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杜甫.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735년, 두보는 낙양으로 돌아와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2년 후, 두보는 북쪽으로 올라가 제(齊) 땅과 조(趙) 땅을 유람하면서 벗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고 사냥을 즐겼다. 명산대천을 두루 구경하면서 자연에 묻혀 있던 이 시기의 시에는 낭만주의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었다.
젊었을 때 두보는 이백(李白)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위대한 두 시인 이백과 두보는 744년에 낙양에서 만났다.
이백은 두보보다 열두 살이 더 많았다. 두보는 이백의 재능에 크게 탄복하면서 그와 더불어 하남, 산동 일대를 유람했다. 시구절 “술 취한 가을 밤 잠자리 같이하고, 해 뜨면 손잡고 행로를 같이하네”처럼 동일한 지향과 애호(愛好)로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친밀한 벗이 되었다.
두보는 젊었을 때부터 원대한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과거에서 여러 차례 낙방한 데다가 장안에 올라와 남에게 덧붙어서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 형편이 점점 나빠져서 나중에는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웠다.
"두보가 장안에서 기거한 10년 동안, 당나라는 번영의 길에서 급선회하여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따라서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 그리고 지배계급 내부의 모순이 더 심화되었다. 이에 두보는 유명한 시 「병거행(兵車行)」을 써서 통치계급의 잔혹함을 폭로했으며, 동시에 백성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드러냈다.
즐비한 전차 소리와 말발굽 소리 요란한데 사람들 모두 활을 메었네.
부모 처자가 달려나와 서로 보내니 흙먼지가 자욱해서 함양교가 보이지 않네.
옷을 잡아당기고 발을 구르며 길을 막고 서서 우니 통곡하는 소리가 똑바로 올라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중략)……
청해의 변두리에 예로부터 널려 있는 백골에는 옛 귀신 울음에 새 귀신의 울음이 더해지는데 흐린 날 내리는 궂은 빗소리 또한 처량하구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백골이 들판에 널려 있는 처참한 정경을 묘사한 이 시는 두보의 시 세계가 현실주의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정표적인 작품이다.
‘안사의 난’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반란군은 낙양과 도성 장안을 신속히 점령했다.
두보는 피난길에 올랐다가 불행하게도 반란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나라와 가정은 위기에 처하고 자신은 적의 포로가 된 이 비참한 상황은 두보로 하여금 정치성이 강한 시들을 쓰게 했다. 명시 「춘망(春望)」은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지은 시이다.
"나라는 잃었으나 강산만은 여전해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울창하네.
시국의 슬픔에 꽃들도 눈물 흘리고 이별의 한에 새들도 가슴 떨리네.
날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봉화에 집의 편지는 만금보다도 귀해지고
흰머리는 긁을수록 짧아지니 아예 비녀조차 꽂을 곳이 없어라."
757년 4월, 여덟 달 동안 적에게 사로잡혀 있던 두보는 끝내 장안을 빠져나왔다. 그때 두보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팔이 다 드러나는 찢어진 저고리에 발가락이 보이는 헌 신을 신고 숙종을 찾아갔다. 숙종은 그를 좌습유(左拾遺)로 임명했다.
두보는 재상 방관(房琯)을 구하기 위해 상주서를 올린 일로 인하여 숙종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화주(華州)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되었다.
두보는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오다가 백성들이 관가의 폭정으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며 겨우 목숨을 연명해 나가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격분한 두보는 관리들의 폭정을 폭로하고 백성들을 동정하는 시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 등을 연거푸 써냈는데 이 세 시를 약칭해서 ‘삼리(三吏)’라고 한다.
동쪽에서 동관으로 오는 도중에 신혼부부가 전란으로 헤어지고, 늙은 노인이 군대에 끌려가며,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인해 집을 잃고 길거리를 헤매는 등의 참상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연이어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 등을 썼는데 이 세 시를 약칭해서 ‘삼별(三別)’이라고 한다. ‘삼리’와 ‘삼별’은 사상성은 물론이거니와 예술적 성과에서도 당시 시가의 고봉을 이루어 민간에까지 널리 전해졌다.
두공부는 두보를 말한다. 두보가 지은 책으로, 여기에 명나라 왕세정(王世貞), 왕신중(王愼中),청나라 왕사정(王士禎) 등이 평을 달았다.
770년에 두보는 악양에서 홍수를 만나 하는 수 없이 역소(驛所)에 배를 대었는데 그때는 이미 식량이 바닥나 있었다.
며칠 후, 59세에 불과한 이 위대한 시인은 배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시신을 고향으로 가져가 장사지낼 돈이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빈소를 임시로 악양에 마련했다.
43년 후, 즉 813년에 그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두보의 시신을 언사(偃師)로 옮겨서 수양산 아래에 있는 두심언의 묘 곁에다 이장했다.
두보는 중국 리얼리즘 시의 대사(大師)로서 3천여 수의 시를 창작했다.
당시 사회의 상황을 진실하게 써낸 그의 시들은 당시 시대를 비추는 거울과 같아서 사람들은 그를 ‘시사(詩史)’라고도 불렀다.
