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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역사(국내 .각지역.)

3·1 운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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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조선은 살아있다

일제의 무단 통치 10년. 이제 국내에서의 항일 운동 세력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어. 아마 일본은 만족스러웠을 지도 몰라. 

하지만 죽었다고 생각한 우리 민족이 한꺼번에 일어나 거족적으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전 세계가 놀랄 만큼 대규모로! 그게 바로 3·1 운동이야.

갑자기 이런 대규모의 민족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뭘까? 우선 세계적인 변화를 들 수 있어.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각국은 평화 협상을 진행하는데 뜻을 모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 여러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어. 

식민지 지배를 받던 세계 여러 나라들은 커다란 희망을 가지게 되었어.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독립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속속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에서는 주로 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지.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축이 되었고, 불교계에서는 한용운 등이 개별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어.

일본 도쿄 한가운데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2·8 독립 선언’을 했어. 

선언서를 각국 대사관과 조선 총독부, 일본 언론에게 공식적으로 보내고, 2월 8일에 독립 선언을 해다. 

일본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했지만, 국내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일본의 수도 한가운데에서 이런 용감한 선언을 한 것에 감동받았다. 

이 일은 3·1 운동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



더 알아보기 왜 3월 1일일까?


1919년 1월 22일, 일본의 압박과 감시 속에 살았던 고종 황제가 서거 하고 말아. 하지만 고종의 죽음은 좀 특이했어. 

시체의 색이 변하는 등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증거가 속속 나왔지. 

그러면서 고종의 죽음이 일본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조선의 백성들은 분노했어.  

3월 3일에 예정된 고종의 국상 때문에 지방에서 많은 유생들도 올라와 있었어. 

그동안 어떤 모임도 가질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은 전 국민의 분노와 단합을 바탕으로 대규모 민족 운동을 계획하게 된 거야.

기미 독립 선언 -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33인의 대표자가 구성되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3·1 운동의 불이 붙었어. 

선언문을 낭독한 민족 대표 33인은 모두 체포되었고, 뒤이어 종로 탑골 공원에서 학생 대표들이 다시 선언문을 낭독하며 3·1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 

서울, 평양 등의 7개 도시에서 시작되어 약 10일만에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함경도 등에 있는 도시로 퍼져나갔어.

3월 중순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도시 지역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하기 힘들어지자 이번에는 농촌으로 빠르고도 넓게 퍼져나가 5월 중순까지 전국적인 독립 만세 운동이 계속됐어.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학생과 종교인이 중심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노동자, 농민, 상인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었지.


시위에 직접 참가한 인원이 200여만 명이었고, 총 횟수는 1,542회나 되며, 전국 213개 군 중에서 203개 군이 시위에 참가했어.

 시위에서 사망한 사람만 7,509명, 부상자가 15,850명, 체포된 사람이 45,306명이라고 해(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통계에 따름).

2000만 인구의 10분의 1인 200만 명이 참가한 시위라면 정말 ‘거족적’이라고 부를만 하지? ‘10분의 1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면 안 돼. 

목숨을 걸고 직접 나선 사람들이 10분의 1이라는 의미거든. 비록 시위에 참가하지는 못해도 마음속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

인구가 4천 8백만인 요즘도 200만이 참가하는 시위는 드물 뿐 아니라 만약 그런 시위가 벌어진다면 그 힘은 어마어마할 거야. 그러니 3·1 운동의 영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지?

〈민족 대표 33인이 낭독한 독립 선언서〉
우리 조선은 이제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똑똑히 밝히며, 자손 만 대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공약 3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가장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 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 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민족 대표 33인의 삶 - ‘앞으로도 계속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일본인 재판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


권동진

“그렇다, 독립이 될 때까지는 어떻게든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고 할 것이다.”

권동진은 3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그 후에는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그야말로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쳤어.

나용환
“이렇게 말하면 비겁하다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 나는 정치에 무관심하므로 총독 정치에 불만이 없다.

앞으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

 안타깝게도 민족 대표 중 재판 과정에서 이처럼 자신의 신념을 접은 사람들도 있었어.

