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老子. lǎo zǐ.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며 도가(道家)의 시조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
『노자도덕경』이라고도 불리우는 『노자』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상당히 발전한 무렵부터 한(漢)대까지의 도가 사상의 소산(所産)이다.
『노자』의 중심 사상은 인의(仁義) 등 도덕이나 지혜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인민을 지배하려고 하는 유가(주로 맹자)에 대하여, 도덕ㆍ지혜를 버리고 지배의욕을 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의하여 지배하려고 하는 정치사상과, 동일하게 무위무욕(無爲無欲)으로 남에게 겸양하는 것에 의하여 성공ㆍ보신(保身)하려고 하는 처세술이다.
이들에 대한 근거로서, 현상의 배후에 불가지(不可知)의 실재(實在)인 도(道)를 설정하여, 우주생성설과 음양의 자연학을 도입하여, 세계는 도(道)로부터 나오고 '도'에 의하여 생성ㆍ사멸의 운동을 한다고 하는 객관적 관념론을 전개하였다.
노자에 대한 설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허난성 루이현(鹿邑縣)) 출신이다.
이름은 이이(李耳)이고 자는 담(聃)이며 호는 백양(伯陽)이다.
노자가 태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기원전 57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1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신빙성은 떨어진다.
혹자 중에는 기원전 5세기, 심하면 기원전 4세기로 보는 사람까지 있고, 심지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노래자와 노자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노자는 주(동주(東周))나라의 도서관을 관장하는 책임자를 지냈는데, 주나라가 쇠퇴하자 이를 한탄하며 서쪽 산관(또는 함곡관)을 나가 은퇴했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위대한 철학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 노자는 도가학파(道家學派)의 창시자이다.
노자의 일화
공자와 만남
기원전 519년 춘추시대 중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해에 공자는 동주(東周)의 도성이었던 뤄양(洛陽)을 방문한다.
평소 주의 문물제도를 흠모해왔던 공자로서는 뤄양 방문이 그야말로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을 것이고, 주 무왕을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공자였기에 흥분 그 자체였을 것이다.
공자는 우선 주 천자가 제후들을 맞이하고 대전을 거행하는 명당(明堂)을 비롯하여 왕성의 궁실, 주나라 조상 후직에게 제사를 드리는 태묘(太廟),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단(天壇) 등을 돌아보았다.
당시 이름난 음악가인 장홍을 방문하여 ‘악(樂)’에 관한 지식을 배웠다.
공자가 뤄양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자는 그의 제자 강상초(康桑楚) 등과 함께 열렬히 공자를 환영했다. 뤄양의 각종 도서와 『주례』와 관련하여 얘기를 나누던 중에 노자는 공자에게 『사기』에 인용된 것처럼 자기 철학의 일단을 드러냈다. 그 대목을 보면 이렇다.
“그대(공자)가 말하는 예란 이런 것이오.
그 사람과 뼈는 이미 다 썩었는데 오직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인 것.
군자는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날리는 쑥대처럼 굴러다닌다고 합디다.
장사를 잘하는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간직하길 마치 그 물건이 없는 것처럼 하고, 군자는 덕이 넘치나 그 용모는 마치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들었소이다.
그대의 교만한 기상과 넘치는 욕심, 얼굴과 모양새를 꾸미는 일, 갈피를 못 잡는 어지러운 뜻일랑 버리시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외다.”
노자의 이 말은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지만 공구의 아픈 곳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으며 동시에 노자의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공자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안다.
물고기가 헤엄을 잘 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짐승이 달리기를 잘 한다는 것도 물론 잘 안다.
달아나는 자에게 그물을 칠 수 있고, 헤엄치는 것에게 낚시를 드리울 수 있으며, 나는 것을 향해 활을 쏠 수는 있다.
용이라면 나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뭐랄까? 그는 용과 같았다···”
『공자세가』에도 노자가 공자를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귀한 자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재물을 딸려 보내고, 어진 자는 사람을 보낼 때 말로 한다고 합디다.
내 비록 부귀하지는 못하나 인자로 자처하길 좋아하니 이런 말로 그대를 떠나보낼까 합니다.
