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오두막 전망대
마추픽추를 완벽하게 감상하려면 헬리콥터와 비행기를 이용해 하늘에서 바라보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가능한 한 높은 곳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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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 유적지를 감상하는 데 가장 좋은 장소는 유적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오두막 전망대입니다. 오두막 전망대에 서면 마추픽추는 물론이고 우아이나픽추와 우루밤바 계곡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습니다.
늦은 오후에 파란 하늘과 울창한 숲 사이로 붉은 노을에 물든 유적지를 보면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에 마추픽추를 감상하려면 유적지 입구에 있는 호텔에 묵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가능하면 마추픽추 마을에 위치한 숙소 대신 유적지 입구에 있는 숙소에서 묵는 것이 좋습니다.
마추픽추 유적지는 하루에도 여러 번 변하는 날씨 때문에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유적지를 가장 잘 감상하려면 해가 떠오르는 아침과 해가 넘어갈 무렵인 오후 시간이 좋습니다. 웅장한 산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에 드러난 풍경이 으뜸입니다.
페루의 여러 부족국가는 15세기 잉카의 지배 체계로 편입되었다.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초에는 안데스를 중심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지배하는 광대한 잉카제국이 건설되었다. 태양신은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최고 지도자인 잉카는 태양의 아들을 의미한다. 잉카제국은 잉카 왕실의 혈통인 귀족 계급을 기반으로 통치하였다.
페루의 역사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1. 잉카제국 이전의 페루
1) 원시시대
2) 잉카 이전의 고대문명
2. 잉카제국
3. 페루의 스페인 식민시대
4. 페루의 독립 이후
1) 페루의 독립
2) 페루와 칠레의 전쟁
3) 페루의 군사정권 시절
4)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1기 정권
페루의 역사 (페루 개황, 2012. 2., 외교부)
1532년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는 내란 상태에 있는 잉카제국을 정복하였다. 1544년 스페인은 페루에 부왕청(Viceroy)을 설치하고 식민통치를 시작하였다. 스페인이 18세기 콜롬비아와 파나마 지역에 해당하는 누에바그라나다(Nueva Granada) 부왕청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에 리오데라플라타(Rio de la Plata) 부왕청을 설치할 때까지, 페루는 170여 년 동안 남아메리카 전체를 관할하는 스페인 식민통치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페루의 스페인 식민시대 (페루 개황, 2012. 2., 외교부)
페루의 독립 운동은 19세기 초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백인인 크리오요(criollo)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페루의 독립운동을 촉발한 요인으로는 과도한 세금을 비롯한 식민지 수탈정책, 크리오요(criollo)들의 유럽견문에 따른 자유계몽사상의 전파,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 등을 계기로 식민지에 대한 통제력이 감소한 데에 있다.
1821년 7월 28일 남아메리카의 독립영웅인 산 마르틴(San Martin) 장군은 페루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와 토레 타글레(Torre Tagle) 총독이 연합한 독립군은 1824년 스페인 군대를 격퇴함으로써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종식시켰다.
페루와 칠레의 전쟁
페루는 1879년~1884년간 칠레와의 태평양 전쟁(Guerra del Pacífico)에서 동맹국 볼리비아와 함께 패전하였다. 그 결과, 타라파카(Tarapaca) 주가 칠레에 할양되었으며, 타크나(Tacna) 주와 아리카(Arica) 주가 칠레군에게 점령되었다. 이후, 1929년 리마(Lima)조약에 따라 아리카 주는 칠레에 귀속되고 타크나 주는 페루에 반환되었다.
페루의 군사정권 시절
1945년 호세 루이스 부스타만테(José Luis Bustamante)는 미주인민혁명동맹(APRA) 당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48년 마누엘 오드리아(Manuel Odria) 장군이 군사혁명으로 집권하였다. 마누엘 오드리아는 1950년~1956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1962년 선거에서 빅토르 아야 델라 토레(Victor Haya de la Torre)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군부의 반대로 집권하지 못하였다. 1963년 실시된 대선에서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Fernando Belaúnde Terry)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8년 10월 3일 좌경 성향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Juan Velasco Alvarado) 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였다. 그는 급진적인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사회동원제도를 채택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80년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Francisco Morales Bermúdez) 대통령의 민정이양 계획에 따라 5월 18일 총선이 실시되었다. 총선 결과, 민중행동당(Acción Popular)의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Fernando Belaúnde Terry) 후보가 당선되었다.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1기 정권
1985년 4월 14일 실시된 총선에서 당선된 미주인민혁명동맹(APRA) 당의 알란 가르시아(Alan Gacía)는 1985년 7월 28일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가르시아 1기 정권은 은행 국유화와 외채상환 거부를 비롯하여 급진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경제침체, 고인플레이션, 자본해외도피 현상이 발생하여 페루는 정치·경제적으로 계속 불안정하였다. 1980년부터는 좌익 테러단체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과 투팍아마루 혁명운동(MRTA)의 테러 활동이 격화되었다. 그 결과 페루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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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성립
1821년 8월 페루의 보호자 칭호를 부여받은 산 마르틴 장군은 보호청을 수립한 후 노예 자녀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원주민의 공물 폐지, 국립 도서관과 국민 학교 건립, 교역 협정 체결, 지상 세관 폐지, 금과 은의 수출 금지 등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신생 독립국 페루의 정치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 후 그는 1822년 7월 14일 과야킬에서 북쪽 그란콜롬비아에서 남하하던 시몬 볼리바르 장군과 회담을 갖고 남미 지역의 독립 문제를 협의하였다.
