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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외)

알프레드 노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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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노벨,1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 중에,,,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나머지 모든 유산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유언 집행자는 그것을 안전한 곳에 투자해 기금을 조성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는 지난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을 선정해 상금의 형태로 매년 지급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이자는 5개 부분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한다.

 

첫째,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둘째,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이나 개선을 이룬 사람.
셋째, 생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넷째, 문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이상적 경향의 작품을 쓴 사람.
다섯째, 국가 간의 우호를 증진시켰거나 군대의 폐지나 감축에 기여한 사람. 또는 평화회의를 개최하거나 추진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수상자를 선정하는 데 후보자의 국적을 고려해서는 안 되며, 스칸디나비아 사람이든 아니든 가장 적합한 인물이 상을 받아야 한다.

- 노벨 경제학상은 스웨덴 중앙은행의 기부금으로 1968년에 조성되었으며, 노벨의 유언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미스터 다이너마이트의 죽음,

연도/ 저자

1896년 12월 10일
나이절 존스

유언을 통해 알프레드 노벨은 사후에 위대한 영향력을 남겼다.

스웨덴의 기업가이자 화학자, 박애주의자인 알프레드 노벨은 이탈리아 산 레모에 있는 자신의 휴양 별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놀라운 부를 축적했지만 개인적인 행복을 많이 가져다주지는 못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기업가로서 노벨은 보포스 제강 공장을 성공적인 무기 제조 공장으로 키웠고, 화학자로서는 1867년에 폭발성 니트로글리세린의 안전한 형태인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했다. 공장에서 폭발이 일어나 남동생 에밀과 근로자 네 명이 사망한 이후, 그는 더욱 안전하고 강력한 폭발물을 발명했다-젤리그나이트였다. 감성적인 영혼을 지녔던 노벨은 무기 제조, 폭발물, 석유 등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는 틈틈이 희곡과 시를 집필했다.

1888년 그는 "죽음의 상인이 죽었다"는 표제를 달고 노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신속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부자가 되었다고 묘사한, 잘못 나온 자신의 사망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더해 오스트리아의 작가이자 평화주의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와의 서신 교환에서 감화를 받아, 노벨은 막대한 재산을 자신의 이름을 붙인 상을 제정하는 데 기증하여 평화를 장려하고 예술과 과학의 발전을 돕겠다고 결심했다.

매년 수여하는 노벨 평화, 문학, 물리학, 화학, 의학, 경제학상의 수상자 중에는 윈스턴 처칠, 알베르 카뮈, 사무엘 베케트(문학),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물리학), 라이너스 폴링(화학), 미국 대통령 테디 루스벨트와 우드로 윌슨, 테레사 수녀, 헨리 키신저, 마틴 루터 킹(평화) 등이 있다. 적십자를 창설한 앙리 뒤낭과 베르타 폰 주트너(전 세계적인 규모의 급진적인 평화 운동에서 활발한 인물이 되었다)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에 속한다.

 

"알프레드 노벨-이 가련한 반쪽자리 존재는 없앴어야 하는데."

 

노벨, 형인 루드비그에게 쓴 편지중에, 1887년

 

화학요법제와 노벨상,

다이너마이트의 발견자 노벨(Alfred Nobel, 1833~1896)의 유언으로 제정한 노벨상은 인류에게 공헌한, 독창성과 창의성으로 번뜩이는 업적을 남긴 위대한 학자들에게 준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인류에게 크게 공헌한 업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앞선 연구자의 연구를 답습했다는 평가를 받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경쟁의 대열에서 탈락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화학요법제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이 주어진 예는 자그마치 세 번이나 된다.

 

1939년에는 술폰아마이드계 약물을 발견한 도마크에게, 1929년에는 페니실린을 처음 발견한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에게, 1945년에는 그 물질의 항균효과를 입증한 플로리(Howard Walter Florey, 1898~1969)와 카인(Ernst Boris Chain, 1906~1979)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이 수여되었다. 항생제(antibiotics)라는 용어를 처음 쓴 왁스만(Selman Abraham Waksman, 1888~1973)은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한 공로로 1952년에 세 번째로 수상을 했으니, 비슷한 내용의 업적으로 3회에 걸쳐 다섯 명에게 노벨상이 주어진 셈이다. 아직까지 노벨상 역사에 항균작용을 지닌 화학요법제의 발견만큼 비슷한 업적으로 노벨상을 여러 번 받은 경우는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노벨상 선정위원회에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한 적이 없지만, 우선 그들의 발견이 인류에 미친 영향이 워낙 컸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술폰아마이드와 페니실린 가운데 어느 것이 최초의 항균제인가에 대한 논쟁도 빼 놓을 수가 없다.

