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고찰, 송광사.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867년(경문왕 7)에 체징(體澄)이 창건하였다.
그 뒤 폐허화되었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곳을 지나다가 영천(靈泉)의 물을 마신 뒤, 영천으로 인하여 뒷날에 큰 절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여 샘 주위에 돌을 쌓아두었다가 제자를 시켜 뒷날 그 자리에 절을 중창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뜻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1622년(광해군 14)에 응호(應浩)·승명(勝明)·운정(雲淨)·덕림(德林)·득순(得淳)·홍신(弘信) 등이 이극룡(李克龍)의 시주를 얻어서 중창하였다. 중창 후 벽암(碧巖)을 초빙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전국에서 수 천인이 모여서 시주하였다.
이로써 1636년(인조 14)에 각성(覺性)이 약사전과 칠성각을 중창하기까지 계속 큰 불사를 벌여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 대웅전은 2층 건물이었고 일주문은 절 남쪽 3㎞ 지점에 있는 만수교 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 뒤 1813년(순조 13)정준이 관음전을 중수하고 대웅전을 단층으로 개축하였다.
1814년 약사전을 중수하였고, 1934년극인(克仁)이 나한전을 중수하였다. 1993년에는 대웅전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이때 다수의 복장(腹藏) 유물이 나왔다. 1996년 포교당을 지었고, 1998년 지장전과 오층석탑을 세웠다. 1999년에는 석조 미륵대불입상을 봉안하고 첨성각과 옛 명부전을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오백나한전·약사전·관음전·삼성각·십자각·천왕문·금강문·일주문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1243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1857년(철종 8)에 제봉(齊峰)이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 팔작지붕이며, 조선 후기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벽과 천장에는 선이 매우 활달하여 생동감을 가지게 하는 19세기 작품 비천(飛天)이 그려져 있다.
십자각은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십자각이라는 이름은 건물의 평면구성이 十자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12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2층 누각형태를 갖춘 건물로서 고건축물 중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이다. 이 십자각 내에는 1716년(숙종 42)에 주조한 범종·법고(法鼓)·목어(木魚) 등이 있다.
일주문은 원래 만수교 앞에 있던 것을 1814년(순조 14)에 조계교(曹溪橋)가 있었던 곳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극인(克仁)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절 입구 동쪽에는 벽암·호일(虎一)·자수(子秀)·유문(有文)·자찰(自察)·서봉(西峰)·성심(性心)·한계(寒溪) 등 고승 20인의 부도가 있다. 또, 1636년에 신익성(申翊聖)이 찬한 송광사개창비를 비롯하여 목각칠층다보탑판(木刻七層多寶塔版)·조계교비·석조(石槽) 등이 있다.
송광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천 년 고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완주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867년)에 구산선문의 개산조인 보조체징선사가 개창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백련사였으며, 현재의 일주문이 3㎞ 밖으로 서 있던 대찰이었으나 역사의 변천 속에 거의 폐찰이 된 것을 1600년대 순천 송광사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발원하여 그의 법손들이 대대적인 불사를 추진한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대왕이 두 왕세자의 무사환국과 국란의 아픔을 부처님의 가호로서 치유하고자 대대적으로 중창한 호국원찰이 되었다.
이렇듯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호국원찰이어서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대웅전, 나한전, 지장전의 불상이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특히 대웅전의 불상은 KAL기 폭파사건, 12·12사건, 군산 훼리호 침몰사건, 강릉 잠수함 출몰 때 그러했으며 1997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엄청난 양의 땀과 눈물을 흘려 IMF 한파를 예견하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절 이름도 송광사로 바꾸어 불렀는데,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승보사찰 송광사와 한자(漢字)까지 같다. 순천 송광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가 아늑하고, 봄이면 진입로부터 약 2㎞에 걸쳐 펼쳐지는 벚꽃이 장관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서면 금강문(金剛門)·천왕문(天王門)·종루(鐘樓)가 차례로 나오고, 종루 옆의 대웅전을 지나면 뒤쪽에 나한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일자(一字)로 배치되어 있고, 공간 배치가 자연스러워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대웅전 안에 있는 소조삼불좌상(塑造三佛坐像) 가운데 오른쪽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은 국가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 유명한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인 1997년 12월에도 땀을 흘렸다고 한다.
