헌하였다.
하서 지방에서 불교가 흥성한 사실은 굴을 파고 절을 세우는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석굴로 된 절은 불교활동의 표지였는데, 초기 불교신도의 주요 일과의 하나는 좌선이었다.
석굴에서 정좌하고 고행하여 잡념을 물리치고 온 마음을 부처로 향하게 하여 해탈을 구하는 것이다.
일설에는 생전에 부단히 좌선고행하기만 하면 점점 적멸(寂滅)의 경지에 도달하여, 사후에 극락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석굴로 된 절은 일반적으로 모두 시끄러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 지어졌다.
그중에는 종종 불탑과 불상이 있는 곳도 있어, 수행 좌선하는 자에게 한편으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한편으로는 예불을 제공하여 최종적으로는 세속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게 하였다.
하서 지방에는 석굴로 된 많은 절들이 현존하지만, 이를 다른 지방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석굴로 된 절들은 비록 한위 시대에는 흥성하지 못했지만, 그 굴을 지은 연원을 추적해 보면 대부분이 16국 시기에 생겨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승전 高僧傳』의 「담마밀다전 曇摩密多傳」에서 말하길, "담마밀다는 법수(法秀)라고 하며 카피사(캐시미르) 사람이다. (중략)
여러 불경에 널리 통달했고 특히 선종의 교리에 깊었다. (중략)
돈황에 와서 한가한 넓은 땅에 사원을 세우고 능금나무 천 그루를 심고, 100무(畝)의 동산을 개간하고, 선방과 누각, 연못, 숲을 엄정하고 조용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 다시 양주로 갔는데, 여전히 공부(公府)의 옛 절에 다시 지붕을 잇고 수리하여 신도들이 몰려들었으니 그의 선업(禪業)이 매우 왕성했다."고 한다.
유명한 돈황 막고굴은 비록 수당대에 성행하여 송원 시대까지 이르렀으나, 막고굴 제1호 석굴도 16국 시기의 것이다.
초기 불교가 돈황에서 전파된 역사로 볼 때 승려들은 절을 세우고 굴을 파서 정좌하여 수행 참선하는 것을 숭상하였는데, 이 때문에 명사산 아래 물이 흘러 감돌고 초목이 울창한 사막의 오아시스를 선택했던 것이다.
돈황은 시끌벅적한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속세인의 음식공양도 얻을 수 있었기에, 굴을 파고 참선하기에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곳이었다.
돈황 막고굴 중 낙준 법사가 만들었다는 제1호 석굴을 비롯한 초기 석굴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가장 오래된 석굴은 5세기 전반에 북량(北凉)에서 북위에 걸쳐 만들어진 굴이다.
다리를 엇갈려 앉은 유명한 미륵보살이 있는 제275호굴은 북위 초기, 정확히 말하면 북량 시기에 만들어진 듯한데, 현존하는 492개의 석굴사원 중에서는 이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제275호굴의 불상은 중국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입은 옷도 투명하며 인도 양식 그대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실크로드의 시작과 끝
현장이나 혜초가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날 때,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가 티베트 정벌을 나설 때, 장안을 출발한 이들이 새로운 세계를 예감하는 첫 관문은 돈황이었다.
이들에게 돈황은 비단길의 시발지였으며,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험난한 천산산맥을 넘어온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에게는 이제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는 비단길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동서양의 민족과 종교가 교차하며 직조되다
현재 약 1만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감숙성 돈황현, 그 동남쪽에 명사산(鳴沙山)이 있다.
'모래가 우는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래산이다.
그 산 중턱에 약 1.8km에 걸쳐 석굴들이 떼 지어 있다.
5호 16국 시기인 366년, 전진의 승려 낙준이 처음으로 석굴을 파고 수행을 시작한 이래로 11세기 북송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굴을 파고 수행을 하여 천여 개의 어마어마한 석굴군이 조성되었다.
현재 492개가 발굴돼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데, 굴 안에는 사방 벽면과 천장에 휘황한 불교회화가 장식되어 있고 수많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천불동(千佛洞)'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돈황 막고굴(莫高窟)'이라 불리기도 한다.
돈황 문화는 이곳을 거쳐간 동서양의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가 서로 교차하면서 직조된 독특한 세계적인 문화특성을 보이고 있다.
벽화들은 동양미술의 뿌리로 일컬어지는데 초기에는 민간신화가 주로 등장하고 불교 전래 이후에는 석가의 일생, 열반상, 극락세계 등과 보살상, 비천도 등이 묘사되었다.
천여 개의 석굴군이 조성되어 '천불동'이라고도 불리는 돈황 막고굴 입구.
돈황(敦煌)을 여행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곳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사람들에게 직접 가볼 것을 권한다.
