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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수학, 과학(학교).

Ewha Womans University, 梨花女子大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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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wha Womans University校.


이화여자대학교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대학으로 설립되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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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5월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의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서울 정동의 자택에서 한 명의 학생으로 수업을 개시한 것이 시초다. 


1886년 11월 서울 정동에 건평 200평에 이르는 한식 기와집을 건축했는데, 이것이 이화 교사 건축의 시작이다. 

이듬해 1887년 2월 고종황제가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 

이화()라는 명칭은 당시 학당 근처에 흐드러지게 피던 배꽃의 이름을 땄다는 설과 '이화정'이라는 정자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912년 보통과, 고등과, 중등과 및 대학과를 설치하였다.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고 문과와 음악과를 신설하였다. 

1935년 신촌으로 캠퍼스를 이전하여 5만 5천 평의 대지에 본관, 음악관, 중강당, 체육관을 지었다. 

1943년 재단법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격하된 뒤, 1945년에는 ‘이화’라는 이름이 민족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는 이유로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강제 변경되었다.

해방 이후 1946년 8월 이화여자대학교로 변경 설립한 뒤 초대 총장에 김활란() 박사가 취임하였다. 

1954년 의약대학을 의과대학, 약학대학으로 분리하였다. 

1960년 예술대학 음악부를 음악대학으로, 미술학부를 미술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76년에는 졸업논문제도를 필수화하였다. 

1988년 학사경고제도와 학사제적제도를 폐지하고, 졸업인정 최저성적점제도를 신설하였다. 

1993년 의과대학 부속 목동병원을 개원했다. 

1997년 국내 유일의 자연사박물관과 세계최초의 여자 공과대학 건물인 공학관을 개관하였다.

2006년 5월 이화학당 한옥교사를 복원한 이화역사관이 완공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이화·삼성 국제기숙사, 이화·알프스 어린이관, 대학원기숙사를 완공했다. 

2008년 4월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지하캠퍼스인 이화캠퍼스복합단지를 완공하고, 8월에는 스크랜튼대학, 9월에는 법학전문대학원과 TESOL대학원을 신설했다. 

2011년 원격평생교육원을 신설했다. 

2012년 2월 제2국제기숙사, 5월에는 종합과학관 현대자동차동이 완공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본부소속 연구기관으로 세포항상성연구센터를 신설했다.

부속기관으로 이화학술원, 자연사박물관, 이화역사관, R&D혁신단, 국제하계대학, 이화리더십개발원, 영재교육원, 국제회의센터, 1700명을 수용하는 기숙사 등 30개 기관이 있고, 연구기관으로는 한국문화연구원, 한국여성연구원, 패션디자인연구소, 분자생명과학기술원, 양자메탈물질연구센터, 색채디자인연구소, 의과학연구소 등 68개의 연구기관이 있다.

부속·병설학교로 부속유치원, 부속초등학교, 부속이화금란중학교, 부속이화금란고등학교, 병설영란여자중학교, 병설미디어고등학교가 있다. 

해외 52개국 409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교환학생 프로그램, 방학 프로그램, 어학연수 프로그램, 외국인유학생입학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고 있다.


2014년 기준 대학은 인문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음악대학, 조형예술대학, 사범대학, 법과대학, 경영대학, 건강과학대학, 약학대학, 스크랜튼대학 등 12개의 단과대학, 대학원은 일반대학원, 국제대학원, 통역번역대학원, 경영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교육대학원, 디자인대학원, 사회복지대학원, 신학대학원, 정책과학대학원, 공연예술대학원, 임상보건과학대학원, 임상치의학대학원, 외국어교육특수대학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대학교. 1886년 5월 31일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가 서울 정동 자택에서 한 명의 여학생으로 시작하였다. 


학생 모집 1년 만에 겨우 한 명의 학생이 학교를 찾았고, 1887년 1월에는 7명의 학생으로 늘어났다. 이에 명성황후가 수고를 치하하여 〈이화학당〉이란 명칭을 하사하였다. 

'이화'()라는 명칭은 당시 학당 근처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배꽃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와 배꽃이 황실을 상징하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견해도 있다.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M.F.스크랜턴 부인에 의하여 창설, 이듬해 고종황제가 교명을 이화학당이라고 이름하였다. 교훈은 '진, 선, 미'이다. 


1888년에 학생 수가 18명으로, 다시 1893년에는 30명으로 늘어났다. 

1890년에 가서는 개화파 자녀와 부인 등 상류층 학생들이 입학하기 시작했다. 

1912년 대학부 설치를 인가받고,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했다. 

1935년에는 정동에서 신촌으로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했다.

1945년에는 '이화'라는 이름이 민족적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강제 변경되었다. 해방 후 1946년 8월 현재 교명인 〈이화여자대학교〉로 변경하고 김활란() 박사가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2011년 현재 11개 대학과 15개 대학원에 2만 3,130명의 학생과 901명의 전임 교원이 있다. 서울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 (대현동 11-1)에 위치한다.


1910년 4년제 대학과정을 신설하고,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였으나,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1년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격하되었다가 1945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다시 개칭하였다. 