전국 4대 지장 기도 도량답게 최대 크기의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나한전의 석가여래와 500의 나한상은 대웅전과 함께 많은 이들의 참배처가 되고 있으며 평지 가람으로 노약자도 편히 찾을 수 있다. 대형주차장과 식당이 준비되어 있고, 봄철 벚꽃 터널의 아름다움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대웅전, 삼세불상, ‘아(亞)’자형 종각, 사천왕상 등 4점의 보물 문화재와 8점의 유형 문화재 등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찰이다.
‘송광사’ 하면 누구나 얼른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곳은 전북 완주군의 종남산(終南山) 송광사이다. 물론 두 절은 전혀 별개의 사찰이다. 하지만 아무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글은 물론 한자로도 ‘松廣寺’라고 같게 표기하고 있으니 필시 무슨 연유가 있으리라는 짐작쯤은 아무라도 해봄 직하다. 송광사의 역사를 기록한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옛날 고려의 보조국사가 전주의 종남산을 지나다가 한 신령스런 샘물을 마시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장차 절을 경영하고자 했다. 마침내 사방에 돌을 쌓아 메워두고 승평부(昇平府, 지금의 순천시)의 조계산 골짜기로 옮겨가 송광사를 짓고 머물렀다. 뒷날 의발(衣鉢)을 전하면서 그 문도들에게 이르길 “종남산의 돌을 메워둔 곳은 후일 반드시 덕이 높은 스님이 도량을 열어 길이 번창하는 터전이 되리라” 했다.
수백 년이 지나도록 도량이 열리지 못했으니 실로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스님 등이 서로 마음으로 맹세하되 보조스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정성을 다해 모연(募緣)하니 뭇 사람들이 그림자 좇듯 하였다. 이에 천계(天啓) 임술년(1622) 터를 보고 방위를 가려 땅을 고르고 풀과 나무를 베어내며 산과 바위를 깎아 가람(伽藍)을 이룩하였다.
결국 보조스님과 인연이 닿아 있어 그 뜻을 받들다보니 절 이름까지도 같게 되었다는 얘기다. 아울러 우리는 이 비문 내용을 통해서 송광사가 조선 후기에 창건되었음도 알 수 있다. 비의 이름 자체가 ‘개창비’인 데다 그것을 건립한 해도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이니 이 사실에 착오가 있을 리는 별로 없어 보인다. 한데 절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전혀 엉뚱하다.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 가지산문의 제3조 보조 체징(普照 體澄, 804~880)선사가 송광사를 창건했다는 얘기다. 심지어 어떤 기록에는 체징스님의 할아버지뻘 되는 가지산문 개창자 도의선사를 창건주로 꼽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통일신라시대 창건설은 아무런 문헌적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를 뒷받침하는 유물이나 유적 또한 현재로선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아마 체징스님과 지눌스님의 호가 같고, 여기에 자기 절의 역사를 가능한 한 올려보려는 생각이 더해져 이와 같은 주장이 제기된 것이 아닌가 한다.
