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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기념물, 문화재,(국보급,관리국 or ,관할지자체,소속)

에베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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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북동쪽, 네팔과 중국의 티베트 국경에 솟아 있는 높이 8,848m의 봉우리로, 히말라야 산맥의 최고봉이자 세계 최고봉이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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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인도에서 식민정책을 펴나가던 1892년 영국은 지도를 만드느라 히말라야 봉우리에 대한 삼각측량을 했다. 당시 측량국장이었던 앤드류 워는 1846년부터 1855년까지 히말라야 산계의 3각 측량을 계속한 결과로, 그 때까지 측량국에서 피크(봉우리) 15라고 부르던 이 산이 지구 위에서 가장 높다는 것을 확인하고, 전임 측량국장 조지 에베레스트(Everest)의 공적을 기려 이 봉우리의 이름을 마운트 에베레스트라고 명명했다. 


오래전부터 티베트에서는 이 산을 초모랑마(Chomolangma : 대지의 여신이란 뜻)로,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Sagarmata : 세계 어머니 여신)로 불러왔으며, 중국에서는 초모랑마를 음차해 주무랑마(珠穆朗瑪)라고 불렀다. 


인도의 측량국장 앤드루 워가 1846년부터 1855년까지 히말라야 산계의 3각측량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히말라야의 고봉 79개를 커다란 경위의()로 정밀 측정한 결과, 1852년까지 피크 15(인도 측량국 번호)라고만 부르던 이 산이 세계 최고임을 확인하였다. 


현지명이 1865년까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측량국장 워의 제창으로 전임자 에버리스트의 공적을 기려 '마운트 에베레스트'라고 명명하였다. 히말라야의 산이름에 개인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후 몇 가지 명칭이 보고되었는데, 티베트에서 옛부터 '초모룽마(Chomo Lungma:세계의 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특히 스벤 헤딘이 프랑스 예수회가 제작하여 1733년에 공간()한 지도에 이 명칭이 사용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초모룽마로 고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찬성을 얻지 못하였다. 



에베레스트의 산정 부근에는 회색의 석회암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편암(천매암() 등의 변성암이 계속되는데, 이는 고생대 말의 해역()에 퇴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지층이 조산운동으로 밀려 올라갔으며, 아직도 융기운동이 산정의 고도를 높이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산등성이와 절벽은 빙하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빙식작용의 결과이다. 등정로가 되어 있는 쿰부 빙하도 그 중의 하나이며, 빙하는 중력에 의하여 서서히 낮은 대로 이동하면서 침식한다. 기상 조건에 따라 등반 시기는 계절풍(몬순)을 피하여 5월 중순∼6월 초 또는 9월 말∼10월 중순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아시아의 국가들이 잇달아 독립하여 양상이 바뀌었다. 특히 중국은 주무랑마[] 외의 명칭을 인정하지 않으며,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Sagarmatha)'라 부른다. 



에베레스트 최초의 공식높이는 약 8,840m였는데, 이는 1852년 에베레스트에서 백 수십km나 떨어진 벵골평야의 6개 기점에서 측량한 것이다. 이후 밸러드는 약 8,880m, 헌터는 약 8,863m라고 주장하였다. 1954년에는 가라티가 약 8,848m라는 새 수치를 발표하였다. 이 수치는 1975년부터 공식높이로 여겨지고 있다. 1999년 5월 미국탐험대는 GPS 장비를 이용하여 이 산이 8850m라고 밝혔으나 네팔 정부는 공식적인 높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2005년 중국의 정부기관에서 다시 측정한 이 산의 높이가 8844.4m라고 밝히기도 했다. 


"훌륭한 사람은 히말라야처럼 멀리 있어도 빛나고 몹쓸 사람은 밤에 쏜 화살 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라는 법구경이 있다. 그만큼 히말라야를 신성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원래 히말라야라는 말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뜻하는 히마(Hima)와 ‘보금자리’ 또는 ‘집’을 뜻하는 라야(laya)의 합성어로 ‘눈의 집’, 즉 ‘만년설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히말라야는 약 7,000만 년 전(백악기 말)에 남위 20~40°에 있던 인도가 7,000㎞ 이상 북상하면서 로라시아 대륙에 속해 있던 티베트 고원과 부딪혀 생겨났다. 그 범위가 인도 대륙 북쪽에서 티베트 고원 남쪽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큰 산맥이다. 그 중에서 동쪽 부탄의 남차바르와에서 서쪽 파키스탄의 낭가파르바트까지 이어지는 산맥이 가장 정통한 히말라야 산맥이며, 이 지역을 대히말라야(Great Himalaya)라고 부른다. 보다 넓게 생각하면 만년설을 이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모든 고봉군을 히말라야라고 일컬을 수 있다. 아무튼 지구상에 있는 8,000m 이상의 고봉 14개 모두가 히말라야에 있고, 그중 가장 높은산이 에베레스트 산(8,848m)이다. 



히말라야가 워낙 높기 때문에 겨울에는 북쪽의 찬 기류가 이 산맥을 넘지 못하고, 여름에는 남쪽의 남서 무역풍이 북으로 올라가지 못하여 대기의 대순환에 장애가 되고 있다. 대히말라야 남북 간의 너비는 200~400㎞이고, 전체 면적은 594,400㎢ 정도 되며 산맥 중간에 네팔 및 부탄 왕국이 있다. 이들 국가가 차지하고 있는 몇몇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인도 영토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히말라야 산맥은 활처럼 굽은 산호를 형성하고 있다. 남쪽은 급경사를 이루어 힌두스탄 평원과 높은 고도차를 보이는 반면, 북쪽은 티베트고원과 연결되어 남쪽보다 고도차가 적다. 눈 덮인 가파른 봉우리, 깊게 팬 계곡, 곡빙하가 발달되어 있고, 풍부한 난대 식물과 고산 식물이 자라고 있는 히말라야는 오늘날 세계 등산가들의 발길을 가장 많이 끄는 장소이다. 



히말라야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도 예로부터 여러 가지 이름으로 보고되고 있다. 티베트에서는 초모룽마(Chomo Lungma: 세계의 어머니 또는 성스러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고, 네팔에서는 ‘하늘의 여신’이란 뜻을 가진 사가르마타(Sagarmatha)라고 불렀다. 프랑스 예수회의 스벤 헤딘은 ‘초모룽마’라는 명칭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음을 확인하고 1733년에 자신이 발간한 지도에 ‘초모룽마’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이름은 이웃 중국의 동의를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이미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강하게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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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측량국장 앤드루 워는 1846년부터 1855년까지 히말라야의 고봉 79개에 대한 삼각 측량을 실시하였다. 이때 그가 Peak-15(인도 측량국에서 붙인 번호)라고 부르던 산이 세계 최고봉임을 확인하고, 전임자인 영국의 조지 에버리스트(George Everest, 1830~1843년에 인도의 측량국장으로 재임)의 공적을 기려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1852년에 실시된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 측량은 수백 ㎞나 떨어진 벵골 평야의 6개 기점에서 실시되었는데, 1954년에 가라티(Gulatee)가 측량한 8,848m를 현재까지 공식 높이로 삼고 있다.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는 강설량, 인력()의 변화, 빛의 굴절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지금도 정확한 고도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판의 움직임에 의해 지금도 매년 1㎝씩 올라 간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는 공식적으로 8,848m이며 북위 28°, 동경 87°에 위치하고 있다.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 8,848m는 해수면에서부터 잰 높이이다. 그런데 티베트 고원을 기준하면 그 키는 3,600m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에 하와이의 마우나케아 산은 해저 6,000m 바다 밑에서부터 솟아 있어, 비록 해수면에서부터는 4,205m밖에 되지 않지만 해저에서부터의 키는 1만 m가 넘는다. 그러므로 바다 밑에 서 있는 마우나케아 산의 키가 고원 지대에 서 있는 에베레스트 산보다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해발(해수면)이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지 않는다면 에베레스트 산은 최고봉의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지구 중심에서부터 계산하면 에콰도르의 침보라소(Chimborazo, 6,310m) 산이 세계에서 제일 높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지구의 적도 부분이 원심력에 의해 침보라소 산이 더 볼록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중심에서 부터 침보라소 산 정상까지는 6,384.45㎞이고 에베레스트 산은 6,382.25㎞라고 한다.  



