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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 三一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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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 三一節.


3ㆍ1 독립 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민족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제정한 국경일.

삼일절은 일제 강점기때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펼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1919년 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어요.


3·1운동의 기미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기 전, 만주에서 대한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고, 일본에서는 2·8 독립선언이 발표되었어요.

1919년 3월 1일 정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기 위해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적 시위를 열었어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년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어요.


'삼일절 노래' 가사 악보

삼일절 노래 악보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1919년 3·1운동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단결을 굳게 하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로 5대 국경일 중 하나.

내용

{3·1절()의 역사적 의의} 삼일절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일로 평가받는다.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인 의의 때문이다.

이 점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밝히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5대 국경일의 하나로 3월 1일이다.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일제의 압박에 항거,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여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으며,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휴일이다.

이 날은 3부 요인을 비롯해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며, 조국 광복을 위하여 싸우다 순국한 선열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별도로 탑골공원에 모여 그 날의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

정부에서는 광복회 회원들에게 철도·시내버스·수도권전철 등에 대한 무임승차의 편의를 제공하며, 전국의 고궁 및 공원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도록 하고, 일반 가정은 전국적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여 그 날의 의의를 기린다.


일제의 철통같은 무단통치를 뚫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명한 거부와 문화적, 역사적 민족 개념에 기반한 이상적 국가 건설이라는 지향이 한국 민족 개개인에게 뿌리 내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비록 3·1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 통치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3·1운동은 비로소 한국 민족을 한국 민족으로 각성시켰던 것이다.


3·1운동 이후 활동한 거의 모든 독립 운동 세력은 3·1 운동을 자신들의 모태로 간주하였으며, 독립 운동의 역사적 당위성과 그들 활동의 역사적 논거로서 3·1운동을 꼽았고, 따라서 매년 이날을 기념하면서 독립을 향한 의지를 새롭게 했다. 

1920년 3월 1일 상해 올림픽대극장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주최한 제1회 삼일절 기념식에서 안창호는 “과거 일년간 일인은 이날을 무효화하려 하였고, 우리는 이날을 유효하게 하려 싸웠소. 


일인의 최대 문제는 이날을 무효로 돌리는 것이고, 우리의 최대 의무는 이날을 영원히 유효하게 함이외다. …… 그리하기 위하여 우리는 작년 3월 1일에 가졌던 정신을 변치 말자 함이요.” 하고 연설했는데, 이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모든 세력들에게 3·1운동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적절히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족을 한국 민족으로 각성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던 3·1운동은 당연히 해방 이후에 전 민족적으로 기념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1946~1948년까지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다투었던 각 정치 세력은 자신들이 3·1운동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삼일절 기념식을 자신의 주도로 치르기 위해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3월 1일은 ‘삼일절’이라는 명칭으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 되었다. 

매년 3월 1일에는 3부 요인을 비롯해서 광복회와 독립 유공자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삼일절 기념식을 거행한다. 

지역별로 1919년 3·1운동 당시 각 지역 만세 운동 광경의 재현을 비롯한 다채로운 행사를 열기도 한다.

 '삼일절 노래' 계이름 악보

삼일절 노래 계이름 악보
삼일절 노래 (초등 교과서 음악)


삼일절이 되면 정부에서 주관하여 기념식을 열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 돌아가신 애국운동가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그 뜻을 돌아보는 의식을 해요. 

가정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긴답니다.


원인과 배경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태형령()으로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했다.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민족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주체적인 여건을 준비하였다. 

1910년대 국내의 항일민족운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첫째는 독립전쟁론의 관점에 기초해 무장조직의 결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했던 비밀결사운동이다. 

대한독립의군부, 민단조합, 광복회, 조선국민회 등의 비밀결사가 각지에서 결성되어 군자금 모금과 무기구입 등을 추진했다. 

많은 조직들이 일제에 발각되어 파괴되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3·1운동 당시 각지에서 나타난 비밀결사의 모체가 되었다. 

둘째는 실력양성의 관점에 기초해 종교단체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문화운동이다. 

1910년대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각지에 설립된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은 3·1운동 당시 각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조직하는 거점이 되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셋째는 일제의 경제수탈에 대한 농민·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운동이다.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반대투쟁, 삼림정책 반대투쟁, 각종 조세 반대투쟁 등을 벌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주재소나 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기구를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노동자들도 민족적 차별대우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농민·노동자의 투쟁양상은 3·1운동에서도 항일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여 나타났다.

이처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가 3·1운동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된 기본 동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한 국제정세의 변화도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의 성격을 지닌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열강 간의 힘 관계가 재조정되어 국제 정치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등에서 전제국가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하여 새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 치하의 피압박 민족들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선언하면서 식민지 민족운동들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1918년 1월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세계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즈음하여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시대 분위기는 국내외에서 항일민족운동의 기운을 고조시켰으며,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을 ‘세계 개조의 신시대’로 인식하면서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을 환기시켜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

준비 과정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국외의 항일운동세력은 국제 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였다.

상하이[]에서는 1918년 6~7월 무렵부터 여운형(김규식(장덕수()·김철()·선우혁(서병호(한진교(조동호()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Charles R. Clane)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김순애()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하였다.

