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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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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최근 통일신라시대 목불로 판명된 해인사법보전 비로자나불상과 크기가 같고 모양도 비슷한 목조불상이 해인사 경내에 1위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경남문화재위원회가 7월 10일 해인사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을 실측함으로써 밝혀졌다.조사에 따르면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상은 높이 125cm, 얼굴 길이 27.4cm, 어깨 너비 63.5cm로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의 126cm, 26.7cm, 64cm와 거의 같았다. 뿐만 아니라 지권인의 형태나 주름 등도 같아 두 불상이 쌍둥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로써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에서 발견된 묵서명에 기록된 ‘誓願大角干主燈身賜彌右座妃主燈身○’를 ‘대각간의 등신불과 오른편에 부인의 등신불을 2위 만드노니’로 해석했던 진홍섭 문화재위 원의 견해대로 처음 조성당 시 2위가 세트로 만들어졌으며, 그 나머지 1위가 해인사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상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은 1996년 고려말 고승인 지공(指空) 스님의 계첩 ‘문수최상승무생계법(文殊最上乘無生戒法)’과 14세기 복식 11점이 복장으로 발견돼 고려시대 불상으로 간주돼 왔다. 한편 해인사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상과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이 쌍둥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명문에 나타난 대각간과 부인을 각간 위홍과 진성여왕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힘을 얻게 됐다.  조위(曺偉.1454-1503)의 문집인 <매계집(梅溪集)>에는 각간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이 해인사를 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당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해인사의 목조불상에서 국보급 고려불경이 다수 발견됐다. 대한불교조계종은 16일 “합천 해인사 원당암 보광전의 주불인 목조아미타불좌상의 정밀조사를 시행한 결과, 국내 유일본인 고려 우왕 1년(1375년)에 간행된 ‘성불수구대다라니’를 비롯해 고려후기 고려대장경을 인출한 ‘대방광불화엄경 28책’ 복장물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대방광불화엄경은 고려대장경을 비롯해 고려시대 사찰간행 사간판(寺刊板)에 대한 불교 판본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또한 수진본 ‘성불수구대다라니’는 국내에 전존본이 확인되지 않은 유일본이다. 특히 권수의 삼신불을 비롯한 마리지천 도상의 변상도를 비롯해 간행관련 기록이 분명해 향후 불교회화사 및 불교사상사, 서지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또한 목조아미타불좌상은 15세기 조성된 조선전기 불상으로 1694년에 중수됐는데, 해당 불상에서는 1490년 학조스님이 해인사 비로자나불상에 납입한 유사 형식의 후령통과 1694년 중수발원문이 발견됐다. 조계종은 이번 조사에서 목조아미타불좌상과 함께 삼존불(三尊佛)을 이루는 좌우의 관음보살입상과 지장보살입상을 X레이로 촬영했다. 그 결과 보살상 내부에는 아미타불좌상에서 출토된 동일한 후령통이 납입되어 있음이 확인됐으며, 후령통 주변에는 낱장의 경전이나 다라니로 추정되는 종이 뭉치와 경전 사이로 화려한 보상당초의 표지화와 6행 17자로 구성된 절첩본과 역시 17자로 구성된 족자형의 사경이 확인됐다. 특히 족자형 사경의 경우 사경축에 금속장식이 확인되는데 이는 현재 일본 금산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사경 ‘불설대길상다라니경’(1324년 추정) 이후 첫 사례로 알려져 주목된다. 한편, 관음보살입상과 지장보살입상은 지금껏 한 차례도 복장을 개봉한 적이 없다. 


15세기 신앙심으로 고스란히 간직한 두 보살상은 향후에도 복장을 열지 않고 법당에 모시기로 했다. 유명한 팔만대장경의 보금자리인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에서 지난 4일 국민적 관심을 모은 발표가 있었다. 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건물의 일부인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상(경남 유형문화재 41호)이 국내에서 가장 오랜 9세기 통일신라 목조 불상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이었다. 불상에 새로 금칠을 하는 개금 도중에 불상 안 빈 내벽에서 당나라 희종의 연호인 중화 3년(883년)에 완성했다는 먹글씨가 씌어진 나무판이 발견된 것이다. 명문상의 조성 시기는 국내 최고의 목조 불로 꼽혔던 13세기 말 서울 개운사와 충남 서산 개심사 아미타 불보다 4세기나 앞섰다. 학계에서 눈여겨보지 않았고, 사찰쪽에서도 조선시대 불상으로만 추정했던 터라 이 ‘낭보’는 화제를 흩뿌렸다. 서양 미술사에 견준다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 조각물이 중세 것으로 판명난 셈이다. 


