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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식물.나무. (자연).

도연명, 꽃,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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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 꽃,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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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꽃의 계절이다. 송나라 문인 구양수(, 1007~1072)가 “들꽃이 피어나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고 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나의 어린 시절, 산골에는 꽃이 많았다. 특히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 무렵이면 밭에는 모란과 작약이 만개하여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모란, 작약과 더불어 국화를 3가품()이라 한다. 역시 구양수가 〈취옹정기()〉에서 말한 대로 ‘바람이 상쾌하고 서리가 깨끗한()’ 가을이 무르익을 즈음 산자락 여기저기에는 들국화가 결곡한 자태로 피어났다. 찬바람이 불 때 피는 국화는 그 존재감이 남달랐다.

 

도연명이 갈건을 벗어 술 거르는 장면을 그린 명나라 화가 정운붕()의 〈녹주도()〉를 보면, 무리 지어 핀 흰 들국화 사이로 자줏빛과 노란 들국화가 드문드문 섞여 있다. 국화가 지고 긴 겨울의 여백을 지나면 매화가 찾아온다. 매화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라면 국화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꽃이라 할까. 원나라 하중()의 〈국화()〉라는 시부터 읽어본다.

국화는 유인과 같고 菊花如幽人
매화는 열사와 같다. 梅花如烈士
모두 빙설 속에서 피어나지만 同居冰雪中
품격은 서로 같지 않구나. 標格不相似

차가운 눈 속에서 봄을 알리는 매화를 보고 열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면 서리 내리는 추운 계절에 저 홀로 피어 있는 국화의 자태에서 은인자중하는 은자의 풍도를 본 것이다. 다음은 당나라 시인 원진()의 〈국화()〉이다.

도연명의 집처럼 집을 둘러 핀 국화 떨기 秋叢繞舍似陶家
빙 두른 울타리 옆으로 해는 기울어간다. 遍繞籬邊日漸斜
꽃 중에서 국화만을 편애하는 건 아니지만 不是花中偏愛菊
이 꽃이 지고 나면 더 이상 꽃이 없으리니. 此花開盡更無花

이 시에서도 국화는 1년 중 마지막에 피는 꽃으로 등장한다. [당시칠언 화보()]에 이 시의 정경을 그림으로 새긴 판화가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채여좌()가 그림을 그리고 유차천()이 판각한 것이다. 울타리 옆 소나무 너머로 지는 노을과 시들어가는 국화를 연결하여 사라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었다.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의 〈농가월령가〉에는 “만산(滿) 풍엽()은 연지()를 물들이고 / 울 밑에 황국화()는 추광()을 자랑한다”라고 하여 국화는 음력 9월의 계절감을 나타내는 소재로 나온다.

 

황봉지(黃鳳池) 편찬의 [당시칠언 화보(唐詩七言畵譜)]에 실린 원진(元稹)의 시 <국화>.명나라 왕무학(汪懋學)이 글씨를 쓰고 채여좌(蔡汝佐)가 삽화를 그렸다. 추운 계절에 피는 꽃이라서 그런지 국화에는 인고의 이미지가 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나 노천명의 〈국화제()〉 시에서 보이는 이미지도 옛 한시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영물시()에 뛰어났던 이규보(, 1168~1241)의 〈국화를 읊다()〉에 그런 이미지가 잘 드러난다.

서리를 견디는 자태 외려 봄꽃보다 나은데 耐霜猶足勝春紅
삼추를 지나고도 떨기에서 떠날 줄 모르네. 閱過三秋不去叢
꽃 중에서 오직 너만이 굳은 절개 지키니 獨爾花中剛把節
함부로 꺾어서 술자리에 보내지 마오. 未宜輕折向筵中

이 시 앞에는, 국화가 봄철의 꽃보다 나아 술잔 속에 띄우니 흥취가 더한다는 내용으로 쓴 시가 한 수 더 있다. 이러한 절개를 가진 꽃을 함부로 꺾어 술좌석에 보내서는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듯, 얼른 그 외경심을 주목하여 이 시 한 수를 더 지었으리라. 물론 이 시 속에는 한 사람의 문인으로 당당히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이규보의 자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으려는 절조()가 엿보인다.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국화를 보고 자연스럽게 이런 시상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오래 축적된 문화사적 배경이 있다.

