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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Chingiz 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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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기즈칸. Chingiz Khan.

몽골제국의 시조(재위 1206~1227). 몽골의 대칸. ‘칭기즈’란 이름은 몽골인들이 숭배하던 ‘빛의 정령’인 ‘Hajir Chinggis Tengri’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뜻이 ‘최강()’이란 설이 있다. 


서양을 대표하는 정복자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있다면 동양에는 칭기즈 칸이 있어요. 칭기즈 칸은 1200년대의 세계 지도를 바꾸어 놓은 인물이에요. 그는 몽골에서 태어났는데 원래 이름은 테무친이다.


칭기즈칸은 몽골 보르치긴 부족 출신으로 바이칼호 부근에서 태어났다. 1188년에 몽골 부족연맹의 맹주에 추대된 후 동정서벌(西)로 동부의 타타르와 서부의 나이만 등 여러 부족들을 격멸하고 1204년에 몽골 초원을 통일하였다. 

1206년 오논 강변에서 개최된 쿠릴타이(Khuriltai, 국가 대사를 토의 · 결정하는 족장들과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몽골제국의 칸에 등극해 칭기즈칸이란 칭호를 얻었다.

그후 기존의 부족집단들을 해체하고 군사조직에 기초한 95개의 천호() 유목민 집단을 편성해 유목영주제()를 확립하였다. 

서하(西)와 금()을 차례로 점령해 만저우()와 화베이()의 태반을 치하에 두었다. 

칭기즈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사건은 그가 친히 이끈 20만 몽골군의 제1차 서정(西, 1219~1225)이다.(‘몽골군의 서정’항 참고) 이 원정에서 돌아온 후 1226년 반기를 든 서하를 공격하던 중 낙마()해 그 후유증으로 1227년 간쑤성() 류판산()에서 병사하였다.

남송의 북벌이 연이어 실패함과 때를 같이하여 금나라도 내부의 부패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나, 북쪽에 자리한 몽골족은 점차 강대해졌다. 

테무친은 몽골 보르지긴족의 후예로, 그의 증조할아버지 하불레는 몽골 니룬의 각 부()를 통일했으며, 이후 그의 오촌할아버지인 후투라와 아버지 예수게이(야속해())는 차례로 니룬의 수령이 되었다. 예수게이는 용맹해서 싸움을 잘했다. 


테무친은 먼저 부락들의 조직 형식을 개조하고 일련의 조치들을 강구하여 권력과 지위를 튼튼히 다진 다음, 몽골 각 부락을 통일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또 적절한 기회에 금나라를 도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타타르족의 반란을 평정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금나라에서는 그를 초토관()으로 봉했다. 그런 다음에 케레이트족의 토그릴 옹칸과 연합하여 나이만족 등 자무카의 편이 된 11개 부락의 연합 공격을 물리쳤으며 이로 인하여 그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테무친은 케레이트족의 토그릴 옹칸과 사돈을 맺어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고 했으나,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토그릴 옹칸의 아들 셍쿰은 아버지를 설득해 혼사를 뒤로 미루고 그를 주연에 초대해 암살하려고 했다. 

이를 안 테무친은 한편으로는 토그릴 옹칸과 싸울 준비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자를 보내서 그의 불의를 꾸짖었다. 

케레이트족이 아직 방비가 없는 기회를 타서 맹공격을 퍼부어 자기 부족보다 강대한 케레이트족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국력이 날로 강해짐에 따라 칭기즈 칸의 세계를 제패하려는 웅대한 뜻이 날로 커졌다. 

1211~1215년에는 금나라를 공격하여 금나라 하동 지역의 광활한 땅을 차지했으며, 금나라는 도성을 변량(, 지금의 개봉시)으로 옮겼다.


1219년, 칭기즈 칸은 대군을 이끌고 중앙아시아의 대국인 호레즘 왕국을 점령하고 이어서 남쪽으로는 인더스 강,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를 넘어 러시아 동남부까지 점령했으나 기후가 맞지 않아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1226년, 칭기즈 칸은 군대를 거느리고 서하를 공격하여 서하의 국토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이듬해에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다. 

