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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곽재우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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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곽재우(, 1552~1617)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중요하게 공헌한 장수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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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의병’과 ‘홍의장군()’일 것이다. 그 표현대로 곽재우는 여러 의병 중에서 가장 먼저 기의(- 의병을 일으킴)했고, 여러 전투에서 홍의를 입고 지휘해 뛰어난 무공을 세웠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현풍(),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곽월()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로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한 김덕령(, 1567~1596)의 사례가 대표하듯이, 전란이 끝난 뒤 의병장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도 했지만 끝내는 은둔하면서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다가(벽곡찬송()”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이 난무한 전장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좀 더 엄혹했는지도 모른다. 

1585년(선조 18)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기 때문에 파방()되었다.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난하자 같은 달 22일 제일 먼저 의령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군세는 더욱 커져 2천에 달하였고, 5월에는 함안군을 수복하고 정암진(: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조정에서는 이 공을 인정하여 그해 7월 유곡찰방()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형조정랑을 제수하였다. 10월에는 절충장군()으로 승진하여 조방장()을 겸임하다가 성주목사(使)에 임명되어 악견산성() 등 성지를 수축하였다. 또한 1차 진주성전투에 휘하의 병사들을 보내어 김시민() 장군이 승리하는데 조력하였다.

1595년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좌도방어사(使)로 임명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화왕산성()을 수비하면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군을 맞아 싸웠다. 이후 계모의 상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창암진() 강가에 망우정()을 짓고 은둔하고 있다가 1604년(선조 37) 찰리사(使)에 임명되어 인동()의 천생산성()을 보수하였고, 10월에는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또 다시 낙향하였다가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을 역임하였고, 이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12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을 신구()하는 상소문을 올린 후에 다시는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한성부 좌윤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제수를 거부하고 낙향을 거듭하였는데 당쟁으로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이 죄없이 잡혀 올라오고, 또 절친한 사이인 광주의병장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에 휘말려 죽는 등의 일련의 사태를 보고 더 이상 관직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익()이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그의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고, 그의 사우()에는 예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가문과 성장"

곽재우는 1552년(명종 7) 8월 28일 경남 의령현()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 시호는 충익()이다.

할아버지는 부사(使)를 지낸 곽지번()이고, 아버지는 승지ㆍ관찰사를 역임한 곽월(, 1518~1586)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다. 본관은 현풍(- 지금의 경북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그곳에서 세거한 명문이었다.

그가 태어난 의령은 외가인데, 그 뒤 그가 의병장으로 활동한 주요 지역이었고 그래서 지금 그를 대표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런 측면은 조선시대 남귀여가혼()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는 1565년(13세)부터 숙부 곽규()에게서 [춘추]를 배우면서 학문을 닦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는 성여신() 등과 함께 제자백가서를 널리 읽었다. 그가 나중에 도교와 깊은 친연성을 갖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곽재우는 1567년 15세의 나이로 만호() 김행(. 본관 상산)의 둘째 딸과 혼인했다. 이 혼사는 그의 자질과 그것에 대한 인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장인 김행은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인 남명 조식(, 1501~1571)의 사위였고, 따라서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사위가 된 것이었다. 손위 동서도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ㆍ대사성 등을 역임한 동강(김우옹(, 1540~1603)이었다. 조식은 두 외손사위를 직접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망우집] <연보>). 인물을 보는 그의 안목은 정확했다.

곽재우는 18세 때인 1570년(선조 3)부터 활쏘기와 말타기ㆍ글쓰기 등을 고루 익히고 병법서도 공부했다. 1575~76년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서 살았으며, 1578년(선조 11)에는 명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수행해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이때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은 그 뒤 임진왜란에서 그의 상징이 된 홍의()의 옷감이 되었다.

10대 후반부터 문무를 함께 연마하던 곽재우는 32세 때인 1585년(선조 18) 별시에서 제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선조는 그의 답안에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해 그 별시의 합격을 모두 취소시켰다.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는 크게 낙망했을 것이다.

