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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외)

마리 퀴리, [ Marie Cur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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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 [ Marie Curie ]

폴란드 태생의 과학자 라듐을 발견한, 방사성 원소를 최초로 발견하다,

 

프랑스의 물리학자·화학자. 남편과 함께 방사능 연구를 하여 최초의 방사성 원소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였으며, 이 발견은 방사성 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성 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이름 Marie Curie 
  • 생몰 1867.11.7.~1934.7.4. 
  • 출생 폴란드 바르샤바 
  • 국적 프랑스

마리 퀴리. 1920년대에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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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국적/ 활동 분야/ 출생지/ 주요 수상/

1867.11.7 ~ 1934.7.4
프랑스
물리학, 화학
폴란드 바르샤바
노벨물리학상(1903), 노벨화학상(1911)

1867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출생했다. 결혼 전 이름은 스쿼도프스카(Maria Skłodowska)이다. 당시 폴란드는 분할 지배하에 있었는데, 바르샤바는 러시아령이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제정 러시아의 압정()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김나지움의 수학 및 물리학 교사였다. 10세 때 어머니를 잃고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독학하였다. 당시 폴란드와 독일에서는 여자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파리로 유학을 결심, 189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였다. J. H. 푸앵카레, G. 리프만 등의 강의를 들었으며, 수학·물리학을 전공하였고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마리 퀴리는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로 방사능 연구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노벨상을 수상한 첫 번째 여성이며,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이자 유일한 여성이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서로 다른 과학 분야에서 (마리 퀴리는 19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1911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이 상을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는 또한 파리 대학(University of Paris)에서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고, 1995년에는 프랑스의 국가적 영웅이 안장되는 파리의 팡테옹에 묻히는 첫 번째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연구는 방사능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열었으며, 이런 업적 때문에 방사능 단위에 퀴리라는 이름이, 화학 원소 퀴륨에 역시 퀴리 이름이 사용되었다.

 

폴란드 과학 소녀, 파리로 가다

마리 퀴리의 성 퀴리는 남편 피에르 퀴리의 성을 따른 것이었다. 결혼 전 그녀의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클로도프스카(Maria Salomea Skłodowska)였다. 마리아는 1867년 11월 7일에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폴란드 왕국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다섯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문은 집안의 재산을 폴란드의 독립을 위한 애국 운동에 다 써 버렸고, 그 결과 마리아와 그녀의 남매들은 제정 러시아의 압정() 아래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원래 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쳤고 남자아이들에게 체육을 가르치는 감독을 했지만, 폴란드의 독립을 바라는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학교에서 해고되어 그 뒤로는 하숙집을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어머니는 마리아가 10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3년 뒤에 마리아의 언니 조피아가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가족의 죽음 이후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가톨릭 종교를 버리고 무신론으로 돌아섰다.

 

마리아는 바르샤바의 한 기숙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했지만, 당시 폴란드나 독일의 대학은 여자 대학생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바르샤바에서는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반면에 프랑스 대학은 여학생을 받았다. 마리아는 언니 브로니스와바와 일종의 협정을 맺어서, 언니가 파리에서 먼저 공부를 하는 2년 동안은 자신이 돈을 벌어서 언니의 학비를 대지만, 그 뒤에는 언니가 자신의 학비를 대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후 2년 동안 마리아는 폴란드의 한 부유한 가정과 친척집에서 가정교사를 해서 언니의 학비를 벌어 보냈다. 그렇지만 2년이 지난 뒤에도 언니는 마리아의 학비를 낼 정도로 여유가 생기지 않았고, 이런 환경에서 마리아는 원래 계획보다 1년 반을 더 일해서 돈을 모으고 마침 월급이 높은 직장에 취직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유학을 갔다. 파리에서의 초기에 그녀는 바르샤바 근처에 있는 산업과 농업 박물관(Museum of Industry and Agriculture)의 실험실에서 화학 실험을 하면서 과학을 혼자 공부했다. 마리아는 24살인 1891년에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입학했고, 그곳의 교수인 푸앵카레, 리프만 등의 강의를 들었다. 그녀는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면서 최선을 다해서 공부한 끝에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1893년에 소르본 대학교를 졸업했다.

