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 역사 (국외)

제갈량諸葛亮

728x90

제갈량諸葛亮"

재야의 현인,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제갈량은 서주() 낭야() 양도 사람으로, 동한(후한) 영제 광화() 4년인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제갈근이고, 동생은 제갈균이다. 그의 자는 공명()이고, 호는 와룡(), 복룡()이다.

동한 말 세상이 혼란에 빠졌고, 그의 나이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로 와서 유표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후베이성 샹양() 인근의 룽중()이란 마을에서 학문과 농사로 소일했는데, 이 시기에 지었다는 노래 <양보음>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당시 형주에는 전란을 피해 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제갈량이 샹양 지역의 유명한 문인이며 대부호였던 황승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얻은 유비"

당시 그는 스스로를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최초의 패자로 만들었던 대정치가 관중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 비유했는데, 동한 헌제 건안() 12년인 207년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에게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유비는 허난()성 루난()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룽중으로 직접 찾아와 자신의 책사로 기용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고사가 유명한 ‘삼고초려(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다)’이다.

이후 화북 일대를 석권한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자 제갈량은 남쪽으로 퇴각하는 유비를 수행하였다. 조조군의 추격으로 위기에 몰린 유비 측은 유표의 장남 유기의 도움을 입어 강하(, 지금의 후베이성 우한()시 지역) 지역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이후 조조가 동진하자 제갈량은 사신의 자격으로 몸소 동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하여 반조조 동맹을 성사시켰다.

조조군을 격파하고 촉한의 재상이 되다

대표적인 산문()으로 《출사표()》, 《융중대()》, 《계자서()》 등이 있다. 목우유마(, 소와 말을 본떠 만든 수레), 공명등(, 종이로 만든 등으로 연을 날리듯 날려 구원을 요청했다 함) 등을 발명하고, 연노(, 쇠뇌, 여러 화살을 동시에 발사가능함)를 서주() 낭야() 양도() 사람으로 자는 공명()이고, 호는 와룡(), 복룡()이다.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산문가, 발명가이다. 유비()를 보좌하여 천하 삼분지계()를 제시했고, 형주()와 익주()를 취하고 촉한()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 남만()을 평정하고 북벌()을 주도했다. 벼슬은 군사중낭장(), 군사장군(), 승상() 등을 역임했다. 생전에 무향후(개량했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자는 공명(), 시호는 충무후()이며, 낭야군 양도현(  )에서 태어났다. 호족()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에서 숙부 제갈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207년(건안 12)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진언()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에 비유하였다. 


이듬해 오나라의 손권()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여,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신기묘산()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별다른 활약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형주와 익주 등 강남을 손에 넣은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계양()·장사() 등 3군()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세간에 구전하는 제갈량의 초인적 지략은 대부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기인하지만, 유비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 것은 소설과 역사서의 기록이 일치한다. 214년(건안 16) 유비는 성도()를 평정하고 나서 그를 군사장군()으로 삼아 자신이 출병한 뒤 군량과 병사를 대도록 하였고, 촉한의 황제에 오른 뒤에는 그를 승상()으로 삼았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업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취하여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 유선을 보필하였다. 재차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를 꾀하고, 윈난[]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한의 경영에 힘썼다. 


상승하는 위나라에 비하여 국력의 열세가 뚜렷한 가운데 오장원()에서 위나라의 사마의()와 대치하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위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와 《후출사표()》는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충정으로 가득한 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후인들이 중국 곳곳에 무후사()를 지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제갈량은 서주() 낭야() 양도 사람으로, 동한(후한) 영제 광화() 4년인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제갈근이고, 동생은 제갈균이다. 그의 자는 공명()이고, 호는 와룡(), 복룡()이다.


동한 말 세상이 혼란에 빠졌고, 그의 나이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로 와서 유표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후베이성 샹양() 인근의 룽중()이란 마을에서 학문과 농사로 소일했는데, 이 시기에 지었다는 노래 <양보음>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형주에는 전란을 피해 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제갈량이 샹양 지역의 유명한 문인이며 대부호였던 황승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그는 스스로를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최초의 패자로 만들었던 대정치가 관중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 비유했는데, 동한 헌제 건안() 12년인 207년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에게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유비는 허난()성 루난()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룽중으로 직접 찾아와 자신의 책사로 기용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고사가 유명한 ‘삼고초려(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다)’이다.