‘총명하여 깊이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위험이 따르는데, 이는 남을 잘 비판하기 때문이요,
많은 지식을 지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로운데 이는 남의 결점을 잘 꼬집어내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식은 아버지뻘 되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신하된 자는 임금 앞에서 자신을 치켜세우지 않는 법이다.’”
무위자연
기원전 484년, 오자서가 ‘반란’이란 모함을 받고 자살한 바로 그 해, 노자는 홀연히 자리를 내던지고 푸른 소를 타고 서쪽으로 가버렸다.
진(秦)의 산관(散關, 산시(陝西)성 바오지시 서남)을 지날 때 관문을 지키던 사령관 윤희란 자가 “은거하시려는 모양인데 몇 글자만 남겨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부탁하자, 노자는 그 자리에서 저 유명한 『도덕경(道德經)』을 써준 다음 바람과 같이 관문을 나가 사라졌다.
『도덕경』은 『노자(老子)』라고도 부르는데, 5천 자밖에 안 되는 짧은 문장이다.
노자는 우주발전의 자연법칙을 ‘도(道)’라 불렀는데, 이것이 도가학파의 기원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덕경』에 반영된 노자 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법률 · 도덕 · 풍속 · 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또 항거할 수 없는 압력에 부딪쳤을 때 취할 수 있는 일종의 자기이해와 자기위안의 심리상태이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친구 상종(常從)으로부터 큰 계시를 받았다.
노자의 전체 사상은 청정(淸靜)과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사물의 자연적 발전에 맡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겉으로는 유약해 보이고 이내 무너질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쓰러지지 않을뿐더러 더욱 강해진다고 말한다.
그것의 발전은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지극히 약한 것이 지극히 강한 것이고, 후퇴가 곧 전진이다.
술잔이 차면 넘치고 달이 차면 기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노자는 억지로 나가려 하지 말고 마음을 다 잡을 것이며, 일삼지 않는 것이 일하는 것이니 자연의 변화가 곧 규칙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지 않는 것(무위(無爲))이 바로 아주 중요한 일을 벌써 많이 한 것(유위(有爲))이다.
평가.
노자는 중국 철학사와 사상사에서 우주의 기원과 우주 만물의 생성 등에 관해 처음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인물로 평가 받는다.
노자의 사상은 노자 이후 장자에 이르러 ‘노장사상’으로 체계화 내지 심화되어 중국 철학사와 사상사는 물론 중국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도가는 훗날 도교(道敎)라는 신앙체계로 발전되었는데, 도교에서는 노자를 시조로 받든다.
관련 유적
노자와 관련한 유적은 그의 신비한 행적에 걸맞게 중국 전역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주요한 유적으로는 우선 그의 출생지이자 고향인 허난성 루이(鹿邑)현을 들 수 있다. 루이현에서 동쪽으로 5킬로미터 지점의 태청궁진(太淸宮鎭)의 노군대(老君臺)와 태청궁 유지 등은 국가급 문화명승지(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노자의 사당을 비롯하여 관련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2012년에는 허난성 루이를 ‘중국 노자문화의 고향’으로 명명하고 이와 함께 ‘중국 노자문화 연구센터’를 건립했다.
루이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 가운데 하나인 이(李)씨 성의 발원지이다.
이 때문에 전 세계 이씨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이곳을 끊임없이 방문하고 있다.
『이씨조맥원류(李氏祖脈源流)』에 의하면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은 노자를 자신들의 선조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이씨 성을 가진 인구는 약 1억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무엇보다 노자 관련 유적지로 유명한 곳은 노자가 『도덕경』을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누관대, 공자와 노자의 만남을 기념하는 공자입주문례비이다.
누관대(樓觀臺)
‘천하 제1 복지(天下第一福地)’로 불리는 이름난 도교 명승지인 누관대는 산시(陝西)성 저우즈(周至)현 동남 15킬로미터 지점인 종남산(終南山) 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풍광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산과 물, 무성한 나무와 대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
옛날 책에서는 이곳을 두고 “관중의 물과 산들 중에서 종남산이 으뜸이고, 종남산 뭇 봉우리들 중에서 누관이 가장 유명하다”라고 했다.
