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권孫權.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안후이, 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을 토벌 진무하고, 타이완, 하이난섬 방면에도 원정군을 보냈으며, 랴오둥의 공손씨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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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중모(仲謀), 시호(諡號)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周瑜)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江南)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荊州: 湖北省襄陽縣)에는 유표(劉表)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華北)에는 조조(曹操)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조상의 본적은 오군(吳郡) 부춘(富春)이고, 하비(下邳)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모(仲謀)이다. 삼국(三國) 시대 동오(東吳)의 건립자로 부친 손견(孫堅)과 형 손책(孫策)과 더불어 군웅할거 시대에 강동(江東)에서 기반을 다졌다. 19세 때에 형 손책(孫策)이 자객에게 죽자 그를 계승하여 제후(諸侯)가 되었다.
208년 유비(劉備)와 연합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조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219년 여몽(呂蒙)을 파견하여 형주(荊州)를 탈취했다. 222년에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가 오왕(吳王)으로 봉해졌다. 229년에 황제로 칭하고, 농관(農官)을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실시하고 산월(山越)을 평정하여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사후에 시호는 대황제(大皇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
유표가 죽고 그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의 압력은 더욱 강화되어 국내에서도 화전양론(和戰兩論)이 대립했으나 주유 등의 주전론이 승리하였다. 이에 손권은 유비(劉備)와 손잡고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뒤 형주의 귀속문제(歸屬問題)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하였으며, 이 때문에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하였다. 이때 손권은 관우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위(魏)·오(吳)·촉(蜀)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으며, 오나라는 장쑤[江蘇]·안후이[安徽]의 남부, 저장[浙江]·장시[江西]·후베이[湖北]·후난[湖南]·푸젠[福建], 그리고 광둥[廣東] 방면까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220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漢)나라의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유비도 촉한(蜀漢)의 황제가 되었다.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위에 올라 연호를 황룡(黃龍)이라 하고 도읍을 건업(建業;南京)으로 정하였다. 위나라 문제(조비)가 손권의 아들을 신하로 등용한다는 명분으로 인질로 데려가려고 하자 손권이 이를 거부함으로서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위나라와 관계를 청산한 손권은 이후 대체로 촉한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안후이·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山越) 민족과 그밖의 이민족(異民族)을 토벌 진무(鎭撫)하고, 타이완[臺灣]·하이난섬[海南島] 방면에도 원정군(遠征軍)을 보냈으며, 랴오둥[遼東]의 공손씨(公孫氏)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만년에 태자로 책봉한 큰아들 손등(孫登)이 죽자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손권은 둘째 아들 손화(孫和)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로 삼는 한편, 넷째 아들 손패(孫覇)를 노왕(魯王)에 봉하여 태자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로써 태자와 노왕 사이에 권력투쟁이 극심하게 일어나 국력이 소모되었다. 250년 손권은 결국 두 파벌을 모두 모조리 처형하고 겨우 10세인 막내 아들 손량(孫亮)을 태자로 책봉하였고, 252년 사망하였다.
1). 후한 말 영웅 손견의 아들
조상의 본적은 오군(吴郡) 부춘1)이고, 하비2)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모(仲謀)이다.
후한(後漢, 동한) 말의 영웅 손견의 아들이고 역시 후한 말의 무장 손책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형 손책을 따라 강동(江東) 정벌에 나섰다.
헌제 건안(建安) 5년인 200년에 형 손책이 죽자 19세에 제후가 되어 뒤를 이었다. 강동 지구를 통치하며 장소, 주유, 정보 등의 도움을 받았으며, 인재를 널리 구하여 노숙, 제갈근 등을 문하의 식객으로 우대했다.
2). 적벽대전에서 승리하다
건안 13년인 208년에 조조가 형주(荊州,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시)를 장악하고 장강(長江)을 따라 진군해왔다. 손권은 항복하자는 여러 신하의 의견을 물리치고 주유와 정보를 좌우도독(左右都督)으로 삼아 각각 1만 명의 군대를 이끌도록 했다. 손권의 군대는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조의 군대를 대파하였고,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손권은 장강의 험한 지형을 의지하여 여러 차례 북방의 조조를 공격했다.
219년에는 여몽을 파견하여 형주를 장악했다.
