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깨우치고반성해야되는- 아시아나라들에침탈해많은사람들이(전쟁)희생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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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가 기억 해야 되는 일제강정기 민족적 치욕....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였으니 일제강점기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으려면 영원히 잊지않고 기억해야할것 입니다
((일본이깨우치고반성해야되는나라- 아시아나라들에침탈해많은사람들이(전쟁)희생된점....일류역사에잊지못하고기록에영원히남는나라.)
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뒤 그 여세를 몰아 1907년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한일신협약 혹은 정미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서울의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일본 혼성 1여단 병력이 급히 파견되고, 외무대신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하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본 측 요구는 별다른 수정 없이 가결되었다. 조약 체결 사실은 바로 다음 날 관보 호외를 통해 공표되었고, 각국 주재 일본 대표들을 통해 열강에도 통보되었다.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07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예비조처로 체결한 7개 항목의 조약.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도 부른다.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여러 가지 내정을 간섭해오던 일본은 헤이그특사파견사건(Hague特使派遣事件)을 계기로 하여 한층 강력한 침략행위를 강행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일본은 외무대신 하야시(林董)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로 하여금 우선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묻고 고종을 퇴위시키는 한편, 고종이 양위하고 신황제인 순종이 즉위한 4일 후인 1907년 7월 24일 전격적으로 흉계를 꾸며 그들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내용의 원안(原案)을 제시하였다. 이에 이완용(李完用) 내각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하여,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7월 24일 밤 통감 이토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조인하였다. 이밖에 부연하여 각 조항의 시행규칙에 관하여 협정된 비밀조치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는 한국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일본인 차관(次官)의 채용, 경찰권의 위임 등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군대의 해산이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다.
제1조 대한제국 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제2조 대한제국 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
제3조 대한제국의 사법 사무는 보통 행정 사무와 구별한다.
제4조 대한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행한다.
제5조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대한제국 관리에 임명한다.
제6조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용빙할 수 없다.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일한협약 제1항은 폐지한다.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을 폐기하고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 처분에 대한 승인권, 고등관리 임면에 대한 동의권 등을 확보함으로써, 통감은 명실공히 대한제국의 최고 감독권자가 되었다. 또한 1904년 고문협약의 조항을 폐지하는 대신 일본인을 직접 대한제국 관리로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조언이나 권고 수준에서 더 나아가 직접 행정 실무까지 장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애초에 이토가 생각한 요구 사항에는 대한제국 황제가 조칙을 발표하기 전에 미리 통감의 자문을 받게 한다는 항목까지 있었지만, 이는 협의 과정에서 제외되었다.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도 한다.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형해화(形骸化)한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안을 제시, 아무런 장애도 없이 1907년 7월 24일 이완용(李完用)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의로 체결 ·조인하였다.
조약의 내용은
①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② 한국정부의 법령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③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④ 한국고등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⑤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용빙할 것,
⑥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하지 말 것,
⑦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은 폐지할 것 등이다. 일제는 조약의 후속조치로 행정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국인 대신 밑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고, 경찰권을 위임하도록 하였으며, 경비를 절약한다는 이유로 한국군대를 해산하였다.
이 밖에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보안법’이 공포되는 등 10년에 명칭만의 대한제국의 국체를 말소하기까지 4년 간은 통감부에 의한 차관정치가 실시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직후에 체결된 것으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비정상적으로 체결되었기 때문에 국제조약으로서의 법적 유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협약에서 보다 중요한 사실은, 조약 체결 당시 이토와 이완용 사이에 교환된 이면 각서의 존재였다.
각서에서는 한일 양국인으로 구성된 재판소(대심원, 공소원, 지방재판소, 구재판소)를 신설하고(제1조), 간수장 이하 반수를 일본인으로 하는 감옥을 설치하며(제2조), 황궁 수비를 위한 육군 1대대 외의 모든 군대를 해산할 것 등이 약속되었다(제3조).
가장 기본적인 국가기구들인 감옥, 군대, 재판소 등을 일제가 장악함으로써 철저하게 대한제국을 해체하는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우선 신협약에 따라 일본인들이 각 부서의 차관에 임명되어 실권을 장악하고(이른바 차관정치), 내부 경무국장이나 경무사 등의 자리에도 진출하여 치안경찰권을 장악했다.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은 대폭 정리하고, 특히 왕실 관련 궁내부는 모두 정리하면서 황실 재산도 모두 빼앗아갔다.