누관대란 이름은 춘추시대에 얻었다.
전해 내려오기로는 함곡관을 지키던 대부 윤희가 이곳에다 풀로 누각을 엮어놓고 지냈는데 어느 날 밤에 하늘을 보다가 동쪽에서 뻗치는 붉은 기운을 보고는 장차 진인(眞人)이 이곳을 지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뒤 노자가 함곡관을 지나게 되었고 윤희는 노자를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
노자는 이곳에서 『도덕경』 5천 자를 저술하여 누각 남쪽 높은 축대에서 이를 전하고 누관대란 이름을 남겼다.
동한시대 이후 노자가 도교에 의해 시조로 받들어지면서 누관대는 중국 전통철학과 종교의 성지가 되었다.
주(周) 목왕이 이곳에 와서 옛 음악을 연주하고 누관궁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진시황은 이곳 남쪽에다 청묘(淸廟)를 짓고 직접 와서 신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한 무제도 북쪽에 사당을 지었다 하고, 진 혜제(晉惠帝)는 이곳에 1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고 300호가 넘는 백성들을 이주시켜 전문적으로 건축과 원림(園林)을 보살피게 했다.
남북조 시대에는 북방의 이름난 도사들이 이곳에 다 몰려 ‘누관파’를 형성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수 문제(隋文帝) 초기에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수나라 말기 혼란기에 당 고조(唐高祖) 이연이 타이위안(太原)에서 기병하고, 그의 딸 평양공주가 호현(鄠縣, 지금의 산시(陝西)성 서쪽)에서 사람들을 모아 아버지의 기병에 호응하자 누관대의 장교도장 기휘(岐輝)는 관내의 돈과 식량을 긁어 적극적으로 평양공주를 지원했다.
이연이 포진관 에 주둔하고 있을 때 기휘는 부하들을 보내 돕게 했으며, 이연도 군사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하면 누관대에 와서 재를 올리며 길흉화복을 물었다.
이때 기휘는 “폐하의 성덕에 하늘이 감동하시고 진왕(秦王, 이세민)이 계속 승리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의 명입니다.
어떤 적인들 물리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이연을 격려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이연은 중국을 통일한 다음 노자를 조종(祖宗)으로 삼기로 하고 직접 누관대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누관대란 이름을 종성궁(宗聖宮)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도교를 맨 앞에 세우고 그 다음에 유교, 마지막에 불교를 두는 당나라 초기 도교 숭상의 국책을 결정했다.
당 현종(唐玄宗) 이융기는 도교에 더욱 심취하여 꿈에 노자를 보았다는 것을 구실로 종성궁을 종성관(宗聖觀)으로 바꾸고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벌였다.
이로써 누관대는 굉장한 규모와 수많은 도사들이 북적대는 최고 전성기의 황실 도관이 되었다.
누관대는 고대의 유적과 한 · 당 시기의 고적들 그리고 주위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때문에 역대로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걸음하여 적지 않은 문장을 남겼다.
누관대의 명승고적으로는 상선지(上善池) · 설경대(說經臺) · 연단로(煉丹爐) · 여조동(呂祖洞) · 앙천지(仰天池) · 서진정(栖眞亭) · 화녀천(化女泉) · 고탑 · 노자묘(老子廟) 및 종성궁 · 회영관 · 옥진관(玉眞觀) · 옥화관 등이 남아 있다.
뤄양에 남아 있는 공자입주문례비는 공자와 노자 이 위대한 두 사상가가 만난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공자 입주문례비 (孔子入周問禮碑)
비에는 정확하게 ‘공자가 주나라에 들어와 예악을 묻고 이곳에 이르렀다’는 뜻의 ‘공자입주문례악지차(孔子入周問禮樂至此)’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뤄양 노성(老城) 동관대가(東關大街) 북쪽 옛 문묘 앞에 서있다.
높이는 5.8미터에 폭은 5.4미터이다.
청 세종(世宗) 옹정(雍正) 5년인 1727년에 허난부윤 장한(張漢)과 뤄양현령 곽조정(郭朝鼎)이 세웠다.
현재 비의 상태는 완전한 편이며 낙양중점문물보호단위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각주: 함곡관(函谷關) : 한구관이라고도 한다.