1945년 10월 이화라는 교명을 되찾고, 한림원·예림원·행림원 등 3원에 문과·의학예과·교육과·약학과·체육과·미술과의 8개 학과를 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초대총장에 김활란()이 취임하였다. 

2011년 기준 15개의 대학원(일반대학원, 국제대학원, 통역번역대학원, 사회복지전문대학원, 경영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교육대학원, 디자인대학원, 신학대학원, 정책과학대학원, 공연예술대학원, 임상보건과학대학원, 임상치의학대학원, 외국어교육특수대학원), 11개 대학(인문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음악대학, 조형예술대학, 사범대학, 경영대학, 건강과학대학, 약학대학, 스크랜튼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기관은 이화학술원, 중앙도서관, 이화역사관, 이화리더십개발원, 이화미디어센터, 여성지도력개발겐터, 발달장애아동센터 등이 있고, 연구기관은 한국문화연구원, 한국여성연구원, 세포신호전달연구센터, 통일학연구소, 이화어린이연구원, 이화인문과학원 등이 있다. 

부속·병설학교로는 부속유치원·부속초등학교·부속이화금란중학교·부속이화금란고등학교·병설영란여자중학교·병설미디어고등학교가 있으며, 이화여자대학교의료원 산하에 부속동대문병원·부속목동병원이 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현동에 있는 사립 여자종합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연원은 1886년 5월 31일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M. F. Scranton)이 한성 황화방(: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자택에서 여학생 1명을 데리고 교육한 것에서 비롯한다. 

1887년고종으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음으로써 최초의 근대 여자교육기관으로 정식 승인받게 되었으며, 초대 학당장으로 스크랜턴이 취임하였다.

1908년 학부 인가를 받아 보통과ㆍ중등과ㆍ고등과로 편성하였고, 1910년 4년제 대학과를 신설하였다. 

1914년 대학과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하였으며, 1915년 유치원사범과를 신설하였다.

1917년 중등과를 대학예과로 개칭하였고, 1918년 고등과와 보통과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보통학교로 각각 개편하였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교사 박인덕()ㆍ신규려()와 학생들이 서울의 다른 사립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대학과 및 대학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면서 문과와 음악과를 신설하였고, 1928년 유치원사범과를 이화보육학교로 개편하였다. 

1929년 가사과를 신설하였고, 그 뒤 학생 수가 증가함에 따라 1935년 지금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면서 본관ㆍ음악관ㆍ체육관ㆍ영학관()ㆍ기숙사 등을 갖추게 되었다.

1939년 최초의 한국인 교장으로 김활란()이 취임하였고, 1940년 이화보육학교를 보육과로 개편하고 가사전수과를 신설함에 따라 4년 과정의 문과ㆍ음악과ㆍ가사과, 3년 과정의 보육과, 1년 과정의 가사전수과 등 5개 학과를 두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1년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격하되었다가, 1945년 4월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개편되어 3년제 후생과ㆍ육아과,

1년제 보육전수과ㆍ교육전수과를 설치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0월이화여자대학으로 개편하여 한림원()ㆍ예림원()ㆍ행림원()의 3원을 두고, 한림원에 문과ㆍ가사과ㆍ교육과ㆍ체육과, 예림원에 음악과ㆍ미술과, 행림원에 의학과ㆍ약학과를 설치하였다. 같은 해 12월 의학과 실습병원으로 동대문부속소병원을 개원하였으며, 1946년 8월 종합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되어 초대 총장으로 김활란이 취임하였다.

1947년 9월 인문학부(국어국문학과ㆍ영어영문학과ㆍ기독교사회사업과), 가정학부(가정학과ㆍ영양학과ㆍ의류학과), 교육학부(교육학과ㆍ아동교육학과), 체육학부(체육학과), 음악학부(피아노과ㆍ성악과ㆍ현악과ㆍ작곡과), 미술학부(동양화과ㆍ서양화과ㆍ자수과ㆍ도안과), 의학부(본과ㆍ예과), 약학부(약학과) 등 8개 학부 20개 학과로 개편하였고, 1950년 법정학부와 간호교육학부를 신설하였다.

6ㆍ25전쟁 중 부산 임시교사에서 수업을 계속하면서 1951년 12월 대학원을 설치하고 문리과대학ㆍ예술대학ㆍ의약대학ㆍ사범대학ㆍ법정대학의 5개 대학 19개 학과로 개편하였다. 

1953년 8월서울 본교로 복귀하였으며, 이듬해 4월 의약대학을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으로 분리하였다.

1955년 4월 사범대학부속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신설하였고, 1956년과 1957년 각각 대강당 및 도서관을 준공하였다. 1958년 4월 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를 신설하였으며, 1960년 2월 예술대학을 음악대학과 미술대학으로 분리하였다.

1962년 체육대학, 1966년 가정대학, 1967년 교육대학원, 1968년 간호대학, 1981년 산업미술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6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이화백년사』 발간, 학술대회 개최, 기념건물 봉헌, 화보집ㆍ논문집 발간, 기념영화 제작 등을 진행하였다.