송광사는 종남산 아래 널찍하게 펼쳐진 수만 평 대지 위에 터를 잡고 있다. 이른바 평지사찰이다. 평지사찰로서의 특징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일주문 앞에 서기만 해도 금세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있어 이들 각 건물의 문들이 틀을 만들며 점차 작아지다가 열어놓은 대웅전 어간문 안의 어둠 속으로 수렴된다(다만 현재는 1998년 완공한 대웅전 앞 석탑이 대웅전 어간 일부를 가리고 있다). 엄정성을 읽을 수 있는 정연한 구조이다. 산지사찰과는 판이하게 다른 진입방식이요, 가람배치이다. 당연히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이 십분 고려된 것이겠지만, 옛 백제지역 사찰들이 보여주는 평지성의 면면한 전통을 여기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끝이다. 천왕문을 넘어서는 순간 어딘가 휑뎅그렁한 분위기가 우리를 덮친다. 날이 선 엄정성이 절 전체로 파급, 확장되는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대웅전의 앞뒤로 흩어져 있는 전각들-십자각, 지장전, 관음전, 첨성각, 오백나한전, 약사전, 삼성각 등-은 너른 대지 위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 말 그대로 ‘흩어져’ 있는 모양새이고, 하나의 점 혹은 파편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저 낱낱의 건물이 고립분산적으로 독립해 있을 뿐 건물들 상호간에 어떠한 유기적 연관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건축이 생활을 담는 그릇일진대 과연 이런 건축 구조와 수행공동체를 지향하는 불가의 생활방식이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적이 의심스럽다.
송광사 건축의 이러한 분산성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조선 후기에 창건된 탓인지 유감스럽게도 송광사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십자각을 제외하곤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강하게 비끄러맬 만한 것이 없다. 말하자면 어느 건물도 이렇다 할 구조의 미 또는 공예적 장식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셈이다. 이럴 경우 그 약점을 보완, 수정하여 강점으로 환치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집합성이다.
별볼일 없는 것들이 기능적으로 결합될 때 생겨나는 힘, 그것은 이를테면 군집의 미, 집체의 미, 그리고 조화의 미일 텐데, 송광사 건축은 애석하게도 이런 미덕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산지가람이라면 덜 드러났을 고립성, 분산성이라는 구조적 결함이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훨씬 강하게 노출되어 그 황량함이 두드러진다.
송광사의 가람배치가 창건 때부터 지금과 같았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을 설정하고 그 선 위에 가지런하게 건물들을 배치한 점으로 본다면 그밖의 건물들도 어떤 원칙과 조형 원리에 입각해서 위치가 정해졌을 법하다. 물론 추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야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아무튼 지금의 송광사는 건물군이 보여주는 짜임새에서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음에 틀림없고, 최근에는 이런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 가속화되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창암 이삼만이 글씨를 쓴 편액이 인상적이던 명부전을 헐고 지장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더 크게 새로 지으면서 집을 오른쪽 뒤편으로 훨씬 물려 앉히는 바람에 다른 건물과의 연계성을 더 떨어뜨린 점이라든지, 건축적 고려 없이 마당 가운데 세우면서 중심축을 벗어난 석탑이라든지, 국적 불명의 쌍석등을 난립시키는 따위가 모두 그런 경우이다. 요즘 사람들의 즉흥성과 안목 없음을 탓할밖에 별 도리가 없으니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대개 이상과 같은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송광사를 돌아본다면 공연한 실망을 덜 수 있음은 물론 소소한 재미와 소득이 없지는 않을 터이다.
절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 일주문은 다포계 맞배지붕 양식이다. 조선시대 다포계 건물의 경우 대체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공포의 생김새가 나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하여 공포뿐만 아니라 서까래와 덧서까래, 창방 뺄목 대신 고개를 내민 용머리, 문의 앞뒤로 덧댄 보조기둥 따위들이 모두 유난히 가늘어 일주문의 인상을 섬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런 섬약함 때문인지 일주문의 또 다른 인상은 일종의 가벼움이다. 어딘가 모르게 진득하게 땅에 몸 붙이고 있는 자세가 아니라 쉽게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기둥이 의식되지 않고 포작에 받쳐진 지붕만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이다.