중국 사람들은 물론이고, 특히 외국인들이 중국의 여러 명소 가운데 가장 즐겨 찾는 역사적 유적지로는 서안(西安)과 돈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빼어난 경치를 찾아가는 것을 명승탐방이라고 한다면, 돈황은 역사유적탐방으로 그 진가를 발휘하는 지역적 특성을 지닌 곳이다.
돈황을 여행해 보면 그곳의 지리적 특성이 오늘날 돈황을 역사유적지로 만들었음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돈황은 책으로 읽거나 말로만 들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실제로 직접 보고 확인해야만 비로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돈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핵심어(key word)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핵심어들은 늘 돈황이라는 지역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나 개념을 불분명하게 대충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우리가 쉽게 하는 말인 '비단길'은 영어의 '실크로드(Silk Road)'라는 말로 널리 알려졌고, 중국 사람들은 '사주지로(絲綢之路)'라고 직역하여 쓰고 있다.
실크로드란, 중국인들이 국내에서 생산된 비단을 낙타에 싣고 지금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아시아 내륙지방을 통해 유럽에 이르기까지의 교역로를 말한다.
실크로드의 시작은 오늘의 서안이지만, 당시 중국 경내의 마지막 기착지였던 돈황 지역은 본격적인 교역이 시작되는 종착역과도 같은 곳이었다.
돈황을 나가 양관과 옥문관을 통과하면 천산남북로로 갈라져, 아시아 내륙을 거쳐 멀리 유럽에까지 이르는 대장정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는 용어는 돈황의 지역적 특성과 관련하여 돈황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인다.
황하를 중심으로 보면 오늘의 감숙성(甘肅省)은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 모양은 서북쪽으로 길게 비스듬히 누워 있어 기나긴 복도를 연상시킨다.
돈황은 하서회랑의 서북쪽 제일 끝부분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신강성 지역의 변경과 인접해 있다.
'하서사군(河西四郡)'은 한무제가 황하의 서쪽에 설치한 네 곳의 직할도시를 이르는데, 양주(凉州)로 불리던 무위(武威), 지금의 장액(張掖)인 감주(甘州), 지금의 주천(酒泉)인 숙주(肅州),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의 돈황인 사주(沙州)가 그것이다.
돈황은 옛날부터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모래 바람이 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사주라 불렸을 것이다.
우리나라 팔도의 지명이 해당 지역의 중심도시에서 비롯되었듯이, 감숙성(甘肅省)이라는 이름도 지금의 장액인 감주와 지금의 주천인 숙주라는 지명의 합성어이다.
돈황은 이 감숙성의 서북쪽 제일 끝에 있는 도시이다.
돈황의 역사와 지역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 지도를 펼쳐놓고 감숙성을 찾아, 감숙성에서 다시 돈황을 보면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오늘의 돈황은 처음부터 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중국의 역사유적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황문물연구원장인 번금시(樊錦詩) 여사는 돈황이 중국 문화대혁명(1966~1977)의 격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고 필자에게 알려주었다.
중국 전역에 산재해 있던 역사유적과 유물의 대부분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나이 어린 홍위병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으나, 돈황의 막고굴은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당시의 상황을 번(樊)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돈황에 이르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철도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돈황의 근처에 있는 유원(柳園)역에서도 막고굴까지의 거리는 130여 ㎞나 되었기 때문에 돈황까지 가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두 명의 홍위병이 유원역에 내린 후 군에서 제공하는 트럭을 타고 몇 시간 만에 막고굴에 도착했지만, 피곤과 허기에 지쳐 기진맥진한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며 민족문화유산의 가치를 설명하자, 홍위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곳에 돈황의 석굴이 있었다면, 그대로 보존되지 못해 지금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돈황 문화의 역사적 이해를 위해 다음의 내용을 중심으로 엮었다.
첫째는 돈황의 역사적 배경으로 돈황의 유래와 중국 역대 왕조의 돈황 개척에 관해,
둘째로 돈황 예술의 보물창고인 막고굴과 천불동에 대해,
셋째로 청나라 말기에 서양인들의 돈황 보물 약취의 시작과 그 전말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겠다.
이상의 세 가지를 이해하고 실제로 돈황을 여행한다면 나름대로 유익한 경험이 될 것이다.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끝, 곤륜산맥崑崙山脈 북쪽 기슭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사주沙州’ ‘과주瓜州’라고 불릴 때도 있었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재위 기원전 141~88)가 돈황국을 둔 이래,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경유지가 되어 왔다.
서역과 중국의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불교가 일찍부터 전해졌고 불교 문화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5세기 중기 북위北魏의 황족인 동양왕東陽王 원태영元太榮이 과주자사瓜州刺史가 되었고, 북위가 멸망한 뒤에도 그 자손이 다스렸으며, 서역의 본토로부터 승려를 불러들여 석굴을 많이 개착하여 천불동이 이루어졌다.