최린
“그렇다. 나는 끝까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당시 최린은 진심이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친일파로 마음을 바꿔 일제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일본 제국을 위한 전쟁에도 적극 참여했어.


한용운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용운은 시를 통해 일제에 저항했고, 신간회에 가입했으며, 불교를 통한 청년 운동도 했어. 

옥살이를 반복하다 병을 얻어 중풍으로 죽었지만, 그의 말처럼 영원히 독립의 열망을 가지고 있었어.

일본 진압 과 우리의 저항 - 수백만의 유관순

당시 일본 정부는 3·1 운동을 ‘조선 만세 소요 사건’이라 불렀어. 

‘소요’란 몇몇 사람이 거친 행동을 하며 들고 일어나 한 지방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말해. 

철저히 진압하면 사그라들 거라 생각했어.

일본은 3·1 운동의 규모가 그토록 커질 줄도, 3·1 운동의 정신이 그토록 깊숙이 자리 잡을 줄도 몰랐던 거지. 

일본이 잔인하게 진압할수록 우리 민족에게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우리는 조선인이다. 

우리는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3·1 운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유관순이야. 

마치 유관순이 3·1 운동을 주도했고, 유관순만 죽음을 당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수백만 명의 유관순이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고, 수천 명의 유관순이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어. 

유관순은 어린 학생이고 여자이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분명히 밝힌 인물이기 때문에 3·1 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꼽는 거야.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1915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 학당 보통과 2학년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며 꿈을 키워가던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 시위를 지휘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지.

뜻을 같이 한 학생들과 천안, 연기, 청주, 진천의 학교와 교회 등을 찾아가 만세 운동을 상의하고,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어.

유관순뿐 아니라 이 시위에 참가했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는 일본 헌병에 의해 죽고 집마저 불탔어. 

오빠 유관옥도 다른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 체포되고 말아다.

유관순은 처음에 3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재판 과정에서 일본인 재판관이 무슨 권리로 조선인을 재판하냐며 재판을 거부하자 최고형인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죽고 말았지. 그때 유관순의 나이는 열일곱이었어.


처음 일제는 만세 시위를 강하게 진압하지 못했어.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를 하니까
‘파리 강화 회의’에서 정말 조선의 독립이 결정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거든. 
일주일 정도 흐르고
사실을 확인한 후에는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어.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운동에 놀란 만큼 더욱 잔인하게 말이야.


① 평남 강서군 사천 장터 시위(3월 4일) : 3·1 운동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시위였어. 

3월 4일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였지. 

헌병 소장 사토와 친일 헌병 보조원들이 미리 숨어 있다가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아무런 경고도 없이 총을 쏴 참가자 수십 명이 죽고 주동자는 사형당했어.


②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4월 1일) : 교회 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주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준비한 만세 운동이야. 

독립 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과 그의 어머니 최씨가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으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당하거나 감옥에 잡혀갔어.


③ 합천 학살 사건(3월 16일) : 지역 주민들과 해인사의 승려가 시위를 벌였는데, 그 참가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어. 

일본군이 총을 쏘는 바람에 3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지. 

22일 주변 마을까지 연합해 3만여 명이 모여 다시 한번 시위를 벌였어. 

질서를 지키는 평화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 42명이 죽고 10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지.


④ 제암리 학살 사건(4월 15일) : 3월 말~4월 초에 수원 제암리에서 장날을 이용해 만세 운동이 일어났어. 

일제는 만세 운동을 뿌리 뽑는다는 구실로 4월 15일 제암리 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조리 가둬 놓고 불을 질러 죽여버렸어. 

이 소식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평화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일본을 거세게 비판하는 세계 여론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어.

3·1 운동의 의의 - 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3·1 운동은 국내에서만 일어난 건 아니야. 

전국적인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들은 해외 독립군 기지에서는 10여 년의 외로운 싸움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기뻐하며 만세 시위에 동참했어. 

3월 10일 이후 만주, 미국, 중국, 일본 등지에도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지.

시위뿐 아니라 구체적인 독립 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했어. 


3·1 운동 한 해 전에 이미 〈무오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고 독립을 준비하던 만주에서는 3·1 운동 이후 일본과의 무력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어.