화학요법제를 처음 발견한 에를리히는 항체형성에 대한 면역학적 이론을 세운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백과사전이나 각종 인명록을 뒤져 보아도 그의 대표 업적은 '화학요법의 발견'이라고 되어 있지, '항체형성의 곁사슬 이론 제창자'라고 나온 경우는 드물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만약에 그가 '화학요법의 발견'이나 '매독치료제인 살발산을 발견'한 업적으로 두 번째로 노벨상을 수상했다면, 화학요법제는 네 번의 노벨 생리의학상을 가져갈 뻔 했다. 그의 화학요법은 20세기 의학을 출발점부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의학으로 바꾸어 놓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는데, 왜 에를리히에게는 두 번째 노벨상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에를리히는 두 번째 노벨상을 탈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첫 노벨상 수상자가 된 것은 1908년이었지만, 그가 최초의 항균화학요법제인 살발산을 발견한 것은 그보다 1년 앞선 1907년이었고, 이를 학회에 발표해 공인받은 것은 1910년의 일이다. 그의 연구내용은 당시의 과학자들에게 전염병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기는 했으나, 기대와 달리 약 20년이 지나는 동안 매독 이외의 질병에서 화학요법의 효과는 그다지 강력하지 못했다. 즉, 학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그는 세상을 떠나 버렸다.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노벨상은 사망자에게는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그가 죽은 지 14년이 지난 1929년의 일이다. 현대인들의 눈에 에를리히가 화학요법의 선구자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세기 초반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에를리히는 단지 매독이라는 한 가지 질환의 치료제를 찾은 것일 뿐이었다. 즉, 그의 연구업적이 인류에게 크게 공헌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고, 단지 그의 방법을 향상시켜 새로운 마법의 탄환을 발견하겠다는 학문적 욕구만 자극받았을 뿐이었다.

한편 플레밍은 우연한 발견으로 그의 업적을 후세에 전해주기는 했으나, 이 '우연한 발견'이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할 것이라는 사실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서 에를리히를 제외하고 최초의 항균제가 무엇인가를 두고 플레밍이 발견한 페니실린이라는 항생제와 도마크가 1932년에 발견한 술폰아마이드가 맞붙었을 때, 어느 쪽이 먼저 발견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끝나지 않을 논쟁의 소지를 남겼다.

1939년 도마크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40년 8월, 플로리와 카인은 페니실린의 항생효과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도마크가 발견한 프론토질은 설파닐아마이드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계속된 노력으로 여러 가지 설파제(설파닐기를 가진 모든 약제를 통칭해 이르는 말)의 개발로 이어져 대단한 영향력을 보였다. 페니실린의 발견도 이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페니실린의 위력은 그보다 훨씬 더 컸다. 플로리와 카인의 발견은 그 이후로 의학자들이 신약 개발에 정진하도록 했다. 각종 유도체 연구도 더욱 활발히 진행했으며, 설파제보다 더 다양한 효과를 거두어서 도마크의 수상 6년 후인 1945년에 노벨상 대열에 끼었다.

1943년 빙선균에서 스트렙토마이신이라는 항생제를 분리해 1944년부터 시판에 들어간 또 다른 항생제 발견자 왁스만은 1952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수상업적은 '결핵 치료제인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한 공로'였다. 스트렙토마이신은 대표적인 결핵 치료제이자 최초로 발견한 결핵 치료제이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스트렙토마이신이 다른 질병이 아닌 결핵의 치료제였기 때문이다. 전염병 가운데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결핵이 왁스만 때문에 그 위력을 잃었으므로, 독창성에서는 좋은 점수를 얻지 못했지만 공헌도에서 워낙 뛰어나 노벨상을 수상했다.~^0^~ 잠시 쉬어 음으로, 밑에 클릭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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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합니다.~

 

출처 ^ 참고문헌,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 중에서 (당신에게 노벨상을 수여합니다: 노벨 물리학상, 2010..,)

[미스터 다이너마이트의 죽음(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

[화학요법제와 노벨상 (인류를 구한 항균제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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