3). 형주를 차지하고 관우를 죽이다
손권은 삼국 정립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숙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비의 촉한과 연합하여 위(魏)나라를 막는 기본 방침을 택했다. 그러나 여몽을 시켜 형주를 차지하고 관우를 죽이는 바람에 양국의 화의가 깨지고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공격해왔다. 이것이 ‘이릉3)의 전투’다. 유비는 이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촉한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해졌다. 그러나 위나라를 막아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오와 촉한의 동맹은 회복되었다. 손권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촉한과의 동맹을 굳게 지켰다. 양국의 오랜 우호관계가 결과적으로 위나라의 공격을 견제했다.
4). 인재를 발탁하고 호족을 끌어들이다
손권은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온 지방 호족 세력을 신임하는 동시에, 재능을 가진 인물들은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발탁했다. 또한 남방의 특징을 파악하여 점진적으로 강동, 특히 오군(吳郡,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 오현에 해당)의 호족 지주와 긴밀하게 연합하여 높은 관직을 위임하는 등 그들을 끌어들이는 데 힘을 다했다. 경제가 발달한 태호4) 유역을 거점으로 한 호족 지주들은 세력이 막강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연대도 뿌리 깊었다. 이들은 손권이 자신들의 이익을 충분히 지켜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지지하고 충성을 표했다.
5). 오나라 황제가 되다
조조의 아들 조비(위 문제)가 동한(東漢, 후한)을 대신해 위나라를 세우자, 손권은 겉으로는 일개 지방 세력인 번(藩)이자 위나라 신하로 자처하고 시간을 벌며 정권의 기초를 다졌는데, 위 문제 황초(黃初) 2년인 221년에 위나라가 내린 봉호(封號)를 받아들여 무창(武昌, 지금의 후베이성 우창시)에서 오왕(吳王)으로 즉위하였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29년에 손권은 마침내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황룡(黃龍)으로 하였으며 무창을 도읍으로 정했다가 뒤에 건업(建業, 지금의 장쑤성 난징(南京)시)으로 옮겨 강동을 통치했다. 황룡 원년인 229년에서 신봉(神鳳) 원년인 252년까지 재위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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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은 만년에 통치 집단 내부의 모순에 시달렸는데, 큰아들 손등이 죽은 후 태자가 된 둘째아들 손화와 넷째아들이자 노나라 왕 손패(孫覇)가 서로를 공격하고 신하들도 두 파로 갈라져 통치에 심각한 위기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에 손권은 태자를 폐하고 노왕 손패를 죽이는가 하면, 연루된 신하들을 혹형으로 다스리고, 어린 아들 손량을 태자로 세워 위기를 타개해 나갔다.
삼국시대 통치자들 중 가장 장수한 끝에 252년 71세로 세상을 떠나 장릉(蔣陵, 지금의 난징 시 쉬안우(玄武)구 소재)에 묻혔다.
시호는 대황제(大皇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라 했다.
6). 손권의 국가 운영 정책
손권은 황제가 되어 전제 독재 권력을 확립한 후에는 엄격한 법을 적용했다. 정치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지방장관이 멋대로 관직을 버리고 도주하면 사형으로 처벌했다.
농관(農官)을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실시하는 한편 산월(山越, 남부의 소수 이민족)을 평정하거나 항복시켜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각지에 흩어져 세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던 할거 세력을 없애 통치 구역을 강동에서 지금의 푸젠성(福建省), 광둥성(廣東省), 광시성(廣西省), 후난성(湖南省)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확대했다. 동한 말기 이후 분열되어 있었던 이 지역들은 다시 통일되어 사회, 경제가 발전했다.
손권은 개인의 봉건적 대토지 소유제를 보호함으로써 경제를 발전시켰고, 산월을 정벌하여 약탈해온 ‘생구(生口, 노예)’들을 세가 호족 대지주들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어 부곡(部曲, 노예)이나 전객(佃客, 소작인)으로 삼게 했다. 또한 군권의 세습을 인정하여 그 전객들의 요역과 병역을 면제해주었다. 이것이 이른바 복객(復客) 제도다. 그는 노동력이 몰려 있던 태호 유역의 호족 지주들과 이런 방식으로 타협하여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었다.