 

리프만의 실험실에서 강철(steel)의 자성을 연구하기 시작한 마리는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Pierre Curie)를 알게 되었고, 동료애로 시작한 둘의 관계는 사랑으로 발전했다. 당시 피에르는 파리에 있던 물리와 산업화학 에콜 쉬피리에르의 교사였다. 이 둘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1895년에 결혼을 했다. 두 사람 모두 결혼식의 종교적인 의식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마리는 백색의 신부 예복 대신에 그녀가 매일 입던 어두운 푸른색 의상을 입었다. 이들은 과학에의 열정을 공유했고, 자전거 여행과 해외여행을 즐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피에르는 마리에게 있어서 새로운 사랑이었고 파트너였으며,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과학 연구의 동업자였다. 이들은 두 딸을 낳았고, 그중 과학자가 된 이렌 퀴리는 나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

 

방사능 연구에 새 지평을 열다

1895년에 독일의 물리학자 뢴트겐(Wilhelm Roentgen)은 음극선 실험을 하다가 엑스선(X-ray)을 발견했고, 1896년에 프랑스의 저명한 물리학자 베크렐(Henri Becquerel)은 우라늄에서 엑스선과 비슷한 투과력을 갖는 광선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광선은 태양 빛을 담고 있다가 이를 방출하는 형광 같은 것이 아니라, 우라늄 자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마리 퀴리는 남편인 피에르 퀴리가 발명했던 예민한 전압기를 이용해서 이 현상을 연구한 결과, 우라늄에서 나오는 광선이 우라늄 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라늄 원자 자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일 수 있었다. 원자가 안정된 것이 아니며, 그 속에 엄청난 에너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추측할 수 있었던 놀라운 실험적 발견이었다.

 

1897년에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사이에서는 딸 이렌(Irene)이 태어났다. 그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에콜 노르말 쉬피리에르(Ecole Normale Superieure)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리 퀴리는 전념할 수 있는 실험실이 없었고, 물리화학과의 옆에 있는 오두막을 개조한 곳에서 연구 대부분을 수행해야 했다. 당시에는 방사능이 위험하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퀴리는 보호 장비를 갖추지 못한 채로 위험한 실험을 오랫동안 수행해야 했다. 연구비도 부족했는데, 그녀는 산업체의 지원을 받아서 실험을 지속했다. 1898년에 마리 퀴리는 토륨(thorium)이라는 원소 역시 방사성 물질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렇지만 이 발견의 우선권은 마리 퀴리보다 조금 먼저 결과를 발표한 독일 과학자 게르하르트 카를 슈미트에게 돌아갔다.

 

마리 퀴리가 이런 연구를 하는 동안에 남편 피에르는 점점 더 그녀의 작업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1898년 중엽에는 자신이 원래 하던 연구를 그만두고 그녀와의 협동 연구에 돌입했다. 1898년 7월에 퀴리 부부는 마리 퀴리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붙인 폴로늄(polonium)이라는 새로운 방사능 원소를 발견해서 이를 공표했고,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1898년 12월 26일에 퀴리는 그들이 라듐(radium)이라고 이름 붙인 두 번째 새로운 방사능 원소의 발견을 발표했다. 이들은 우라늄 광석인 피치블렌드(pitchblende, 역청우라늄석)에서 염화바륨에 섞여 있는 형태로 미량의 염화라듐을 추출해 냈다. 1902년에 이들은 8톤의 폐우라늄 광석을 처리해 0.1그램의 순수한 염화라듐을 얻었고, 1910년에는 마리 퀴리가 염화라듐을 전기 분해시켜서 금속 라듐을 얻었다. 또한 이들 부부는 방사능(radioactivity)이라는 단어도 만들어 냈다. 라듐은 우라늄에 비해 훨씬 강한 방사능 물질이었고, 이 발견은 방사능 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능 원소들을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마리 퀴리는 첫 번째 여성 노벨상 수상자였다.