이후 화북 일대를 석권한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자 제갈량은 남쪽으로 퇴각하는 유비를 수행하였다. 조조군의 추격으로 위기에 몰린 유비 측은 유표의 장남 유기의 도움을 입어 강하(, 지금의 후베이성 우한()시 지역) 지역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이후 조조가 동진하자 제갈량은 사신의 자격으로 몸소 동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하여 반조조 동맹을 성사시켰다.

남쪽 호족세력을 정벌하고 북벌을 주도하다"

건흥() 3년인 225년,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 고정(), 주포() 등이 손권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직접 남쪽 정벌에 나섰다. 촉의 남부 지방은 유언과 유장 부자가 익주를 장악하던 기간부터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이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중 공방전 기간에도 반란이 일어나 이엄이 이를 진압한 전례가 있었다.

제갈량의 남쪽 정벌은 225년 봄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계속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제갈량은 불모지 깊숙이 직접 들어가 토벌을 단행하여 우두머리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동시에 그 지역의 세력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을 다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방 장관으로 기용함으로써 안정을 이루었고, 촉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제공하는 근거지로 삼았다.

건흥 5년인 227년 제갈량은 선주 유비의 유언을 명분으로 위나라에 대한 북벌군을 일으켰다. 출정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이 바로 유명한 <출사표>이다. 북벌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8년간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갈량은 북벌 기간 동안 전쟁이 없는 상황에도 한중에 상주했는데, 이 기간 촉한은 준전시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흥 6년인 228년 봄, 1차 북벌에서 제갈량은 사곡 과 기곡(, 지금의 산시(西)성 푸()성 서북쪽)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위연이 1만의 병사로 진령산맥을 넘어 장안(, 지금의 산시(西)성 시안(西))을 급습하는 ‘자오곡계책’을 제안하였으나 신중한 작전을 선호하는 제갈량은 이 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사곡의 본진은 제갈량이 지휘하였고, 기곡에 파견된 별동대의 지휘관은 조운이었다. 위 명제()는 조진을 도독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고, 조진은 장안과 가까운 기곡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제갈공명의 부인은 알고 보니 바느질에만 솜씨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제갈공명은 그런 부인의 도움으로 똑똑해질 수 있었다.


모티프 분석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의 주요 모티프는 ‘신통한 능력을 지닌 이인()’이다.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에서 황씨 부인은 돗바늘로 옷 바느질을 하고, 제갈공명을 집 안에서 헤매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여성 이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대표적인 고전 소설로는 「박씨전」과 「황부인전」 등을 들 수 있다. 재송동에서 채록된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은 『삼국지연의』와 「황부인전」을 바탕으로 새롭게 형성된 설화라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황부인전」에는 황씨 부인이 절색으로 변신하는 내용이 있는데,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소설이 구전을 통해 설화화 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선제()께서는 한나라를 찬탈한 역적과 같은 하늘 아래 설 수 없고,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했음에 만족해 앉아만 있을 수 없다 여기시어, 신에게 역적을 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현명하신 선제께서는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어, 신이 역적을 칠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함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않으면 왕업 역시 망할 것이니,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리까. 그리하여 제게 정벌의 사명을 맡기시고 의심치 아니하셨습니다. 신은 사명을 받은 날부터 자리에 누워도 편안할 수 없었고, 밥을 먹어도 맛을 알 수 없었습니다.(…)신은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할 것입니다.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이로울지 해로울지에 대해서는 지금 미리 내다보지 못합니다."