왜 이런 편차가 난 것이며 불상은 또 어떤 내력을 지녔을까. 실제로 불상 명문과 천년 고찰에 얽힌 옛 기록들의 미스터리는 호사가들의 소설적 상상력을 자극할 만하다. 명문은 불상 안 벽에 못으로 박은 나무판에 두 줄로 쓰여져 있었다. 일부 해석이 엇갈리긴 하지만, 대략 내용은 두 가지다. 중화 3년인 계묘년 여름에 금칠해 완성했으며, 신라 최고 관직인 대각간 벼슬아치와 그의 비(아내)가 발원해 각각 등신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4일 발표 현장에서 원로 미술사가 진홍섭씨가 이런 해석을 제시하자, 현장 관계자들 사이에서 당장 ‘대각간은 위홍’이란 수군거림이 들렸다. 위홍은 통일신라 말 음탕한 생활로 실정을 거듭했다는 진성여왕의 애인이자 권세가다. 왜 위홍이 법보전 불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 


대한불교조계종은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본존인 아미타불좌상의 복장(腹藏·불상의 뱃속)에서 고려 우왕 1년(1375) 간행된 '성불수구대다라니'와 고려 후기에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찍은 '대방광불화엄경 28책'을 발견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는 지난 8월 개금불사(改金佛事·불상에 금칠을 다시 할 때 행하는 의식)를 위해 불상의 복장물을 확인하던 중 발견된 것이다. 불상에서 발견된 '성불수구대다라니'는 소매 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든 '수진본'(袖珍本)이다. 전존본(傳存本)이 확인되지 않은 유일본으로 그 가치가 높다. 또한 '대방광불화엄경'은 고려대장경을 비롯해 고려시대 사찰간행 사간판(寺刊板)에 대한 불교 판본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특히 변상도(불교 경전 내용을 소재로 삼은 그림)가 있고 간행관련 기록이 분명해 향후 불교회화사 및 불교사상사, 서지학적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설명이다. 


한국불교연구원이 75년 낸 책자 <해인사>에는 흥미로운 사적이 나온다. 조선 성종 21년(1490년) 해인사 중창 당시 현 대적광전인 비로전 처마의 부재 사이에서 발견된 전권(땅을 하사받거나 사들인 경위를 기록한 문서)을 설명한 문인 조위의 <서해인사전권후>란 기록이다. 문집 <매계집>에 실린 이 기록은 이렇게 적고있다. ‘헌강왕 11년(885년) 을사년까지 해인사는 ‘북궁해인수(北宮海印藪)’라고 불리우다가 진성왕 4년인 경술년(890년)부터 혜성대왕 원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글에 나오는 혜성대왕은 진성여왕 2년(888년) 위홍이 죽자 여왕이 그를 추모해 높여 붙인 시호다. 죽은 위홍을 기리는 추모당이 곧 해인사였다는 말이다. <삼국사기>에는 진성여왕이 재위 11년째인 898년 퇴위한 뒤 북궁에서 숨져 황산에 장사지냈다는 대목도 나온다. 조위의 기록을 감안하면 북궁인 해인사에서 여왕이 만년을 살다 세상을 떴다는 얘기가 된다. 장사 지낸 황산에 대해 <삼국유사>는 경주 모량 서쪽의 산이라고 했는데, 이 지명은 해인사 들머리인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뒷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서해인사전권후>는

‘해인사를 위홍의 원당 삼았고, 왕위도 버리고 해인사로 가서 지내다 죽었으니, 죽어서도 함께 묻히고자 원했기 때문’이란 해석까지 붙여 놓았다. 게다가 <삼국유사>는 위홍을 진성왕의 배필(남편)이며 직위를 대각간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법보전 불상의 대각간과 비 명문을 놓고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법한 상황이 설정된 셈이다.법보전 불상은 대적광전에 있는 비로자나불 불상과 크기와 모양이 닮아 두 구의 등신대 불상을 조성했다는 명문 내용과도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금칠을 벗긴 법보전 불상 사진을 보면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형 용모다. 대적광전의 불상 또한 주름, 옷 윤곽, 얼굴 등이 그런 식이어서 학계에서도 두 불상의 닮은 꼴은 오랜 화제거리였다. 발표 이후엔 대적광전 불상도 법보전 불상과 같은 시기 것이란 추론이 일부에서 고개를 들었다. 