 

마리 퀴리는 1900년에 에콜 노르말 쉬피리에르의 교수가 되었지만, 이 대학의 실험실은 보잘 것 없었다. 노벨상을 받고 피에르 퀴리가 소르본 대학의 이학부 교수가 되면서 마리는 남편 실험실의 주임이 되어 본격적으로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04년에 퀴리 부부는 두 번째 딸 이브(Eve)를 낳았다. 그런데 그 즈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1906년 4월 19일에 피에르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것이다. 그는 폭우 속에서 마차에 치어 즉사했다. 마리 퀴리는 남편의 죽음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소르본 대학은 피에르를 위해 만들었던 교수직을 유지하고, 그 자리를 마리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피에르에게 보내는 헌사로 세계 수준의 실험실을 만들기를 희망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마리 퀴리는 파리 대학의 첫 번째 여성 교수가 되었다.

두 딸 이브, 이렌 퀴리와 함께. 1908년.

1910년에 퀴리는 금속 라듐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1년 뒤인 1911년에 예기치 못한 스캔들이 터졌다. 마리 퀴리가 물리학자이자 이전에 피에르의 제자였던 5세 연하의 폴 랑주뱅(Paul Langevin)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때 랑주뱅은 아내와 별거 상태에 있었던 유부남이었다. 이는 당시 상당한 비중을 두고 언론에 보도되었고, 세간의 관심과 비난을 유발했다. 퀴리의 집 앞에 군중들이 몰려들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1911년에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 그리고 라듐의 분리에 대한 업적을 기려서 마리 퀴리에게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따라 퀴리는 두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가 되었다. 이 노벨상에 힘입어서 그녀는 스캔들을 이겨내고 1914년에는 소르본 대학에 라듐 연구소를 건립할 수 있었다. 또 이 업적을 기려서 방사능 단위와 화학 원소 퀴륨에 각각 퀴리의 이름이 붙었다. 한편 마리 퀴리의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와 그녀의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Jean Frédéric Joliot-Curie) 역시 1953년에 인공 방사능을 발명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리 퀴리는 해부학을 공부해서 전장에서 엑스선을 이용해 부상당한 병사를 치료하는 일을 자원했다. 그녀는 개조한 트럭을 사용해서 부상병들을 치료했고, 이런 치료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을 교육시켰다. 병사들은 그녀의 트럭을 ‘작은 퀴리’라고 불렀고, 이런 활약은 프랑스 사회가 퀴리를 프랑스의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병사들의 치료를 위해 사용된 마리 퀴리의 엑스선 트럭.

프랑스 시민으로 남아있는 동안에도 마리 퀴리는 폴란드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딸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쳤고 그들을 데리고 폴란드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녀가 밝혀낸 첫 번째 화학원소에 그녀의 고국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정도로 조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퀴리는 1934년 초에 폴란드를 마지막으로 방문했고, 두 달 뒤인 7월 4일에 66세의 나이로 프랑스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사인은 방사능에 과다 노출되어 생긴 무형성 빈혈(aplastic anemia)이었다.

 

퀴리는 남편 피에르가 안장되었던 소(Sceaux)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이들의 유해는 60년 뒤인 1995년에 프랑스의 위인들이 안장된 팡테옹으로 옮겨졌다. 이에 따라 마리 퀴리는 자신의 업적으로 팡테옹에 매장되는 영광을 얻은 첫 번째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방사능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녀가 노출된 방사능의 양은 상당한 것이어서 지금도 그녀의 실험실 노트 같은 사료는 납으로 코팅한 보호복을 착용해야만 볼 수가 있다.