강남 지역의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이 기초 위에서 여러 차례 해외로 사람을 보내 해외 개척에도 나섰다.
7). 관련 유적
관련 유적은 그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삼국지』에 따르면 손권은 죽은 뒤 장릉에 묻혔다. 이곳은 당시 남경(南京, 난징시)의 종산(鐘山)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손종(孫鐘)의 이름자를 피해 종산을 장산(蔣山)으로 바꾸고 자신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훗날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이 종산에 자신의 무덤인 효릉(孝陵)을 만들 때 담당관이 손권의 무덤을 이장하자고 건의했지만 주원장은 손권은 영웅호한(英雄好漢)이니 그대로 두라고 했다.
손권의 무덤은 원래 손릉강(孫陵崗)이라 불렸는데, 이곳에 매화가 많기 때문에 1940년대에 매화산(梅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는 그의 부인인 보씨(步氏), 반씨(潘氏) 및 선명태자(宣明太子) 손등 등이 함께 묻혀 있다.
삼국시대의 오의 건국자이다. 오군(吳郡) 부춘(富春) 출신으로 자는 중모(仲謀), 부(父)는 손견(孫堅)이며 형인 손책의 대업을 이어받아 양자강 하류에 세력을 구축하고 건업(建業. 현 남경)에 도읍하였다. 유비(劉備)를 도와 조조(曹操)를 적벽(赤壁)에서 물리친 고사는 유명하다.
2. 孫堅" 손견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황건의 난 토벌에 공을 세우고 동탁 토벌에도 가담하였다.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의 공격에 나섰다가 현산(峴山)에서 전사하였다. 아들인 손권(孫權)이 오(吳)를 건국한 뒤에 무열황제(武烈皇帝)로 추증되었다.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지금의 浙江省 杭州 富陽) 출신이다. 아들인 손권(孫權)이 오(吳)를 건국한 뒤에 시호(諡號)를 무열황제(武烈皇帝)라고 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병법가(兵法家)로 이름을 날린 손무(孫武)의 후손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오군(吳郡) 지역의 호족(豪族) 출신으로 17세 때 전당(錢唐)에서 해적을 물리쳐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회계(會稽)의 허창(許昌)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군(吳郡)의 사마(司馬)로서 1천여명의 군사를 모아 이를 토벌하였으며, 이 때의 공으로 현승(縣丞)으로 임명되었다. 184년(中平 원년)에 장각(張角)이 이른바 황건(黃巾)의 난을 일으키자, 토벌군에 참여해 공을 세워 의랑(議郎)으로 임명되었으며, 장사태수(長沙太守)가 되어 구성(區星)이 이끈 반란군을 토벌하여 오정후(烏程侯)로 봉해졌다.
손권(孫權)의 아버지로, 자는 문대(文臺)고, 젊어서 현리(縣吏)가 되어 허생(許生, 또는 許昌)의 반란을 진압했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184) 주준(朱imagefont)을 따라 황건군(黃巾軍)을 진압하고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올랐다. 얼마 뒤 장사태수(長史太守)로 옮겨 사공(司空) 장온(張溫)의 부하로 구성(區星) 등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후한(後漢)의 영제(靈帝, 재위 168~189)가 죽은 뒤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리자 각지의 제후들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손견도 군사를 일으켜 형주자사(荊州刺史) 왕예(王睿)와 남양태수(南陽太守) 장자(張咨)를 죽이고 노양(魯陽)에 이르러 원술(袁術)과 만났다.
원술(袁術)은 표(表)를 올려 손견이 파로장군(破虜將軍)과 예주자사(豫州刺史)를 겸하도록 하였고, 손견은 노양성(魯陽城)에 주둔하며 진군(進軍)을 준비하였다.
동탁(董卓)이 군대를 보내 노양성(魯陽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손견은 이를 물리쳤다. 하지만 양동(梁東)에서 동탁(董卓) 군대의 공격을 받아 간신히 포위를 뚫고 탈출한 뒤, 다시 병사를 모아 양인(陽人)에서 동탁의 군대를 대파하고 화웅(華雄) 등을 죽였다.
