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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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십경은 낙동강 일대에서 삼링진읍 나루터 하구로 펼쳐진 들판과 하천은 대외적으로는 주변의 정세를 관찰하는데 용이한 곳이며, 응천강을 따라 들어오면서 주변에 펼쳐진 십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밀양은 명산과 하천이 조화를 이루며 예로부터 수려한 경승지가 많고 지세가 영특하며 들판이 비옥한 고장이라 했다. 태백산의 지맥이 밀양으로 달려 들어와 동쪽으로 운문 · 가지 · 재약 · 정각 등의 명산이 이루었고, 서쪽으로 화악 · 호암 · 화왕산이 버티고, 남쪽으로 종남 · 덕대 · 만어 · 천대산이 우둑 솟아 있다. 명산 골짜기를 누빈 하천은 乙字形으로 城中을 휘돌며 응천강이 되었다. 서쪽으로 발원한 한줄기 물은 내진천을 이루어 낙동강에 합류된다. 응천강가 언덕에 위치한 영남루 왼편으로 영봉, 남포, 용두산이 위치해 있으며, 앞쪽으로 펼쳐진 강 건너편에는 마산과 사포, 율도였던 삼문동이 보이며, 오른편 뒤쪽으로 우령, 나현, 감천이 위치해 있다.
밀양은 삼한시대에 가락국에 속하였다가 신라에 병합되었고 고려 때에 경주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에 속했다가 “밀주군”으로 개칭되었고, 고려말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조선말 고종 때 경상남도 밀양군, 현재 밀양시가 되었다. 밀양십경은 삼랑진으로부터 북쪽으로 휘돌아가는 응천강을 따라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길목에, 영남루를 비롯한 경승으로써 십경이 구성되어 있고 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는 시각으로 좌우에 펼쳐지는 근경의 경관과 북쪽의 원경으로 펼쳐지는 특징을 보인다. 도심의 중도에 신도시가 건설되어 일목요연한 경관을 만나기가 수월하지 않지만 여전히 영남루를 중심으로 주위에 펼쳐지는 십경의 아름다움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우령한운(牛嶺閑雲) "우령이 멀리 겹친 청강석을 꽂은 듯하니, 영남의 아름다움이 천하에 제일일세. 아름다운 누각은 들보에 금오(金鰲)의 머리를 그렸고, 한가로운 구름이 둘러 있어 오색(五色) 위에 높다랗구나. 누가 구름을 무심타 하는가, 생령을 윤택케 하니 원래 술법이 있더라. 어찌하여 일찍이 해를 가려 부질없이 하늘을 막는다 하였던가. 큰 가뭄에 며칠 안에 장마를 이루어 주리라." 하였다.
마산비우(馬山飛雨) "동풍에 발이 걷혀 12난간이요, 한번 바라보는 안계(眼界)는 동남이 트였구나. 긴 숲이 가렸다 비쳤다 하여 물가와 물가가 새 뜨고, 마산(馬山) 한 점은 청아환(靑鴉?)일세. 문득 강 구름이 옻같이 검더니, 소낙비 날려 은살대 번득이네. 긴 바람이 강을 쓸고 가니, 반변(半邊) 청산이 지는 해를 머금네." 하였다.
응천조정(凝川釣艇) "응천이 멀리 은하수에서 와서, 누 앞을 푸르게 물들여 포도주를 괴네. 간밤에 작은 비가 삿대에 반이나 물을 불리니, 고기잡이 거룻배 뜻대로 물결 따라 돌아오네. 복사꽃 뜬 잔잔한 물결에 쏘가리 새끼 살쪄, 쟁반에 회를 치니 눈 날리는 듯하구나. 얼큰히 취해 북[鼓] 밑에서 창랑(滄浪)을 읊조리니, 인대황각(麟臺黃閣)은 알 바 아닐세." 하였다.