두보는 병도 많았으나 열심히 공부하여 14~15세 때에 유명한 문사(文士)들과 수창(酬唱)을 할 수 있을 만큼 학문적인 기초를 닦았다. 20세 되던 해에는 집을 떠나 3~4년 동안 남으로 오(吳)·월(越)을 유람하며 역사 문물, 풍광에 심취하였다.
24세 때에는 낙양(洛陽)으로 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실의에 잠겨 산동(山東), 하남(河南) 일대를 장유(壯游)하였다. 이 시기 이백(李白), 고적(高適) 등과 같은 일류 시인들과 창화(唱和)하며 시교를 맺기도 하였다.
두보는 35세 되던 해인 천보(天寶) 5년(746)에 다시 장안으로 가 10년 가까이 곤궁한 생활을 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품은 뜻을 펼 수 없어 울적한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천보(天寶) 11년(752) 두보의 나이 42세 되던 해에 성대하게 제전(祭典)이 베풀어졌을 때 「삼대예부(三大禮賦)」를 지어 올려 본인의 가세(家世), 학문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고 등용을 희망하였다. 현종(玄宗)은 두보의 글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재상에게 그를 집현전으로 불러들여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다.
두보에게 하서현위(河西縣尉)를 제수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冑曹參軍 = 무기고 관리)으로 임명하였다. 두보는 장안의 10년 동안의 간고한 현실 생활의 체험을 통하여 「여인행(麗人行)」, 「병거행(兵車行)」, 「자경부봉선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詠懷五百字)」 등과 같은 사실주의적 시를 써 나갔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안사(安史)의 난은 찬란했던 당의 역사에 내리막길을 걷게 하였고, 두보 생활사에 있어서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였다.
천보 15년(756) 6월에 동관(潼關)을 지키지 못하여 장안이 함락되자 두보는 봉선(奉先)을 떠나 부주(鄜州 = 현 섬서(陝西) 부현(鄜縣))로 향하였다. 섬서(陝西), 하남(河南), 산서(山西) 등이 전화에 휘말려들었을 때 숙종(肅宗)이 감숙(甘肅) 영무(靈武)에서 즉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주에서 영무로 달려가는 도중 적군에게 사로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춘망(春望)」, 「월야(月夜)」 등은 장안에 감금되었을 때에 지은 시이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지 2년째 되던 해에도 두보는 장안에 머물러 있었는데, 「춘망(春望)」, 「애강두(哀江頭)」, 「애왕손(哀王孫)」 등의 시를 통하여 국가, 백성들의 고통을 여실히 묘사하였다. 「춘망(春望)」을 예로 든다.
두보는 지덕 2년(757) 4월에 장안을 탈출하여 봉상(鳳翔)으로 가 숙종을 배알하였다. 숙종은 두보를 좌습유(左拾遺, 황제 명령의 타당성을 검토하여 간하는 벼슬)에 임명하였으나 친구 방관(房琯)의 죄를 옹호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처자가 있는 부주 강촌(羌村)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의 비참한 정경이 「강촌(羌村)」, 「북정(北征)」, 「삼리(三吏)」, 「삼별(三別)」 등에 잘 묘사되어 있다.
건원(乾元) 원년(元年, 758)에 사사명(史思明)의 변란을 피하여 장안을 떠나 산물이 풍부한 사천(四川)의 성도(成都)를 찾아갔다.
성도의 생활은 엄무(嚴武), 배면(裴冕), 고적(高適) 등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안정적이였다. 성도 서쪽 교외의 완화계(浣花溪)에 초당(草堂)을 짓고 야로(野老)들과 교유하였다.
대종(代宗) 광덕(廣德) 2년(764)에는 서천병마사(西川兵馬使) 서지도(徐知道)의 난을 진압한 뒤, 두보는 절도참모(節度參謀) 겸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의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뒤에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년 뒤에 엄무가 죽자 벼슬을 버리고 다시 호북(湖北), 호남(湖南)의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초옥위추풍소파가(草屋爲秋風所破歌)」, 「문관군수하남하북(聞官軍收河南河北)」, 「우정오랑(又呈吳郞)」, 「제장(諸將)」, 「추흥(秋興)」 등의 시를 지었다.
두보는 형양을 떠나 강릉(江陵), 공안(公安)을 거처 악주(岳州 = 호남성(湖南省) 악양(岳陽))에 이르러 얼마동안 머물렀다. 이 때에 「등악양루(登岳陽樓)」란 시를 지었다.
악양에서도 살 수 없었던 두보는 대력(大曆) 5년(770)에 뇌양(耒陽 = 호남(湖南) 형양동남(衡陽東南))으로 향하였으나 상강(湘江)에 큰물이 져 강상을 오락가락하다가 배 안에 병져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백(李白)을 '시선(詩仙)', 왕유(王維)를 '시불(詩佛)'이라 하듯 두보(杜甫)를 '시성(詩聖)'이라 하는데, 혼란했던 역사의 현실적인 경험을 시로 썼기 때문에 '시사(詩史)'라고 부르기도 했다.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두보초당(杜甫草堂)
두보초당이 그 당시 얼마만한 규모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의 초당은 동쪽의 범인사와 서쪽의 매원을 합친 총 면적 20만 제곱미터가 넘는 대규모다.
