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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컴퓨터 ,

인터넷 [in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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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internet].

원론적인 의미로 따져보면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주판’이다. 컴퓨터(Computer)라는 단어 자체가 ‘계산기’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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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초창기의 전자식 컴퓨터들은 단순히 계산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한 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컴퓨터의 용도가 다양해지면서 컴퓨터는 단순한 계산기에서 벗어나 종합적인 정보 단말기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처리하는 데이터가 다양화되고 용량이 방대해지면서 한 대의 컴퓨터로는 이를 모두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 이르렀다. 때문에 개발자들은 두 대 이상의 컴퓨터가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디스크(Disc)로 대표되는 보조기억장치에 데이터를 저장하고 이를 직접 들고 다니며 데이터를 교환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것이 단점이었다. 


1960년, 미국의 릭라이더(Joseph Carl Robnett Licklider, 1915~1990) 박사는 여러 명의 사용자가 하나의 컴퓨터에 접속하여 작업하면서도 처리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시분할 시스템(Time Sharing SystemTSS)’의 기초 이론을 발표했다. 이는 컴퓨터의 연산 속도에 비해 사용자의 데이터 입출력 속도가 느리다는 것에 착안한 것인데, 예를 들어 A 사용자가 데이터를 입력하거나 출력하는 사이의 공백 시간 동안 컴퓨터는 B 사용자에게 입력 받은 데이터를 처리한다는 것이다. 


시분할 시스템은 이후 등장하는 거의 모든 컴퓨터 네트워크 시스템의 기본 이론이 된다. 

1969년 아르파넷으로 시작된 인터넷은 1970년대 개방적 네트워크로 전환된 이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확대 발전되어 왔다. 


1990년대 이후 월드와이드웹의 등장으로 인터넷은 폭발적 성장과 함께 상업화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통신망으로서 인터넷의 역사는 근대 통신의 혁명적 발전의 계기가 된 1836년의 전신 발명, 주요 통신망으로 기능하고 있는 1858년부터 1866년 사이의 대서양 횡단 케이블 구축, 그리고 현재도 주요 인터넷 통신망으로 이용되고 있는 1857년의 전화 발명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Internet Valley, 1998). 


현재와 같은 컴퓨터 통신 시스템으로 인터넷이 발전하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1969년 아르파넷이 구축되기 이전인 1960년대 초반부터 현재의 인터넷을 가능케 해 준 컴퓨터 상호 연결 개념과 관련 기술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MIT 그룹이었다(Leiner et al., 1998).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리클라이더(John C. R. Licklider)는 MIT교수로 있던 1962년 "은하 네트워크(Galactic Network)"라는 개념을 제안했는데, 이는 전 세계적으로 컴퓨터를 상호 연결하고자 하는 구상으로 현재의 인터넷 개념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나아가1968년 로버트 테일러(Robert Taylor)와 함께 쓴 "커뮤니케이션 장치로서의 컴퓨터"라는 글은 이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Licklider & Taylor, 1990). 1960년대 인터넷의 역사는 패킷 교환(packet switching) 네트워크의 구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Hardy, 1993), 현재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 방식인 패킷 교환 이론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 MIT의 레너드 클라인록(Leonard Kleinrock)에 의해 1961년 7월 발표되었다.  


미국 글로벌 정책 싱크탱크인 RAND(Research ANd Development)의 폴 배런(PaulBaran) 팀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분산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연구(On DistributedCommunication)"를 수행했는데, 이 연구의 목적은 미군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보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Hardy, 1993; Rheingold, 1993, p.74). 배런은 이 보고서에서 "중복 연결(redundancy of connectivity)"의 원리를 제안하는데, 이것은 탈중앙집중적 명령 및 통제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시스템의 일부분이 파괴되더라도 전체 시스템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RAND의 보고서는 그후 인터넷의 역사를 논할 때 인터넷의 "군사적 기원(military origin)"을 주장하는 주된 논거가 된다. 


