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족은 흑룡강 상류의 남쪽, 흥안령 북부에 거주하며 수렵과 원시적 농업을 병행하였다.
칭기즈칸의 생애를 연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162년: 아버지는 예수게이 바타르이고, 어머니는 허엘룬이다.
본명은 테무친이다.
1155년, 1161년, 1162년, 1167년 출생설들이 있으나 몽골 학자들은 1162년 출생설을 공식 견해로 삼고 있다.
· 1175년~1176년: 예수게이 바타르가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되었으며, 예수게이 바타르가 독살된 직후 동족들은 테무친과 그 일가를 외면하였다.
가장이 된 테무친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복동생 벡테르를 살해하였고, 이에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친이 무서운 적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여 테무친을 포로로 붙잡으나 테무친은 탈출하였다.
테무친은 고단한 어린 시절을 “그림자 말고는 동무도 없고,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던” 시절이라 회상하였다.
· 1182년: 케레이트 부족의 군주 토오릴(옹칸)을 방문하여 의부자 관계를 맺었다.
· 1184년: 메르키트 부족이 납치해 간 자신의 부인 보르테를 구출, 안다(Anda, 의형제) 자무카와 연합을 시작하였다.
· 1186년: 자무카와 결별하고 몽골 부족의 ‘칸’으로 즉위하였다.
이때를 ‘1차 즉위’라고 한다.
· 1187년: 달란 발주트에서 전투를 벌였다.
· 1196년: 금나라·케레이트와 연합하여 타타르(Tatar) 원정에 나섰다.
· 1196년~1197년: 주르킨 가문의 족장들인 사차 베키, 타이추를 처형하였다.
· 1198년~1199년: 케레이트와 연맹하여 나이만(Nàimàn) 부족 원정에 나섰다.
· 1201년: 자무카가 ‘구르칸’으로 즉위했으나 쿠이텐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 1202년: 달란 네무르게스의 전투로 타타르는 전멸하였다.
· 1203년: 케레이트와 카라 칼지트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다.
· 1204년: 케레이트를 습격하여 승리하였으며, 나이만(Naiman)과 메르키트를 정벌하였다.
· 1205년: 자무카를 처형하였다.
· 1206년: ‘칭기즈칸(Chinggis Khan)’으로 즉위하고 천호제(千戶制)를 조직하고, 나이만을 정복하였다.
이때를 ‘2차 즉위’라고 한다.
· 1207년: 키르기스(Kirgiz)를 복속하였다.
· 1208년: 오이라트(Oirat)를 복속하였다.
· 1209년: 탕구트(Tangut, 西夏) 원정에 나섰다.
· 1211년: 위구르·카를룩을 복속하고, 금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몽골어 표기에 위구르 문자를 채용하였다.
· 1218년: 중앙아시아로 파견한 사신단이 오트라르(Otrar)에서 몰살당했는데, 이 사건은 서방 원정의 원인이 되었다.
· 1219년: 호라즘(Khorezm)및 서방 원정을 시작하였다.
칭기즈칸의 네 아들과 주요 장군이 모두 참여하는 15만 명 ~ 20만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을 통해 대대적인 응징을 가했다.
· 1225년: 서방 원정 결과 이슬람 신흥강국 호라즘이 멸망하고, 중앙아시아·서아시아 도시들은 황폐화되었다.
칭기즈칸은 이 지역의 지배의사가 없었으므로 전군 철수하였다.
· 1226년: 탕구트 원정에 나서 호라즘 원정 불참자에 대한 응징을 가했다.
· 1227년: 원정 도중 사망하였다.
· 1227년~1229년: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툴루이(Tului)가 섭정하였다.
제국의 흥망
제국의 흥망사를 칸(Khan)별로.
1) 오고타이칸(Ogotai Khan)
오고타이칸(Ogotai Khan, 재위 1229~1241)은 칭기즈칸(Chingiz Khan)의 셋째 아들로, 1229년 몽골 올스의 2대 칸으로 등극하였다.
1234년 금나라를 정복하였다.
1235년 수도 카라코룸(Karakorum)을 건설하였다. 1240년 바투(Batu)를 사령관, 수부타이(Subutai)를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서방 원정을 시작하였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몽골 초원지대를 통치하던 ‘유목 국가’로서의 성격을 탈피하여 정주·농경국가를 지배하는 ‘세계 제국’으로 변모하였다.