"송광사 일주문
절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로 기둥이나 여러 부재들이 유난히 가늘어 섬약해보이는데, 그 때문에 포작에 받쳐진 지붕이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금강문을 지나 사천왕문 안으로 들어서면 여느 절집처럼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여기 사천왕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塑造)이다. 흔히 이곳 사천왕상을 소개하면서 뛰어난 사실성과 세부 묘사의 성실성을 언급하지만, 글쎄 그게 다른 천왕상들과 뚜렷이 드러날 만큼 차이가 큰지는 모르겠다. 흙을 이겨서 4m가 넘는 신상을 조성하면서 이 정도 성실성을 보여준다는 점은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이 사천왕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제작연대가 분명하다는 점 때문이라 해야 솔직하리라. 오른손으로는 당(幢)을 잡고 왼손 위에는 보탑(寶塔)을 올려놓은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쓰고 있는 보관의 뒷면 끝자락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畢”(순치기축육년칠월일필)이라는 먹글씨가 남아 있어 1649년에 이들 사천왕상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조선시대 소조 사천왕상의 기준작을 얻게 된 셈이고, 이 점이 송광사 사천왕상이 갖는 의의라 하겠다. 1997년 보물 제1255호로 지정되었다.
"송광사 사천왕상
흙으로 빚어 만든 4m가 넘는 거대한 사천왕상이다. 사진의 오른쪽에 있는 서방 광목천왕의 보관 뒤쪽에 1649년에 조성했다는 연대가 남아 있어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기준작이 되고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소재 송광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천왕상.
내용
높이 4.2m. 보물 제1255호. 이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성을 지닌 조각상이다. 정확한 제작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1649(인조 27)년 이전에 완성된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임진왜란 이후에 행해진 일련의 사찰 재건 사업에서 당시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이었던 벽암각성 대사(碧巖覺性大師)가 주도한 장인 계열을 중심으로 제작하였던 승주 송광사, 화엄사와 더불어 동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세 사찰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벽암 문도들이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점에서 사천왕의 호국·호법 정신과 맞닿아 있다.
이 상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 가운데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신체의 균형이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재질이 소조이기 때문인지 얼굴의 주름살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활달한 몸의 움직임과 함께 분노상이 잘 드러난 얼굴 표정은 이 작품의 우수성을 대변하고 있다. 4위(位) 모두 한쪽 다리는 악귀가 받들고 있고 다른 한쪽 다리는 수직으로 내리고 있다.
1994년 10월 사천왕상 개채 보수 작업 중에 보탑을 든 사천왕상의 보관 끈 뒷면과, 왼손에 받쳐 든 보탑의 밑바닥에서 묵서의 명문이 발견되었고, 여러 점의 복장품들이 나왔다.
보관 끈에는 “順治乙丑年十月日畢金山畵面主造?爲?(순치을축년시월일필금산화면주조?위?”라고 씌어 있었다. 송광사 개창비에는 숭정(崇正) 병자(丙子)년에 법당과 동서 재료(齋寮)를 완성하고 단청을 시채(施彩)하였으며 천왕전은 여인(呂仁)이라는 승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1636년과 1649년 사이에 사천왕상이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보탑 밑바닥에는 건륭(建隆) 51년(1786)에 중수하였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복장품으로는 용, 보주를 든 사천왕상을 제외한 3위(位)의 천왕상의 등 부분 속에서 법화경과 화엄경을 비롯한 경전류와 후령통 등이 나왔다. 경전류로는 정강(靖康) 정미(丁未)년(1129)과 천계(天啓) 8년(1443)에 제작된 귀중한 목판본이 포함되어 있다.
천왕문을 넘어서면 중정이고 그 너머 정면으로 대웅전이 우람하다. 대웅전은 송광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이다. 절이 창건될 무렵 처음 지어졌고, 1857년 중건되었다. 꽤 큰 건물이다. 외관에 걸맞게 기둥이 튼실하고 훤칠하다. 그런데 어쩐지 처마가 깊지 않아 집 전체의 조화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니다. 제대로 조화가 맞았더라면 장중한 맛을 한껏 드러냈으련만 도리어 점잖은 도포 차림에 양태 좁은 갓을 쓴 것마냥 어딘지 어색하다.