1895년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여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남편과 공동으로 연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물리학에서는 새로운 사상()이 잇달아 발견된 시기였는데, 뢴트겐의 X선 발견, H. 베크렐의 우라늄 방사능 발견에 자극받아 퀴리 부부도 방사능 연구에 착수하였다. 먼저 베크렐의 추시부터 시작했는데 부부는 방사능의 세기를 측정하는 데에 전기적 방법(피에르가 발견한 압전기의 이용)을 사용했다. 그것은 방사선의 정량적 측정법으로서 베크렐의 사진법()보다 편리한 것이었다. 토륨도 우라늄과 마찬가지의 방사선을 방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방사능(radioactivity)'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방사능이 원자 자체의 성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여러 가지 시료()에 대하여 측정하던 중 우연히 우라늄 광물 피치블렌드가 우라늄 자체보다도 강한 방사능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그 속에 미지()의 강한 방사성 성분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 이것의 추출을 시도하였다. 보헤미아의 요아힘스탈에서 산출되는 피치블렌드에서 방사되는 방사능을 바탕으로 화학 분석을 하여(방사화학분석법의 시초), 1898년 7월 폴로늄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이어 그해 12월 라듐을 발견하였다.

이 두 원소는 방사성 원소로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특히 라듐은 우라늄에 비하여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발견은 방사성 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성 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는 소르본대학 이학부() 교수, 마리는 그 실험실 주임이 되었다.

1906년 남편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어 사망한 뒤에도 단독으로 방사성 물질을 계속 연구하였다. 1907년 라듐 원자량을 더욱 정밀하게 측정하는 데 성공하고, 1910년에 금속 라듐을 분리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1906년 5월에는 남편의 후임으로 여성으로서 최초의 소르본 대학 교수가 되었고, 1914년 소르본 대학에서는 그녀가 연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라듐연구소를 건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해오자 라듐을 스위스로 옮겼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전쟁 중 장녀 이렌과 함께 부상자 치료를 위해 뢴트겐 투사기를 보급하는데 노력하였고 많은 부상자들이 목숨을 구하였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파리 의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라듐연구소는 이후 파스퇴르 실험소와 퀴리 실험소가 되었는데, 그녀는 퀴리 실험소 소장으로서 프랑스의 과학 연구에 공헌하였다.

1911년 라듐과 폴로늄 발견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후 연구소의 운영은 물리학자인 장녀 이렌에게 맡겼으며, 이렌은 마리 퀴리의 실험 조수로 있던 F. 졸리오 퀴리와 결혼한 뒤 1935년 남편과 함께 인공 방사능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마리 퀴리는 그동안의 실험으로 몸이 쇠약해져 스위스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1934년 7월 4일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61년 만인 1995년 4월 20일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으로는 사상 최초로 역대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었다.

마리 퀴리,

마리 퀴리 연보 출생 1867.11.7~ 사망 1934.7.4

1867

11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출생.

1891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

1895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

1898

방사능 물질인 라듐을 발견.

1903

남편 피에르 퀴리와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1906

남편 사망하자 그가 강의했던 소르본 대학교에서 강의.

1907

라듐 원자량의 정밀 측정을 성공.

1911

라듐  폴로늄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화합물 연구로 노벨화학상 수상.

1934

7월 4일 방사능으로 인한 골수암, 백혈병 등으로 사망.

1995

여성 최초로 파리 팡테옹 신전에 안장.

1995.4.20 마리 퀴리, 여성 최초로 팡테옹에 묻히다,

 

1995년 4월 20일, 한 부부의 유해가 엄숙한 의식이 거행되는 가운데 프랑스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팡테옹은 프랑스의 국가적 위인들만이 묻힐 수 있는 국립 묘지다. 아내 마리 퀴리는 남편의 업적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만으로 팡테옹에 묻힌 최초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등 남성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바로 그곳에 여성이 묻혔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마리 퀴리는 이민자 출신의 과학자였다. 그리고 과학자 집단은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남성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인 배타적이고도 공고한 사회였다.