오고타이칸이 사망하자 그의 부인 투르게네가 1242년부터 1246년까지 섭정하였다.
2) 귀위크칸(Güyük Khan)
귀위크칸(Güyük Khan, 재위 1246~1248)은 오고타이칸의 아들이며, 즉위 2년 만인 1248년에 돌연 사망하였다.
바투(Batu)와의 불화로 인한 사망설이 유력하다.
귀위크칸이 사망하자 그의 부인 오골-카이미쉬가 1248년부터 1251년까지 섭정했다.
3) 몽케칸(Möngke Khan)
몽케칸(Möngke Khan, 재위 1251~1259)은 바투(Batu)의 적극적인 지지로 대칸에 즉위하였는데, 오고타이 가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벌였다.
윈난(雲南)과 티베트 지역을 평정하고, 1252년과 1254년 2차례 고려를 침공하였다.
1258년, 몽케칸의 동생 훌라구(Hulagu)는 페르시아 및 소아시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몽케칸은 1259년 남송 원정 도중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4) 쿠빌라이칸(Khubilai Khan)
쿠빌라이칸(Khubilai Khan, 재위 1260~1294)은 1267년 카라코룸(Karakorum)을 대신할 새 수도 건설을 명령하여 1272년 완성 후 대도(大都) 라 명명하였다.
대도와 상도(上都) 를 오가는 양도순행(兩都巡行)을 했다. 1271년 ‘대재건원(大哉乾元)’에서 그 뜻을 취하여 ‘대원(大元)’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였다.
『역경(易經)』에 따르면 대재건원은 “크도다! 하늘의 으뜸이여!”라는 뜻이다.
인도차이나 자바(Java) 원정에 나서기도 했으며, 유라시아 대륙에 몽골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다.
1279년에는 남송을 정벌하였다. 그리고 고려와 연합하여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태풍으로 실패하였다.
원나라 때는 국제 교역이 대폭 증대하였다.
5) 원(元)의 쇠망
쿠빌라이칸(Khubilai Khan)이 죽자 대칸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실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라마승의 횡포로 국가 재정이 파탄되었다. 또한 가뭄, 홍수, 지진 등 잇따른 자연 재해가 발생하였다.
1333년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Togun-Temur, 순제)가 즉위하였으나, 1368년 주원장(朱元璋, 홍무제)이 이끄는 명나라군에 의해 몽골고원으로 패퇴하였다.
1483년에는 몽골의 러시아 지배가 종료되었다.
역사적 의의
몽골제국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제국’과 ‘세계사’를 실현하였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육상·해상교통로를 발달시키고 인터넷보다 700년 앞서 국제통신망을 건설함으로써 동서 간 경제·문화 교류를 촉진하였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동방에 전파하였다.
지리학·천문학·역학·수학·지도제작법 등을 전래하였으며, 신항로의 발견을 촉진하였다.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탄생인 셈이다.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지 1995년 송년 특집호는 지난 1천 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즈칸(Chingiz Khan)을 선정하였다.
제국의 흥망일지
칸국명 | 건국자 | 존속기간 | 위치, 멸망 원인 |
---|---|---|---|
오고타이한국(Ogotai汗國) | 오고타이(칭기즈칸의 3남) | 1224 ~1310 | · 몽골남부 알타이(Altay) 산-발카슈 호 일대 |
차가타이한국(Chaghatai汗國) | 차가타이(칭기즈칸의 차남) | 1227 ~1380 | ·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 지역 - 초기에는 아마리크 - 후기에는 동(東)차가타이: 악스/서(西)차가타이: 사마르칸트(Samarqand) · 멸망 원인: 내부 분열, 티무르에게 멸망 |
킵차크한국(Kipchak汗國) | 바투(칭기즈칸의 장손자) | 1243 ~1502 | · 러시아 볼가 강 유역 · 멸망 원인: 모스크바공국의 독립, 티무르 침입, 내부분열 |
일한국(Il汗國) | 훌레구(칭기즈칸 4남의 아들) | 1258 ~1410 | · 이란, 이라크 등 서남아 일대 · 멸망 원인: 내부 분열, 티무르에 멸망 |
원(元) | 쿠빌라이(칭기즈칸 4남의 아들) | 1271 ~1368 | · 중국 전 지역, 몽골 지역 · 멸망 원인: 내부 분열, 홍건적의 난(주원장) |
몽골제국: 사한국(四汗國)과 원나라
대몽골 올스는 1260년 이후 각 계승 국가로 분열된 것이 아니라, 올스들의 연맹으로 칭기즈칸의 후손이라는 연대감과 일체성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존재하였다.