 

도연명의 여향(餘香), 

휴정(, 1520~1604: 서산대사)이 남긴 [청허집()]에 보면 〈소나무와 국화를 심다()〉라는 시가 있다.

지난해 처음 뜰 앞에 국화를 심고 去年初種庭前菊
올해는 또 난간 밖에 소나무를 심었네. 今年又栽檻外松
산승이 화초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山僧不是愛花草
사람들에게 색즉시공을 알게 함이라네. 要使人知色是空

불교의 색즉시공()의 진리를 들어 허상에 집착하지 말라 일갈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국화와 소나무일까? 대사의 마음이야 자신만이 알겠지만, 대사가 속으로 도연명을 알고 또 좋아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정선(鄭敾), 〈동리채국(東籬采菊)〉(부채 그림)18세기, 종이에 담채, 22.7×59.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선은 〈동리채국()〉에서 도연명(, 365~427)의 시 〈음주()〉 제5수를 그림으로 재현하였다. 선비의 평상복을 입은 도연명이 소나무가 서 있는 사립문 앞에서 국화를 따다가 남산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다.

 

도연명은 남북조시대에 동진에서 송()으로 바뀌는 시기를 살았는데, 젊은 시절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과 잘 맞지 않아 출사()와 퇴은(退)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그는 팽택령()으로 있을 때, 현을 순시하는 독우(: 지방을 순찰하는 감찰관)가 오니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아전의 말에 “오두미()의 하찮은 녹봉 때문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실거릴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결기 있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거래사()〉는 그때의 감회를 표현한 작품이다. 그 후 줄곧 전원에 묻혀 살면서 바뀐 왕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가 절개를 지켰다 하여 ‘정절()’이라는 사시()를 수여하였다.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네(, )”라고 하였고, 또 “햇빛이 장차 뉘엿뉘엿 지려 하는데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댄다(, )”라고 노래하였다. 그래서 도연명의 집 주변을 나타낸 그림에는 으레 국화와 함께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소나무와 국화는 도연명의 분신이자 은일의 표상인 것이다. 도연명이 살던 여산() 자락은 그 풍광이 우리나라와 비슷하고 국화와 소나무도 낯익어 더욱 친근감을 준다. 송나라 때 화가 이공린()의 〈연명귀은도()〉를 비롯한 일련의 도연명 그림이나 앞에서 말한 당시화보에서 보듯이 화폭에 늙은 소나무가 강조되어 나타나는 것에는 이러한 연유가 있다. 한 그루의 노송에서 풍기는 절조와 고독감이 도연명의 생애와 잘 어울리고 있다. 모두 스무 수로 된 도연명의 〈음주()〉 시 중 제7수이다.

가을 국화 자태도 아름다워라 秋菊有佳色
이슬에 젖은 꽃잎을 따 보네. 裛露掇其英
근심을 잊는 술에 띄워 마시니 汎此忘憂物
세속 떠난 마음 더욱 깊어지네. 遠我遺世情

이 연작시는 도연명 시의 풍격을 대표하고 있다. 전원에 묻혀 지내면서 삶의 참의미를 자각하는 철리적인 측면과 한가하고 호젓한 심상을 자아내는 일상생활의 서정이, 세상을 좀 살아본 문인들에게 커다란 공명을 준다. 도연명을 그린 그림에 흔히 나타나는 ‘추국유가색()’은 이 시에서 온 것이다.

장승업(張承業), <도연명애국도(陶淵明愛菊圖)>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128.8 x 31.7cm, 개인 소장.

이 연작시는 도연명 시의 풍격을 대표하고 있다. 전원에 묻혀 지내면서 삶의 참의미를 자각하는 철리적인 측면과 한가하고 호젓한 심상을 자아내는 일상생활의 서정이, 세상을 좀 살아본 문인들에게 커다란 공명을 준다. 도연명을 그린 그림에 흔히 나타나는 ‘추국유가색()’은 이 시에서 온 것이다.