1994년 10월 정보과학대학을 신설하였고, 1995년 4월 정보과학대학원에 여성최고지도자과정을 개설하였다. 같은 해 9월 법학연구소ㆍ의과학연구소ㆍ인간생활환경연구소를 설치하였다.

1996년 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과ㆍ행정학과ㆍ문헌정보학과ㆍ신문방송학과ㆍ사회학과ㆍ사회복지학과), 이공과대학(전자계산학과ㆍ전자공학과ㆍ건축학과ㆍ환경공학과), 법과대학(법학과), 상경대학(경제학과ㆍ경영학과ㆍ비서학과)을 신설하였고, 공학관ㆍ자연사박물관을 신축하였다. 또한 국제통상협력연구소ㆍ사회과학연구소ㆍ공학연구소를 설치하였고, 국제대학원 및 통역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자연사연구소ㆍ음악연구소를 설치하였고, 신학대학원ㆍ정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9년 11월 과학기술대학원ㆍ국제대학원ㆍ통역번역대학원ㆍ실용음악대학원ㆍ경영대학원ㆍ임상보건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2000년 종합사회복지관ㆍ국제교육관을 신축하였고, 2001년 국제학부를 신설하였다. 

2002년 인문학연구원ㆍ특수교육연구소ㆍ뉴미디어기술연구소를 설치하였다.

2005년 6월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를 개최하였고, 8월 지능형나노바이오소재연구센터ㆍ국가인적자원개발연구원ㆍ생명윤리법정책연구소를 설치하였다. 

2006년 5월 이화역사관을 완공하였으며, 2007년 이화학술원ㆍ이화인문과학원을 신설하였다.

교훈은 ‘진ㆍ선ㆍ미’이며, 기독교 정신의 바탕 위에서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지도적 여성 양성을 위한 지성공동체를 표방하고 있다. 

발전전략으로는 연구중심대학 위상 구축, 인문학과 자연학의 융합화, 인성ㆍ교양교육 강화, 연구와 교육의 연계, 학문의 특성화, 글로벌 네트워킹 구축 등에 역점을 두고 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ㆍ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ㆍ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 캐나다 토론토대학교(University of Toronto), 영국 사우샘프턴대학교(University of Southampton), 중국 베이징외국어대학교 등 36개국 228개 해외 대학과 교류협정을 맺었으며, ISEP(International Student Exchange Program)에도 가입하여 ISEP 회원대학들과도 학생교류를 시행하고 있다.

2007년부터 해외 거점캠퍼스 구축사업을 시작하여 2010년 현재 뉴욕ㆍ워싱턴ㆍ베이징ㆍ보스턴ㆍ런던ㆍ도쿄ㆍ홍콩ㆍ싱가포르ㆍ파리 등 21개 지역에 거점캠퍼스를 구축하였고, 해당 지역 명문대학들과 복수학위제, 교환학생제, 방문학생, 계절학기, 단기방문, 어학연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문예행사로는 매년 5월 메이퀸 행사를 실시하여 교사 중에서 메이퀸을 선발하다가, 이후 재학생 중에서 메이퀸을 선발하여 화제를 모았으나 1978년부터 중단되었다. 

현재 65개의 동아리가 활동하고 있으며, 개교기념일인 5월 31일을 전후하여 이화대동제가 열린다. ‘동창의 날’에는 ‘올해의 이화인’을 선정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언론활동으로는 1929년 교내 학생기독교청년회(YWCA) 주도로 창간된 교지 『이화』를 연2회 발간하고 있고, 1954년 창간된 대학신문 『이대학보』를 주간 8∼12면, 1972년 창간된 영자신문 『Ewha Voice』를 격주 8면으로 발간하고 있다.

2010년 현재 15개 대학원 및 11개 단과대학(17개 학부, 17개 학과)이 설치되어 있으며, 재학생은 21,200여 명, 전임교원은 913명, 직원은 370여 명이다. 

현재까지 총 181,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부속기관으로는 이화학술원ㆍ도서관ㆍ박물관ㆍ이화역사관ㆍ이화리더십개발원ㆍ기숙사ㆍ사회복지관ㆍ평생교육원 등이 있고, 부설연구기관으로는 한국여성연구원ㆍ분자생명과학기술원ㆍ인문학연구원ㆍ초기우주과학기술연구소ㆍ신재생에너지연구센터 등 70여 개가 있다.

도서관은 중앙도서관ㆍ음악도서관ㆍ의학도서관ㆍ법학도서관ㆍ신학도서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48만여 권의 단행본, 1만여 종의 인쇄본 저널, 25,000여 종의 전자 저널, 각종 비도서 자료 11만 점을 소장하고 있다.

백주년기념박물관은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0년 신축되었고, 국보 제107호 백자철화포도문호와 보물 11점, 중요민속자료 3점을 비롯하여 청동기ㆍ토기ㆍ도자기ㆍ공예품ㆍ서화ㆍ복식ㆍ민속품ㆍ현대미술품 등의 유물과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자연사박물관은 1969년 국내에서 최초로 설립되었으며, 동물ㆍ식물ㆍ암석ㆍ화석 등의 다양한 표본을 전시하고 있어 자연사 관련 학교 교육과 사회 교육에 이바지하고 있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하여 매년 400여 명의 학생을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일본, 독일, 중국 등 세계 36개국 315개의 학교로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국제화를 도모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에 있다.


