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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역사(국내 .각지역.)

한일신협약. 韓日新協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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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신협약. 韓約.


정의

1907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예비 조처로서 체결한 7개 항목의 조약.

개설

정미칠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역사적 배경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 여러 가지 내정을 간섭해 오던 일본은, 헤이그특사파견사건(Hague使)을 계기로 한층 강력한 침략 행위를 강행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일본은 외무대신 하야시()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로 하여금 우선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물어 퇴위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와 동시에 순종이 즉위한 4일 후인 1907년 7월 24일 전격적으로 흉계를 꾸며,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내용의 원안()을 제시하였다.

경과

이완용() 내각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7월 24일 밤 통감 이토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조인하였다.

이 밖에 각 조항의 시행 규칙에 관하여 협정된 비밀 조치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는 한국 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위임, 일본인 차관()의 채용, 경찰권의 위임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한국 군대의 해산이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제4조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고용할 것.

제6조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하지 말 것.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을 폐지할 것.

이 조약의 7개조를 보면, 을사조약보다 강력한 통감의 권한과 일본인 관리 채용 등을 강요, 한국의 내정에 관한 모든 국권을 일본에게 넘긴 것을 알 수 있다.

제7조에서 외국인 재정고문의 용빙을 폐지한다고 한 것은, 사법권과 관리임용권까지 빼앗았기 때문에 이 조항이 무의미하게 되어 폐지한 것이다.

결과

한일신협약의 체결로 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각지에서 무장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제는 한국의 사법권·행정권 및 관리 임면권을 빼앗고 외국인 고문 폐지 등을 강압적으로 실시하여, 이후 1910년 강제로 병합할 때까지 한국에서 이른바 차관정치를 실시하였다.

이 결과 1909년 현재 한국 정부에 채용, 배치된 일본인 관리의 수는 [표]와 같은 2,000여 명으로 모든 행정관청이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간 꼴이 되었다. 

이것은 침략정책을 단계적으로 강행하는 한 방법이었다.

을사조약.約.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일명 제2차한일협약으로 을사보호조약 또는 을사5조약이라고도 한다. 고종실록(권46)에 실린 을사조약전문

정의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개설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한일협약·을사5조약·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

배경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대한시설강령()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그 사이 러일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국제관계를 주시하며 한국을 보호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자면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열강의 묵인이 필요하였으므로 일본은 열강의 승인을 받는데 총력을 집중하였다.

먼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았으며,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다. 이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한국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 한다는 설이 유포되어 한국의 조야가 경계를 하고 있는 가운데, 1905년 10월 포츠머스회담의 일본대표이며 외무대신인 고무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총리대신 가쓰라[] 등이 보호조약을 체결할 모의를 하고, 11월 추밀원장() 이토[]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使)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일협약안을 한국정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다음날 고종을 배알하고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라는 내용의 일본왕 친서를 봉정하며 일차 위협을 가하였다.

이어서 15일에 고종을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들이밀었는데,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서 조정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17일에는 일본공사가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하였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를 열게 되었다.

이 날 궁궐 주위 및 시내의 요소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선 가운데 쉴새없이 시내를 시위행진하고 본회의장인 궁궐 안에까지 무장한 헌병과 경찰이 거리낌없이 드나들며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어전회의에서는 일본측이 제안한 조약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이토가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을 배알하고 정부 대신들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다시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가 이토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체결에 관한 찬부를 물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못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 달려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다 중도에 쓰러졌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를 ‘을사오적()’이라 한다.

내용

을사조약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정부 및 일본국정부는 양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의 실()을 인정할 수 있을 때에 이르기까지 이를 위하여 이 조관()을 약정한다.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할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국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장리()한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한국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미국·청국·독일·벨기에 등의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 해인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가 초대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우리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우리 민족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다. 장지연()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자, 국민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을사5적을 규탄하며 조약 반대투쟁에 나섰다.

고종은 조약이 불법 체결된 지 4일 뒤인 22일 미국에 체재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 B.)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라고 통보하며 이를 만방에 선포하라고 하였다.

이 사실이 세계 각국에 알려지면서 이듬해 1월 13일 『런던타임즈』지가 이토의 협박과 강압으로 조약이 체결된 사정을 상세히 보도하였으며, 프랑스 공법학자 레이도 프랑스 잡지 『국제공법』 1906년 2월호에 쓴 특별 기고에서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유생과 전직 관리들은 상소투쟁을 벌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뜻있는 인사들이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시종무관장() 민영환()을 비롯하여 특진관 조병세(), 법부주사 송병찬(), 전 참정() 홍만식(), 참찬() 이상설(), 주영공사 이한응(), 학부주사 이상철(), 병정() 전봉학()·윤두병()·송병선()·이건석() 등의 중신과 지사들이 그들이었다. 이밖에 청국인 반종례()와 일본인 니시자카[西]도 투신자결로 조약 반대의사를 천명하였다.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쟁에 떨쳐 나선 이들도 있었다. 충청도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이, 전라도에서는 전 참찬 최익현()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이, 강원도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고, 이근택·권중현 등을 암살하려는 의거도 일어났다.

그와 함께 구국계몽운동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유교와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기독교청년회·헌정연구회()·자신회()·대한자강회·동아개진교육회()·서우학회(西)·상업회의소() 등이 표면상으로는 문화운동을 표방하며 국민의 계몽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산하에 비밀결사를 두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칭별칭한일협상조약, 제2차한일협약, 을사5조약, 을사늑약
유형사건
시대근대
성격조약
발생·시작 일시1905년 11월 17일
관련인물·단체

을사조약의 배경.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획득하고도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3국의 간섭을 받아 이를 반환해야만 했다. 그 뒤 한반도와 만주로의 진출을 꾀한 일본은 이 지역으로의 남하()를 도모한 러시아와 대립하였다. 1898년 절영도(, 지금의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조차()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나타났다. 독립협회() 등이 참여한 반대 운동으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는 철회되었으며, 일본도 석탄고() 기지를 반환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과 러시아는 1898년 4월에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Nish-Rosen Agreement, 제3차 러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한국 진출은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받은 배상금을 바탕으로 한국에서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했으며, 광산·삼림·어업·항시()·온천 등의 갖가지 이권()을 차지하면서 한국의 상업()과 무역(貿)을 장악했다. 

삼국간섭으로 서구 열강과의 외교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어(제1차 영일동맹) 러시아를 견제하였다. 일본과 영국은 러시아에 만주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러시아는 청()과의 협상을 다시 시작하여 그 해 4월 청과 철병() 협정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협정에 따라 만주에서 일부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1903년 이후에는 강경파가 득세하여 오히려 압록강 유역으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다. 1903년 5월 러시아군은 압록강의 삼림벌채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신의주의 외항()인 용암포()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주롄청[]과 안둥[, 지금의 ], 용암포()에 이르는 지역에 1개 여단()의 병력을 배치하고, 7월에는 대한제국()에 용암포 조차()를 강요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은 더욱 커졌으며, 군사적 충돌의 상황으로 나아갔다. 1903년 7월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를 둘러싸고 협상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에 자신들이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하는 대신 만주에서 러시아의 상업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만한교환(滿)’을 제안하였지만 거부되었고, 러시아는 일본에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4년 1월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두 나라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월 6일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한 일본은 2월 8일 뤼순[]을 공격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3일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중립국임을 선포하였지만, 2월 9일 일본군이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면서 전쟁 지원을 위한 협약의 체결을 강요당했다. 2월 23일 대한제국의 영토를 일본이 군사적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의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어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는 한편,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일본군은 뤼순[]의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압록강 너머에서 벌어진 육전()에서도 승리하였다. 그리고 해전()에서도 러시아의 발틱(Baltic) 함대마저 전멸시키고 승리하였다.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5월 18일 조칙()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모든 조약과 협정을 폐기하고,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주었던 이권()도 모두 취소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8월 22일에 재정()과 외교() 부문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둔다는 내용의 ‘외국인용빙협정(, 제1차 한일협약)’의 체결을 강압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을 확대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Agreement)’을, 8월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9월 5일 미국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의 조정으로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러시아와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은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또 한국에 대하여 지도, 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조약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유럽 열강이 일본의 한국 침략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은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화로 본격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유럽 열강()들에게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한국에 보호국화의 조약 체결을 강요하며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이미 일본은 1904년 5월 31일 내각회의()에서 한국의 국방과 재정에서의 실권을 장악하고,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의 기본 방침을 결정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1841~1909]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했으며, 주한() 일본공사(使) 하야시 곤스케[, 1860~1939]는 11월 2일 서울로 돌아와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1850~1924]와 협력하여 이완용() 등을 매수하고 일진회()로 하여금 조약에 찬성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게 하는 등 조약 체결을 준비하였다.

체결 과정.

1905년 11월 9일 특명전권대사로 한국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10일에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일본 정부의 신협약안()을 외부대신 박제순()을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전달하였다. 이토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함께 3차례에 걸쳐 고종(, 재위 1863∼1907)을 만나 압박하였으나, 고종의 거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6일 정동()의 손탁호텔로 참정대신(한규설(, 1848~1930)을 비롯해 여덟 명의 대신()을 모아, 그들을 위협하여 협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참정대신 한규설은 분명히 반대 의사를 밝혔고, 법부대신(이하영(, 1858~1919) 등도 공식 회의에 부쳐 토의해 결정해야 한다며 의견 개진을 거부하였다.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일본군이 에워싸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어전회의()가 열렸지만, 한규설 등이 반대 의사를 강하게 주장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폐회되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공사(使) 하야시 곤스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등은 폐회하여 돌아가는 대신들을 강제로 다시 소집하였고, 고종의 알현()을 요구하였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알현 요구를 거절했지만, “정부 대신과 협력하여 조처하라”며 책임을 대신들에게 미루었다. 이토와 하야시 등은 일본 헌병 수십 명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 결정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강압()에도 한규설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으며, 탁지부대신(민영기(, 1858~1927)와 법부대신(이하영(, 1858~1919)도 한규설에 동조하여 반대하였다. 하지만 학부대신 이완용(, 1858~1926), 군부대신() 이근택(, 1865~1919), 내부대신 이지용(, 1870~1928), 외부대신() 박제순(, 1858~1916),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1854~1934) 등은 고종()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조약 체결에 찬성하였는데,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8명의 대신 가운데 5명이 찬성하였으므로 조약 안건이 가결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조약 체결에 찬성한 다섯 대신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어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한일 양국의 대표로 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


주요 내용

이토 히로부미[]는 궁내부대신() 이재극(, 1864~1927)을 시켜 강제 통과시킨 협약안의 칙재()를 고종()에게 강요하였다. 그리고 11월 17일자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두 나라의 대표로 하여 조약을 체결한 뒤, 18일에 이를 공포()하였다. 


을사조약은 모두 5개조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의 식민화를 위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와 이사청()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는 데 있었다. 조약 각 항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금후()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교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과 그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이 타국과 맺은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며, 한국은 금후 일본의 중개 없이는 타국과 조약이나 약속을 맺어서는 안 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제 아래에 통감()을 두고, 통감은 외교를 관리하기 위해 경성(, 지금의 서울)에 주재하여 한국 황제와 친히 내알할 수 있도록 한다. 