청 복속 시대'
토곤 테무르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몽골 본토로 돌아가 1371년 ‘빌릭투칸’이라고 칭하고 옛 대원의 잔여 세력들을 규합하고 지배 체제를 안정시켜 북원 내부를 안정화하였다.
북원 시기 몽골고원은 정치적 분열과 내분으로 ‘6만 호 몽골(동몽골)’과 ‘4만 호 오이라트(Oirat, 서몽골)’로 나누어졌다가, 다시 ‘6만 호 몽골’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3개의 독립국을 형성하였다.
오이라트는 몽골고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대칸 즉위는 불가능하였다.
1466년 만두하이(滿都海) 여왕은 바트멍흐에게 ‘다얀(Dayan)’이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칸(다얀칸)으로 추대하였다.
지배기
17세기 몽골은 몽골고원의 알타이(Altai) 산을 경계로 서부의 오이라트(Oirat), 동부의 할흐몽골, 고비 남쪽의 내몽골로 분리되었다.
차하르(Chakhar) 부의 링단칸(Lingdan Khan)은 통치력을 강화하고 전 몽골인의 통합 통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후금은 자신들의 걸림돌인 링단칸을 가장 먼저 공격하였다.
1626년 후금의 홍타이지(HuángTàijí)가 차하르 부를 공격하자 이에 대항해 링단칸은 호르친(Khorchin)을 공격하였다.
1632년 홍타이지는 링단칸을 정복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출전해 정벌을 감행하였다. 1634년 링단칸은 허흐노르로 피신을 가던 중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다.
링단칸의 사망으로 칸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자 공백 상황이 발생하였다.
1636년 내몽골의 16개 아이막(Aimag), 49개 호쇼의 왕공들은 홍타이지를 몽골의 대칸으로 인정하고, 내몽골은 만주(후금)에 복속되었다.
1640년 ‘몽골-오이라트 법전’을 비준하고, 러시아와 청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몽골 각부와 오이라트 연합을 결성하였다.
1688년 갈단칸(Galdan Khan)이 몽골 할흐부를 공격하였다.
1689년 청·러시아 간 네르친스크 조약(Nerchinsk條約)으로 청·러시아 간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부리야트 몽골을 비롯한 북부지대는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1691년 할흐몽골, 내몽골 왕공들의 회맹을 통해 몽골은 청에 복속되었다. 1717년에는 청이 몽골 전역을 장악하였다.
1727년 청과 러시아가 캬흐타(Kyakhta) 근처의 보오린(Bohlin) 골에서 ‘보오린 조약’을 체결해 현재 몽골과 러시아 간의 국경선을 확정하고, 캬흐타에서 ‘캬흐타 무역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은 한족과 만주족을 몽골 지역에 이주시키는 등 동화정책(同化政策)을 추진하였다.
반청(反淸) 운동
1755년 이후 몽골은 반청·반봉건·반식민지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1911년 8월 신해혁명으로 청이 붕괴되면서 독립운동이 확산되었다.
1911년 9월 제8대 접준담바(Jebtsundamba) 호탁트(Khutuktu)를 혁명의 정신적 지주로 세우고 외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1912년 11월 외몽골의 고륜(Kùlún, 庫倫) 정부와 러시아 간의 협약을 통해 내몽골은 포함하지 않는 독립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몽골인들의 내몽골과 외몽골의 통합 독립을 희망하였으나 러시아와 일본의 사전 협약에 따라 실패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은 외몽골은 러시아, 내몽골은 일본이 특수한 이해관계를 갖는 지역임을 상호 승인하고 이를 위반하지 않기로 사전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1912년~1919년 몽골은 러시아 보호하에 자치주로 존립하였다.