처음 세울 때는 2층이었으나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고쳐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 연유로 건물 각 부분의 비례가 적정치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물리고 그 위로 공포를 올려 다포집 전형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 집의 특색은 그 아래에 있다. 즉 정면의 창방과 상방 사이 공간을 벽면으로 처리하고 각각의 칸을 균등하게 셋으로 나눈 다음 칸칸이 벽화를 채운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다. 보통은 여기에 빗살무늬 교창을 둔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천장의 꾸밈새가 다채롭다. 천장은 가운데 3칸은 우물반자를 치고 나머지 외진부는 경사진 빗천장을 꾸몄다. 불상 위 천장에는 간단한 운궁형 보개를 씌웠으며, 우물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 하늘을 나는 동자, 반자틀에 붙인 갖은 물고기·게·거북 혹은 자라 따위 바다짐승 등 온갖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개중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론가 바삐 줄지어 가는 자라, 새끼를 등에 업고 네 활개를 젓는 거북도 눈에 띈다. 빗천장에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추는 모습의 비천도 20여 장면이 천장화(天障畵)로 그려져 있다. 19세기 중건 당시에 완성된 것들로 생각되는데, 비교적 색채도 선명하고 활달한 동세가 구김살없이 표현되어 눈을 즐겁게 한다.
법당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불상이 되겠다. 중앙에 석가, 동쪽에 약사, 서쪽에 아미타여래가 삼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흙으로 만든 이 불상들은 각각의 높이가 5.5, 5.2, 5.2m나 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소조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분들은 그 크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법당 안이 그들먹하다. 때문에 불상과 천장 사이의 공간은 여유롭지 못하고, 수미단과 앞면 기둥열의 간격이 좁아 예배 공간은 옹색하며, 수미단조차 3단이 아닌 2단으로 낮추어 만드는 편법을 구사하고 있다. 공간 활용이 이렇게 비합리적임을 무릅써가며 이만큼 불상을 크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지 의아스럽다. 혹 법당이 2층이었을 때에는 그런대로 집과 어울렸을까? 모를 일이다.
"송광사 소조삼존불
각각의 높이가 5m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소조삼존불이다.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불상에서 땀이 흐른다고 전한다.
근년 도난사건이 빌미가 되어 삼존불의 복장유물(腹藏遺物)이 수습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세 불상에 똑같은 내용으로 납입된 「불상조성기」(佛像造成記)이다. 그 가운데 “이 불상을 만드는 공덕으로 주상전하는 목숨이 만세토록 이어지고 왕비전하도 목숨을 그와 같이 누리시며, 세자저하의 목숨은 천년토록 다함없고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며, 봉림대군께서는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또한 환국하시기를 ······ 원하옵니다”(以此造像功德奉爲 主上殿下壽萬歲王妃殿下壽齊年 世子邸下壽千秋 速還本國 鳳林大君增福壽 亦爲還國 ··· 之願)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함도 이들 불상 제작 배경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의 서글픈 장면 하나가 일견 세상과 무관한 듯한 불상에조차 화인(火印)처럼 남은 것이다. 또 조성기 첫머리에 불상을 만든 때를 밝히면서 ‘崇禎十四年’과 ‘崇德六年’(1641)이라고 명(明)과 청(淸)의 연호를 나란히 기록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는 혼란기에 명, 청 양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약소국 조선의 딱한 처지도 손금보듯 읽어낼 수 있다. 대웅전 삼존불은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가감없이 고스란히 간직한 불상이라 하겠다.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전패(殿牌) 또는 원패(願牌)라고 불리는, 조각이 아름다운 목패(木牌) 세 개가 서 있다. 왕, 왕비,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원패이다. 셋 모두 크기가 2m가 넘어 전패치고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화염을 날리며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용무늬가 복잡하게 전체를 뒤덮고 있는 앞면은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인다. 뒷면에는 인조 때 만들었다는 것과 정조 때인 1792년 수리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먹글씨가 남아 있다. 크기로나 새긴 솜씨로나 또 만들어진 연대가 드러난 점으로나 눈여겨봄직한 유물이다.