 

국화를 도연명과 결부시키게 된 것은 아무래도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가 〈애련설()〉에서 “진나라 도연명은 국화를 사랑하였다” 하고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인데 “도연명 이후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다”라고 한 말 때문일 것이다. 〈애련설〉은 짧고 쉬우면서 문인들의 기호에 잘 맞아떨어져 널리 암송되었다. 일제 때 문필로 이름을 날린 문일평()이나 이후 한문학적 교양이 풍부했던 미술사학자 김용준(), 수필가 윤오영() 등의 글을 보면 도연명의 영향을 실감하는데, 그들이 책에 가장 즐겨 인용하는 시가 〈음주〉 제5수이다. 그중 한 대목이다.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采菊東籬下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본다. 悠然見南山
산 기운은 저녁 무렵에 아름답고 山氣日夕佳
나는 새도 서로 더불어 돌아온다. 飛鳥相與還

'동리채국()', 이 말 역시 여기서 나왔다. 이 시는 도연명의 〈오류선생전()〉, 〈귀거래사〉, 〈도화원기()〉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글이다. 〈음주()〉의 이 두 수와 〈귀거래사〉, 그리고 주돈이의 언급으로 도연명은 은일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지식인의 은거는 평민이 시골에 사는 것과 달리 정치적이고 철학적이다. 저 멀리 요순시대의 소보(), 허유()에서부터 한나라 때의 상산사호(), 그리고 도연명보다 조금 앞선 시기의 혜강(), 완적() 같은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은나라 이윤()이나 주나라 강태공()도 발탁되어 재상이 되기 전에는 은자였다. 이렇듯 세상이 혼란스럽거나 자신과 맞지 않을 때는 은거하고 때가 되면 출사하여 뜻을 펴는 것이 전통적인 지식인의 처세였다. 청나라 중기의 화가인 정섭()이 “총명하게 세상 살기 어렵고, 바보스럽게 세상 살기 어렵지. 총명하면서 바보스럽게 세상을 사는 것은 더욱 어렵지(, , )”라고 한 말이 처세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능력을 가진 지식인이 초야에 묻혀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이전의 포부를 접고서 자신이 만족할 만한 새 삶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느끼듯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 바로 이런 면에서 도연명의 삶과 문학이 동병상련의 지식인에게 일종의 로망으로 다가와 시문에 즐겨 인용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충신과 열녀 의"

국화야, 너는 어이 3월 동풍 다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정보(, 1693~1766)의 시조이다.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꿋꿋한 절개가 ‘오상고절()’이다. 이 말은 소동파의 〈겨울 풍경()〉이라는 시에 “연꽃은 지고 나면 비를 받칠 덮개가 없지만, 국화는 시들어도 서리를 이겨내는 가지가 있다(, )”라는 대목에서 유래한 듯하다. 도연명과 관련한 국화의 이미지가 은일자의 모습이었다면, 이제 국화는 말을 삼가고 역경을 견디는 인고를 넘어 매운 향기를 지닌 기품 있는 절개의 풍도()로 다가온다.

국화 이미지에 가장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은 역시 도연명이지만 그전에 굴원(, BC343?~BC278?)의 이미지가 깔려 있다. 굴원은 〈이소()〉에서 “아침에는 목란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먹네(, )”라고 노래하였다. 굴원은 충신이다. 이런 충신의 이미지가 국화와 결합해 있다. 명종 때 송순(, 1493~1582)도 국화에 충신의 의미를 담은 시조를 지은 적이 있는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목은 이색(, 1328~1396)의 〈대국유감()〉이 있다.

인정이 어찌하여 무정한 물건과 같은지 人情那似物無情
요즘엔 닥치는 일마다 불평이 늘어간다. 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 바라보니 부끄럽기만 하네 偶向東籬羞滿面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으니. 眞黃花對僞淵明

목은은 왜 국화꽃을 보며 얼굴 가득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자신을 가짜 도연명이라고 자조하는 것일까? 이기(, 1522~1600)의 〈송와잡설()〉에 이 시에 대한 배경 설명이 풍부하다. 고려말에 우왕()이 폐위되어 강화()에 있을 때에 목은이 미복()으로 가서 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국화()를 보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또 윤근수()의 [월정만필()]에는 길재()가 목은에게 거취에 대한 의리를 물었을 때, “나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과 함께해야 하니 떠나갈 수 없지만 그대는 떠나가도 좋다” 하였다. 목은이 그때 장단의 별장에 있다가 그에게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다()”라는 시구를 지어주었는데, 당시 목은의 심사가 잘 녹아 있다. 서애 유성룡도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다()”에 목은의 마음이 다 담겨 있다고 논평하고는 슬프다고 하였다. 시류에 영합하는 사람이면 애초 부끄러움이 없을 터인데, 절개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끄럽다고 한 목은의 심정을 읽은 때문이 아닐까.