삽포어등(鈒浦漁燈) "삽포에 아침이 오니 새물이 일고, 하늘이 촉촉하여 가을 밤이 맑구나. 잎 떨어져 성긴 숲에 강바람 아니 불고, 어등(漁燈)이 반짝반짝 별을 늘어놓았네. 야로(野老)들이 기뻐서 나뒹굴 듯 하는구나. 금년에 풍어(豊漁)이니 돈 걱정 마라. 술에 가재 안주로 다시 서로 위로하니, 외로운 배가 갈꽃 가에서 밤을 새우네." 하였다.
용벽춘화(龍壁春花) "용두산(龍頭山) 위에 봄이 정말 좋구나, 철쭉꽃이 벼랑 가득히 봄이 한창일세. 하룻밤 좋이 온 비 진국술 같아서, 꽃이 만발하여 타는 듯 붉구나. 뉘 집 젊은이가 금장니(錦障泥 비단으로 만든 말 다래)했나. 술병 지니고 동에 서에 노니네. 날 저물어 돌아오니 봄빛이 얼굴에 가득하고, 말굽 아래 무수히 꽃잎 날리네." 하였다.
율도추연(栗島秋煙) "누 앞의 10리 앵무주(鸚武洲)에는, 밤 꽃이 눈 같고 향기 넘치네. 늘어진 밤송이 별같이 많아서, 가을이면 만섬 황금 거두네. 나무 끝에 희게 비낀 것은 연기 아닌 연기인데, 만가(萬家)의 연기는 멀리 서로 이었구나. 태평한 기상을 그릴 사람 없구나. 묘수(妙手)로 용면(龍眠 이공린(李公麟))을 수고시켰으면." 하였다.
영봉초욱(塋峯初旭) "금계(金鷄)가 꼬꾜 우니 부상(扶桑)의 새 아침일세. 육용(六龍)이 해바퀴를 떠받쳐 올려, 짙은 붉은 빛 햇살이 찬란하여 산호 빛이요, 큰 물결 만 두둑에 금빛 번득이네. 조금 뒤에 만 길 언덕에 날아올라서, 하루에 끝없이 푸른 하늘 한 바퀴 도네. 긴 밧줄로 구오(九烏 해의 별칭) 묶어다가, 만고 하늘 한가운데에 달아 놓았으면." 하였다.
나현적설(羅峴積雪) "강 구름이 컴컴하더니 먹을 흠뻑 뿌리네. 눈송이 훨훨 자리[席]보다 크구나. 하늘 땅 사이에 온통 맑은 기운이요, 한 조각 안개만한 틈도 없구나. 예전부터 삼백(三白)하면 풍년을 기약한다는데, 집집마다 백옥 같은 천 두둑 밭이니, 황충(蝗蟲)이 천 길 땅속으로 들어가고, 명년에는 집집이 벼를 거두리." 하였다.
서교수계(西郊修契) "봄날이 사람에게 알맞게 옥과 같이 따뜻하고, 서교의 방초(芳草)는 베보다 가늘구나. 교외에 가득히 꽃비 붉게 날리고, 봄 물결이 쏴쏴 유수곡(流水谷)일세. 동리 푸닥거리에 구름같이 모여서 잔질 빨라 어느덧 모두 흥청거리네. 풍류는 영화(永和) 봄만 못지 않은데, 취해 쓰는 글이 누가 왕 장군(王將軍)과 같을꼬." 하였다.
남포송객(南浦送客) "아침에 조금 오는 비는 기름같이 윤나고, 관가(官街)의 푸른 버들 명주실같이 가늘구나. 아이 하나 말 한 필에 쌍 술병 달고서, 손님 전송하러 남포교(南浦橋)를 바로 지나니, 인생의 모이고 흩어짐이 뜬구름 같아, 부별(富別) 빈별(貧別)이 모두 상심하는데, 여구(驪駒 송별곡) 한 곡은 노래 이미 한창이요, 하늘 길고 물 멀어 사람 근심시키네." 하였다.
영남루에서 응천강 일대(마산, 응천, 삽포, 율도)를 표현한 경관이미지
영남루의 정면에서 오른쪽 방향의 응천강 일대를 파노라마식으로 펼친 경관이미지.