중국 허난성(河南省) 북서부의 교통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동서 8킬로미터에 이르는 황토층 골짜기로 암벽이 솟아있고 벼랑 위에 나무들이 햇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낮에도 어둡다고 한다.
늙어서 태어난 노자"
기원전 604년 9월 14일, 중국 초나라 고현의 여향 곡인리에 한 여인이 자두나무(李樹)에 기댄 채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떨어지는 별을 찬양하면서 62년 동안 임신해 있던 상태였고, 그때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주위의 자두나무를 가리키며 “나는 이 나무를 따서 성(姓)을 짓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두나무(李)에다 자신의 큰 귀(耳)를 상징하는 이름을 붙여 스스로 이름을 이이(李耳)라 했다.
그의 머리칼은 벌써 하얀 눈처럼 희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두고 노자 라 불렀다.
노(老)는 늙었다는 뜻이고, 자(子)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존칭어다.
노자는 유가에서 내세운 명분주의와 인위적인 조작에 반대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유가의 인위적인 도덕이 끼치는 폐단과 인간의 위선을 고발함으로써 좀더 근원적인 진리로 나아가고자 했다.
노자는 주나라에서 왕실의 장서고를 기록하는 수장실사(守藏室史) 로서, 사십여 년간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공자의 방문을 받았는데, 공자는 노자에게 예(禮)에 대해 물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자가 볼 때, 공자는 아직도 혈기가 왕성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나아가서 벼슬을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뒤로 물러나 숨어야 하는 것이오.
내 일찍이 듣기를 ‘훌륭한 장사꾼은 귀중품을 감춰놓은 채 아무것도 없는 듯이 행동하고, 완전한 덕성을 갖춘 사람은 겉으로는 다만 평범한 사람으로 보인다.’라고 했소. 그러니 그대는 몸에 지니고 있는 그 교만과 욕심과 위선 따위를 다 버리시오.”
그가 권하는 대로, 상하 양편의 오천 자로 된 《도덕경(道德經)》을 완성하게 됐는데, 이렇게 본다면 윤희라는 사람이야말로 거의 노자와 맞먹을 정도로 큰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공자에게 따끔한 충고를 가한 노자는 스스로 재능을 숨겨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썼다.
주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그곳을 떠나기 위해 함곡관 에 이르렀을 때, 국경을 수비하던 관리 윤희(尹喜)라는 사람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만약 그가 노자에게 글을 쓰도록 종용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가장 값진 한 권의 책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독일의 사상가 슈테릭히는 “세계에 단 세 권의 책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버려야 한다면, 《도덕경》이 그 세 권 가운데 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백육십 살 또는 이백 살을 살았다고도 전해지는데, 그 최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을...
유가는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인위적인 도덕에 의해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노자는 이러한 방법에 반대하고, 무위자연을 주장했다.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하기 마련이어서, 가령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구하려고 한다.
본디 하나인 이것들을 구분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삶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는 길은 본래부터 타고난 자연으로 돌아가 작위 없이 사는 것뿐이다.
유가에서는 인의니 예악이니 하여 어떤 규범과 덕목을 내세우지만, 노자는 모든 억지스러움을 버리고 차라리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노자는 정치론에서 유가의 대통일 국가라는 이상에 맞서며, ‘작은 나라와 적은 백성’(小國寡民)이라는 이상사회를 제시했다.
인위적인 도덕과 잡다한 지식에서 벗어나 소박하게 생활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며, 위정자는 백성들의 이러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무위의 정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큰 사상가들이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데 반해, 불행하게도 노자에게는 그 깊고 오묘한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만한 제자들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학설은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되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것이 무술이나 마법, 연금술이나 불로장수법과 같은 미신과 뒤섞여버린 탓에 노자 자신의 순수한 이론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위선 & 가식 을 버리라
뤄양(洛陽)을 떠날 무렵, 공자가 다시 노자를 찾아 작별 인사를 드리자 그는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고 한다.
“부자는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배웅하고, 선비는 말로써 사람을 배웅한다고 하오.