인터넷에 접속하는 방법은 전용선에 의한 IP 접속과 전화 회선을 이용한 다이얼 업 IP 접속이 있다. 인터넷 사용자는 각국의 통신망 정보 센터(NIC)에서 할당하는 IP 주소와 인터넷에 연결하는 서비스를 해주는 회사에 가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내에서는 한국전산원의 한국 인터넷 정보 센터(KRNIC)가 IP 주소의 지정 및 도메인 등록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94년 6월 한국통신이 최초로 인터넷 상용 서비스(KORNET service)를 개시한 이래 많은 수의 인터넷 접속 서비스 제공자(ISP)가 생겨나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사업자는 개별적으로 미국이나 기타 국가의 인터넷 접속 사업자와 연결되어 있다. 


현재와 같은 컴퓨터 통신 시스템으로 인터넷이 발전하게 된 것은 1969년 아르파넷이 구축되기 이전인 1960년대 초반부터 현재의 인터넷을 가능케 해 준 컴퓨터 상호 연결 개념과 관련 기술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MIT 그룹이었다(Leineretal., 1998).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리클라이더(John C. R. Licklider)는 MIT교수로 있던 1962년 "은하 네트워크(GalacticNetwork)"라는 개념을 제안했는데, 이는 전 세계적으로 컴퓨터를 상호 연결하고자 하는 구상으로 현재의 인터넷 개념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나아가1968년 로버트 테일러(RobertTaylor)와 함께 쓴 "커뮤니케이션 장치로서의 컴퓨터"라는 글은 이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Licklider & Taylor, 1990).1960년대 이후다.    


1960년대 인터넷의 역사는 패킷 교환(packetswitching) 네트워크의 구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Hardy, 1993), 현재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 방식인 패킷 교환 이론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 MIT의 레너드 클라인록(LeonardKleinrock)에 의해 1961년 7월 발표되었다.한편 미국 글로벌 정책 싱크탱크인 RAND(ResearchANdDevelopment)의 폴 배런(Paul    Baran) 팀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분산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연구(OnDistributed Communication)"를 수행했는데, 이 연구의 목적은 미군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보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Hardy, 1993; Rheingold, 1993, p.74). 


배런은 이 보고서에서 "중복 연결(redundancyofconnectivity)"의 원리를 제안하는데, 이것은 탈중앙집중적 명령 및 통제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시스템의 일부분이 파괴되더라도 전체 시스템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RAND의 보고서는 그후 인터넷의 역사를 논할 때 인터넷의 "군사적 기원(militaryorigin)"을 주장하는 주된 논거가 된다. 


인터넷에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는 전자우편(e-mail), 원격 컴퓨터 연결(telnet), 파일 전송(FTP), 유즈넷 뉴스(UsenetNews), 인터넷 정보 검색(Gopher), 인터넷 대화와 토론(IRC), 전자 게시판(BBS), 하이퍼텍스트 정보 열람(WWW:WorldWideWeb), 온라인 게임 등 다양하며 동화상이나 음성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서비스나 비디오 회의 등 새로운 서비스가 차례로 개발되어 이용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서비스와 풍부한 정보자원 때문에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국방부의 주도로 아르파넷을 물리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각 기관 또는 연구팀별로 구체적인 작업이 수행되었다(Leineretal., 1998; Hauben & Hauben, 1997). 1968년까지 다르파(DARPADefenseAdvancedResearchProjectsAgency)의 지원하에 아르파넷(ARPANET,AdvancedResearchProjectsAgencyNetwork)의 기본 구조와 사양이 확정되었고, 이것의 개발을 사설 연구 기관인 BBN(BoltBeranekandNewman)이 패킷 교환기인 IMP(InterfaceMessageProcessors)를 개발한다. 


BBN은 또한 물리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설치한다. 이 과정에서 칸(Kahn)은 전반적인 아르파넷의 구조 설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한편 다르파의 로버츠(Roberts)와 NAC(NationalAnalysisCorporation)의 하워드 프랭크(HowardFrank) 팀은 네트워크 형태와 경제적 측면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였다. 