몽골 독립' 1920년 이후.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담디니 수흐바토르(Damdinï Suhbator)는 몽골인민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소비에트 적군(赤軍)과 연합하여 중국군을 몰아내고 1921년 7월 11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몽골은 7월 11일을 혁명기념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7월 11일 ~ 13일을 몽골 민족 최대의 축제인 ‘나담(Naadam) 축제’ 기간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1924년 11월 26월 새로이 제정된 헌법에 따라 몽골인민공화국 선포하였는데, 이로써 몽골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1939년 5월 ~ 8월 일본이 몽골 지역에 침입해 할힌골(Khalhin Gol) 전투가 발발하자 몽골은 소련과 연합하여 일본을 격퇴하였다.
중국은 1946년 2월 외몽골은 몽골인민공화국으로 인정하였으나, 내몽골은 1947년 5월에 중국의 자치구로 편입시켰다.
1959년 12월 몽골은 인민 경영주에 대한 협동 조합화를 완료함으로써 사유재산 소유제는 기능을 상실하였다.
1960년 몽골인민공화국은 신헌법을 승인하여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향후 공산주의를 건설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등 사회주의 건설이 완료되었음을 선포하였다.
1961년에는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에 가입하였다.
아시아의 중앙 내륙에 있는 국가이다.
13세기초 칭기즈 칸이 등장해 역사 상 최대의 몽골 대제국을 건설했으며, 동서 여러 국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제국이 멸망하고 남은 내륙 중앙부가 1688년 청(淸)에 복속되어 ‘외몽골’로 불렸다.
1911년 제1차 혁명을 일으켜 자치를 인정받았으나 1920년 철폐되었고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21년 제2차 혁명을 일으켜 독립하였다.
정식명칭은 몽골 울스(Монгол улс)이다.
북서쪽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남동쪽으로 중국과 국경을 이룬다.
국토는 넓지만 인구는 적다.
구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공산주의가 된 국가이다.
최근 심각한 경제난 타개와 경제지원 확보를 위해 공산주의를 버리고 서방과의 관계 강화, 국제기구 가입, 주변국과의 관계 증진 등을 추구하는 개방외교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추진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21개주(aymag)와 1개 자치구(hot:울란바토르)로 이루어져 있다.
몽골(Mongolia)
몽골이란 본래 “용감한”이란 뜻을 지닌 부족어였으나, 칭기스칸에 의해 통솔된 몽골부(部) 발전에 따라 민족의 이름 “Mongol” 및 지역의 이름 “Mongolia”로 변화하였다.
몽고(蒙古)이라는 이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북방 민족으로부터 전쟁에 시달려 온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
1924년 11월 26일 사회주의 혁명으로 수립된 정부는 국호를 “몽골 인민공화국(Mongolian People'sRepublic)"으로 정하였으나 1922년 1월 개방 정책의 상징으로 국호를 몽골 공화국으로 고쳤다.
통칭; “몽골”은 대개 외몽골(外夢古, 몽골 공화국)을 말하는 것이며, 내몽골(內蒙古)이라고 부르는 내몽골 자치주는 중국 국경 안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분단 국가다.
분단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민족적 친근감이나 통일에의 의지는 거의 없는 편이어서 한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국가독립일
국가독립일; 1921.7.11 (소련 적군과 연합하여 중국으로부터 독립)
국가선포일; 1924.11.26 (러시아식 헌법을 채택, 몽골인민공화국 선포)
일반사항
국명 | 몽골(Mongolia) |
---|---|
위치 | 중앙아시아 고원지대 북방에 위치한 내륙국가 |
면적 | 1,564,116km2, 한반도의 7.4배 |
기후 | 건성냉대기후 |
수도 | 울란바토르(Ulaanbaatar) |
인구 | 286만명(추정, 2012년) |
주요도시 | 다르한(Darhan), 에르데넷(Erdenet), 초이발산(Choibalsan) |
민족(인종) | 할흐몽골족(90%), 카자흐족(5.9%), 브리아드계(2%) 등 |
언어 | 할흐 몽골어 90%, 키릴문자, 문맹률 5%이하 |
종교 | 라마불교(90%), 무슬림 5%, 무속 및 기독교 5% |
건국(독립)일 | ㅇ 국가독립일: 1921.7.11 (소련 적군과 연합하여 중국으로부터 독립) |
정부형태 | 민주공화제(92.1.13 新민주헌법 발효, 2000.12.14 헌법 개정, 총 의석수 76석) |
국가원수 | 대통령: Tsakhia Elbegdorj(임기 4년, 연임 가능, 2013년 6월 26일 재선 성공) |
시차 | 한국보다 1시간 늦음.(4.27~9.28 기간은 서머타임제 실시) |
국화 /연꽃
국기
소욤보기(旗)
Mongolia 국기는 세로로 세 부분으로 동등하게 빨강, 파랑, 빨강으로 되어있다.