 '삼고초려'의 예우를 받고 유비의 모사가 되다" 

229년경,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다시 한 번 위나라를 정벌하려 떠나며 후주() 유선에게 이러한 <후출사표>를 올렸다고 한다. 이 중에서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 )”는 먼 훗날 청나라의 강희제가 신조로 삼았을 정도로 유명한 문구다. 그러나 이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제갈량은 중국사의 무수한 인물 중에서도 공자나 관우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적어, 진수가 쓴 <삼국지>와 상거의 <화양국지>, 그리고 제갈량 자신의 <제갈량집>(이 역시 상당 부분이 위작이라는 의심을 받는다)이 전부다. 그리고 이 문헌들을 통해 대략 살펴볼 수 있는 제갈량의 인생 역정은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갈량, 자는 공명(), 호는 와룡(). 181년에 낭야군 양도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제갈규는 태산군 승()이라는 비교적 하급직을 지냈고 제갈량이 어릴 때 죽었다. 형주의 융중에서 살게 된 것은 작은아버지 제갈현이 그를 데리고 유표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석광원, 석도, 맹공위, 서서 등과 학문을 닦았는데, 남들은 학문 자체를 깊이 탐구함에 비해 그는 대략만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뽕나무를 관리하고, 밭을 갈았다.한가할 때는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읊고, 무릎을 껴안은 채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갈량은 스스로를 춘추전국시대의 명재상 관중과 명장 악의에 비교했는데, 모두 곧이듣지 않았지만 오직 서서만이 그를 큰 인물로 알아주었다. 그리고 한 발 먼저 유비 에게 등용된 서서의 추천으로, ‘ 삼고초려 ’의 예우를 받은 다음 유비의 모사 ()가 된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남들은 할 수 없는 일을한 ‘위대한 바보 "

하지만 군사적 재능은 과장되었어도, 제갈량은 분명 다재다능했으며 보기 드문 역량을 갖고 있었다. 촉한군의 열세를 보완하고자 그가 창안했다는 팔진도, 목우유마, 연노 등은 성능이 과장되기는 했으되 실제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치 방식이나 <제갈량집>에 나타난 사상을 보면 그는 유가  법가 를 적절히 조화시켰다.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는 법가의 장점과, 인간적인 대우를 통해 덕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유가의 장점을 그는 모두 살렸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었다”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서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예정된 병사들에게 돌아가라고 함으로써, 병사들이 감격하여 전력으로 싸워 이겼다”는 에피소드는 원칙을 냉정히 지키며 따뜻한 인간미를 잃지 않은 예다.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
세 번 찾아준 은혜에 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두 대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
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서주() 낭야() 양도() 사람으로 자는 공명()이고, 호는 와룡(), 복룡()이다.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산문가, 발명가이다. 유비()를 보좌하여 천하 삼분지계()를 제시했고, 형주()와 익주()를 취하고 촉한()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 남만()을 평정하고 북벌()을 주도했다. 벼슬은 군사중낭장(), 군사장군(), 승상() 등을 역임했다. 생전에 무향후()로 봉해지고, 사후에 시호는 충무후()이다. 동진() 정권에서 무흥왕()으로 추봉되었다.

대표적인 산문()으로 《출사표()》, 《융중대()》, 《계자서()》 등이 있다. 목우유마(, 소와 말을 본떠 만든 수레), 공명등(, 종이로 만든 등으로 연을 날리듯 날려 구원을 요청했다 함) 등을 발명하고, 연노(, 쇠뇌, 여러 화살을 동시에 발사가능함)를 개량했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자는 공명(), 시호는 충무후()이며, 낭야군 양도현(  )에서 태어났다. 호족()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에서 숙부 제갈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207년(건안 12)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진언()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에 비유하였다. 


이듬해 오나라의 손권()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여,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신기묘산()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별다른 활약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형주와 익주 등 강남을 손에 넣은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계양()·장사() 등 3군()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세간에 구전하는 제갈량의 초인적 지략은 대부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기인하지만, 유비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 것은 소설과 역사서의 기록이 일치한다. 214년(건안 16) 유비는 성도()를 평정하고 나서 그를 군사장군()으로 삼아 자신이 출병한 뒤 군량과 병사를 대도록 하였고, 촉한의 황제에 오른 뒤에는 그를 승상()으로 삼았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업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취하여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 유선을 보필하였다. 재차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를 꾀하고, 윈난[]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한의 경영에 힘썼다. 


