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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외)

공자. 孔子, Confuciu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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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孔子, Confucius.


공자의 출현은 중국, 아니 인류의 큰 행운이다. 

키 크고 잘생겼으며, 구수한 목소리에 술 잘 마시고 사람 좋아하는 인간, 솔직담백하고 항상 세상일에 열변을 토하는 사람, 끊임없이 탐구하며 옳은 일에 고집불통인 공자는 참으로 위대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였다. 

독서와 사색을 겸하는 공부 방법, 재능에 따라 달리 가르치는 교수 방법으로 공자는 그 이전 중화문명의 진수들을 집대성하여 유가 및 제자백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공자는 탁월한 언어감각을 지닌 학자이다. 

예를 들어 공자의 어록인 『논어』엔 "군자유()가 되라"고 한다. 

임금의 아들[]이라는 기존 개념에 도덕적 의미부여[]를 함으로써 군자의 뜻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인()이 그렇고, 예()가 그렇고, 그의 철학적 개념이 모두 그렇다. 

그러면서도 그는 "옛사람의 말을 옮겼을 뿐 창조하지 않았다"고 겸손해 한다. 

예를 중시한 주나라에서 큰일을 치르는 의식에 밝은 유들은 예식을 돕는 상례()와 교육활동으로 생계를 꾸려갔는데, 공자는 거기에다 기존의 사상적 유산인 6예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마른 고기 한 묶음만 가져오면 각지에서 찾아온 가난한 자, 강도·건달까지도 가리지 않고 열성으로 가르쳐 그들을 전통문화의 계승자로 만들어냈다. 

참으로 위대한 역사의 기적이다.


그의 관심은 땅 위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는, "아직 사람도 섬길 수 없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논어』 「선진」)고 대답한다. 

사람과 사회를 중요한 인식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개인의 수양과 품덕을 특별히 강조한 도덕주의자였으며, 상식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입장에서 과거의 일에 대해 연구하고 정의하였다. 


삼년상을 치를라치면 산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며 합리적인 항의를 한 재아를 어질지 못한 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식으로 태어나 삼 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기"(「양화」) 때문이라는 인간적인 이유를 단다.

이렇게 전통의 현대적 해석에 성공한 공자는 기존의 『시』 『서』 『예』 『악』 『역』 『춘추』를 재정리했고, 이로써 유가는 경전을 갖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학파가 될 수 있었다. 

고문헌에 대한 선별·편찬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나, 체계적인 이론이 바탕이 되어 줌으로써 오히려 육경의 의미는 더욱 승화되었다. 


『예기』 「경해 」편은 공자의 육경에 대해, "사람됨에 온유하고 돈후하란 것이 『시』의 가르침이다. 

소통하여 멀리 알라는 것이 『서』의 가르침이다. 폭넓고 어진 삶을 살라는 것이 『악』의 가르침이다. 

정밀하고 미묘한 것을 잘 재어 보고 헤아리라는 것이 『역』의 가르침이다. 공손·검약하고, 엄숙·경건하라는 것이 『예』의 가르침이다. 

사건을 잘 비유하여 말을 하라는 것이 『춘추』의 가르침이다"라고 논평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 스승보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도 여럿이었다. 

대다수의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교육에 종사하면서 스승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유복()이라는 독특한 복장을 하며 동질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유'가 한 학파의 칭호가 된 것은 공자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스승의 사상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제자들 사이에 급속히 분파가 생겨났다. 


『순자』 「유효」편은 이들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었고,구체적으로 제자들 이름을 거명해 자궁()을 공자의 정통으로, 자사와 맹자를 정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잡학한 사람으로, 자장()씨의 유는 말만 그럴듯하게 늘어놓은 자들로, 자하()씨의 유는 의관만 정제하고 있는 사람들로, 자유()씨의 유는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로 비판하기도 한다. 


『한비자』 「현학」편엔 "공자가 죽은 뒤 자장의 유, 자사의 유, 안()씨의 유, 맹()씨의 유, 칠조()씨의 유, 중량()씨의 유, 손()씨의 유, 악정()씨의 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는 사실은 유가가 쇠락했다기보다 발전했다는 징표이다.  

이러한 분파 투쟁을 통해 이론적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뉜 초기의 유가 사상가들에겐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된 사상 형식·개념·범주가 있었다. 


정치와 윤리를 일체화시킨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학문과 정치 사이를 오간 유가 사상가들은 

첫째, 선왕 특히 요·순()과 문·무()의 도를 자신들의 깃발로 삼았다. 

둘째, 전통 문화유산이며 공자가 정리한 육예를 모든 교육과 삶의 모범으로 삼았다. 

셋째,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논어』 「안연」)는 가르침에 따라 군신·부자·귀천·상하·친소의 구분이 엄격한 예의를 숭상하였다. 