일본은 한국의 개항장() 등에 이사관()을 둘 수 있다.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아래 종래 한국에서 일본 영사가 지니고 있던 직권()을 완전히 집행하고, 또한 본 협약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한 모든 사무를 담당한다. 

제4조. 일본과 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나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하지 않는 한 계속 효력을 지닌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이러한 조약의 내용을 기초로 일본은 1905년 12월 20일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하였다. 주한 일본 공사관은 철폐되어 통감부로 그 기능이 넘겨졌으며, 각지의 영사관은 이사청으로 개편되었다. 

개항장과 13개의 주요 도시에 이사청이, 11개의 도시에 지청()이 설치되어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1906년 1월 31일 각국의 영사관은 모두 철수하였으며,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외교에 관한 사항만이 아니라, 각 대신들과 협의해 시정() 개선의 급무()를 시행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실상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였다. 

1906년 8월 1일 일본은 한국 주둔군 사령부 조례를 공포하여 통감의 명령으로 병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로써 통감부는 관헌() 감독권, 병력 동원권, 시정 감독권 등을 보유한 최고 권력 기관으로 군림하였다.

반대투쟁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때문에 조약 체결의 사실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일본에 대한 항쟁이 일어났다. 

장지연(, 1864~1920)은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일본의 흉계를 비판하며 조약 체결의 사실과 부당함을 널리 알렸다. 의정부참찬() 이상설(), 종1품 이유승(), 법부주사() 안병찬(), 원임의정대신() 조병세(), 시종무관장() 민영환(), 전참찬() 최익현(), 특진관() 이근명(), 종묘제조(調) 윤태흥(), 승지() 이석종(), 유림() 이건석() 등은 상소()로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상소가 효과를 얻지 못하자, 민영환은 유서를 남겨 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전참판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대() 일등병() 김봉학(), 주영공사(使) 이한응() 등도 죽음으로 일본에 항거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도 일어나 전참판 민종식()이 홍주()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이,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는 유인석() 등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나철(), 오기호() 등은 이완용, 박제순 등의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거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고종()도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등을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알리려 하였다.

1907년에는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 이준() 등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밀사(使)로 파견해 열강()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하였다. 

한국 대표의 회의 참석은 거부되었고, 밀사(使) 파견이 문제가 되어 고종()은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되었다. 

을사조약은 조약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에서 무효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906년 프랑스 파리법과대학의 교수인 F. 레이는 을사조약이 협상 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 체결에 대한 비준서 등 국제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다가 한글과 일본글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1965년 체결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과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한일협정)에서 한국과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제2조)고 규정하여 을사조약이 다른 조약과 함께 이미 무효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한일협정 제2조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해석이 다르게 나타나 을사조약의 효력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을사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무효였다고 보지만, 일본에서는 1965년 협정 이후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한국은 국제 관습법()에서 강제와 위협에 기초한 조약 체결은 무효로 하므로 을사조약도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본다. 

당시 국가를 대표했던 고종()의 승인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고종이 친서()와 밀사(使) 등으로 국제 사회에 조약이 무효임을 꾸준히 밝혔다는 사실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일본은 강제와 위협에 기초한 조약 체결을 무효로 하는 국제 관습법은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났으며, 1945년 ‘국제연합헌장’에서야 비로소 명문화되었으므로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해석한다. 

고종()에 대해 강제와 협박이 행해졌다는 역사적 근거도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을사조약의 실효성을 둘러싼 대립은 간도협약() 등 1905년 이후 일본이 한국을 대리해 청() 등과 체결한 조약의 효력과도 연관되므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간도협약. 間約.

1909년(융희 3) 9월 청(淸)나라와 일본이 간도(젠다오)의 영유권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

청나라는 19세기 말기부터 간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여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영유권 문제는 한·청 간의 오랜 계쟁문제()였다.

일제는 1905년(광무 9)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청나라와 간도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 오다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① 한·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토문강)으로서 경계를 이루되, 일본 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도문강 이북의 간지()를 한국민의 잡거()구역으로 인정하며, 

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국민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③ 청나라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하며, 

④ 장래 지린[창춘[] 철도를 옌지[] 남쪽까지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것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는 동시에, 남만주에서의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일본총영사관을 두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하게 되었다. 


간도와 독도우리 땅,

대한 제국기에는 청과는 간도를 놓고, 일본과는 독도를 놓고 영토 분쟁이 일어납니다. 일찍이 청은 백두산이 청 왕조가 일어난 신령한 산이라며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1712년(숙종 38년)에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면서 청과 백두산 일대의 영토 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한 제국기에 들어서 이 지역에 대한 분쟁이 다시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나라가 뒤숭숭해지면서 한민족은 간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그러자 청은 간도 개간 사업을 구실로 한민족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간도의 귀속 문제가 발생한 것이죠. 그것은 특히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해석을 놓고 청과 대한 제국이 각기 다른 입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정계비1)는 비문에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 : 西〕."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이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이므로 간도가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고, 간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청은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통감부가 설치된 뒤에 일제는 간도에 통감부 파출소를 두어 이를 관할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만주의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받아내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라고 넘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일제가 청과 체결한 간도 협약입니다(1909).

이 협약은 일제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 조약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체결한 협약입니다. 고종 황제는 을사 조약이 무효라고 선언했고 조약을 비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을사 조약을 근거로 체결한 간도 협약도 무효인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일제는 러 · 일 전쟁 중에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에 편입시키는 불법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독도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우리 국토에 속하는 섬입니다. 지금도 가끔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근대의 개혁


‧ 갑오 · 을미 개혁은 청의 종주권 부인과 사법권 독립, 재정 일원화, 신분제와 봉건적 폐습 등을 개혁한 것으로, 자율적인 성격과 타율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 고종은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 왕호를 황제로 바꾸어 자주국가임을 선포했습니다.

‧ 서재필 등의 진보적 지식인과 도시 시민층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열어 일반 시민들이 시국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을 내놓을 수 있게 했습니다. 

독립 협회는 국권 · 민권 운동을 통한 민주주의와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자주적 근대 개혁 사상 정착에 기여했습니다.

백두산정계비 비문
오라총관 목극등(烏喇摠管 穆克登), 봉지사변(奉旨査邊), 지차심시(至此審視),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 고어분수령(故於分水嶺), 륵석위기(勒石爲記), 강희(康熙) 오십일년(五十一年) 오월십오일(五月十五日)
〔오라총관 목극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방의 경계를 직접 조사하고자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 그러므로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 51년 5월 15일〕


독립 협회.


흔들리는 주권

한 나라의 왕이 일개 외국 공사관의 보호 아래에 들어간 아관 파천으로, 주권 국가로서 조선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조선은 아관 파천으로 일본의 위협에서는 조금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의 주권을 훼손하는 데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을미정권을 대신하여 이범진 등 고종의 측근 세력과 정동파라 불리는 친러, 친미 인사들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이들도 개화 정책에는 적극적이었다. 전면적인 서구화를 추진한 일본이 중체서용을 내세운 청을 꺾음으로써 더욱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정권은 바뀌었으나 갑오개혁의 상당 부분이 계승되었다. 청으로부터 독립을 확고히 하는 것과 함께 신문의 발행, 학교의 설립이나 신산업 육성을 위한 조치들도 꾸준히 추진되었다. 새로운 호적 제도를 실시하면서 신분 차별을 법적으로 철폐한 것도 이때였다.

독립신문과 독립 협회

서양 열강의 간섭과 이권 침탈이 강화되고 있던 1896년 무렵에는 이래저래 '독립'이란 말이 화두였다.

1896년 4월, "무슨 일에서든 인민의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 알리고……" 라는 창간 정신을 밝힌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신문 발간을 추진하였던 갑오정권의 계획을 새 정권이 이어받아 서재필로 하여금 신문 발간 사업을 추진하게 한 결과였다.

이해 7월에는 독립 협회도 창립되었다. 독립 협회에는 이완용 등 정부 관료와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이 두루 참가하였다. 독립 협회는 청 사절단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이 문은 단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 《독립신문》 사설(영문판), 1896. 6. 20.


서재필(1864~1951, PhilipJaisohn)갑신정변에 참가하였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1896년에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을 맡은 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의회 설립을 추진하다가 추방되어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독립 협회는 토론회와 강연회를 자주 열어 자주 독립 의식을 높이고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력을 길러야 하며, 민권을 보장하고 애국심을 높여 폭넓은 인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이 행사 때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수시로 '동포'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이런 취지에서였다.

《독립신문》(한글판, 영문판)1896년 4월 7일에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되었다. 순 한글로 발행한 최초의 신문이며, 외국인을 위해 영문판도 함께 만들었다. 개화 정책의 필요성과 독립 의식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한 제국으로 거듭나다

1897년 2월, 고종은 아관 파천 1년 만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러시아나 일본 어느 한쪽도 일방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운 정세였고,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고종이 환궁하자 전직 관료나 유생 들이 독립 의지를 높이기 위해서 왕의 칭호를 황제로 높이자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던 고종도 이에 적극적이었다.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바꾸었으며,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환구단을 쌓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한을 아우른다는 뜻의 '대한'을 새 나라 이름으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조선 왕국을 대신하여 대한 제국이 성립된 것이다.(1897) 반일 감정이 누그러지길 원했던 일본이 가장 먼저 대한 제국을 승인하였고, 다른 나라의 승인도 잇달았다. 1899년에는 대한 제국 황제가 청 황제와 동등한 자격으로 한·청 통상 조약에 서명하였다.

환구단과 황궁우1897년,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치르기 위해 환구단을 조성하였다. 1913년에 일본은 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호텔을 세웠다. 현재 환구단 자리에는 1899년에 지은 황궁우(천신과 지신을 모신 곳)와 1902년에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돌로 된 북만 남아 있다. 아래는 현재 서울 소공동에 있는 황궁우이다.

입헌 군주제냐, 전제 군주제냐

왕권 강화를 꾀한 고종과 달리, 왕권을 제한하고 나아가 의회를 만들어 입헌 군주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독립 협회 안에서는 생각이 갈렸다. 정부의 현직 고위 관리들은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으나, 서재필 같은 재야 개화파 인사들은 왕권 강화에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1897년 11월에 독립문이 완공된 이후 정부 관리들은 거의 독립 협회에서 손을 뗐다. 독립 협회는 신교육을 받은 학생이나 개명 유학자, 상인 등이 참여하는 정치 사회 단체로 탈바꿈하였는데, 이때부터 민권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높아졌다. 또한, 중추원을 개편하여 외국의 민회(의회)처럼 운영하자고 하였다.