초당(初唐)에서 성당(盛唐)기에는 중국의 지배가 회복되었는데, 781~850년은 티베트가 점거하였고, 851년에 장의조張議潮가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가 되어 하서 일대를 지배하였다.
주변 지역에는 위구르, 티베트가 할거하였고, 900년경 절도사가 된 조씨曹氏는 돈황 오아시스만을 차지하는 소국을 건설하였으며, 위구르 왕이나 우진 국왕과 통혼 연합하여 중국과 교통하였다.
막고굴莫高窟의 대형 석굴이나 안서 유림굴, 그리고 장경동에서 발견된 고사본 중 많은 것이 이 시기의 것이다.
그 후 10세기 중반부터 탕구트족이 건국한 서하西河의 영토가 되고, 결국에는 몽골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명대(明代) 초기에 일시 회복되었는데, 15세기 초에 명明이 가욕관嘉峪關 서쪽지방을 포기하여 몽골족의 유목지가 되었고, 청대(淸代)에 이르러 다시 한인이 들어와 현성縣城을 세웠다.
돈황은 당대(唐代)에 이르러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에 의해 치안이 유지되어오다가, 안녹산의 난(755~763)으로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787년에 침공한 토번에게 점령당해, 70년간 토번의 통치를 받았다.
토번 통치하의 돈황은 역사서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지만, 토번의 경제·사회 문서 해석을 통해 당시 돈황의 사적을 추적할 수 있다.
이후 돈황은 장씨와 조씨, 두 귀의군 시대로 접어든다.
돈황의 한인 호족 장의조(張議潮, 799~872)가 848년에 토번을 몰아내고 하서 지역을 당 왕실에 봉납하자,
당조(唐朝)로부터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로 임명받아 4대에 걸쳐 약 70년 가까이 장씨가 돈황을 지배하게 되었다.
장의조는 감숙 돈황 사람으로, 돈황이 이미 토번에게 점령당한 후에 태어났다.
몸소 토번의 잔혹한 통치를 겪었기 때문에 그의 청소년 시절은 더욱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헌종 원화 10년(815), 17세의 장의조는 「무명가 無名歌」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장의조가 처음 사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 때문이었다.
대력 원년(766)에 하서 절도사 양휴명(楊休明)이 양주에서 사주로 주둔지를 옮긴 후부터 한족은 분분히 돈황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사주는 금방 한인들의 하서 지역 집결지가 되어버렸다.
토번이 사주를 점령할 당시에는 사주 백성들이 결연히 투쟁하여 11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사주를 지켜왔다.
사주의 한인들은 모여 살 수 있었고, 당나라의 사상과 문화, 풍속과 민풍 등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기초가 있었기에 장의조가 봉기의 깃발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장의조가 의병을 일으킨 장면은 제156호 석굴의 「장의조통군출행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장의조변문 張議潮變文』(P.2962)에는 대중(大中) 10년에서 11년에 걸친 세 번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다.
914년부터는 조의금(曹議金)이 귀의군 절도사가 되어, 오대와 송에 걸쳐 120년 이상 조씨가 중앙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된 소왕국으로서의 돈황을 다스려오다가, 1036년경 서하(西夏)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돈황은 그 지리적인 환경요인 때문에 중국 본토와는 정치, 경제, 문화에 있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귀의군 시대의 돈황은 당 왕실의 보호와 인정을 받으며 서북 민족 중에서 정통한 지위를 수립하였으니, 돈황의 문화는 특히 불교를 중심으로 공전의 번영을 맞게 된다.
막고굴의 석굴사원도 당대에 지어진 것들이 많은데, 이 시기에 지어진 석굴사원 내의 불상과 벽화는 모두 중국풍이다.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가 당대에 이르러 중국에 맞게 변형되어 표현된 것이다.
서하는 200여 년간 돈황을 통치하며 서장어(西藏語)와 한어(漢語)로 된 불경을 서하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는데, 이로 인해 불교문화가 대체로 보호받을 수 있었고 석굴사원도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1227년 서하가 칭기즈칸에게 멸망한 후 서북쪽에 대한 중국 본토의 세력이 미약해짐에 따라 해상 실크로드가 육로를 대신하게 되었고, 동서무역의 중심점이라는 지위가 사라진 돈황은 역사상의 중요한 위치와 특수한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후 돈황은 1280년에 원으로 편입되었으나, 명대는 가욕관(嘉峪關)까지만 통치권에 두고 다른 노선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왕래함으로써, 돈황은 변방의 황량한 사막으로 남게 되었다.