이화학당 . 梨.(이화여대 예 이름)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된 메리 F.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서울 황화방(), 지금의 중구(정동()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이다. 

제1대 당장인 스크랜튼의 교육이념은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한국여성들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양성하는 것’, 즉 한국인의 긍지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한국인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화학당은 1886년 5월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의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가 서울 정동의 자택에서 한 명의 학생으로 수업을 개시한 것이 시초다. 

이듬해인 1887년 2월 고종황제가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 출범을 기념하기 위해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 

이화()라는 명칭은 당시 학당 근처에 흐드러지게 피던 배꽃의 이름을 땄다는 설과 '이화정'이라는 정자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근대화와 개화의 싹이 움트던 19세기 말, 봉건적 틀에 갇혀 지내던 여성들만을 위해 문을 연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의 시초이자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산실로 여겨져 왔다. 
1886년 서울 정동에 건평 200평 규모의 한식 기와집을 건축했는데, 이것이 교사건축의 시작이다. 

35명 정도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교실과 교사 숙소 등을 갖추었다. 

1887년 학생 수가 7명으로 늘고, 1888년 18명, 그리고 1893년 30명으로 늘었다. 이렇듯 학생들이 증가하자 1897년 기존의 한옥교사를 헐고, 그 자리에 당시로서는 최신 설비를 갖춘 서구식 2층 건물인 메인홀을 착공하였다. 

1904년 중등과, 1908년 보통과와 고등과, 1910년 대학과를 신설하였다. 

1914년에는 이화유치원을 신설하고, 대학과 1회 졸업식을 가졌다. 

1915년 유치원 사범과를 설치하고, 심프슨홀을 완공하였다. 

1917년 중등과의 명칭을 대학예과로 변경하였다. 

이화학당은 1918년 고등과, 보통과를 이화학당에서 분리하여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보통학교로 각각 개교하였다. 1925년에는 대학과 및 대학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명칭을 바꾼 후, 문과 및 음악과를 새로 설치하였다. 

1927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이듬해인 1928년 이화학당 유치원 사범과를 이화보육학교로 개칭하였다. 이와 같은 학당의 교육체제 변화에 따라 1928년부터 이화학당 명칭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화학당 출신의 졸업생으로는 한국 여성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활란(1918년 대학과 졸업)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비롯해,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터(1893년 이화학당 졸업),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 하란사(1895년 이화학당 졸업), 한국 최초의 중등학교 여성경영자 황메례(1890년 이화학당 졸업) 등이 있다.


1887년 2월에는 고종황제가 외아문을 통해 ‘이화학당()’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하였다. 이는 조선의 사액서원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한다. 

이화라는 교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점차 학제를 정비하여 1904년에는 중등과를,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함으로써 마침내 보통·중등·고등과정의 일관된 학제를 마련하였다. 

이화가 중등과를 먼저 설치한 것은 이화의 교육이 여성의 고등교육을 지향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교사 양성이 시급했던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수렴한 것이었다. 

이화학당은 1908년 6월 5명의 제1회 중등과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10년에는 4년제의 대학과를 설치하여 1914년 4월 신마실라·이화숙·김애식 등 한국 최초의 여대생을 배출하였다.  

1914년에 이화유치원을, 1915년에 유치원사범과를 차례로 신설하고, 1917년에는 중등과를 대학예과로 개편하였다. 

1918년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로 분립개교하였고, 1925년에 대학과와 대학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였으며, 1928년에 유치원사범과를 이화보육학교로 독립하였다. 

이화학당 내에 있던 각급 교육기관들이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 독립된 학제로 운영됨에 따라 1928년에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으나, 친근하고 익숙한 ‘학당’이란 칭호가 계속 사용되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 , 梨校.

1886년 5월 31일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창설되었다. 

1887년 10월 22일 고종황제가 '이화학당'이란 교명을 하사하였다. 

1910년 고등과로부터 대학과를 신설하여 분리했고, 분리된 이화전문학교는 신촌으로 이전하여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 

1935년 이화여대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1951년 6·25전쟁으로 부산 영도에 가교사를 설치하고 개교하였다. 

1953년 서울로 환도하여 완전 복교하였고 자매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74년 독립 투사인 유관순 동문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유관순 기념관을  건립했다. 1986년 이화 창립 100주년 기념 비문을 세웠다. 

1988년 학교법인 이화학원에서 예원학교 및 서울예술고등학교가 분리되었다. 

2003년 일본 야마나시 에이와여고와 자매결연을 맺었으며, 2009년에는 자율형 사립고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6에 있다.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 梨館.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2번지의 이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는 멀티미디어 교육관으로, 30년 동안 졸업생들이 모은 기금으로 2004년 7월 준공되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시설 가운데 하나로서 1975년에 화재로 소실된 프라이홀(Frey Hall)을 복원하기 위하여 30년 동안 졸업생들이 모은 기금을 바탕으로 2003년 4월 4일 착공하여 2004년 7월 30일 준공하였다. 

옛 건물의 벽돌과 목재를 다시 사용하여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되었다.