넷째, 인·의·예·지·충·효·신·애·화·중() 등을 사회생활을 실천하는 데 공통된 기본 개념이자 범주로 삼았다. 

다섯째, 모두가 공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받들었다. 따라서 덕·중용·정명() 등 공자의 주장은 항상 유가의 주된 관심 대상이었다.


불우했던 개인 생애

공자는 춘추 전국시대 즉 고대 노예제도가 차차 봉건제도로 옮아가던 시대에 노나라 추읍(, 지금의 산둥성 취푸())에서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가졌을 때 니구산()에서 백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후일 공자의 이름이 ‘구()’이고 자인 중니()에 ‘니’자가 들어간 것도 기도를 드렸던 니구산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전한다.


공자의 선조는 송나라의 귀족 출신이었으나 송에서 정치적 실패로 노나라로 망명하였다. 

공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귀족 집안의 소사가 되었다가 나중에 노나라의 관리가 되기도 했으나 단기간의 임관에 불과했다.

19세에 결혼을 한 공자는 24세에 어머니 안씨를 잃었고 66세 때 부인이 죽었으며 69세 때는 아들 백어()마저 세상을 떠나는 등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말년도 매우 불우했다. 

그의 제자 안자(안회)가 자기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을 때 통탄하던 공자의 모습(『논어』)을 보면 그가 일찍이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난 후 오늘에 이르러 부모와 아들과 수제자마저 보내는 심정이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그의 조은 원래 송의 귀족이었으나 노()로 망명하였다. 

<맹자>에는 공자가 () 왕가의 후손이라는 서술 있어  때로는 공자를  왕족의 혈통으로 여기기도 하였으나, <사기>에는 이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단지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는 그를 송()의 후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버지의 자는 숙량(), 이름은 흘()이다. 어머니는 안씨()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이다. 

아버지는 ()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을 세운 부장()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는 “나는 십오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이 되어 뜻을 세웠다( )."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하였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에게 중용()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공자는 19세 때인 BC 533년 노나라 계씨의 창고 관리직이 되었다. 

BC 517년 삼환씨의 가에 실패한 소공()과 함께 ()로 갔다. 

에서 관직 등용에 실패한 뒤 노로 되돌아왔다. 

공자는 51세 때인 BC 501년 노의 정공()에게 중용()되었고, 56세 때 대사구()로 재이 되었다. 

노의 정치에 실망하고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해 주유 천하의 길을 나서 위, 조, 송, 정, 진, 채, 초를 방문하였다. 

그 후 공자는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를 계속하며 이실현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는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자들의 교육에 전념한다.

이 무렵 아들 이()와, 고자() 안회() 및 자로()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증삼() 등 뛰어난 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에 통한 문인()이 72명이라고 한다. 

그가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공자는 이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다. 

이는 그의 자나 자의 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 《서경()》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야망을 접고 교육에 전념..

공자는 10여 년 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각처에서 유세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등 자기의 정치적 이상 실현을 도모했으나 그 기대와 희망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68세 때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는 세월을 한탄하며 관직을 단념하고 시, 서(), 역(), 예기(), 춘추()의 육경을 풀이 및 정리하고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문왕무왕주공을 높이 받들어 숭배하고 고대의 사상을 집대성했으며 유가와 가학을 창립했다.

당시에 공자는 ‘하늘이 허락한 거룩한 성인()’, ‘하늘이 세상을 위해 목탁으로 삼으신 분’이라는 영광스런 명칭을 얻었고, 후대에 ‘지성()’, ‘지성선사()’, ‘만세사표()’, ‘문선황제()’, ‘문선왕()’, ‘소왕()’ 등으로 받들어졌다.

그의 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인()을 이상의 도덕이라 하여 효제와 충서를 이상의 근거로 삼았고, 후에 그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록을 기록해 놓은 『논어』 7권이 현재 전해진다.

출현의 시대적 배경

공자가 태어난 춘추시대 사회 실정을 보면 공자의 출현은 시대의 당연한 요청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사회 실정에 대해 『한서』 「화식전()」에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주()나라 왕실이 쇠하여 예법이 무너지고 제후들은 제멋대로 사치하고 방자해졌다. 선비와 서민들은 각기 본분을 지키지 아니하여 농사에 힘쓰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상업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만 많아져 쌀과 곡식이 부족한데 상품은 넘쳐흐른다.


제 환공, 진 문공 이후로는 예의가 크게 무너져 위아래가 없고 나라마다 정치가 제각각이고 집집마다 풍속도 제각각이며, 욕망은 제한이 없고 분에 넘치는 일이 허다하다. 