칭기즈 칸이 죽은 다음 아들 오고타이가 몽골의 칸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남송에게 길을 빌어 금나라의 도성 변량을 포위했다.


1233년, 몽골의 대군이 변량을 점령하자 금나라의 애종()은 채주(, 하남성 여남시)로 도망쳤으며, 몽골은 남송과 연합하여 채주를 포위 공격했다.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된 애종은 사신을 남송의 이종(, 영종의 아들로 이름은 조윤)에게 보내 화의를 청했다. “금나라가 망하면 그 다음 차례는 송나라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연합하여 몽골군에 대항하면 양국에 모두 이득이 될 것입니다.” 

송나라 이종은 그 요구를 거부했고, 애종은 결국 자살했다. 1234년, 금나라는 몽골군과 송나라군의 협공에 의해 멸망했다.


그는 몽골 서부에 있는 나이만족을 정복하고 1년 후에는 강적 자무카를 생포하여 죽여버렸다. 

1205년, 테무친은 20여 년간의 전쟁을 통해 전 몽골을 통일했다. 

1206년, 오논 강 상류에서 각 부락 수령들의 추대를 받아 ‘칭기즈 칸’이 되었다.


칭기즈 칸(성길사한())이 출생했을 때 타타르족을 물리치고 돌아온 그는 승전을 기념하며 아기의 이름을 테무친()이라고 지었다. 

테무친이란 몽골어로 ‘강철’이란 뜻이다. 

테무친은 스물여덟 살 때 ‘칸’으로 옹립되어 니룬의 수령이 되었다. 

‘칸’이란 몽골어로 왕을 말한다. 

이때부터 테무친의 웅대한 뜻을 펼쳐나가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칭기즈칸은 분명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사건 창조적’ 위인이다. 그는 부족적 관계로 이루어진 유목사회를 전제적 영주제에 바탕한 국가로 변화시켰으며, 중세에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범세계적 제국을 세워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몽골의 평화)라는 세계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대동주의()를 내세워 각기 다른 동서문명과 종교를 존중했으며, 탁월한 맹장()과 지장()으로서 평생 토사구팽()한 일이 없는 희대()의 영웅이었다.

일세를 풍미하던 칭기즈칸이 어디에 묻혀 있는가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를 기리는 성소나 묘당이 중국 네이멍구() 어얼둬쓰(오르도스) 이진훠뤄() 초원과 역시 네이멍구의 후허하오터() 두 곳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의 묘지가 아니다. 최신 탐지기를 다 동원해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기록이나 전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명나라 주원장()의 명을 받은 대문신 송염()이 책임지고 편찬한 『원사()』는 이에 관해 ‘장기련곡()’이란 아리송한 네 글자를 남겨놓았다. 이 네 글자의 해석을 두고 이론이 분분하다. 마르코 폴로는 알타이산 높은 곳에 묻혀 있다고 하고, 러시아 학자들은 바이칼에 수장()되었다고 하며, 스웨덴의 동양학자 콘스탄틴 도손(Constantin d’Ohsson, 다상())은 어느 수림 속에 묻혔다고 한다. 또 그가 병사한 간쑤성 류판산이란 주장도 있다.


칭기즈칸은 중세에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세계 최대의 대제국인 몽골제국을 건설한 경략자이자, 동서 문명교류에 괄목할 만한 기여를 한 대표적인 교류인이다. 1206년 몽골 초원의 모든 부족을 평정하고 범 몽골의 대칸(대한())으로 추대된 칭기즈칸과 그 자손들은 몽골 대제국의 건설을 목적으로 대대적인 대외 정복활동을 단행하여 중세 국제관계를 변모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서교류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칭기즈칸은 등극 후 잔여세력의 소탕과 더불어 대남(), 대서(西)의 양방향으로 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이미 제압한 나이만 부족의 왕 쿠츨루크(Kuchluk)가 서쪽의 카라키타이(Kara Khitai, 서요(西))로 도주해 왕을 자칭하며 재기를 시도하자, 부장 제베(Jebe, ?~1225)를 파견해 정벌하게 하였다. 제베는 파미르로 도주한 쿠츨루크를 추적해 참수()하고 카라키타이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바로 칭기즈칸이 실크로드로 진출한 최초의 정복활동이다.