손견이 동탁의 군대를 격파하며 세력을 키우자 원술은 그를 경계하여 군량미를 보내지 않았다. 손견은 노양(魯陽)으로 달려가 원술을 설득하여 군량미를 조달받고 대곡(大谷)으로 진군하여, 뤄양[洛陽]을 위협하였다. 동탁은 뤄양[洛陽]에 불을 지르고 한구관[函谷關]으로 퇴각하였고, 손견은 뤄양[洛陽]에 진입하여 역대 왕들의 능묘를 보수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노양(魯陽)에 머물렀다.
192년(初平 3년), 손견은 원술의 종용을 받아 형주(荊州)의 유표(劉表)를 공격하였다. 손견은 유표가 파견한 황조(黃祖)를 격파하고 한수(漢水)를 건너 양양(襄陽)을 포위했다. 하지만 현산(峴山)에서 황조(黃祖) 군사가 쏜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동탁(董卓)을 토벌하는 군사가 일어나자 원술(袁術)과 병사를 합쳐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예주자사(豫州刺史) 직을 수행했다. 동탁 군대를 격파하고 낙양(洛陽)으로 진격하여 동탁이 약탈한 후한 황제의 능들을 수복하고 우물 속에서 전국새(傳國璽)를 얻었다.
나중에 노양(魯陽)에 이르러 여러 부곡(部曲)을 지배했다. 헌제(獻帝) 초평(初平) 2년(191)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와 싸워 크게 이겼지만, 자기의 용맹만 믿고 단기로 현산(峴山)에 출전했다가 유표의 장수 황조(黃祖) 부하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둘째 아들 손권이 칭제한 뒤 무열황제로 추봉되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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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孫策. 손책, 入主江東.
후한 말기 오현(吳縣) 부춘(富春) 사람. 자는 백부(伯符)고, 손견(孫堅)의 아들이며, 오(吳)나라를 세운 손권(孫權)의 형이다. 어렸을 때 수춘(壽春)에 살아 강남의 사족(士族)들과 폭넓게 교제했다. 아버지가 죽자 장인인 단양태수(丹陽太守) 오경(吳景)에게 갔다. 한헌제(漢獻帝) 흥평(興平) 초에 원술(袁術)에게 의지했고, 손견의 남은 세력 1천여 명과 군대를 이끌고 오경을 도왔다.
원술이 절충교위(折衝校尉)로 삼고 도강(渡江)하여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전투를 벌이다가 유요(劉繇)를 격파했다. 또 절강(浙江)으로 들어가 엄백호(嚴白虎) 등을 격파하고 스스로 회계태수(會稽太守)가 되었다. 나중에 여강군(廬江郡)을 빼앗아 강동(江東)에 손씨 정권을 세웠다. 조조(曹操)가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임명하고 오후(吳侯)에 봉했다. 나중에 평소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오군태수의 측근에게 살해당했다. 동생 손권(孫權)이 칭제(稱帝)하자 장사환왕(長沙桓王)에 추시(追諡)되었다.
자는 백부(伯符). 손견의 장자이자 손권의 형. 손견이 죽자 원술에게 잠시 의탁해 있다가 손견을 섬기던 이들의 도움을 얻어 동오로 들어가 기반을 닦는다. 그러나 웅지를 펴보지 못하고 26세로 요절한다.
175년 저장성[浙江者]에서 출생했다. 자(字)는 백부(伯符)이고, 손권(孫權)의 형이다. 이름난 맹장이었던 아버지 손견(孫堅)이 죽은 후 서주 근처인 강도로 이주했다. 단양태수에게 몸을 의지했다가 194년 원술(袁術)의 휘하에 들어가 아버지의 군대를 이어받았다. 이때 받은 군사는 1천 명이었다. 원술의 휘하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지만 그의 기개를 두려워한 원술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이에 원술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심하고 강남(江南)을 평정, 일족과 측근을 태수로 임명하여 진무(鎭撫)와 개발에 힘썼다. 마침 원술이 제위에 오르려 하자 손책은 이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원술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조조(曹操)는 이를 알고 손책과 손을 잡는 편이 이롭다고 판단해 그를 토역장군 오후(吳侯)에 봉하고 혼인관계를 맺었다. 200년 조조와 원소(袁紹)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도(許都)에 있는 한나라 헌제(獻帝)를 맞아들이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 자객의 칼을 맞고 죽었다.