상인은 구하기 어려운 상품을 마구잡이로 사다 들이고 공인()은 사치스런 기물을 제조하기에 바쁘다. 

선비는 정도에서 벗어난 학설과 유행만 좇은 공부에만 몰두하며, 호사스러운 자들은 헛된 명예를 위하여 진실은 배반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친다. 

폭도라도 나라를 뺏은 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고 왕위를 찬탈한 자는 영웅이 된다.


예의가 군자의 마땅한 도리가 되지 못하고 형벌도 소인을 무섭게 하지 못하여, 부자들은 헛된 우상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개와 말에게도 고기를 먹여 배부르게 하는데 가난한 자들은 떨어진 베옷에 콩잎을 먹고 물만 마실 뿐이다.


군주를 도와주면 비록 그 출신이 노예의 신분이었더라도 사대부와 같이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권모술수를 모르면 배고픔을 면치 못한다.”

맹자는 이러한 공자의 시대를 평가하기를,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희미해져 요망하고 간사한 말들과 폭행이 심하여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세태에 공자가 이를 심히 염려하여 『춘추』를 지었다고 했다.

공자와 유가학파

“유가의 학파는 주()나라 때의 ‘사도()’라는 관직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그 임무이다.

『한서』 「예문지()」는 중국 고대의 여러 학파를 아홉 종류로 분류하여 

1) 유가류 

2) 도가류 

3) 음양가류 

4) 법가류 

5) 명가류 

6) 묵가류 

7) 종횡가류 

8) 잡가류 

9) 농가류 학파의 특징을 논술하였는데, 그 중 유가류()라 한 것은 공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유가학파를 말한다.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음양의 이치를 따르고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임금을 바르게 도와 사회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근본사상은 인()과 의()이며 인의사상이 유교의 경전인 육경을 통하여 구체화된다고 하였다.

역사적 학통을 보면, 요 · 순과 문왕 · 무왕을 본받고 이를 집대성한 공자를 만세의 스승으로 받들고, 유가학파의 도가 모든 학파 중에서 으뜸이며 동양의 모든 학술 · 문화의 사상적 근원으로 그 전통을 이루어온 것이라고 하겠다.”


중국 철학사상사에 있어서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그 전과 후를 획기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서양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가 갖는 위치와 같은 것으로 본다.

공자사상은 도가처럼 자연주의도 아니고 묵가의 공리주의도 아니며, 성실성과 불변함을 지닌 인간가치에 관한 학문이며 인간을 중심으로 파헤친 인생철학이다. 

공자의 사상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인()은 자기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완성까지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본다. 

공자는 인을 도덕실천의 최고 목표로 삼은 것이다.


사상의 핵심 - 인()

유가 사상은 ‘인()’으로 통용되는 공자의 중심사상이다. 

‘인’은 유도()의 근본이며 인류애의 근본사상이다. 

이 ‘인’에 관하여서는 『논어』에만 105자에 달하며 사서에 나타나 있는 ‘인’ 자를 모두 합하면 272자가 된다. 

이로 볼 때 유교에서 얼마나 ‘인’자에 치중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인’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 혼자 존립할 수 없으며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 도와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중용』에서는 “(인자, 인야: 인은 곧 사람이다)”라 하였고, 『맹자』에서는 “ (인야자 인야: 인이라는 것은 사람이다)”라 하였으니, ‘인’은 곧 사람, 다시 말하면 ‘인’은 인간 자체의 성실성 있는 가치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인의 길()’은 곧 ‘사람의 길()’과 서로 통한다.


공자는 ‘인’ 사상에 대해서 뚜렷한 정의를 밝히지 않았고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때와 장소에 따라 인물에 따라 각각 그 답이 달랐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라 했으나 다른 제자의 질문에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서(, 관대함)가 그것”이라 하기도 했고 “집에 있을 때는 공손하고 일을 할 때는 신중하고 남과 사귀는 데는 성실한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공자는 증삼에게 내 도는 한결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제자가 증참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하자 “충서()가 그것”이라 했다. 

이런 말은 자공(단목사)도 하고 있어서 충서야말로 ‘인’일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주관에 따라 어떻게라도 해석이 가능한 반면 그 어느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에 대한 학설들이다. 

이는 공자가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기를 기피했고 사람에 따라 말을 달리 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도 ‘인’의 개념에 대한 규정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 


그 어느 ‘덕()’도 ‘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는 반면, 그 어느 것만으로는 그 내용이 대변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인’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고 선()은 어디에라도 적용되는 반면, 어느 것으로도 포착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논어』 「자로()」편 18장에는 엽공과 공자가 정직에 대해 문답한 것이 나와 있다.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자식이 고발했다는 말을 듣고 공자는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숨기는 것이 정직”이라고 하였다. 