 

정몽주(, 1337~1392)가 스물다섯에 쓴 〈국화탄()〉이라는 시가 있다.

사람은 함께 말할 수 있으나 人雖可與語
미친 그 마음 나는 미워하고 吾惡其心狂
꽃은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花雖不解語
꽃다운 그 마음 나는 사랑한다. 我愛其心芳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지만 平生不飮酒
너를 위해 한 잔 술을 들고 爲汝擧一觴
평소에 웃지 않지만 平生不啓齒
너를 위해 한바탕 웃어보리라. 爲汝笑一場

시인은 별로 웃어볼 일 없는 세상에 찬란하게 핀 국화를 보고 위안을 받고 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세태를 한탄하는 뜻과 훗날 사직()과 운명을 함께한 지조를 읽어볼 수 있다. 같은 시에 “마침 10월로 바뀌는 즈음이라 날씨가 점점 추워지건만, 찬란하게 옛 모습 드러내고 유유히 맑은 향기 지니고 있네(, . , )”라고 한 구절은 자신의 미래를 예견해 보이고 있는 듯도 하다. 포은() 역시 고려 말엽에 한 승려가 “강남 만 리에 들꽃이 만발하였으니, 봄바람 부는 어느 곳인들 좋은 산 아니겠는가(, )”라고 하여 몸을 피할 것을 암유하자, 눈물을 흘리며, “아, 이제 늦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는 이야기가 여러 문헌에 전한다. 목은과 포은의 행적과 일화에는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일찍이 문일평은 정몽주의 이 시를 소개하면서 “국화가 충신에게 사랑을 받고, 충신이 국화를 사랑한 것은 그럴듯한 일이다”고 했는데, 과연 그럴듯하다.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고 곤장을 맞는 춘향의 노래에도 국화가 나온다. 이해조()가 [춘향전]을 개작한 신소설 [옥중화()] 중 한 대목이다.

구자(九字) 낫을 딱 부치니 구자로 아뢰리다.
구고(九臯)의 학이 되어 구만장공(九萬長空) 높이 날아
구곡간장(九曲肝腸) 맺힌 한을 구중심처(九重深處) 아뢰고져
구월상풍(九月霜風) 요락(搖落)한들 구월황하(九月黃花) 이우릿가

아홉 구() 자를 반복하여 자신의 절개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 절개의 상징물로 ‘구월황화()’, 즉 국화를 등장시키고 있다. 여기서 국화는 절개나 충절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품격에의 이끌림"

심사정(沈師正), 〈자국괴석(紫菊怪石)〉 18세기경, 종이에 담채, 17×23.9cm, 간송미술관 소장. 바위틈에 자줏빛 국화가 뿌리를 박고 몇 송이의 꽃을 피우고 있다.,

국화는 인고와 절개의 상징에 그치지 않고, 군자의 자화상으로도 읊어졌다. 사람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나 앞으로 원하는 모습을 사물에 투영하여 그려보고자 한다. 김매순()은 〈함종 가는 길()〉에서 만난 국화에서 자신이 바란 군자의 모습을 보았다.

돌길 천 굽이 시냇가 따라 나 있는데 磴道千回並磵斜
말발굽 대담하게 위태로운 길 밟고 가네. 馬蹄磊落蹹崩沙
벼랑 틈서리 자줏빛 국화 아무도 상관 않지만 崖縫紫菊無人管
저 홀로 찬 하늘 향해 정성 다해 피어 있네. 自向寒天盡意花

아무도 보는 이 없어도 자기 할 일에 정성을 다하는 국화의 모습이 시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것은 ‘신기독()’의 군자정신이다. [대학]의 전() 6장에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이니,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는 것같이 하며 선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여야 하니, 이것을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 , , . )”라 하였고, [중용] 제1장에 “숨어 있는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 )”라 하였다. 위 시에서 시인은 벼랑 틈 국화에서 ‘신기독’의 경지를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앞서, 위나라 장수 종회()의 〈국화부()〉와 남송의 문인 범성대()의 [국보()] 서()에서는 국화를 군자에 비유하였다.

국화에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 둥근 꽃송이가 높이 달린 것은 하늘을 본받은 것이고, 잡티 없이 순수한 황색은 땅의 색이며, 일찍 심어 늦게 꽃이 달리는 것은 군자의 덕이고, 찬 서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것은 굳세고 곧은 기상을 드러낸 것이며, 술잔에 가볍게 떠 있는 것은 신선의 음식이다.

