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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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왕사 스님,
속성 김(金).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의 아들. 15세에 출가, 승려가 되어 스승을 따라 불도(佛道)에 정진하였다. 공산(公山:현 대구광역시 팔공산)에 있다가 영심(永深)이 진표사(眞表師)의 계법(戒法)을 이어받고 속리산(俗離山)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을 때 석가를 받드는 그의 지극한 정성이 영심에게 인정되어 정계(正戒)를 받았다.
영심이 그에게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봉행하라”며 간자(簡子)를 주었다. 간자를 받들고 공산에 돌아와 동화사(桐華寺)를 짓고 그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다
옛날 팔공산에는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좀 과장된 표현이겠으나 오늘날에도 절은 많다. 산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기왓장이나 주춧돌이 어느 정도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심지계조(心地繼租)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 심지는 신라 제 41대 헌덕왕(憲德王, ?∼826, 신라 제41대왕. 재위 809∼826) 김씨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있고 천성이 맑고 지혜가 있었다.
15세에 머리를 깍고 스승를 따라 불도에 부지런했다. 중악(中惡)에 가서 살고 있는데 마침 속리산의 심공(深公)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불골간자를 전해받아서 과증법회를 연다는 말을 듣고 뜻을 결정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례를 허락 받지 못했다. 이에 땅에 앉아서 신도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칠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으나 심지가 서 있는 사방 열 자 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그 신기하고 이상함을 보고 법당에 들어오기를 허락했으나 심지는 거짓으로 병을 칭탁하여 들어가지 않고 예배를 했다
마침내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니 이는 마치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선계산(仙溪山, 전북 변산반도에 있는 산)에서 수도하던 중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는데 지장보살이 매일 와서 위로했다.
법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중에 옷깃 사이에 간자 두 개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가지고 돌아가서 심공에게 아뢰니, 영심(永心)이 말하기를 " 간자는 함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 하고 조사해 보니 함은 봉해 둔 대로 있는데 열고 보니 간자가 없었다. 심공이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는데 간자가 먼저와 같이 다시 돌아와 아뢰니 심공이 말하기를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 하고 간자를 주었다.
심지가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선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아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는 엎드려 공순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불타의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 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던져 점치도록 하자." 이에 신들과 함께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간자를 던지니 바람에 날아간다. 이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막현던 바위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길이 훤해지네/ 불골간자를 찾아 얻어서/ 깨끗한 곳 골라 장상 드리려네.
노래를 다 부르고, 간자를 숲속 샘에서 찾았다. 곧 그 자리에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의 동화사 첨당(籤堂)이라고 한다.
심지왕사 스님의 삼국유사에 있는 다른이야기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이 그렇듯이 일종의 설화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좌우간 진표율사가 선계산 토굴에서 미륵불에게 손수 얻었다는 불골간자는 동화사에 전래된 것만은 동화사 사적기 등을 봐도 명확하다.
심지가 영심으로부터 전수받아 팔공산 상봉에서 그것을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지었다는 첨당(籤堂)이 곧 동화사의 원터가 되는데, 이를 두고 간송미술관장인 최완수(명찰순례 저자 ; 대원사)씨는 지금의 금당암 극락전 북쪽 수마제전 근처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최관장은 그 이유로 극락전 앞에서 팔공산을 바라보면 주봉이 극락전과 일직선에 놓이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심지 스님의 입산 시기가 좀 복잡한 데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비록 15세에 중악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아버지 헌덕왕이나 심지의 출생연도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법흥왕 14년(527)이나, 그보다 앞의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동화사를 창건하였다는 내용에 대하여는 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재창은 일설에는 혜공왕 2년(782)으로, 다른 기록 즉, 동화사 사적기에는 흥덕왕 7년(832)으로 되어 있어 약간의 시차가 있으나 심지의 생존 연대를 감안,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원래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로 부르다가 흥덕왕7년(832)에 심지왕사가 중창할 깨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오동나무 꽃이 피어 동화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팔간자를 봉안했기 때문에 공산이던 산 이름도 팔자를 더하여 팔공산으로 불렀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불과 15세의 어린 나이에 신라 왕자인 심지가 팔공산에 입산하여 불도를 닦으며 수도한 행적을 한번 더듬어 보자.