어떤 덕이든 그 형식적인 면에 얽매이면 도리어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니, 공자가 ‘인’의 규정을 회피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은 사랑이다”라는 정의는 애정이 결핍된 사람에게는 교훈이 되겠지만 이 정의로 고정시켜 버리면 적군도 사랑하고 악인도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자가 ‘인’에 대하여 완벽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그때그때 적절히 대응한 것은 저울이 평형을 이루려면 상대의 무게에 따라 추의 무게나 위치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는지,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모르듯 우리 범부중생이 성자철인의 속 깊은 뜻을 어이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공자가 정의를 안 내린 이 ‘인’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간의 최고 선이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겠다 싶다. 

그것이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실천적 윤리임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재관과 교육관

‘유교무류(有敎無類)’ - 평등한 교육을 강조한 공자의 인재론

공자는 춘추시대 후기를 살면서 평생 교육과 학술 활동을 펼친 사상가이자 교육가였다. 

공자의 교육활동은 중국 인재사와 교육사에 있어서 계획적이고 전문화된 대량의 인재창출의 시초를 열었다는 점에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은 상() · 주() 때부터 국가 차원의 교육기관과 체제를 갖추고 귀족과 그 자제들에게 시 · 서 · 예 · 악을 가르쳐 자질을 향상시켰다.


(『순자()』 「왕제()」)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여 실행한 이런 교육은 너무 형식적이라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재를 대량으로 배출할 수는 없었다. 

춘추시대 및 그 이전의 이름난 군주를 비롯하여 장수와 재상 및 기타 인재들 중에 귀족학교에서 배출된 사람은 없었다. 

공자는 교육에 있어서 귀족의 독점을 타파하고 사학()을 창립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최초의 인물이다.


공자는 사학을 창립하여 각계각층의 자제들을 키웠는데, 스스로 ‘가르침에 부류는 없다’는 뜻의 ‘유교무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논어()』 「위령공()」)

그가 길러낸 제자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뛰어난 학생만도 7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학생들 대부분이 노나라 사람이었지만 진() · 정() · 송 · 오 · 초 등에서 온 사람도 있었으며, 맹의자 · 남궁적() 등과 같이 귀족 집안 출신이 있는가 하면 안회 · 증삼 등과 같이 빈곤한 집안 출신도 적지 않았다. 


염옹은 신분이 최하층민이었고, 공야장은 죄인의 몸이었다.

공자의 교육활동은 인재 배양을 독립된 사회활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인재와 관련한 이론 연구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는 인재 발전사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인재관과 관련하여 공자는 애인과 존현을 강조했다. 

그는 “인()이란 곧 사람이므로 어버이를 어버이로 받드는 것이 옳고, 어진 사람을 존경하고 의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라고 했다.(『예기』, 『중용』)


공자의 교육 목적은 어진 선비를 많이 배출하는 데 있었다. 

공자가 가르친 내용으로는 시 · 서 · 예 · 악 · 어() · 사()가 있었는데, 기본 경전과 예악은 물론 말타기와 활쏘기까지 익히게 하여 학생이 보다 전반적인 지식을 습득한 인재들로 커가도록 의도했다. 

공자의 교육방법은 생활 속의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교육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문(, 지식) · 행(, 실천) · 충(, 국가관) · 신(, 신용)을 내세웠다. 

이는 최초의 인재 평가기준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두고 여러 나라를 돌며 책임 있는 자리에서 일을 해보고자 하였으나, 공자가 활동했던 춘추 후기는 약육강식으로 대변되는 전국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당시 각국이 원했던 인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다. 

서주(西) 시대로의 회귀를 갈망했던 공자의 정치사상은 당연히 이런 풍조와 맞지 않았고 현실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공자의 위대한 점은 여기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과 경험을 종합하여 이를 교육과 학술에 재투자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겪었던 불운을 거울삼아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존현()’이란 용인관을 내세운 점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정치적 이상은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교육적 이상은 오늘날까지 살아 현대인의 삶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공자에 재평가

1949년 중화민국이 성립한 이래 공자에 대한 논쟁은 주로 공자의 사상에 나타나는 계급적 속성 문제와 철학적 속성 문제에 집중되었다. 

계급적 속성 문제는 중국 역사시기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 문제와 한데 얽혀 대단히 복잡하게 전개되었는데, 주진(, 주나라와 진나라) 봉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자 사상의 계급적 속성에 대해 대체로 다음 네 가지 견해를 제기한다.

1) 귀족 노예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2) 봉건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3) 노예주 귀족에서 변화한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4) 평민의 이익을 대변한다.


공자의 철학적 속성 문제에 대한 견해 역시 크게 네 가지로 대표된다.