세계 여러 나라의 언론에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의지를 밝히는 등 외교적 독립운동에도 힘썼어. 

일본은 국내의 만세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세계 여론도 잠재워 버렸지만,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3·1 운동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상하이에 임시 정부를 세우고 외교적 노력과 전쟁 준비에도 박차를 가했지.


3·1 운동의 의의
우선 3·1운동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어. 

우리 민족과 문화를 인정하는 방식이 등장한 거지. 

단체 및 언론 활동을 허락하고 초등 교육도 확대했어. 

일본에 대항하는 민족 의식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아무튼 우리 민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야.

우리 민족 스스로 우리의 의지와 힘을 알게 되었어.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같다는 것을 알았고, 만주와 상하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드는 성과도 있었으며, 이후에도 서로 합심하여 독립을 향한 노력을 계속해 갔지.


3·1 운동으로 독립의 의지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게 된 것도 중요한 의의야. 

일본 덕에 조선이 살기 좋아졌고, 조선은 일본의 통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던 세계 사람들은 조선이 독립하기를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어.

이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독립운동의 뜻이 반영되어 마침내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이후 대한민국은 세계로부터 독립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지.

3·1 운동은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어. 

중국의 5·4 운동, 대만과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도 영향을 주었지. 

중국에서는 ‘힘없는 조선 민중도 용감히 나서고 있는데, 중국인들은 무엇하고 있느냐!’며 전 중국에 3·1 운동을 알려 중국판 3·1 운동인 5·4 운동을 전개했어.


무단 통치

우리 역사 반만 년의 문을 닫다

[]

요약일본이 헌병을 동원해 조선을 지배한 시기를 일컬음.

8월 15일이 무슨 날이게? 광복절~~. 맞았어.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날이다. 

8월 29일은 무슨 날인지 아니? 바로 우리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수치스런 날이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의 역사는 없어지고 우리는 일본의 한 지역이 되어버린 거다. 

일본 왕이 우리 왕이고, 일본 법으로 우리나라가 다스려지고, 

제복을 입고 들어온 선생님에게 일본어도 배워야 했다.

일제 강점기 - 일본에 국권이 넘어가다

한·일 병합이 맺어졌어
한일 병합이라는 강제 조약을 맺어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일본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억압하기 시작했다. 

최고 기관인 조선 총독부의 관리는 전부 일본인이어서, 우리 의견과 상관없이 모든 결정을 내렸다. 

당연히 조선의 주권을 빼앗는 것에 반대하는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을 억압했어.

정치 단체를 만들거나 의견을 내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다.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강제로 끌고 가 고문하거나 죽이기도 했고, 민족 신문은 폐간되었다. 

이처럼 무조건 무력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무단 정치()라고 해.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데 경찰만으로는 부족해 군인들을 다스리는 헌병까지 동원할 정도였어.

일제는 무단 통치를 하기 위해 경찰과 헌병을 동원했어. 

1910년 헌병과 경찰이 7,900명이던 것이, 그 다음해에는 14,000명으로 증가했지.

모든 것을 일본의 뜻대로 했어
그냥 감시만 한 게 아니다. 

작은 죄를 지은 사람들은 헌병이 직접 벌을 내릴 수 있었다(즉결심판권). 

헌병에게 잘못 보이면 재판도 없이 당장 잡혀 들어가 벌을 받으니까 사람들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숙이고 피해 다녔지. 정말 법이고 뭐고 없는 무단 통치였어.

학교는 어땠냐고? 선생님들은 군복에 칼을 차고 교실에 들어와다. 

교사는 조선인이 대부분이고 조선 말로 수업이 진행되었지만 일본어와 일본의 역사를 가장 많이 배워야 했다, 

한국어는 중국어와 함께 선택 과목이었어.

조선인은 고등 교육을 받을 수준이 안 된다며 초등학교는 4학년까지만 있었고, 중등학교에서는 주로 실업 교육만 했으며, 고등 교육(지금의 대학교) 기관은 없애 버렸다. 

조선 왕조 오백 년 내내 지식인을 길러내던 성균관도 없어졌지.