만약에 외국의 예를 들어서 말씀드린다면, 현재 많은 곳에 민회가 있어 정부 대신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이를 전국에 널리 알리고 사람들을 모아 질문하고 논쟁을 벌이며 탄핵함으로써, 민중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은 하지 않게 되는데…….
- 정교, 《대한계년사》

그러나 의회를 운영하면 정책 결정을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될 뿐만 아니라, 외세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고 걱정하는 이도 많았다. 홍종우 등은 외세를 자주 독립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보았는데, 외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황제를 중심으로 온 국민이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은 황국 협회를 조직하여 독립 협회의 중추원 개편 운동에 맞섰다. 독립 협회는 중추원 개편(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고, 황국 협회는 반대 집회를 열었다. 정부가 독립 협회를 탄압하던 1898년에는 양자 간에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홍종우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에 유학하였으며, 우리 문학을 프랑스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데에 적극적이었고, 개혁을 자주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믿었다. 김옥균을 '조국을 외세에 판 역적'이라며 암살한 인물로, 고종에 의해 등용되어 대한 제국 경제 정책에 관여하였다.
왕조 체제를 넘어서다

1898년 12월, 고종은 독립 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후 고종은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 신식 군대를 육성하는 한편, 측근 세력을 등용하여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 제국은 자주 독립 국가이며, 만세 불변의 전제정치"로 시작하는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황제는 법적으로도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외교권, 군사 지휘권 등을 보장받는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대한 제국은 군주제란 점에서 조선 왕조와 정치 체제가 같지만, 갑오개혁 결과가 어느 정도 반영된 근대 국가의 특징을 지녔다. 무엇보다 군주권이 법의 형식을 띠고 행사되었으며, 신분제가 폐지되어 '법 앞에 평등'이란 정신이 자리 잡았다.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신교육이 확대되고 신분을 뛰어넘는 관리 등용이 이루어졌다.

대한 제국은 황제를 나라의 상징으로 세우고 '국민'이란 의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황제의 위엄과 권위를 높이기 위한 기념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 사용을 확대하였다. "상제(, 하느님)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로 시작되는 최초의 공식 국가도 만들었다. 이 모두가 전근대 왕조 체제와 분명히 구별되는 일이었다.

최초의 애국가고종은 즉위 40주년이 되던 1902년에 대대적으로 다양한 기념 행사를 치렀는데, 이때 황실 군악대 대장인 독일인 에케르트가 최초의 공식 국가를 제정하였다. 사진은 첫 애국가를 실은 책자의 표지와 한글로 적어 놓은 가사이다. 이후 윤치호가 쓴 새로운 노랫말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을 붙인 애국가가 불렸다. 그러다가 1936년 이후 안익태의 곡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독도와 간도

대한 제국 정부는 간도와 독도 문제 등 국경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간도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1897년과 1898년 두 차례에 걸쳐 상세한 현지 조사를 벌였다. 이를 통해 간도가 대한 제국의 영토임을 확인하고, 1902년에는 이범윤을 북변 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 주민을 직접 관할하였다.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서도 대한 제국 정부는 1898년과 1899년에 발행한 지도에서 독도가 대한 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나아가 1900년에는 관보를 통해 독도가 대한 제국의 영토임을 밝힌 칙령 41호를 나라 안팎에 알렸다.

백두산 정계비1712년에 조선과 청의 관리가 백두산을 기준으로 국경을 확정 짓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서쪽은 압록강을, 동쪽은 토문(도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적혀 있었다. 1880년대 국경 분쟁 시 조선은 토문강을 도문강(쑹화 강 상류)으로, 청은 두만강으로 해석하여 논란이 계속되었다.

독도여러 차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인정했던 일본 정부는, 러·일 전쟁 과정에서 독도를 불법적으로 자국 영토로 편입하였다(1905).
태정관 문서(1877)왼쪽은 일본 내무성이 정밀한 자료 조사를 거친 후 독도와 울릉도를 시마네 현 지도에서 뺄 것인가를 놓고 당시 일본 최고 국가 기관 태정관에 올린 질문서이고, 오른쪽은 태정관이 내무성에 내린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을 마음에 익힐 것'(색자 부분)이라는 훈령을 담은 문서이다.

관보독도를 대한 제국의 영토라고 명시한 칙령 41호가 나와 있는 대한 제국 관보이다.
바람 앞에 선 등불

대한 제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불안한 세력 균형 위에서 힘겹게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부는 러·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한편, 미국, 영국 등 구미 제국주의 국가들과 친선을 도모하는 선린 외교를 맺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한 제국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관 파천 이래 러시아와 일본은 몇 번의 비밀 협상을 진행하였다. 두 나라 모두 대한 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여러 차례 떠들어댔으나, 1896년 6월에는 대한 제국을 양국의 공동 보호령으로 삼으려는 비밀 협약(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을 맺기도 하였다.

러시아는 압록강 하류에서 가까운 용암포를 점령하여(1903) 군사 기지로 삼으려 하였으며, 일본은 영국, 미국과 손잡고 러시아에 맞서면서 대한 제국을 침략할 기회만 노렸다.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는 데 주력하면서 여러모로 일본을 도왔다.

근대적인 국가를 만들려는 노력은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운동이기도 하였다. 의회 설립을 통해 정치 참여를 확대하자는 독립 협회의 주장, 국론 분열을 막고 황제를 중심으로 단결하자는 황국 협회의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타당했을까?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독립을 지키려면 어떻게....



고종(1852~1919)1863년 12세 나이에 조선 26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었다. 1897년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대한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 무렵부터 일제에 사실상 주권을 빼앗긴 1905년까지 황실 중심의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광무개혁이라 부르기도 한다. 1907년 황태자(순종)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덕수궁에서 지내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다시 일어나다
작년 10월에 일본이 한 짓은 만고에 없던 일이다. 억압으로 한 조각 종이에 조인하여을사조약 오백 년을 전해 온 종묘사직이 하룻밤에 망하였다. 천지신명도 놀라고, 조종의 영혼도 슬피운다. …… 우리 황실과 문무 백관, 사농공상과 서리와 수레잡이들이 다 무기를 들고 일어서자.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역적을 죽여서 그 간을 내어 먹고, 왜적을 무찔러 그 소굴을 소탕하자!- 최익현, 격문, 《면암집》

일찍이 위정 척사 운동을 이끌었던 전 참판 최익현이 여러 고을에 이 같은 격문을 보냈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로서 인연을 맺었던 여러 유학자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에 앞서 역시 참판을 지낸 민종식이 홍주(충남 홍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민종식 부대는 홍주성을 놓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민종식 부대도 최익현 부대도 성공적으로 싸우진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을 계기로 무장 투쟁의 필요성이 널리 인식되어, 을사조약을 무효화하고 일제를 내쫓기 위한 대대적인 의병 투쟁이 전개되었다.(병오의병, 1906.)
의병이라 이름 붙인 무장 항일 투쟁은 1894년의 동학 농민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항일을 위해 봉기한 농민군은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며 관군에게 합류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제천의 유인석, 춘천의 이소응 같은 양반 유학자가 중심이 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동학 농민 전쟁이 좌절되고 을미의병이 해산된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무장한 농민군이 활동하였다.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외국 상인을 약탈하거나 관청을 습격하고 못된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활빈당이 대표적이다.
러·일 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구체화되면서 의병 부대가 새롭게 조직되었다. 1904년 7월부터 의병을 칭하는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을사조약을 계기로 의병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지역, 다양한 계층으로 확대되었다. 1906년 말에는 중남부 지방의 60여 군에서 의병 부대가 조직되었는데, 최익현이나 민종식 같은 유학자나 관리 출신 외에도 신돌석 같은 평민 출신이 의병장이 되어 이끄는 부대도 적지 않았다.

신돌석(1878~1908)
'태백산 호랑이'란 별명을 얻었으며, 강원도, 경상 북도, 충청도 접경 지대에서 평민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신돌석은 1908년에 체포될 때까지 군청이나 헌병 분견소 같은 일제의 통치 기관, 경제 침탈의 상징인 철도, 세무서, 광산 등을 파괴하였다.



항일 의병
한말의 역사학자이자 독립 운동가인 박은식은 "나라가 위급한 때 즉각 의로써 들고 일어나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과 맞선다. 한국 민족은 본래 충의가 두터워 삼국 시대 이래로 외환을 만날 때마다 의병이 일어나 적을 물리친 공적이 현저하였다."며, 의병은 한국 민족의 정수〔국수(()〕라 하였다.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다

의병 운동은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대한 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것을 계기로 한층 더 확산되었다. 서울의 시위대(국왕의 호위 군대) 군인들은 군대 해산에 맞서 싸웠다.

대대장 박승환은 자결로 항거하였으며, 시위대 소속의 많은 군인이 해산을 거부한 채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해산 군인들 가운데는 의병에 합류한 이들도 많았다. 무기고를 열어 총과 실탄을 나누어 가진 뒤 강원도 원주 일대를 장악한 민긍호 등이 대표적이다.

해산 군인이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향상되고, 활동 지역도 넓어졌다. 평민 출신 의병장의 수도 늘어났다. 의병 투쟁은 더욱더 광범위한 계층을 망라하는 범국민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의병 전쟁이 확산된 1907년 12월, 이인영 등 양반 유생 의병장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연합 의병 부대(13도 창의군)가 조직되었으며, 1908년 1월에는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가 서울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의병은 소규모 부대로 유격 전술을 펼쳐 일본군을 괴롭혔다.

일본은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무자비한 학살과 파괴를 일삼으며 의병을 공격하였다. 일제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적지 않은 의병장이 체포되고, 부대가 해산되는 사태도 빚어졌다. 그러나 '의병이 없는 마을이 없다.'고 할 정도로 속속 새로운 의병 부대가 조직되어 1908, 1909년에는 의병 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다.

의병 전쟁

의병 전쟁은 1908~1909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투쟁으로 을사조약 이후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의도를 여러 해 동안 막아 낼 수 있었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

의병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일본군의 진압과 파괴가 이어지자, 다음과 같은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대들의 이런 행동이 …… 실은 동포를 해치고 조국을 상하게 할 뿐이요, 털끝만치도 실효가 없을 것이니, …… 국권을 되찾으려면 눈앞의 치욕을 참고 국가의 원대한 계획을 도모하여 모두 무기를 버리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농부는 농업을 열심히 하고, 기술자는 공업을 열심히 해야 한다. 각기 산업에 종사하여 자산을 저축하고 자제를 교육하여 지성을 계발하며 실력을 양성하면 다른 날에 독립을 회복할 기회를 자연히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
- 의병 제군에게 경고한다, 《황성신문》, 1907. 9. 25.

의병들은 일제의 침략에 당당히 맞서야 하며, 지금 일제를 막지 못하면 실력 양성도, 독립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의병들은 일본군과 경제 침략을 일삼는 일본인 지주와 상인, 공공 기관을 공격하여 침략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친일 매국노와 친일 관리도 공격하였다.

평민 의병장이 이끌던 부대들은 민을 수탈한 부패한 관리와 횡포한 양반을 공격하는 일이 많았다. 부당한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과도한 소작료 징수에 맞섰으며, 부잣집이나 관청의 창고를 헐어 가난한 사람에게 곡식이나 재물을 나누어 주는 일도 있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차별과 불평등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인으로 살겠다

1908년 이후 의병 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은 호남 지역이었다. 동학 농민 전쟁 이래 항일 열기가 높았고, 일제의 경제 침탈도 심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투쟁을 이끈 사람들 가운데에는 머슴 의병장 안규홍 같은 평민이나, 평민과 처지가 다를 바 없는 몰락 양반들이 많았다. 민중의 군대라 할 수 있는 이들 부대는 다양한 유격 전술을 구사하며 일본군을 괴롭혔다.