지하 1층과 지상 5층의 멀티미디어 교육관으로서 지하층에는 이화아트갤러리가 있다. 

지상 1층에는 화암홀과 카페, 2층에는 음악실·개인연습실·기도실, 3층에는 프라이홀·컴퓨터실·시청각실·모임방, 4층에는 물리실·화학실·생물실·지구과학실·교사연구실, 5층에는 영어교과실·예절실·가정과학실·회화실·공동작업실·도예실이 있다.

공연장인 화암홀은 2006년 1월 개관하였다. 

2층 구조로 1층 322석(장애우 6석 포함), 2층 111석 등 총 433석을 갖추고 있다. 

주무대는 면적 132㎡에 양 포켓의 인아웃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이동하기 편리하며, 공연할 때 다목적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76㎡ 규모의 측면무대가 있다. 

중극장 규모로서는 최고 수준인 31개의 이동식 버턴이 장치되어 있어 무대변환을 통한 다양한 연출을 꾀할 수 있다.


이화여고 학생기독청년회의 이고.

《이고()》는 1934년 12월 25일자로 창간된 이화여고 학생기독교청년회 문학부 발행의 교우지인데, 속간 여부는 미상이다.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미국인 아펜셀라(), 인쇄인 김용규(), 인쇄소 (주) 창문사(), 발행소 이화여고 학생기독교청년회 문학부(서울·정동 32), B5판 93면, 비매품이다.

발행인 아펜셀라(Alice R. Appenzeller 1885~1950)는 누구인지 《이화백년사()》(이화여자고등학교, 1994)에서 보기로 하자.

“한국 선교의 개척자인 아펜셀라 목사(배재학당 설립자)와 어머니 엘라 도지(Ella Dodge)의 딸로 1885년 11월 9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인 셈이다. 1886년 4월 25일 스크랜튼 박사의 어린 딸과 함께 신교 전도를 시작한 후 최초의 세례식에서 영아 세례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유치원 교육을 받고 우리나라 어린이들과 어울려 뛰놀던 그는 우리말을 매우 잘하는 편이었다.


17세 되던 1902년 4월 어머니와 함께 귀국하여 랭카스터 시의 십펜(Shippen)고등학교에 입학, 1905년 2월 동교를 졸업하고 1909년 매사추세츠 주 웰슬리(Wellesley)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한때 모교인 십펜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1915년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불우한 학생들의 다정한 상담역으로 봉사하였으며, 그의 능력이 인정되어 1919년에서 1920년까지 프라이 학당장의 서리직을 맡아 보았다.

이 무렵 우리말과 한문을 서광진()으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아 우리말을 한국인 못지않게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었다. 무명 천에 검은 색을 염색하여 만든 촌스러운 두루마기를 입고 채선엽() 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상경한 서광진에게 번듯한 신사복을 생일 선물로 선사하여 개인 지도에 대한 보은을 잊지 않았으며, 1921년 잠시 미국으로 귀국할 때엔 서광진의 능력을 인정하여 이화 교사로 천거하여 주었다. 미국에선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22년에 돌아와서 윌터에 이어 제6대 학당장에 취임하였다. 1925년 4월 이화학당 대학과를 대학(Woman’s Christian College of Korea)으로 승격시키려던 노력이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고 자신이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29년 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가 완전히 분리, 고등보통학교장직을 처치(Miss Marie Church, 최치())에게 넘겨 주고, 1935년 전문학교는 신촌 교사로 이전하였다.” ⇨ 

이화

“제2학년 생도 73명, 제3학년 생도 67명, 인솔교원 이덕상(), 김극배(), 전수진(), 이금동(), 안천(), 양능점(), 김봉희(), 서광진().

오전 8시 반에 우리는 동대문에 모여 정각 9시에 경성궤도()회사 동대문역에서 기동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장난감 만한 기동차 궤짝 두개 속에 우리는 꼭꼭 실렸다. 빈틈없이 마주서 피차에 넘어질 염려는 없었다. 

차는 까불고 가솔린 냄새는 코를 찌른다. 차도() 연변에는 군데군데 지저분한 것이 많이 있다. 경성부() 사람들의 뱃속 길을 다녀나온 양식 곳간()인 시멘트 저장지()에서는 훌륭한 냄새를 우리에게 날려보낸다. 그러나 가솔린 냄새보다는 오히려 구수한 편이다. 〈중략〉

지저분한 곳을 다 지나고 청청()한 채마전()과 미나리밭을 휙휙 지나고 철로()다리로 한강을 건너니 넓은 평야가 보인다. 

이 강은 심청()강이라는 한강 지류이다. 강 건너서는 바로 뚝섬인데 사방으로 보이는 것이 무밭 배추밭이요, 조금 더 가니 일면이 모두 사과밭이요 포도원이다.