중국 후한(後漢) 말의 무장. 손견 사후 군대를 이어받아 강남을 평정, 진무와 개발에 힘썼다.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한나라 헌제를 맞으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조조가 북방을 통일하고 있을 때, 남방에서는 다른 할거세력이 점차 강대해지고 있었다. 그 세력의 수령은 강동의 주인인 손책(孫策)과 손권(孫權) 형제였다. 강동이란 지금의 장강 하류의 강남 일대를 말한다. 손책의 자는 백부(伯符)이며, 오군(吳郡) 부춘(富春, 절강성 부양) 사람으로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손견(孫堅)은 농민 봉기를 진압한 공로로 장사 태수를 책봉받았다. 손견은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북상하다가 노양(魯陽)에서 원술을 만났다. 원술은 손견을 파로장군으로 임명했다. 손견은 원술과 유표(劉表)가 형주를 쟁탈하는 싸움에서 원술의 선봉장이 되어 유표의 대장 황조(黃祖)를 격파했다. 그리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다가 숨어 있던 복병들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손견이 죽은 다음 맏아들인 손책이 그 직무를 이어받아 군대를 통솔했다. 손책은 언제나 전쟁터에서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손랑(孫郞)'이라고 불렀다.
동생 손권을 가까이 불러 관인(官印)과 인수(印綬, 관인을 몸에 차기 위한 끈)를 넘겨주며 당부했다. “강동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장에서 승부를 겨루고 천하를 다투는 일에서는 아우가 나보다 못하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이 각자 힘을 다하게 하여 지금의 강동을 보존하는 데는 내가 아우보다 못하네.” 강동을 종횡하던 '손랑'은 숨을 거두었다.
손책이 죽은 후 동생 손권이 형의 직무를 대신해 강동의 대권을 장악했다. 당시 손권의 나이 겨우 열아홉이었으나, 장소와 주유의 보좌로 형의 업적을 계승해 강동을 발전시켰다.
손책은 평소 사냥을 즐겼는데 어느 날인가는 사슴을 쫓다가 강변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말이 하도 빨라 수하들은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뒤에 처져 있었다. 그런데 이때, 오군의 태수였던 허공(許貢)의 문객 셋이 강변에 숨어 있었다. 손책이 오군을 함락했을 때 태수 허공을 죽이자, 주인의 원수를 갚을 시기를 줄곧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허공의 문객들은 손책을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손책은 이마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손책의 몸은 신속히 악화되었다.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안 손책은 모사 장소 등을 불러서 당부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오, 월 땅은 인력과 자원이 풍부한 데다가 방어하기 좋은 장강까지 있어서 큰 위업을 이룩할 수 있소. 부디 내 동생 손권을 잘 보필해 주길 바라오.”
손책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큰 위업을 이루려 했으나 원술 밑에서는 그런 포부를 실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기회를 노려 원술의 수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양주 자사 유요(劉䌊)가 원술의 외숙인 강동 태수 오경을 단양(丹陽)에서 쫓아냈다. 손책은 강동에 가서 외숙의 원수를 갚겠다고 원술에게 청했다. 원술은 손책에게 어서 가서 외숙의 원수를 갚으라며 군사 1천 명을 내주었다.
손책은 군사들을 데리고 강동으로 오는 도중에 군사들을 더 모집했다. 수춘(壽春)에서 역양(歷陽)까지 오는 동안에 그는 군사를 5∼6천 명이나 모집했다. 이때, 오랜 친구인 주유가 단양의 친척집에 와 있다가 손책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고 그도 군사를 거느리고 찾아갔다. 그리고 손책에게 군량을 비롯한 기타 물자를 도와주었다. 이렇게 손책은 자기의 역량을 확충함과 동시에 유력한 조수를 얻게 되었다.
장강을 건넌 손책은 유요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했으며 마침내 유요를 단양에서 쫓아내고 오군과 회계군을 점령했다. 아울러 강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손책은 군사들이 백성의 재물을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였으며 백성의 이익을 해치는 일을 하면 엄하게 다스렸다. 그래서 손책의 군대는 강동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손책을 죽음으로 몬 우길은?.
