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왕구천세가(한자 원문) , 卷四十一. 越王句踐世家. King Gōu Jiàn of Yuè.
월왕 윤상(允常, B.C.510~497 재위)의 아들.
B.C.496년에 취리(欈李)에서 오나라 군사와 격돌했을 당시 사형수 300여 명으로 된 결사대를 투입하여 오나라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차례로 목을 찔러 자결하게 하는 전대미문의 계책을 써서 오나라 군사들의 혼을 뺀 뒤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오왕 합려를 사망하게 만들었음.
이 대승리에 만족하여 잠깐 방심한 결과 3년 뒤인 B.C.494년에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가 이끈 대규모의 오나라 군대에게 패배함으로써 망국 직전까지 가는 참담한 패배와 치욕을 당하게 되었음.
이후 날마다 쓸개를 핥으면서 지난날의 치욕을 거듭 상기하고 오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계속 북돋아 보복전을 철저히 준비했음.
그처럼 고군분투한 결과 마침내 20년 뒤인 B.C.473년에 오나라를 멸국(滅國)시켜 원수를 갚고 춘추 후기 국제 질서의 주요 축이었던 오, 월 양국의 항쟁을 완전히 종식시켰음.
문종(文種)과 범려(范蠡) 양 책사의 보필하에 대내적으로도 내정 개혁과 안정에 힘써 월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중원 국가들에게도 월나라의 위명과 영향력을 널리 알렸음.
구천과 오월쟁패>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그 선조가 우(禹)나라의 후예로서 하후(夏后) 제소강(帝少康)의 서자였다.
회계(會稽)에 봉해져 우나라의 제사를 받들었다.
문신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풀을 뽑고 나무를 베는 등 황무지를 개척하여 읍을 만들었다.
그 후 20여 세(世)가 지나 윤상(允常)에 이르렀다.
윤상 때 오왕(吳王) 합려(闔廬)와 싸워 서로 원한을 품고 정벌하게 되었다.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句踐)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월왕이다.
월왕 구천 원년(기원전 496년)에 오왕 합려는 윤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일으켜 월나라를 정벌했다.
월왕 구천은 결사대로 맞서 싸웠는데, 세 줄을 지어 오나라의 진영에 이르러 고함을 지르며 목을 그어 죽었다.
오나라의 군대가 이를 구경하는 사이 월나라가 오나라의 군대를 습격하여 오나라의 군대를 취리(檇李)에서 패배시키는 한편 오왕 합려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혔다.
합려가 죽음을 앞두고 그 아들 부차(夫差)에게 “월나라를 절대 잊지 말아라!”라고 했다.
구천 3년에 구천은 오왕 부차가 밤낮으로 병사를 훈련시켜 월나라에 보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나라가 나서기 전에 월나라이 먼저 오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범려(范蠡)가 “안 됩니다.
신이 듣기에 군대는 흉기이며, 전쟁은 덕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싸움은 모든 일의 맨 마지막입니다.
음모로 덕을 거스르고, 흉기를 즐겨 사용하여 자신의 몸을 보잘 것 없는 곳에다 시험하려는 것은 상제께서 금할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충고했다.
월왕은 “내가 이미 결심했다.”고 하면서 드디어 군대를 일으켰다.
오왕이 이를 듣고는 정예병을 모두 징발하여 월나라를 공격하여 부추(夫椒)에서 패배시켰다.
월왕은 남은 병사 5천을 수습하여 회계산(會稽山)을 거점으로 수비에 들어갔고, 오왕은 추격하여 이곳을 에워쌌다.
월왕은 범려에게 “그대 말을 듣지 않은 까닭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하면 되겠소?”라고 했다.
범려는 “가득 찬 것이 지속되려면 하늘이 도와야 하고, 기운 것을 바로 세우려면 사람이 도와야 하며, 절제할 수 있으려면 땅이 도와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말과 넉넉한 예물을 그 쪽에 보내십시오.