밀양십경에서 나타나는 잔잔한 응천강에 더 있는 고깃배, 밤섬의 가을연기와 밤섬뒤편에 위치한 마산의 휘날리는 비 그리고 삽포나누터에 고기잡이배에서 흘러나오는 등불을 동일한 View에서 볼 수 있는 경관이미지.
남루에서 본 용벽/영봉/남포 방향의 경관
영남루에서 본 용벽, 영봉, 남포 방향의 경관으로, 자시산성이 있는 영봉산의 해돋이 광경과 첫 새벽을 깨우는 닭 울음 소리 그 오른편으로 용두산의 석벽에 피어난 봄 꽃, 그리고 객사의 손님을 전송하는 남포길 등을 동일한 View로 볼 수 있는 경관
우령한운
영남루에서 본 우령한운
청강석을 꽂은 듯한 우령의 아름다움에 한가로운 구름이 둘러싸여 있다는 경관이미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우령 오른편으로 나현이 같이 자리하고 있다.
용벽춘화
영남루에서 본 용두산(龍頭山) 절벽 위에 핀 봄꽃의 자태를 표현한 용벽춘화는 가곡동에 위치한 용두산을 말하는데, 용머리 모양의 절벽아래 짙푸른 심연을 이룬 곳 이다. 이 용두산의 용두목에 관련된 설화로 ‘이무기와 용두목의 용과의 싸움에 의해 조성된 반티산과 남천강의 유래가 나온다. 그 주변에는 응천강과 영봉산을 곁에 두고 있다.
아랑각
이조 명종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사백여 년 전의 일이다. 밀양부사로 도임한 윤부사에게는 아랑이라는 아리따운 딸이 있었다. 아랑의 이름은 東玉인데 자태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재주가 뛰어나 뭇총각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아랑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와 같이 살았다. 어느 달 밝은 사월 삼육일, 기망일 이었다
유모가 아랑에게 달도 밝고 좋은 날에 책만 읽을 것이 아니라 아버님에게 허락을 받아 영남루로 달구경을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랑은 윤부사에게 허락을 받고는 달구경을 나왔다. 아랑이 영남루 능파각 쪽으로 올라갈 무렵 유모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갑자기 어떤 괴한이 나타나 겁탈을 하여 하자 아랑은 죽을힘을 다해 항거했다. 괴한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랑을 죽여서 대발 속에 던져 버렸다.
괴한과 공모한 유모는 후환이 두려워 소문을 퍼뜨리기를 "아랑아씨가 호식을 당했다, 범이 와서 물어갔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안 윤부사는 온 나졸을 풀어서 무남독녀 딸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딸을 잃은 슬픔으로 화병을 얻은 윤부사는 할 수 없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윤부사가 서울로 올라간 후 밀양에 내려오는 후임 부사마다 그날로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부임하자마자 죽게 되니 그 밀양부사 자리는 비어 있게 되었다. 이때 글은 뛰어나자 배경이 없어서 급제를 못하고 과객으로 지내는 이진사라는 사람이 영남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 아래위로 소복을 하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한 처녀가 나타나서, "오랜만에 내 원수를 갚아줄 어른을 뵙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진사는 속으로 놀랐지만 워낙 대담한 사람이라서, "네가 도대체 귀신이냐, 사람이냐?"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그 처녀가 하는 말이 "나는 아무 때 윤모부사의 딸인데 유모의 꾀임으로 영남루에 달구경을 나왔다가 욕보이려는 괴한에게 죽음을 당해서 대밭 속에 버려졌습니다. 그래서 내 원수를 갚기 위해 새로 부임하는 사또를 뵙고자 했는데, 모두 보자마자 기절해 돌아가시고 오늘에야 좋은 어른을 뵈었으니 내 한을 풀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진사가 네 원수가 누구냐고 물으니 그 처녀는 말을 안하고 자꾸 뒷걸음질 치면서 빨간 깃대를 흔들고 가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이진사는 이상히 여기면서도 이 고을에 부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과거를 보니 급제하였다. 그래서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밀양부사를 자원해서 부임하게 되어 그날 밤을 지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니 밖이 소란했다. 