1) 공자는 무신론자이며 그의 천도관()은 유물주의적이다.
2) 공자 사상은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두 가지 성분을 아울러 갖고 있다.
3) 공자는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4) 공자는 은 · 주 이래 전통적인 천명관념을 계승한 유심주의자다.


공자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와 차이는 있었지만 그가 수립한 사상체계와 교육사상 등은 지금까지 엄청난 영향을 발휘했고 또 여전하다. 

그의 사상체계에 보수적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는 급변하는 시대상을 자신의 주관으로 파악하고 이를 전통사상과 연계하여 새로운 시대적 이념과 사상을 제기한 진보적인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다. 

실제 정치에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가 만년에 정리한 역사, 철학, 사상, 교육, 예술, 정치윤리 등과 관련된 이론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각국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관련 유적

공자와 관련한 유적은 중국 전역에 남아 있다.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삼공()이 가장 유명하다. 

삼공이란 공자의 무덤인 공림(), 공자의 사당인 공묘(), 공자의 저택인 공부()를 말한다.


삼공을 포함한 관련 유적을 아래에 정리해둔다.

① 창평니산부자동(): 산둥성 취푸시 동남 30킬로미터 창평향 니산 동쪽 기슭
② 궐리방(): 산둥성 취푸시 공묘동장 밖 궐리가 중부
③ 공자고택문(): 산둥성 취푸시 공부대문 서측
④ 공택고정(): 산둥성 취푸시 공묘 동로 시례당 뒤
⑤ 문례당(): 산둥성 취푸시 성 동북 1킬로미터 주공묘 동로 내
⑥ 시례당(): 산둥성 취푸시 공묘 동로 내
⑦ 행단():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전 앞
⑧ 선사수식회():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문 북폐 동측
⑨ 수사서원(): 산둥성 취푸시 공림 동북 1킬로미터
⑩ 무우태(): 산둥성 취푸시 성 남쪽 2킬로미터
⑪ 춘추태(): 산둥성 취푸시 성 남쪽 8킬로미터 식감촌 내
⑫ 석문사(): 산둥성 취푸시 성 동북 26킬로미터 석문산 남쪽 기슭
⑬ 관천정(): 산둥성 취푸시 니산 공묘 대성문 동남
⑭ 공자문소처(): 산둥성 쯔보시 성 동쪽 소원촌
⑮ 협곡(): 장쑤성 공유현 성 서북 15킬로미터, 위공자 상로회제후
⑯ 호산():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남쪽 기슭 비규령 동북
⑰ 공자애():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옥황정 서남
⑱ 공자등림처방():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남쪽 기슭 홍문궁 앞 반도 위
⑲ 공자소천하처():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옥황정 동남 태평정 위
⑳ 공망산(): 장쑤성 롄윈강시 신포 남쪽 2.5킬로미터
㉑ 학당강(): 허난성 창위안현 성 북쪽 5킬로미터
㉒ 격경처(): 허난성 급현 남관, 상전 공자증재차 격경습락
㉓ 현가태(): 허난성 화이양현 성 밖 서남 모퉁이
㉔ 문아태(): 허난성 상추()현 동남 1.5킬로미터 태지 위
㉕ 부자애여쇄서태(): 허난성 닝청현 동북 32킬로미터 망산진 서남 기슭
㉖ 공자문례처(): 허난성 락현시 노성 동관
㉗ 공자묘(): 산둥성 취푸시 공림 내 남부
㉘ 공자묘(): 산둥성 취푸시 성내
㉙ 대성전(殿): 산둥성 취푸시 공묘 내
㉚ 규문각(): 산둥성 취푸시 공묘 내, 동문문여 십삼어비정 사이
㉛ 십삼어비정():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문 앞
㉜ 니산공자묘(): 산둥성 취푸시 동남 30킬로미터 니산 동쪽 기슭
㉝ 확상포(): 산둥성 취푸시 내, 공묘 서측, 상국가로 남쪽
㉞ 공림(): 산둥성 취푸시 성 북쪽 1킬로미터

 인생 회고록

공자는 만년에 자신의 70 평생을 단 38자의 문장으로 개괄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짧은 자서전 내지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열다섯 무렵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무렵에 내 뜻을 세웠고, 사십 무렵에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오십 무렵에는 하늘이 준 사명을 알게 되었다. 

육십대에는 순종하게 되었고, 칠십이 넘자 마음 가는대로 따라가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 , , , , .”

(『논어』 「위정()」편)

위 38자의 회고록은 공자가 70이 넘자 인생을 회고하면서 제자들에게 구술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삶을 정리하면서 감개무량한 심경을 고백한 것으로 본다.

 가문의 영욕사

공자의 가문은 역대로 통치자들에 의해 크게 중시되어 많은 특혜를 받았다. 