바깥의 두 빨간 부분은 진보와 밝은 미래를 의미한다.
중앙의 파란 부분은 영원한 하늘을 상징한다.
황금색의 문장은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민족적 문장으로 1924년 제1회 대인민 회의에서 채택된 것으로 soyombo(소욤보)라고 일컫는다.
수도
울란바타르
현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타르는 36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도시이다.
Tuul 강 위에 위치해 있고 장대한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소나무로 뒤덮인 산들, 넓은 가로수길, 광대한 공공 광장과 많은 공원들의 결합이 도시에 웅대함을 주는 반면 ger지역과 혼잡한 장터는 시골의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
가장 가볼만한 장소들은 Sukhbaatar 광장, Gandan 사원과 ZaisanHill 전쟁 기념관이다.
주요한 박물관은 역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Fine Arts, Choijin 라마 사원 그리고 복드항궁이며, 다른 문화유적지로는 국립 예술 갤러리, 오페라와 발레 극장, 드라마 극장 캐시미어 공장이 있다.
# 어원
울란바타르는 몽골어로 "Ulaan"은 "붉다"라는 뜻이고 "Baatar"는 영웅이라는 뜻이다.
합쳐서 '붉은 영웅'이라는 뜻으로 중국어로는 우란바투오[烏蘭巴托]로 쓰며, 1924년까지 성벽을 뜻하는 쿠룬[庫倫]이라 했고, 유럽 사람들은 우르가라고 한다.
# 위치 및 기후
오르콘강의 지류인 툴라강 우안, 해발고도 1,300m의 초원성 고원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은 4700km2이다.
기온은 여름에 27°C, 겨울에 -46°C까지 떨어져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이룬다.
# 인구
90년 전에 이 도시에는 약 50,000명이 살았으나, 현재는 장, 단기로 체류하는 외국인과 국내 여행객을 포함하여 약 124만 명(2012년 추정)이 살고 있다.
몽골 전체 인구의 40%에 달하는 인구이다.
급격한 인구의 증가는 대부분의 서쪽지방 사람들은 실업과 집안의 가난 때문에 도시의 삶을 택하여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도시로의 이주증가 때문이다.
2012년 기준 286만 명으로 추정되며 인구 밀도는 1.8/km2, 남자 평균 수명은 65세, 여자 평균 수명은 70세이다.
# 교민
현재 몽골에는 약 3,000여명의 재몽교포들이 살고 있으며, 기업인, 선교사, 교육 및 의료인, 대사관 및 여러 봉사단체의 봉사단원, 유학생 등 다양한 계층들로 구성된 교민들이 주로 울란바타르시를 중심으로 모여 생활하고 있다.
# 위치
중국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사이의 중앙아시아 내륙고원에 위치해 있는 몽골은 서유럽의 크기와 대략 같은 크기로 면적이 1,566,500 sq.km 이며 동서로 약 2,400km,
남북으로 약 1,260km의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몽골 국경선의 총 길이는 8,114km이다.
몽골은 해발 평균 1,580미터의 산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낮은 Huh Nuur지역의 해발고도는 560m이고 가장 높은 지역은 몽골리아 알타이 산맥에 있는 Huiten 산(4,374m)이며, 수도 울란바타르는 해발 1,380m에 위치하고 있다.
# 국토구성
면적 1,567,000km2로 한반도의 7.4배이며 동서 길이가 2,394Km, 남북 길이가 1,259Km이다.
이중에 목축지 면적이 80%로 가장 많고 이어 산림(10%), 경작지(1%), 기타(9%)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리형태상 전형적인 고원지대로써 사막이 많다.
북서부는 알타이산맥이고 동남부는 평원지대이며 평균고도는 1,600m(오대산의 정상 높이)이다.
서쪽 끝의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에 솟아있는 후이틍 어르길(Huityn Origil) 봉우리는 최고해발인 4,366m이다.