그동안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던 대웅전은 1996년 보물 제1243호로 등급이 승격되었고, 삼존불상과 그 복장유물은 1997년 보물 제1274호로 새롭게 지정되었다.
절 건물 가운데 범종, 목어, 운판, 법고의 네 가지 법구(法具), 곧 사물(四物)이 비치된 곳이 범종각 혹은 범종루이다. 엄격히 구분한다면 종각은 단층, 종루는 누각 형태의 2층을 가리킨다.
송광사에는 대웅전의 남서쪽, 현재는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의 비스듬한 앞쪽에 범종루가 있다. 우리 전통건축에서는 아주 드문 십자형 평면을 채택하여, 누마루를 경계로 아래위 동일선상에 12개씩의 누하주와 누상주를 세우고, 그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짜올린 대단히 독특한 외관을 뽐내는 건물이다.
바닥이 지면과 별 차이가 없는 누각 아래층은 주춧돌과 기둥을 제외하면 거칠 것 없이 열린 구조이고, 그 서북쪽 귀가 만나는 곳에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이 걸렸다. 사물이 걸려 있는 누각은 면마다 돌아가며 간결한 계자난간을 돌렸다.
누마루의 중심을 이루는 4개의 기둥에는 기둥을 휘감고 솟아오르는 용을 그려넣어 돋보이게 장식을 하였다. 기둥 위로는 창방을 건너질렀는데, 대들보 없는 이 건물에서 그 구실을 겸하고 있다. 평방 위로 짜올린 공포는 가냘프게 휘어올라간 앙서형의 살미, 두께가 얄팍한 첨차 등 하나하나 뜯어보면 매우 섬약하다.
서까래와 덧서까래도 가늘고 길어 연약해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울림은 전혀 다르다. 기둥 사이의 간격이 2.5m, 따라서 한 면의 길이가 7.5m에 지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집에 귀공포가 여덟 군데나 놓이고 기둥 사이마다 주간포를 짜올렸으니 처마밑은 공포로 빼곡하여 섬세하고 현란하며 화사하다.
공포를 구성하는 낱낱 부재가 가볍다보니 그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느낌도 가뿐하고, 산뜻하고, 날렵하다. 마치 범상한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고된 훈련 끝에 부르는 화려한 합창 같고, 보잘것없는 풀꽃들이 가득 모여 이룬 커다란 군락 같다. 밀집한 공포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한 본보기를 여기서 만날 수 있다.
종루는 1857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함께 중창된 것으로 전해온다. 종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96년 ‘완주 송광사 종루’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244호로 승격되었다. 십자형 평면으로 말미암아 십자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대웅전을 옆으로 비껴 절의 동북쪽 귀퉁이로 빠져나가면 절의 내력이 적힌 ‘송광사개창비’를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내쳐 걸으면 긴 돌각담에 둘러싸인 이 절의 부도밭이 나온다. 송광사개창비는 절의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 세워졌다. 거북받침,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는데 거북받침은 화강암, 몸돌과 지붕돌은 대리석 통돌이다.
비머리의 앞면에는 ‘全州府松廣寺開創之碑’(전주부송광사개창지비), 뒷면에는 ‘賜號禪宗大伽藍寺’(사호선종대가람사)라고 전서(篆書)로 제액(題額)하였고, 그 아래로 앞뒷면에 글씨가 빽빽하다. 글을 짓고 전서를 쓴 사람은 선조의 부마였던 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 1588~1644)이고, 글씨는 선조의 여덟째아들 의창군 광(義昌君 珖)이 썼다. 이미 대웅전 삼존불의 조성 경위에서 우리는 송광사와 왕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음을 짐작한 바 있지만, 국가에서 ‘선종대가람’이란 이름을 내리고 왕실과 가까운 사람들이 비의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런 점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송광사 개창비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에 세워진 비로 불교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고려 보조스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사찰 건립의 배경과 과정, 둘째는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스님이 창건에 깊이 관여한 사실과 그분의 면모 및 고려 말의 태고 보우(太古 普愚)스님으로부터 스님에게까지 이어지는 법맥(法脈)의 상세한 계통, 그리고 셋째는 벽암스님의 문도, 창건에 동참한 시주자와 기술자, 비석 제작에 참여한 장인의 명단이 그것이다.