가문의 영속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공자로부터 공덕성(, 1920~2008)에 이르기까지 77대가 되고 있는데, 그 동안 공씨 가문은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을 몇 가지 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1) 오대 후량() 건화() 연간(911~912)에 공부에서 청소를 담당하던 공말이란 자가 공자의 42대손 공광사()를 죽이고 공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는 사건이 일어났다. 

18년 뒤 공광사의 아들 공인옥이 당 명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사건을 밝히자 공말은 처형되었다. 

이 일로 공인옥은 공씨 가문을 다시 일으킨 중흥조()로 존중되었다. 

공말의 후손들은 이 사건으로 ‘가문 밖의 가짜 공씨’란 뜻의 ‘외원위공()’, 줄여서 ‘외공()’으로 찍혀 족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2) 북송 말기 제 48대 연성공(, 공자의 후손을 이렇게 높여 불렀다) 공단우()가 강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저장성 취저우()에 살게 되니, 이를 남쪽 지역의 공씨 가문이라는 의미로 ‘남종()’이라 한다. 

그 동생 공단조()는 취푸에 남아 가문을 이으니 이것이 ‘북종()’이다. 

실제로는 남종이 공씨 가문의 장손 후예들이지만 취푸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남종과 북종이 정통을 놓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 

명나라 홍치() 연간(1488~1505)에 와서야 비로소 황제에 의해 북종이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3) 종법제도에 따라 적장자는 윗대를 잇는 계승자다. 

공씨 가문은 장자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장자가 아들이 없으면 반드시 가장 가까운 혈통을 골라 장손의 자리를 잇게 했는데, 조카가 장손 자리를 이을지언정 동생이 장손 자리를 이을 수는 없게 했다.


공자의 유머

공자의 유머는 자연스럽다. 

『논어』에는 유머러스한 공자의 말이 많은데, 이는 공자가 실제로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정감 넘치고 이치에 합당한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성리학의 기세가 너무 강했던 탓에 공자 이후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는 14년 동안 송 · 위() · 진() · 채() 사이를 떠돌아 다녔는데, 여의치 않은 경우가 열에 아홉이었지만 그 때마다 늘 의연하게 대처했다. 

세상에 대해 상심하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고향인 노나라에서 계환자와 양화 같은 인물을 만나는 바람에 진()나라로 가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하 가에서 “물이여, 물이여!”라며 탄식한 것이 그런 경우였다. 

환퇴란 자가 공자를 해치려 하자 “환퇴 그가 나를 어쩌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은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시 스스로 만족하고 유유자적하는 군자의 두려움 없는 기세라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진 · 채 · 여() · 영()에서 왜 그렇게 특별히 오래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다.


유머 사례

공자의 침착하고 유유자적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진()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무려 7일 간을 굶었을 때의 일이다. 

제자들은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공자는 꼿꼿하게 혼자서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침착하고도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제자들에게 “우리가 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어쩌다 이곳에 버려졌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대목은 우리가 공자에게 가장 탄복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 번은 공자와 제자들이 길에서 흩어져 서로를 잃어 버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동문에서 공자를 보았다면서 그 행색이 마치 ‘상갓집 개’ 같더라고 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공자는 “다른 건 몰라도 상갓집 개란 말은 그럴 듯하구나.”라 했다.


모습에 대한 도학자들의 평

공자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공손하면서도 편안했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다. 

천리 밖까지 찬바람이 쌩쌩 도는 도덕군자인양 점잔을 빼는 그런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정자나 주자와 같은 송나라 유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공자의 모습은 바뀌어 버렸다. 

도학적 관점에서 공자를 논하면 공자의 본래 모습을 잃게 마련이다. 

그들은 마치 보통 사람이 하는 행동을 성인은 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모름지기 도학적인 송대 유학자들이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공자는 거침없이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유비라는 자가 공자를 만나러 왔다. 

공자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거나 문지기를 시켜 집에 없다고 하라 했다. 

유비가 가지 않고 문 앞을 얼쩡거리자 공자는 일부러 유비가 들으라고 비파를 연주했다.


공자가 왜 그랬을까?

주자는 공자가 유비를 몹시 싫어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고 했다. 

그와는 달리 청나라 때 학자 최술은 다른 해석을 했다. 

그는 이 대목이 후세 사람이 멋대로 갖다 붙인 것이라면서, 성인께서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냐고 했다. 

역사학자 고힐강은 최동벽의 이런 견해에 불만을 나타내며, “경서()와 공자 · 맹자를 지나치게 신봉하여 도처에 선입견과 주관이 물들어 있다.”라고 했다.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논어』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논어』의 멋을 알려면 먼저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들을 음미해야 하는데, 그 중에는 유유자적하면서 한 말, 솔직담백한 말, 외부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 말, 그냥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 유머러스한 말, 심지어는 농담 및 욕까지 다양하다.