불행은 거듭 찾아왔다. 이듬해 8월 6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곽재우는 선산인 현풍 신당()에서 삼년상을 치르고 1588년에 탈상했다. 36세였다.

그 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의령 동쪽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 근처 둔지()에 정자를 짓고 낚시질을 하면서 지냈다. [망우집()- 곽재우의 문집]에 실린 <연보>에는 그 2년 동안 “강가의 정자에 있었다()”고만 짧게 기록되어 있다.

그의 처사적 삶은 세속과 어느 정도 절연한 것이었지만, 일정한 경제적 기반 없이는 영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광해군일기]에 실린 그의 졸기()에서는 이때 그가 그냥 은둔한 것이 아니라 농업경영에 힘써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기록했다(1617년(광해군 9) 4월 27일).

곽재우의 재력은 실제로 작지 않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곽재우의 전공을 보고한 장계에서 초유사(使) 김성일()은 그의 집안이 매우 부유했는데 의병을 모집하는 데 재산을 모두 희사(- 목적을 위해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음)했다고 기록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의병활동에 참가한 양반들은 대부분 수백~수천 마지기()1)의 토지와 200~300명의 노비를 소유했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하면, 곽재우도 그것과 비슷한 경제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정한 방법이 아닌 이상 축재는 나쁜 일이 아니다. 김성일이 지적했듯이, 중요한 사실은 그런 재산을 창의()하는 데 쾌척했다는 것이다. 조선 최대의 국난은 곽재우가 은거한 지 4년 만인 1592년 4월에 발발했다. 그때 곽재우는 40세의 장년이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그는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섰다.

기의와 승전"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열흘도 안 된 4월 22일에 고향인 의령현 세간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기의는 호남ㆍ호서의 의병보다는 한 달, 김면()ㆍ정인홍() 부대보다는 50일 정도 빠른 최초의 의병이었다. 이런 정황에는 그가 살던 의령이 일본군의 초기 침략지역과 가까웠다는 까닭도 작용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그의 애국심과 실천력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의 부대는 거느리던 노비 10여 명으로 출발했지만, 이웃 양반들을 설득해 이틀 만에 5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뒤 그의 의병은 2천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1593년(선조 26) 1월 11일).

첫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그 까닭은 불리한 전황이 아니라 조정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물자가 부족했던 그의 부대는 관군이 도망가 비어있던 초계성()으로 들어가 그곳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해 사용했는데, 합천군수 전현룡(), 우병사 조대곤() 등이 이런 행동을 오해해 그들을 토적(- 지방에서 일어난 도둑 떼)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의 해명으로 위기를 넘긴 곽재우 부대는 그 뒤 의령을 거점으로 현풍ㆍ영산(. 지금 창녕)ㆍ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 우선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 경남 의령 소재. 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남강의 나루)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육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조선군이 이긴 최초의 전투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7월에는 현풍ㆍ창녕 등지에서 승리해 경상우도에서 왜군의 진격을 차단했고, 왜군에 항복해 길잡이 노릇을 하던 공위겸()을 매복작전으로 체포해 처형했다. 10월에는 왜란 초반의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전투였던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그들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교란해 승전에 기여했다.

곽재우가 구사한 전술은 기본적으로 유격전이었다. 그는 단기()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ㆍ매복전술 등의 변칙적 방법으로 적을 교란하고 무찔렀다. 이것은 전력과 물자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의병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었을 것이다.

곽재우는 이런 전공으로 벼슬을 받았고 계속 승진했다. 그는 유곡찰방(. 1592년 6월. 종6품)·형조정랑(8월. 정5품)을 거쳐 경상도 조방장(. 정3품)에 임명되었고, 1593년 4월에는 성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왜란이 발발한 지 1년 만에 그는 경상우도 방어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군사 지휘관에 올랐다.