청조가 건립되어 중원지방에 발을 들여놓은 후, 강희제는 군사를 일으켜 서쪽 지방을 정벌하면서 가욕관 밖의 지역을 경영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의 안서·옥문 일대에 적금(赤金)과 정역(靖逆)의 두 위(衛)를 설치하였다.
1723년에 옹정제가 다시 사주소(沙州所)를 설치하였으며, 사주소는 1725년에 사주위(沙州衛)로 격상되었다.
이 사주위의 본래 성이 당하(黨河) 강물에 침식되어 동쪽 벽이 붕괴되자,
당하 동쪽에 다시 성을 건립한 것이 지금의 현성(縣城)이다.
건륭 25년(1760)에 사주위는 돈황현으로 바뀌었으며, 안숙도(安肅道)에 예속되었다.
청 왕조는 옹정에서 건륭에 이르기까지 이민, 둔전, 황무지 개간 등의 조치를 취하여 돈황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였으며, 사회경제 또한 점차적으로 회복되었다.
이 시기의 막고굴은 돈황 예술의 '사라지기 직전의 빛'으로 이미 황혼에 가까워졌다.
이후 벽 속에서 잠자던 돈황 관련 문서들이 1900년의 어느 날 왕원록(王圓籙) 도사에 의해 발견되어 비로소 세계 각국에 공개됨으로써, '돈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탄생되었다.
돈황문학. 敦煌文學.
돈황(敦煌)은 중국 서북 지역의 사막 가운데에 있는 녹지대로, 한 무제 이후 점차적으로 발전하기 시작, 중서 문화의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돈황과 서역과의 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상업 경제가 날이 갈수록 번창하였고 문화의 교류도 빈번해져 갔다.
서한 말년 불교가 인도에서 돈황으로 들어온 뒤 전국에 퍼진 이후 돈황은 문화 교류의 중심지인 동시에 불교의 성지로 변해 갔다.
전진(前秦) 건원(建元) 2년(서기 366)부터는 이 곳에 석굴을 조영하고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돈황의 막고굴(莫高窟), 속칭 천불동(千佛洞)이다.
막고굴은 북위 때 번창하여 당대에는 1,000개 이상이나 되었으나, 현재는 북위 22개, 수 90개, 당 206개, 오대 32개, 북송 103개, 서하 3개, 원 8개, 청 5개 등 469개 석굴이 남아 있다.
송 경우(景祐) 2년(1035) 서하의 이원호(李元昊)가 돈황을 침략했을 때, 당시 사묘의 승려들은 피난하면서 가져가기 힘든 불상, 경서, 그림, 문서 및 잡다한 것들을 동굴 석실에 넣고 봉하였다.
석실 밖으로는 담을 쌓고 흙벽으로 도장한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려 은폐, 약간의 외적 손상이 있다고 해도 발견할 수 없도록 했다.
그 후, 전쟁은 끝났으나 승려들이 돌아오지 못해, 희세의 문물들은 어두운 석실에서 약 900년 동안 잠들게 되었다.
청 광서(光緖) 26년(1900) 이들 장서와 문물들은 수도승 왕도사(王道士)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장경동(藏經洞, 제17굴)이다.
돈황의 문물들은 펠리오(Pelliot, Paul), 헝가리의 슈타인(Stein, Aurel : 1862~1943), 일본인 다치바나 미즈오키와 요시카와 고이치로, 그리고 러시아, 미국인 등에 의해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되었다.
돈황에서 발견된 장서는 모두 3만여 권으로, 그중 절대다수는 필사본이고, 극히 일부분만 목각본이다.
돈황 장서의 종류는 불경, 도경(道經)을 비롯하여 경(經), 사(史), 자(子), 집(集), 시, 사(詞), 곡, 부, 통속 문학, 도경(圖經), 방지(方志), 의약, 역서(曆書) 등 다양하다.
돈황 문학은 돈황학 가운데 가장 핵심 부분으로, 대부분이 민간 문학이었다.
이것들은 소박한 필치로 쓰여진 서민 문학 작품들로서, 중국 정통의 귀족 문학과는 다른 서민적 풍모를 지녔는데, 중요한 것은 가사, 변문, 시가, 화본 소설, 속부(俗賦) 등이다.
장경동.
전실이 10×3m, 연도가 폭 3m, 본실이 10×10m의 규모로 돈황 석굴 중에서는 대형에 속하는데, 본실의 중앙에는 높이가 3m나 되는 거대한 소조상이 봉안되어 있고 벽면과 천장도 온통 벽화들로 가득하다.
그 석굴 속에서 약 5만여 권의 경전과 유서들이 발견되어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각국의 위대한 탐험가(약탈자)를 탄생시켰으며, 이로 인해 세계적으로 새로운 학문인 '돈황학'이 만들어졌다.