최저지대(522m)는 동부 평원지대에 분포한다.
몽골의 지리는 굉장히 다양하다.
북에서 남으로는 4지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mountain-forest steppe(산림초원지대), mountain steppe, 최남단의 semi-desert(사막화되어가는 지역)과 사막(요즘 전체 영토의 약 30%)로 구분 된다.
2000 미터가 넘는 주요 산들은 서부에 집중되어 있고 높은 꼭대기에는 일년 내내 눈과 빙하로 덮여있다.
산과 빽빽한 숲들이 몽골의 북쪽과 중앙 지역을 차지하고 있고 초원은 이 지역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다.
동쪽에는 아시아 초원지대의 거대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으며. 동에서 서로 몽골의 남쪽까지 뻗어있는 이 초원은 Gobi 사막까지 이어져 있다.
Gobbi(고비사막)는 자갈이 많을 뿐만 아니라, 남쪽 경계선과 가까운 건조한 지역에는 큰 모래 사구도 찾아볼 수 있다(WTO, 1994).
몽골리아에는 수백 개의 호수들이 있는데, 이중 가장 큰 호수들은 Uvs-Nuur(3,350 제곱킬로미터), Huvsgul(2,260 제곱킬로미터), 그리고 Khara Us-Nuur(1,852 제곱킬로미터)이다.
Havsgul 호수는 또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담수호이며, Orkhon(1,124km), Kherlen(1,090km) Selenge(539km)은 가장 큰 강들이다.
# 기후
건성냉대기후에 속한다.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로 겨울이 길고 추우며, 여름이 매우 짧다.
연중 구름이 없는 날이 257일이나 되어 맑고 높은 하늘을 항상 볼 수 있다.
11월~3월은 영하, 특히 1월~2월은 영하 20°C가 보통이며, 겨울철 야간에는 영하 40°C 이하까지 내려가는 반면, 여름은 33~38°C로 무덥다.
평균기압은 1,036mb이다.
# 민족
할흐몽골족(90%), 카자흐족(5.9%), 브리아드계(2%) 등 17개 부족이 있다.
경제지표
GDP | US$ 102억(20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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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성장률 | 12.3%(2012년) |
1인당GDP | US$ 3,575(2012년) |
실업률 | 3.6%(2012년) |
물가상승률 | 14.98%(2012년) |
화폐단위 | Tugrik |
환율 | 1US$=1692Tg(2013년 9월) |
외환보유고 | US$ 3,497백만(2013년) |
교역규모 | ㅇ 수출: US$ 4,385 백만(2012년) |
교역품 | ㅇ 주요수출품: 석탄, 동, 금, 형석, 몰리브덴 등 광물 및 캐시미어, 피혁제품 |
자료: EIU Country Report(GDP, GDP성장률, 물가상승률, 외환보유고)
IMF World Economic Outlook Databases(1인당 GDP, 실업률)
한국무역협회(교역규모, 교역품)
Bank of Mongolia(환율)
World Bank Mongolia Quarterly Economic Update(실업률)
한국과 관계
교역규모 | ㅇ 한국의 수출: US$ 349,874천(2011년), US$ 433,457천(2012년), US$ 173,083천(2013년 1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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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품 | ㅇ 주요 수출품: 건설중장비, 산업관련 자동차, 윤활유, 철구조물 등 |
투자교류 | ㅇ (2012년)한국의 대(對)몽골 투자액(누계): US$ 652,290천(신고 건 수: 983건, 신고액: US$ 299,860천) |
교민 | 약 3,000명 |
언어
몽골어는 알타이계 언어의 하나이다.
오늘날 몽골, 카자흐, 부리야트(옛날의 부여), 중국내 몽골자치구역 등에 살고 있는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은 몽골어를 쓴다.
몽골어의 연역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1) 고대 몽골어.
2) 중세 몽골어.
3) 현대 몽골어.
고대 몽골어는 고대부터 12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관한 자료는 Tonyukuk라는 유물에 돌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중세 몽골어는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쓰인 Secret history of Mongols는 아랍어-몽골어 사전과 그 밖의 다른 중요한 문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기 몽골어는 남부, 동부 그리고 서부 방언으로 나누어진다.
Secrethistory of Mongols는 동부지역 방언으로 쓰여 있는데, 아랍어-몽골어 사전은 서부 방언으로 쓰여 있다.