불화와 낙향"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금방 끝날 것 같던 임진왜란은 내륙의 의병과 해전의 이순신이 활약하면서 1593년 후반부터 장기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전황의 변화에 따라 곽재우의 역할도 바뀌었다. 그동안도 그는 왜군의 대규모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으려면 산성을 거점으로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져 1594년부터 삼가()의 악견()산성, 가야산의 용기()산성, 지리산의 구성()산성 등 경상도 일대의 산성을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순신ㆍ원균 등과 함께 거제도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여했지만, 왜군이 대응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12월에는 가장 주요한 격전지 중 한 곳인 진주목사에 임명되었고, 경상도 관찰사ㆍ경상우수사 같은 요직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곽재우는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본격화되던 1595년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본관인 현풍으로 낙향했고, 거기서 2년 동안 칩거했다. 승전을 거듭해 계속 중용되던 의병장이 갑자기 낙향한 이례적인 사태의 가장 큰 까닭은 조정과의 불화였다.

앞서도 그랬지만 그 뒤 처사로 은둔해 곡기를 끊고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행적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곽재우는 기본적으로 직선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저런 갈등을 일으켰다.

첫 사례는 전란이 일어난 직후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관련된 것이었다. 1592년 6월 김수가 패전하자 곽재우는 그를 패장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도 곽재우가 역심을 품었다고 맞섰다. 이 대립은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1594년 거제도 작전에서도 곽재우는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다른 장수들과 마찰을 빚었다. 나중에 두 사안 모두 곽재우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은 곽재우의 자세는 상당한 반발을 가져왔다.

이런 마찰로 형성된 가장 중요한 결과는 국왕 선조가 그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낙향한 뒤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이덕형()을 중심으로 그를 다시 기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선조의 반응은 싸늘했다. “나는 이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1595년(선조 28) 12월 5일). ·····곽재우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의 처사를 보니 참으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 도체찰사가 격서를 보내 불렀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가.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으니 함부로 병권을 맡길 수 없다(1596년 2월 18일).” 왕명을 대행하는 도체찰사의 부름에 곽재우가 따르지 않자 선조는 그가 왕명을 무시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런 불신은 이때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 발원은 앞서 말한 김수와의 충돌이었다. 그때 선조는 “곽재우가 김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자신의 병력을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1592년 8월 7일)”고 물었고, 나아가 “이 사람이 함부로 감사를 죽이려고 하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연려실기술] 권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

권력자의 한 속성은 의심이고, 그런 성향은 위기의 국면에서 더욱 짙어지곤 한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이순신에게 그랬듯이, 뛰어난 무공을 세운 의병장을 보는 국왕의 이런 태도는 상당한 문제였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정유재란의 조짐이 뚜렷해지자 곽재우는 다시 경상좌도 방어사(使. 종2품)에 기용되었다. 일단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수축해 주둔하다가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왜란에서 곽재우의 활약은 여기서 끝났다. 복상() 때문이었다. 1597년(선조 30) 8월 계모 허씨가 별세하자 그는 현풍의 선영에 장사지낸 뒤 강원도 울진()으로 피신해 삼년상을 치렀다. 복상 중에도 기복()하라는 명령이 몇 차례 내려졌지만 그는 상중이라고 거절했다.

그동안 거대한 전란은 끝났다. 탈상한 곽재우는 1599년 10월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에 임명되어 그 지역의 군무를 총괄했다. 당시로서는 노년의 초입에접어든 48세였다.

당쟁과 은거"

조선 후기 주요 인물들의 삶을 규정한 핵심적 조건은 당쟁이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갈등이었지만, 그 저변에는 학문과 혈연관계가 복잡하고 견고하게 얽혀 있었고,그래서 그 영향과 파괴력은 넓고 깊었다.

곽재우도 당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조식의 외손사위라는 혼인관계가 보여주듯이 북인계 인물로 평가되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전란 동안 그를 계속 추천하고 인정한 인물도 김성일(초유사. 1592~93년)ㆍ유성룡(영의정. 1593~96년)ㆍ이원익(체찰사. 1597~98년) 등 남인계 중신들이었다.