 

"언니가 먼저 파리로 유학 가. 내가 뒷바라지할게. 그 다음 나를 도와주면 되잖아"

 

마리 퀴리는 1867년 11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스크워도프스키 브와디스와프와 어머니 브로니스와바의 다섯 아이 중 막내(폴란드 이름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로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는 폴란드의 문화와 전통을 무시했고, 폴란드어로 수업하는 것까지 탄압했다. 폴란드인들에게는 참으로 어둡고 슬픈 시절이었다.

 

마리 퀴리의 부모는 교사였다. 어머니는 마리가 열 살 되던 해인 1878년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는 공립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성은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못했다. 마리는 언니와 다짐했다. 언니가 먼저 파리에 가서 공부를 하고, 그 사이에 자신은 가정교사를 하며 돈을 벌어 학업을 돕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런 다음 언니가 학업을 마치면, 이번에는 언니가 동생을 뒷바라지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물론 허드렛일까지 해야 하는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생활비가 따로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는 언니에게 돈을 보낼 수 있었다.

실험실의 피에르 퀴리(가운데)와 마리 퀴리(오른쪽)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 교수이던 남편이 숨진 후 그의 교수직을 이어받음으로써 이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됐다.

1891년, 드디어 마리는 파리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남학생은 9000명 정도나 되었지만 여학생이 200명 정도인 그곳 소르본 대학에서 마리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그것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받았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먹을 것조차 제대로 못 먹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 원래는 학위를 받은 후 아버지가 계신 조국 폴란드로 돌아오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조국의 상황이 너무 암울했다. 그래서 프랑스에 남기로 했다.

 

1903년 퀴리의 노벨상 수상 연설 "라듐이 범죄자들 손에 들어가면 위험물질이 됩니다"

 

마리는 대학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물질의 결정을 연구하는 피에르라는 과학자였다. 두 사람은 1895년에 결혼했다. 결혼하기 전 마리가 피에르에게 보낸 편지 중 한 통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우리 두 사람이 마음 속에 같은 꿈을 살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이겠지요. 당신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가 인류를 생각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꿈 말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한 해인 1895년은 독일의 과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이 포함된 광석의 특이한 성질, 즉 인광() 방출 현상을 발견했다. 이 두 가지 발견에 자극을 받은 마리는 그런 특이한 성질에 관해 연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남편 피에르의 도움을 받아가며 우라늄의 성질을 연구하고 실험하던 중, 마리는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빛을 방출하는 원소를 발견했다. 마리는 이 새로운 원소에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1898년 7월, 폴로늄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마리는 ‘방사능’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강력한 방사능을 방출하는 새로운 원소를 또 발견하고, 그것에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911년 마리 퀴리에게 수여된 노벨 화학상 원본,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일은 엄청나게 고된 일이었다. 피치블렌드란 광물 몇 톤을 화학적으로 정제해야 했다. 부부는 비가 새는 헛간을 실험실 삼아 밤낮없이 열심히 연구했다. 그리고 1902년 4월 20일, 마침내 순수한 라듐 0.1그램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공로를 인정 받아 이듬해인 1903년 부부는 앙리 베크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 퀴리는 노벨상 수상 기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듐은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아니면 오히려 해로운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남편이 사고로 숨진 후 다른 과학자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으로 자살까지 시도

1906년 4월 19일, 마리 퀴리는 남편을 잃었다. 피에르가 마차에 깔려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마리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젖어 ‘서글프고 끔찍한 나날’을 보냈다. 살아 생전 남편이 했던 “어쨌든 계속해나가야만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다시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마리는 남편이 맡았던 소르본 대학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교수가 된 것이다.