통감은 통감 관저에 앉아서 대한제국 정부 대신들을 불러오거나 각부의 일본인 차관들을 소집하여 모든 국정 운영을 직접 지휘했다.
황제에게 결재를 청하는 문안이 있더라도 통감이 먼저 승인해야 하므로 대한제국의 최고권자는 이미 통감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일본인 관리의 대한제국 정부 진출은 그간 고문 또는 참여관 명의로 대한제국 정부에 용빙된 사람들을 모두 해고하고, 중앙 및 지방 관리에 직접 일본인을 임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구체적으로 각부 차관, 내부 경무국장, 경무사 또는 부경무사, 내각 서기관 및 서기랑 중 약간 명, 각부 서기관 및 서기랑 중 약간 명, 각도 사무관 1명, 각도 경무관, 각도 주사 중 약간 명과 재무 · 경무 및 기술 관련 관리 등이 그 대상이었다.
중앙 각부의 차관, 내각 서기관 등을 일본인으로 임명함으로써 중요 정책의 결정과 집행 과정을 장악하게 하고, 내부 경무국장 임명을 통해 치안권을 확보하며, 각 지방 일선 대민행정 분야에까지 공식적으로 일본인을 진출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방침에 따라 1907년 8월 2일 경무고문이던 마루야마 시게토시가 경시총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8월 8일 궁내부 차관 쓰루하라 사다키치(전 통감부 총무장관), 내부 차관 기우치 주시로(전 통감부 농상공부총장), 학부 차관 다와라 마고이치(전 통감부 서기관)가 임명되었고, 8월 13일 내부 경무국장에 마쓰이 시게루(松井茂)가 임명되었다.
8월 15일에는 각도 사무관 및 경시, 9월 7일에는 탁지부 차관 아라이 겐타로(荒井賢太郞, 전 재정고문부 소속), 9월 19일에는 농상공부 차관 오카요시, 법부 차관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통감부에서 자리를 옮기거나, 그간 고문직으로 간접적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참여하다가 직접 대한제국 내각에 들어서게 된 경우였다.
일본인들이 직접 대한제국 정부에 진출함으로써, 통감부 입장에서는 그간 효율성에 문제가 있었던 ‘대한제국 정부 집행-통감부 · 고문부 감독’이라는 이중구조가 필요 없어졌다.
시정개선 사업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둘러오던 재정고문부는 폐지되어 탁지부 재무감독국에 귀속되었고, 고문경찰의 폐지로 각도 경무고문지부 보좌관은 각도 경시에, 나머지 경무고문부 직원들은 경부, 순사에 임용되는 등 다수의 일본 경찰이 대한제국 정부에 임용되어 내부 경무국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제 일본 경찰이 직접 한국민들을 체포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일제시대 악명 높던 그 무서운 ‘일본 순사’가 이때부터 등장했다.
이미 일제가 치안경찰권을 모두 장악한 마당에 여러 종의 경찰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대한제국 경찰과 고문경찰, 통감부 · 이사청 경찰 3종이 모두 통일되었다.
대한제국 정부 조직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통폐합 정리가 시작되었다.
먼저 1907년 11월 27일 궁내부 신관제를 발포하여 경리원 등 궁내부 소속 다수 부서를 폐지하고 관리도 대폭 감축하는 한편, 일본인을 궁내부 수뇌부에 배치했다.
황제를 보좌하던 궁내관 중에서 폐관 또는 퇴관된 사람은 1908년 상반기까지 칙임관 이하 166명, 하급관원 2,400여 명, 궁중 제사관 300여 명 등이었다.
메가타 재정고문이 부임 당시부터 추진했으나 황제 측의 심한 반발로 완전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던 황실 재산 정리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 물적 · 인적 기반이었던 궁내부와 황실 재산을 철저하게 해체하는 작업이었다.
1908년 1월 각부 신관제 실시 이후 일본인 관리의 임명은 더욱 현저히 증가했다.
종래 고문, 보좌관, 참여관 혹은 그 부속원으로서 대한제국 정부에 용빙되었던 이들은 대부분 대한제국 정부 관리로 임명되었다.
1908년 6월에 이르면 대한제국 정부 관료 5,096명 중 일본인이 1,797명, 통감부 소속 일본인 관료는 4,403명에 이르렀다.