『삼국지연의』 제29회의 회목은 ‘소패왕이 노하여 우길(于吉)을 참수하다.’이다. 손책은 원한을 맺은 자객들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고 상처를 입는다. 그 상처가 낫기도 전인 어느 날 성루(城樓)에서 일을 논의하는데 갑자기 여러 장수들이 성루를 내려간다. 그들은 도인(道人) 우길에게 다가가 큰 절을 하고 신선(神仙)이라고 부르며 우러러 공경한다.
신선을 믿지 않던 손책이 우길을 체포하라고 명한다. 잡혀온 우길에게 재주를 물으니 바람과 비를 불러 올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우길에게 단에 올라 비를 빌도록 명하니, 때맞추어서 큰 비가 내린다. 이 광경을 본 여러 관원들은 더욱 우길에게 감복하여 큰 절을 올린다.
북제(北齊) 사람인 안지추(顔之推)는 『환혼기(還魂記)』에서 이렇게 서로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모순까지 있는 부분을 연결시키고 있다. 즉 손책이 우길을 처치한 사건과 사냥 도중 자객에게 상처를 입은 사건을 뒤바꾸어 배치했다.
손책의 상처가 나으려는 참에 거울을 들고 자신을 비추다가 거울 속에 나타난 우길을 만나게 되는데 정작 뒤를 돌아보면 사라지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다가 그만 거울을 부수고 크게 고함을 지르고 그 바람에 아물던 상처가 터지고 조금 뒤에는 죽고 말았다라고 한 것이다.
우길의 능력이 대중을 현혹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손책은 속히 참수토록 명한다.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길을 죽였지만 이때부터 손책은 꿈속에서 여러 차례 우길을 만나게 되고, 우길의 혼에 이끌려, 앉으나 서나 마음이 불안하고 정신이 황홀해진다. 어느 날 거울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손책은 거울 속에 서있는 우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곧장 거울을 깨뜨린 손책은 크게 고함을 지른다. 이로 인하여 아물던 상처가 다시 터지고 오래지 않아 죽게 된다.
이렇듯 우길에 대한 나관중의 묘사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발생될 수 없는 황당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터무니없는 날조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역사상 근거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ㆍ손책전』 배송지 주에서 인용한 『강표전(江表傳)』, 『지림(志林)』, 『수신기(搜神記)』 등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산견된다. 그래서 배송지는 ‘『강표전』, 『수신기』 등에 적힌 우길에 관한 기록은 동일하지 않아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 부분은 당연히 각도를 달리해서 평가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모종강이 이 회의 평주에서 이르기를, ‘손책은 신선을 믿지 않는데, 이 점이 바로 손책이 영웅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한 무제(漢武帝)와 같이 영명(英明)한 경우도 오히려 신선에 유혹되고 방사를 좋아했으나 손책은 그렇지 않으니, 이에서 우리는 그의 식견이 보통 사람을 크게 뛰어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지의 평주에도 역시 이런 의미가 있다. 이런 것이 바로 그들의 고명한 점이다.
나관중이 표현하고자 한 본의는 아마도 손책이 우길의 손에 죽었다고 여긴다거나 손책의 죽음이 우길과 지극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나관중이 묘사한 것처럼 진실로 우길이 비바람을 불러 오고 병을 고칠 수 있었다면, 손책은 감히 우길을 죽이지 못하고 응당 공경하고 받들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우길과 같은 이러한 신선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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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은 이러한 자료들을 적당히 정리해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의 소설로 완성했다. 나관중은 역사소설과 역사과학을 적당히 혼합함으로써 『수신기』와 같은 종류의 기괴한 사건을 그의 역사소설 속으로 적절히 끌어들였던 것이다. 만약 그가 이런 기괴한 사건을 역사사실로 간주했다면 당연히 착오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를 쓸 때 설서예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신기하고 괴이한 사건을 특별히 중시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사건은 수많은 독자들을 흡인하기에 충분하여 누구나 듣기 좋아하고 읽기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나관중은 사건의 진실성이나 합리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곧바로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쓰면서 참고한 서적이 광범위하다는 것은 장점이겠지만, 때로는 너무 복잡해서 괴탄하고 황당한 것들마저 끌어들인 것은 단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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