요컨대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이 사적으로 나눈 대화체 실록()으로, 공자의 진면목을 다시 볼 수 있다. 

진지함과 농담이 적당히 섞인 조용하고도 차분한 이 실록으로부터 우리는 공자의 진짜 성품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몇 가지 대화 내용을.


“그게 바로 나다!”
공자는 제자들에 대해 전혀 격이 없었다. 

철학과 종교에 대해 강의하면서도 후대의 정자처럼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의에 집착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공자는 “너희들 내가 너희들한테 뭐 숨기는 것이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나 숨기는 것 하나 없다. 

지금까지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너희들에게 알려 주지 않은 적이 없다. 

바로 나다.”라고 말한다. 정겨운 모습이 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농담이야!”

공자는 자신이 한 농담에 대해서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한번은 제자인 언언이 성재(, 성의 우두머리)로 있는 무성(, 산둥성 더저우에 있는 현) 지방을 방문했는데, 집집마다 책 읽는 소리와 거문고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는 싱긋이 웃으며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했다. 

그러자 언언이 공자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까?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말입니다.” 

공자는 “얘들아 언()의 말이 옳다.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을 뿐이니라.”라고 말했다. 

공자가 한가하게 제자들과 나눈 대화의 말투는 보통 이러했다.


“나는 점아를 따라 가겠다.”
제자들에게 각자의 바람을 물어보는 대목이다. 

모두들 매우 즐겁게 자신의 포부 등을 얘기했다. 

공자는 딱딱한 겉치레 말이 아닌 은근한 정을 담은 말로 분위기를 끌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 끝나자 증석(증점)은 자신의 ‘바람’은 관직을 하는 것도 아니오, 조정과 종묘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공자는 “무슨 상관이냐? 나는 그저 각자의 바람을 듣고 싶을 뿐이니라.”라고 말했다.


증석은 비파의 굵은 줄을 한번 퉁겨 소리가 울리게 한 다음 비파를 내려놓고는 일어서서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그 부분을 대략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말로 바꾸어 보면 이렇다. 

“3월과 4월 사이 새 옷을 입고 양음산 중정공원()으로 놀러 갑니다. 

어른들 대여섯이 아이들 예닐곱을 데리고 수영장에서 논 다음, 근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다가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한숨을 내쉬면서 “점()아! 나는 너하고 같이 가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네 말에 전적으로 뜻을 같이 한다.

”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앞에서 진지하고도 점잖게 자신의 바람을 말한 것에 뒤이어 증석이 이렇게 느긋하게 분위기를 풀어 버리니 자연스럽게 유머 작용을 한 것이다. 

공자도 흔쾌히 그 뜻을 알아주었다.


“말을 탈까, 활을 쏠까?”
누군가 공자를 두고 “공자는 정말 위대하다. 

박학다식하면서도 특기 하나 없으니.”라고 비꼬았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나한테 무슨 특기를 가르쳐 주려고? 말을 탈까? 아니면 활을 쏠까? 아무래도 말을 타는 것이 낫겠지?”라고 말했다. 

이 대목은 진짜 유머의 멋이 물씬 느껴진다고 평가한다.


“그래? 어찌 그럴 수가!”
공자가 공명가()에게 위나라 대부 공숙문자()에 대해 묻기를 “정말로 그 사람 말하지도 웃지도 욕심부리지도 않느냐?”라 했다. 

공명가는 “그렇게 말한 사람이 부풀려 한 말입니다. 

그 분은 말할 줄도 웃을 줄도 아는데 다만 그럴 만한 때라야 말을 하고 웃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싫어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그러냐? 정말 그러냐?”라고 말했다. 이런 중첩된 말투는 『논어』에 흔히 보이는 회화체 필법이다.


“사야, 네 능력 밖이다.”
자공은 말을 아주 잘 했다. 

한번은 그가 “남이 저를 아무렇게 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듯이 저도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사(, 자공의 이름)야, (말은 쉽다만) 내가 보기에 네가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 번 냄새 맡고는 그냥 일어서다.”
이 대목은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것으로 꼽히는데, 최술은 또 위작이라고 했다. 

사실 별 것 아닌 대목이다. 

그저 공자가 꿩의 냄새를 맡아보고는 구역질이 나 먹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대목은 「향당편()」에 보이는데, ‘향당편’은 주로 먹는 것에 관한 얘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새 한 마리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내려앉았다. 

자로(중유)가 가만히 다가가서 “들새로구먼. 마침 잘 왔다!”며 잡아서는 공자에게 드렸는데, 공자는 서너 번 냄새를 맡아보더니 들새의 비린내가 싫어 먹지 않고 그냥 일어섰다. 