구 소련에서 1987년 발행한 마리 퀴리 기념 우표(위) 퀴리의 조국 폴란드에서 그녀를 기려 유통되고 있는 지폐(아래)

1911년 1월, 마리 퀴리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 후보가 되었지만 두 표 차이로 떨어졌다. 여성인데다 폴란드 이주민이라는 출신 배경에 과학계 인사들의 보수성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리고 같은 해 마리 퀴리가 폴 랑주뱅이라는 과학자와 불륜 관계라는 기사가 언론에 실렸다. 이 기사의 영향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필요 이상의 엄청난 비난이 마리에게 퍼부어졌다. 심지어는 “프랑스 여인의 남편을 빼앗아간 외국X”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이 일들로 마리는 건강까지 나빠졌다. 자살까지도 시도했지만, 마리에게는 ’계속 해나가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같은 해 12월, 노벨 화학상을 받은 마리는 1914년에 라듐 연구소를 열었다. 하지만 그 해 8월 1차 세계 대전 때문에 연구 계획은 어긋났다. 젊은 남성 연구자들이 모두 군에 소집된 것이다. 마리도 X선 장치를 실은 구급차를 마련해 전쟁터로 나섰다. 딸 이렌도 동참해 장비 다루는 일을 맡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 퀴리는 직접적인 연구보다는 연구소의 재원을 마련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마리는 당시 1그램당 10만 달러나 되던 라듐 구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으로 모금 활동을 떠나기도 했다. 연구소에는 1그램의 라듐 밖에는 없었다. 한 여기자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마리의 대답은 간단했다. “실험실에서 쓸 라듐 1그램이에요!” 마리는 50만 달러가 넘는 기금을 모아 라듐을 더 구입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퀴리"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라듐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악성 빈혈이나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마리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방사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결과였다. 그리고 1934년 7월 4일, 마리는 세상을 떴다.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사람들 중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낸 폴란드 출신 유대계 프랑스인 여성 과학자의 사인은 백혈병이었다. 동료 물리학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과학 저널 <네이처>에서 마리 퀴리를 이렇게 애도했다. “퀴리 부인은……과학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 시대 최고의 여성 연구자로 인정받았다……

 

라듐의 발견과 분리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라듐은)……일반적으로 원자의 내부 구조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늘리는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더욱이 라듐은……암을 치료하는 데 뛰어난 효능이 있음이 증명되었다……과학적 재능뿐 아니라 순수한 성격과 개성을 지닌 그녀를 존경하는 전세계의 많은 동료들은 지식의 성장과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인류 복지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의 때 이른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하지만 마리 퀴리 자신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 적이 있었다. “전 폴란드에서 태어났어요. 피에르 퀴리와 결혼했고, 두 딸을 두었지요. 연구는 프랑스에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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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듐의 발견과 마리 퀴리나오미 파사초프 저강윤재 역바다출판사2002.01.20.상세보기

마리 퀴리의 생애에 관해서는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어린이용 위인전기를 제외 한다면, 나오미 파사초프가 쓴 <라듐 발견과 마리 퀴리> 가 가장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남편 피에르를 회상하며 마리 퀴리가 직접 쓴 책 <내 사랑 피에르 퀴리> 에는 실험일지와 일기의 일부도 함께 실려 있다. 마리 퀴리의 연구 성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위대한 물리학자 5> 의 제1장 ‘핵의 세계의 문을 열다’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참조항목,

라듐, 가브리엘 리프만, 방사능, 피에르 퀴리, 토륨, 폴로늄, 푸앵카레, 마리퀴리박물관

 

역참조항목,

노벨상, 퀴륨, 퀴리, 폴란드의 사회, 앙투안 베크렐, 1903년 노벨상, 1911년 노벨상

 

카테고리,

인물 > 과학 > 물리 > 외국물리

출처 ^ 참고문헌,

  • [마리 퀴리 [Marie Curie] (두산백과)

  • [마리 퀴리 [Marie Curie] - 라듐을 발견한 폴란드 태생의 과학자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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