해발고도로는 침보라소 산이 에베레스트 산보다 2,538m나 낮지만 오히려 지구 중심에서의 거리는 2.2㎞ 정도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세계최고봉인 에베레스트 하면 우리는 쉽게 이러한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다. 에베레스트 정상의 위치는 정확히 어디일까? 에베레스트는 인도 북부 네팔과 중국 남부 티베트의 국경선에 있는데 왜 영어이름이 붙었을까? 어떤 기준으로 측정했기에 에베레스트가 세계최고봉이 되었을까? 세계최고봉에 처음 오른 사람은 누구일까? 위의 질문에 간단히 답을 하면 이렇다. 에베레스트는 네팔과 티베트 국경선에 있지만 에베레스트 정상의 정확한 위치는 북위 27도 59분 17초, 동경 86도 55분 31초다. 


영어이름이 붙은 것은 19세기 식민지 시대에 이 사실을 처음 발견한 영국인들이 자신들이 편하게 부르려고 원명인 '초모룽마'를 무시하고 에베레스트라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베레스트가 세계최고봉으로 채택된 것은 해수면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만일 지구의 중심부를 기준으로 측정하면 적도 인근인 에쿠아도르의 침보라조(6,310m)가 최고봉이 된다. 



높이가 6384.442미터로 에베레스트보다 2229미터나 높다. 이는 지구의 자전으로 적도 부근이 불룩해져 있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에는 1953년 5월 힐러리와 텐징이 처음 올랐지만, 1924년 6월 정상등정에 나섰다가 실종된 맬러리와 어빈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7년 6월 국제등반대가 당시의 복장과 장비를 재현해 북릉‒북동릉을 따라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는 한때 제15봉우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다 인도를 측량한 군사 공학자 조지 에베레스트 경이 1865년 이 산을 본 이후로 에베레스트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에베레스트를 측량하려고 했지만 네팔 정부는 그 계획을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인도의 전문가들을 모아서 몰래 정보를 수집한 후에야 이 지역의 지도를 정확하게 작성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에서야 서구인들은 에베레스트 등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영국의 산악인 조지 멀로리도 있었다. 그는 산에 왜 올라가느냐는 질문에 "산이 거기에 있어서."라는 대답을 남긴 사람이다. 불행히도 그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에베레스트를 오르다가 목숨을 잃었다. 


에베레스트에서는 날씨와 상황이 순식간에 변화하기 때문에 아무리 노련한 등산가라도 등반하기가 쉽지 않다. 에베레스트는 1953년에 마침내 인간에게 정복되었다. 당시 존 헌트 경이 이끄는 원정대가 티베트 쪽에서 등반을 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뉴질랜드의 양봉업자 에드몬드 힐러리경과 네팔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였다. 그들은 1953년 5월 29일 아침 일찍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해 약 다섯 시간 후 정상에 도착했다. 



힐러리와 텐징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측량한다." 

마지막 산등성이에서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눈 속에서 걸음을 옮기느라 더 이상 다리를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출발할 때의 열정은 이미 사라졌고, 이제는 암울한 투쟁일 뿐이었다. 그 순간 힐러리는 눈앞의 산등성이가 솟아오르는 대신 깎아지른 듯 가파르게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음 도끼를 몇 번 더 휘두르고 났을 때, 마침내 그들은 해냈다. 오전 11시 30분이었다. 


힐러리는 텐징의 얼굴에서-어깨까지 내려오는 털실 모자와 고글, 산소 마스크로 뒤덮여 있었음에도-"순수한 희열에서 우러난 전염적인 웃음"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들은 15분 동안 사진을 찍고, 영국과 네팔 국기, UN기를 꽂았다. 



에베레스트를 티베트에서는 초모룽마,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라 부르며, 둘 다 "세상의 어머니 여신"이라는 뜻이다. 영국에서는 처음에는 피크 XV라고 불렸다가 인도 대륙을 측량한 조지 에버리스트 경의 이름을 따 에베레스트라 부르게 되었다. 정상의 눈 때문에 정밀한 수치는 아니지만 해발고도 8,848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등산가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힐러리 전에도 면밀한 준비를 거친 등반대가 십여차례 시도했다가 등정에 실패한 바 있다. 현대의 산소 장비와 방한복에도 불구하고 힐러리보다 불과 며칠 전 강풍 때문에 포기한 사례가 있었다. 다행히도 뉴질랜드인 힐러리와 셰르파 탄징 노르가이(두 사람 모두 영국 원정대 소속이었다)가 등반할 때에는 날씨가 완벽했다. 


에베레스트 등정 뉴스는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전야제에 영국에 전해졌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엘리자베스 시대"가 왔다며 설레었다. 


최초 여성 의 등반" 다베이 준코는 1975년 초모룽마에 여성으로서 최초로 올랐다. 1981년 시샤팡마 이외에도 몽블랑, 킬리만자로, 아콩카과, 매킨리, 엘브루스, 빈슨 매시프 등을 오르며 결국 일곱 대륙 최고봉을 다 올랐다. 평범한 주부였던 다베이는 여성 등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1975년 5월 16일 초모룽마 정상에 두 사람이 올랐다. 한 사람은 네팔인 셰르파 앙 체링이었고 또 한사람은 놀랍게도 여성이었다. 그녀는 딸 하나를 둔 36세 주부 다베이 준코()였다. 


여성으로서 첫 초모룽마 등정자가 된 다베이의 결혼 전 성은 이시바시(). 1939년 일본 후쿠시마 현에서 2남 5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몸집이 작아 체육 시간을 싫어하던 다베이가 산을 좋아하게 된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이다. 담임 선생을 따라 나스야마 산에 오른 그녀는, 천천히라도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디면 정상에 오를 수 있음을 알고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다베이는 사회인 산악회에 가입했다. 거기서 일본 최고의 클라이머 요코오 고이치와 짝을 이루어 암벽 타기를 익혔으며, 역시 암벽 타기의 명수인 다베이 마사노부를 만나 결혼했다. 



1969년 다베이는 일본산악회의 쟁쟁한 여성 등산가들과 만나 해외 원정을 가기로 했다. 목표는 안나푸르나 Ⅲ봉(7,577m). 1969년 7월 29일 다베이는 히라카와 히로코와 함께 안나푸르나 Ⅲ 정상에 올랐다. 1971년 일본산악회 여성 멤버들은 두 번째 해외 원정지를 초모룽마로 정했다. 


힐러리가 초등한 지 20년이 가깝도록 아홉 팀밖에 오르지 못한 때였다. 네팔 정부로부터 입산 허가 통지가 오자 그들은 세부 준비에 들어갔다. 다베이의 생활은 이 때부터 온통 초모룽마 준비에 바쳐졌다. 두살 반짜리 딸아이마저 '에베레스트 마마상'이라고 부르며 "엄마, 에베레스트 힘들지?"하고 말할 정도였다. 그녀는 밤마다 달리기를 했는데, 처음 4km를 달릴 때는 5~6분만 달려도 몹시 힘들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자 8km로 늘렸고, 11월에 들어서는 하룻밤에 19km씩 달렸다. 


일본 여자 등반대의 베이스 캠프는 1975년 3월 16일 5,300m 지점에 세워졌다. 산소가 평지의 반밖에 안 되는 곳이었다. 그로부터 제1 캠프가 완성되기까지 그들은 14일간 길을 다지고 사다리를 놓는 등 건설 공사에 가까운 노동을 했다. 베이스 캠프와 제1 캠프 사이에서 고소 적응 훈련을 한 뒤 4월 8일 제2 캠프를 세웠다. 


제3 캠프까지 닷새. 제4 캠프(7,600km)까지 전진하는 데는 열흘이 걸렸다. 5월 4일 밤 굉음과 함께 눈사태가 캠프를 덮쳤다. 