원래 들새는 2~3일 말렸다가 먹는 게 좋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무슨 거창한 도리를 찾아내려 할 필요가 있을까?


“여럿이 하루 종일 죽치다.”
공자 왈 “여럿이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 좋은 말 한 마디 않고 사사로운 꾀나 부리고 있으니, 정말 힘들구나 너희들!” 여기서 맨 뒤의 ‘정말 힘들구나 너희들’이라는 말은 ‘잘 하는 짓이다’라는 말이다. 

주자는 이 대목을 ‘장차 근심과 해가 있을 것이다’라고 풀이했지만 이것은 ‘잘 하고 있구나, 너희들’이라는 한적한 말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말투가 또 한 군데 더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이다.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쓰는 일 하나 않는구나. 

정말 잘 하는 짓이다! 장기나 바둑 같은 것도 있지 않느냐? 그런 곳에라도 신경을 쓰는 것이 아무데도 마음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유머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연스럽고 조용한 방에서 친한 친구와 나누는 한담 같이 전혀 꾸밈없고 허세 부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논어』다. 한번은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어찌 담에 매달려 있기만 하고 먹지도 못하는 표주박과 같을 수 있나?” 또, “팔아야지! 암, 팔아야지! 나는 누군가 나를 사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라는 말도 했다. 


이 구절은 현명한 군주가 자기를 등용하길 기다린다는 뜻으로, 속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이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준비해 두었다가 한 말이 아니다. 

친한 친구와 한담을 나누는 분위기라면 오해는 사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을 너무 진지하게 읽는다면 그 맛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공자가 사람을 욕한 대목도 적지 않다. 오늘날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떠냐는 물음에 공자는 “아, 째째한 인간들이니 인간 축에 끼지도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아, 밥만 축내는 그 밥통들, 어디다 쓰겠느냐!” 정도가 될 것이다. 

친구 원양을 욕하는 대목에서 공자는 “늙어서 죽지 않으면 도적이야!”라고 한 다음, 그것도 모자랐던지 몽둥이를 들고 땅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원양의 정강이를 때렸다.

염구를 욕하면서 “내 제자가 아니니라. 

얘들아 북을 울리고 공격을 가해도 좋다!”라고까지 말했다. 

제자에 대해서까지도 이렇게 화를 낸 것은 염구가 권력자 계씨()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었다.

“유()야는 제 명에 못 죽을 것이다.” 

이 말은 자로(중유)를 두고 한 욕으로 곱게 죽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위트

진짜 위트 넘치는 공자의 말을 독자들은 평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가장 좋은 보기 중 하나가 『공자가어』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다.

자공이 죽은 자에게도 지()가 있냐고 묻자 공자는 대뜸 “네가 죽으면 알게 되겠지.”라고 대답했다. 

이는 자로가 비슷한 질문을 했을 때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라고 대답한 것처럼 위트가 넘친다. 

“말하지 않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어쩌겠는가? 이런 사람은 정말이지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는 걸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이런 대목들도 같은 종류로 본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잘못하는 것이다.”  

“남이 나를 몰라준다고 걱정하지 말고 알아 줄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라.”라는 대목은 알 ‘지()’자를 가지고 대단히 좋은 문장을 만들었는데, 위트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다.

공자는 화통한 사람이었다. 

나오는 대로 말해도 모두가 이치에 합당했다. 


그는 자신의 발로 여러 곳을 실제로 돌아다녔고, 또 쉬우면서도 친근한 말로 사람과 접촉했다. 

부모를 섬길 때는 봉양만 해서는 안 되고 존경해야 한다면서 “봉양이야 개나 말도 다 할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한다. “부자가 될 수만 있다면 나더러 마부가 되어 수레를 몰게 해도 기꺼이 하겠다.”는 말도 한다. 모두가 참으로 꾸밈없는 말들이다. 

여러 곳을 몸소 다녔기 때문에 늘 유머러스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나왔다.


미국의 대문호 칼 밴 도렌(Carl van Doren)은 공자의 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계문자(계연)가 세 번 생각하고 난 다음 행동한다고 말하자 공자가 “두 번, 그 정도면 되네. 라고 말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는 아무리 좋은 일도 지나치면 못쓴다는 뜻으로 결단과 실천을 강조한 대목이다.


각주: 

소사(小使) : 집안의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고용하는 사람.

구호와 복장은 유가이나 정신을 모르는 황당한 유를 속유(俗儒), 유가 정신의 실질을 깨쳐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대유(大儒), 속유와 대유 사이에 낀 아유(雅儒) 그리고 쓸모없는 제자들을 소유(小儒)·산유(散儒)·천유(賤儒)로 구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