1909년 9월, 일제는 가장 강력한 항일 세력인 호남 의병을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였다.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이다. 대규모 일본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호남 지역을 포위하고, 비질하듯 의병을 몰아붙였다. 파괴와 학살이 자행되는 두 달 동안 103명의 의병장과 4,138명의 의병이 체포되거나 학살당하였다. 호남 지역에 이어, 경상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산악을 근거지로 장기전을 모색하였던 의병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유생 의병을 이끌었던 유인석 이나 포수 출신 의병장 홍범도처럼 국경을 넘어 투쟁을 준비할 새로운 근거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승리를 확신해서였을까? 아니면 "몸은 죽을망정 마음마저 변할쏘냐. 의는 무겁고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 , 신망심부변 의중사유경)"라고 말한 정환직 의병처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순간 5, 6명의 의병이 뜰에 나타났다. 나이는 18세에서 26세 사이였고, 그 중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한 청년은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머지는 한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총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도 성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 중 인솔자인 듯한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 매켄지, 《자유를 향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

침략자를 몰아내야만 희망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의병인들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해외의 독립군,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나라 밖에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만들다

유사시 나라 안에서 세울 수 있는 계책이 마땅치 않다. 국경을 넘어 그 땅을 차지하고 국내의 충의호걸을 맞이하여 형세를 기다리면서 기회를 보아 부흥을 기하고 싶다.
- 유인석, 《의암집》

유인석이 나라 밖에 독립 운동 근거지를 만들고자 한 때는 1907년, 13도 창의군이 서울을 공격하러 나섰을 때였다. 연해주에서 의병을 이끌던 이범윤과 부대를 이끌고 간도로 들어간 홍범도의 생각도 유인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투쟁을 위해 국경을 넘은 이들은, 여전히 고국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며 살고 있던 간도나 연해주의 이주민들과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였다. 간도와 연해주는 그리하여 일제에 맞설 새로운 투쟁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① 서간도 삼원보
1911년, 이동녕과 이회영, 이상룡 등이 집단적으로 이주하면서, 경학사와 부민단이란 자치 조직을 만들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이때 만들어진 신흥 강습소(훗날 신흥 무관 학교) 출신 인사들은 이후 일제와 맞서는 무장 독립군이 되었다.

② 북간도 용정
이주 한인이 가장 많았던 북간도의 용정촌과 명동촌에서는 간민회나 중광단 같은 이주 동포 조직을 중심으로 민족 운동이 활발하였다. 이곳에는 서전 서숙이나 명동 학교 같은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으며, 무장 독립군을 조직하고 투쟁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③ 연해주 신한촌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 잡은 한인 집단 거주지였던 신한촌은 1910년에 강제 병합 무효 선언을 하고 강력한 반일 운동을 벌이던 수많은 한인이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곳이기도 하다. 1911년 이후 자치 조직인 권업회(1911~1914)와 대한 광복군 정부(1914)가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을 사랑한 서양인들

영원히 한국인이길 바랐고, 한국인으로 죽어 한국 땅에 묻힌 베델은 "나는 죽지만, 신보(《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려 한국 동포를 구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죽음을 애석해한 박은식은 "하늘이 공을 보내고 또다시 데려갔구나. 구주(유럽)의 의혈 남아가 조선의 어둠을 씻어 내고자 삼천리 방방곡곡에 신문지를 뿌렸네. 꽃다운 이름 남아서 다함없이 비추리."라는 애도의 글을 바쳤다.

개항과 함께 베델처럼 한국을 찾은 서양인이 적지 않았고, 그들 가운데에는 진정 한국을 사랑한 사람도 많았다.

· 베델(E.T. Bethell, 한국명 배설, 1872~1909)

영국의 언론인. 1904년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왔으며, 같은 해 7월 양기탁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한국 법이나 일본 법을 적용받지 않는 치외법권을 활용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비판하고 항일 운동을 후원하였다.

· 헐버트(H.B. Hulbert, 1863~1949)

1886년, 23세의 나이로 한국에 와서 5년간 육영 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때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 환경과 정치, 학문을 종합적으로 소개한 《사민필지》를 편찬하였다. 1895년부터 10년 동안 한성 사범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교재를 개발하였다. 1905년과 1907년 두 차례 고종의 밀사로서 을사조약이 무효란 고종의 뜻을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 알리는 일을 맡았다. 해방 후 한국에 왔다가 세상을 떠나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사민필지》관리든 백성이든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란 뜻에서 사민필지 ()라 이름지었다. 1889년에 한글본으로 초판이 간행되어 교과서처럼 널리 쓰였다.

식민지 조선으로

신민에서 인민으로, 다시 신민으로

만일 조선 신민이 신민의 도리를 할 것 같으면 어찌 대군주 폐하께서 곤란하신 일을 그렇게 여러 번 보시고, …… 외국 사람들이 조선 인민을 사람으로 대접하게 힘쓰는 것이 마땅하거늘, 이런 때를 당하여 이런 마음은 조금치도 없고 시절 만난 줄로 알고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되든지 못된 짓을 하고…….
- 《독립신문》, 1896. 3. 30.

신민이나 인민, 백성은 모두 조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뜻이 어떻게 다르기에 《독립신문》은 이렇게 구분하여 썼을까?

'신민()'은 왕이 있는 나라의 관리나 일반민, 곧 왕이 아닌 모든 국가 구성원을 뜻한다. 백성도 이와 비슷해서 왕이 아닌 모든 사람, 또는 벼슬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뜻한다. 잘 다스려야 할 대상이란 점에서 신민과 백성은 같은 말이다.

《독립신문》에 많이 등장하는 '인민()'은 평등한 국가의 구성원이란 뜻이다. 민에게 자유와 권리를 주어야 한다며 개화파가 널리 쓴 말이다. 독립 협회는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처럼 운영하자고 주장하였다. 군권에 대항하는 민권이 있으며, 정치의 주체가 인민이란 점도 분명히 밝혔다. 반면에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를 선언한 대한 제국 황제와 관리들은 신민이란 말만 사용하였다. 주권자는 오직 군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인정하든 않든, 이미 수많은 인민이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며 권리의 주체란 생각을 가졌고 자기 생각을 실천하였다. 어떤 이는 총칼을 들고 외세에 맞서는 의병이 되었고, 어떤 이는 자기 재산을 내놓아 학교를 세웠다.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 애쓰던 이들은 신분, 성별, 지역의 차이를 뛰어넘어 단결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군주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전제 군주제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준이 중심이 된 헌정 연구회는 국권을 잃어버릴 위기에 빠진 이유를 전제 군주제에서 찾고, 인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입헌 군주제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신민회 회원 중에는 모든 국민이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공화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스스로 인민이고자 한 이들에 의해, 인민이 주체가 되는 자유롭고 평등한 국가가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신민이길 강요하는 또 다른 권력, 즉 더욱 폭력적인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공립 신보》을사조약 이후 국내에서 발간되는 잡지에는 황실과 국가, 왕권과 국권의 분리를 주장하는 기사가 종종 실렸다. 이 무렵 미국에서 발행된 교민 신문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권 상실의 원인으로 황실의 존재를 지적하면서, 혁명을 통해 국민이 주인이 되는 신국가를 건설해야만 국권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였고, 많은 나라에서도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어 있었다. 사진은 1905~1909년 사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공립 신보》다. 안창호가 회장인 공립 협회에서 발행하였다.

관민 공동회독립 협회는 누구든 나와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정치 집회(관민 공동회)를 자주 열었다. 백정인 박성춘은 이 집회에서 연설을 하였는데, 스스로 정치의 한 주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라와 백성이 잘 살기 위해서는 관민이 힘을 합해야 합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하니 그 힘이 튼튼해집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

대한 제국에서 식민지 조선으로

1910년 8월 22일, 총리 대신 이완용과 내부 대신 박제순 등이 참가한 어전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일본이 보내 온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는 이른바 한·일 병합 조약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총리 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서명한 이 문서는 8월 29일에 공개되었다. 이날부터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가 내걸렸다. 대한 제국은 이렇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순종)는 일본 황제의 신하인 창덕궁 이왕 전하가 되었으며, 통치권은 일본 황제가 임명한 조선 총독이 행사하게 되었다. 친일적이며 일본어에 능통한 1/3 정도를 제외한 대한 제국 관리 대다수가 자리에서 쫓겨났고, 그 자리는 일본인들로 메워졌다. 조선 총독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 지휘권도 가진 최고의 권력자였다. 새 법을 만들거나 정책을 추진할 때 한국인의 의사를 수렴하고 반영할 수 있는 절차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한국인들은 단체를 만들거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조차 부정당하였다.

일제는 현역 군인을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군대의 경찰인 헌병이 경찰을 지휘하며 경찰 업무를 맡는 헌병 경찰 제도를 시행하였다. 헌병 경찰은 한국인의 생활을 철저히 감시하였고, 전쟁 때 군인에게나 적용할 법한 가혹한 규칙을 만들어 한국인을 통치하였다. 일제는 동양 평화를 이루고 조선을 문명화하겠다며 병합을 추진하였다.

일진회 같은 친일 단체도 "조선을 문명화하기 위해서는 합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며 강제 병합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일 병합은 항일 투쟁을 짓밟고 이루어진 국권 강탈일 따름이었다. 일제의 통치는 대다수 한국인을 배제한 이민족 통치였으며, 인민의 권리를 철저히 부정한 더욱 후퇴한 군주제이자 폭력적인 군사 통치였다. 일제의 통치 아래 모든 한국인은 일본 황제의 신민이길 강요받았다.

한·일 병합

을사조약 이후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의 내정을 감독하는 한편, 외교권을 대신 행사하였다. 1907년에는 군대를 해산시키고 각부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였다. 1909년에는 사법권을, 이듬해에는 경찰권을 박탈하였다. 1910년의 강제 병합은 이 과정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① 송병준
일본에 강제 병합을 청원한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대표였다.

② 이완용
을사조약을 지지하고, 일제에 국권을 넘겨준 대표적 친일 매국노이다.

③ 근정전
조선 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의 중심 건물이다.


조선 총독부 1926년 일제가 식민 통치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경복궁의 일부를 헐고 근정전 바로 앞에 세웠던 총독부 청사는 이후 19년간 일제 식민 통치와 수탈의 본거지로서 악명을 떨쳤다.

일제가 조선인에게 적용한 악법들

일제는 차별 없이 한국인을 대한다고 떠들었으나 그 어떤 민주적 제도도 도입하지 않았을뿐더러, 한국인들이 개혁을 통해 폐지한 낡은 제도들을 되살려 식민 통치를 강화하였다. 일제가 만든 악법은 근대 개혁 운동을 통해 이룩한 민주적 성취를 짓밟은 것이며, 국가 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짓밟는 잘못된 관행을 만들었다.

▶ 조선 태형령(1912)

태형은 갑오개혁 때 비인간적 처벌이라 하여 폐지되었으나, 일제는 오직 조선인에게만 적용할 조선 태형령을 제정하였다.