UCLA의 클라인록 연구팀은 네트워크 측정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AT&T는 통신 회선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준비 끝에 1969년 4개의 호스트 컴퓨터가 연결되면서 아르파넷이 시작된다(Leiner etal., 1998; Hardy, 1993 참조). 먼저 1969년 9월 클라인록이 있는 UCLA의 '네트워크측정센터(NetworkMeasurementCenter)'가 최초의 아르파넷 노드로 선정되었다. 한 달 후 '스탠퍼드연구소(StanfordResearchInstituteSRI)'가 두 번째 노드로 연결되었다. 


SRI는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Engelbart)가 인간 지능 확장 프로젝트를 수행한 연구소로, 다르파의 '네트워크정보센터(NetworkInformationCenter)'를 지원, 일종의 도메인 네임 시스템인 호스트 네임 테이블을 유지, 관리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두 번째 노드가 연결되면서 UCLA의 클라인록 실험실에서 SRI로 호스트 간의 메시지 전송이 최초로 이루어졌다. 그 이후 곧바로 수리함수의 표현 방법을 연구하던 글렌 쿨러(GlenCuller)와 버튼 프리드(BurtonFried)가 있는 UC 산타바바라, 그리고 3차원 표현 방법을 주로 연구하고, 다르파에 있던 로버트 테일러(RobertTaylor)와 이반 서덜랜드(IvanSutherland)가 있는 유타대학교가 연결되면서, 1969년 최초의 인터넷망이라 할 수 있는 아르파넷이 4개의 호스트 컴퓨터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구축된 것이다. 


그 후 아르파넷에 연결되는 컴퓨터가 늘어나 1971년 말까지 23개 호스트 컴퓨터가 연결된다(Griffiths, 1999). 


아르파넷에 연결되는 컴퓨터가 늘어나면서 프로토콜 관련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전자우편 서비스 등이 속속 개발된다(Leineretal., 1998).유럽의 수많은 강국들이 2차 대전을 계기로 다수 몰락하자 비어 있는 왕좌를 차지한 것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각자의 이념을 필두로 그들은 군비전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2차 대전 종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핵폭탄이 지구를 몇 번이나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이나 양산되었다. 그동안 양국의 고민은 이랬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거리. 2차 대전처럼 폭격기로 공중 투하하는 구시대적 방식의 타격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서로 개발 경쟁을 벌인 것이 바로 ICBM(InterContinentalBallisticMissile)이었다. 소위 말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수백 킬로미터에 있는 적을 정밀 타격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사실 로켓이나 위성 등 우주산업의 이면에는 내세우는 숭고한 의미보다 ICBM의 제반기술을 개발하고 과시하기 위한 면모가 강했다. 


당시 소련의 과학자였던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인공위성을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쟁무기 개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순수한 과학자였다. 그저 지구 궤도를 끊임없이 도는 인공위성을 발사한다면 스스로의 낭만도 충족시키고 조국에도 애국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련에서도 그의 낭만을 통해 ICBM에 필요한 제반기술을 얻어낸다면 군비경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기에 그 계획을 승인하게 된다. 1957년 10월 4일, 스푸트니크(Sputnik)가 발사되던 순간 미국에서는 미국ㆍ소련 과학자들 간의 세미나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자신들의 우주 계획을 1급 비밀에 붙이고 있었지만 술에 취한 러시아 과학자가 조만간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농업국가 정도의 취약한 기반의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발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뉴욕타임즈>의 기자인 월터 설리번도 끼어 있었는데 그는 신문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러시아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는 것이었다. 


설리번은 헐레벌떡 연회장으로 돌아가 말했다. 누군가 옥상으로 올라가 인공위성을 보자고 제안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대사관 지붕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맨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작은 위성이었지만 보고 싶었던 것이다. 스푸트니크는 그들이 연회를 벌이는 동안 그들의 머리 위를 두 번이나 지나갔고, 그때를 기점으로 세계는 우주 전쟁의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1969년 7월 20일, 암스트롱이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 표면을 밟기 전까지 미국은 ‘스푸트니크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주 경쟁에서 추월당한 미국은 상대를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 외에도 상대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소련에서 발사된 핵이 미국 본토에 명중한다면? 그것도 지휘 통제를 담당하는 곳에 떨어진다면? 머리가 떨어져 나간 생물, 지휘자가 사망한 부대는 무력화가 되어버린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것을 연구하기 위한 미국 국방부 산하 고등 연구국(ARPAAdvancedResearchProjectAgency)이 설립되었고 그해 국방부, UCLA, 스탠퍼드 등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ARPANET이 탄생됐다.