초당 안을 매화 · 대나무 · 녹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고전적인 원림 건축은 문화적 색채가 농후하여 청두를 찾는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감상하는 곳이 되고 있다.
초당의 원림은 아주 조용하고 그윽하다. 시내가 구불구불 흐르고 다리와 정자가 서로 마주보며 손짓한다. 4계절 내내 꽃과 나무가 서로 어울려 사람들을 끈다. 현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두보는 이곳에서 햇수로 4년을 머물며 울분을 달랬고, 그 울분을 240여 수의 주옥과 같은 사실주의 시작으로 승화시켰다. 훗날 사람들이 이런 두보를 흠모하여 북송 때부터 초당 유지에 사당을 세워 그의 넋을 기렸다.
초당 건축은 정문에서 시작하여 차례로 대해(大廨) · 시사당(詩史堂) · 시문(柴門) · 공부사(工部祠)로 이어진다. 그 중 대해와 시문은 두보의 시에도 나오는 초당 원래의 건축이고, 시사당과 공부사는 훗날 두보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시사당 한가운데에 두보의 입상이 있고 안에는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주련· 현판이 진열되어 있다. 공부사는 그가 한 때 검교공부원외랑이란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사당 안에는 두보 초상화가 있고, 이와 함께 두시의 정신을 이어받은 육유, 황정견이 함께 모셔져 있다. 실내에 벽에는 비각같은 문물들이 있다.
공부사 왼쪽에는 ‘소릉초당(少陵草堂)’이란 편액이 걸린 비각이 있다. 두보의 별명이 두소릉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는데, 네 글자는 청나라 공친왕 혁흔의 필체다.
1985년 5월 두보초당 개관 30주년을 축하할 무렵 두보초당 박물관이 정식으로 섰다. 박물관 안에는 3만여 종의 책과 2천여 건의 문물이 소장되어 있다.
문물 중에는 두보의 시를 책으로 펴낸 송 · 원 · 명 · 청 역대의 정각본· 영인본· 수초본 및 근현대의 활자본이 포함되어 있다. 또 그 중에 15종의 문자로 된 번역본과 조선 · 일본에서 출판한 한자본 120여 종도 보인다.
당의 역사
당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당시(唐詩)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위대한 시인 절반이 당나라 때 탄생했다.
이 시대의 시가를 전적으로 ‘당시’라 부르는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이름이나 성이 남아 있는 당대의 시인만 2,300명에 이르고 시는 48,900수 이상이라고 한다.
위로는 제왕에서 아래로 천민 · 기생 · 노비에 이르기까지 너나할 것 없이 성숙한 작품을 남겼다. 시가는 민족 특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형식이 되었다. 당시는 20세기 초까지 천 년 넘게 영향을 미쳤다.
중국인은 걸출한 당대 시인들의 이름을 줄줄 꿴다. 그 중에서 이백은 변방인 쇄엽(碎葉, 현 키르기스스탄 토크막)에서 출생하여 술의 고장 익주에서 성장한 낭만적 문인이다. 그는 풍부하고 화려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시는 현실과 관계된 것이 아주 적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중시하는 권력과 재물을 뜬구름처럼 여겼다.
평생 공직을 맡지 않았고, 시가에만 바쳤다. 그의 방대하고 초월적인 시적 경지는 그에게 ‘시선(詩仙)’이란 아름다운 호칭을 선사했을 뿐만 아니라, 성당(盛唐)시대의 힘찬 청춘을 대표하면서 후대에게 이 시대의 고무된 정신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와 나란히 거론되는 ‘시성(詩聖)’ 두보는 이백보다 11세 아래지만 또 다른 시대의 대변인이었다.
두보는 자리랄 것도 없는 말단 관리를 지냈고, 중년에는 안사의 난을 잔혹하게 치렀다.
생사의 갈림길을 강요받는 혼란 속에서 그는 예술의 눈빛을 냉혹한 현실로 돌렸다. 그는 호화와 사치의 극을 달리는 권세가와 귀족, 온갖 억압과 기만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삶에 동시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소리없이 흐느꼈다.
그는 성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시가는 글자 하나하나를 다듬고 또 다듬어 구절을 응축하고 대구와 억양을 공들여 맞춤으로써 중국 시가의 율격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다른 시인으로 잠삼이 있다. 영웅적 기개로 충만한 그의 시는 당 왕조 전기에 강토를 개척하는 전투에서 나왔다. 그는 황량한 사막에서 국토를 지키는 전사를 노래했고, 그 비장한 감정은 전쟁문학이 한참 모자랐던 중국 시단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래서 이 변방 시인을 ‘시웅(詩雄)’이라 부른다.