"태형은 수형자를 형판 위에 엎드리게 하고, 그 자의 양팔을 좌우로 벌리게 하여 형판에 묶고 양다리도 같이 묶은 후 볼기 부분을 노출시켜 태로 친다. 형 집행 중에 수형자가 비명을 지를 우려가 있을 때에는 물에 적신 천으로 입을 막는다."
- 조선 태형령 시행 규칙, 《관보》, 1912. 3. 18.


▶ 보안법·신문지법(1907)


자강 계몽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단체를 해산시키고, 집회를 제한 또는 금지하거나 해산할 수 있으며, 신문 발매와 반포를 금지하고 발행을 정지 또는 금지할 수 있다."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하였다. 국권 강탈 이후 이 법이 더욱 강화되어, 한국인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아예 누리지 못하였다.

▶ 조선 교육령(1911)

"조선에서의 교육은 …… 제국 신민으로서의 자질과 품성을 갖추게 하는 데 있다." 조선 교육령을 발표하면서 총독 데라우치가 한 말이다. 학교에서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기르는 수신 교육과 일본어 교육이 중시되었는데, 그나마 조선인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연한을 제한하고, 대학 설립을 금지하였다.

▶ 경찰범 처벌 규칙(1912)

헌병 경찰은 정식 법 절차나 재판 없이 한국인을 잡아가두거나 벌금형에 처할 수 있었다.

2. 일정한 주거 또는 생업 없이 이곳 저곳 배회하는 자. …….
5. 협력, 기부를 강요하고 억지로 물품의 구매를 요구하며, …….
21. 남을 유혹하는 유언비어 또는 허위 보도를 하는 자. …….
64. 관서의 독촉을 받고도 굴뚝 개조, 수선, 청소를 소홀히 하는 자. …….
- 《조선 총독부 관보》, 1912. 3. 25.

민족주의와 공화주의가 자라나다

러·일 전쟁에서 강제 병합까지 황실과 광무 정권은 일제에 맞서기보다 협상을 선택하였고,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광무 정권 내내 막대한 예산을 쏟아 육성한 신식 군대는 의병 진압에 활용되다가 해산되었다. 정부가 신민으로 규정한 인민들은 목숨을 걸고 항일 투쟁에 나섰으나, 친일 매국노로 가득 찬 정부는 황제의 명령이란 형식을 빌려 항일 운동을 탄압하였으며, 결국 강제 병합을 받아들였다.

황실이 국가를 대변하지 못하고, 국가가 민족을 배반하는 상황이었다. 황실은 충군애국을 이야기하였으나,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될 수 없었으며, 오히려 나라가 제정한 법을 지키는 것이 민족을 배반하는 일이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가 만든 국법 질서를 파괴하며 싸웠다. 함께 싸우며 신분과 지역, 성별의 차이를 뛰어넘었다. 왕 이전에 국가가 있고, 조선이나 대한 제국 같은 국가 이전에 국민이 있으며, 국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 온 하나의 민족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은 단군 시조 이래 이천만 자손이 삼천리 강산에서 대대로 살아온 공동체이니 그것이 곧 국가이며, 국가는 모든 동포의 공유물이라.(〈민족과 국민의 구별〉)"고 생각한 신채호는 "전제 봉건의 낡음과 고루함이 사라지고 입헌 공화의 복음이 두루 퍼져 국가는 인민의 낙원이 되며, 인민은 국가의 주인이 되는(〈20세기 신국민〉)" 세상을 꿈꿨다. 민족을 앞세운 이들은 대부분 공화주의자였다. 제국주의와 맞서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앞세워야 하며, 민족이 하나로 단결하기 위해서는 왕과 신민, 양반과 상민, 남녀의 차이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믿었다.

신채호(1880~1936)《대한매일신보》 기자이며 신민회 회원이었던 신채호는 역사 연구와 저술을 통해 민족 정신을 탐구하고 애국심을 높이려 하였다. 그는 〈민족과 국민의 구별〉, 〈20세기 신국민〉 등의 글을 통해 공화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훗날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역사 연구를 통해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초를 쌓았다.

나철(1863~1916)1907년에 이완용 등 을사조약에 찬성하였던 매국 대신 암살을 시도하였다가 유배된 뒤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오기호 등과 함께 단군을 교조로 민족 고유의 하느님을 신앙하는 대종교를 창시하였다(1909). 대종교는 단군을 국가의 조상으로 삼고, 국사를 연구하고 국어와 국문을 발전시키며, 민족 영웅을 추앙하려는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위 사진은 서울 사직동에 있는 단군 성전이다.

독립 운동은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일

황제가 주권을 일본 황제에게 넘겨준 1910년 이후 대한 제국이 사라졌다. 그러나 황제의 주권 양도를 국민들이 인정하거나, 일본이 주권 양도에 대한 한국인의 동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 한국인들이 이에 반대하며 주권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의병 전쟁에 참가하였던 양반 유생들 상당수가 '독립을 되찾아 황제의 자리를 찾아 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실천하였다. 이처럼 독립을 이전의 군주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생각을 복벽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계몽 운동에 참가하였던 지식 계층은, 독립이란 황제가 포기한 주권을 인민이 되찾는 과정이며, 아래로부터 민주 공화정의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1911년 청에서 황제 제도가 타파된 신해혁명 이후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다. 독립 운동가들이 대단결하여 임시 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한 대동 단결 선언은 이 같은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융희 황제(순종)가 삼보(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경술년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즉 민권이 발생한 때요, 구한국 마지막 날은 신한국 최초의 날…….
- 대동 단결 선언, 1917

해외 주요 독립 운동 지도자들 사이의 이 같은 합의는, 독립 운동은 인민 주권의 원리에 따라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는 운동이라는 공감대가 이루어졌음을 잘 보여 준다.

국권을 빼앗긴 뒤, 한국 황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본 황제가 있는데 한국 황제가 또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많은 한국인이 황실에 기대어 국권 회복을 시도할지도 모르는데 혹시 황실을 없애 버리지는 않았나요?

"일본군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가 각각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는 존칭과 위엄 및 명예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지급한다."

한국 황제가 일본 황제에게 통치권을 넘기고, 이를 일본 황제가 수락한다는 내용의 한·일 병합 조약 세 번째 조항입니다. 약속은 거의 지켜졌어요. 일본 황실은 해마다 많은 돈을 한국 황실에 내놓았고, 적절한 지위도 누리게 하였다. 물러난 고종 황제는 이태왕으로, 순종 황제는 이왕으로 불렸다.

황제 즉위식이 열렸던 환구단이 헐리고 그 자리에 호텔이 세워졌다. 또,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이 들어서고, 경복궁의 많은 건물을 헐고 조선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훼손된 환구단, 창경궁, 경복궁 등은 모두 대한 제국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덕수궁에 살던 고종은 1919년에, 창덕궁에 살던 순종은 1926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갇혀 죽은 듯이 지냈어도, 그들을 잃어버린 나라의 상징으로 여긴 이들이 많았지요. 두 황제의 장례에 맞춰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에요.

황태자로 책봉되기까지 했던 영친왕 이은(1897~1970)은 일본에 볼모처럼 끌려갔어요. 그곳에서 일본 왕족과 혼인하고, 일본 군인이 되었으며, 1963년까지 일본에서 살았다. 

고종의 하나밖에 없는 딸 덕혜 옹주(1912~1989)도 일본 귀족과 혼인했다지요. 정략 결혼의 희생물이 된 셈인데, 젊어서부터 치매와 실어증으로 어렵게 살았답니다.

고종의 또 다른 아들 의친왕(1877~1955)은 독립 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1919년에는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하려 한 적도 있다지요. 

그때 일본군에 잡혀 되돌아온 뒤 오랫동안 감시를 받았대요. 

그때 의친왕이 탈출하는 데 성공하고, 그래서 황실이 독립 운동에 앞장 섰다면 ……. 지금 우리나라도 혹시 입헌 군주제를 하고 있지 않을까? 아직 입헌 군주제가 남아 있는 일본이나 영국처럼 말이죠.


무단 통치와 문화 통치.

주개념

1) 무단 통치 : 헌병 경찰 통치(1910년대)

조선 총독부는 일제 식민 통치의 중추 기구로서 조선 총독은 현역 대장 중에서 임명하였다. 

총독은 행정·입법·사법권과 군 통수권을 장악하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근대적 발전을 저해하였다.

일제는 헌병 경찰을 통해 우리 민족을 무력적으로 탄압하였다. 

이 시기 태형 제도가 부활되었고 범죄에 대한 즉결 처분권을 행사하였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권을 완전 박탈하였다. 

관리와 교사들까지도 칼을 차고 제복을 착용하였다. 

중추원을 총독부의 자문 기구로서 한국인의 정치 참여를 위장하고 친일파를 회유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2) 기만적 문화 통치(1920년대)

일제는 3·1 운동에서 나타난 조선 민족의 거족적 저항을 무마하고, 세계 여론이 악화되면서 식민통치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그 본질은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 양성을 통한 민족·이간 분열책으로 민족운동 진영 내부에서는 자치 운동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타협론)

내용을 살펴보면 총독에 현역 육, 해군 대장을 임명하던 것을 문관 총독도 임명 가능하도록 법령을 개정했으나 광복될 때까지 한 번도 임명된 적이 없었다. 경찰 제도에 있어서도 헌병 경찰을 보통 경찰로 전환했으나 오히려 경찰 인원과 예산 등은 3배 이상 증가하였다. 

치안 유지법을 제정하고 많은 독립 인사들을 탄압하였다. 

언론 정책으로는 조선, 동아일보 등 민족계 신문의 발행을 허용했으나 철저한 사전 검열 제도를 시행하였다. 교육 정책에 있어서는 교육 기회를 확대한다고 선전하여 학교를 설립하였지만 그것은 식민 지배에 순응하는 노예적 인간을 양성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우민화 교육, 초등 교육, 기술 교육에 치중하는 기만성을 보이게 된다.

2. 확장 개념

1) 헌병 경찰 통치의 실상

강도 일본이 헌병 정치, 경찰 정치를 행하여 우리 민족은 조그만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 냉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눈뜬 소경이 되고 말았으니, 자식을 낳으면 일어를 국어라, 일본글을 국문이라 가르치는 노예 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조선 역사를 읽게 된다면 한강 이남을 예로부터 일본 땅이었다는 엉터리 역사를 배우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면 강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정치를 찬양하는 노예적 글 밖에 없으니, 똑똑한 자식을 낳으면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는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 사건의 이름 아래 감옥으로 끌려가 주뢰, 가쇄, 단근질, 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발톱 밑을 쑤시는, 손발을 달아 매고 콧구멍에 물을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온갖 악형을 다 당하고 요행히 살아서 감옥 문을 나오더라도 일생 동안 불구가 되어 폐인이 될 뿐이며, 그렇지 않을지라도 창의적 생각이 짓밟히고, 진취적이고 활발한 기상은 소멸되어 찍도 못하게 압제를 받아, 반도 삼천리가 하나의 큰 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인류로서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본능까지 잃어 노예나 기계가 되어 강도 일본의 사용품이 되고 말 것이니··· [신채호, 조선 혁명 선언(1923)]

2) 문화 통치의 의도

하나는 강연이나 글을 통해서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독립노선을 추구토록 한 것이다.