특히 벽암스님의 존재가 주목된다. 그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1624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면서 3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한 승병장이기도 하다.
스님은 송광사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서, 무주 적상산성에서 사고(史庫)를 지키던 중 대중들의 요청이 계기가 되어 대웅전 삼존불의 조성을 비롯한 갖가지 송광사 불사에 참여한다. 그의 지위나 직책으로 보아 송광사와 왕실을 연결하는 매개자였으며 불사의 주도자 또는 후견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또 비문 속의 스님에게까지 이어지는 전법(傳法)의 계보는 불교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돌각담이 정겨운 부도밭은 너무 넓은 탓인지 아늑한 맛은 없다. 뒷줄에 열둘, 가운데 둘, 그리고 앞줄에 둘 해서 모두 열여섯 기의 부도와 두 개의 비가 세 줄로 나란히 서 있다. 부도들은 모두 석종형으로 별다른 특징은 없고, 다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여러 점 눈에 띈다. 푸근한 맛은 없지만 세월을 벗하며 서 있는 부도들이 맑은 바람 속에서 해바라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송광사는 진입부의 정연함과 중심부의 산만함이 기묘한 대비를 이루는 사찰이다. 진입부에서 가졌던 기대와 긴장이 중심부에서 여지없이 풀려버리는 그런 곳이다. 건물과 건물이 짜임새 있게 맞물려 돌아가야 거기에 생활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음을 교훈적으로 보여주는 절이다. 설사 여러 점의 유물이나 유적이 가치 있고 볼 만하더라도 그것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못하면 그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없음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송광사이다.
송광사 범종루우리나라 건축물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십자형 평면을 가진 건물로 부재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매우 섬약하나 수많은 기둥과 처마밑의 빼곡한 공포로 인하여 현란하고 화사한 느낌을 준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에 위치한 송광사의 조선시대 누각.
보물 제1244호. 완주 송광사 종루는 종을 달아 놓은 십자형의 2층 누각이다. 종루나 종각은 보통 사각형 평면인데 비하여 십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어 주목된다.
현존하는 건물 중에서는 창덕궁 부용정과 수원 방화수류정이 십자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나 다른 건물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구조이다. 십자형은 내부 공간구성이 어려울 뿐 아니라 지붕을 구성할 때도 회첨이 많이 생겨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송광사 종루는 기단 위에 12개의 기둥을 세워 완전한 십자형 누각을 구성하였다. 누하주(樓下柱)는 굵은 나무를 민흘림을 주어 8각으로 치목하였고 그 위에 다시 원기둥을 세워 2층 누각을 지지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외벌대로 돌렸는데 부분적으로 유실된 상태이며 서측의 기단은 흙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2층 누마루는 우물마루로 처리되었으며, 기둥 위에 창방을 걸고 그 위에 평방을 서로 반턱맞춤으로 결구하여 공포를 배치하였다.
평면은 중앙에 범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4칸에는 법고, 목어, 운판을 매달아 기본 불구(佛具)를 갖추었다. 나머지 한 칸은 승강계단이 설치된 입구이다. 주간은 모두 8.15자[尺]로 일정하며 마루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돌렸다.
공포는 다포계 구조이다. 내외 3출목의 공포를 주상과 주간에 1구씩 짜올려 빈틈없이 공포가 처마 밑을 받치고 있다. 출목간의 순각판은 내·외부 모두 생략되고 오제공 상단에 도리와 직각방향으로 널을 깔아 처리했다. 내부의 초가지에는 연봉, 연화, 봉두가 조각되었으며 회첨귀한대 내부 제공은 모두 교두형으로 처리되었다.