잔여세력의 소탕과 함께 칭기즈칸은 대남, 즉 중국을 향해 정복의 화살을 돌렸다.

당시 오르도스(쑤이위안())로부터 하서회랑(허시후이랑(西))까지의 오아시스로 요충지에는 서하(西, 탕구트)가 자리해 토번() · 위구르 · 송()과 교역하면서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서하 정복을 결심한 칭기즈칸은 1205년과 1207년의 공격에 이어 1209년에는 수도 흥경()까지 진입하여 국왕 이안전()과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칭기즈칸은 이를 통해 서하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넘겨받았다. 

이어 서하의 군사원조를 약속받은 칭기즈칸은 1211년에 아들 넷을 파견해 숙적 금()을 압박하였다. 

이듬해 12월까지는 황허() 이북의 전 영토를 석권하고, 1215년에는 수도 연경(, 현 베이징)을 공략함으로써 일단 금을 제압한 칭기즈칸은 이듬해에 본영으로 돌아왔다.

서하와 금을 제압한 칭기즈칸은 정복의 예봉을 서쪽으로 돌렸다. 목표는 우선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의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호라즘샤(Khorazm-Shah, 969~1220)조였다.

이 왕조의 지배자는 알라웃 딘 무함마드(Alau’d Din Muhammad, 재위 1200~1220)였는데, 그는 1215년에 연경()에 머물고 있던 칭기즈칸에게 사절과 대상()을 보냈다. 

칭기즈칸은 곧바로 답례사(使)를 파견하고, 이어서 큰 규모의 대상을 보냈다. 

이 대상 일행이 오트라르(Otrar) 강가에 이르렀을 때 호라즘의 지방 태수가 기습하여 상인들을 살해하고 화물을 빼앗는 이른바 ‘오트라르 사건’이 발생하였다.

칭기즈칸은 다시 사절단을 보내 사건에 대한 사죄와 지방 태수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무함마드는 이에 불응하고 사절단의 단장을 살해하였고, 결국 이에 격분한 칭기즈칸은 서정(西)을 결단하게 되었다. 1219년 카라코룸(Karakorum)을 출발한 20만 명의 칭기즈칸 서정군은 중가리아 분지를 지나 서진(西)해 세미레체에 도착하였다.

2남 차가타이와 3남 오고타이의 중앙대()는 오트라르를, 장남 주치의 우익대()는 시르다리야강 하류를, 3부장()의 좌익대()는 시르다리야강 상류를, 칭기즈칸의 막내아들 툴루이 휘하의 본대()는 부하라를 각각 공격 목표로 설정하고 출정하였다.

중앙대는 5만 명의 수비대와 5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오트라르를 함락하였고, 우익대는 시르다리야강 하류에서 승전고를 울렸으며, 좌익대는 베나케트를 함락하고 호젠트에 도착하였다. 

본대는 베나케트에서 시르다리야강을 건너 키질쿰 사막을 돌파해 1220년 2월에 부하라를 공략하고 사마르칸트를 배후에서 포위하였다. 

오트라르를 함락한 중앙대는 본대를 뒤쫓아와 함께 그해 4월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였다.

원정군이 시르다리야강을 도하했다는 보고를 받은 샤 무함마드는 사마르칸트를 탈출해 남행으로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발흐를 경유, 4월 18일 이란의 니샤푸르를 지나 계속 서북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무함마드의 도주 소식을 접한 칭기즈칸은 부장 2명을 급파하여 추격하도록 하였는데, 무함마드는 혈혈단신으로 카스피해의 소도 아비스쿰(Abiskum)으로 피신했다가, 12월에 시종 한 명 없이 홀로 병사하였다.