장경동이 발견된 경위는 매우 극적이었다. 1900년(청 말 광서 26), 호북성 출신 도사 왕원록(王圓籙, 1849~1931)이 이곳에 찾아와 그동안 돌보지 않아 흙모래에 묻혀있는 석굴을 보고 이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왕원록 도사가 굴을 보수하려고 굴 한쪽에 쌓여 있던 모래를 쓸어냈는데, 그때 굴 입구 변 한쪽의 벽화가 그려진 벽에 금이 하나 생겼고, 이 벌어진 틈으로 막대기 같은 것을 찔러 넣으니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도사는 흙으로 봉해진 작은 문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작은 문을 열어보니 안에 한 칸의 석실이 또 있었는데, 겨우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고 한다.
장경동의 1900년 발견설은 현재 학계에서 공인된 것으로, 『중수천불동삼층루공덕비기 重修千佛洞三層樓功德碑記』에 자세한 경위가 나와 있다.
광서 32년(1906)에 세워진 이 비는 나무로 음각하여 삼층 건물 아래 동굴에 새겨졌으나, 지금은 제16호굴 남쪽 벽의 가운데 길에 있다.
비의 높이는 230㎝, 너비는 89㎝이다.
『공덕비기』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이 비석에 기록된 '경자년 초여름(庚子孟夏) 발견설'은 왕도사의 입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는데, 왕도사가 일찍이 스스로 삼층 건물을 짓는 일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믿을 만한 설이다.
'1900년 발견설'은 왕도사의 『최모경관초책 催募經款草冊』(『왕도사천소 王道士荐疏』라고도 함)의 도판에도 나와 있다.
이 이야기는 담홍색 종이에 먹물로 기록되었는데, 현재 돈황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초책 草冊』은 왕도사의 이름으로 쓰인 것으로, 예산 집행을 독촉하기 위해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그는 『초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초책』은 장경동의 발견시기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1900년 5월 26일에 발견되었다고 하여 '경자년 초여름 발견설'과 들어맞는다.
펠리오와 스타인 두 사람이 불경 만권을 '청'해간 일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일은 1908년이 얼마 지나서 쓰인 것으로, 마땅히 믿을 만하다고 하겠다.
왕도사는 이렇게 발견된 자료가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현장(縣長)에게 보고하였고, 현장은 감숙성의 지방관인 섭창치(葉昌熾)에게 보고하였다.
섭창치는 권자사본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 모두를 난주로 옮겨 보관하려고 하였으나,
감숙 총독이 수천 냥의 운임(運賃)비 지출을 거부하여 석굴 안에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1904년 3월, 돈황현의 왕종한(汪宗澣) 지사는 왕도사에게 고서들을 전부 점검하여 동굴을 그대로 다시 봉해두라고 명했다.
왕도사는 벽돌로 이 보고의 입구를 다시 봉해버렸는데, 법적으로 말하자면 그때부터 이 문물은 이미 중국 정부의 재산으로 왕도사에게는 팔아넘길 권리가 없었다.
왕도사는 이 고서의 가치를 알아내고자 약간의 경권(經卷)을 가지고 주천(酒泉)으로 나가, 당시 안숙도(安肅道) 도지사인 만주 사람 정동(廷棟)에게 보고했다.
정동 역시 중국 고전에 대한 지식이 없어 무관심했으며, 글자를 읽을 줄 몰랐던 왕도사는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자료인지 알 수 없었다.
왕도사가 돈황 고서의 가치를 알아내고자 이곳저곳을 다니며 감정을 의뢰하는 동안, 이 고서 발굴의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갔다.
장경동은 언제, 누가, 왜 만들었을까? 홍변이란 사람은 정사(正史)에는 별로 기재되지 않았으나, 『오승통비 吳僧統碑』(P.4640)와 기타 관련 자료들에 근거하여 그의 생애를 대략 살펴볼 수 있다.
홍변(洪辯~862)의 속성은 오(吳), 즉 오화상(吳和尙)·오승통(吳僧統)이다. 본적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결코 돈황의 구족(舊族)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 오서지(吳緖芝)는 일찍이 건강(建康)의 군사(軍使)를 지냈는데, 후에 감(甘)·숙(肅) 두 주 사이에서 수군(戍軍)을 지내기도 했다. 토번이 양주를 점령한 후에는 하서 절도사 양휴명(楊休明)이 사주로 진(鎭)을 옮겨오고, 당 대종 대력 원년(766)에는 건강군수(建康軍戍)가 사주로 발령되었다.