특히 내부에서는 짜 올라간 공포로 별도의 천장 없이 천개식(天蓋式) 구성을 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지붕은 평면형에 맞추어 십자형 팔작지붕을 구성하고 직교하는 용마루의 중앙 교차점에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와는 신재로 교체되어있는 상태이며 용머리기와 및 망와는 일부가 옛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단청은 외부는 모로단청, 내부는 모로단청과 긋기단청이 혼용되었다. 벽이 없는 건물로 벽화는 없다.
이 건물은 건물의 규모에 비해 공포대가 크고, 중첩되는 살미선과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선 그리고 계자난간 등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다. 공포는 화려하지만 가냘프게 휘어 올라간 앙서형 살미와 양끝이 사절된 교두형 첨차 등으로 인해 섬약해 보인다. 대웅전 공포와 비교해 볼 때 장식적 수법은 덜하지만 쇠서의 앙각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여 대웅전이 중건되던 시기에 같이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 종루는 독특한 평면과 화려한 공포, 날아갈 듯한 추녀선들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은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일한 십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다. 전주객사 앞에서 다시 충경로 사거리로 나와 왼쪽 전주 시내로 난 1번 국도를 따라 1.3㎞ 가면 진북광장 오거리가 나온다. 진북광장 오거리에서 다시 오른쪽 모래내·전주역 방면으로 난 길을 따라 1.7㎞ 가면 안골광장 사거리가 나오고, 안골광장 사거리에서 앞으로 계속 난 길을 따라 1.2㎞ 가면 우아교차로가 나온다.
우아교차로에서 앞으로 계속 난 26번 국도를 따라 진안 방면으로 5.3㎞ 가면 황운교차로에 닿는다. 황운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2.6㎞ 가면 마수교를 앞두고 길 왼쪽에 송광사·위봉사 표지판과 함께 741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741번 지방도로를 따라 2.5㎞ 가면 길 오른쪽 앞에 한마당슈퍼가 있는 사거리가 나온다.
한마당슈퍼 앞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작은 다리를 건너면 송광사에 닿는다. 대형버스는 한마당슈퍼 앞 사거리 100m 정도 못미처 왼쪽으로 난 다리를 건너면 송광사 앞까지 갈 수 있다. 송광사 주차장은 대형버스도 여러 대 주차할 수 있다. 송광사 주변에는 숙식할 곳은 있으나 그리 마땅치 않다.
송광사 입구 마수교에서 진안으로 계속 이어진 26번 국도를 따라 약 3.5㎞ 가면 화심온천에 닿는다. 화심온천은 중탄산나트륨이 함유된 알카리성 온천으로 피부미용, 신경통, 관절염 등에 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화심온천에서는 숙식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순두부촌이 형성되어 있다. 화심순두부는 순수한 국산 콩에 재래식 제조방법으로 만드는데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어서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두부의 명소이다.
전주 시내 모래내 사거리에서 송광사로는 14-1, 37, 38, 106, 106-1번 시내버스가 약 30분 간격으로 다닌다.송광사 입구 마수교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2.5㎞ 구간에는 길 양옆으로 해묵은 벚나무가 우거져 있다. 이 길은 봄에는 만개한 벚꽃들로 온통 흰 터널이 되며, 가을에는 붉은 벚나무 단풍 터널이 되어 장관을 이룬다.
**본 정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행 시에는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문헌
-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倉碑)」(노명신, 『불교학보』 3.4합집, 1966)
- 「조선후기 사천왕상에 대한 고찰」(노명신, 『미술사학연구』 202, 한국미술사학회, 1994)
- 「송광사 사천왕상에 대한 고찰」(노명신, 『불교미술연구-송광사 특집호』 5, 동국대학교불교미술문화재연구소, 1999)
- 『전통사찰총서』8(사찰문화연구원, 1997)
- 『전통의 고장 완주』(완주군, 1982)
- 『한국사찰전서』(권상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8)
- 송광사 [松廣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송광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 송광사 [松廣寺] (두산백과)
- 완주 송광사 종루 [完州松廣寺鍾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완주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完州松廣寺塑造四天王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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