일본은 일부의 쟁의를 허용하여 주기도 했고 경성제국대학에 맞서 조선인의 대학을 세워야한다는 민립대학운동을 묵인했고, 우리의 물건을 써야 한다는 물산장려운동을 억누르지 않았다. 

농촌 계몽운동이나 노동야학운동 같은 것도 적극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일제 당국으로서는 무장항쟁의 기세를 누르고 민족 감정의 분출구를 터 주려는 속셈에서 나왔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총독부 당국이 온갖 매수와 회유로 일제의 협력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종래 한일합방 당시의 친일파들은 민중의 신망을 잃었으므로 젊고 지식 있는 명사들을 친일파로 만들어 이용하려 한 것이다. 

천도교 세력을 입은 최린을 매수했고,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던 이광수를 회유했고, 사학자로 명망이 높은 최남선을 끌어들였다. 


일제 당국은 이들을 시켜 조선 민족이 열등하다는 민족개조론(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을 펴게 했고, 조선의 자치권(독립이 아니라 자치!!! -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조선 총독부에 청원하게 하기도 했다. 

유력한 인사들에게도 학교를 설립하게 하기도 하고 회사를 만들게 하고 단체를 결성하게도 하여 간접적 친일파를 만들어 갔다.

3. 관련 지식

1) 조선 태형령

• 태형은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서 비밀리에 행한다.
• 조선인에 한하여 5대 이상의 태형에 처할 수 있다.
• 태는 길이 1척 8촌, 두께 2푼 5리, 넓이는 위가 7푼, 아래가 4푼 5리로 한다.
• 수형자를 형판 위에 엎드리게 하고 손과 발을 묶은 후 볼기를 노출시켜 태로 친다.

2) 총독 사이토의 문화 통치 관련 방침(일부)

• 귀족, 양반, 유생, 부호, 교육가, 종교가에 침투하여 계급과 사정을 참작하여 각종 친일 단체를 조직하게 할 것.

• 종교적 사회 활동을 이용하기 위해 사찰령을 개정하고 불교 각 종파의 총본산을 경성에 두고 이의 관장과 회장에 친일 분자를 배치하는 한편, 기독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편의와 원조를 제공할 것.

• 친일적 민간 유지들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고, 수재 교육의 이름 아래 우수한 조선 청년들을 친일 분자로 양성할 것.

• 조선인 부호, 자본가에 대해 일·선() 자본가의 연계를 추진할 것.


청년운동

근대적 교육기관이 점차 확산되면서 신교육을 받은 청년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3 · 1운동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3 · 1운동 이후 일회적이고 분산적인 운동보다는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이 필요하다고 보고 각지에서 청년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청년단체의 경우, 초기에는 지방 유지나 명망가들에 의해 결성되어 수양 · 계몽 활동에 주력했다. 그리고 이들은 전국적인 조직으로서 1920년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했다.

116개 청년단체를 망라한 조선청년회연합회는 교육진흥 · 산업진흥 · 도덕수양 등을 통한 지 · 덕 · 체의 함양을 활동 목표로 내걸었다. 따라서 청년회는 강연회, 토론회, 야학강습회, 운동회 등을 주된 사업으로 삼았다. 또 청년회는 ‘문화운동’의 주력단체로서 각 지방에서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기성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지회를 만들 때 실질적인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3 · 1운동 직후부터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조는 청년층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일부 청년들은 1919년 하반기부터 사회주의 사상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청년들은 1922년 1월 김윤식의 사회장 문제를 계기로 민족주의자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청년회연합회 내부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서울청년회 등 19개 단체가 연합회를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분리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서울청년회 등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은 1923년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는 물산장려운동을 비판하고 사유재산제 철폐 등 사회주의 구호를 내걸었다. 대회에 참석했던 각 지방 청년회 간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각 지방에서 청년회의 혁신운동을 시작하여, 기존의 지방 유지 중심의 간부들 대신 혁신청년들로 간부진을 새로이 구성했다.

이와 같은 혁신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각 지방 청년단체는 서울청년회나 화요회와 연결되면서 각기 사상단체를 만들어 사회주의 사상학습을 시작했다. 이들은 각 지방에서 노동운동, 농민운동단체를 만드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노동쟁의나 소작쟁의를 적극 지원했다. 1924년에는 혁신 청년회들의 전국적 중앙기관으로서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었다. 그에 따라 기존의 조선청년회연합회는 자진해산했다.

조선청년총동맹에는 전국 250여 개의 청년단체가 참여했다. 그런데 지역별로 흩어져 있던 단체들이 개별적으로 총동맹에 가입했기 때문에, 이들을 일률적으로 통제할 중간기구나 조직이 없었다. 청년총동맹은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27년 반(리)-지부(면)-청년동맹(부 · 군)-도연맹(도)-총동맹으로 이어지는 조직체계를 갖추고, 기존의 개별 청년단체를 모두 해산하도록 했다.

1927년 2월 신간회 본부가 창립되자 각 지방에 신간회 지회가 만들어졌다. 이때 신간회 지회 창립의 주역이 된 것은 그동안 지역 청년회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해온 이들이었다. 25세 혹은 30세 이상의 청년들은 이제 청년회에서 신간회 지회로 자리를 옮겼으며, 새로운 세대가 청년회를 주도하게 된다.

이후 청년운동은 여전히 청년들의 의식화와 조직화에 주력하면서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그리고 신간회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운동의 중심이 신간회로 넘어간 이후 청년회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또한 청년운동도 1928년 「12월테제」와 1930년 신간회 해소론의 등장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 일부 사회주의 청년들은 청년동맹 해소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당시 해소를 주장하던 사회주의 청년들은 조선청년총동맹을 소부르주아 및 인텔리들의 결합인 비무산자적 계급으로 규정하고, 무산계급적 의식으로 노동자와 농민 속으로 들어갈 것을 강조했다. 이렇듯 청년총동맹 해소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청년운동의 비중은 농민조합이나 노동조합의 청년부로 옮겨졌다. 청년총동맹은 1931년 5월 신간회 해소와 함께 사실상 해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사회주의 청년들은 이제 청년운동을 떠나 혁명적 농민운동, 노동운동 쪽으로 옮겨갔다.

노동운동

3 · 1운동 이후 1920년대 전반기에 이미 많은 대중적 노동단체가 조직되었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가 노동단체로서 처음 창립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노동회 · 노우회 · 노동친목회 · 노동조합 · 노동계 등의 이름을 가진 노동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들 노동단체는 앞서 본 청년단체 혹은 사상단체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으면서 조직된 것이 많았다.

조선노동공제회는 박중화 · 박이규 · 오상근 · 김명식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노동 문제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대하기 위해 기관지 『공제』를 발간하고 노동야학과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계몽적인 활동을 주로 펼쳤다. 『공제』의 필자는 대부분 진보적 지식인들이었고, 대상 독자도 노동자가 아니었다. 이 잡지는 선진적인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 일반인에게 노동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조선노동공제회의 윤덕병 · 김한 · 신백우 등은 1922년 1월 사상단체로서 ‘무산자동지회’를 결성하고 노동공제회에서 탈퇴하여 그해 10월 ‘조선노동연맹회’를 결성했다. 조선노동연맹회는 ‘신사회 건설’과 ‘계급적 단결’을 강령으로 내걸었으며, 13개 노동단체가 여기 참여했다. 조선노동연맹회는 1923년 5월 1일 최초로 메이데이 행사를 열고, 경성여자고무직공조합과 경성양말직공조합의 파업을 지원했다. 당시 조선노동연맹회는 화요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한편 1920년 5월 김광제 · 문탁 등이 노동자의 친목도모와 지위향상을 내걸고 ‘조선노동대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회장 김광제가 2개월 뒤 갑자기 사망하자 임원들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고, 결국 회장제를 없애고 집행위원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청년회 계열의 사회주의자들이 조직을 장악했다. 서울청년회 계열은 조선노동공제회의 잔류파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후 전국적으로 노동운동, 농민운동단체가 크게 늘어나자, 화요회계의 조선노동연맹회는 1923년 9월 ‘조선노농총동맹’을 발기했다. 이에 서울청년회계의 조선노동공제회 잔류파와 조선노동대회 측도 ‘조선노농대회 준비회’를 만들었다. 두 계열이 경쟁적으로 지방의 노농단체 포섭에 나서자, 지방 노농단체들은 이를 비판하면서 따로 노농단체 결성을 추진하고 나섰다.

이에 화요회계와 서울청년회계의 노농단체들은 하나의 단체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아, 1924년 4월 167개 단체 대표 204명이 모여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조선노농총동맹은 노농계급의 해방, 8시간 노동제 실시, 최저임금제 쟁취 등을 표방했으며, 이후 260여 노농단체와 53,000여 회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1920년대 전반 노동공제회, 노동연맹회, 노농총동맹 등은 소작쟁의나 노동쟁의를 직접 계획하고 지도한 예는 별로 없었고, 쟁의가 발생하면 이를 수습하기 위한 조정에 나선 경우가 많았다. 또 각 현장의 쟁의도 노동조합이 주체가 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쟁의 후에 조합이 조직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표 6>에서 보는 것처럼 1920년대 전반기 노동쟁의는 1920년에 81건으로 가장 많이 발생했고, 건당 참가 인원은 1924년에 150명으로 가장 많았다.

1920년대 노동쟁의 발생 건수와 참가 인원

<표 6> 1920년대 노동쟁의 발생 건수와 참가 인원
연도발생 건수참가 인원평균 인원

1920.

81

4,599

57

1921.

36

3,403

95

1922.

46

1,799

39

1923.

72

6,041

84

1924.

45

6,751

150

1925.

55

5,700

104

1926.

81

5,984

74

1927.

94

10,523

112

1928.

119

7,759

65

1929.

102

8,293

81

* 출전: 조선총독부 경무국, 『최근 조선의 치안상황』, 1930.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분리 원칙에 따라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또 이 시기에는 산업별 노동조합 및 지역별 노동조합 연합체가 등장했다. 산업별 노동조합으로는 조선인쇄직공청년동맹(1926.), 철공직원총동맹, 섬유노동조합 등이 결성되었으며, 지역별 노동조합연합체로는 경성노동연맹, 진주노동연맹회, 나주노동조합연맹, 광주노동연맹, 전북노동연맹, 함북노동연맹 등이 결성되었다.

1920년대 후반 들어 노동쟁의는 조직성과 강인성을 보였다. 이는 지역 및 산업별, 혹은 전국 단위 노동단체들이 조직적으로 쟁의를 지도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예를 들어 1925년 평양 · 경성의 인쇄직공파업, 1926년 목포 제유공파업, 1928년 영흥 노동자총파업(3개월 지속), 1929년 원산총파업(4개월 지속) 등은 몇 달씩 지속되었다.

또 쟁의 발생 지역이 전국 각지의 중소도시로 확대되었고, 노동조합이 광범위하게 조직되었으며, 노동운동의 대중성이 강화되었고, 각지의 쟁의에 대한 전국적 지원 양상이 나타났다. 앞의 <표 6>에서 보듯이 1920년대 후반에 일어난 노동쟁의는 1928년에 119건으로 가장 많았고, 건당 참여 인원은 1927년에 112명으로 가장 많았다.