신관사또 이진사가 죽은 줄 알고 모두 염을 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진사는 관속들을 호통하고 전임자를 막론하고 모든 관속들의 명단을 죄다 가져오라고 일렀다. 명단을 쭉 훑어보는데 제일 끝머리에 현직에서 물러난 사람으로 붉을 주(朱)자 기(旗)자 주기(朱旗)라는 이름이 나왔다. 이 때 진사는 빨간 깃대 생각이 나서 유모와 함께 그놈을 불러들이라고 명했다. 둘을 추궁하니 결국 모두 자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놈을 앞세워 영남루 대밭에 가서 보니 시체가 칼이 꽂힌 채 썩지도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이부사가 시체에서 칼을 뽑으니 뼈만 남게 되었다. 그 뼈를 거두어 좋은 자리에 묻어주니 그 후로는 밀양 고을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아랑이 지킨 순결의 정신을 기리어 아랑사당을 짓고 지금까지도 매년 음력 4월 16일 모범된 규수들을 뽑아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용바위
아기장수와 용바위
밀양군 산외면 용산에 용바위라 하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옛날 그곳에서 용마가 나왔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희실의 백장군이 났다고도 전하는데, 그 바위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희곡리의 한 가난한 집 아낙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워낙 가난한 집인지라 아이가 삼칠일을 넘기기도 전에 아낙은 아이를 혼자 집에 놓아둔 채 방아 품을 팔러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아낙이 집에 돌아와 보니 방안에 뉘어놓았던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낙은 깜짝 놀라 집인 곳곳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바로 아이를 처음 뉘어놓았던 방에서 아이를 찾아내게 되었다. 놀랍게도 아이는 방안의 천정에 붙어 있는 것이다. 아낙은 나중에 돌아온 남편에게 이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남편은 이 일이 필시 보통 일이 아니라고 하며, 자고로 큰 인물이 태어날 때에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행적을 많이 이룬다 하였는데 바로 이 아이가 그런 아이임에 틀림없다고 근심에 싸여 말했다. 왜냐하면 옛날부터 민가에 힘센 장수가 태어나면 장차 역적이 될 것이라고 하여 관가에서 아이와 부모를 죽여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이의 부모는 관가에서 알지 전에 아이를 손수 죽여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기름틀에 눌러놓고 돌을 매달았다. 그러나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락 한 섬을 다시 실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죽지 않았다. 그만큼 힘이 장사였던 것이다. 마침내 기름틀 위에 나락 석 섬을 올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아이는 발버둥을 치다가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용산의 용바위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좌우로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용마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용마는 하늘로 높이 날아 울부짖더니 보탕들에 있는 소(沼)에 빠져 죽어버렸다. 지금도 비가 오려고 날이 흐리면 용바위에서 뻘건 핏물이 배어나온다고 한다.
용두목
용두목에 관한 설화
가곡동에 위치해 있으며, 팔경의 용벽춘화(龍壁春花)라 하여 밀양팔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이다. 용머리 모양의 절벽아래 짙푸른 심연을 이룬 곳인데, 그 깊이는 알 수 없고 둘레는 5리쯤 된다. 본래 기우소로서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겼으나 근래에는 유원지를 만들었다.
용두목에 관련된 설화는 '이무기가 하늘의 복숭아가 담긴 반티를 몰래 훔쳐 나오다 용두목의 용에 들켜 싸움이 붙었다. 그때 엎어진 반티가 반티산이 되고, 용이 이무기를 치면서 쏟아 부은 많은 물이 남천강이 되었다. 용두목 용의 이야기는 밀양 고을의 농민들이 왜놈의 침략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여 물리친 사실을 나타낸다.