상승하는 위나라에 비하여 국력의 열세가 뚜렷한 가운데 오장원()에서 위나라의 사마의()와 대치하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위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와 《후출사표()》는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충정으로 가득한 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후인들이 중국 곳곳에 무후사()를 지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제갈량은 서주() 낭야() 양도 사람으로, 동한(후한) 영제 광화() 4년인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제갈근이고, 동생은 제갈균이다. 그의 자는 공명()이고, 호는 와룡(), 복룡()이다.

동한 말 세상이 혼란에 빠졌고, 그의 나이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로 와서 유표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후베이성 샹양() 인근의 룽중()이란 마을에서 학문과 농사로 소일했는데, 이 시기에 지었다는 노래 <양보음>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형주에는 전란을 피해 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제갈량이 샹양 지역의 유명한 문인이며 대부호였던 황승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얻은 유비

당시 그는 스스로를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최초의 패자로 만들었던 대정치가 관중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 비유했는데, 동한 헌제 건안() 12년인 207년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에게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유비는 허난()성 루난()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룽중으로 직접 찾아와 자신의 책사로 기용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고사가 유명한 ‘삼고초려(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다)’이다.

이후 화북 일대를 석권한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자 제갈량은 남쪽으로 퇴각하는 유비를 수행하였다. 조조군의 추격으로 위기에 몰린 유비 측은 유표의 장남 유기의 도움을 입어 강하(, 지금의 후베이성 우한()시 지역) 지역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이후 조조가 동진하자 제갈량은 사신의 자격으로 몸소 동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하여 반조조 동맹을 성사시켰다.


남쪽 호족세력을 정벌하고 북벌을 주도하다"

건흥() 3년인 225년,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 고정(), 주포() 등이 손권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직접 남쪽 정벌에 나섰다. 촉의 남부 지방은 유언과 유장 부자가 익주를 장악하던 기간부터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이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중 공방전 기간에도 반란이 일어나 이엄이 이를 진압한 전례가 있었다.

제갈량의 남쪽 정벌은 225년 봄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계속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제갈량은 불모지 깊숙이 직접 들어가 토벌을 단행하여 우두머리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동시에 그 지역의 세력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을 다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방 장관으로 기용함으로써 안정을 이루었고, 촉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제공하는 근거지로 삼았다.

건흥 5년인 227년 제갈량은 선주 유비의 유언을 명분으로 위나라에 대한 북벌군을 일으켰다. 출정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이 바로 유명한 <출사표>이다. 북벌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8년간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갈량은 북벌 기간 동안 전쟁이 없는 상황에도 한중에 상주했는데, 이 기간 촉한은 준전시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흥 6년인 228년 봄, 1차 북벌에서 제갈량은 사곡 과 기곡(, 지금의 산시(西)성 푸()성 서북쪽)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위연이 1만의 병사로 진령산맥을 넘어 장안(, 지금의 산시(西)성 시안(西))을 급습하는 ‘자오곡계책’을 제안하였으나 신중한 작전을 선호하는 제갈량은 이 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사곡의 본진은 제갈량이 지휘하였고, 기곡에 파견된 별동대의 지휘관은 조운이었다. 위 명제()는 조진을 도독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고, 조진은 장안과 가까운 기곡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조조군을 격파하고 촉한의 재상이 되다"

건안 13년인 208년 11월, 손권과 유비의 반조조 연합군이 적벽(, 지금의 후베이성 가어()현)에서 조조군을 격파하기에 이른다. 정사에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정사 『삼국지』 「선주전()」과 「산양공재기()」에 유비가 패주하는 조조군을 형주 남부까지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참모로 종군하거나 병참() 등을 담당한 것으로 본다.

이후 유비가 형남 4군, 즉 무릉, 장사(, 지금의 후난성 창사시), 계양, 영릉(,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 닝링현)을 정벌할 때 군사중랑장()으로 임명되어 행정과 병참을 담당하였다.