페루 출신 백인들은 독립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의회를 개원하여 신생 독립국의 정체를 왕정과 공화국 및 중앙 집권제와 연방제 중에서 택일하는 문제, 그리고 사회 계층 제도의 존폐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때 그란콜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는 페루에서 스페인 왕실군의 격퇴를 위해 6000명의 병력 파견을 약속하였다. 그 후 시몬 볼리바르의 파견군은 호세 데 수크레(José de Sucre, Antonio) 장군이 지휘하여 카야오 항에 도착하였다. 이 사이 산 마르틴은 부재 중에 페루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이 약화된 사실을 알고 1822년 10월 페루 의회에 전권을 이양한 후 칠레의 발파라이소로 갔다.
산 마르틴이 출국한 후 페루 의회는 2명의 민간인과 1명의 군인을 위원으로 정부 평의회를 결성하여 호세 데 라 마르(José de la Mar) 장군이 지도하였다. 그 후 1823년 의회는 신헌법을 제정했으나, 리마에서는 왕실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한 책임 문제로 의회주의자들과 리바 아궤로(Riva Agüero, José de la) 당파 간에 갈등을 빚게 되었다. 결국 리바 아궤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페루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집권 후 영국에서 120만 스털링 리브라의 차관을 도입하여 페루군과 페루 함대를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또, 아르헨티나, 칠레 및 그란콜롬비아 등에 외교관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1823년 6월 스페인군의 반격으로 리마가 함락되자 리마 북쪽 500㎞에 자리잡은 트루히요로 후퇴하였다.
1819년 8월 보야카(Boyacá) 전투로 콜롬비아를 독립시키고, 1821년 6월 카라보보(Carabobo) 전투로 베네수엘라를 독립시킨 시몬 볼리바르 장군은 1822년 5월 피친차(Pichincha) 전투에서 승리하여 에콰도르를 독립시킨 후 1823년 9월 페루의 카야오 항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당시 페루의 신임 대통령으로 지명되었던 베르나르도 데 타글레(Bernardode Tagle, José)와 의회는 시몬 볼리바르를 페루군 최고 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트루히요로 도주한 리바 아궤로는 독립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군주국을 수립하려는 의도를 가진 시몬 볼리바르에 대해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시몬 볼리바르는 리바 아궤로 집단에 대한 응징을 시도하였다. 결국 리바 아궤로는 자신의 참모 라 푸엔테(La Fuente)에 의해 체포되어 리마로 압송된 후 추방되었다.
1824년 베르나르도 데 타글레는 의회가 폐지된 후 권력을 시몬 볼리바르에게 이양하였다. 시몬 볼리바르는 페루군과 그란콜롬비아군을 지휘하여 1824년 8월 후닌(Junín) 전투에서 스페인 부왕군에 대항하여 승리하고, 12월 9일 호세 데 수크레 장군이 남미 최후의 전투인 아야쿠초(Ayacucho)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 후 1825년 1월 카야오 항에서 스페인군을 축출함으로써 남미 대륙에서 독립 전쟁이 종식되었다.
아야쿠초 전투에서 승리한 후 시몬 볼리바르는 볼리비아로 가서 1825년 8월 6일 볼리비아 공화국의 건설을 선언하였다. 그 후 시몬 볼리바르는 페루로 돌아와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어 1826년 신헌법에 의해 시몬 볼리바르는 페루의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페루의 지도자들은 1821년 7월부터 1822년 9월까지 산 마르틴의 통치, 그리고 사실상 1823년 9월부터 1826년 9월까지 시몬 볼리바르의 통치 등 외국 출신들의 통치에 반감을 갖고, 또한 페루와 볼리비아를 그란콜롬비아에 합병시킬 가능성에 의혹을 품고 있었다.