곽재우의 정치적 시련은 전란이 끝난 뒤에 닥쳤다. 그때 대부분의 인물이 그랬듯이, 그 시련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개진해 스스로 초래한 것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1600년(선조 33) 2월 붕당의 대립과 거기서 발생한 영의정 이원익의 파직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사직한 것이었다. 그는 국왕의 재가를 받지도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선조는 “장 1백 대에 멀리 유배 보내도 모자란다”면서 대노했다. 결국 그는 대북계 중진인 대사헌 홍여순()의 탄핵으로 전라도 영암()에 3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처음 겪은 주요한 정치적 시련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되지만, 그가 자신의 당색을 남인으로 자정()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1602년(선조 35)에 해배되어 현풍으로 돌아온 뒤 익힌 밥을 멀리하고 솔잎만 먹었다. 그리고 영산 창암()에 망우정()을 짓고 은거했다. <연보>에서는 이때 그의 생활을 “쓸쓸한 도인 같았다()”고 적었다.

국왕의 분노를 산 그가 공로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듬해 공신도감에서는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참으로 그의 공로”라면서 공신 책봉을 건의했지만, 선조는 곽재우의 공로뿐만 아니라 장수들의 활약을 전체적으로 각박하게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장수와 군사가 왜적을 막은 것은 양()을 몰아 호랑이와 싸운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이 수전에서 세운 공로가 으뜸이고, 그밖에는 권율의 행주전투와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기대에 부응했으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했다. 그 중에 잘했다는 사람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1603년 2월 12일).” 결국 곽재우는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그 뒤 1605년(선조 38) 2월에 그는 동지중추부사ㆍ한성부 우윤(종2품)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두 달만에 병으로 사직한 뒤 줄곧 망우정에서 지냈다. 1607년 1월에는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한강() 정구(, 1543~1620)와 여헌() 장현광(, 1554~1637)이 방문해 함께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노년에 접어든 56세 때의 일이었다.

해평()부원군으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당시의 주요한 대신인 윤근수(, 1537~1616)는 그가 곡기를 끊은 까닭을 이렇게 짚었다. “곽재우가 솔잎만 먹는 까닭을 도술을 닦으려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김덕령이 뛰어난 용력으로도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죽자 자신도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이것을 핑계로 세상을 도피하려는 것이라고 한다(1608년 8월 13일).”

낙향과 별세"

관계가 불편했던 선조가 붕어하고 광해군(재위: 1608 ~1623)이 즉위하면서 곽재우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그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고 상경을 재촉했다.

그때 곽재우의 삶은 청빈함을 넘어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교지를 갖고 찾아갔던 금군()은 “인적이 아주 끊어진 영산의 산골에 두어 칸의 초가를 짓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생계가 아주 초라했고, 병들어 누워서 나오지도 못했다”고 보고했다. 곽재우의 아들은 아버지가 상경하려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타고 갈 말과 종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단벌옷도 다 해져 날씨가 추우면 길을 떠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국왕은 즉시 의복을 지급하라고 하명했다(1608년(광해군 0) 9월 14일).

그 뒤 1610년(광해군 2) 곽재우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ㆍ한성부 좌윤(종2품)으로 임명되어 잠깐 상경했지만, 역관()과 원접사(使)가 왕명을 무시했다고 비판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낙향했다.

2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용맹하고 고결한 의병장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서울에 있는 동안 이원익ㆍ이덕형 같은 중신들이 자주 찾아왔고, 사대부들도 그를 만나려고 몰려들어 집에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아이들까지도 그를 보려고 거리를 메웠다(<연보>).