현대 몽골어는 17세기부터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몽골어를 의미한다.
언어학자들은 이 시기에 비로소 몽골어의 표준이 정립되었다고 한다.
몽골어는 dorvoljin, tod, soyombo 등 서로 다른 10가지의 문자를 통해 만들어지고 또 쓰여 오고 있다.
고대 몽골 문자는 Uighur Mongolian script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아래로 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Uighur는 13세기에 Sogdians로부터 그 문자를 차용했다.
1944년에는 러시아의 Cyrillic 문자가 차용되어 문자수가 두 개 더 늘어나게 되며 고대 몽골어를 대신하게 된다.
이때부터 모든 문서가 Cyrillic으로 쓰이게 된다.
몽골의 모든 학교들은 1990년부터 다시 새로운 언어를 가르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Cyrillic은 모두 35개의 문자와 이중 모음을 가지고 있다.
Cyrillic에 있어서 발음이 중요한데 매우 어렵다.
작가 Tim Severin은 몽골어는 마치 두 마리의 고양이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할흐몽골어(KhalkhMongolian)가 공용어이며 문자는 키릴문자로써 러시아문자를 차용하고 있다.
자원
원유, 석탄, 구리, 몰리브덴, 텅스텐, 주석, 니켈, 아연, 금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다.
공휴일
신년 휴일(1.1), 차강사르(몽골력1.1~2, 한국 음력설 해당), 여성의 날(3.8), 어린이날(6.1), 나담절(7.11~13), 건국기념일(11.26).
정부형태
민주공화제(92.1.13 新민주헌법 발효, 2000.12.14 헌법 개정). 과거 대통령중심제와 내각 책임제의 중간형태인 이원집정부제를 시행했으나,
헌법 개정으로 의회와 내각의 권력이 대폭 강화되어 의원내각제 성격이 강화됐다.
주요 지도자
* 대통령: Ts. Elbegdorj/
* 국회의장: Z. Enkhbold/
* 총리: N. Altankhuyag/
경제 현황
2011년 GDP 성장률은 2010년(6.4%) 대비 급증한 17.5%를 기록해 경기 과열 양상을 보였다.
경기과열의 주 원인은 정부지출 급증으로, 2011년 정부지출 규모는 전년 대비 무려 56% 증가했었다.
몽골정부는 광산자원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기반으로 정부지출을 급격히 확대했으며 2012년에도 계속 증가시켰다.
반면에, 2012년 GDP 성장률은 12.3%으로, 2011년(17.5%)에 비해 줄어들었다.
중국 내 석탄 수요의 감소 및 중국알루미늄주식유한공사(찰코)와의 마찰로 인해 석탄 수출이 확연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부터의 투자 유입이 낮았던 것과 긴축 정책의 영향력이 결합되어 낮은 GDP성장률을 기록한 것으로 분석된다.
몽골정부가 인플레이션 억제 및 대출 증가속도 억제를 위한 다양한 긴축정책을 펼쳤으나 2011년 인플레이션은 9.5%, 대출증가율은 73%을 기록하였다.
2012년 몽골은 43억 8000만 달러(전년 대비 26.5% 감소)를 수출하고, 67억3000만 달러(전년 대비 10.4% 감소)를 수입하였다.
2012년에도 인플레이션 수치는 14.98%으로 더 높아졌으며, 이는 전반적으로 소비자의 신뢰도와 광업에의 투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2013년 몽골 상공회의소에서 발표한 몽골 경제 현황은 2008년도부터 시작된 정당들의 무책임한 약속과 그에 따른 복지제도 시행이 몽골 경제정책의 바람직하고도 성공적인 이행으로의 기회를 놓치게 했으며,
투자와 사업 환경 악화 및 이 분야에서 진행 중인 쇄신 과정, 결과에 대한 성과가 와 닿지 않으며 쇄신 속도 감속,
경제하락 및 환율 변동, 물가 상승 등은 국내 정치와 경제적인 불안정한 상황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민간 업체의 활동 및 투자 등 전반적인 환경이 좋지 않은데 특히 금융환경에 있어 영세업체 및 중소사업자들이 원하고 기다렸던 변화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 2013년 기준으로 작성된 KOTRA의 국가정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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