오서지와 그의 아들도 군대를 따라 돈황으로 이주하였다. 당 덕종 건중 2년(781)에 토번이 사주를 점령하자, 오서지는 은거하여 공문(公門)을 밟지 않고 팔을 굽혀 인(仁)에 처하며, 토번의 관직을 거절하였다. 홍변의 큰형 도(滔)는 일찍 죽었고 둘째 형 계련(季連)은 일찍이 '시태자가령(試太子家令)'을 지냈는데, 후에 관직에서 물러나 독실한 불교신도가 되었다.
홍변은 어려서 출가하여 불법을 잘 지키고 불사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한경(漢經)과 범전(梵典)을 공부했으며, 이민족의 언어와 티베트어를 익혀 뛰어난 역경승이 되었다. 이에 토번의 찬보(贊普)는 그를 십수 년간 역장사원(譯場寺院)의 귀족자제학교에서 문화교육과 기타 종교적인 사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홍변의 마음은 비록 불가에 깃들어 있었으나 끝까지 아버지의 무거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토번에 대항한 돈황인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장의조가 대중 연간에 거사한 후 제자 오진(悟眞)을 파견하여 장의조가 파견한 입조사를 따라 장안으로 가게 했다.
당 선종은 그가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운 미덕을 겸비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대중 5년(851) 칙명으로 홍변을 '하서석문도승통지사주승정법률삼학교주(河西釋門都僧統知沙州僧政法律三學敎主)'로 제수하였다. 그리고 자의(紫衣)와 여러 가지 신물(信物)을 하사하였는데, 그 총애가 남달랐다. 도승통은 모든 승려의 통령이란 뜻이다.
당 의종 함통 3년(862)에 홍변은 발을 내던지고 사주로 옮겨왔다. 홍변이 세상을 떠난 후, 문하의 승려들과 오성의 본가에서 사묘(寺廟)의 '늠실(廩室, 양식을 보관하던 곳)'을 홍변의 기념사당으로 바꾸었다. 이곳이 지금의 편목 번호 제17호굴, 즉 장경동이다.
홍변의 기념사당이 되면서 이곳에서는 자연히 홍변의 모습이 조각으로 새겨졌다. 어깨에 가사를 두른 홍변은 의연하고 자신감에 넘치며 단정하고 신중하다. 그리고 북쪽 벽 가운데에는 오동나무 가지와 잎이 서로 맞붙은 보리수 두 그루를 그려놓았는데, 동쪽 나뭇가지에는 정수병(淨水甁)이, 서쪽 나뭇가지에는 자루가 걸려 있다. 나무의 동쪽에는 비구니 한 명이 그려져 있는데, 가사를 입고 양손에는 두 마리의 봉황이 그려져 있는 둥근 부채 두 자루를 받쳐 들고 있다.
그리고 나무의 서쪽에는 막대기를 잡고 있는 시녀가 그려져 있다. 벽화에 나타난 물건과 인물들은 모두 승려의 생활이나 승려를 모시는 일과 관계가 있다. 홍변상은 나무 두 그루의 사이에 앉아있어, 마치 나무 밑의 미녀와 비구상이 홍변을 향해 협시(夾侍)하며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곧 완성된 삼존구조를 보여준다. 미녀와 비구는 공양자와 시자상이지만, 각 나무에 걸려 있는 현대식 가방과 우리나라 청자정병과 흡사한 정병은 좌우대칭적인 구도로 멋들어진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서쪽 벽의 감실 깊숙이에는 석비가 하나 새겨져 있는데, 바로 높이 1.5m, 넓이 70㎝의 『홍변고신칙첩비 洪辯告身敕牒碑』다. 1900년에 장경동을 발견했을 때 이 비석은 굴 안에 있었는데, 스타인과 펠리오가 경을 훔쳐갈 때에도 여전히 이 굴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 비는 왕도사에 의해 제16호굴의 복도 남쪽 벽으로 옮겨졌고, 1964년에 돈황문물연구소에서 다시 이 비석을 장경동으로 옮겨 감실의 원래 위치에 놓았다.
장경동의 홍변상은 홍변과 관련된 생활모습을 벽화로 그려놓고 고신비들을 새겼으니, '모범을 드러내어 제사를 받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비문 앞에 특별히 주석을 달아 '당가고신의본휴석(當家告身依本鑴石)'과 '조서본(詔書本)'이라고 밝혀놓았는데, 당조가 홍변을 중시하고 칭찬하여 포상한 것을 드러내며 "천년만년 동안 썩지도 무너지지도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여 영원을 기원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곳은 경전 한 권 없는 텅 빈 방에 불과하다.
다채로운 돈황 채색소조.