정말 두 불상은 위홍과 진성여왕의 사랑이 깃든 커플 불상일까. 미술사학계의 시각은 대체로 싸늘하다. 교리상 비로자나불 상을 동시에 봉안하는 것은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에도 전례가 없는 발상인데다, 대적광전 불상을 자세히 보면 얼굴 표현이 평면적이어서 시대적 차이가 드러난다는 견해다. 상당수 연구자들은 대적광전 불상이 고려 또는 조선시대 법보전 불상을 본떠 만든 복제상이 명백하다는 주장을 편다. 법보전 불상이 통일신라 것이라는 데 대한 의문도 없지 않다. 불상을 검토한 강우방 이대 교수는 자연미 돋보이는 표정이나 주름 양식상 통일신라 양식이 분명하다고 했지만, 문명대 동대 교수 등은 나무판 명문의 형식이 어색하다는 점 외에도 동시대 복장유물이 없다는 게 이상하며, 양식상 조선시대 것으로 보인다는 이견을 제시했다. 종단 안에서도 학계 의견을 모으지 않고 서둘러 단정적 발표를 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대적광전의 불상 안 복장에 명문이 있는지 검토하고, 개봉되지 않은 법보전의 복장물과 나무 재질을 심층조사하자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두 불상이 1000여 년전 왕실 연인들의 애정 불심이 깃든 커플 불상이었는지를 밝히는 데는 더욱 난감한 검증절차가 필요한 셈이다. 어쩌면 그 비밀은 영원히 부처님만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더불어 불상에서는 1694년 해인사의 승려 숭열(崇悅), 종안(宗眼) 등이 불상을 중수했으며, 증사 탁근(卓根), 지전 일원(一元) 등 많은 사중 승려들이 중수에 참여했다는 내용의 발원문도 발견됐다. 1490년 학조스님이 왕실 후원을 받아 해인사 법보전과 대광명전에 모셨던 비로자나불상에 납입한 은제 후령통(候鈴筒·복장 유물을 넣는 통)과 유사한 형식의 은제 후령통도 함께 출토됐다. 조계종은 목조아미타불좌상과 함께 삼존불(三尊佛)의 좌우인 관음보살입상과 지장보살입상을 각각 엑스레이(X-ray)로 촬영했다. 조사 결과 보살상 내부에는 아미타불좌상에서 출토된 동일한 후령통이 들어 있었고, 후령통 주변에는 낱장의 경전이나 다라니로 추정되는 종이 뭉치와 경전 사이로 확인됐다. 


지장보살입상에서 족자 형태의 사경(寫經·손으로 베껴 쓴 경전)에 금속 장식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는데, 이는 현재 일본 금산사에 있는 고려 사경 '불설대길상다라니경'(1324년 추정) 이후 첫 발견이어서 주목된다. 해인사 측은 "목조아미타불좌상은 1983년 개금불사를 위해 복장이 일부 개봉된 바 있으나, 관음보살입상과 지장보살입상은 지금까지 한 차례도 복장이 개봉된 적이 없다"며 "사찰이 중창되던 15세기 신앙심으로 고스란히 간직한 두 보살상은 신성한 비불(祕佛)로 삼아 향후에도 절대 복장을 열지 않고 법당에 모시기로 했다"고 말했다. 


경남 합천 해인사에 있는 불상 3개를 X-ray로 투시해 봤더니 그 안에 불경과 귀중한 불교 문화재가 들어있는 게 확인됐습니다. 불교계는 이 불상과 불경을 국가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할 계획입니다.  불교 경전 내용을 담은 작은 그림들과 함께 성불하기 위해 외워야 하는 주문이 가득 적혀 있습니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접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성불수구대다라니입니다. 고려 우왕이 왕위에 오른 해인 1375년에 제작됐다고 뚜렷하게 연대가 적힌 이 책은 해인사의 한 불상 안에서 나왔습니다. 원당암 삼존불에 금칠을 다시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X-ray 투시를 해봤더니 아미타불좌상에서 이 책과 화엄경 28책과 사리가 발견된 겁니다.


[정은우/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장 : X-ray 촬영을 해서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고, (내부 유물을) 꺼낼 것인가 안 꺼낼 것인가 결정하거든요. 이번에도 그런 경우인데요, 이 아미타불 좌상은 84cm 정도라서 (바닥을 통해) 충분히 손으로 빼낼 수 있었어요.] 다른 불상 속 유물도 확인됐습니다. 지장보살입상 안에는 금속장식이 달린 족자형 경전이 관음보살입상에는 병풍처럼 접었다 펼 수 있는 책자가 들어 있는 게 확인됐습니다. 불교계는 이 두 불상은 열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5월엔 CT를 이용해 불경을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국내 최초로 사람 크기의 불상을 3D CT로 촬영했더니 머릿속에서 불경 두루마리가 나왔습니다. 


