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 역사 (국외)

장자. 莊子 . 1

728x90

장자. 莊子 . 1

생각해 볼 문제들'

노자』와 『장자』를 실제로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서로 같은 '도가'로 묶는 것이 자연스러울지 생각해 보자.
최근에는 노자와 장자는 서로 구분되는 전통으로서 각각 노학(), 장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송ㆍ명 시대 이후에는 주로 노장이라 부르지만 석로()나 노불()처럼 이단으로서의 도교와 불교 전통을 지칭하는 용어는 자주 보여도 노장()이라고 같이 부르면서 비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장자』는 과연 반유가적 사상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장자』는 역대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공자를 비판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도왔다"는 소식의 평가처럼, 공자를 대변인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학설을 드러낸 경우가 많다. 

사실상 『장자』 철학의 핵심들은 공자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유학자들이 공자를 부를 때 쓰는 무관의 제왕이란 뜻의 소왕()이란 말은 『장자』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이런 점 때문에 『장자』를 막연히 반유가적이라 볼 수는 없는데 북송 이후의 유학자들이 대개 그러하였다.

『장자』는 문학적인 면이 강할까, 아니면 철학적인 면이 강할까?
오늘날 『장자』는 신화, 예술, 철학, 문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구와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어느 한 영역이나 분야의 소유물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이해가 가능한 텍스트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 지식론은 명가()의 궤변이나 전변()의 제물설()의 비판적 섭취에서 성립, 얼마 후에는 세계관과 혼합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은 '도'()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존재론, 우주 생성의 전설을 받아들여 태초의 '혼돈'='도'로부터 세계가 유출하였다고 하는 우주생성론 및 음양 오행설을 채용하여 물()의 생사()를 기()의 집산으로 설명한 자연론 등이 전개되었다. 

『장자』의 새로운 부분에는 위와 같은 생각에 기초하여 무위자연()으로 인민을 통치한다고 주장한 정치 사상도 있다.


'아내가 죽었다. 

남편은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이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기록에 단 한 번 나온다. 

그 남편이란 사람은 다름 아닌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의 그 유명한 철학가 장자였다.

그의 좋은 친구이자 사상가인 혜시()가 장자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을 왔다가 아내의 관 옆에서 두 다리를 쩍 벌리고 땅에 주저앉은 채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혜시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서 "저 사람은 자네와 평생을 살면서 자식을 낳아 기르고 함께 늙어가다가 이렇게 불귀의 객이 되었는데,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대야를 두드리며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라며 따져 물었다. 

장자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니지. 

내 아내가 죽었는데 나라고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것만도 아니라네. 

한 사람으로서 저 여자는 본래 생명도 형체도 심지어는 기()조차 없었다네. 

그뒤 언제부터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점차 한데 섞여 기가 되고 형체가 되고 생명이 되어 생겨난 것이지. 

지금 이 상황은 그저 생명이 죽음으로 변한 것뿐이라네.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과 같다고나 할까. 

그녀는 마치 편히 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네. 

그런데 내가 그 옆에서 엉엉 운다는 것은 생명변화의 이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짓이지. 

그래서 울지 않는다네(이상 『장자』 「외편」의 이른바 '망물우화()' 참조).

장자는 이름이 주(),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 몽종(, 지금의 하남성과 안휘성 경계 지점) 사람이었다. 

대략 기원전 369년에 태어나 기원전 286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맹자(기원전 약 372∼289년)와 동시대 사람이며, 명가()의 대표적 인물인 혜시(기원전 약 370∼310년)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려서는 너무나 가난해 쌀을 꾸어다 끼니를 때우거나 짚신을 꼬아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 일쑤였다. 

평소 옷을 누추하게 입었는데, 언젠가 한번은 위나라 왕을 만나러 갈 때도 더덕더덕 기운 옷을 입고 갈 정도였다.

장자는 사상적으로는 노자를 이어받았다. 

진·한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노·장'이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두 사람의 사상은 같은 궤적을 나타내고 있지만 표현방식이 서로 달랐다. 

노자가 시적인 잠언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반면 장자는 주로 산문형식의 우화로 표현했다. 

장자의 사상은 그 언어가 생기 넘치고 발랄했으며, 유머러스하면서도 많은 은유와 비유를 통해 심오한 사상을 반영했다.

장자 역시 노자처럼 '부러 일삼지 않아도 다스려진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스린다)'는 '무위이치()'를 주장했는데, 『장자』 「외편」 곳곳에 보이는 '무위()'와 관련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장자는 천하를 대할 때는 '무위'로 너그럽게 대해야지 '유위()'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한다.

'무위'로 다스리면 천하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순박한 도덕성을 지킨다. 