일본에서는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로 꾸며 모임을 갖고 최팔용()·김도연(백관수(서춘(椿) 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과 이광수()를 국내와 상하이로 파견하였고, 2월 8일 유학생대회를 열어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국권강탈을 고발하고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였다.

국내에서도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윌슨의 14개조 강화원칙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 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하였다. 

상하이, 미국, 도쿄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운동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이승훈(양전백()·길선주() 등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송계백도 최린()을 통해 도쿄 유학생들의 소식을 손병희(최남선(송진우() 등에게 전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처음에는 각기 운동을 계획하다가 1919년 2월부터는 함께 협의하였고, 여기에 한용운() 등의 불교계 인사가 가담했다.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민족대표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2월 하순 박희도()와 이갑성()에게 종교계의 계획에 합류할 것을 요구받고 일단 민족대표들의 계획에 합류한 뒤 3월 5일에 다시 서울에서 독자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 결과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 등이 작성되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사전에 배포되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과 시위, 독립선언서의 배포 등의 계획을 준비하였다.

전개 과정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의 전개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점화기)에서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을 특징으로 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한 2단계(도시확산기)에 운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되었으며,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 중순 이후의 3단계(농촌확산기)에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하였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으며, 시위의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의 시기에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폭력투쟁으로 나타났다.

3월 1일에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과 평양·의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를 군중들이 모여 있던 탑골공원에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하였다.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오후 3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에 일본 경찰에 통고하여 스스로 체포되었다.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장소 변경에 당황하여 강기덕 등을 민족대표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2시 30분 무렵에 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서울역·정동·이화학당·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2일에는 함흥·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해주·개성 등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력이 강한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주요도시들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3월 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였고,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서울의 학생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평양과 광주 등의 학생들도 결사대를 조직해 이에 참여했다. 

이 날의 시위는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참배객들에게 운동의 지속성을 전파하여 3월 중순 이후 각 지방으로 시위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3월 10일 이후에는 시위가 경상도·전라도·강원도·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확대되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는데, 이 과정에는 교사와 학생 등 지방 사회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들은 선언서 등의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했으며, 비밀결사와 결사대를 조직해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하였다. 

청년과 학생들이 주도한 비밀결사는 전단과 격문 등을 제작·배포하여 투쟁열기를 높였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신문을 만들어 민족의 총궐기와 결사항쟁을 촉구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에 발간되었던 신문은 <조선독립신문>, <노동회보>, <반도의 목탁>, <충북자유보>, <혁신공보>, <각성호외보>, <광주신문>, <강화독립회보> 등 30여 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조선독립신문>은 27호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던 청년과 학생들은 독립청원이라는 대외의존적인 태도를 지녔던 민족대표들과는 달리 민족의 주체역량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동은 3월 중순 이후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노동자·농민·중소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중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서울에서는 3월 5일에 앞장섰던 학생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으나, 3월 4일에 시작된 평양과 선천의 철시투쟁에 이어 3월 9일부터 서울 시내의 주요 상점도 철시를 하면서 상인들도 항일투쟁에 나섰다. 

3월 20일 무렵부터는 노동자들의 궐기를 호소하는 <노동회보>가 배포되었고, 3월 22일에는 남대문 앞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날부터 시내 곳곳에서 야간시위가 계속되었으며, 3월 26일에는 경성철도와 전차 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노동자의 항일시위는 고양·부천·시흥·김포 등 주변 농촌 지역의 시위를 촉발시켰다.

농민 시위는 주로 장날에 일어났는데, 시위 주동자들은 각 마을로 통문을 돌리거나 전단을 살포하여 미리 시위 계획을 알렸다. 

장을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각지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경험을 전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과거 의병투쟁이 활발했던 지역에서는 산상봉화시위나 횃불시위 등을 벌이기도 했으며, 떼를 지어 며칠씩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시위에 참가하는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운동이 발전될수록 투쟁 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비폭력적인 만세시위운동에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폭력투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으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일제의 권력기관에 대해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헌병의 총격 등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면 군중들은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본인과 친일인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빼앗아 소각하는 등 무력을 행사했다. 

처음부터 일제의 권력기관을 접수하려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원도 통천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국외독립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간도·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은 3·1운동 당시 국내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화성 제암리·천안 아우내·정주 곽산·남원 광한루·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저질렀다.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


의의 와 한계..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것은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으며,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물리적인 폭압만으로는 3·1운동으로 분출한 민족의 저항의지를 막을 수 없었으므로 형식적이나마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일부 완화하여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다. 

이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

3·1운동은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를 다르게 한 채 분산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전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기 위해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민중의 투쟁력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계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주체역량보다 외세에 의존해 독립을 얻으려 했다.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내세웠고, 일본 정부에 독립의 취지를 건의하여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독립청원의 방식에 의존했다.  

3·1운동의 경험을 통해 민족의 주체역량에 기초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실력양성과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체계화하였다.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민찬호()·정한경()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8년 12월 조소앙()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김좌진(황상규(박찬익()·김교헌()·안창호·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이듬해 2월 1일 이를 발표하였다. 

음력으로 무오년()에 작성되어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무오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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