그런데 나는 돈이 없으므로 선비의 흉내를 내어 말로써 선물을 대신할까 하오. 총명한 사람이 자칫 죽을 고비에 이르게 되는 것은 남의 행동을 잘 비평하기 때문이오.
학식이 많은 사람이 자주 위험한 고비에 부딪치는 것은 남의 허물을 잘 지적하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자기의 주장을 함부로 내세워서는 안 되오!”
이 말을 듣고 돌아간 공자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새는 공중을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헤엄을 치며 짐승은 달린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는 활을 쏘아야 잡을 수가 있고, 물속을 헤엄치는 고기는 그물을 쳐야 잡을 수가 있고, 달리는 짐승은 덫을 놓아야 잡을 수가 있다.
용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구만 리 하늘로 오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만나본 노자는 바로 용이었다.”
과연 큰 도(大道)란 무엇일까? 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무위자연의 도다.
위대한 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인의가 생겨났고, 지혜가 나오고 나서 큰 거짓이 생겨났고, 집안이 불화하기 때문에 효와 자애가 강조되었으며, 나라가 혼란할 때 충신이 필요했다.
이처럼 유가에서 강조하는 덕들은 이미 그것들이 사라지고 없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애초부터 큰 도리를 굳게 잡아나갔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일을 꾸미려 하니 일이 꼬였던 것이고, 다시 그것을 억지로 고치려 하니 일이 더 얽히고설키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배경에서 노자는 유가에서 말하는 성스러움과 지혜와 인의를 오히려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그릇의 쓰임...
유가에서 말하는 도(道)란 인간의 윤리에 국한된 것이다.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도는 천지 만물, 모든 자연의 이법(理法)으로서 우주의 근본 원천을 의미한다.
도란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모든 법칙 중의 법칙이자 모든 척도 중의 척도다.
노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라고 말한다.
이 도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도 없다.
우리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도에는 어떠한 빛깔도, 어떠한 소리도, 어떠한 형체도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어떤 모양을 갖는 존재는 모두 도에서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도는 어떠한 시간적 · 공간적 한계도 갖지 않기 때문에 무극(無極)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무가 단순히 텅 비어 있는 공무(空無)인 것은 아니고, 도리어 모든 존재를 생겨나게 하는 무(無)라고 해야 할 것이다.
노자는 무의 효용성을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수레바퀴에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의 통에 모여 있긴 하지만 그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수레를 사용할 수 있으며,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 때 그 빈 곳이 있기 때문에 그릇을 쓸 수 있으며, 문과 창문을 뚫고 방을 만들되 그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방을 쓸 수 있다.
유(有)가 이용되는 까닭은 무가 작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굽은 나무가 제 수명을 누린다
공자는 “우리가 선에 대해서는 선으로 대하되, 악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정의로써 응징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에 반해 노자는 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악에 대해서까지 포용하기를 가르친다.
“적에게도 덕을 베풀라.
오직 다투지 않은 그것으로 인해 천하가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노자의 윤리가 갖는 특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노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유연성이다.
마치 부드러운 물이 견고한 바위를 뚫는 것처럼, 부드러움은 딱딱함을 이길 수 있다. 이처럼 도란 어떤 의미에서 물과 같다.
물은 모든 사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먼저 가려고 다투지 않으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물려 한다.
물과 같이, 모름지기 현자는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유익을 안겨주면서도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항상 겸손한 자세로 살아간다.
둘째, 소박함이다.
인간의 재치와 이기심 등 작위성을 멀리하고 무욕에 처하도록 가르치며, 물질적 재화에 대해서도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당부한다.
덕을 두터이 지니고 있는 사람은 갓난아기와 같아서 독 있는 벌레도 물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덤벼들지 않으며, 사나운 새도 채가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억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재앙에 맞닥뜨리게 마련이며, 마음이 기운을 부려 뭔가를 이뤄보려고 하는 사람은 억지스런 삶을 꾸려가기 십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왕성하게 번창하다 보면 곧 늙어 시들어버리기 마련인데, 이는 천하 만물의 도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셋째, 무위(無爲)의 실천이다.
여기에서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를 피하고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억지로 꾸며서 하는 행위는 오래가지 못하고 곧 그치게 마련이다.
