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원제의 궁녀.
남군(南郡) 자귀(秭歸) 사람으로 이름은 장(嬙)이고, 자는 소군(昭君)이다.
진(晉)나라 황제 사마소(司馬昭)의 이름인 ‘소’자를 피하여(이를 피휘避諱라 한다.
제왕이나 아버지의 이름 글자를 피하는 것을 말한다.) 명비(明妃)라고도 일컬어진다.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녀(宮女)이다.
남흉노(南匈奴) 선우(單於) 호한야(呼韓邪)에게 시집가서 ‘영호알씨(寧胡閼氏)’로 책봉되었다.
진(晉)나라 황제 사마소의 이름에 ‘소’자를 피하여 명군(明君), 명비(明妃)라고도 일컬어진다.
한나라 원제 때의 궁녀이다.
전승에 따르면 화공(畫工, 화가)인 모연수가 자기에게 재물을 바치고 아부하는 궁녀들의 모습만 아름답게 그려서 황제에게 올렸는데, 왕소군은 뛰어난 용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입궁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황제에게 간택되지 못했다고 한다.
흉노로 시집가다
원제 경녕(竟寧) 원년(BC.33)에 흉노의 왕 호한야(呼韓邪)가 한나라와 혼인 화친을 청하자, 한나라에서는 왕소군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는데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가는 날 원제가 왕소군의 용모를 처음 보고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는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 싫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라 돌이킬 수가 없었다.
후에 원제는 크게 노하여 모연수를 죽이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흉노로 시집간 왕소군은 영호알씨 로 봉해졌고, 아들인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는 뒤에 우일축왕(右日逐王)이 되었다.
호한야가 죽은 후 그녀는 한나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한 성제(成帝)는 흉노의 풍습을 따르라고 거절했다.
왕이 죽으면 그 본처의 자식이자 다음 후계자가 될 이와 결혼해야 한다는 흉노의 풍습에 따라 왕소군은 호한야의 배다른 아들인 복주루약제(復株累若鞮) 왕과 결혼하여 다시 딸 둘을 낳았다.
왕소군은 죽은 후 지금의 내몽골자치구의 호화호특(呼和浩特) 남쪽에 묻혔으며 무덤 이름은 청총(青冢)이라 불린다.
후세의 문학작품
후세에 그녀의 기구한 운명을 기리는 문학작품과 연속극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대표적인 시로 두보의 <영회고적오수(詠懷古蹟五首)>, 이방원(李芳園)의 <새상곡(塞上曲)>, 백거이의 <왕소군> 2수, 상관의의 <왕소군>, 왕안석의 <명비곡(明妃曲)>, 희극 작품으로 마치원의 잡극인 『한궁추』, 조우의 『왕소군』, 그 외 작품으로 전백찬의 <유소군묘(遊昭君墓)>, 가천원(賈天源)의 <소군지(昭君志)> 등이 있다.
중국 4대 미녀
왕소군은 중국 4대 미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나머지 세 사람은,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녀로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보내져 오나라의 국정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결국 오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서시,
『삼국지』에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미인계에 이용된 초선, 당나라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오빠 양국충과 함께 당나라 국정을 어지럽히고 결국 안록산의 난을 초래하는 데 영향을 미친 양귀비이다.
이들 네 미인은 각각 별명을 갖고 있었다.
서시는 그녀의 미모를 보면 물속의 물고기조차 넋을 놓고 바닥에 가라앉았다고 해서 ‘침어(沈魚, 물고기도 가라앉힌다)’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왕소군은 날아가는 기러기가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낙안(落雁, 기러기도 떨어뜨린다)’이란 별명을 얻었다.
초선은 달도 그녀의 미모에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고 해서 ‘폐월(閉月, 달이 숨는다)’이란 별칭으로 불렸다.
양귀비는 그녀가 나타나면 아름다운 꽃들도 그녀의 미모에 부끄러워했다고 해서 ‘수화(羞花, 꽃들을 부끄럽게 만들다)’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들 4대 미녀의 별칭을 모아 ‘침어낙안(浸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라는 대구를 만들기도 했다.
- 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후궁이었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보내졌다.
-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하였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鴈漢宮秋雜劇:漢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唐)나라 이후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화되고 윤색되어 전해져, 서경잡기(西京雜记)에 따르면 원제는 화공들에게 궁녀를 그리도록 명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불러들였다.