형주 남부를 장악한 유비는 이후 서촉(西)을 차지할 계획을 세웠고, 제갈량도 여기에 참전한다. 건안 16년인 211년 산시(西)성 한중()의 장노가 유장을 공격하자 유비는 이를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서촉으로 출병하였다. 이듬해 유장과 유비의 전쟁이 발발했고, 유비는 성도(, 지금의 쓰촨()성 청두시)를 공격하여 유장 정권을 뒤엎고 익주 를 빼앗았다. 이후 제갈량은 군사장군()으로 승진했다.

유비가 정벌에 나서면 제갈량은 성도를 지키면서 후방을 튼튼히 하고 군량 공급선을 확보했다. 이 시기에 새로운 법률인 <촉과()>를 제정하고 익주의 국가적 구조조정에 참여하였다. 219년 유비와 조조간의 한중 공방전이 발발할 때도 제갈량은 성도에 머물며 병참과 보급을 담당했다.


221년 유비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나라 이름을 한(, 촉한)이라고 하자 제갈량은 승상(), 녹상서사(錄)에 임명되었다. 223년의 손권과의 이릉전투 때 유비가 출정하자 제갈량은 성도에 남아 내정과 병참을 관장하였다.

장무() 3년인 223년, 유비가 죽고 후주 유선이 즉위하자 승상, 녹상서사, 익주목() 및 사례교위()를 겸하며 대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14년 동안 촉한의 재상으로서 실권을 행사하였다.

남쪽 호족세력을 정벌하고 북벌을 주도하다

건흥() 3년인 225년,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 고정(), 주포() 등이 손권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직접 남쪽 정벌에 나섰다. 촉의 남부 지방은 유언과 유장 부자가 익주를 장악하던 기간부터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이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중 공방전 기간에도 반란이 일어나 이엄이 이를 진압한 전례가 있었다.

제갈량의 남쪽 정벌은 225년 봄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계속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제갈량은 불모지 깊숙이 직접 들어가 토벌을 단행하여 우두머리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동시에 그 지역의 세력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을 다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방 장관으로 기용함으로써 안정을 이루었고, 촉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제공하는 근거지로 삼았다.

건흥 5년인 227년 제갈량은 선주 유비의 유언을 명분으로 위나라에 대한 북벌군을 일으켰다. 출정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이 바로 유명한 <출사표>이다. 북벌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8년간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갈량은 북벌 기간 동안 전쟁이 없는 상황에도 한중에 상주했는데, 이 기간 촉한은 준전시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흥 6년인 228년 봄, 1차 북벌에서 제갈량은 사곡 과 기곡(, 지금의 산시(西)성 푸()성 서북쪽)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위연이 1만의 병사로 진령산맥을 넘어 장안(, 지금의 산시(西)성 시안(西))을 급습하는 ‘자오곡계책’을 제안하였으나 신중한 작전을 선호하는 제갈량은 이 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사곡의 본진은 제갈량이 지휘하였고, 기곡에 파견된 별동대의 지휘관은 조운이었다. 위 명제()는 조진을 도독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고, 조진은 장안과 가까운 기곡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전쟁 초반의 상황은 제갈량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제갈량이 사곡에 진출하자 옹주(, 지금의 산시(西)성 서쪽) 일대의 호족들이 일제히 호응하였고 남안(, 지금의 푸젠()성 난안), 천수(, 지금의 간쑤()성 텐수이), 안정(, 지금의 간쑤성 딩시(西)시 안딩구) 3군을 점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제갈량의 후계자로 평가되는 강유가 귀순하였다. 반면 기곡 전선에서는 조운의 별동대가 국지전 도중에 조진에게 패해 한중으로 퇴각하기에 이른다.

활로를 찾은 조진은 장합에게 5만의 군사로 제갈량의 본진을 상대하게 하였다. 장합은 사곡과 한중을 잇는 가정으로 진격하여, 촉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하였고, 제갈량은 마속에게 방어하게 하였다. 하지만 마속은 협곡을 막아 방어하라는 제갈량의 지시를 무시한 채 산위에 둔병하였고, 장합의 포위전술을 맞아 고전하였다. 고상() 또한 열류성()을 빼앗겼다. 왕평이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였다.