북위 효문제(孝文帝)가 정치제도를 개혁하기 전인 막고굴 초기의 소상은 인물의 얼굴이 대부분 둥글거나 풍만하며 조금 길고, 콧마루는 높이 솟아 이마 가장자리에 이르렀고, 눈썹은 길고 눈은 튀어나왔으며, 어깨는 넓고 가슴은 평평했다. 불상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거나 어깨에 두르는 붉은 승려복을 입고 있는데, 옷에는 촘촘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사람들에게 얇은 비단이 투명하게 비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제259호 굴에 있는 북위 시기의 좌불(坐佛)이 그 좋은 예이다.
예술의 전체적인 풍격에서 보면 이 시기의 소상은 자태가 건강하며 아름답고, 표정이 엄숙하며 색채가 명쾌하고, 조형이 웅장하고, 수법이 간결하며 소박하여 중원 지방의 전통적인 조각예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서역 불교예술의 아름다운 풍채도 엿볼 수 있다.
서위 때부터 채색소조의 주요한 형상은 갸름한 얼굴과 성긴 눈썹, 맑은 눈, 날씬한 몸매, 작은 눈, 얇은 입술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서위의 제285호굴에 있는 선승(禪僧)은 이런 형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수대의 채색소조는 동방인의 표준체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머리가 크고 체격이 웅장하며 하체가 굵고 짧은, 대형 채색소조로 만들어진 새로운 조형도 출현했다. 일부 소상은 높이가 4~5m에 달하는데, 동굴 높이와 인신 거리의 제한 때문에 작자는 일부러 머리 부분과 상체의 비중을 높이고 위에서 아래로 경사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땅에 엎드려 부처를 알현하는 사람들이 부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장엄하고 엄숙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종교적인 분위기를 짙게 하고 대형 조각품의 표현력을 강조했다. 천왕, 역사(力士)의 조각상은 머리 크기가 곡식을 담는 되와 같고, 몸체와 두 팔은 생리적인 한계를 벗어나 과장되었지만, 그 위풍과 용맹한 기세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제407호굴은 수나라 때 동굴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소상 28점이 있다.
당대의 채색소조는 그 규모나 수량, 제재의 범위와 예술적인 성과에 있어서 모두 전례가 없던 것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두 점의 큰 불상인데, 바로 북대상(北大像) 제96호굴과 남대상(南大像)이다.
돈황의 대형 소상의 출현은 당 전기의 정치·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측천무후가 황위를 탈취한 후,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바꾸기 위하여 의법랑(意法朗)과 설회의(薛懷義) 등 10명의 승려에게 '성대한 황제의 명을 받드는 사업'으로 재초(載初) 원년(689)에 『대운경소 大雲經疏』를 짓게 하였다.
여기에는 미륵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여자의 몸으로 변했다는 뜻의 "염부(閻浮)를 틀어쥐고"나 "왕사(王嗣)를 계승하고" "왕토(王土)를 담당하고" "여왕이 정통을 계승하니, 위엄이 천하에 드리운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곧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측천무후는 『대운경』을 받은 후, 진귀한 보물을 얻은 것처럼 전국에 영令을 내렸다. 여러 주에 각각 대운사(大雲寺)를 짓게 하고, 아울러 『대운경』을 전국의 절에 각 한 권씩 소장시켜 높은 자리에 올라 강설할 것을 반포한 동시에 당(唐)을 주(周)로 개칭하였다.
돈황 북대상은 측천무후의 불교에 아첨하는 일련의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당 함통 6년(865) 정월 15일에 쓴 『막고굴기 莫高窟記』(P.3720)에는 "연재 2년에 이르러 선사(禪師) 영은(靈隱)은 거사 음조(陰祖) 등과 함께 북대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140척이다."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이 굴이 바로 돈황 필사본 중 나오는 '대운사'일 것이다. 북대불전은 막고굴의 상징과도 같은 9층 누각으로, 그 내부에는 33m 높이의 미륵불(북대상)이 있다.
북대상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석불인 낙산대불과 비교해 볼 때, 규모로는 뒤지지만 예술성은 훨씬 뛰어나다. 낙산대불은 우뚝 솟아 있어 기세가 웅장하며 큰 윤곽의 형식미가 뛰어나지만 원형을 갖추고 있을 뿐임에 반해, 돈황 북대상은 형상이 진실하고 정제되게 빚어져 있어서 사실적이면서도 화려한 풍격이 두드러진다. 소상의 면모로 보자면,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고 규모도 가장 큰 걸작인 것이다.