세상 사람들이 본성에 따라 순박한 도덕성을 지킨다면 따로 다스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서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요()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즐거웠으며 삶은 평화로웠다. 이 모든 것들은 요 임금이 억지로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걸() 임금이 통치할 때는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려 했으나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근심스럽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편안함과 즐거움을 좇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일부러 그들을 다스리려 한다면 그들은 본성을 잃는 것은 물론 편안함과 즐거움도 잃게 된다. 

나라도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장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무위'가 으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무위'의 평정한 상태로 만드는 데 중점을 두어야지 사람을 다스리는 데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할 때 천하는 관리될 수 있다.

공자(기원전 551∼479년)도 순() 임금은 '무위이치'의 실천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세를 똑바로 남쪽을 향하고 있었을 뿐이다(『논어』 「위령공」)"라고 했다. 

장자는 순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당시를 분석하면서 오늘날 보기에는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비유를 들고 있다.

장자는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하나는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는 부류이고, 또 하나는 일시적인 편안함에 희희낙낙하는 부류이고, 나머지 하나는 몸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다니는 부류가 있다고 분석한다. 

순 임금은 이 중에서도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순 임금을 양고기에, 백성을 개미에 비유하면서 양고기는 개미를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개미는 양고기를 아주 좋아한다고 말한다. 

양고기에서는 개미를 끄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순 임금은 맛 좋은 양고기와 같기 때문에 백성들은 개미가 양고기를 향해 달려들 듯 그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순 임금이 도읍을 세 차례나 옮겼는데 그때마다 백성들이 그를 따른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 임금은 순 임금의 이러한 덕성을 살피고는 그를 개발되지 않은 지방으로 보냈고, 그 지방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번영을 이룩했다. 

순 임금은 늙어 눈귀가 어두워졌는데도 쉴 수가 없었다. 

장자는 순 임금을 '몸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는 순간 까치가 사마귀 뒤를 노리고 있구나." 이 구절은 『장자』에 실린 우화의 한 대목인데, 그 표현이 생동감 넘치는 것은 물론 오묘한 이치를 담고 있다. 

'객관적인 사물의 상호 제약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모략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눈앞의 작은 이익만 보지 말고 후환을 미리 막을 것을 경고하는 우화다(이 우화는 『설원()』 「정간()」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장자』 「외편」 '산목()'에 나오는데 그 줄거리를 한번 살펴보자.

장자가 어느 날 조릉()의 과수원 주변을 산책하다가 머리 위를 맴돌다 멀지 않은 과일 나무에 내려앉은 까치 한 마리를 보고는 활로 그 새를 쏘려 했다. 

이 순간 나뭇가지 위에 사마귀 한 마리가 두 다리를 쳐든 채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기분 좋게 맴맴 거리고 있는 매미를 덮치려는 모습을 발견했다. 

매미는 사마귀가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줄도 모르고 늘어지게 울고 있었다. 

매미를 잡으려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사마귀의 등 뒤에서는 까치가 사마귀를 노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까치는 장자가 활로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이 순간 장자는 깨달았다. "눈앞의 이익과 욕심에만 정신이 팔려 등 뒤에서 다가오는 화근을 잊는 수가 왕왕 있구나. 

다른 사람을 해치려 했다간 자신이 그 해를 입을 수 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장자는 활을 내던지고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과수원 주인이 급히 뛰어가는 장자를 보고는 도둑인 줄 알고 등 뒤에다 마구 욕을 퍼부었다.

장자의 말 속에는 정치·군사·철학 등의 분야와 관련된 모략사상이 적지 않다. 

산문형식에 생동감 넘치는 문체는 심오한 철학사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장자의 사상은 나름대로 한계점도 갖고 있다. 

그의 기본사상은 상대주의로, 만물은 '변화하지 않는 움직임이란 없고,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옮겨가고 있는'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성질과 존재는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은 크고 작은 것이 있고' '모든 것은 태어남과 죽음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식의 객관적 표준을 부정한다. 

 "이것도 바르다 할 수 있고 저것도 바르다 할 수 있으며, 이것도 틀렸다 할 수 있고 저것도 틀렸다 할 수 있다(「내편」)"는 것이다.

그럼에도 장자의 사상에는 틀림없이 적극적인 면이 있다. 

당시 사회를 "쇠붙이 하나를 훔친 자는 죽음을 당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되는(「외편」)" 불합리한 현상을 뼈저리게 그리고 냉철하게 폭로하면서, 통치자에게 협력할 것을 거부했다.

그는 부귀와 이익을 천시했으며 명리를 뒤좇는 사람을 비웃었다. 