"갑자기 꿍 하는 소리가 나더니 엄청난 충격이 내 몸을 덮쳤다. 몸이 무엇엔가 눌려 짜부라지는 듯했다. 얼마쯤 지나 정신이 들자 간신히 오른팔을 움직여 목에 걸고 다니던 나이프를 찾아 텐트를 찢었다." 오전 0시 30분. 눈사태를 모면한 셰르파들이 잽싸게 눈더미를 치우고 텐트를 갈기갈기 찢어 다베이 등 다섯 사람을 구해 냈다. 


다베이는 발목을 다쳤지만 사흘 만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큰 부상자가 없어 등반을 강행하기로 했다. 5월 11일 전대원이 제2 캠프에 모이자 대장은 최종 공격대로 다베이와 와타베 유리코, 셰르파 앙 체링을 지명했다. 



제4 캠프까지 짐을 나르는 사이 셰르파 가운데 6명이 고산병에 걸렸다. 남은 셰르파로는 공격대 3명이 쓸 물자를 운반하기가 벅찼다. 공격대를 2명으로 줄여야 했다. 다베이와 와타베는 서로 양보하다가 다베이가 등정하기로 결정했다. 


5월 14일. 공격대와 지원대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제4 캠프를 출발했다. 오후 늦게 7,986m 지점의 사우스 콜에 닿아 제5 캠프를 세웠다. 5월 15일 일행은 8,500m 지점에 제6 캠프를 세웠다. 지원대는 짐을 내려놓자 모두 제5 캠프로 돌아갔다. 남은 사람은 다베이와 앙 체링, 두 사람은 텐트가 말려 올라갈 듯한 돌풍 속에서 눈을 녹여 홍차를 석 잔씩 마셨다. 


다베이가 소변을 볼 때는 몸을 묶는 자일을 앙 체링이 텐트 안에서 잡아 주었다. 5월 17일. 새벽 3시 50분에 잠이 깼다. 커피를 석 잔씩 마신 두 사람은 5시 50분에 제6 캠프를 나섰다. 텐트를 나설 때 무릎까지 찼던 눈은 갈수록 깊어져 허리까지 찼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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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사람이 온몸으로 부딪치고 발로 밟고 무릎으로 다지며 나아갔다. 그러나 서너 걸음밖에 못가 심장이 터질듯 지쳐 교대하곤 했다. 3시간 반쯤 지난 9시 40분에 남봉에 닿았다. 


꼭대기가 너무 뾰죽해 겨우 두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비스킷 몇 조각과 초콜릿을 먹고 10시 10분에 그곳을 떠났다.



남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정말로 아찔했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등성이로, 오른쪽이 중국 왼쪽이 네팔인데, 아차 실수하면 6,000m쯤 추락할 것 같았다. 내리막이 끝난 곳에 힐러리 침니가 있었다. 그곳을 올라 왼쪽으로 돌아서 다시 7m쯤 오르니 암벽이 끝나고 다시 급경사가 이어졌다. 파란 하늘이 올려다보여서 이제 끝인가 하면 또 땅이 있었다. 얼마나 지쳤는지 다베이는 무릎을 겨우 1cm쯤밖에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달팽이보다 느리게 끌면서 몇 번이나 피켈에 기대 숨을 몰아 쉬었다. 몇 발짝 앞서가던 양 체링이 문득 멈춰섰다. "다베이씨, 정상이에요!" 두사람은 나란히 올라섰다. 피켈을 꽂고 나자 더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악수를 나누고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이었다. 다베이 여사는 1975년 초모룽마에 오른 뒤로 1981년 시샤팡마(8,012m)에도 올라 8,000m봉 두 곳을 오른 첫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또 몽블랑 · 킬리만자로 · 아콩카과 · 매킨리 · 엘브루스 · 빈슨 매시프 등에도 올랐다. 그녀가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하다는 남극 대륙 최고봉 빈슨 매시프(4,897m)에 오른 것은 쉰두 살 때(1991년)이며, 그 다음해에는 뉴기니의 칼스텐츠(4,884m)에 올랐다. 결국 일곱 대륙 최고봉을 다 오른 것이다. 



다베이는 4년 뒤면 환갑을 맞는다. 하지만 지금도 열심히 산에 오르며, 힐러리 · 메스너 등과 함께 산악 환경 보호 운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77년 9월15일 '77 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의 고상돈 대원이 4개월의 대장정 끝에 등정에 처음으로 성공하였다.여성 의 기록" 1991년, 1993년 / 인도 여성 경찰관 산토시 야다브 2회 등정, 1995년 / 영국 주부 앨리슨 하그리브스 셰르파 · 산소통 없이 단독 등정(그녀는 1995년 K2봉에 올랐다가 하산길에 눈사태로 죽었다) 



우리나라의 기록" 

1993년 / 대한산악연맹 여성원정대 지현옥 · 최오순 · 김순주 등정. 진기록" 1953년 에베레스트가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와 세르파 텐징 노르게이(TenzingNorgay)에 의해 초등된 이래 반세기 동안 수많은 진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개인 최다 등정 기록은 네팔의 세르파 아파(Appa, 41세)가 가지고 있다. 그는 2000년 5월 에베레스트 등정 11회를 기록한 후 2년 뒤 또 한번의 등정으로 자신이 세운 기록을 경신하여 12회 등정자가 되었다. 아파의 등정은 놀랍게도 대부분 무산소로 이루어졌다.


최단 시간 등정을 기록한 사람은 네팔의 세르파 바부치리(Babuchiri, 34세)로, 2000년 5월에 무산소로 정상에 올랐다. 16시간 56분 만이었다. 그 밖에도 1988년 9월 프랑스의 마르크 파타르(Marc Batard, 37세)가 단독등반으로 22시간 30분 만에 등정한 적이 있고, 10년 후인 1998년 10월에는 네팔의 세르파 가지가 20시간 24분 만에 정상에 올라 파타르의 기록을 깨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산소 기구를 사용하지 않은 채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문 사람 역시 바부치리이다. 


1999년 5월 6일 오전 10시 55분, 정상에 도착한 그는 정상에 텐트를 치고 21시간을 머무르다가 5월 7일 아침 8시에 하산했다. 바부치리는 2001년 4월에 에베레스트 캠프 2에서 사진 촬영을 하던 중 크레바스로 추락해 사망했다. 

에베레스트 초등 40주년을 맞은 1993년 5월 10일에는 하루 동안 11개국 40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이들 중에는 한국 여성원정대의 지현옥, 최오순, 김순주 대원과 동국대 산악회의 박영석, 안진섭, 김태곤 대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약 10년 후인 2002년 5월 16일, 하루에 54명이 등정하여 당일 최다 인원 등정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5월 15일 밤부터 16일 정오까지 에베레스트 초등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이 산을 올랐다. 1993년에는 27개국의 129명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연중 최다 인원 등정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들 중에는 한국 원정대 6개 팀 52명이 참여해서 6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최고령 등정 기록은 일본의 와타나베 다마에(63세)가 가지고 있다. 그녀는 2002년 5월 16일 오후 1시 등정에 성공해 최고령 여성 등정자가 되었다. 


이 기록은 2000년 5월에 등정에 성공한 폴란드 여성(50세)의 기록을 2년 만에 경신한 것이다. 이날 와타나베는 네팔 쪽의 남동릉 루트로 정상에 올랐다. 그녀는 50세를 넘긴 나이에 히말라야에 입문해서 초오유를 위시해 지금까지 7,000m급 봉우리 2회, 8,000m급 봉우리는 3회나 오른 맹렬 여성이기도 하다. 최고령 남성 등정자는 2001년 5월 등정에 성공한 캐나다의 셔만 불(64세)이다. 


셔만 불 이전에는 1993년 10월 스페인의 라몬 블랑코(Romon Blanco, 60세)와 1999년 5월 그루지야공화국의 레프 사르키소(Lev Sarkisov, 60세 161일)의 기록이 있다. 대를 이어 에베레스트에 정상에 오른 기록도 있다. 


