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라비, Hammur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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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792년에 함무라비가 선왕 신물발리트(Sinmuballit)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았을 당시 바빌론은 주로 농업에 의존하던 여러 도시국가들과 공존하고 있었으나, 여러 다른 문명들 보다 우월했으며, 국민들이 높은 문자해독률 보유하고 있었다. 함무라비의 선왕들은 중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군소 도시국가들을 바빌론 치하로 통합하고자 했다.
함무라비 치세 초기에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샴시 아다드 Ⅰ의 사망으로 샴시 아다드 제국이 분열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바빌론에게는 국력 강화의 기회가 되었다. 함무라비는 공공 사업을 벌여 성채를 높이고 성벽을 강화했으며, 사원의 규모를 확장했다.
바빌론 제국의 첫 황제가 된 함무라비는 남부의 풍요로운 농업지대로 왕령을 확대시키고 그 수리권(水利權)을 장악하면서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고, 그 대상으로 부역(賦役)·군역(軍役)·납세를 요구하는 이르크 제도를 갖추어 왕국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중간쯤에 있던 바빌론의 왕자로 태어났다. 구체적인 생애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1792년경 부왕 신무발리트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 같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군주들은 조금만 힘이 있으면 이웃나라를 침략했고,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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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도 재위 7년경 우르크와 이신을 정복하며 일찌감치 전쟁터에 뛰어들었으나, 그 뒤로는 정복한 도시들의 체제를 정비하고 도시들을 하나로 잇는 운하와 도로를 닦는 등, 오랫동안 내치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사이에 두각을 나타낸 군주는 아시리아의 샤마시아다드였다. 그는 숙적 마리를 꺾기 위해 남쪽의 함무라비와 손을 잡고 전력을 집중, 마침내 마리를 정복하고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손에 넣었다.
282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함무라비 법전은 이러한 함무라비의 정치 이념이 반영된 것으로, 범죄의 처벌에 대해 엄격한 것이 특징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12개의 석판에 당시 바빌론의 시민들이 사용하던 아카드어(Akkadian)로 쓰여 있으며, 바빌론 제국의 식자율이 매우 높았으므로 모든 시민들이 법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함무라비는 사르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다짐했다. 그는 통일제국을 유지하려면 힘도 중요하지만 제도의 정비와 사상적 통일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사르곤 시대에는 여러 도시들의 자치권이 폭넓게 인정되던 것이, 재정권과 사법권을 빼앗아 중앙에 귀속시켰다. 공평한 세금과 병역 제도 마련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한편으로 언어의 통일도 꾀하여 아카드어를 국어로 삼고, 종교적으로도 바빌론의 지방신이던 마르두크의 위상을 높여 수메르의 엔릴, 아시리아의 아슈르와 동일화, ‘벨-마르두크’라는 이름으로 메소포타미아 전체의 최고신으로서 숭배를 받도록 했다.
넓은 제국에서 발생하는 법률문제는 무수한데, 그것을 모두 바빌론의 왕이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각지에 지방법정을 세워 왕을 대리하여 판결을 할 사법관을 파견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제국 어디서나 왕이 직접 재판하는 것과 같게끔 해줄 법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래서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진다.
모두 282조로 이루어진 함무라비 법전이 씌어진 비문은 1901년에 프랑스의 고고학자 드모르강이 발굴했는데, 그 후 오랫동안 ‘세계 최초의 법전’이라는 명예를 누렸다.
1947년에 그보다 150년 이상 앞선 리피트-이시타르 법전이 발견되고, 그 법전의 서문에는 다시 70년 전쯤의 빌랄라마 법전을 참조했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최초의 법전이라는 명예는 현존하지는 않는 빌랄라마 법전에게 돌아갔는데, 다시 1952년에 기원전 2050년 경의 우르남무 법전이 발견됨으로써 최초 법전의 순위는 또 바뀌었다.
함무라비 법전보다 오래된 법전은 앞으로도 또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 법전이 중요한 까닭은 이것이 이전 법전들과는 다른 메소포타미아 통일제국의 법전이며, 이전 법전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정신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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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법전이라고 하면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同害) 보복 원칙’을 떠올린다. 그런데 조문을 잘 들여다보면 반드시 가해자에게 같은 손해가 가해지는 건 아니다. 자유민이 다른 자유민의 눈을 멀게 했으면 그의 눈을 뽑는 처벌을 내리지만, 한 단계 낮은 평민이 피해자라면 벌금만 내면 된다. 노예를 그렇게 했다면 벌금 액수가 줄어든다(그리고 벌금을 받는 상대는 그 노예의 주인이다). 낮은 신분의 사람이 높은 신분의 사람을 해쳤다면 반대로 처벌이 갈수록 엄중해진다.
사람의 신분에 따라 처벌이 불공평하다. 아울러 우리가 보기에는 지나칠 만큼 처벌이 엄중하다. 총 246조(36개 조는 훼손되어 읽을 수가 없다) 중에서 32개 조가 사형을 규정하며, 그 외에도 손을 자르거나 귀를 도려내는 등 잔혹한 벌칙이 많다. 이렇게 보면 “법전의 조상 어쩌고 하더니, 악법의 조상이로군”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이 법전은 ‘정의’라고 할 만했다. 그때까지는 신분보다 권력이나 재산에 따라 법이 들쑥날쑥 해지는 일이 보통이었다. 가령 권력자의 노예가 자유민을 때렸어도 그 자유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함무라비 법전은 그가 누구의 노예이든 자유민을 때렸으면 중벌을 받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반대로 권력자가 피해를 입었을 때 가해자에게 무제한적인 보복을 가하는 일도 막았다.
함무라비의 통일 왕조도 그의 죽음 이후로는 오래 버티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통치체제의 잘못보다는 이민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이란고원에서 넘어온 카사이트족은 동북부를 점령하고 독립 왕국을 세웠으며, 남부에서도 수메르가 독립했다.
1600년경에는 히타이트족의 침입에 바빌론이 함락되고, 제국이 멸망해 버린다. 이후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민족과 나라가 뒤섞인 항쟁을 거쳐, 1350년경부터 힘을 기르기 시작한 아시리아에 의해 통일된다.
함무라비의 통일제국은 이처럼 사라졌으나, 그의 유산은 오래 남았다. 이후의 여러 왕조는 그가 이룩한 체제를 모방했으며, 함무라비 법전을 그대로 적용해 쓰기도 했다. 강하지만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인자한 왕이라는 이미지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고, 바빌론도 오랫동안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로 남았으니,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음은 함무라비의 통일이 정치적으로는 끊어졌어도 문화적으로는 지속되었다는 증거이리라.
신분제 자체가 현대인의 눈으로는 불공평한 체제이지만, 당시에는 실제 권력이나 부와 관계없이 신분에 따른 원칙과 상식이 통할 수 있다면 충분히 공평하고, 정의로운 일이었다.
강력한 처벌이 많은 까닭은 범인을 교도소에 가두고 교화한다는 개념이 없던 당시로서는 실질적인 처벌 방법이 신체형과 벌금형에 그쳤고, 엄격한 처벌을 해야 범죄가 예방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법전들에 비하면 함무라비 법전은 많이 너그러운 편이었다. 고아나 과부, 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규정을 많이 마련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함무라비는 이 법전이 태양신이자 정의의 신인 샤마시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었다. 여러 나라의 각양각색의 법률들을 꼼꼼히 살피고는 이를 잘 정리하고 배합하여 법률상의 통일을 이룩한 자체가 뜻있는 일이었으리라.
법전이 새겨진 비석" 282개의 판례법이 새겨져 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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