일설에는 신라의 서울 경주를 벗어난 심지가 맨 처음 팔공산으로 들어온 것이 지금의 영천, 즉 대한불교 조계종 제 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 중암암(中岩庵)이라고 하나, 심지 스님이 직접 창건 또는 중창을 했다는 사찰과 암자에 대한 자료를 분석해 보니 중암암 입산설은 사실과 다름이 발견됐다.
이제 와서 누가 그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또한 따져서 무슨 실익이 있으랴만 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료라도 한번 정리해 볼까 하여 뽑아 본 결과는 표와 같다.
이 자료를 보면 심지 스님의 팔공산 입산은 중암암이 아니고 파계사일 가능성이 높다. 그후 스님께서는 동화사를 중창하시고 중암암, 묘봉암, 환성사를 차례로 창건하신 것이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창건 또는 중창한 절이 서로 가깝게 있는 것도 아니고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있을 뿐 아니라, 기계의 힘도 빌릴 수 없었을 당시 이 험한 팔공산을 어떻게 오르내리며 절을 지었을까 하는 의문인데, 스님들의 절 창건 또는 중건이라는 것이 직접 돌과 흙을 운반해서 짓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지휘, 감독한 사실도 창건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빠를 것으로 생각된다.
심지왕사 스님의 또 다른 이야기
신라 왕자였던 심지 스님은 영산인 이 팔공산에 들어와 서쪽에는 파계사, 북쪽에는 중암암, 묘봉암, 동쪽에는 환성사, 남쪽에는 동화사를 배치하여 오늘날 불교성지의 기틀을 닦으셨다. 속세와 인연을 끊게 된 동기도 어쩌면 아버지인 헌덕왕이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데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동화문을 막 들어서 얼마를 가면 큰 절 못 미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으니 비로암이다. 이 암자 단아한 모습의 3층 석탑이 있고,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심지 스님의 작품이라고 한다. 각기 보물 제247호 제2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심지 스님을 파계사, 동화사에서는 왕사라고 하는데, 왕사 제도가 고려때부터 시행된 사실을 감안하면 표현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다. 스님이 처음 입산했다는 중암암과 필자가 조사한 바 가장 먼저 창건한 절로 알려진 파계사에는 다 같이 경관이 수려할뿐더러 재미있는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중암암은 벼랑에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기도 하지만 큰 자연석문을 지나서 자리잡고 잇기 때문에 일명 '돌구멍절'이라고 한다.
삼지대사는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의 아들로서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불교에 정진하였으며, 팔공산에 있다가
영심스님(永深)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해 받아 속리산에서 법회를 연다는 소식에 찾아가 영심스님에게 간자(簡子)를 받아왔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이 오동나무는 동화사 중창과 인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파계사 등을 창건하여
팔공산을 불국토(佛國土)로 만들고자 한 대사(大師)를 기리기 위하여 '심지대사(心地大師)나무' 라 이름 지었다
관음전(좌) 중암난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대웅전 주련의
금강경 사구게)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꿈이요
환상이요 몰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동화사 대웅전(桐華寺 大雄殿)
초창연대는 알수 없고 신라시대 대 창건된 이후 오늘날까지 8번 중창되었는데 지금의 대웅전은1727년(영조 3)에서 1732(영조 8)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둥과 기둥사이에 지붕을 받치는 여러개 포가 놓인 다포식 건축이며 내부 불단 위에 삼세불상인 석가모니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를 봉안하였다,
축대 양쪽 아래는 한쌍의 괘불대와 노주과 있고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는 정면에 반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 위로 닫집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으며 특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대웅전 정면 문짝에 새겨진 꽃살문!
이는 부처님께 꽃을 공양한다는 불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가공하지 않은 아름드리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자연미와 함께 건물의 안정감도 살펴볼 수 있다 (보물 제1563호로 지정)
유래1
대구의 진산이라 할 수 있는 명산인 팔공산은 신라 말기에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를 공격하자 고려 태조 왕건은 정병 5천명을 거느리고 신라를 구원하려다가 도리어 이곳에서 후백제군에게 포위당하여 전세가 매우 불리해졌고. 이 때 왕건의 부하장수인 신숭겸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견훤의 군사와 싸우다 전사하였을 뿐 아니라 김락, 복지겸, 홍유인등 8명의 부하장수도 전사하였는데, 그 틈을 타서 왕건은 겨우 목숨을 보전케 되었다고 한다.