시가는 당 왕조 시대정신의 직접적인 기록이다. 이백의 호방함, 잠삼의 비장함, 두보의 냉담함에서 이후 이상은의 부드럽고 섬세함, 가도의 괴이함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당 왕조 흥망성쇠의 역사를 반영함으로써 사람들 마음에 깊이깊이 새겨지고 큰 영향을 남겼다.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시
중국의 명주 중 하나인 분주(汾酒)의 술병에는 "주막이 어디에 있는가 물으니 / 목동은 저 멀리 살구나무 마을을 가리키네"라는 두목(杜牧)1)의 시구가 쓰여 있다. 이 광고 문구는 술의 산지가 산서성(山西省) 분양현(汾陽縣) 행화촌(杏花村)이라 두목 시구와 딱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살구나무 우거진 곳에 술 익는 내음을 상상하게 하여 마시기도 전에 이미 한가롭고 아름다운 풍경에서 풍겨나오는 향기에 푹 빠지게 하는 묘미가 있어 분주의 명성을 배가시키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고 자극적인 것을 기대하는 이 시대에 긴 호흡을 필요로 하고 잔잔한 여운을 느껴야 하는 시는 더 이상 읽히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인은 천 년 전의 시구를 글쓰기의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광고 문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는 수천 년간의 역사를 자랑하며 현재까지도 함께 호흡하고 있는 시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에서 근원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은 스스로 '시의 나라' 후손임을 자처하는데, 한자의 상형문자적 특성이 이미지 전달을 위주로 하는 시와 잘 부합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되지만,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간결하고도 인상 깊게 표현할 수 있는 문학 장르가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의 『시경(詩經)』부터 시작된 중국 시의 역사는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웠다. 한(漢)나라 때까지의 시가민가로서 백성들의 공통적인 감정을 노래한 것이었다면, 한나라 말엽부터는 시인의 개인적인 정서를 읊기 시작하였고, 당대에 이르러서는 시를 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적 장치, 시인의 비약적 증가에 힘입어 시는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또한 질적으로도 근체시(近體詩)와 고체시(古體詩)2) 스타일이 완성되어 성숙해졌으며 다양한 수법과 세련된 언어로 인간의 수많은 감정과 느낌을 전달하고 있어 독특한 맛을 지닌 '당시(唐詩)'가 형성될 수 있었다.
중국의 시가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면 거기에 우뚝 선 시인으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꼽을 수 있다. 그 두 사람은 11살 터울로 나이차는 별로 나지 않았으나 당시(唐詩)의 서로 다른 두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이백이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전의 화려했던 시절을 재현했다면 두보는 난리 이후의 혼란스럽고 강퍅한 시대에 주목하였다. 이백은 시선(詩仙)이라는 별칭답게 맑은 물에 피어난 연꽃처럼 청순한 자연미를 환상적으로 표현하였다면, 두보는 시성(詩聖)으로서 인생과 사회를 비추기 위한 거울을 애써 닦고 단련하여 현실 지향적 성향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예부터 쉬우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이백의 시는 신선의 경지와 같아 쉽게 닿을 수 없다고 여겼으나, 엄격하면서도 치밀한 모색에 의한 두보의 시는 열심히 공부해서 갈고 닦으면 결국 이를 수 있는 경지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시인들이 이백보다는 두보를 모방, 추종하였으므로 한자 문화권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두보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것은 그가 대단한 천재여서도 아니고, 화려한 경력을 가져서도 아니었다. 아마도 갈등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면서 그것을 나름대로 극복하려 무단히 애썼던 것, 그것이 모든 이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오웬(Stephen Owen) 교수는 두보에게 '대립하는 양자'가 있다고 했는데, 사실 두보는 하고 싶어 했고 해야 한다고 믿었던 당위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의 간극 속에서 항상 갈등의 불씨를 품고 있었다. 인간이란 시시포스의 신화에서처럼 무거운 돌을 짊어져야 하는 고통 받는 존재이듯, 두보도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현실의 무게에 억눌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형벌로 생각하지 않았고 현실의 돌을 들어 올리면서 이상을 꿈꾸며 동경하였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엇나가기만 하였고, 그 부조화 때문에 희망과 좌절을 오갔으며 유가와 도가, 불가가 복잡하게 얽힌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릎이 꺾였을 갈등 속에서 그는 시를 대안으로 삼아 끊임없이 시적인 아름다움을 탐구하였고, 놀랄 만한 작품을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결국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
두보는, 몰락한 세족 출신이 대개 그렇듯 진(晉)나라 명장이었던 13대 조부 두예(杜預)와 당나라 초엽 문명을 날렸던 조부 두심언(杜審言)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자신도 언젠가 관직에 나아가 그들처럼 정치적 이상을 펴리라고 다짐했었다. 청년 시절 두보는 전국을 답사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유명 인사들과 시문을 논하며 꿈을 다져 나갔기 때문에 스스로를 반고(班固)와 양웅(揚雄)에 견줄 정도로 자부심이 강하였다. 과거에 두 차례 낙방했어도 그다지 상심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의 안정과 번영은 두보의 이러한 이상 지향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다. 그는 시를 통해, 태산에 올라 뭇 산들이 얼마나 작은지를 바라보겠다며 큰소리를 치거나, 임금을 요와 순 위에 올려놓겠다고 다짐하면서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고자 자존심의 날을 세웠던 것이다.