12월에는 다시 2,080명으로 일본인 관리 수가 늘어났는데, 나라의 살림살이를 관장하는 탁지부 관리가 962명(46.3%)으로 가장 많았다.
일본이 무엇보다도 대한제국의 재정 장악을 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 법부 393명(18.9%), 내부 373명(17.9%)의 순서로 일본인 관리가 진출했고, 1909년 말에는 일본인 관리 수가 한국 관리 수에 육박할 정도로 대한제국 정부는 급속도로 일제에 의해 장악되었다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각에 직접 진입함에 따라 통감부 조직은 대폭 축소되었다.
일본인들이 직접 대한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했으므로 대한제국 정부와 통감부 사이에 중복되는 부분은 과감히 정리, 조직을 간소화한 것이다.
1907년 9월 9일 칙령 제295호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 개정의 내용을 보면, 일단 통감의 직권은 확장되었다.
통감은 대한제국에서 일본 정부를 대표하여 조약 및 법령에 기초하여 제반 정무를 통할한다고 규정되어(제3조), 외교 업무 대행 외에 대한제국의 일반 내정까지 관장하는 대한제국 국정 운영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권자가 되었다.
이전에도 실제로는 그런 위치였지만 황제권의 반발로 명문화되지 못했던 것이 이제 법적 · 공식적으로도 명실상부한 권한을 확보하게 된 셈이었다.
통감부 관리의 수는 부통감의 신설(제10조 2항) 외에는 상당히 축소되었다.
총무장관 1명, 참여관 2명(감사부장, 외무부장), 비서관 2명, 서기관 6명, 기사 4명, 통역관 9명, 속(屬) · 기수 · 통역생 43명 등이 전부였다.
경시 및 경부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각부의 일본인 차관 9명을 참여관 자격으로 통감부에 소속시키고, 또 대한제국 내각에 진출한 일본인 관리들이 실제로 통감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므로, 통감부는 변함없이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다.
1907년 10월 9일에는 통감부 훈령 제21호 「통감부사무분장규정」의 개정으로 총무부 · 경무부 · 농상공부를 폐지한 대신, 통감관방 · 감사부 · 지방부를 신설하고 관방장관에 총무장관, 각 부장에는 총무장관 혹은 전임 참여관을 임명했다.
통감관방에는 문서 · 인사 · 회계과를 두고, 외무부 각 분과는 폐합하여 영사관 및 외국인에 관한 사항, 이민에 관한 사항, 조약 및 약정서에 관한 사항, 의식 및 서훈에 관한 사항 등을 관장했다.
감사부는 통감부 법령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가 제정한 제 법령 및 처분을 심사하는 업무를 관장하고, 지방부는 지방 행정에 관한 사항, 식산 및 금융에 관한 사항, 종교 및 교육에 관한 사항, 사법 및 경찰에 관한 사항 등을 관장했다.
통감부 개정 관제의 특징은 통감부가 집행 기능을 축소하고 대한제국 내각의 통치 행정을 감독하는 상위기구의 성격을 분명히 한 점이었다.
종래 통감부와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이 이중적으로 존재하고 또 고문부가 중간에 개재해 있던 병렬적 구조에서, 고문부가 해체되고 통감부와 고문부의 일본인 관리들이 직접 대한제국 내각에 진입함으로써, 통감부의 집행기구적 측면은 최소화되고 대한제국 정부를 감독하는 상위기구적 성격이 강화된 것이다.
통감은 여전히 통감 관저에서 대한제국 정부 대신들을 소집하여 시정개선협의회를 계속하되, 실행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통감부 총무장관 및 각 참여관과 대한제국 정부 각부의 일본인 차관들을 참여관회의에 소집하여 직접 집행을 지휘했다.
통감이 대한제국 정부의 법령 제정에 대한 동의 · 승인권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대한제국 정부가 칙령 · 법률을 제정하려면 먼저 내각 또는 각부의 초안을 내각회의에서 논의한 뒤, 황제에게 결재를 품청하는 문안을 만들어 통감부에 넘기고, 통감의 승인이 나면 황제에게 상주하여 칙재를 받아 반포할 수 있었다.
각령 · 부령은 법률 · 칙령의 범위 안에서 내각 총리대신 및 각부 대신이 통감의 승인을 받아 관보에 공포했다.
이로써 대한제국 황제권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통감이 실질적인 최고 통치권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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