夫菊有五美焉. 圓英高懸, 準天極也. 純黃不雜, 后土色也. 早植晩登, 君子德也. 冒霜吐穎, 象勁直也. 流中輕體, 神仙食也.

- 종회, 〈국화부〉

산림의 호사가들은 혹 국화를 군자에 비유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한 해가 저물면 초목이 변하여 시드는데 오직 국화만은 홀로 환하게 꽃을 피워 바람과 서리를 오만하게 노려보니 이는 숨어 사는 고결한 선비의 지조이다. 비록 적막하고 황량한 상황 속에서도 심오한 도의 경지를 맛보고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山林好事者, 或以菊比君子,其說以爲歲華晼晩,草木變衰,乃獨煜然秀發,傲睨風露,此幽人逸士之操. 雖寂寥荒寒,而味道之腴,不改其樂者也.

- 범성대, 〈국보〉 서

국화를 아끼어 관찰하고 오랫동안 사색하지 않았다면 나오기 어려운 글들이다. 응축된 문장으로 담담하게 군자의 이미지를 국화에 투영하였다. 찬밥 한 덩이와 물 한 바가지로 누추한 골목에서 하루를 지내면서도 학문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고 공자에게 극찬을 들은 안회()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전기에 국화로 군자의 자화상을 다룬 작품으로는, 강희맹()의 〈우국재부()〉와 성현()의 〈국옹설()〉이 우선 눈에 띈다. 강희맹의 부()는 수양론적 자세에 가깝고, 성현의 산문은 양생론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문득 사계절이 순식간에 바뀌니 奄四時兮倐忽
여러 꽃이 쇠하여 시들어가네. 念群芳兮衰歇
국화는 맨 뒤에 비로소 피어나니 殿百花兮始發
맑고 차가운 향기가 뼈에 스미네. 香淸冷兮逼骨
만장의 홍진이 눈을 가리고 塵萬丈兮眯目
된서리가 머리칼에 날아들어도 颯乾霜兮入髮
너는 끝내 향기를 그대로 지녀 保芳馨兮無闕
밝은 달에게 그윽한 정 붙이네. 寄幽情於明月
- 강희맹, 〈우국재부(友菊齋賦)〉

의인화된 국화는 작자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세상인심은 자주 바뀌지만 나는 국화처럼 맑고 차가운 향기를 지닌 채 살고 싶다. 때로 세상 먼지가 눈을 가리고 된서리가 머리칼에 파고들어도 나만의 향기를 지닌 채 밝은 달과 같은 세상을 염원하고 싶다. 과연 문인다운 표현이다.

성현은 벼슬은 버리고 은거하려는 국옹() 신윤조()에게 〈국옹설()〉을 지어주며 그의 호 ‘국옹’에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군자는 어떤 사물이 자신의 마음에 들면 그것으로 이름을 삼는다고 하면서, 오솔길과 집, 서재에 이름을 붙인 예시를 들었다. 그리고 국화는 유아(), 담박()하고 찬란히 홀로 빼어난데, 굴원이 먹고 도연명이 뜯고 두보가 향기를 맡고 소식과 장식()이 읊고, 유몽()과 범성대가 족보로 만들었다며 박학한 지식을 드러내었다. 이에 이어지는 글이다.

국화는 그 색이 누렇다. 이를 통하여 옹(翁)이 중정(中正)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것을 안다. 국화는 또 그 냄새가 향기롭다. 이를 통하여 옹의 덕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가리기 어려운 줄을 안다. 국화꽃은 봄에 피지 않고 반드시 가을에 피니, 봄날 햇볕이 화사할 때 피지 않고 반드시 가을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려 한기로 서늘할 때 핀다. 이를 통하여 옹은 지조가 굳고 행실이 독실하여 시류에 혼탁하게 휩쓸리지 않을 것을 안다. 국화의 특성은 달고 부드러워 매우 맛이 좋다. 복용하면 허한 기운을 보충해줄 수 있고, 술에 띄우면 근심을 잊을 만하며, 주머니에 넣어 베고 자면 두풍(頭風: 신경성 두통)을 치료할 수 있고, 물에 담가 마시면 불로장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옹이 정신을 잘 길러 더욱 오래 살 것을 안다.