궁녀들은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으나,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졌고, 원제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왕소군을 호한야(呼韩邪)에게 보내기로 결정한 후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알고 나서 매우 안타까워했으나, 외국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어 그녀를 보내고는 화공들을 죽였다고 한다.
후한서(后汉书) 금조(琴操)에는 왕소군이 몇 년 동안 황제의 관심을 받지 못하여 자진해서 흉노의 왕에게 시집갔으며, 그녀가 호한야의 아들에게 재가하게 되었을 때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야기는 후세에 널리 전해졌으며, 많은 문학작품에서도 다루어져, 진(晉)의 석숭(石崇)이 작사ㆍ작곡하여 기녀에게 부르게 했다는 왕명군사(王明君辞)는 매우 유명하며,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을 비롯해 당대의 시인들도 이 이야기를 즐겨 썼으며 원ㆍ명대에는 희곡으로도 각색되었는데, 원대 마치원(马致遠)의 희곡 한궁추(汉宮秋)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왕소군원가. 王昭君怨歌.
조선시대 작자 미상의 가사.
구성 & 형식
총 140구. 『정선조선가곡(精選朝鮮歌曲)』·『교주가곡집(校註歌曲集)』에 수록되어 전한다.
한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녀인 절세미녀 왕소군(王昭君)의 고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내용 & 평가
내용은, 원제는 자신의 시중을 들 궁녀를 취택할 때 언제나 화공을 시켜 궁녀들의 초상을 그리게 한 뒤 그 초상화를 보고 취택 여부를 정하였다.
이에 다른 궁녀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어서 얼굴을 예쁘게 그리도록 하였으나, 왕소군만은 그러지 않아서 추한 얼굴로 그려져서 천자에게 바쳐졌다.
뒤에 흉노(匈奴)가 미녀를 구하므로 추녀로 그려진 왕소군을 뽑아서 보내게 되었다.
왕소군은 슬프고 원통하여 말 위에서 비파를 뜯으며 원한을 노래불렀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선조선가곡(精選朝鮮歌曲)≫ · ≪교주가곡집(校註歌曲集)≫에 수록되어 전한다. 가사의 첫부분은 다음과 같다.
「흥진비래(興盡悲來) 고진감래(苦盡甘來)는 전(傳)하는 말 있나니라, 천지조판(天地肇判)한온 후(後)에 숙녀가인(淑女佳人) 몇몇이뇨. 전생(前生)의 무삼 죄(罪)로 절대가인(絶對佳人)되단말까, 한궁녀(漢宮女) 삼천중(三千中)에 제일색(第一色) 내로고나·
흉노 출가
[王昭君-出嫁]
전한(前漢)대 일종의 정략적 혼인을 통한 인적 교류. 『한서(漢書)』 「흉노전」에 의하면 전한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에 흉노의 호한야(呼韓耶) 선우는 세번째로 한에 입조해 후한 예우를 받고 ‘제실(帝室)의 사위가 되어 (한과) 인척관계를 맺고 싶다’고 자청하자 원제는 양가(良家)의 딸인 후궁 왕장(王牆, 자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시집보냈다.
왕소군은 흉노의 안녕을 비는 비(妃)라는 뜻의 ‘영호알씨(寧胡閼氏)’로 불렸는데, 우일축왕(右日逐王)을 낳았고,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계위한 복주류(復株絫) 선우와 재혼하여 2녀를 낳았다.
일설에 왕소군은 미모가 출중해 원제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입궁하였으나, 뇌물을 안 준 탓으로 화공 모연수(毛延壽)가 그녀를 추녀로 그렸다.
그 초상화를 본 원제는 그녀를 한번도 불러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흉노 선우가 취녀(娶女)를 요청하자 추녀라고 생각한 소군을 선뜻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였던 것이다.
앞에 나타난 절세의 여인 소군을 보자 원제는 놀라서 크게 후회를 하였다고 한다.
절망에 빠진 소군은 국경을 흐르는 흑하(黑河)를 건너다가 투신자살까지 하려고 하였다.
당(唐)대의 시인 이백(李白)은 ‘오늘은 한궁(漢宮)의 후궁이었건만, 내일 아침이면 호지(胡地)의 첩이 되나니’라고 그녀의 비운을 개탄하는 시를 남겼다.
후사는 알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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