보급로가 끊긴 촉군은 한중으로 퇴각하였고 1차 북벌은 실패한다. 이후 제갈량은 마속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처형했는데, 이 과정에서 ‘읍참마속’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제갈량은 후주에게 표를 올려 북벌 실패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스스로 우장군()으로 지위를 낮추었지만, 재상의 권한은 유지하였다. 

5. 진창과의 긴 전쟁이 시작되다"

건흥 6년인 228년 가을, 제갈량은 진창으로 진격하였다. 진창은 조진의 부하 장수인 학소가 불과 1천 명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었는데, 그는 짓던 외성을 버리고 대산관에서 농성해서 20일에 걸친 촉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후 조진이 낙양(, 지금의 허난성 뤄양)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출병하자 제갈량은 한중으로 귀환하였다. 이때 복병전을 통해 조진군의 장수인 왕쌍의 추격군을 격파하였다. 2차 북벌 이후 학소는 병으로 죽었다.

건흥 7년인 229년 제갈량은 진식에게 무도(, 지금의 간쑤성 우두시)와 음평(, 지금의 간쑤성 룽난()시 원()현)을 기습하게 하였다. 무도와 음평은 옹주(, 지금의 산시(西)성 서쪽), 양주(, 지금의 간쑤성 량저우)와 촉을 직접 잇는 요충지로 이곳을 점령하면 익주의 방어가 용이해진다는 장점이 있었다.

위나라에서는 옹양주도독 곽회가 진식의 촉군을 맞아 싸웠는데, 제갈량의 본진이 진격하자 곽회는 무도와 음평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겨울이 오자 양측은 소강상태에 진입하고, 제갈량은 한중으로 귀환하여 기회를 엿보게 된다. 무도와 음평을 점령한 공으로 제갈량은 승상직에 복직하였다.

해가 바뀌어 230년이 되자 조진은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반격을 시도하였다. 조진의 본진은 사곡에서 한중을 공격하고, 사마의와 장합의 2로군은 각각 상용 과 무도를 공격하였다. 이에 제갈량은 성고 에 본진을 두고 방어하였다.

이후 계속된 여름장마로 도로가 유실되고 병력 보급이 어려워지자 위나라군은 퇴각하였고, 그해 가을 제갈량은 위연으로 하여금 강중()으로 진출하게 하여 곽회의 위군을 상대하게 했다. 위연이 양계()에서 곽회군을 대파하였는데, 이 패배로 조진은 대사마()로 좌천되고 후임으로 사마의가 등장한다.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다가온 촉의 멸망"

건흥 9년인 231년, 제갈량은 다시 치산()으로 진격하였다. 4차 북벌부터 제갈량은 목우유마(소와 말을 본떠 만든 수레)를 사용하고 둔전(, 군사요지에 설치한 토지)을 강화하는데, 이는 매번 북벌에서 문제가 된 군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촉군은 가을보리를 수확하는 한편, 곽회의 위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치산 인근의 노성 에서 촉군과 위군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데, 사마의와 장합이 서로 맞지 않아 촉군이 승리했다. 사마의는 촉군에 대한 전략을 견벽거수(, 벽을 바라보며 수비만 하다)로 수정하고 수비로 일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병참을 담당한 이엄의 실수로 촉군은 다시 군량이 부족하게 되고 결국 퇴각하였다.

사마의는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합에게 촉군을 추격하게 하는데, 장합은 목문도(, 지금의 간쑤성 텐수이시의 도로)에서 촉군의 매복계에 걸려 전사하였다. 제갈량은 조정에 복귀하여 표기장군() 이엄과 거기장군() 유염()에게 북벌 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들을 실각시킨다. 이 와중에 상당한 마찰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후 3년 동안 북벌이 중단되었다.