이런 그의 사상은 노자 사상과 통하는 점이 많다. 

우리는 '정수는 취하고 필요 없는 것은 버림으로써' 그의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중국 사상사에서 유가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도가는 소극적 인생관을 앞세운다. 

장자는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냉소적이고 허무한 삶을 표방했다. 

소극적이라는 비평은 물론 퇴폐적이라는 비판도 따른다. 

장자의 사상에는 풍요로운 비유와 유머가 있다. 

장자의 모략사상이었다. 

고답적이고 형식에 치우친 유가사상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한 순간 사람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모략가로서 장자의 매력은 바로 이런 '일탈'에 있다고 하겠다. 

그의 일탈은 단순히 일탈에 머무르지 않고 그 추종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어 인간 처세의 중요한 모략으로 자리 잡았다. 

유가 일변도의 편협과 경색에 숨통을 트게 하는 일침()이 곧 장자 모략사상의 진수다.

장자는 이이(노자)와 어떤 관계도 없다. 

장자는 대체로 노자의 학설을 존중했고, 어떤 면에서는 더 극단적이었다. 

노자의 사상은 피하는 것이 나아가는 것이라고 여겼다. 

장자의 사상은 퇴폐적이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합리적이며, 발생하는 모든 일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한다.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해서 그것을 늘려주려 하면 오리는 분명 두려워할 것이다. 

학의 목이 길다 해서 목을 늘려주려 하면 학은 슬퍼할 것이다. 

무릇 긴 것을 억지로 짧게 해서는 안 되며, 짧다고 해서 억지로 길게 해서도 안 된다."

도피조차도 의욕 없이 하는 것이니 그저 구차하더라도 살아가며 어떤 외부 형세에 의해 잘리고 농락을 당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정신승리를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장자는 진지하게 일을 대하는 것을 반대했다.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진실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이 싸워 당신이 나를 이겼다고 해서 당신이 옳은 것인가? 내가 당신을 이겼다 해서 내가 옳은 것인가? 두 사람 모두 옳을 수 있고, 두 사람 모두 틀릴 수 있다.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당신에게 찬성하는 사람이 판단하면 그는 당신을 찬성하는 것일 뿐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를 찬성하는 사람의 판단은 나를 찬성하는 것이지 어찌 공정하다 할 수 있는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의 판단은 우리를 반대하는 것이니 더욱더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옳고 그른 것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시비에 의존할 수 있단 말인가."


각주

명 은 주옥봉(周玉鋒)으로 공산당원이자 철학자이다. 

  • 50년대 이후 대륙 중국에서 철학사 연구를 이끌었다. 
  • 그의 『장자』 연구는 영국의 그레이엄(A. C. Graham)에게 이어져 『장자』의 유파별 이해에 관해 획기적인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사가이자 신리학(新理學)을 통해 나름의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기도 했다. 
  • 현대 신유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철학사 저술은 우리나라에도 거의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중국 철학사가이다.

  • 고대 중국 은(殷)나라의 유명한 현인(賢人)으로 폭군 주(紂)에게 간언하다가 심장을 도려내는 벌을 받고 죽는다. 
  • 공자가 뜻을 굽히지 않은 인물로 꼽은 것으로 유명하다.

  • 식객(食客)으로도 불리며 후원자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 대신 자신의 학문이나 재주로 그에 대해 일정하게 봉사하던 처지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 위진(魏晉) 시대의 인물인 완적(阮籍)ㆍ혜강(嵆康)ㆍ산도(山濤)ㆍ향수(向秀)ㆍ유영(劉伶)ㆍ완함(阮咸)ㆍ왕융(王戎) 7명을 가리킨다. 
  • 이들이 정치계를 떠나 서로 교유하면서 대나무숲에서 술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세상을 조소하면서 기이한 행적을 남겼다고 한다.

  • 위진(魏晉) 시대의 학자로서 『장자』를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는 격한 주장을 담은 「폐장론(廢莊論)」이란 글로 유명하다.

  • 신유학(新儒學)이란 말은 풍우란이 공자ㆍ맹자ㆍ순자로 대표되는 선진(先秦) 시대의 유학과 당송(唐宋) 이후의 유학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신조어이다. 
  • 철학사에서 신유학이란 대개 송명(宋明) 시대의 이학(理學) 사조를 말한다.


'인물. 역사 (국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자. 孔子, Confucius. 1  (0) 2018.02.27
공자 [孔子, Confucius.  (0) 2018.02.27
장자. 莊子.  (0) 2018.02.27
노자. 老子. lǎo zǐ.  (0) 2018.02.26
맹자. 孟子, Mencius.  (0) 2018.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