사마르칸트에서 1220년 여름을 보낸 칭기즈칸은 가을에 접어들자 제2단계의 서정을 단행하였다. 

장자와 2남, 3남 휘하의 연합군은 호라즘의 구도(우르겐치에 접근해 6개월간의 격전 끝에 도시를 함락하고, 완강하게 항전하던 시민 모두를 몰살하는 참극을 저질렀다. 

칭기즈칸은 분대를 이끌고 아무다리야강의 북안에 위치한 테르메스(Termez)를 공략하고, 이듬해 봄에는 고도 발흐를 점령한 데 이어 서남방의 타레칸(Talecan) 산지의 요새도 장악하였다.

칭기즈칸은 이 산지에서 1221년 여름을 보냈다. 

막내아들 툴루이가 이끄는 일대가 호라산 공략에 나서서 니사와 메르브를 공략한 후 헤라트를 공격해 1만 2,000명의 수비대를 척살하였다. 

1221년 가을 툴루이와 합류한 칭기즈칸이 바마얀 계곡(아프가니스탄)의 성새를 공격하던 중 손자(차가타이의 아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격분한 나머지 이 작은 성새에서 사람은 물론 일목일초()도 남기지 않는 잔인한 소탕작전을 자행하였다.

그즈음 호라즘의 고왕() 무함마드의 아들 잘랄룻 딘(Jalālu’d-Din)이 가즈니(Ghazni)를 근거지로 하여 군대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칭기즈칸은 부장을 가즈니에 급파해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에 그는 대군을 이끌고 가즈니에 당도했으나 잘랄룻 딘은 이미 탈출한 뒤였다.

인더스강까지 추격했으나 잘랄룻 딘은 이미 강을 건너 자취를 감추었다. 몽골 정복군은 아프가니스탄으로 회군할 때 호라즘 도시들이 재기의 기미를 보이자 또 다시 무참한 파괴 행위를 자행하였다. 

결국 이 도시들은 영영 폐허가 되고 말았다.

칭기즈칸은 사마르칸트와 치르치크에 얼마간 체류하다가 북행해 1225년 봄, 6년 만에 귀향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칭기즈칸의 서정(西)이다. 

귀국 후 그는 서하(西)가 그의 서정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하 정벌군을 이끌고 주취안() · 장예() · 우웨이() 등 허시후이랑 내의 여러 도시와 허저우() · 시닝(西)을 차례로 공략하였다.

수개월의 포위 끝에 수도가 함락되고 왕 이현()이 피살됨으로써 서하는 1227년에 멸망하였다. 

귀로에 오른 칭기즈칸은 간쑤성() 동단의 류판촌() 부근에 이르러 1227년 여름을 보내고 나서, 8월 18일 간쑤성 칭수이현() 싸리췐()에서 사망하였다.

칭기즈칸 사망 후, 그의 자손들에 의해 원()을 비롯한 4대 칸국이 유라시아의 광대한 지역에 출현함으로써 몽골제국은 실크로드 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아우른 범유라시아적 대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칭기즈칸이 직접 발의하고 선도한 서정이 가져온 결과로서, 그가 중세 세계사뿐만 아니라 동서교류사에 남긴 족적을 말해주고 있다.

교류인으로서 칭기즈칸이 기여한 바는 유라시아를 석권하는 서정을 단행해 중세 동서교류의 통로를 열어놓았고, 동서문명이 직접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중세 동서교류를 활성화한 몽골대제국의 건국 기반을 닦았다는 데 있다.

그의 문명 계승과 교류에 대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복지 도처에서 자행한 문명 파괴적인 행위는 그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반역사적이며 반문명적인 만행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유목문화의 체현자로서 어떤 문화적인 대체안()도 없이 단순한 군사적 정복관에서 이질문명, 더욱이 유목문화보다 선진화된 농경문화나 도시문화를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원제국을 비롯한 4개 칸국의 건립 및 운영과 더불어 동서교류의 참여 및 결과로 인해 초창기에 있었던 이러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요소들이 어느정도 극복되고 상쇄되었다는 점이다.