이러한 북대상과 함께 남대상(南大像)도 있다. 『막고굴기』에는 "개원 연간에 승려 처언(處諺)과 마을 사람 마사충(馬思忠) 등이 남대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120척이다."라고 쓰여 있다. 바로 제130호굴 내부에 있는 26m 높이의 미륵불(남대상)을 말하는 것이다. 오른손이 나중에 더해진 것 외에는 기본적으로 원형이 보존되어 있고 비례도 적당하며, 건장한 체구에 곡선의 눈썹과 풍만한 턱, 신비스런 모습과 장중함 등이 성당의 풍격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열반상(涅槃像)은 당대에서 규모가 가장 큰 군상(群像)이다. 이태빈(李太賓)이 대력 11년(776)에 세운 제148호굴의 열반상은 길이가 16m에 달하며 오른쪽으로 누워있는데, 부처를 둘러싸고 있는 '72명의 제자' 중에는 보살과 천룡팔부, 십대제자와 각국의 신도들이 있다. 제158호굴에 있는 토번 시기의 열반상은 제148호굴에 있는 것과 크기가 비슷하여 길이가 15m에 달하지만, 주위의 신도들은 모두 벽화에 그려져 있다. 이 열반상은 조형이 단정하고 잠자는 자태가 평온하여 죽음을 맞이한 고통이나 세상에 대한 미련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잠자는 미인의 자태와 흡사하다.
당대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다. 돈황 채색소조에도 소수의 고승들의 초상이 있는데, 제17호굴인 장경동(藏經洞)에 있는 홍변은 막고굴에 현존하는 여러 고승들의 초상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 얼굴이 속인과 같으며 신채가 늠름한데, 이는 채색소조 초상예술의 걸작이다. 작자는 함축적인 눈빛과 꽉 다문 입술, 얼굴에 있는 가느다란 주름으로 이 고승의 깊은 내면세계를 그리고 있다.
폐쇄의 수수께끼.
일부에서는 막고굴 승려들이 송 초 서하의 난을 피해 이 굴의 한 석실에 그들의 불경, 불상, 그림과 여러 문서들을 쌓아 넣고, 석실 밖에 담을 쌓아 흙을 바른 후 벽화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봉해진 석실이 완전히 은폐되어 9백년간 세상과 격리되었다는 것이다.
최초로 장경동이 폐쇄된 시간과 원인을 논한 사람인 펠리오는, 『돈황석실방서기 敦煌石室訪書記』1)에서 장경동의 권본(卷本)에 제(題)한 연도를 보면, 그 최후의 것이 송초 태평(太平) 흥국(興國) 연간(976~983)부터 지도(至道) 연간(995~997)까지라고 하며, 동굴 전체의 권본은 서하문자로 쓰인 것이 없으니, 동굴이 폐쇄된 것은 필히 11세기 전반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제16호굴 용도의 벽화가 서하가 지배하던 시기의 양식인 것으로 미루어 제기된 또 다른 피난설도 있다. 이는 10세기 말 카슈가르에서 일어난 이슬람을 믿는 카라한 왕조가 서역 남도에 있던 호탄을 점령한 후 불교유적을 모조리 파괴했는데, 그 후 돈황을 지배하고 있던 서하까지 공격하려 하자, 당시 불교를 믿고 있던 서하가 불서를 장경동에 넣고 봉했다는 설이다.
앞의 두 가지 '피난설'이 사실은 그럴듯하게 꾸며낸 학설이라고 하여, 또 다른 의견인 '폐기설'이 나오게 되었다. 이는 "이 문서들은 당시의 돈황 승려들에게 있어서 이미 실용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폐기된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즉, 사경(寫經)을 하다가 실수로 잘못 쓴 경전이나 닳아서 더 이상 보기가 어려운 경전, 그리고 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서 중 비교적 수준이 낮은 것이나 필요 없는 문서를 폐기처분하면서 이것들을 따로 모아둘 창고가 필요했는데, 막고굴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석굴을 폐기물 창고로 이용하였고, 그곳이 바로 장경동이라는 것이다.
장경동이 봉쇄될 무렵, 돈황은 이미 『대장경』과 『대반야경』 등을 완비하고 있었다. 장경동 내에는 피난과 관련이 있다면 응당 소중히 보관되었어야 할 진귀한 물품들은 하나도 없으며, 대부분이 잔권 단편들이고, 의위경(疑僞經)이 적지 않으며, 심지어 잘못 베껴 버려진 두루마리와 먹을 덕지덕지 칠한 잡다한 글씨의 문서들과 기한이 지난 계약서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서고개조설'이 있다. 대략 서기 1000년쯤 절엽식(折葉式) 간행본 경전 두루마리들이 이미 중원으로부터 돈황에 전해졌고, 이로 인해 반드시 장서실의 위치를 바꿔야 했는데, 이 때문에 사용하기에 불편해진 두루마리식의 불경들과 많은 양의 잡다한 물건들을 한꺼번에 석굴 안으로 넣어 봉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직까지는 장경동이 폐쇄된 시기와 그 원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외의 학자들은 각종 방증자료에 근거한 다양한 가설을 제기하여 천고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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