192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노동쟁의는 1929년 원산총파업이었다. 이 총파업은 1928년 9월 라이징선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파업은 상급단체로서 단체교섭권을 가진 원산노동연합회가 개입하면서 원산노동연합회 대 총독부 지배당국 및 자본가의 대립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일제는 경찰과 소방대는 물론, 일본군 19사단 함흥연대 4백여 명을 투입하여 파업 노동자를 위협했고, 자본가단체인 원산상업회의소는 원산노동연합회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29년 1월 원산노동연합회는 총파업을 선언하고 합법적인 농성투쟁과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총독부는 무력을 동원하여 파업을 강제진압했다. 이 파업은 원산 인구 3분의 1이 참여하여 4개월간 투쟁한 파업이었다. 비록 총독부 경찰과 자본가의 탄압으로 실패했으나, 원산총파업은 국내외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920년대 후반 노동운동의 또 하나 특징은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결합 양상이었다. 1925년 치안유지법은 노동운동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으로 이어졌으며, 이로써 노동운동은 단순한 경제투쟁을 넘어 일제에 반대하는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은 임금인하 반대, 노동시간 단축 등의 문제는 해당 자본가와 타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자와 대결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농민운동

1920년 4월에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는 1922년 7월 「소작인은 단결하라」라는 선언문에서, 당시 일각에서 유행하던 노자협조주의를 ‘이리로 하여금 양을 지키게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 선언문은 소작농의 단결을 바탕으로 소작인조합을 조직하는 것이 소작농의 이익을 지키는 데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선언 이후 전국 각지에 소작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으며, 광주 · 진주 · 대구 등지의 노동공제회는 소작인부를 설치하여 소작단체를 지원했다.

그런 가운데 지주에 저항하는 소작쟁의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소작쟁의는 일찍부터 논농사가 발달하고 소작관계가 발달한 삼남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처음에는 소작료 인하 및 지세공과금의 지주부담을 요구하는 쟁의가 많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소작권 이동으로 인한 쟁의가 급증했다.

또 <표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20년대에 가장 많은 소작쟁의가 발생한 해는 1923년과 1924년이었다. 1922년 말에 일어난 순천 소작쟁의는 1923년 전국적인 소작쟁의 발생을 유도했고, 1924년 초에는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나 역시 전국적인 소작쟁의 발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쟁의들이 경찰의 강력한 탄압에 부딪치고 다수의 소작인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빚어지자 1925년 이후에는 소작쟁의가 크게 줄어들었다.

<표 7> 1920년대 소작쟁의 발생 건수와 참가 인원

<표 7> 1920년대 소작쟁의 발생 건수와 참가 인원
연도발생 건수참가 인원

1920.

15

4,140

1921.

27

2,967

1922.

24

2,539

1923.

176

9,060

1924.

164

6,929

1925.

11

2,646

1926.

17

2,118

1927.

22

3,285

1928.

30

3,576

1929.

36

2,620

* 출전: 조선총독부 경무국, 『최근 조선의 치안상황』, 1930.

1920년대 전반기의 대표적인 쟁의는 6~8할의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해줄 것을 요구한 무안군의 암태도 소작쟁의(1924.)였다. 이들은 1년여에 걸친 투쟁 끝에 4명이 옥고를 치르는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소작료 4할을 관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쟁의에 자극받아 인근의 섬들과 전국 각지에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쟁의가 일어났다. 또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의 동양척식회사농장에서는 소작료 인상에 반대하는 쟁의(1924.~1925.)가 일어나 동척농장 직원과 농민들 사이에 충돌이 빚어졌으며, 이 사건으로 소작인 6명이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시기 대규모 소작쟁의들은 일시적이거나 상시적인 조직이 결성되어 농민들의 투쟁을 이끌어가는 특징을 보였다.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동맹, 공동경작동맹, 불경동맹, 아사기아동맹, 추수거부, 시위농성, 다른 사회단체와의 연대투쟁 등을 통해 지주와 경찰에게 맞섰다. 대규모의 격렬한 집단적 소작쟁의는 동척, 일본인 대지주, 조선인 대지주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또 이 시기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수리조합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투쟁도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총독부 권력은 전면에 나서서 지주에 대한 소작인들의 투쟁을 직접 탄압했다. 그것은 지주의 고율의 소작료가 안정적으로 확보되어야 다량의 미곡이 시장에 나올 수 있고, 나아가 다량의 미곡이 일본으로 실려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앞서 본 것처럼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이 전국 각지의 167개 노동자 · 농민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노농계급의 해방과 신사회의 실현’을 내걸고 창립되었다. 노농총동맹은 창립과 동시에 조선노농총동맹-군 단위 연합기관-면 단위 소작단체 등으로 이어지는 중앙집권적 조직을 구상했다. 그러나 당시의 지역 실정이 이런 단계에 이르지 못해 1920년대 중반까지는 구상에 머무르고 있었다.

노농총동맹은 창립 당시 ‘소작료는 3할 이내로 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는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고 당이 조선노농총동맹을 지도하면서 ‘동척 폐지, 일본인 이민 폐지, 군 농회 철폐, 일본인 지주에 대한 소작료 불납’ 등으로 바뀌었다. 전체적으로 일제에 대한 투쟁이 더 강조된 것이다. 1926년 발표된 「조선공산당선언」은 농민운동의 궁극적 목표로 지주제 타파와 토지혁명을 제기했다.

1926년경부터는 “농민운동은 소작농이 중심이 되지만 자본주의 미발달 단계에서는 자작농을 포함한 농민대중의 대중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운동론 아래에서, 소작인조합은 자작농까지 포함하는 농민조합으로 개편되었다. 그 과정에서 1군 혹은 1면 1조직 원칙도 관철되어 군 혹은 면 단위에 하나의 농민조합이 결성되었다.

192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쟁의로는 평북 용천군 불이흥업주식회사의 서선농장 소작쟁의(1926.~1930.)를 들 수 있다. 이 쟁의에서 농민들은 소작권 보장, 수리조합비의 지주부담, 소작료 정액제 실시 등을 주장했다. 그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수리조합 반대투쟁(부천 수리조합 등)이 전개되었다.

1929년에는 갑산 화전민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화전민은 전국적으로 115만 명에 달했는데, 갑산의 영림서에서 화전민 80여 호에 방화하여 1천여 명의 화전민들을 쫓아내는 일이 있었다. 이에 신간회는 김병로 등을 조사위원으로 파견하여 보고회를 가지려 했지만 경찰이 이를 금지시켰다. 신간회는 김병로 등을 총독부에 보내 정무총감에게 항의문을 전달했다. 또 성진청년동맹에서는 이 사건을 소재로 수천 명의 청중을 모아 연극을 공연하다가 6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독립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치다.

운동의 추진과정

3 · 1운동은 한국 민족이 일제의 한국병합, 즉 식민지화에 대한 원천적인 거부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을 표시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3 · 1운동의 동인을 찾는다면 우선적으로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 민족의 거부 의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왜 한국인들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1919년이라는 시점에 전 민족적 봉기를 감행했을까. 이는 당시 국제정세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10년대는 세계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국이 무너지고 공화제국가인 중화민국이 출범했다.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1918년에는 독일 제정이 무너지고 이듬해 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런 가운데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이 1918년 말 종식되면서 세계정세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새로운 전후질서의 14개조 원칙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비밀외교의 폐지, 민족자결주의, 무병합 무배상, 그리고 국제평화 유지기구인 국제연맹의 결성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4개조 원칙 가운데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식민지나 반식민지 처지에 있던 약소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따라서 많은 약소민족들은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었고, 한국의 지식인들도 민족자결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이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다. 이때 여운형은 그를 만나 미국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크레인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인 대표를 파견할 것을 권유하고, 국내외에서 한국인들이 독립을 바라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그 대표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여운형 · 장덕수 · 조동호 · 선우혁 등은 즉각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의하고, 이를 위한 조직으로 ‘신한청년당’을 만들었다. 여운형은 1919년 1월 톈진에 있던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가줄 것을 부탁했다.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 · 8독립선언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에 따라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2백여 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선우혁은 1919년 2월 조선에 들어와 선천 · 평양 등지에서 기독교계의 이승훈 · 양전백 · 길선주 등과 접촉하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일으켜줄 것을 당부했다. 여운형은 또 직접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에 가서 전러시아조선인대회에 참석하고,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갈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한편 국내에서도 운동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 · 권동진 · 오세창 · 최린 등은 1918년 말부터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1차 대전 종전에 따른 독립운동 혹은 자치운동에 관해 논의했으며, 1919년 1월 중순경 만세시위운동의 형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천도교 지도자들이 이런 합의를 하게 된 데는 일본 유학생 송계백이 도쿄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현상윤 · 최린 등에게 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천도교계는 만세시위운동을 결정하면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 원칙을 정했다. 한편 최린 등은 김윤식 · 한규설 등 구한국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에게도 동참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기독교계도 독자적인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양의 기독교계는 선우혁을 통해 상하이의 소식을 듣고, 1919년 2월 중에 교회 신자들과 기독교계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천도교 측이 2월 7일경 평양에 사람을 보내 이승훈을 서울로 불렀다. 이승훈은 서울로 가서 천도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운동을 일원화하는 문제에 관해 협의했다.

2월 8일 도쿄에서 2 · 8독립선언이 있자, 이 소식에 자극을 받은 서울의 학생들도 따로 운동을 준비했다. 김원벽 · 강기덕 등 전문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학생들은 3월 5일 시위를 갖기로 계획했다.

2월 24일 천도교와 기독교계는 마침내 연합에 합의하고 학생들에게도 함께 운동을 전개하자고 요청했으며, 불교계도 끌어들였다. 하지만 유림과의 연합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곽종석 등 유림은 뒤에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파리장서를 따로 보내게 된다.

천도교와 기독교계의 운동 지도부는 운동의 방법으로 ① 독립을 선언하고, ② 일본 · 미국 ·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며, ③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선언이었다. 운동 지도부는 독립선언에 서명할 33인을 선정하는 한편, 독립선언문의 작성을 최남선에게 맡겼다. 선언문의 인쇄는 천도교 측이 맡았으며, 인쇄가 완료된 선언문은 전국 주요도시의 기독교와 천도교 조직에 전달되었다.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서명자들의 모임이 열렸다. 이날 밤 서명자들은 독립선언식을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이 흥분한 학생들과 대중에 의해 폭동으로 격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의 전개

국내의 만세시위운동은 크게 3단계로 나뉜다. 제1단계는 3월 상순의 발발 단계이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는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가운데 29인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따로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선언식을 마친 뒤 29인의 대표는 바로 경찰에 연행되었고, 학생들은 서울 시가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민족대표’로 서명한 이들은 모두 종교인들로 독립선언식을 갖는 데 그쳤고, 대중들을 시위현장에서 지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촉발함으로써 주어진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시각 서울 외에도 평양 · 진남포 · 안주 · 의주 · 선천 · 원산 등 주요도시에서 동시에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들 지방도시의 시위 주모자들은 기독교 · 천도교의 조직을 통해 서울과 사전에 연락을 주고받았고 선언문도 이미 전달받은 상태였다. 3월 상순의 만세시위는 특히 북부 지방, 부청 · 군청 소재지,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주로 발생했다. 서울의 학생들은 예정대로 3월 5일 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제2단계는 3월 중순의 확산 단계이다. 이 시기 만세운동은 청년 · 학생 · 교사 등 지식인,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에 의해 전국 소도시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남부 지방, 면 단위 이하의 농촌 지역, 심지어 산간벽촌에 이르기까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참가계층의 폭도 넓어져 학생, 교사, 하층 종교 지도자, 학교 졸업자뿐만 아니라 노동자, 소부르주아, 하급관공리, 양반유생 등이 운동에 참여했다.