허락하지 않으면 몸이라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구천이 “좋소.”라 하고는 바로 대부 문종(文種)에게 오나라로 가서 일을 성사시키게 했다.
(문종이) 무릎으로 기어 머리를 조아리며 “군왕의 망한 신하 구천이 심부름꾼 신 문종을 보내 여러분들께 ‘구천은 신하가 되고, 처는 첩이 되길 청합니다’라고 감히 아뢰라고 했습니다.”라 했다.
오왕이 이를 허락하려 하자, 오자서(伍子胥)가 오왕에게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게 주시려는데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문종이 돌아와 구천에게 보고하자 구천은 처자식을 죽이고 보물을 불태워, 죽음으로 맞서 싸우려 했다.
문종이 구천을 말리며 “보아 하니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嚭)가 탐욕스러워 이익으로 그를 유혹할 수 있으니, 몰래 가서 이를 알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문종을 시켜 미녀와 보물을 몰래 오나라 태재 백비에게 바쳤다.
백비가 이를 받고는 바로 대부 문종을 오왕에게 보였다.
문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왕께 원하옵건대 구천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의 보물을 다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구천은 그의 처자식을 다 죽이고 보물을 불태운 다음 5천 명을 모두 거두어 죽기로 싸울 것이니 (대왕께서도) 분명 상당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백비가 오왕에게 “월나라가 항복하여 신하가 되었으니 용서하시면 나라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오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오자서가 나서며 “지금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훗날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구천은 현명한 국군이고 문종과 범려는 좋은 신하들입니다.
저들 나라로 돌려보내면 장차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직언했다.
오왕은 듣지 않고 끝내 월나라를 용서하고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갔다.
구천이 회계산에서 포위당했을 때 “내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문종이 “탕(湯)나라는 하대(夏臺)에,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에 갇혔었습니다.
중이(重耳)는 적(翟)나라으로, 소백(小白)은 거(莒)나라로 달아났었습니다.
끝내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상황이) 복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오나라가 월나라를 용서하자,
월왕 구천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는데, 자리에 곰쓸개를 두고서 앉으나 누우나 쓸개를 올려다보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쓸개를 맛보았다.
“네가 회계의 치욕을 잊었는가?”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몸소 농사를 짓고 부인은 옷감을 짰다. 음식에 고기를 더하지 않았고, 옷은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체면을 내려놓고 유능한 인재를 우대하고, 빈객을 후하게 접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죽은 자를 조문하면서 백성들과 수고를 함께 했다.
범려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자 범려는 “군대 일이라면 문종이 범려만 못합니다만 나라를 단단히 어루만지고 백성을 따르게 하는 일이라면 범려가 문종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국정을 대부 문종에게 맡기고 범려와 대부 자계(柘稽)를 보내 담판을 짓고 오나라에 인질로 남게 했다.
2년 뒤 오나라는 범려를 돌려보냈다.
구천이 회계에서 돌아온 지 7년(기원전 487년)만에 군대와 백성을 잘 다독거려서 오나라에 보복하는 데 쓰려고 했다.
대부 봉동(逢同)이 “나라가 얼마 전에 망했다가 이제 조금 넉넉해지려고 합니다.
군비를 정비하고 무기를 가다듬으면 오나라가 두려워 할 것이 뻔하고, 두려워하면 어려움이 닥치기 마련입니다.
무릇 매나 수리가 공격을 하려 할 때는 그 모습을 숨기는 법입니다.
지금 오나라는 제나라, 진(晉)나라에 병력을 더 보내고 있고, 초나라와 월나라는 한이 깊습니다.
명성이 천하에 높지만 실제로는 주나라 왕실에 해가 되고 있습니다.
덕은 적고 공은 많으니 분명 자기 멋대로 교만하게 굴 것입니다.
월나라를 위한 계책으로 말하자면 제나라와 결탁하고,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진(晉)나라에 의지하고, 오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입니다.
