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식 문화, ,
우리 음식은 한 끼 식사에 온 세상을 다 담으려는 노력이 있다. 한 그릇 반찬에도 우주를 표현하고자 했다.
오방색이 바로 그런 의미다. 오방색(파랑,빨강,노랑,흰색, 검은색)은 동서남북과 중앙을 의미. 떡도 오방떡이 있는 것은 온 우주의 기운을 담아낸 음식이 신성한 우주의 소산임을 기억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밥과 반찬이 오롯이 한 그릇에 담겨 있는 비빔밥이야말로 가장 영적인 음식이요, 식사법이다.
섞어먹는 식습관 중에서 국에 말아먹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방식이다. 비빔밥이 陽的인 會通이라면 말아먹는 것은 陰的인 형태의 會通이라고 할 수 있다.
고형물을 물에 말아 버리면 식감도 미감도 망가지기 쉽다. 그러나, 우리 음식은 국이나 찌개에 밥을 말아먹어도 잘 어울린다.
비빔밥과 국밥이 통째로 다 섞은 음식인데 반해 쌈은 한 숟갈 먹을 때마다 섞어 먹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샌드위치나 햄버거도 싸먹는 형태지만 미리 익혀 나온 것을 쌈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밥상에서 신선한 재료를 직접 싸 먹을 경우에만 쌈이다.
모든 맛은 조화에 달려 있다. 우리 음식은 그 조화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음식이다. 그런데 왜 우리 음식은 조화를 이루고자 했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 특유의 정신성 때문이다. 이는 한국 사람 특유의 신바람으로 나타난다. 신과 하나가 되고 조상과 소통하고, 너와 나가 하나가 되었을 때 신바람이 나서 큰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조화와 합일을 중요시 했다.
아울러 부족함 역시 섞어 먹는 음식이 발전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김치의 경우 소금이 부족하므로 해서 김치가 빨리 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추가루를 섞는다. 이런 것이 우리 음식의 역설이다.
우리 음식의 키워드- 나물, 소금, 곡물, 콩, 발효음식,
나물은 한국에서 가장 발달한 음식이다. 먹을 것이 부족해 산과 밭에서 나는 나물과 채소에 의지한 결과다.
우리 주식은 밥이다.밥과 함께 하지 않는 한식은 어울리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낮은 염분과 풍부한 미네랄로 인체에 좋은 작용을 하는 천일염 세계 생산량의 86%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나온다.
우리는 질에서나 양에서나 세계 최고의 소금을 생산하는 땅에 살고 있다.
북방계통의 대표 음식은 콩이다. 만주가 원산지이고 단백질이 풍부하여 남방의 소금과 합쳐져 각종 장을 만들어 냈다. 콩과 바닷물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두부 역시우리나라의 강점이 있는 음식이다.
먹거리 부족으로 발효음식이 발달했고 해산물이 풍부한 나라이다 보니 젓갈이 또한 발달했다.
양념, 비법의 맛내기
옛사람들은 양념을 한자로 "藥念"이라고 했다.이는 약을 마음애 둔다라는 뜻이다. 藥食 東原이라는 개념이다.
한국의 주요 음식,
과일,
포도,
포도의 원산지는 흑해와 카프카스 산맥 지역. 우리나라에는 고려말 원나라를 통해 들어왔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충청도에서 말린 포도를 특산물로 바쳤다고 되어 있으며, 세종이 이를 먹고
가슴속이 답답한 증세가 나았다고 되어 있다.
귤,
귤은 1085년 일본 대마도 사신이 감귤을 선물한 것이 시초. 무신정권 시절 무신 최세보의 아들 최비란 사람이 태자의 여종을 귤로 유혹하여 건드린 사건이 있었다. 1282년 전라도 안렴사 임정기가 개성으로 귤나무를 가지고 왔으나 얼마 되지 않아 시들어 죽고 말았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환자가 있으면 귤로 선물을 주어 쾌유를 기원했는데, 오늘날 입원한 환자에게 과일을 선물하는 유래가 되었다.
수박
수박은 원산지가 아프리카인데 원나라를 통해 고려 말기에 전해졌다.
조선 중종은 어느 사람이 수박을 선물하자 그 답례로 다른 물건을 주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신하들이 토론을 일삼았다. 그러자, 중종이 백성이 자신에게 사사로이 선물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대가를 바라고 계속 바칠 테니 사사로이 선물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채소
침채(김치)
무나 파,우엉 같은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머근 풍습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처럼 고춧가루를 배추에 잔뜩 절여서 만드는 김치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전라도에서 서울로 이사온 사람들 덕분에 배추에 고춧가루, 각종 젓갈을 버무려 먹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전라도는 날씨가 덥고 습도가 높아 소금을 많이 넣어 간을 짜게 하지 않으면 음식이 쉽게 상했기 때문이다.
과자,
떡
떡은 고조선 무렵의 부족국가 시절부터 만들었던 것으로보인다. 삼국사기에 "유리이사금과 석탈해가 신라의 왕위를 놓고 다툴 때 "덕이 있는 사람은 이가 많으니 떡을 깨물어 이의 개수를 세어 봅시다." 라고 하여 떡을 깨물었는데 유리이사금이 더 많아 유리가 왕에 올랐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왕들은 거지들을 위해 절에서 떡을 만들어 먹이라고 지시한 기록이 나온다.
고려 인종 시절 중 묘청이 평양으로 천도하면 나라의 힘이 강성해지고 태평해진다.고 하면서 기름을 잔뜩 넣은 큰 떡을대동강에 빠뜨린 후 기름이 물 위에 떠 오르자 신령스러운 용이 침을 토해 오색 구름이 대동강 위에 피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를 이상히 여긴 인종이 조사를 해 보니 기름짜던 사람이 이를 일러 주어 평양 천도 계획을 취소하자 묘청이 마침내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조기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은 둘째 딸을 인종의 아버지인 예종에게 시집을 보냈고,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 보냈다.
즉, 이자겸은 외조부이면서 장인인 셈이다. 그렇게 권세를 틀어 진 이자겸을 두려워 한 인종이 척준경을 시켜 이자겸을
붙잡게 하여 영광으로 귀양을 보냈다. 차마 장인을 죽일 수는 없었던 가 보다. 이 때 이자겸이 영광 조기를 왕에게
선물했는데 인종이 맛이 좋아 이 고기 이름이 뭐냐고 묻자 이자겸이 굴비(屈非)라고 말했는데 이는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품은 말이다. 이로서 영광 조기가 굴비로 바뀐 이유이다.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은 백마산성을 지키며 청너라를 상대하고자 했으나 백마산성이 견고함을 한 청 태종이 우회하여 인조를 굴복시키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항복하게 하자 임경업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국 명나라로 건너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그만 연평도에 좌초하고 말았다. 연쳥도에서 먹을 것이 귀하던 임경업 장군은 밀물 때 기둥을 세워 그물을 쳐 두었다가 썰물 때 조기를 잡는 방법을 연구하여 연평도 주민들에게 가르쳤는데 이후 조기를 잡을 때 이 방법을 쓰며 연펴도 주민들이 수호신으로 임경업장군을 모신다.
소주
소주는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해 전해졌다. 중동을 점령한 몽고인둘이 그 지역 증류주 아라흐를 알았고 그것을 전파한 것이다.
원나라 군대가 안동에 오래 머물 때 안동 소주가 생겨났다고 한다.
숫불구이 영상,
https://youtu.be/XnhqOB-CY0g
출처 ^ 참고문헌,
[한국의 음식 문화
[한식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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