1910년대에는 헌병들까지 경찰처럼 거리에 좍 깔려서 민간인들을 잡아갔다.


일본은 우리나라 경제를 완전히 망가뜨렸어

이 시기에 일본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수탈해 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교묘하게. 

마치 조선의 경제를 발전시켜주러 온 것처럼 .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빼앗아 갔다.


처음에는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근대적인 방법으로 확인한다며 시작했어. 왕실의 땅, 가문이나 마을의 공동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공동의 땅은 주인이 없다며 가져갔어. 공동의 땅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가져갔지. 일본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아 기간 내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의 것도 무조건 빼앗아 갔어. 땅 문서가 있어도 말이야.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전체 토지의 40%가 일본에게 넘어가 버렸어. 

빼앗은 땅은 어떻게 했냐구? ‘동양 척식 주식회사’라는 회사를 통해 팔거나 빌려 주었지. 

그 결과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어.

‘회사령’을 발표해 회사를 설립할 때 반드시 조선 총독부의 허가를 얻도록 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큰 돈을 모아 경제를 발전시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버린 거지.

읽을 거리 곤장은 흔한 벌 아닌가?

태형이라고 하는 곤장은 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던 형벌의 하나로, 굉장히 흔한 벌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다. 

알고 보면 조선 시대에는 곤장을 그리 자주 때리지 않았다. 

정치범이나 아주 못된 짓을 한 사람에게만 태형을 내렸다. 

일제 시대에는 조선인에게만 태형을 적용해 아주 작은 잘못만 해도 ‘벌금 얼마에 태 몇 대’라는 식으로 곤장을 때렸다. 

못된 아이를 다루듯 매일 때린 거다. 

일본이 얼마나 우리 민족을 우습게 봤는지 짐작이 되지?

독립운동 - 소리 없는 저항

일제의 무단 통치하에서도 우리 민족은 나라 안팎에서 항일 투쟁을 벌여 나갔어.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눈치 챈 일본은 미리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항일 투쟁의 중심지인 호남 지방에서 의병의 씨를 말려 놓았지. 

1910년대의 민족 운동은 작은 규모로 비밀리에 진행되었어.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활동하던 신민회는 1911년까지도 활발히 항일 운동을 전개했지. 

이밖에도 많은 비밀 단체들이 무력이나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일본의 억압을 받게 되었어. 

독립운동의 중심은 국외로 옮겨질 수밖에 없었고 많은 항일 무장 세력이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어.

대표적인 독립운동 기지는 신민회가 중심이 되어 건설한 서간도의 삼원보,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상설 등이 세운 북만주의 한흥동,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의 신한촌 등이야. 일본의 지배를 피해 넘어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만든 마을을 배경으로 수십 개의 학교와 군사 학교가 세워지면서 독립운동 기지도 같이 들어섰지. 

규모가 큰 곳에는 임시 정부가 들어서기도 했어.

더 알아보기 조선 총독부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조선 총독부는 일부러 경복궁을 가로막으며 세워졌어. 조선의 기를 막기 위해서지. 

그런 총독부 건물은 광복 후에도 ‘중앙청’이란 이름으로 계속 사용되었어. 

그것을 대신할 만한 큰 건물이 없었기 때문이야. 

박정희 대통령 때에는 정부종합청사 등이 생기면서 총독부 건물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했지. 

1995년 8·15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총독부 건물에 우리 유물들을 전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드디어 철거됐지.


‘3·1 운동은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그 까닭은 독립 의지를 표시할 때 민중이 스스로의 뜻을 표시하였을 뿐 어떤 폭력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태도야말로 반제국주의, 반침략주의에 가장 알맞은 위대하고 비장한 운동인 것이다.’(중국 잡지, 〈조선 독립의 감상〉

‘일본은 처음 얼마간 개혁을 하였으나 곧이어 본뜻을 드러냈고, 조선 민족은 항일 독립 투쟁을 줄기차게 계속했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1919년의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조선의 청년들은 맨주먹으로 적에 대항하여 용감히 투쟁하였다. (중략)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듣는다면 너도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인도 독립운동가 네루가 옥중에서 딸 인디라 간디에게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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