두보는 입신출세에 대한 이상을 줄곧 견지하고 있어서 가정 형편이 악화되어 생계에 위협을 받자 약초를 재배하여 팔면서 유력자에게 시를 지어 추천을 바라기도 하였고, 조정에 직접 문장을 지어 올려 보기도 하였다.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절망 속에서 이 생활을 청산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가 다시 관직을 구하고 다시 실의를 반복하는,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이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구직생활이 지속되었다. 결국 나이 44세에 간신히 무기를 관리하는 낮은 관직을 얻게 되었는데, 두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자리였으나 아들이 굶어 죽는 판에 생활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여전히 그의 편이 아니었다.
755년에 터진 안록산의 난은 그의 모든 기대를 허물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이 난리는 당 왕조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두보 개인의 인생도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반란군의 포로로 붙잡힌 두보는 사선을 뚫고 전란 중에 왕이 된 숙종(肅宗)에게로 달려갔다. 새 군주에 대한 기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온 보람이 있었는지 임금께 직간을 임무로 하는 좌습유(左拾遺)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관직은 그에게 맞지 않은 옷이었다. 모함에 빠진 친구를 위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고 만 것이다. 씁쓸한 두보는 장안(長安)을 빠져나오며 이렇게 읊조렸다.
이 길로 지난날 임금께 돌아갈 때,
서쪽 근교에는 오랑캐가 한창 들끓었지.
···
재주도 없이 날로 늙어 쇠약해짐에
말 멈추고 임금 계신 궁궐 바라다본다.
-「지덕 2년, 내가 장안의 금광문(金光門)에서 나와 봉상으로 돌아갔었다. 건원 연간 초에 좌습유(左拾遺)에서 화주연(華州掾)으로 이직하게 되어 친구들과 이별하고는 이 문으로 나오니 옛일에 슬프기만 하구나」 중에서.
평소의 꿈을 이루고자 목숨을 걸고 장안을 떠나 새 군주를 찾은지 1년 만에 다시 실의한 채 장안을 떠나는 시인의 쓸쓸한 모습이 겹쳐진다. 이후로 죽을 때까지 두보의 삶은 부평초 같이 떠도는 인생이어서 불안한 경계인(境界人)의 모습 그것이었다. 그는 「입추가 지난 후」라는 시에서, "평생에 홀로 원하는 바 있었으나 / 슬프게도 나이는 벌써 반백이구나. / 관직을 버림은 역시 사람 때문이니 / 어떤 일로 마음이 육체의 노예가 되리오?"3)라며 조정에 가득한 소인배 때문에 이상을 펴보지도 못한 채 실의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였다. 이때부터 두보의 정치적 포부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그래서 관직을 얻어 이상을 펴보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유랑을 하며 고난의 객지생활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보의 시야는 더욱 확대되었다. 이전에도 백성의 고초에 대해 무심하지는 않았지만, 여정 중에 백성이 겪는 참혹한 현실을 목도한 후 「삼리(三吏)」, 「삼별(三別)」 등을 창작하여 개인적 고통을 전달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성들이 겪었던 고난의 피와 눈물을 생생하게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을 펴보지도 못한 채 무릎이 꺾였던 두보는 시인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진지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화주(華州)에서 진주(秦州)로, 다시 동곡(同谷)을 유랑하면서 민중의 곤궁한 삶의 현장과 애환을 하나하나 시에 담았고, 성도(成都)에 정착하여 오랜만에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 동화된 맑고 조용한 작품을 창작하면서도 세상의 고난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 예로 「띠집(茅屋)이 가을바람에 부서지다」의 후반부를 보자.
지붕 새어 침상 머리 마른 곳 없고
빗발은 삼 줄기 같이 그칠 줄 모른다.
난리 겪으며 잠은 적어졌지만
젖은 채로 긴 밤 어찌 새우리오?
어찌하면 천만 칸 큰 집 지어
천하의 가난뱅이 크게 감싸 함께 환한 얼굴 되어서
비바람에도 산처럼 태연할 수 있을까?
아아!
언제든 눈앞에 우뚝 선 그런 집 보이면
내 오두막 부서져 얼어 죽는다 해도 족하리라!4)
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가을에 태풍이 불 적마다 얼마나 마음 졸이는가? 지붕이 날아가고 가재도구가 햇볕 아래 나뒹구는 속수무책의 상황을 보면 손이라도 잡아주며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게다. 두보 역시 오랜 방랑 끝에 초당(草堂)을 짓고 잠시나마 한숨 돌리려 하였지만, 졸지에 재난을 당한 백성들을 보면서 함께 아파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지만 자신의 생계조차도 해결 못하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나서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곳곳에서 전란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두보는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없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참혹상과 백성이 받는 고통을 어느 역사서보다 생생하게 기록하여 독자의 심금을 울렸으므로 그에게는 '시사(詩史)'라는 칭호가 남게 되었다. 성도에서 운안(雲安), 기주(夔州), 다시 강수(江水)와 상수(湘水)로 떠돌면서 시 창작에 더욱 몰두하는데, 관직 생활에 대한 미련보다는 고단한 삶을 사는 백성들에 대한 동정, 제갈량(諸葛亮)과 같은 위정자의 부재에 관한 작품을 써, 여전히 허망해 보이는 이상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한 채 곤궁과 병에 고통 받는 인간 두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그의 시에서는, 자신을 '버려진 물건'이라며 자조하거나, 자부심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다가도 때로는 지혜로운 늙은 말로 비유하는 등 자탄과 함께 아직은 웅지를 품고 있음을 과시하였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흰 구름, 푸른 산이 만여 리인데, / 줄곧 북쪽으로 근심스레 보는 것은 장안일 뿐"5)이라며 죽을 때까지 조국의 현실과 백성들의 안위를 근심하였다.