이 글을 보면 국화에 대한 종합적인 식견을 느낄 수 있다. 인고와 절개, 군자의 표상에 더해 수양과 양생의 문화까지 녹아 있다.

 

퇴계 이황은 푸른 물가 벼랑에 핀 야국()을 보고 아예 이곳으로 집을 옮기고 싶다 하였고, 추사 김정희는 국화가 비바람 속에서 시인에게 자태를 보여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노라며 꽃 중의 으뜸이라 하였다. 국화의 결곡한 모습에 고매한 선비들이 매료되어 시를 지어 바친 예이다.

 

옛 문인들은 국화를 알뜰히도 생각하여 시로 즐겨 읊었다. 고인()의 작품 속에 그려진 국화를 감상하노라면, 오래 다듬어진 그들의 품격()이 느껴지는 반면 초라하기만 한 오늘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국화는 여러모로 삶을 생각게 하는 꽃이다.

 

도연명 [陶淵明, táo yuān míng]

중국의 대표적인 전원시인, 무릉도원을 노래했던 시인ㅡ

도연명 초상화,

시대출생 - 사망

위진남북조시대, 동진() 말~남조() 송 초
약 365년 ~ 427년 추정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도연명 초상화

 

심양() 시상(, 현 장시(西)성 주장()) 사람으로 자는 원량()이고 송나라가 들어선 다음 이름을 잠()으로 고쳤다. 집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를 오류선생()이라 부르기도 했다.

 

유토피아 무릉도원을 노래한 <도화원기>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남긴 시인 도연명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간 사람이었다. 그는 남북조 시대라는 중국사 대분열기에 남조의 동진과 송이 교체되는 시기를 살았다. 그의 증조부 도간은 대사마 벼슬을 지낸 동진의 명사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태수를 지냈다. 그러나 도연명 대에 와서 가세가 기울어 힘든 생활을 했다. 

도연명

어려서부터 그는 책 읽기를 좋아했고 도교와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관련 서적들을 외고 다닐 정도였다. 좨주(, 국자감의 우두머리)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참군(, 참모)을 거쳐 팽택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살았다.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유명한 시 <귀거래사>를 썼다.

 

따스한 인간미, & 담담한 기풍이 깃든 시풍'

도연명집 판본

 

시골로 은거한 그는 직접 괭이와 삽을 들고 농사를 지었고, 평생 가난과 병에 시달렸지만 권세와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았다. 그는 직접 노동하면서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도 생활에서 나오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

 

따스한 인간미와 담담한 기풍은 당시의 선비들이 즐겨했던 유희문학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범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멸시에 가까운 평을 받았지만 당나라 이후 육조1)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시풍은 당나라 때의 맹호연, 왕유, 위응물, 유종원, 백거이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죽은 뒤 ‘정절()’이란 시호를 받아 ‘정절선생’이라 불리었고, 양나라 소명태자는 『문선』에 그의 시 9편을 수록하여 그에 관한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등과 같은 산문과 『도연명집()』을 남겼고, 유명한 괴기소설집 『수신후기()』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장승업, 〈귀거래도〉 간송미술관 소장.

고향, 그리고 관련 유적'

장강 중류에 위치한 도연명의 고향 시상은 북으로는 명산으로 꼽히는 여산()을 등에 지고 남으로는 파양호()를 바라보는 명승지이다. 그는 이 아름다운 전원에서 농민들과 더불어 농사지으며 시를 통해 자기 삶의 애환과 그들의 생활을 노래했다. 그를 고고한 인품의 소유자로 칭찬하는 까닭도 사람들과 더불어 울고 웃으면서 인간의 삶을 한 점 부끄럼 없는 진솔한 문학적 경지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도연명의 고향인 시상(, 현 장시(西)성 주장())의 사마()로 부임한 뒤 도연명이 살던 옛집을 찾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오늘 당신의 옛집을 찾아, 숙연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섰습니다. 당신의 단지에 담긴 술이 그리운 것도 아니고, 줄 떨어진 당신의 거문고가 그리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과 들에서 자유롭게 스쳐간 당신이 그리울 뿐입니다

 

도연명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장시성 주장시에 남은 무덤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여기서 멀지 않은 여산 서쪽 기슭 구강현에는 그를 기념하는 도연명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기념관에는 도연명의 사당인 도정절사()가 있는데 도연명의 신상이 모셔져 있다. 