건흥 12년인 234년, 제갈량은 북벌을 재개하였다. 기존의 북벌은 7~8만 정도의 병력이 투입되었으나 5차 북벌은 10여 만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촉군은 오장원 에서 위군과 대치했다. 곽회의 방어진 구축이 실패했고 사마의는 수비 전략을 고수하였다. 제갈량은 식량을 확보하면서 위군을 도발했으나 사마의는 움직이지 않았다. 4개월간의 대치 끝에 그해 8월 제갈량은 과로로 쓰러져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제갈량이 죽자 촉군은 장수 양의()의 지휘 아래 한중으로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의와 사이가 나빴던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왕평과 마대()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제갈량의 지위는 장완이 물려받아서 한수(, 한중지방을 흐르는 한수이 강)를 이용한 관중 공격을 준비했으나 그도 일찍 죽었다. 이후 촉의 권력은 비위가 물려받았는데, 비위는 강유와 대립하다가 촉은 국력이 쇠하여 곧 위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제갈량은 사후에 시호가 충무후()이며, 동진 정권에서 무흥왕()으로 추봉되었다.

대표적인 산문()으로 <출사표> 외에 <융중대()>, <계자서()> 등이 있다. 그는 목우유마 외에도, 공명등()이라고 하는 종이로 만든 등을 발명하였고,

화살이 연속 발사되는 연노()를 개량했다. 


관련 유적

제갈량묘(诸葛亮墓) 제갈량 무덤의 정식 명칭은 무후묘()이다. 무덤은 산시(西)성 남부 한중 분지 서쪽 몐()현의 정군산 남쪽에 위치해 있다.

무후사(武侯祠) 제갈량이 죽은 후 이를 애석하게 여긴 백성들이 사당 건립을 청했고 후주 유선이 명을 내려 지금의 산시성 몐현에 첫 번째 무후사당이 건립되었다. 이후 중국 대륙 각지에 무후사가 생겼는데 지금은 9곳의 무후사가 있으며 쓰촨()성 청두()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 청두 이외에도 허난성 뤄양(), 후베이성 샹양(), 간쑤성 치산(), 산시(西)성 치산산(), 충칭시 백제성(), 윈난성 바오산() 등지에 무후사가 있다.

제갈공명()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로 공명()은 자()이다. 유비()를 도와 오()와 연합하여 조조의 위군()을 적벽에서 격파한 후 촉한국()을 세운 공이 있다. 제갈공명을 우리나라 무속신앙에서 숭배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무렵부터가 아닌가 판단된다. 머리에는 관모()를 썼고 손에는 붓과 책을 들었으며 사실감 있는 얼굴은 인품()있는 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어깨에는 파랑색의 스카프를 두른 녹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흉배장식()을 하고있다.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에서 제갈공명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제갈공명의 처에 대한 이인담()이자 신이담()이다. 제갈공명의 아내인 황씨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활자본 고전 소설 「황부인전」과 필사본 고전 소설 「황처사전」이 있는데, 후반부의 이야기는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제갈공명의 아내 황씨 부인은 남면 명사인 황승언의 딸로 박색이었으나 그 재주가 제갈공명과 대등하여 당시에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갈공명이 전장에서 썼던 물건들 중에는 그녀가 만든 것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서 발행한 『해운대 민속』에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는 1996년 6월 22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으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이경룡[남, 82]으로부터 채록한 것,

그런데 그 집을 떠나려고 아무리 걸어도 계속 집 마당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 마당에 나온 장인 때문에 다시 신방으로 들어갔는데, 날이 밝아 와서 다시 옷을 보았더니 듬성듬성 기운 줄 알았던 옷이 틀로 박아 놓은 것처럼 고왔다. 제갈공명의 부인은 알고 보니 바느질에만 솜씨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제갈공명은 그런 부인의 도움으로 똑똑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을 떠나려고 아무리 걸어도 계속 집 마당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 마당에 나온 장인 때문에 다시 신방으로 들어갔는데, 날이 밝아 와서 다시 옷을 보았더니 듬성듬성 기운 줄 알았던 옷이 틀로 박아 놓은 것처럼 고왔다. 제갈공명의 부인은 알고 보니 바느질에만 솜씨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제갈공명은 그런 부인의 도움으로 똑똑해질 수 있었다,