만어사
만어사 전설
만어사의 옛 이름은 자시산(일명 자성산) 이라 불리었다. 근처에 옥지(玉池)라는 연못이 있어 못된 독룡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독룡은 성질이 사악하여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 모두 뜯어먹고 짓밟아서 농사를 망치게 만들었다.
때는 김해 수로왕 시절이었다. 수로왕은 자시산에 큰 절을 창건하여 그 낙성식에 참석하러 자시산으로 행차를 하였다. 왕의 행차가 낙동강에 이르렀는데 수많은 새떼가 날아와 지저귀는 것이었다. 왕이 저 새는 무슨 새인가 하고 좌우에 물으니. 좌우의 한 사람이 까치라는 새로서 자고로 길조라고 전해온다고 아뢰었다. 왕이 다시 그곳 지명을 물으니 그곳은 아직 이름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수로왕은 그곳을 까치두들-지금의 작원(鵲院)-이라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수로왕의 행차는 다시 길을 재촉하여 마침내 자시산에 이르렀다. 이때 인근의 백성들이 몰려와서 왕에게 옥지에 사는 독룡의 폐단을 고하고 퇴치해 줄 것을 청하였다. 왕은 백성들의 간청을 부처님께 기원하였다. 부처님은 수로왕의 기원을 받아들여 옥지의 독룡을 불러 꾸짖었다. 독룡은 부처님의 꾸짖음에 자신은 본시 부처님의 제자 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그동안 해꼬지를 하였다고 하고, 이제 부처님께서 제자로 받아 주신다면 다시는 백성들의 농사를 망치는 일이 없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부처님은 쾌히 독룡을 제자로 받아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이 멀리 동해 용궁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곳 용왕의 아들 역시 이 소문을 듣게 되었는데 내가 못될 것이 없다 생각하고 수만 명의 물고기 부하들을 이끌고 이 자시산 부처님을 찾아와 제자 되기를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자시산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불공을 드리며 불도를 닦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자시산은 만어산이라 이름 하게 되었고, 김해 수로왕이 창건했던 절은 만어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만어사 근처에는 물고기 형상의 온갖 바위들이 널려 있으며, 그 중에서 특히 큰 바위 하나가 있어 흡사 미륵불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전한다.
①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편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 의하면, 지금의 양산지역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사악한 독룡 한 마리와 사람을 잡아먹는 다섯 나찰(羅刹)이 서로 사귀면서,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등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고 한다. 이에 가락국 수로왕이 주술로 그들의 악행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께 설법을 청해 이들로부터 오계(五戒)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는데, 대부분 경쇠소리를 내는 신비로운 돌이라는 것이다.
②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 터라고 일러주었고, 이윽고 왕자가 길을 떠나니 수많은 종류의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다. 신승의 말처럼 왕자가 길을 가다가 잠시 쉬기 위해 머무르자 용왕의 아들은 미륵 돌로 변하였고, 수많은 고기 역시 돌로 굳어져 장관을 이루는 돌밭으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그들이 머물러 쉰 곳은 만어사 미륵전 자리였는데, 지금도 미륵전 아래에는 무수한 돌무덤이 첩첩이 깔려 있어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돌은 두들기면 맑은 쇳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이라고도 한다.