두보의 생애에서 실제로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3년도 되지 못하였다. 그것도 자신의 마음에 썩 내키지 않은 직위라 불안하고 답답한 생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 생애를 걸쳐 끊임없이 제세(濟世)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의 고통에 대해 손 쓸 수 없는 무능을 자조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하여 위정자들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려 하였다. 이상을 펼 수도, 그렇다고 현실을 간과할 수도 없었던 시인 두보는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고통과 인내를 시화했던 것이다.
유ㆍ불ㆍ도(儒佛道)의 혼합
당나라 시대는 사상이 비교적 개방적인 시대였다. 통치자들이 유교와 도교, 불교를 모두 중시하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당시의 문인들에게는 이 세 요소가 복합적으로 보인다. 두보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유가적 사고방식을, 개인의 행위양식은 도가, 불가적인 감정의 흐름에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가톨릭대학의 원종례 교수는, 두보는 복합적 인격이 극단적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에 유ㆍ불ㆍ도가 서로 보완적이기 보다는 갈등관계를 형성했다고 보았다. 그의 복합적 인격이란 항상 이상과 현실의 경계 위에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어디로 향할지 불안해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두보는 스스로 밝힌 대로 유생(儒生)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유가적 열망, 즉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길만이 참된 것이라는 믿음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는 갖가지 좌절을 맛본 뒤에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이상의 목소리와는 달리 어쩔 수 없이 은둔의 길을 택해야만 했고, 때로는 스스로도 강렬히 은거를 지향했기 때문에 모순과 충돌 속에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은거의 뜻을 두고
세월 보내려던 뜻 없었던 것도 아니나,
생전에 요순과 같은 임금 만났으니
차마 길게 떠나지 못하겠구나.
지금의 조정은 잘 갖추어져 있으니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있으랴?
해바라기는 해를 향해 기울어지는 것,
만물의 성질은 정말 바꾸기 어려운 법이네.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면서」 중에서
과감히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갈등을 하면서도 결국 관직에 대한 의지는 앙금처럼 남아 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관직에서 떠나 유랑하는 중에도 여전히 현실과 중원의 소식에 귀 기울이면서 한편으로는 도가적 성향을 지닌 인사들과 자주 어울렸고 함께 단사나 영지 등 장생불로 약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불교의 사찰도 유람하고 불법에 대한 강의도 들었으며 스님들과도 교류를 하는 등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고뇌와 모순이 없는 이상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심리 또한 있었던 것이다. 유가적 이상에 대한 개인적 욕망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고통의 해소를 위해 도가와 불가에 의지해보려 했지만, 여기서 궁극적인 해답을 얻지는 못하였다. 결국 그에게 정신적 탈출구는 시의 세계였다.
갈등의 극복
평생 동안 이상을 지향하면서 살았던 두보는 안록산의 난을 기점으로 다소 변화된 양상을 보였다. 어린 시절의 생각은, 관직에 나아가 뜻을 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여 입신양명하리라는 다소 추상적이지만 외향적인 것이었다.
후반기에는 더 이상 관직 생활이 자신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히 좌절된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후 이상과 포부가 점차 내면화되고 심화되었던 것이다.
화주(華州)로 좌천된 이후 그는 관념의 정치와 실제의 정치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그 실제의 정치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추구해왔던 삶의 진실을 도저히 포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내면화하고 시로 토로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두보의 시 가운데 90% 이상이 난리 이후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피 흐르는 대지를 응시하면서 쇠망해가는 시대, 내심의 갈등과 비애를 충실히 묘사해 내고자 하였다.
때로는 백성을 착취하는 위정자들을 폭로했고 전쟁에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에 동정하였으며 그들의 올바른 정치에 대한 염원을 대변해주었다.
찬란했던 당(唐) 제국이 하루아침에 쇠망하게 된 전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권력을 향한 싸움이 자신을 비롯한 백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등 역사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정치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시로써 표현했던 것이다.
가시덤불 덮인 고향, 승냥이와 호랑이 같은 관리들 때문에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에게 주목하면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없음을 자책하며 잠 못 이루었던 두보는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때로는 사람 일은 그저 그런대로 놓아두자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허무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마음속의 갈등과 중압감은 지속되었다.
정치와 역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담은 개인적 고난과 맞물려 시에서 불안한 정서와 괴로움으로 나타났다.