이 산의 첫 번째 등정자인 힐러리의 아들 피터 힐러리(Peter Hillary)가 1990년 5월 10일에 정상에 올라 318번째 등정자가 되었다. 힐러리와 함께 에베레스트 첫 등정자인 세르파 텐징 노르게이의 아들 잠링 노르게이 역시 1996년 5월에 정상에 올랐다. 또한 1963년 5월, 미국인으로는 처음 에베레스트에 오른 배리 비숍(Barry Bishop)의 아들 브렌트 비숍(Brent Bishop) 역시 1994년 5월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상에 올랐다. 


부자가 함께 정상에 오른 기록도 있다. 아버지 장 노엘 로쉐(Jean Noel Roche, 프랑스)와 아들 베르트랜드 로쉐(Bertrand Roche)가 1990년 10월에 등정했는데, 부자 동반 기록으로는 최초이다. 당시 베르트랜드의 나이는 17세 217일로 최연소 등정 기록도 함께 남겼다. 한편 네팔의 아르빈 티밀시나(Arvin Timilsina, 15세)가 정상 100m를 앞두고 남봉(8,749m)에서 포기한 적이 있고, 2000년 봄, 세르파족 출신의 템바지리(14세)도 남봉에서 등정을 포기해 최연소 등정이 무산된 적이 있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손자가 정상에 오른 기록도 있다. 



1924년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는 명언을 남긴 채 의문의 실종을 한 조지 라이 말로리(George Leigh Mallory)의 손자 조지 말로리가 71년 전 할아버지가 올랐던 루트를 따라 정상에 올랐다. 그가 정상에 올라 할아버지가 못 이룬 꿈을 실현시킨 것은 1995년 5월이었다. 텐징 노르게이의 손자 라시왕축 텐징(37세)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그는 2002년 5월 스위스 원정대와 함께 49년 전 할아버지가 올랐던 남동 루트로 정상에 올랐다. 최초의 부부 등정자는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마츠(Gerhard Schmatz)와 부인 한네롤레 슈마츠(Hannelore Schmatz)이다. 


1979년 10월 원정대 대장인 남편이 등정한 다음날 부인이 뒤따라 등정했으나, 하산 도중 예기치 못한 비박을 하다가 동사하고 말았다. 1990년 10월 슬로베니아의 마리아 스트럼펠즈(Marija Stremfelz)와 남편 안드레즈 스트럼펠즈(Andrej Stremfelz)도 함께 정상에 오른다. 남편은 두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이었다. 같은 날 또 한 쌍의 부부가 나란히 정상에 섰다. 


미국의 캐시 깁슨(Cathy Gibson)과 그녀의 러시아인 남편 알렉세이 크라스노쿠스키(Aleksei Krasnokutsky)였다.

2002년 5월 16일에도 미국의 필어실러(51세)와 수전(46세) 부부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으며, 이날 등정으로 이들은 세계 7대륙 최고봉 모두를 오른 세계 최초의 부부가 되었다. 최초의 여성 등정자는 일본의 다베이 준코이다. 1975년 5월 16일 그녀는 세르파 앙체링과 함께 정상에 올라 첫 번째 여성 등정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1975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해’이기도 했다. 그동안 남성들만의 독무대였던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그녀는 세 살짜리 딸과 남편을 둔 35세의 주부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성 첫 등정자는 지현옥(32세), 김순주(23세), 최오순(24세)이며, 이들 중 지현옥은 가셔브룸 I, II와 안나푸르나 등 8,000m급 4개 봉을 등정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에서 최초로 단독등반을 시도한 사람은 영국의 퇴역장교 출신인 모리스 윌슨(Maurice Wilson, 37세)이었다. 그는 1934년 티베트의 입국 허가가 나지 않자 세르파 3명을 고용해 밀입국했다. 노스콜 밑에 텐트를 치고, 세르파들이 영국 원정대가 남기고 간 식량이 저장된 장소를 알려주자 이 식량만 믿고 단독으로 북사면 등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6,400m 지점의 캠프 3에서 사망하고 만다. 윌슨의 시체는 다음해 제5차 영국 원정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단발 경비행기를 타고 오를 수 있는 최고 높이까지 올라 비행기를 산에 부딪혀 떨어지게 한 후 등반하려는 황당무계한 등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영국에서 싣고 온 비행기는 철도 수송 도중 인도 당국에 압수되었다. 이 기상천외한 윌슨의 단독등반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후 완벽한 단독등반이 이루어진다. 1980년 8월 20일 라인홀트 메스너는 산소 기구를 사용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정상에 올랐다. 



1978년에 이어 두 번째로 정상에 오른 기록이었다. 에베레스트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무산소 등정은 1978년 5월 8일 메스너와 페터 하벨러(Peter Habeler)에 의한 것이었다. 이 등정은 인류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루어낸 명기록 중의 하나이다. 8,850m를 모두 오른 매카트니 스네이프는 1990년 2월 인도의 항구도시 콜카타를 출발해서 장장 700km에 이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걸어간 뒤 등반을 시작, 1990년 5월 11일 무산소로 정상에 올랐다. 에베레스트 등정사상 최초로 최장의 등고 기록이었다. 


인류가 에베레스트에서 산소 없이 최초로 도달한 고도는 8,225m이다. 이는 1922년 영국 원정대가 세운 기록이다. 그러나 1924년 제3차 영국 원정대의 노튼(Norton)이 8,572m 높이까지 올라 2년 전의 기록을 경신한다. 

노튼이 세운 이 기록은 54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메스너의 무산소 등정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세인들은 “생명을 경시하는 미치광이”라고 그를 매도했다. 당시 메스너는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사전에 무산소 환경에 몸을 던져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다. 1977년 봄에 기내에 기압 조절 장치가 없는 경비행기를 타고 산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에베레스트 상공에서 고도 9,000m까지 오르는 시험 비행을 거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최초의 시각장애인은 미국인 에릭 웨이헨메이어(32세)이다. 그는 2001년 5월 25일 오전 10시에 동료 4명과 함께 정상에 오른 뒤 10분 동안 머물며 등정의 기쁨을 누렸다. 



스웨덴의 골란클롭도 스톡홀름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해 유럽 대륙을 횡단, 터키-이란-파키스탄-인도를 거쳐 이듬해인 1996년 2월에 네팔의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장장 12,500km를 달려온 그는 2주에 걸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혼자서 장비와 식량을 옮긴 뒤에 등반을 시작했다. 그리고 5월 말, 무산소로 정상에 올랐다. 그는 등반을 마치고 다시 자전거를 이용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 9월 말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의 등정 기록은 네팔 당국이 허가해 준 루트를 벗어났다고 해서 네팔 정부가 공식 기록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최초로 스키 활강으로 하산한 사람은 슬로베니아의 다보 카르니차르(Davo Karnicar)이다. 그는 2000년 10월 6일 정상에 오른 후 베이스캠프까지 5시간에 걸쳐 스키 활강을 성공시켰다. 그는 특수하게 만든 스키를 신고, 헬멧에 카메라를 장착해서 스키 활강 전 과정을 녹화해 기록을 남겼다. 에베레스트 최장의 등고 기록을 세운 사람은 호주의 매카트니 스네이프(Macartney Snape, 34세)이다. 에베레스트의 해발고도는 8,850m(현재 공인된 높이)로 이는 해수면에서부터 측량한 고도지만, 산을 오를 때는 이 고도 모두를 등반하지 않는다. 


베이스캠프가 되는 5,400m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실제 등고() 거리는 이에 못 미치고 있다. 