운동의 양상도 달라져 계급 · 계층 간, 종교단체 간 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시위 자체의 조직화 · 지속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또 지역에 따라 각종 비밀결사, 결사대가 조직되어 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어갔다. 그런 가운데 소규모 지역 단위의 고립 분산성을 극복하고 생활권을 중심으로 지역별 연대투쟁을 모색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제3단계는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로 민중의 진출 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다수의 민중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시위가 다소 과격화되었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3월 상순에는 총 183회의 시위 가운데 22%가 폭력성을 띠었지만, 4월 상순에는 총 292회의 시위 가운데 47%가 폭력성을 띠는 양상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이때 이른바 ‘폭력성’이란 일본 경찰의 가혹한 탄압에 대한 정당방위의 성격을 지닌 경우가 많았고, 처음부터 공세적인 시위는 그리 많지 않았다.

3월 22일 서울에서는 노동자와 청년 · 학생들이 준비한 ‘노동자대회’에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해 시위를 전개했다. 이 시위는 이후 서울 시가지 시위의 기폭제가 되어 23일 이후 매일 밤 시내 도처에서 게릴라식 시위가 벌어졌다. 26, 27일에는 전차 종업원, 경성철도 노동자, 만철 경성관리국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서울의 시위는 이후 인근 지역, 즉 고양 · 시흥 · 부천 · 수원 · 김포 등의 시위에 불을 지폈다.

황해도 수안에서는 시위대가 헌병대 접수에 나섰고, 의주 옥상면에서는 시위대가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를 접수하려 했다. 경북 안동 임동면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관청을 타파하면 반드시 우리 조선은 독립의 운명에 도달할 것이다”라는 독립쟁취의식과 돌멩이 · 몽둥이 ·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초기부터 권력기관과 일본인 상점을 습격했다. 수원 · 안성 · 영덕 · 합천 등지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만세시위는 4월 10일을 고비로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지만 5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일본 경찰의 기록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5월 20일까지 경찰관서 87개소, 헌병대 72개소, 군청과 면사무소 77개소 등 278개 관공서가 파괴되거나 불에 탔다고 한다. 이 숫자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대응한 시위대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면 각 지방에서의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이를 중부, 북부, 남부 지방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중부 지방의 만세시위운동을 살펴보자.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3월 5일 학생들의 남대문역 앞 시위로 이어졌다. 3월 중순에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3월 22일 이후 노동자층이 주도하고 시민들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고, 서울 시가지에서의 게릴라성 시위는 27일까지 계속되었다.

경기도에서는 3월 초순 서울의 시위에 호응하여 각지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가 많았다. 3월 18일 이후 시위는 대형화되고 공세적으로 변해갔다. 예를 들어, 강화도에서는 수천 명이 참가한 시위가 벌어졌다. 3월 하순에는 면과 면이 연대하여 시위 규모가 대형화되었으며, 주재소 · 면사무소 · 우편소 등을 습격하는 공세적인 시위도 나타났다.

4월 1일부터는 수원군의 장안면, 우정면에서 산상횃불시위가 있었고, 3일에는 1,500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했다. 순사의 총격에 의해 시위대의 일부가 죽고 다치자, 시위대는 이 순사를 살해했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가혹한 보복에 나섰다. 수원 지역의 가옥 328채에 방화하고 47명을 죽였으며 442명을 검거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이런 보복 과정에서 발생했다.

강원도에서는 특히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 조직이 큰 힘을 발휘했으며, 각 마을의 구장이 주도하는 시위도 많았다. 양양의 경우 유교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시위를 전개했다. 하지만 산간 지역이 많은 강원도에서는 시위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이어서 북부 지방을 살펴보자. 황해도에서도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과 인물이 시위를 주도했다. 황해도에서 가장 치열한 시위는 3월 2일 수안에서 일어났는데, 이 시위에서 13명이 즉사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시위는 황해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황해도의 시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공세적이고 저항성이 강했으며, 따라서 피해도 컸다.

평안남도에서는 3월 1일 정오 평양에서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집회와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후 각지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곳에서도 시위를 주도한 것은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었다. 도시의 시위는 주로 기독교인, 농촌의 시위는 주로 천도교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학생들도 다수 참여했다.

평안북도에서는 3월 1일 의주와 선천읍내에서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그리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가 일어났고 이후 각지로 확산되었다(천도교와 기독교가 간여하지 않은 시위는 용천에서 일어난 2회의 시위뿐이었다). 평안북도의 시위 참가자는 서울 다음으로 많았으며, 인구 비례로 보면 전국에서 참여도가 가장 높았다. 일제는 경찰만이 아니라 군대, 국경수비대, 소방대 등을 동원해 시위를 탄압했다. 평안북도의 시위 양상도 격렬해서, 의주군 옥상면 면사무소는 10일 동안 시위대에 의해 점거되기도 했다.

함경남도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등 종교계와 학생들이 연결을 갖고 시위를 전개했다. 원산에서는 3월 1일 천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함흥에서도 다음 날 역시 천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시위 이후 함남에서 사법 처리된 참여자 중 천도교도들이 30.7%, 기독교인이 15.2%로 종교인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함남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져, 전신과 철도를 파괴하거나 관청을 습격한 경우가 많았다.

함경북도에서는 3월 10일 성진에서 시위가 시작되어 도내 각지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함북의 시위는 나남 주둔 일본군부대(19사단 사령부)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그리 활발하게 전개될 수 없었다. 함남의 경우에도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주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었다.

끝으로 남부 지방의 만세시위운동을 살펴보자. 충청 지방에서는 3월 1일 대전과 예산, 7일 청주 시위 이후 각지로 열기가 확산되었다. 시위는 3월 하순까지 거의 매일 2~4개 지역에서 일어났고, 3월 말~4월 초에 가장 활발했다. 충청 지방의 시위는 지방 유학자, 천도교인, 기독교인, 학생, 상인, 면직원 등 다양한 계층에 의해 주도되었다. 참여자들은 대부분 농민이었으며, 도시에서는 각종 직업을 가진 계층들이 참여했다. 충청 지방에서는 특히 밤에 마을 근처 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산상횃불시위).

호남 지방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등 종교 세력과 학생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세시위는 대부분 장날에 일어났고, 부분적으로 산상횃불시위가 있었다. 호남에서의 시위는 한말 의병전쟁기에 인적 손실이 컸던 탓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영남 지방에서는 3월 8일 대구 시위, 3월 11일 부산 시위 등으로 다소 늦게 시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3월 중순 이후 4월 중순까지 활발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경남에서는 하동, 합천, 창원, 진주, 김해 등에서 가장 활발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특히 합천군에서는 13회나 시위가 있었고, 3월 23일 시위는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다. 경북에서는 각 군에서 골고루 만세시위가 있었지만, 특히 안동 11개 곳에서 14회의 시위가 있었다.

영남 지방 시위의 주체는 기독교도, 천도교도, 각급 학교 학생들이었으며, 참가계층은 농민, 어민, 상인, 노동자 등이었다. 일본군 측 자료에 의하면, 경남의 시위 참가자는 경기도 다음으로 많은 10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경남에서 군중들에 의해 습격 · 파괴된 일제 관서는 경찰관서 15개소, 헌병대 7개소, 군청과 면사무소 7개소, 우편소 6개소, 기타 8개소로 모두 39개소나 되었다. 경북에서 피습당한 관서는 경찰관서 12개소, 면사무소 3개소, 우편소 1개소, 기타 2개소로 모두 18개소였다.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만세시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압록강 너머 서간도에서는 3월 12일 부민단이 주축이 되어 유하현 삼원포와 통화현 금두복락에서 수백 명이 독립축하회를 갖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두만강 너머 북간도에서는 3월 13일 1만여 명의 한인들이 용정 북쪽의 서전들에 모여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벌였다. 훈춘에서도 3월 20일 만세시위가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도 3월 17일 한인들이 만세행진을 했다. 미주 지역에서도 3월 1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미주, 멕시코, 하와이 거류 동포 전체회의를 열어 독립을 다짐하는 12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포고문을 발표했다. 재미 교포들은 서재필의 주선으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 집결하여 한인자유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식과 시가행진을 가졌다.

일제의 탄압과 3 · 1운동의 역사적 의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강력한 진압에 나섰다. 3월 1일 조선총독 하세가와는 즉각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는 협박문을 발표하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 육군성은 3월 7일 조선군사령관에게 “불상사를 속히 진압하고 거사를 미연에 방지하는 수단을 유감없이 발휘하라”고 지시했다. 비폭력적인 만세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2개 사단 23,000여 명에 달했는데, 일제는 이 병력으로는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4월 들어 본토에서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파했다.

3월 중순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도중 군경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크게 늘어났고, 4월 15일 수원 제암리에서는 30명의 주민이 일제의 보복 만행으로 살해되는 제암리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조선 사람들이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는 일제 측 자료도 각각 달라 정확히 알 수 없다. 일제 측 자료는 1919년 3월 이후 1년간 피살자를 350명 혹은 630명, 부상자는 800명 혹은 1,9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투옥된 이들은 8,000~9,000명으로 기록되었다.

3 · 1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이 대동단결해 독립을 외친 일은 3 · 1운동 외에 없었기 때문이다. 3 · 1운동은 한국인들이 신분, 계급, 지역을 넘어 하나가 된 사건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한국인이 근대민족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3 · 1운동은 한민족의 주체적 독립 쟁취에 강한 자신감을 부여했고, 이후 해방의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지속시킨 원동력이 되었으며, 세계인들에게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역량을 알리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이 운동으로써 2차 대전 이후 한국의 독립은 자명한 사실이 될 수 있었다.

3 · 1운동은 대외적으로는 항일운동이요, 대내적으로는 공화주의운동의 의미를 가졌다. 3 · 1운동 과정에서 여러 공화주의 임시정부안들이 나왔고, 그 연장선상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 3 · 1운동은 무장독립운동도 유발시켰다. 국경 일대에 독립군이 조직되어 1919년 가을부터 활발한 운동을 전개한 것은 3 · 1운동의 결과라 할 것이다.

3 · 1운동은 이후 대중운동을 고양하여 노동자와 농민층이 근대적인 주체로 거듭나게 했다. 또 일제의 식민 통치를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시켰다. 이로써 국내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활동영역이 다소 넓어질 수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5 · 4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 · 베트남 ·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의 민족운동에도 자극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