두보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높은 데 올라」는 늦가을이 주는 중압감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바람 급하고 하늘 높은데 슬픈 잔나비 울음, 물은 맑고 모래 흰데 새는 선회한다.
가없는 낙엽이 우수수 지고 끝없는 장강은 도도히 흘러온다.
만리타향에서 가을 슬퍼하며 늘 떠도는 신세라, 평생 병 많은 몸으로 홀로 누대에 오른다.
어려움 속에 서리 앉은 머리털 괴롭고 한스러운데 지쳐 쓰러져 탁주도 이제 끊는다."
갈등과 좌절을 시로 승화해보려 하지만 결국 견딜 수 없는 비애를 안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시인의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현실에서 성취를 이루지 못한 점은 그로 하여금 사회의 어두운 면에 눈을 돌리게 한 동시에 시 자체의 예술성에 집착하게 했다.
무겁고 침울한 내용들을 가장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형식과 치밀한 기교로 드러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원래부터 시를 가업이라 여기며 놀라운 시구를 얻기 위해 부단히 애쓴데다 전대 시인들의 성과를 모두 흡수, 집대성하였으므로 자기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일찍이 중국의 어떤 학자는 위의 제5, 6구에서 무려 여덟 가지의 의미를 찾아냈는데, 두보의 시에서 이런 경우는 드물지 않다.
시 한 구, 글자 하나가 치밀한 계산 아래 창작되었기 때문에 글자 한 자라도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된다. 필자는 대학원 시절 수업 중에 두보의 시 한 편을 한시간 내내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두고두고 감탄한 적이 있었고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기교에 머리가 쭈뼛했던 적도 있었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개부(開府) 가서한(哥舒翰)께 드림」 같은 장편 배율(排律)은 첫 두 구와 마지막 두 구를 제외하고 모두 대구를 써야하는 까다로운 형식인데, 두보는 자신을 추천해줄 가서한을 송찬하면서도 기막힌 대구를 운용하여 은근히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었다.
시를 바치는 대상을 높이면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어 추천을 호소하는 두 가지 목적을 솜씨 있게 잘 처리하였는데, 그의 이와 같이 치밀하고 다양하며 조직적인 시상(詩想) 배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것이어서 강단의 선생님이 각 시구의 연결고리들을 풀어서 해석하실 때마다 우리들은 놀라움에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참으로 두보의 시는 이른바 아는 만큼 보이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체시와 근체시를 완성시켰고, 치밀한 구상과 절제된 언어로서 시어를 정련하였으며 각고의 노력을 들여 누구보다도 정교한 시를 창작하였다.
두보는 현실과의 갈등을 예술성 깊은 시로 승화 시킬 수 있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중당(中唐) 이후 지금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으며 수많은 시인들의 시적 스승이 될 수 있었다.
두보는 생전에 높은 명성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번황(樊晃)이 『두공부소집(杜工部小集)』을 엮어낸 이래 수많은 판본과 주석서들이 나왔다. 청(淸)나라 때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注)』, 포기룡(浦起龍)의 『독두심해(讀杜心解)』, 두양륜(杜楊倫)의 『두시경전(杜詩鏡銓)』 등이 중요한 것으로 손꼽히며, 그중에서도 구조오의 주(注)는 두보 시 주석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성종 12년(1481) 유윤겸(柳允謙) 등이 두보의 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지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한자 문화권에 있어서 두보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겠다.
최근 우리나라의 중국 문학자 몇몇이 두보의 시를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현재 152수의 시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두보의 작품뿐 아니라 대표적인 주석서들의 주석도 완역하고 있어 작업이 더디긴 하지만 『두시언해』 이후 최대의 역작이 되리라 믿는다.
감탄할 만큼 기발한 시어나 재기가 반짝이는 시적 장치뿐이었다면 그가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독자의 마음속에 자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보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까지 의미가 있는 것은 '시성'이라는 그의 별칭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 인간 두보의 진실한 감정과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내었다는 점이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을 느끼게 한다.
소망과 기대가 꺾였을 때의 굴욕과 억울함, 가난에 식구들이 흩어지고 자식까지 잃어야만 했을 때의 가장으로서의 무력감과 비애, 함께 고통 받는 백성들에 대한 애정과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 세상 뿐 아니라 가족들에게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허탈함과 자괴감 등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 그의 인생에 대한 솔직함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
우리는 시를 읽으면서 이런 질문들을 한다. 왜 하필 시인가? 시는 왜 쓰여지고 읽혀지는가? 시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 시인이 남긴 고통의 언어를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문학은 도대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런 근원적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는 두보의 작품을 통해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의 고통과 좌절,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시로서 승화시키려는 의지에 감동한다. 시의 예술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많은 독서와 습작, 각고의 노력을 통해 새로운 시적 영역을 개척하였고 누구보다 뛰어난 예술성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이 모여 인생을 이루는 우리 같은 보통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다.
생각해볼 문제'
두보 시의 대표적인 풍격은?