8,850m를 모두 오르기 위해서는 해수면(0m)의 높이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에베레스트는 원래 다른 이름이 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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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의 남쪽인 네팔에서는 산스크리트어로 '하늘의 여신' 또는 '세계의 정상'이라는 뜻의 '사가르마타(Sagarmatha)'라 부르고, 북쪽인 티베트에서는 '이 세상의 여신이자 어머니(Goddess Mother of the LandMother Goddess of theWorld)' '눈의 여신이자 어머니(Mother Goddess of the Snows)' '바람의 여신'이라는 뜻의 '초모룽마(Chmolungma)' '쿠오모랑마‒펭(Qomolungma-Feng)'이라고 부른다. 한편에서는 이를 오역된 것이라고 한다. 


초등정자인 셰르파 텐징의 증언에 따르면 텐징의 모친은 초모룽마를 '어떤 새도 넘을 수 없을 만큼 높디높은 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티베트 철자로 해석하면 '암컷 새들의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다른 설로 단순히 '계곡 위의 봉우리'를 뜻한다고도 한다. 


초모는 봉우리를, 룽은 넓은 계곡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세계의 산들 Sacred mountain of the world』(Edwin Bernbaum)에서는 조모랑마(Jomolangma), 즉 '랑마의 여인'으로 번역해야 옳다고 한다. 조모는 여인(lady)을 뜻하고 랑마는 여신 미욜랑상마(Miyolangsangma)를 줄인 것이기 때문이다. 


티베트불교에서 랑마는 산에 거주하는 여신이라는 뜻이다. 티베트 경전()인 십만보훈()에 의하면 7~8세기경, 즉 중국 당()나라 시절에 티베트 왕의 명령으로 초모룽마 지역에 백조()를 기르는 장소를 두었다. 그 이후 그 지역은 차랑마(새를 기르는 땅), 혹은 '로차랑마'(남쪽의 새를 기르는 땅)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곳 원주민들은 초모룽마를 '암컷 새'라고 한다. 



라마교에서 달마다 10일 또는 15일에 제사를 지내는 여러 신 가운데는 초모룽마의 다섯 여신이 있다. 다섯 여신의 이름은 불교경전에 나와 있는데, 원래는 다섯 자매의 이름이었다. 맏언니는 초모조렝마, 둘째는 초모칭체사상마, 셋째는 초모랑상마, 넷째는 초모차오방추상마, 막내는 초모도카리조상마라 부른다. 초모룽마란 초모랑상마의 약칭이다. 


티베트어로 '초모'는 여신이라는 뜻이고 랑상마, 조렝마, 칭체사상마, 차오방추상마, 도카리조상마는 모두 여신의 이름이다. 


초모룽마란 '성모()의 물'이라는 뜻도 된다. 


현재 중국에서는 초모룽마라는 이름을 음차해서 주무랑마()라고 표기한다. 



중국 청나라 2대 황제 강희제(, 재위 1661~1722)는 프랑스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지도편찬을 명했다. 1708년부터 측량하기 시작해 청나라 전역에 걸쳐 장기간 측량한 끝에 1717년에 '황여전람도(輿)'가 완성되었다. 이때 이번원() 주사인 승주()와 두 명의 라마승려 스루칭상부와 랑벵창바 등 세 사람을 티베트로 파견해 1714년(혹은 1715년)부터 1717년까지 측량을 실시했다. 이때 제작된 티베트지도는 가장 오래된 지도로 1718년에 완성되었다. 


1719년에 만주어 동판이, 1721년에 중국어 목판이 인쇄·출판되었다. 이 지도에 초모룽마라는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황여전람도를 바탕으로 프랑스 예수회의 장 바티스트 부르귀뇽 당빌은 프랑스어로 '중국·타타르·티베트의 새 지도'를 1733년 프랑스어판으로 펴냈다. 이 지도에도 역시 초모룽마라는 명칭이 기재되어 있다. 이 사실을 밝혀낸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Sven Anders Hedin, 1865~1952)은 에베레스트라는 명칭을 초모룽마로 고치자고 주장했지만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 당국은 '에베레스트'라는 명칭 사용을 불허하고 '초모룽마' 사용을 조건으로 입산허가를 내주고 있지만 원이름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티베트의 정교인 라마교에서는 초모룽마의 수호여신을 '체링마(Tseringma)'라고 하며,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서 북서쪽으로 7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출푸 사원에 체링마 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라마교의 설화에 의하면 에베레스트는 음식을 지닌 여신과 보석을 내뱉는 몽구스(고양잇과 동물)가 사는 곳이다. 


셰르파족은 에베레스트를 미욜라상마 여신이 사는 곳으로 믿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에베레스트 초등자 텐징 노르가이의 아들인 잠링 텐징의 카트만두 집에는 미욜라상마 여신이 호랑이 등 위에 탄 채로 에베레스트 앞을 지나가고 에베레스트 정상 위에 여신이 가부좌 자세로 앉아있는 탱화가 걸려 있다. 



네팔에서 칭하는 사가르마타는 1960년대 네팔정부에서 원이름을 찾다가 역사학자 바부람 아차리아(Baburam Acharya)가 제안한 이름을 채택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영어권에서는 에베레스트(Everest)를 줄여서 '빅이(The Big E)'라고도 칭하고 '장엄한 산(TheMajesty of the Mountain)'이라는 부제를 붙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중국한자 표기인 주무랑마를 차용해서 주무랑마봉으로 표기하고 있다. 에베레스트의 변화,(현재진행형: 변하고있다) 

1. 지구 표면은 여러 개의 판으로 나뉘어 있어요. 

2.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의 충돌로 히말라야 산맥이 생겼어요. 

3. 인도한은 계속 움직이고 있어요.  

지구의 모습은 수십억 년 동안 판이 느리게 이동하고 서로 부딪쳐 솟거나 갈라져서 만들어 젔읍니다. 


총 길이 2400km를 굽이치는 히말라야 산맥에는 에베레스트 산을 포함해 8000m가 넘는 높은 산 대부분이 있어요. 


히말라야 산맥은 유라시아 판과 인도 판이 이동하다 충돌해서, 인도 판이 유라시아 판 밑으로 파고들었고, 이때 지각이 밀려 올라가 높고 험한 히말라야 산맥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유라시아 판과 인도 판의 충돌로 인해 중국남부와 인도차이나반도가 남북으로 틀어져 높고 좁은 산맥과 깊은 골짜기,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원인 티베트고원이 생겨났어요. 


이렇게 거대한 지각충돌 이후에도 판의 충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답니다. 그래서 히말라야 산맥도 계속 융기하여 2008년 기준 공식 높이가 8850m인 에베레스트도 해마다 약 5cm씩 높아지고 있다고 하네요. 



히말라야 등의 산맥으로 둘러싸인 티베트고원 또한 히말라야산맥과 마찬가지로 계속 융기하고 있답니다. 초기등반" 에베레스트 초기등반시대의 중앙아시아는 서구열강(영국, 러시아) 세력과 동양(중국)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식민지시대 말기의 무대였다. 


에베레스트가 있는 티베트는 종교국가였지만 청나라(중국)의 변방 속국이었다. 러시아는 차르(Czar, 제정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Ⅱ세(재위 1894~1917)의 남진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에서도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티베트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관심은 식민지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을 반발하게 만들었다. 결국 1903년에 영국군은 티베트를 침공하고 이듬해(1904) '라사조약'을 맺고 철수했다. 



1912년에 청나라가 망하자 티베트는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1950년에 중국공산군이 침공할 때까지 영국과 선린관계를 지속했다. 이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청나라에게서 인도를 방어하기 위해 티베트를 완충지대로 이용했다. 


인도는 1858년부터 영국국왕(빅토리아 여왕)의 직접 통치로 총독이 부임하고 내각에서는 인도식민지장관을 임명했다. 1898년 인도총독으로 부임한 커즌(Curzon) 경()은 에베레스트 등반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왕립지리학회와 영국산악회는 회원 다수가 복수가입해 있었다. 따라서 왕립지리학회 회장과 산악회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당시 양 단체의 회장은 아마추어 지리학자이자 변호사인 프레쉬필드(William Douglas Freshfield)였다. 그가 인도 방문 시 총독을 만났을 때 에베레스트 등반이 화제에 올랐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무렵에 러시아와 티베트, 그리고 청나라 사이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등반계획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1905년 티베트 문제가 안정되자 총독은 프레쉬필드 왕립지리학회 회장에게 에베레스트 등반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영국산악회는 총독의 제안을 받아들여 영국산악회 창립 50주년(1907) 기념 원정대를 파견하기로 했으나 그 사이에 정치 상황이 돌변했다. 커즌 총독이 사임하고 후임 총독으로 1905년에 민토(Minto) 경이 부임했다. 민토 경은 영국산악회 회원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을 지지했다. 그러나 내각의 인도식민지 국무장관 몰리(John Morley)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는 티베트 영토 진입을 반대했다. 