벼를 심은 논은 별로 볼 수 없었다. ······ 그 많은 포도원 간판 중에는 조선 양반의 이름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도무라()니 야마자끼()니 무슨 다로()니 무슨 지로()니 하는 이름들 뿐이요, 훌륭한 농원에 문화주택을 짓고 사는 양반은 다 그들이었다. 〈중략〉

우리는 궤도 종점에 내려 이 선생님의 안내로 전에 보지 못하던 한 유원지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폭포와 분수와 저수지와 화원과 운동구 식당 등이 설비되었는데, 실로 백사장에 나타난 별유()천지였다. ······ 그리고 빽빽한 포플러 임상()은 저 인조적인 유원지의 시설보다 강안 일대의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무한한 정취()와 장엄미()가 있어 시상()을 자아낸다.

민족이 쇠하면 산야가 황폐하고, 그것이 흥하는 곳에는 사원()의 수림()이 자라고 황막한 사막에도 샘이 솟아나는 것이다. 〈중략〉 이 굽이 저 굽이 돌고 돌아 한 고개 두 고개 올라가 내려가는 장사진()은, 자칫 그림이 살아서 동하는 것 같고 산촌에 짖는 개소리는 적막한 가을 강산을 더욱 쓸쓸하게 해 준다.”

〈시단〉에 학생들과 함께 섞여 있는 주수원()은 교사이자 현역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은 〈실제()〉와 〈주문한 책 받고〉가 있는데, 그중 뒤의 작품을 소개한다.

"산 넘고 물 건너 저 먼 곳에서 누구 찾아 보려고 네 여기온고 네 아는 얼굴들 예 있음이냐 부르는 내 소리 들렸음이냐

너를 보니 내 마음은 이리 기쁘다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렴 매마르고 거칠은 이 내 마음에 넘치는 너의 샘물 마시워다오"

주수원(1909~2003)은 경남 창원 출생. 이화여전 문과 졸업. 당시 영어교사였으며, 배화여고 교사, 월간 《새가정》 주간(1959~1965), 펄벅재단 한국지부(1965~1968)에 근무했다. 그의 작품은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조선일보사, 1937)에 수록되었다. (이 기사는 문덕수 편 《세계문예대사전》(성문각, 1975)에서 발췌했음)


이 많은 학생 필진을 두고 아무리 찾아 보아도 아는 이가 없다. 그러다가 한 사람 눈에 띄는 이가 〈우리 고향〉을 쓴 전산초(, 전 연세대 의대 간호대학장)인데, 그는 소설가 전영택( 1894~1968, 호 늘봄)의 딸이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연혁〉에서 그 초창기를 본다.

“1885년 미국감리교회 부인선교부 대표 시란톤( : 스크랜튼 Mrs. M. F. Scranton) 부인이 현재의 구역(서울·정동 32) 내에 조선식 가옥을 교사로 하고 약간의 여자아이를 모아 교수하니, 이것이 본교의 창시인 것이다. 1886년 5월 국왕은 ‘이화학당()’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편액()을 만들어 보내 주었다.”

《이고()》 창간호는 현재 학교에도 소장되어 있지 않으며, 《이화백년사》에도 발행 기록이 없다. 다만 창간호에 김창제가 쓴 〈본지() 창간()에 제()하여〉를 보면, “근래 중등학교들은 다투어 자교()의 학보를 발행한다. 거의 없는 학교가 없다. 아마 이화여고만이 아직 없는가 보다”라고 했으니, 그때까지 이화여고는 교우지가 없었다. 그러니 이 《이고()》가 이화여고 최초의 교우지인 것이다. 그후의 교우지는 1954년 4월 5일자로 창간된 주간 《거울》인데 현재도 발행되고 있다.

이밖에도 일제하에서 나온 ‘중고등 교지’는 적지 않으나 거의 만나지 못했다. 주로 ‘국문판’으로 나왔으리라고 짐작되는 것만 적어 본다. (ㄱㄴㄷ 순)

1. 《계성()》(1935) 대구 계성학교 계우회
2. 《계성학보()》(1914. 2) 대구 계성학교
3. 《고창고등보통학교학우회보()》(1927. 3) 고창고보 학우회
4. 《신명()》(1938. 2) 대구 신명여학교 교우회
5. 《신성()》(1934. 5) 선천 신성중학교
6. 《영생()》(1937)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우회
7. 《영흥()》(1934. 4) 목포 영흥학교 학생회
8. 《이습()》(1928. 3) 보성고등보통학교 이습회
9. 《일신()》(1929. 2) 동래 일신여학교
10. 《정신()》(1935. 3) 정신여학교 학생회
11. 《정의()》(1934. 3)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회
12. 《호종()》(1934)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우회.

13. 《교우회보()》(1908) 수원농림학교

14. 《루씨학우()》(1928. 4) 원산 루씨여학교
15. 《배재()》(1922) 배재고보 학생청년회
16. 《송우()》(1925)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우회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이화.

《이화()》는 1929년 2월 10일자로 창간된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우지인데, 대체로 1년에 한 차례씩 발간되어 1938년 제8집을 내고 종간했다. 그리고 광복 후 1950년에야 제9호로 복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2000년 3월에 제60호를 냈다. 

창간호의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박겸숙(), 인쇄인 정경덕(), 인쇄소 기독교창문()사, 발행소 학생기독교청년회 문학부(서울·정동 32 이화여자전문학교), A5판 195면, 정가 40전이다.