경남 합천 해인사(주지 현응 스님)의 ‘첨단 대비로전’이 눈길을 끌고 있다. 24일 오후 낙성법회를 갖는 대비로전은, 화재가 발생하면 센서가 이를 감지해 즉시 법당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상 2점을 지하 6m 깊이에 콘크리트로 지어진 ‘별실’로 이동시켜 안전하게 대피시키도록 돼있다. 대부분 국내 사찰의 경우 화재 대비책은 소방호스나 소화기를 갖추는 수준이다. 목조 건축물이 많은 일본 사찰의 경우도 지붕 위에서 스프링클러가 물을 뿜어 수막(水膜)을 만들면서 불길을 차단하는 정도라고 한다. 해인사의 한 스님은 “우리가 아는 한 국내외를 막론하고 ‘비상하강 시스템’을 갖춘 법당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럼 해인사는 왜 이런 첨단 화재 대피 시스템이 갖춰진 법당을 짓게 됐을까? 대비로전에 모실 불상들은 원래 법보전과 대적광전에 따로 모셔져 있었다. 쌍둥이 불상인 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불상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다가 지난 2005년 7월 법보전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하는 과정에서 불상 내부의 묵서(墨書)가 발견돼 833년에 제작된 국내 최고의 통일신라 목조불상임이 밝혀졌다. 


대적광전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제작된 점도 확인됐다. 해인사는 쌍둥이 비로자나불을 모실 전각을 새로 지으면서 화재에도 대비할 수 있는 건물을 짓기로 했다. 그해 봄 낙산사 화재로 인한 피해가 타산지석이 됐다.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은 “화재는 목조건물은 물론 동종(銅鐘)까지 녹여버리더라”면서 “목조불상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방법을 고안해 달라고 시공사에 부탁했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비상하강 시스템’을 갖춘 첨단 법당이 탄생한 것이다.  


마침 2005년 8월 해인사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도 특별지원금 30억원을 약속해 ‘첨단 법당 건축’은 탄력을 받았다. 년의 공사를 거쳐 완공된 ‘대비로전’의 기본 구조는 어찌 보면 간단하다. 지하 6m 깊이에 사방이 30㎝ 두께의 콘크리트 벽으로 막힌 ‘별실’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로 법당을 지었다. 폭 2.6m, 길이 5.6m, 높이 3.7m 크기의 별실은 오로지 불상을 대피시키기 위한 공간으로 설계됐다. 비로자나불 2점이 놓이는 각각의 좌대(座臺) 아래로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화재가 발생하면 유압식 기계장치를 타고 엘리베이터처럼 지하 별실로 사라지는 구조다. 대비로전 입구 안쪽 왼쪽 기둥에는 전방 160도 범위를 감지할 수 있는 화재 자동감지장치(센서)가 쌍둥이 불상을 향해 설치돼 있다. 이 센서는 열이 아닌 불꽃을 감지해 낸다. 


시공을 맡은 홍기종합건설 관계자는 “열 감지장치는 주로 섭씨 70도 이상의 고열을 감지하는데, 그럴 경우엔 목조불상이 이미 훼손되기 시작한다”며 “불꽃 감지센서는 횃불 혹은 신문지에 불을 붙인 정도의 불꽃에 반응하도록 설계돼있다”고 말했다. 불공을 드리기 위해 켜는 촛불 정도의 불꽃에는 센서가 반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단 화재가 감지되면 자동으로 엘리베이터가 작동해 불상이 지하로 내려간다. 별실 바닥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분. 지하 별실로 통하는 구멍에는 각각 지하 2.3m와 지하 4.3m 지점에 이중의 방화문이 설치돼 있다. 첫 번째 방화문이 닫히는 시점은 불상이 하강을 시작한 지 약 2분 30초 후이다. 즉, 화재가 감지된 2분 30초 후면 불상은 불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장치는 모두 전기로 작동된다. 


홍기종합건설 이동식 현장소장은 “외부의 화재로 전기선이 끊어져도 10분 정도 기능할 수 있는 축전기가 가동되기 때문에 불상을 지하로 모시는 데는 문제가 없다”며 “이틀 정도 불이 계속돼도 불상은 안전하게 보존된다”고 설명했다. 해인사는 지난 21일 불상의 무게(약 150kg)보다 무거운 170kg의 철근을 좌대에 올려놓고 시험운행을 했다. 해인사 측은 이번 ‘첨단 대비로전’ 완공에 이어 앞으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 목판과 이를 모신 법보전 등에 대한 화재 대비책도 마련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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