“자기의 키를 커 보이게 하기 위해 발끝으로 꼿꼿이 선 사람은 오래 서 있지 못하고, 마음이 급하여 두 다리를 크게 벌려 걷는 사람은 멀리 가지 못하며, 스스로 나타내려는 사람은 도리어 드러나지 못한다.”라고 한다.
환경이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욕심대로 정권을 잡아보려 하거나 욕심껏 돈을 벌어보려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이 간단한 이치를 모르고 욕망대로 행하다가 망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러한 무위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노자는 먼저 우리가 분별지(分別知) 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좋은 것이라 여기고, 빈천굴욕을 나쁜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이것들은 본래 하나다.
동전의 양면과 마찬가지로, 복과 화는 우리가 늘 안고 가야 하는 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재앙은 복이 의지하는 바요, 복은 재앙이 깃드는 곳이다.
올바른 것이 다시 기이한 것이 되고, 길(吉)한 것이 다시 흉(凶)한 것으로 된다.
이처럼 화복은 본디 둘이 아니고 하나인데도, 사람들은 상대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재앙을 멀리하려 하고 복을 구하려 한다.
바로 여기로부터 모든 환란이 생겨난다.
굽은 나무가 제 수명을 누리고, 자벌레는 몸을 굽혔다가 펴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물은 파인 곳에 고이며, 옷은 닳아져야 새것을 입고, 욕심이 적어야 만족을 얻으며, 아는 것이 많으면 도리어 미혹에 빠진다.
가끔 우리가 보듯이, 크게 이룬 것(大成)은 모자란 것 같으나 그 쓰임새에 그침이 없고, 크게 찬 것은 빈 것 같으나 그 쓰임에 다함이 없다.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크게 교묘함은 서툰 것 같고, 크게 말을 잘함은 말더듬이 같다.
노자의 윤리는 무위자연에서 소박하고 유연하게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권한다.
노자의 사상
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런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백성의 눈높이에 ..
현자에게 요구되는 무위자연의 도는 정치가나 통치자에게도 요구되게 마련이다.
정치는 백성과 천하 만물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므로, 무위의 도덕정치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노자에 의하면, 정치가는 다변(多辯)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말에 실수가 있게 마련이고, 국민들이 식상해하고 피곤해한다.
통치자는 많은 법률을 만들 필요 없이 담담하게 스스로 덕을 펴나가기만 하면 된다.
정치가가 위선을 부리거나 힘으로 다스리려고 하면, 백성들이 그를 불신하고 경멸한다.
스스로 마음을 비우고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간다면 모두의 환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천하에 금기조항이 많을수록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들에게 편리한 기구가 많을수록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지며, 사람들의 재주가 많을수록 기이한 물건이 많이 나오고, 법령이 밝아질수록 도적도 많아진다.
이 모든 것이 억지로 백성을 다스리려 하는 데서 오는 폐단이..
현자를 특별히 대접하지 않아야만 백성들이 서로 다투지 않게 되고, 얻기 힘든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만 백성들이 도적질할 마음을 먹지 않게 되며, 욕심낼 만한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야만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지식 있고 지혜로운 자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하면 모두 학벌만 갖추려 할 것이고, 돈이 있건 없건 모든 국민이 법 앞에서 평등해야만 악착스럽게 돈을 벌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또한 사람의 탐심을 자극하지 않아야만 국민이 순박해진다.
어진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고집을 피우지 않고 백성들 편에 서서 그들의 눈높이와 마음에 맞도록 스스로 맞춰나가면 된다.
설령 백성들이 귀로 듣기 좋은 것, 눈으로 보기 좋은 것에 대해서만 욕심을 낸다 할지라도, 천진난만한 갓난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다스려나가야 한다.
성인은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데, 가령 백성들이 죽음을 중하게 여기고, 먹는 음식을 맛있게 여기며, 입는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고, 사는 거처를 평안하게 여기며, 행하는 풍습을 사랑하도록 하면 된다.
기괴하고 특별한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 가장 평범하고 상식적인 삶을 살도록 해주면 그만이다.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다른 나라를 부러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각주: 도가 및 도교의 비조(鼻祖)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도 있고,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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