에베레스트원정이 영·러 조약(1907년에 체결된 조약으로 영국과 러시아는 오직 청나라를 통해서만 티베트와 상대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다)을 위반하는 '침입'이라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에베레스트 등반은 또다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했다. 전후 유럽에서는 러시아가 볼셰비키혁명을 겪고 있었고, 중국은 청나라가 망하고 민족주의혁명 중이었다. 이 시기 인도식민지 정부와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사이는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남·북극이 정복되었으며 1913년 여름에 인도의 캘커타(현재 이름 콜카타) 주둔 영국 육군 장교 노엘(John Noel) 중위가 휴가를 이용해 티베트로 밀입국해 에베레스트 북쪽 70킬로미터 지점까지 접근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1919년 3월, 런던에서 왕립지리학회 정기집회에서 노엘의 티베트 비밀여행 강연회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영국산악회 회장 패러(John Percy Farrar)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선언한다. 이로써 앵글로색슨(스콧)이 바이킹(아문센)에게 참패한 남극의 비극을 설욕할 새로운 목표가 등장했다. 에베레스트 입산허가를 위해 1920년 6월, 영국산악회 회원은 아니었으나 카라코람 지역을 여행하고 1905년에 티베트를 몰래 여행한 경험이 있는 하워드-베리(Charles Howard-Bury) 육군중령이 인도로 파견되었다. 그는 6개월 동안 체류하며 티베트 정부에게서 상당량의 군사 장비를 기증하는 대가로 에베레스트 입산허가를 받았다. 


이에 고무되어 1921년 1월에 왕립지리학회와 영국산악회는 에베레스트위원회(Everest Committee)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1921년에 답사를 하고 1922년에 등정을 한다는 단순한 계획을 세웠다. 비용은 1만 파운드로 예상했다. 원정비용은 산악회와 지리학회 회원은 물론 국왕 조지 5세와 왕자, 인도총독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서 기부금을 받아 충당했다. 


당시(1920년대) 서구사회는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용광로처럼 들끓는 분위기였다. 

야구의 베이브 루스, 재즈의 루이 암스트롱,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 디자이너 코코 샤넬, 무용가 이사도라덩컨, 음악가 조지 거쉰, 극작가 유진 오닐, 영화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루돌프 발렌티노 등이 활약하는 대중과 호흡하고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영웅과 사건이 필요한 시대였다. 


이런 분위기가 세계최고봉 등반을 가능하게 했다. 답사대, 즉 정찰대의 대장은 입산허가를 받아온 하워드‒베리가 맡았다. 그는 등산가는 아니었지만 조직을 이끄는 능력은 뛰어났다. 당시 히말라야 등반은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전혀 새로운 발견의 여정이었다. 당시 그 여정의 주인공은 영국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영국뿐이었다. 

입산 허가를 위해 다른 국가들(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이 티베트 정부에 접근하는 것을 영국이 막지 않았다면, 



1953년 훨씬 이전에 에베레스트 등정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등산 역사가들에게는 정설로 통한다. 1909년에 K2(8,611m)를 등반한 이탈리아의 귀족 아브루치 공()은 원래 에베레스트 등반을 원했으나 인도식민지 정부의 권유 때문에 K2로 대상지를 바꿔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영국 등산가들은 알프스 등산 황금기(1845~1865)의 첫 10년을 군림했지만, 그 후 기술면에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의 등산가들에게 점점 뒤쳐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심지어 1920년대의 영국 등산가들조차 동시대에 뒤떨어졌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데 기술적인 어려움은 많지 않았다. 에베레스트 등반은 기술보다는 결단력과 끈기가 필요한 등반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등산가들이 에베레스트 등반을 시도하는데 기술의 문제는 없었다.

1921년 원정(정찰)대는 하워드‒베리 대장 외 8명으로 등반대와 측량대로 구성되었다. 



원정대는 5월 18일에 인도 북부 다르질링을 출발했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티베트를 가로질러 지도에는 없는 땅, 즉 지도의 공백부로 들어섰다. 측량대는 지도 제작 작업으로 바빴다. 


등반대는 팅그리종(Tingri Dzong)을 거처 남쪽으로 90킬로미터 떨어진 에베레스트로 접근해갔다. 6월 25일 마침내 맬러리(George Mallory)와 블록(Guy Bullock)은 롱북 빙하에 도달했다. 6월 말부터 9월 하순까지 탐사가 계속 되었다. 


맬러리는 노스콜(일명 창라, 7,010m)에 올라 등반 가능성을 발견했다. 만약 이때 남측에서 등반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네팔 측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귀국한 원정대의 보고에 고무된 위원회는 이듬해 원정을 준비했다. 자금은 풍부했다. 런던 시민들도 에베레스트 등반에 호응했다. 그러나 실제 원정에서는 750파운드가 적자났다. 


준비과정에서 산소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학계에서는 '산소장비 없이는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설사 올라간다 하더라도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산소장비를 준비했다. 당시 채택한 산소장비는 옥스퍼드대학의 드레이어(G. Dreyer)교수가 공군을 위해 개발한 것이었다. 


대원들 중 절반이 출발 전에는 산소장비 사용에 반대했으나 산에서 산소의 위력을 체험한 후 산소장비 옹호자로 바뀌었다. 



1922년 3월 26일 원정대(브루스 대장 외 12명)는 다르질링을 출발했다. 에베레스트까지 직선거리로 약 160킬로미터에 불과했지만 시킴을 통과해 티베트고원을 올라가는 우회로를 택해 480여 킬로미터를 한 달 남짓 걸어갔다. 4월 30일에 롱북 빙하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등반대장이 된 맬러리는 노스콜(제4캠프)에서 900미터 높은 북릉 8000미터 지점에 캠프(제5캠프) 하나를 더 설치하고 정상에 오르려고 했다. 5월 20일 맬러리, 소머블, 노턴, 모스헤드는 북릉 7600미터 지점에 제5캠프를 설치하고 8225미터까지 등반했다. 


이 등반은 인류가 에베레스트에서 등반한 최초기록이 되었다. 당시에는 고산에서 인체의 생리나 한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다. 등산가들은 자신들이 이 산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한 번 시도해 보고 난 뒤부터 산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차 등반대인 핀치, 부르스, 테지비르는 5월 25일에 북릉 7800미터 지점에 제5캠프를 설치하고 이틀을 지내면서 산소의 효과를 체험했다. 그러나 6월 7일 마지막 등반시도 중 노스콜에서 발생한 눈사태로 셰르파 7명이 사망해 등반이 끝났다. 


귀국한 원정대의 보고에 따라 에베레스트위원회는 셰르파들에게 사고가 났지만 고도등반 신기록, 고산에서 인체의 생리와 산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다시 등정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듬해(1923)에 다시 등반을 하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고, 

1924년 등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24년의 등반은 에베레스트에서 시도한 본격적인 등반이었다. 

1922년의 경험을 통해 어떻게 해야 이 거대한 산을 오를 수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마지막 캠프에서 좋은 날을 기해 정상을 왕복한다는 포위전술(히말라야 시지택틱스)이 채택되었다. 산소장비도 개량되었다. 



1924년 3월 25일, 브루스 대장 외 11명의 원정대는 다르질링에서 티베트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북쪽으로 히말라야산맥을 통과하는 일반적인 길을 택했다. 세르포 라(Sarpo-La)를 통과해 캄파종(Kampa Dzong)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서쪽의 팅그리종(Tingri Dzong)으로 나아갔다. 