* 김수로왕이 창건했다는 전설 속 사찰, 만어사 *
만어사(萬魚寺)는 46년(수로왕 5)에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전설 속의 사찰이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의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는 만어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지금의 양산지역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독룡 한 마리와 다섯 나찰(羅刹)이 서로 사귀면서,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등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 이에 수로왕이 주술로 그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여 이들로부터 오계(五戒)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는데, 이들 돌에서는 신비로운 경쇠소리를 났다. 수로왕은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하였는데, 불법의 감화를 받아 돌이 된 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이름을 만어사(萬魚寺)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감화로 인해 수많은 물고기가 돌로 변해 법문을 듣는다는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만어사.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듯 법당 앞 널찍한 너덜지대에는 물고기떼가 변한 어산불영(魚山佛影)이라는 돌더미가 있는데, 지금도 이를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이라고도 하며 현재 경상남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만어사에 가면 꼭 봐야할, 만어사 삼층석탑 *
만어사에 있는 단층 기단(基壇)에 3층 석탑이며, 현재의 위치가 원래의 자리로 생각된다. 지대석(地臺石)은 4장으로 짜고, 2단의 각형(角形)받침을 마련하여 면석(面石)을 받쳤으며, 면석도 4장이다. 갑석은 2장이며 얇고 그 밑에는 부연(副椽)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屋蓋)가 모두 한 돌로 되어 있으며, 옥개석의 낙수면은 경사가 급히다. 탑신에는 각 층마다 우주형이 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형(寶珠形) 석재가 놓여 있으나 후에 만든 것이다. 《삼국유사》 어산불영(魚山佛影)의 기록과 탑의 양식(樣式)으로 보아 1181년(명종 11)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용안내
쉬는날
연중무휴
주차시설
있음
문의및안내
만어사 055-356-2010
밀양 문화관광과 055-359-5637
상세정보
화장실
있음
한국어 안내서비스
가능
이무기
시례 호박소의 이무기
당장면 골짜기에 시례 호소박라는 沼가 있는데, 그 소에 용이 한 마리 들었다는 유래가 있다.
옛날 그 골짜기에 이미기(이무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떤 선생 밑에서 수학했는데 어찌나 영특한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였다. 하루는 제자가 저녁에 "오줌누러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하자 스승은 허락하고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도중에 깨어 일어나 보니 아직도 제자는 돌아와 있지 않았다. 이런 일이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여서 선생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뒤를 밟아보기로 하였다. 사흘째 되는 밤 한시경에 이르자, 선생이 수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제자는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뒤를 밟아보니 한 마을에 있는 소로 가더니 곧 물에 들어가 노는 것이었다. 선생이 유심히 살피니 분명 그 제자는 사람이 아니고 이무기였다. 그가 한참 물 속에서 놀다가 나와서 다시 둔갑을 하여 사람으로 되돌아오자, 선생을 급히 돌아와 자는 척하였다. 얼마 후에 제자가 돌아와서 슬그머니 옆에 누워 자는데, 선생이 몸을 만져보니 몸이 매우 싸늘하였다. 그때 마침 마을에 비가 오지 않아 무척 가물었는데 선생은 옛말에 "사람이 용이 되면 가문다."는 말이 있듯이 아마도 그 제자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마을 주민들이 선생에게 찾아와 비가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간청하자 선생은 제자를 불러서 "애야, 백성들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데 네가 비 좀 내리게 할 수 없느냐?" 라고 했지만 "선생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하면서 제자는 시치미를 떼고 거절하였다. 그러다 선생은, "네가 무슨 재주가 있는지 밝히지 않아도 되니 비만 내리게 해다오."
이렇게 계속 제자를 재촉하였다. 거듭되는 선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승낙하고 붓글씨를 쓰다가 먹을 손가락에 찍어 하늘에 튕기자 먹비가 막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을 이 제자는 옥황상제가 오년간 수양하라는 명을 내린 이무기였다. 그 이무기가 명을 어기고 비를 내리게 하자 옥황상제는 저승사자를 내려보냈다. 하늘에서 뇌성병력이 치며 선생 앞에 저승사자가 나타나 "여기 이무기라는 사람이 있느냐?" 묻자 이무기는 선생 뒤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 선생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뒷산에 이무기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갑자기 그 나무에 벼락이 내리치고는 날씨가 다시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 후 아무도 이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아마 등천을 못해서 그 길로 시례 호박소로 들어간 것이라고도 한다. 간혹 선생이 그 소로 찾아가면 이무기가 눈물을 흘리더란 이야기가 전한다.
출처 & 참고문헌,
(자료출처 : 밀양시 http://www.miryang.go.kr/main/)
[밀양십경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전통팔경),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만어사 고기떼가 변해 돌이된 만어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만어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전통팔경) 2005. http://www.culturecont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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