오나라의 야심이 커지면 싸움을 우습게 볼 것이 분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도권을 쥐고, 세 나라와 함께 오나라를 정벌하고, 우리 월나라는 오나라의 지친 틈을 이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직간했다.
구천이 “좋소!”라고 했다.
2년이 지나자, 오왕이 제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오자서가 “안 됩니다.
신이 듣기에 구천은 두 가지 이상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백성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 한답니다.
이 자가 죽지 않으면 틀림없이 우리나라의 근심이 됩니다.
오나라에게 월나라는 뱃속의 질병이지만 제나라는 오나라에게 부스럼 정도입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제나라는 놔두시고 월나라를 우선시하십시오.”라고 간언했다.
오왕이 듣지 않고 기어코 제나라를 정벌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를) 패배시키고 고장(高張)과 국하(國夏)를 포로로 잡아 돌아와서는 오자서를 나무랐다.
오자서가 “왕께서는 기뻐할 것 없습니다.”라고 하자 왕이 노했다.
오자서가 자살하려고 하자 왕이 이를 알고는 말렸다.
월나라의 대부 문종은 “신이 보아하니 오왕의 정치가 교만합니다.
시험삼아 양식을 빌려 달라고 하고, 그 일이 어찌 되는 지 예측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식량을 빌려달라고 청하자 오왕은 주려고 하는데, 오자서가 주지 말라고 했다.
오왕이 끝내 빌려주었고, 월나라는 은근히 기뻐했다.
오자서는 “왕이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3년 뒤면 오나라의 땅이 폐허가 되겠구나!”라고 했다.
태재 백비가 이를 듣고는 오자서와 월나라에 대해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면서 오자서를 두고 “오원(오자서)이 보기는 충성스럽지만 실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와 형님도 돌보지 않았는데 어찌 왕을 돌보겠습니까? 왕께서 전에 제나라를 치려고 하셨을 때 오원이 강력하게 말렸지요.
공을 세웠는데도 이 때문에 오히려 왕을 원망했습니다.
왕께서 오원에 대해 대비하지 않으면, 오원은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모함했다.
봉동과 함께 모의하여 왕에게 오자서를 모함했다.
처음에 오왕은 이 말에 동조하지 않고,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가 제나라에 가서 그 아들을 포목(鮑牧)에게 맡겼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왕이 “오원이 정말 과인을 속였구나!”라며 크게 노했다.
(제나라 정벌에서) 돌아와서는 사람을 시켜 오자서에게 촉루검(屬鏤劍)을 주면서 자살하게 했다.
오자서가 크게 웃으며 “내가 네 아비를 패주로 만들었고, 내가 또 너를 세웠다.
네가 처음에 오나라를 반으로 나누어 내게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지금 네가 오히려 모함의 말을 듣고 나를 죽이는구나.
오호라, 오호라! 혼자서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라 하고는 사신에게 “반드시 내 눈알을 파내 오나라 동문에 걸어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오왕은 백비에게 정권을 맡겼다.
3년이 지나자, 구천은 범려를 불러 “오나라가 이미 오자서를 죽였고, 지금 그 주위에는 모두 아부만 일삼는 자들만 있이니 (공격하면) 되겠소?”라고 물었다.
(범려가)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오왕은 북쪽 황지(黃池)에서 제후와 회맹했다.
오나라의 정예병은 왕을 따라 나섰고, 오로지 노약자와 태자만 남아 지키고 있었다.
구천이 범려에게 다시 묻자 범려는 “가능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물에 익숙한 2천명, 훈련을 제대로 받은 4만명, 뜻이 굳센 군자(君子) 6천명, 근위 시종 1천명을 선발하여 오나라를 정벌하여 오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마침내 오나라의 태자를 죽였다.
오나라는 왕에게 급히 알렸다.
오왕은 황지에서 제후들과 회맹 중이었는데 천하가 이 일을 알까 두려워 비밀에 부쳤다.