다르질링 출발 직후 브루스 대장이 병세가 악화되어 등반대장이었던 노턴이 대장 직무를 대행했다. 따라서 등반대장은 맬러리가 맡았다. 그들은 4월 28일 롱북에 도착해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5월 23일 노스콜에 진출했다. 첫 시도로 6월 3일에 노튼, 소머블은 무산소로 북릉의 제6캠프(8,168m)에서 출발해서 옐로우밴드를 넘어 북서벽을 가로질러 그레이트(노턴) 쿨르와르 8580미터 지점에 도달했다. 


이 기록은 1952년까지 최고 도달 기록으로 유지되었다. 6월 8일 아침에 산소통을 휴대한 맬러리와 어빈(Andrew Irvine)이 북릉 제6캠프에서 출발해 북동릉을 따라 정상으로 향한 뒤 행방불명되었다. 이들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오델(Noel Odell)은 12시경 제2스텝 부근을 오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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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된 맬러리는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간다(Because it is there)"는 명언을 남기고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영웅이자 전설이 되어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등정에 성공하려는 맬러리의 과욕 때문에 1922년 눈사태로 7명의 셰르파가 사망했고, 그의 보급판단 실수로 1924년에는 구르카 병사 2명이 동상으로 사망했다. 


결국맬러리는 자신과 어빈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대가로 자신은 행방불명되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어떠한 장애도 노력해서 극복한다는 의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함께 등반한 동료들은 맬러리가 체력은 좋았지만 판단력이 떨어지고 건망증이 심해 책임자로서는 부적격했다고 평했다. 


1924년의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위원회의 재정을 흑자로 돌려놓았다. 이로써 그동안의 적자를 만회했다. 그러나 1924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후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입산을 불허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기록영화판권을 산 노엘이 티베트 승려 5명을 영국으로 데려가 영화상영 전에 종교적인 행사인 전통춤을 추게 한 것이 달라이 라마에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티베트정부는 영국 외무성에 공식적으로 항의했고 이후 9년 동안 입산허가를 받지 못했다.  



1929년 10월 24일에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뉴욕주식거래소의 증시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영국도 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930년대는 대공황과 함께 전체주의가 득세한 세계적인 혼란기였다. 


1931년 국제 간 결제수단으로 통용되던 영국 파운드화가 파운드화 사용권 내로 제한되었다. 서구사회를 휩쓴 대공황은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했다. 유럽대륙의 실업자들은 도피처로 알프스를 찾았다. 


결국 알프스의 마지막 과제라고 하던 북벽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들은 죽기 살기로 산에 올랐다. 이 시대에 마터호른, 아이거, 그랑조라스를 비롯한 알프스 6대 북벽 중 드류만 빼고 모두 전체주의 국가인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등산가들에 의해 초등반되었다. 또한 전체주의 국가들은 이를 정치에 잘 이용했다. 


대공황 속에서 알프스에서는 치열한 북벽등반이 벌어지고,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 K2, 칸첸중가에서는 독일과 미국 등산가들이 극적인 등반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에베레스트에서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오히려 퇴보하는 조짐까지 보였다. 1930년대 에베레스트위원회는 대원선발에 관여해 등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33년 원정대(러틀리지 대장 외 13명)에 참가한 브로클뱅크는 런던 클럽에서 한 노정객과 대화를 나눈 후 대원에 선발되었는데 그는 등산가라기보다는 조정선수로 유명했다. 사회상류층 인사들이 등반대원으로 선발되어 결정적인 순간에 치명적인 실수도 했다. 


군장교인 버니 대위와 보스태드 소령은 날씨가 좋은데도 개인적인 판단(감정)으로 셰르파들에게 제5캠프(7,830m)까지 300미터 하산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가 원정대의 전진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하산 후에 해리스는 "빌어먹을 군인들!"이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후 사흘 동안 기후조건은 완벽했다. 


더글러스(Ed Douglas)는 『텐징 노르가이 Tenzing Norgay』에서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기회를 스스로 날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해의 등반은 5월 30일 북동릉 상 18미터 아래, 제1스텝에서 225미터 떨어진 곳(8,460m)에서 웨이저와 윈 해리스가 어빈의 피켈(빙설로 뒤덮인 경사진 곳을 오를 때에 사용하는 기구)을 발견했고, 제2스텝 바로 아래 지점에 도달해 등반이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6월 1일 십턴과 스마이스가 제6캠프(8,350m)에서 출발해 등반에 나섰으나 도중에 십튼이 위경련을 일으켜 제1스텝 부근에서 등반을 포기했다. 스마이스는 홀로 그레이트쿨르와르까지 진출했다가 되돌아온다. 이때 그는 높은 고도 때문에 발생한 환각 증세에 시달려야 했다. 1933년 원정부터 무전기를 사용했으며(무전사 2명 참가) 다르질링으로부터 기상예보를 통보받았다. 



1936년 원정 시에는 각 캠프마다 무전기를 설치했다. 1935년에는 달라이 라마에게서 입산허가가 늦게나와 등정보다는 정찰로 목적이 변했다. 원정대는 십턴(Eric Shipton)을 대장으로 7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원정대에는 후일 에베레스트 초등정자가 되는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당시 19세의 나이로 처음 선발되었다. 


몬순의 눈 상태 연구와 주변의 6000미터 봉우리 26개를 오르고 노스콜에 도달한 것으로 등반활동을 끝냈다. 이때 유일하게 원정기가 발행되지 않았다. 


1936년 영국은 북서벽에서 시도하는 전무후무한 대규모 원정대를 에베레스트에 파견했다. 원정대는 러트리지(Hugh Ruttledge)를 대장으로 10명으로 구성했으며 셰르파 23명을 동원했다. 비용도 1만 파운드에 달했으나 몬순이 일찍 시작되어 노스콜까지 등반하고 등정에는 실패했다. 그 때문에 서민들이 굶주리는 판국에 에베레스트 등산처럼 비생산적인 데에 돈을 낭비한다는 도덕적 회의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일부 등산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에베레스트위원회도 파산위기에 몰렸다. 결국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1936년 원정대원 선발에 1953년 초등정 시 대장이 되는 헌트(Jhon Hunt)가 지원했으나 경미한 심장 경련이 있다는 이유로 신체검사에서 탈락되었다. 


1938년의 원정비용은 1936년 원정 비용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원정대는 틸먼(HaroldTilman)을 대장으로 7명으로 구성했다. 이는 틸먼이 평소 추구한 소규모 원정대를 지향하는 그의 신조에 맞는 등반이었다. 그러나 이 등반 역시 조기(5월 초)에 시작된 몬순으로 6월 초 노스콜에 진출했으나 많은 눈 때문에 더 전진하기 곤란했다. 



세계 1, 2차 대전을 전후해 영국은 일곱 차례에 걸쳐 에베레스트에 원정대를 보냈다. 1920년대에 세 차례, 1930년대에 네 차례 원정했다. 그 중 두 번은 답사를 위한 원정이었으며, 나머지 다섯 번 중 세 번은 일찍 도착한 몬순 때문에 무산된 원정이었다. 


등산가들은 무거운 장비를 휴대하고 열악한 기후에서 보온 기능이 떨어지는 의복을 입었다. 비록 장비의 효능은 떨어졌지만 1953년의 장비보다 훨씬 가벼웠다. 높은 고도에서 생리적인 측면에 관한 정보도 아주 빈약했다.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옥스브릿지(Oxbridge,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대학)나 군 출신으로 대원을 선발했으며 대원들은 짐을 운반하지 않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영국등산가들이 정상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에베레스트는 신비한 산이 되었다. 대신 등산가들이 극한 상황에서 벌이는 사투는 널리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폴란드가 해마다 등반을 시도하기로 내정되어 있다. 최초로 남쪽에서 의 등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50년대 세계는 냉전시대 였다. 