1162년경 오늘날의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이 맞닿은 곳 근처, 오논 강 유역 숲에서 보르지긴 씨족 예수게이와 올크누트 부족 출신 후엘룬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후엘룬은 메르키트 부족 전사의 아내였으나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한 처지였다. 예수게이는 이미 첫 부인 소치겔과의 사이에 아들 벡테르를 두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테무진().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전사의 이름이었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부르테와 약혼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타타르족 야영지를 방문했다가 독살당하고 말았다. 

두 아내와 10살이 안 된 자식 일곱 명이 남겨졌다. 

12세기 당시 초원 지대에는 수십 개 부족과 씨족들이 전투, 사냥, 유목, 약탈, 납치, 교역 등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예수게이의 보르지긴 씨족은 타이치우드 씨족에 사실상 의탁해 살고 있었는데, 타이치우드 씨족은 예수게이가 죽자 그 가족들을 버리고 이동했다. 


고립된 가족은 오논 강 유역에서 사냥과 채집으로 겨우 연명하며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테무진은 자무카와 의형제를 맺었고, 배다른 형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였다.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었지만 테무진은 탈출했다. 


1178년 16살 경 테무진은 부르테와 결혼하고 몽골 중부의 유력한 부족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복종하여 안전을 도모했다. 

메르키트 부족이 후엘룬을 빼앗긴 것에 대한 뒤늦은 복수로, 테무진의 아내 부르테를 납치해갔다.


테무진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옹 칸에게 메르키트를 습격할 뜻을 밝혔다. 메르키트와 구원()이 있던 옹 칸은 테무진과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를 끌어들여 메르키트를 공격해 승리했다. 


테무진은 의형제 자무카 무리와 함께 생활하며 안정을 찾았지만 1181년 자무카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쌓기 시작했다. 


1189년 여름 27살의 테무진은 옹 칸의 승인 아래 전통적인 씨족, 부족 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칸의 칭호를 차지했다. 


1196년에는 옹 칸과 함께 타타르 원정에 나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쟁을 통해 테무진은 금나라가 타타르, 케레이트, 몽골 등 여러 부족들을 서로 싸우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1197년 테무진은 주르킨 부족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케룰렌 강과 쳉게르 강이 만나는 곳 근처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었다. 이곳이 몽골의 수도 아바르가가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원정을 위한 기지 구실을 했다. 


1201년, 새롭게 떠오르는 테무진 세력에 반감을 지닌 씨족들이 자무카를 구르 칸으로 추대해 옹 칸과 테무진에 도전했다. 옹 칸은 자무카와 맞서고 테무진은 타이치우드 부족과 맞서 승리했으나 자무카는 달아났다. 


1202년 옹 칸은 메르키트를 공격하고 테무진은 타타르를 공격했다. 타타르를 정복한 테무진은 수레바퀴 비녀장보다 키가 큰 타타르 남성들은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자기 부족의 구성원으로 융합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몽골 군대와 부족을 아르반(10호), 자군(100호), 밍간(1000호), 투멘(1만호) 체제로 재편했다.


테무진은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을 혼인시키려 했으나 옹 칸은 거부했다. 

테무진의 군사력을 당해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옹 칸은 계략을 세웠다. 

혼인을 수락하고 축하 잔치에 테무진을 초대해 제거하려 했던 것. 소수 병사만 이끌고 옹 칸에게 가던 테무진은 계략을 알아채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옹 칸의 추격을 피해 살아남은 자는 불과 19명. 이들은 흙탕물을 마시며 테무진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들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으로 전통적인 씨족이나 부족 관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결사체가 탄생한 셈이었고, 이는 몽골 제국 내 통일의 기초나 마찬가지였다. 


테무진은 흩어진 추종자들을 모아 옹 칸을 향해 진군했다. 기습당한 케레이트 부족은 대부분 테무진에게 항복했다. 