오왕이 황지 회맹을 마치고는 바로 사람을 보내 후한 예물로 월나라에 강화를 요청했다.
월나라는 아직 오나라를 멸망시킬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헤아려서 오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그 뒤4년 만에 월나라가 다시 오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
오나라의 군사와 백성들은 이미 지친 상태였다.
정예병이 모두 제나라와 진(晉)나라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대파하고 3년 동안 포위했다.
오나라의 군대는 패했고, 월나라는 마침내 고소산(姑蘇山)으로 오왕을 몰아넣었다.
오왕의 사신 대부 공손웅(公孫雄)은 웃통을 벗고 무릎으로 기어서 월왕에게로 다가가 강화를 요청하며 “오갈 데 없는 신 부차가 감히 속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지난 날 회계에서 죄를 지었을 때 이 부차는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고 왕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여 귀국하도록 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몸소 옥체를 움직여 신을 토벌하시니 신은 명을 받들 뿐입니다.
회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지요?”라고 했다.
구천은 차마 모질지 못해 받아들이려 했다.
범려가 “회계의 사건은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 준 것인데 오나라가 취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오나라를 월나라에 주려는 것인데 월나라가 어찌 하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왕께서 아침 일찍 조회를 하고 저녁 늦게 파한 것은 오나라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22년을 계획했는데 하루아침에 버린다니 될 말입니까?
하늘이 주시는 데도 받지 않으면 오히려 그 화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그 본이 멀지 않거늘’라는 (시경의) 구절이 있듯이 왕께서 회계의 재앙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라고 했다.
구천은 “내가 그대의 말을 따르고 싶지만, 사신에게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소이다.”라 했다.
범려는 북을 울려 군대를 진격시키면서 “왕께서 이미 이 일을 내게 맡겼으니 사신을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죄를 받게 될 것이오!”라고 했다.
오나라의 사신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구천이 가엾게 여겨 곧 사람을 보내 오왕에게 “내가 왕을 용동(甬東)으로 보내 100가의 우두머리가 되도록 하겠소.”라고 했다.
오왕이 “내가 이미 늙어서 군왕을 섬길 수 없겠습니다.”라며 사양하고는 드디어 자살했다. 그때 그 얼굴을 가리게 하면서 “내가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라고 했다.
월왕은 바로 오왕을 장사지내고 태재 백비를 죽였다
구천이 오나라를 평정하고 바로 병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회하를 건너 제후 제나라, 진(晉)나라와 서주(徐州)에서 회맹하고 주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주나라 원왕(周元)은 사람을 시켜 구천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내리고 백(伯)에 임명했다.
구천은 철수하여 회하 남쪽을 건너 회하 위쪽 땅을 초나라에 주고, 침탈한 송나라의 땅을 돌려주고, 노나라에게는 사수(泗水) 동쪽 사방 100리 땅을 주었다.
당시 월나라의 군대가 장강과 회하 동쪽을 주름잡으니 제후들이 모두 축하를 드리며 패왕(覇王)이라고 칭했다.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 “날던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감추고, 약은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는 법이오.
월왕은 목은 길고 입은 뾰족하여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오.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소?”라고 했다.
문종이 편지를 보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 문종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중상하자 구천은 문종에게 바로 검을 내리며 “그대가 과인에게 오나라를 정벌할 일곱 개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과인은 그중 세 가지만 사용하여 오나라를 물리쳤다.
나머지 넷은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선왕을 따라가서 그것을 시험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문종이 마침내 자살했다.
구천이 죽자 아들 석여(鼫與)가 왕으로 섰다.
석여가 죽자 아들 불수(不壽)가 왕이 되었다.
불수가 죽자 아들 옹(翁)이, 옹이 죽자 그의 아들 예(翳)가, 예가 죽자 아들 지후(之侯)가, 지후가 죽자 아들 무강(無彊)이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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