장시성 주장시에 조성되어 있는 도연명상

도연명이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도연명이 강희 11년 그의 나이 51세에 지은 「여자엄등소()」라는 글이다.

엄아, 사야, 분아, 일아, 동아 보거라.

천지가 만물에 생명을 부여하여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예로부터 어진 이도 성스러운 이도 이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공자의 제자였던 자하(복상)는 “삶과 죽음은 운명 속에서 벌써 정해진 것이며, 부귀는 하늘이 안배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공자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하께서 이런 생각을 하셨다는 것은 곤궁과 영달은 멋대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명의 길고 짧음도 정해진 수가 있어 달리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느냐?

내 나이 벌써 50이 넘었다. 젊어서부터 궁하고 힘들게 살다보니 집안이 가난하여 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살았단다. 하지만 성격은 강하고 재주는 아둔하여 항상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끝까지 가다간 세속의 환란을 피할 길이 없을 것 같아 억지로 관직을 사퇴하고 세상을 피해 은거하다보니 어려서부터 너희들을 춥고 배고픈 생활로 내몰고 말았구나. 언젠가 유중(, 민중이나 백성)의 현명한 아내가 “담담하게 자신의 지조를 지킨다면 생활이 빈곤하여 헤어진 솜이불을 덮고 산다한들 자식들에게 무슨 부끄러움이 있을 소냐?”라고 한 말에 깊이 감동을 받았단다. 그건 그렇고, 청렴결백하게 명예와 세상을 피한 이중 같은 이웃도 없고, 집안에 어질고 후덕한 래부 같은 아내도 없는데 쓸데없이 자기 혼자 이런 고민을 안고 있으니 이것이 정말 부끄러울 뿐이구나!

도연명

어려서 거문고를 배웠고 책을 읽었다. 조용하게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단다. 책을 읽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너무 기뻐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단다. 잎사귀 무성한 나무와 나무 그늘을 보거나 때맞추어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면 마음이 절로 들떴단다. 그래서 늘 5월이나 6월에 북쪽으로 난 창 아래에 누워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 내가 바로 ‘복희 이전의 태고적 사람이구나’ 했단다. 마음속에 품은 뜻이 차분하고 담담하여 굳이 무엇을 만들거나 구하는 바가 없다면 스스로를 깨끗하고 높게 지킨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 재치와 속임수도 점점 멀어지고 오로지 고인의 경지를 추구하게 되니 이런 유유자적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 줄 아느냐! 병을 얻은 뒤로 몸이 점점 쇠약해졌으나 다행히 친척과 옛 친구들이 버리지 않고 약을 마련하여 나를 도왔단다. 다만 내가 죽은 뒤 어린 너희들이 가난 때문에 늘 생계를 걱정하고 힘들게 일해야 할 테니 언제 그것을 면할 수 있을까 이것이 걱정될 뿐이다. 마음속에 깊이 맺혀 있으니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이 비록 같은 어미에게서 난 형제들은 아니지만 ‘사해의 모든 사람이 형제다’라는 이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포숙 관중은 모은 재물을 나눌 때 터럭만큼도 셈을 따지지 않았고 서로 시기하지 않았다. 귀생과 오거는 정과 의리가 돈독하여 서로 기대고 돕고 살았단다. 그래서 그들은 끝내는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었단다. 친척이 아닌데 이렇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너희들은 모두 한 아버지에게서 난 형제 아니냐! 영천의 한원장()은 동한 시대의 명사로 재상이란 높은 자리에 있었고 80까지 사시다가 세상을 뜨셨는데 형제들이 끝까지 함께 살았다. 북조 사람 치춘()은 진 왕조에서 덕행으로 이름이 높은 분이셨는데 7대가 분가하지 않고 함께 살면서도 누구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시경』에 “높은 산은 사람이 우러러보고 큰길은 가려 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충심으로 그렇게 하려면 너희들은 삼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할 말이 없구나.

도연명 부자를 그린 그림

 

출처 & 참고문헌

[도연명 [陶淵明, táo yuān míng] - 중국의 대표적인 전원시인 (중국인물사전)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

『남사(南史)』 「도연명전(陶淵明傳)」

『송서(宋書)』 「도잠전(陶潛傳)」

『명문가의 자식교육』, 김영수, 아이필드, 2005.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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