모티프 분석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의 주요 모티프는 ‘신통한 능력을 지닌 이인()’이다.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에서 황씨 부인은 돗바늘로 옷 바느질을 하고, 제갈공명을 집 안에서 헤매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여성 이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대표적인 고전 소설로는 「박씨전」과 「황부인전」 등을 들 수 있다. 재송동에서 채록된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은 『삼국지연의』와 「황부인전」을 바탕으로 새롭게 형성된 설화라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황부인전」에는 황씨 부인이 절색으로 변신하는 내용이 있는데, 「아내 덕에 똑똑해진 제갈공명」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소설이 구전을 통해 설화화 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선제()께서는 한나라를 찬탈한 역적과 같은 하늘 아래 설 수 없고,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했음에 만족해 앉아만 있을 수 없다 여기시어, 신에게 역적을 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현명하신 선제께서는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어, 신이 역적을 칠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함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않으면 왕업 역시 망할 것이니,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리까. 그리하여 제게 정벌의 사명을 맡기시고 의심치 아니하셨습니다. 신은 사명을 받은 날부터 자리에 누워도 편안할 수 없었고, 밥을 먹어도 맛을 알 수 없었습니다.(…)신은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할 것입니다.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이로울지 해로울지에 대해서는 지금 미리 내다보지 못합니다."

 '삼고초려'의 예우를 받고 유비의 모사가 되다" 

229년경,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다시 한 번 위나라를 정벌하려 떠나며 후주() 유선에게 이러한 <후출사표>를 올렸다고 한다. 이 중에서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 )”는 먼 훗날 청나라의 강희제가 신조로 삼았을 정도로 유명한 문구다. 그러나 이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제갈량은 중국사의 무수한 인물 중에서도 공자나 관우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적어, 진수가 쓴 <삼국지>와 상거의 <화양국지>, 그리고 제갈량 자신의 <제갈량집>(이 역시 상당 부분이 위작이라는 의심을 받는다)이 전부다. 그리고 이 문헌들을 통해 대략 살펴볼 수 있는 제갈량의 인생 역정은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갈량, 자는 공명(), 호는 와룡(). 181년에 낭야군 양도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제갈규는 태산군 승()이라는 비교적 하급직을 지냈고 제갈량이 어릴 때 죽었다. 형주의 융중에서 살게 된 것은 작은아버지 제갈현이 그를 데리고 유표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석광원, 석도, 맹공위, 서서 등과 학문을 닦았는데, 남들은 학문 자체를 깊이 탐구함에 비해 그는 대략만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뽕나무를 관리하고, 밭을 갈았다.한가할 때는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읊고, 무릎을 껴안은 채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갈량은 스스로를 춘추전국시대의 명재상 관중과 명장 악의에 비교했는데, 모두 곧이듣지 않았지만 오직 서서만이 그를 큰 인물로 알아주었다. 그리고 한 발 먼저 유비 에게 등용된 서서의 추천으로, ‘ 삼고초려 ’의 예우를 받은 다음 유비의 모사 ()가 된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남들은 할 수 없는 일을한 ‘위대한 바보 "

하지만 군사적 재능은 과장되었어도, 제갈량은 분명 다재다능했으며 보기 드문 역량을 갖고 있었다. 촉한군의 열세를 보완하고자 그가 창안했다는 팔진도, 목우유마, 연노 등은 성능이 과장되기는 했으되 실제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치 방식이나 <제갈량집>에 나타난 사상을 보면 그는 유가  법가 를 적절히 조화시켰다.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는 법가의 장점과, 인간적인 대우를 통해 덕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유가의 장점을 그는 모두 살렸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었다”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서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예정된 병사들에게 돌아가라고 함으로써, 병사들이 감격하여 전력으로 싸워 이겼다”는 에피소드는 원칙을 냉정히 지키며 따뜻한 인간미를 잃지 않은 예다.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세 번 찾아준 은혜에 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두 대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script data-ad-client="ca-pub-4162949345545299"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인물. 역사 (국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라함,Abraham.  (1) 2017.12.15
리브가" ,이삭".  (0) 2017.12.15
야곱Jacob.  (0) 2017.12.15
劉備" 유비.  (0) 2017.11.12
삼국지 주요 인물들.  (0) 2017.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