발행인 박겸숙()은 학생회 문학부장이다. 당시의 교우지들은 대개 교수 또는 교장이 발행인이 되었으나, 그중에는 학생이 발행인이 된 것도 있다. 이는 학생들의 자치능력을 그만큼 돋보이게 한다. 

제2집 이후의 발행인은 최직순(, 2), 연영화(, 3), 최예순(, 4), 박봉자(, 5), 이보배(, 6), 최원복(, 7) 등인데, 이들은 다 학생회 회장이거나 문학부장이다. 제8집은 찾지 못했다.

《이화100년사》(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는 《이화》 창간 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1928년 학생회가 문학부 사업으로 회지 발행을 결의하고 회장 전수진(), 문학부장 박겸숙()이 중심이 되었는데,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교수·동창·재학생들의 원고를 수집하여 총독부 도서과에 출판허가를 받으러 가자, 허가를 내주려 하지 않고 그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압수당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된서리를 맞은 책임자들은 이에서 물러서지 않고 수차례 찾아가서 사정하고 애쓴 끝에, 저들의 요구대로 원고를 수정 삭제하고 끝까지 문제가 된 원고는 아예 버려야 하는 고충을 겪은 후에야 겨우 출판허가를 받아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임원의 임기가 바뀌고 신임 회장 최직순(), 문학부장 최이권()이 일을 물려받아, ······ 마침내 1929년 2월에 창간호를 내놓았다.” 이때 백낙준(), 최현배() 두 교수가 편집을 지도했다.

〈머리말〉이라고 한 창간사는 여학생의 글답지 않게 의젓한 태()를 보인다.

(교교) 명월()은 창천()에 높이 솟아 이천만()의 머리 위에 고르게 비취고, (진진) (도향)은 삼천리()에 滿(편만)하여 있는 가을에게, 감()히 같은 주의() 같은 이상()을 가졌다고 하고 싶은 《이화()》지()를 실어 보냅니다.

······ 이 열매가 우리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된다면 이것으로 더 없는 기쁨으로 삼겠습니다.(1928. 10. 8)”

앞머리에는 ‘이화()와 여자교육()’ ··· 아펜셀라() 교장/ ‘조선학생()의 이중() 책임()’ ··· 김활란() 학감의 글을 비롯한 〈교수 논단〉 5편이 실렸고, 이어 〈학생 논단〉 4편, 〈수필〉 22편, 〈시조〉 14편, 〈현대시〉 49편, 〈소설〉 2편 등 많은 글이 수록되었다. 

아펜셀라(Appenzeller, A.R. 1885~1950) 교장은, 1885년 8월에 배재학당을 설립한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셀라의 장녀로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 《이고

제4집의 권두언은 한돌(일석() 이희승())이 썼다.

“땅바닥에 떨어진 한개의 솔씨를 그 누가 작다 하느뇨? 수십간()의 지면()을 덮고도 남을 큰 정자()가 될 것을 아는가. 바위 틈에 스며 고이는 한 줄기 샘을 그 누가 야중가리 없다 하는뇨? 그 앞에 양양무애()한 바다가 있는 것을 잊지 말라.

그러나 솔씨가 정자 되기에는 그에게 모풍능상()하는 깨끗한 고절()이 있으며, 샘물이 바다에 이르기 전에는 돌부리에 발을 차이고 여울에 몸이 부서지는 쓰라린 신고()와 일촌()의 광음()도 쉬지 않는 꾸준한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이 변변치 않은 선물 《이화()》 제4집을 여러분 앞에 올림에 당하여, 이 작은 고언()을 덤으로 드리노니 여러분은 한번 씹어 보시기 바라는 바이다. 1932. 9. 20. 〈한돌〉”


이 무렵부터 이희승(), 김상용(), 이태준() 세 교수가 편집을 지도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온 ‘야중가리 없다’는 말은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다.)

제6집에는 〈본교 창립 50주년 기념에 제하여〉라는 아펜셀라 교장의 기념사가 실렸는데, 그중 몇 대목을 옮긴다.

“······ 10유여년을 두고 동경하던 신교사들이 송림() 속에 솟아오름을 볼 때에 일어나는 감회 ······, ‘한개의 돌 한개의 벽돌마다 생각하여 주는 마음의 상징이고, 회()와 쇠로 선 것이 아니라 정신적 이상()의 표현이다’ ······, 

과거 50년 긴 동안 한 걸음의 발전, 한 계단의 향상은 어느 것에나 수없는 인사들의 공헌이 나타나고, 날과 달이 반복된 50년의 경과만이 아니라 성의()의 섭리()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로 시작되는 이 기념사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맺는 말을 이렇게 하고 있다.


“······ 첫째로 사회의 몰이해, 부형들의 반대까지라도 이기고 모험적 용기를 내어 이 학교를 찾아오고 성심성의 수학() 면려()하여 현재의 학교가 되게 한 학생들의 열성이 고마웠다. 

둘째로 학교를 떠나 사회에 들어, 이 방식 저 형태로 이 사회 이 강산을 향상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그곳 그 일에서 이화의 정신을 살리려고 고심하는 졸업생들이 고마웠다. 