그 뒤 별세할 때까지 곽재우는 계속 망우정에 머물렀다. 앞서 말한 빈한한 환경이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처럼 “강가의 정자에 있었다”는 이 시기 <연보>의 짧은 표현은 그런 쓸쓸함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타협하지 않는 곽재우의 직선적인 성품은 별세하기 전에 한번 더 표출되었다. 그때 조정의 가장 큰 논란이었던 영창대군()을 사사하는 문제와 관련해 곽재우는 그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1613년(광해군 5) 5월). 이 때문에 그는 대북()의 탄핵을 받아 사사될 뻔했지만, 장령 배대유()의 변호로 목숨을 구했다.

노쇠한 의병장은 4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1617년 3월 병이 깊어지자 그는 “생사에는 천명이 있는 것”이라면서 치료를 중단했고, 4월 10일 망우정에서 별세했다. 65세였다. 그 뒤 지금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안장되었고, 그를 모신 사우()에는 ‘예연서원()’이라는 현판이 내려졌으며,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문집은 [망우집]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좌찬성을 지내고 호성()공신에 책봉된 이호민(, 1553~1634))은 이런 시를 지어 곽재우를 칭송했다([망우집], <망우선생전> 및 [연려실기술] 권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

들으니 홍의장군은()

왜군을 노루 쫓듯 한다고 하네.()

그대를 위해 말하니 끝까지 힘을 다해()

곽분양처럼 되소서().

곽분양은 당 현종 때의 곽자의(, 697~781)로,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로를 세워 분양왕()에 책봉된 인물이다. 그는 관원으로 성공했고 장수를 누렸으며 자손들도 번창해 세속에서 지복()을 누린 인물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노년에 호화로운 저택에서 자손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곽분양 행락도()>는 성공과 행복의 상징으로 자주 그려졌다.

추측일 뿐이지만, 이호민은 두 사람이 같은 성씨의 무장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곽재우의 무운과 성공을 기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뒤 곽재우의 삶은 곽분양과 전혀 달랐다. “쓸쓸한 도인 같던” 곽재우의 벽곡과 은거가 불행했는지, 아니면 탈속의 자유로 충만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화려한 출세가 행복의 필수적 조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조선 후기의 주요 인물이 대부분 당쟁의 여파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복잡성과 함께 착잡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임진왜란 때 의령지구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의병장.

할아버지는 곽지번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곽월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이다. 1585년(선조18)34세의나이로과거에 응시하여 별시의정시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은거하고 있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대패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그 공으로 유곡찰방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악견산성() 등 성지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1597년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였으나, 그 역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604년(선조 37)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고, 이어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에 승진하였으며,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거쳐호분위의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5월 중순 왜군은 승장 안고쿠지를 시켜 의령 방면으로 진출케 하였다. 이에 앞서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켜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던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이라 칭하면서 관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수습하여 의병을 무장시켰다. 5월 24일 안고쿠지 군은 정암진에 도착하여 지역 주민들을 동원, 도하 지점을 선정하고 정찰대로 하여금 도하 후 그들이 통과할 지점에 나무를 꽂아 표시를 해두게 하였다. 


곽재우 의병은 이를 보고 있다가 정찰대가 철수한 다음 밤을 틈타 표지물을 늪으로 옮겨 놓았다. 다음 날 아침, 안고쿠지 군의 선봉대가 남강을 건너 그들이 표시해 둔 나무가 꽂혀 있는 곳으로 건너왔다. 그곳은 무릎까지 빠지는 늪지로 왜군들은 늪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이를 틈타 곽재우 의병은 적을 공격하여 전멸시키고 뒤이어 적의 주력 부대가 남강을 건너 정암진에 상륙하자 기습 공격을 가하여 대파하였다. 안고쿠지 군은 당황하여 강을 건너 달아나기에 바빴으며, 이후 의령 방면으로의 진출을 포기하였다.


이와 같이 왜군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의 진로를 차단하여 왜군이 계획한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을 기습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진주성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그의 사우에 예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묘지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출처 ^ 참고문헌

[을 통해 본 (1552~1617)의  활동>, 

[규장각] 33, 2008;이장희, 

[곽재우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5;곽재우 지음, 이재호 옮김, 

[국역 망우선생문집], 집문당, 2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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