옹 칸은 나이만에서 죽임을 당했고 1204년 테무진은 나이만을 정복했다. 

테무진 앞에 끌려 온 자무카의 유언은 이러했다. 

“나를 죽여 그 뼈를 높은 곳에 놓아라. 내가 영원히 그대의 후손들을 보호할 것이며, 그들에게 복이 되겠다.”


1206년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성산() 근처 오논 강 원류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100만 명 가까운 인구에 2000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가 탄생할 참이었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 통치자의 칭호는 칭기즈칸이었다. 


칭기즈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폈다. 

1207년부터 1209년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통해 탕구트, 즉 서하(西)를 정복했다.

칭기즈칸이 48세가 된 1210년 금나라 사신이 몽골의 복종을 요구하러 왔다. 

칭기즈칸은 땅에 침을 뱉고 금나라를 욕했다. 

전쟁 선포였다. 


1211년 쿠릴타이를 소집해 원정을 결정하고 진군을 개시한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 오늘날의 베이징)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원정에서 몽골군의 병력은 기병 6만5천이었다. 


지구력 강한 몽골 말과 보급부대를 두지 않는 간편함(육포와 마른 젖 덩어리를 휴대했다), 고도로 조직화된 부대 편재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세계 최강으로 만들어주었다. 

여기에 포로들을 통해 익힌 공성전() 전술과 무기, 굳은 충성심과 규율, 적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선전전,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기습하는 전술, 적의 영토 전역에 걸쳐 작전을 펼쳐 혼란을 일으키는 전술 등으로 몽골군은 위세를 떨쳤다.


칭기즈칸은 이제 넓어진 영역을 다스리며 교역과 상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한 호라즘과 교역 조건을 협상하고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호라즘의 지배자인 투르크 족술탄 무함마드 2세는 칭기즈칸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칭기즈칸은 많은 물자와 함께 상인들을 보냈다. 

호라즘의 북서쪽 오트라트(카자흐스탄 남부)의 총독이 상인들을 죽이고 물자를 빼앗았다. 칭기즈칸은 사신을 보내 총독을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무함마드 2세는 오히려 사신들을 죽였다. 

남은 것은 전쟁이었다. 


1219년 원정을 떠난 칭기즈칸은 이듬해 봄 호라즘 영역에 도착하여 그 해가 끝나기 전에 호라즘의 주요 도시들을 속속 점령했다.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에 쫓기다가 카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죽었다.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웃딘이 인더스 강변에서 몽골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칭기즈칸에게 패했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휩쓴 칭기즈칸의 원정은 1222년 여름 오늘날의 파키스탄 중심부에서 멈추었다(1223년에는 제배와 수부타이가 이끈 별동군이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러시아 남부 지역과 이란 일부 지역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칭기즈칸은 인도 북부를 모두 점령하고 히말라야 남쪽을 돌아 중국 송나라 영토를 가로지를 생각을 했지만, 더위와 습기가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본거지로 돌아온 칭기즈칸은 이제 서하, 즉 탕구트 공격을 준비했다. 

탕구트는 이미 항복했지만 호라즘 원정 때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탕구트 원정을 위해 고비 사막을 건너던 1226~27년 겨울 칭기즈칸은 진군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했다. 갑자기 야생마들이 돌진해오자 칭기즈칸이 탄 말이 놀라 뛰어올랐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지만 칭기즈칸은 탕구트와 전쟁을 계속했다. 수도를 포위하고 마지막 승리를 얼마 앞둔 1227년 8월 칭기즈칸은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중국 깐수성() 칭수이현() 시장(西) 강변이었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테무진,(칭기즈칸)은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으며, 칭기즈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것을 선언했다.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


칭기즈칸의 사망일에 관해서는 명확하지만 출생일에 관해서는 1155년설(라시둣 딘의 『집사()』), 1162년설(『원사()』와 『원조비사()』), 1167년설(원말 청초의 문학가 양유정()의 『정통변()』) 등 다양하다.


몽골 제국의 제1대 왕(1162 추정~1227), 본명은 테무친.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