1826년 그란콜롬비아 사태로 시몬 볼리바르가 물러나게 되자 페루에서는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Andrés de Santa Cruz)가 집권하였다. 1827년 페루에 잔류하던 그란콜롬비아군이 수 차에 걸쳐 폭동을 일으키자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이를 계기로 페루 인들은 시몬 볼리바르가 설치한 정부 평의회를 폐지하면서 페루 출신 호세 데 라 마르 장군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1828년 볼리비아에 잔류하던 그란콜롬비아군이 폭동을 일으키자 페루군은 질서 회복을 구실로 볼리비아를 침공하여 호세 데 수크레 대통령과 그란콜롬비아군을 축출하였다. 그 후 그란콜롬비아가 1829년 독립 전쟁의 부채와 국경선 문제로 페루에 전쟁을 선언하자 과야킬 항구 지대를 회복하려고 침공을 시도했으나 패전하여 전쟁 배상금 15만 페소를 지불하는 피우라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양국 간의 분규가 수습되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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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에서 자유주의적 연방주의자들의 일부는 이념적 신념에서, 그리고 대다수는 지역적 이해 관계, 즉 리마의 관료 체제에 의한 통제와 압제로부터 탈피를 열망하고 있었다. 특히, 남부 아레키파 지역에서는 리마 지역의 보수주의 정권에 반대하면서 연방주의를 열망하였다. 이로 인해 1829년 아구스틴 가마라(Agustín Gamarra) 장군이 집권한 후, 1833년 제헌 의회에서 호세 데 오르베고소(José de Orbegoso, Luis) 장군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아구스틴 가마라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면서 베르무데스(Bermúdez, Pedro P.) 장군을 행정 수반으로 선언하여 내란이 발생하였다. 결국 1834년 호세 데 오르베고소가 집권하여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1835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산티아고 데 살라베리(Santiago deSalaverry, Felipe) 장군이 집권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볼리비아의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 대통령은 페루와 볼리비아의 연방 결성을 열망하고 있었다.
페루의 전직 대통령 호세 데 오르베고소 등의 지원 요청을 받고 페루로 진격하여 산티아고 데 살라베리 대통령을 격파하고, 호세 데 오르베고소는 북부, 그리고 피오 트리스탄(PíoTristán)은 남부 대통령으로 지위를 부여하면서 소위 볼리비아 - 페루 연방을 결성하였다. 결국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는 시몬 볼리바르의 이상과 같이 1836년 10월 페루 - 볼리비아 연방(Peru - Bolivia Confederation)을 창설하는 최고 법령에 서명함으로써 연방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당시 강력한 볼리비아 군부는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가 페루의 자유주의자, 특히 리마에 거주하는 아레키파 지역 출신의 자유주의자들과 연방을 수립하려는 것을 지지하였다. 따라서, 그는 집권 후 연방 기구의 확대, 법률 정비 및 지방 교육 행정을 개선하였다.
북부 페루는 1838년 7월 29일 리마에서 공개 시 의회를 개최하여 볼리비아와의 완전 분리를 선언하였다. 이는 정치적인 것보다 지역주의적 감정이 대두된 것이었다. 이어 8월에는 임시 대통령으로 아구스틴 가마라를 선출하였다. 결국 칠레군은 1838년 11월 부닌(Bunín) 전투, 그리고 1839년 1월 융가이(Yungay) 전투에서 승리하여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는 에콰도르로 도주하였다.
당시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가 결성한 페루 - 볼리비아 연방이 전쟁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은 첫째, 연안과 사막 및 북부와 남부, 그리고 페루와 볼리비아 인들 사이의 이해 부족으로 연방 사상이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둘째,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가 페루의 산티아고 데 살라베리 대통령을 총살하여 민간인들 뿐 아니라, 군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많은 정적을 갖고 있었다. 셋째, 양국에서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에 대한 대중의 비난이 많았다. 넷째, 아르헨티나측에는 연방 사상에 대한 자각을 갖게 하여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반감을 갖도록 하였다. 다섯째, 페루 - 볼리비아 연방은 전함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여섯째, 역사적 근시성과 페루 정치가들 사이의 개인적 욕망이 칠레로 하여금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에게 대항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페루 - 볼리비아 연방 결성은 남미 남부 지역에서 세력 균형을 파괴하게 되어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먼저 칠레는 페루의 많은 보수주의자들과 유대를 맺고 1936년 12월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의 페루 - 볼리비아 연방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언하였다. 뒤이어 아르헨티나도 1837년 5월 전쟁을 선언하였다. 먼저 1837년 11월 정치적, 또는 개인적으로 연방에 반대하는 페루 인들의 협조를 받아 칠레에서 30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아레키파로 진격했으나,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와 카우파르타파(Caupartapa) 조약을 체결하고 귀환하여 칠레 사회가 혼란하였다. 그 후 칠레는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의 조약 사항 불이행을 구실로 1838년 7월 19일 5400명의 병사로 제2차 원정을 실시하였다.
볼리비아 연방의 해체 이후 리마 의회는 연방 체제에서 집행한 모든 조치를 폐기하고, 1839년 11월 양원제 의회에 6년 임기의 대통령제 헌법을 채택하여 다시 아구스틴 가마라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840년 칠레군의 리마 철수 이후 아구스틴 가마라 대통령은 볼리비아를 합병하여 페루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1841년 10월 볼리비아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아구스틴 가마라 대통령은 잉가비(Ingaví) 전투에서 전사하고 양국은 1842년 6월 푸노(Puno)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후 페루의 정치 상황은 주변부 지역에서 주민들의 폭동과 봉급을 받지 못한 군부의 반란으로 1845년 카스티야 이 마르케사도(Castilla y Marquesado, Ramón)가 집권할 때까지 대단히 불안정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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