팔공산이라는 이름은 이들 8명이 순절한 곳이므로 붙여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유래2
통일신라 때 호국 성신으로 숭배되는 오악이란 산이 있었다,
동쪽으로 (토함산 동악) 서쪽으로 (계룡산 서악)
남쪽으로 (지리산 남악) 북쪽으로 (태백산 북악)
신라의 중심 (팔공산 중악)
오악의 산은 통일 신라를 지켜주는 성신으로 숭배 되며서 그 한가운데 자리한 팔공산은 통일신라 성신의 중심 산이었다,
신라 왕실 차원에서도 팔공산(중악)은 신라의 상징적인 산으로 관리가 되었고 발전이 되며서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팔공산 (중악) 전체가 마치 거대한 호국불교의 도량처가 되어 있었다 (삼국유사)
이후 통일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개국이 되고 이때부터 팔공산이라 불렀다는 몇가지 설이 전해 내려온다,
1. 8 고을에 걸친 산이다,
2. 8 성인이 득도한 산이다,
3. 8 간지가 보관 되어 있었던 산이다,
4. 8 공신이 전사한 산이다,
첫번째 조선초기 이후 팔공산에 걸친 고을로 해안. 신령. 부계. 팔거. 하양 등이었고,
두번째 설은 신라 원효대사 제자 8명이 천성산에서 팔공산으로 입산 수도하여 세사람은 삼성암 에서 다섯사람은 오도암에서 수도 끝에 8 성인으로 득도 했다는 설 세번째는 그당시 심지 대사가 속리산에 가서 진표 율사가 미륵 보살로부터 받은 8간지를 가져와 동화사에 보관 했다고 하여 팔공산이다고 불렀다는 설 등을 볼때
이 세가지 설은 시기적으로도 맞지가 않고 객관적 소명이 부족하고 큰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마지막 네번째 설이 팔공산 으로 불린 가장 가까운 정설로 들려진다,
후삼국 통일 전쟁때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공산 (지금의 지묘동) 전투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왕건이 포위가 되어 생사 기로에 놓이자 8장수들이 지혜를 모아 신숭겸이 왕건의 옷과 바꾸어 입고 8장수가 함게 적진으로 돌진 하자 변장한 신숭겸을 왕건으로 알고 견훤의 군사들이 신숭겸을 쫏자 반대편에서 퇴로가 열리고 그길로 왕건은 도주에 성공 하여 천신만고 끝에 개성에 돌아 간다 이후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고려를 개국하여 왕이 된다,
왕건은 고려의 왕으로서 공산 전투장을 다시 찻는다 자신을 살리고 장렬히 전사한 8 장수를 고려개국 8공신으로 추앙하고 신숭겸이 순절한 자리에 무덤을 다시 만들고 지묘사라는 사찰을 세워 이들의 충절을 기리게 하였다(지묘동 신숭겸 유적 참조)
지금도 매년 가을에 지묘동 신숭겸 무덤과 유적지에서 신숭겸 장군을 추모하는 고려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왕건이 공산전투서 살아남아 도주길의 지역명 야사들이 생생히 전해 내려온다,
공산전투장에서 8장수들이 지혜를 모아 퇴로를 열었다고 하여 지혜를 모은 그 전투장을 지묘동으로 불렀고 퇴로가 열려 가장 먼저 피신 한곳이 지금의 파군재 삼거리에 있는 신숭겸 장군의 동상 뒷쪽에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로 처음 피신하여 왕이 살았다고 하여 왕산이다,
왕산에서 파군재 삼거리로 내려와 단숨에 한동네에 도착하니 노인들은 다 전쟁터에 동원이 되어 없었고 어린 아이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어 불로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로동을 지나 또 한동네에 접어 들어 이제 겨우 위험을 피해 찌프린 얼굴을 활짝 폈다고 하여 해안동이라 불렀고 다시 평강동 쪽으로 도주하다 큰바위가 있어 그 바위위에 잠시 혼자 쉬워 갔다고하여 바위 이름을 독좌암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다시 평강동을 거쳐 초례봉을 넘어서 한마을로 접어 더는데 날은 어두운데 중천에 떠있는 달이 도주의 길을 비쳤다고 하여 그 고을을 반야월 이라고 불렀고 여기서 다시 밝은 달빛 아래로 도주하여 도착한 고을에서야 이제 겨우 살았다 고 안심을 하였다고 하여 안심이라는 지역등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불리며서 야사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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