두보의 시는 상당히 다양한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전형적 풍격이라면 대개 '침울돈좌(沈鬱頓挫)'를 꼽는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침울은 비분의 정서와 결합되어 있으며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무겁고 충실한 내용을 가리킨다. 그리고 돈좌는 내면의 미처 분출되지 못한 감정을 풀어내기 위해 굴곡을 두고 대비를 하며 비장한 느낌을 주게 하는 형식적인 특징을 말한다.
두보의 현실비판적 정신은 후대 어떤 시인들에게 계승되었나?
당나라 때의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稹)을 비롯해서 송나라 때의 애국시인 육유(陸游), 문천상(文天祥)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 문인들은 두보의 작품을 어떤 경로로 읽었을까?
고려 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 흔히 『두시언해(杜詩諺解)』라고 한다.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보의 시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두목(803~852)은 자가 목지(牧之)이고 828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까지 지냈다. 향락적인 도시의 풍류를 좋아하여 작은 예절에 구애되지 않았던 그는 화려하고 염정적(艶情的)인 색채가 짙은 시를 많이 써서 특별한 경지를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두보(杜甫)와 구별하여 '소두(少杜)'라고 불렀다.
고체시는 근체시 형성 이전의 시로서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이다. 반면에 근체시는 성운(聲韻)의 조화와 형식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추구한다.
근체시는 위ㆍ진(魏晉)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발달한 오ㆍ칠언고시(五七言古詩)를 바탕으로 하여 당(唐)나라 때에 완성되었는데, 자구법(字句法), 평측(平仄), 대우(對偶), 용운(用韻) 등에서 엄격한 규정이 있다,
두보
두 보(杜甫, 712∼770)는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이백(李白)과 함께 중국 시단을 대표하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시인이다. 그는 본래 유가(儒家)로서 정치에 몸담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결국 시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두보가 처한 시대는 당나라가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다가 안사의 난으로 제국의 붕괴 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그의 생애는 크게 보아 755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전·후반으로 양분된다. 안사의 난 이전, 그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아 착실히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하였다.
735년 진사 시험의 낙제는 그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재차 유람에 나서는 한편 이백, 고적(高適)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746년 이후 두보는 거처를 장안으로 옮겨와 고위 관리에게 벼슬을 구하는 간알시(干謁詩)를 써서 보내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생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두보는 점차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궁핍한 삶에 대하여 절감하기 시작했다.
755년은 그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해였다. 그해 10월, 그는 10년 노력의 결과로 무기의 출납을 관리하는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曹參軍)이라는 미미한 벼슬을 받고 스스로 낭패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당 왕조를 거의 멸망시킬 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던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이후 두보의 삶은 전란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전개된다.
두보는 잠시 장안 근처 부주에 떨어져 살던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어린 아들이 먹지 못해 요절한 사실을 알고 참담한 마음으로 장편시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며 회포를 읊어(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남겼다. 벼슬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궁핍한 처지를 그렸으며 총체적인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했다.
이후 두보의 삶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다. 전란의 와중에 현종(玄宗)은 사천으로 피난 가고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임시로 즉위한 사실을 알고 두보는 이를 경하하기 위해 영무로 가던 중 반군에 붙잡혀 장안으로 호송되어 얼마간 억류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봄의 전망(春望)』을 썼다. 757년 2월, 숙종이 행재소를 봉상(鳳翔)으로 옮겼을 때 두보는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을 배알하여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받았다.
참고"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formal and content characteristics of various Du-fu chronology as well as the literary meaning of the Du-fu yearbooks, which were produced from the Song dynasty to the Qing dynasty. Among the Du-fu annals that have been reported so far, there are various types of anniversaries, such as the chronology of the time when the duo lived and the chronology of the tabular annual report that clearly shows the biographies through the table, It can be seen that there are various types of annuals such as the one - year annual report on the works left by Du-fu. In particular, in the process, the annals of both sides of the the qing dynasty have been recognized as separate works of their own, but this study has confirmed that they quoted the annals of the main school ages as they are. In addition, I have examined the methods of tracking the biographies of their bios based on existing biographies by comparing and analyzing biographical biographical information described in each annals. In particular, he wrote his works in the form of a diary. In the making of the annals, the composition of the biographies through these two works, the construction of a chronology by revising and reviewing the records described in the history books, And it is confirmed that the annuals are produced through the reconstruction process of the biweekly biography through the confirmation with the characters like Li-bai, Gu-shi, Yan-mu. As I have already pointed out in various research results, the production of the annals is a methodical attempt to implement the `acquaintance theory` and the `reverse order`. However, the production of the annals was not merely to identify the activities of the duo, but was an analytical attempt to grasp the overall flow and contents of the work. In other words, the production of such an annals can be said to have a value in that it is a way of exchanging writers and emotions through the reader`s experience not the situation at the time, and the discovery of the remains, The production of annals was an interpretive attempt to read individual works in a context. Until now, the annals were merely ancillary means of decorating the front of the literary works, but in fact, the annual memorandum contains an in-depth understanding of the literary man, his own interpretation, and consideration of the times when the writer lived. It is worthy of all that the wide knowledge is 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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