셋째로 이 학교 운행()에 몸을 바쳐 심신의 노()를 아끼지 않고 50년 풍상()을 계속하여, 서로 전하고 전하여 꾸준히 노력한 분들이며, ······ 미국에 널리 퍼져 기도와 도움을 즐겁게 준 친구들이 고마웠다.

이러한 학생들의 열성, 졸업생의 봉사, 여러 인사들의 도움, 미국에 있는 친구들의 협력으로 이제 마치어 놓은 것은 시작일 뿐이고 외형()의 학교뿐이다. 이제부터 이 안정된 곳에서 실력과 내용있는 학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으로, 그 연혁은 이러하다.

“1886년 5월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Scranton, M.F. 1832~1909)이 서울 황화방( : 현재의 정동)에서 한명의 여학생으로 수업을 시작한 것이 그 효시이다. 

1887년에 명성()황후로부터 ‘이화()’라는 명칭을 받아 교명을 이화학당으로 정하고, 초대 학당장에 취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출발하였다. 

1908년에 학부()의 인가를 받아 보통과·중등과·고등과로 편성하였다가, 1910년 4월 4년제 대학과를 신설하였다.

1914년에 대학과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하고, ······ 1918년에는 고등과와 보통과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보통학교로 개편하였다. 

1925년에는 이화학당 대학과 및 대학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고 문과와 음악과를 신설하였다. 

1929년에는 가사과를 신설, 그 뒤 학생수가 증가함에 따라 1935년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여 본관·음악관·체육관·영학()관·기숙사 등을 갖추게 되었다. 1939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김활란()이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3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가 폐쇄되고, 1년제의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 양성과로 격하되었으며, 1945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광복과 함께 이화여자대학으로 개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화여자대학교’ 항(김순겸 집필)에서 발췌 인용)

앞의 기사를 보면 이화학당이 평탄하게 수업을 시작한 것 같지만, 《이화80년사》(이대출판부, 1967)에는 일반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사연이 있기에, 그 몇 대문을 옮긴다.

스크랜튼 여사가 40세되던 해, 그의 아들이 16세 때에 남편을 잃었다. 

그는 아들을 키우는 동안 평소에 뜻하던 선교사업에 힘을 기울이고 있던 중 드디어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때가 53세, 그러니까 인생이나 신앙이 영글어가는 연령이었다. 그가 학생을 모아 가르치려고 했지만 그것은 생각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어 보자.


“스크랜튼 부인의 끈기있는 노력과 신앙이 승리하여 1886년 5월 31일 드디어 이화에 첫 번째 학생이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스크랜튼 부인이 아직 아들 스크랜튼집 한옥에 거주하고 있을 때, 하인을 거느리고 정장하고 온 한 부인이 밤에 찾아와서 가르침받기를 청하였다. 

귀족이나 양반집 부인들은 밤에 출입을 하는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기다리던 학생이 제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선생인 스크랜튼 부인 쪽에서는 구원을 얻은 것 같은 기쁨으로 이 학생을 데리고, 그는 선생과 학생 1대 1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김 부인이라고 하는 기혼여성이었다. 

고급관리의 소실()인 그는 언젠가는 왕후의 통역관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영어를 배우러 왔던, 개화에 눈뜬 야심있는 첫 학생이었다. 그러나 김 부인은 소중한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3개월간 머물러 공부하다가 그만두어 버렸다.


김 부인이 그만두기 전에 스크랜튼 부인을 또 한번 기쁘게 한 사건이 있었다. 김 부인이 온 다음 달인 6월말 경에 두번째로 여남은살 난 눈이 부리부리한 어린 소녀가 스크랜튼 부인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학생은 가난을 면하기 위해서 온 아이였다. 그러나 스크랜튼 부인에게는 대견한 아이였다. 며칠이 안되어 그의 어머니는 딸을 외국인에게 맡기느니보다는 차라리 가난하더라도 같이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딸을 찾아가야겠다고 떼를 썼다. 

스크랜튼 부인은 그 어머니를 여러 가지로 타이르고 나중에는 ‘서약서’까지 써 주고야 그 아이를 머물러 있게 하였다.

다음 세번째 학생은 전염병 덕으로 얻어진 학생이다. 즉 1886년(5월~7월) 전국적으로 호열자(콜레라)가 돌아서, 서울에서만도 하루 수백명씩 죽어서 시체를 담은 들것이 수구문() 밖으로 줄을 이어서 나가는 판이었다. 

당시 스크랜톤 박사나 알렌 등 외국인 의사들이 굉장히 활약을 하였는데, 이때 스크랜튼 박사가 쓰러져 죽어가는 여인을 치료해 주기 위해 병원으로 데려올 때 함께 따라온 아이였다.

그 아이는 죽어가는 어머니 가슴에 얼굴을 박고 굶어죽기 직전에 구원을 받았고 공부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기구하게 모이는 학생들이지만 1886년 10월에는 4명으로 늘고 연말에는 7명이 되었다.”

1890년에는 철종()의 부마() 금릉위() 박영효()의 딸도 스크랜튼 부인과 기거를 함께 하며 공부했다는 것을 보면, 이때부터 상류계급의 자녀들이 이화학당에 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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