1950년 2월에 소련과 중국은 중·소 동맹을 결성해 공산주의 연합전선을 선언했다. 동유럽이 공산화되고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 진영과 날카로운 긴장 상태로 대치했다. 냉전 상황은 필연적으로 군비경쟁을 불렀고 핵 시대가 도래했다. 히말라야에서는 1930년대 알프스에서 발전한 등반기술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봉들을 정복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정치적 격변(동·서 냉전시대의 시작)으로 에베레스트 원정의 관례가 바뀌었다.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는 1950년, 중국 공산군에 점령당해 '죽의 장막(bamboo curtain, 중국과 자유진영의 국가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중국의 명산물인 대나무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에 둘러싸여 30여 년 동안 에베레스트 북쪽으로는 얼씬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남쪽의 네팔이 문호를 개방했다. 네팔은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인도의 지배를 받다가 1769년 구르카 왕조가 전국을 통일했다. 네팔은 1814년 영국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해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846년 코트 대학살로 권력을 잡은 융 바하두르(Jung Bahadur)가 라나(Rana) 직위를 차지하고 자신을 마하라자(Maharaja, 힌두교의 제왕으로 왕 중 왕이란 뜻)로 선언해 네팔 왕은 단지 명목상의 대표자로 격하되었다. 


그 후 100여 년 동안 네팔은 라나 일족의 통치시대였다. 1846년 이래 네팔을 지배하던 라나 가문은 안전보장을 위해 영국과 타협하게 되었다. 1860년 네팔은 구르카 용병의 식민지 인도군대 편입과 외교권의 이양을 수용하는 대신 국내외에서 라나 체제 보호와 내정 불간섭을 영국에게 보장받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1947년 인도가 독립하자 반()라나 운동이 일어나고 1951년 인도의 지원으로 트리부반 왕의 왕정복고로 이어졌다. 


이러한 네팔정치의 변화와 혼돈 속에 소수의 서방 탐험가와 과학자들에게만 네팔 입국이 허용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스위스산악연구재단(SwissFoundation for Alpine Research, 1939년 설립)은 1949년부터 네팔정부에 에베레스트 입산 허가를 신청했다. 


왕정복고로 수립된 새 정부는 영국과는 관계가 없었다. 스위스의 입산신청은 곧 허가되었다. 당시 에베레스트 등반은 1953년 영국, 1954년 프랑스, 1955년 스위스 순으로 입산순서가 정해졌다. 다른 변화로 제2차 세계대전을 분기점으로 등산가의 신분이 변했다. 이전에는 상류층만이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할 수 있었으나 이후부터 노동자 계급도 원정대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스위스원정대의 레이몽 랑베르와 정식대원으로 합류한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영국원정대에 참가한 에드먼드 힐러리가 그 대표적인 예다. 1950년 10월, 휴스톤(Charles Houston)을 비롯한 4명의 미국인이 두드코시 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 남체바자르에서 영국의 틸먼을 만났다. 휴스톤과 틸먼은 셰르파 3명과 함께 서양인 최초로 쿰부 빙하에 접근, 푸모리(7,161m) 능선에 올라 쿰부 아이스폴과 웨스턴 쿰을 정찰했다. 그러나 1921년에 맬러리가 로라(일명 쿰부라 Khumbu-La, 6,026m)에 올라 웨스턴 쿰을 내려다보고 등반불가능이라고 판단한 것처럼 그들 역시 비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정찰의 기원은 젊은 의사 워드(Mike Ward)가 히말라야위원회에 제안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50년 10월, 쿰부 빙하에 다녀온 위원인 틸먼은 아이스폴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파견을 반대했다. 하지만 워드의 치밀한 계획서와 설득에 위원회는 반신반의하며 지원을 결정했다. 대신 히말라야탐험대가 십턴을 참가시키는 조건이 붙었다. 




1951년 가을, 영국의 히말라야위원회(Himalaya Committee, 제2차 대전 후 에베레스트위원회가 개명)는 소규모정찰대(에릭 십턴 대장)를 쿰부 빙하로 파견했다. 정찰대는 8월 하순 인도와 네팔 국경의 조그바니를 출발해 9월 29일, 쿰부 빙하 끝에 도달했다. 


다음날 9월 30일에 보딜런과 리디포드, 워드는 쿰부 아이스폴을 등반했다. 동시에 십턴과 힐러리는 웨스턴 쿰이 잘 보이는 푸모리에 있는 한 능선의 6100미터 지점까지 올라 웨스턴 쿰을 정찰했다. 이때 십턴과 힐러리는 등반가능성을 발견했다. 웨스턴 쿰 위쪽 로체페이스의 긴 사면을 올라 사우스콜로 횡단한 후 남동릉을 따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등반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웨스턴 쿰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아이스폴이라는 두려운 장애물을 통과해야 했다. 


10월 말까지 이들은 세 차례에 걸쳐 아이스폴을 등반한 끝에 웨스턴 쿰 초입까지 진출했다. 이로써 아이스폴을 돌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1952)의 입산허가는 스위스산악연구재단이 받았다. 뒤늦게 이를 안 영국의 히말라야위원회는 스위스산악연구재단과 합동원정대 조직을 제안했다. 


1951년 12월 말, 스위스 취리히에서 양측 관계자들이 만나 협의했으나 내셔널리즘 때문에 결렬되고 말았다. 고산병" 높은 산을 등반하고 정복하고자 하는 것은 먼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꿈꾸고 도전하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언젠가는 세계적인 명산에 등반하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고산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고산병은 기본적으로 외부 산소농도가 떨어지는 것에 대한 증상입니다.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고도를 몇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해발 2,400m에서 3,000m 정도까지는 중등 고도로서, 몸에서의 산소운반능력이 많이 떨어지지는 않지만, 운동능력이 조금씩 떨어집니다. 너무 급하게 올라가는 경우에는 해발 2,500m 정도의 높이에서도 급성 고산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해발 3,000m에서 5,500m 정도까지는 상위 고도라고 하는데, 동맥의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면서 저산소증이 나타나게 됩니다. 해발 5,500m 이상의 고도를 초상위 고도라 하며, 심한 저산소증과 저탄산증이 생기고, 운동능력도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이 거주할 수는 없는 고도입니다. 급성 고산병은 몸살에 걸리거나 술에 취한 것처럼 어지럽고, 머리가 아픈 증상이나 식욕이 없는 등의 비특이적인 증상을 보입니다. 


얼굴이나 손발이 붓기도 하고, 피로감이 심하며, 잠을 잘 자지 못하고, 때로는 신경질적이 되기도 합니다. 심해지면 고소 폐부종이나 고소 뇌부종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증상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일단 고산병의 증상이 나타났다면 그 증상이 심하지 않더라도 더 이상 높이 올라가면 안 됩니다. 




인체는 어느 정도의 저산소 환경에 순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 일이나 수 주에 걸쳐서 같은 정도의 저산소 환경에 있는 경우에는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적응기간을 가지면서 치료를 하는 데도 증상이 지속되거나 악화되는 경우나 의식변화, 폐부종 등의 소견이 있으면 즉시 하강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산소를 투여하거나 약제를 사용하여 증상을 감소시키고 순응을 도와주거나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약을 복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증상이 악화되는 경우에는 더 이상의 등반은 위험합니다. 


저산소증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고도를 높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3,000m 이상으로는 빠르게 올라가지 말고, 1,500~2,000m 정도에서 쉬고, 3,000m 이상에서는 1,000m를 올라갈 때마다 적어도 이틀 밤을 보내는 것을 추천합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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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있는 한라산(해발 1,947m)이나 지리산(해발 1,915m)은 고산병이 흔하게 생기는 높이는 아니지만, 등산을 하는 개인의 건강상태에 따라서는 조금 낮은 고도에서도 고산병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백두산은 해발 2,750m라고 하니, 통일이 되어 등반을 하게 된다면, 고산병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볼거리,

https://happyday6200.blogspot.com            

https://happyday2162.blogspot.com                                     

https://happyday2100.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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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happyday2162/221511275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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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RlLFVcDdBs?t=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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