컴퓨터 또한 군사적 목적으로 시작해 이후 국가행정, 기업, 일반인에게 점차적으로 퍼져나갔듯 인터넷 역시 그런 과정을 밟아나갔다.


1972년 10월의 공개 시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아르파넷은 자리를 잡게 된다. 미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 노르웨이, 스웨덴, 영국의 대표가 참가한 〈국제컴퓨터커뮤니케이션학술대회(InternatinalComputerCommunicationConference)〉에서 칸(Kahn)팀은 40대의 컴퓨터를 연결하여 일반 대중을 상대로 새로운 네트워크 테크놀로지인 아르파넷을 최초로 보여 주게 된다(Leineretal., 1998). 


이 학술대회에서는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라는, 지금과 같은 인터넷의 개념이 최초로 제시되는데, 이는 독립적인 네트워크들을 게이트웨이를 통해 서로 연결한다는 것이었다(Hardy, 1993). 


이같이 출발한 아르파넷은 인터넷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디(Hardy, 1993)의 주장처럼, 아르파넷이 당시 냉전 최고조 시기에 미군의 중앙집중적 명령 및 통제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즉 분산된 네트워크 구조를 개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향후 인터넷의 발전에 디딤돌이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1986년에는 미국 국립 과학재단(NSF)도NSFNET이라는 새로운 통신망을 구축해 운용하기 시작했다. 전 미국 내 다섯 개 연구소의 슈퍼컴퓨터 센터를 상호 접속하기 위하여 구축되었는데, 이는 점차적으로ARPANET을 대신해 인터넷의 근간망의 역할망을 담당하게 되었고, 인터넷은 점차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인터넷은 군사 혹은 기업의 한정적인 목적만을 위해서 이용되었고,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인터넷이라는 단어는 생소할 뿐이었다. 


1954년, 유럽 12개국은 유럽 입자물리연구소(CERNConseilEuropeenpourlaRecherche Nucleaire)를 설립한다. 각 분야의 과학자들이 서로 같은 곳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공동 연구를 하는 것으로 과학 발전을 가속화하자는 목적하에 세워진 곳이었다. 



과학자들끼리의 효율적인 의견 교환, 자료 공유는 분명 당초 목적대로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소프트웨어 공학자 팀 버너스 리는 이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기존에 있던 인터넷 기반을 통해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앉은 자리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1989년 3월 완성하게 된다. 그 결과물은 WorldWideWeb이라 불렸다. 


바로 우리가 인터넷 주소 앞에 붙이는 WWW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후 CERN의 연구자들과 전 세계의 학자들을 기점으로 하나하나씩 웹사이트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WWW는 지금껏 시도했던 그 어떤 것보다 파급력이 큰 프로젝트가 될 것이 확실했다. 팀 버너스 리의 동료들은 그것을 간파하고 그에게 WWW에 대한 특허를 내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그는 제의를 거절한다. 이러한 공헌으로 그는 훈장과 기사 작위와 함께 “인터넷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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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스탠퍼드 대학의 학생이던 제리 양, 데이비드 필로는 박사 논문에 쓸 참고 문헌을 찾는 데 골머리를 앓는다. 당시 대학에는 인터넷이 상용화돼 있었지만 각자의 페이지는 직접url(인터넷 주소)을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었고, 결국 어디에 좋은 정보가 있는지는 입소문을 통해서 전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불편함에 불만을 갖던 그들은 어느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지도 혹은 목차 같은 웹페이지를 만든다면 훨씬 더 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각자 단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정보를 취합해 각 학과별, 주제별로 참고할 자료를 정리한 홈페이지를 만든다. 


개인적인 필요성(박사 논문 작성)을 위해 만든 홈페이지였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스탠퍼드 학생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사업 기회를 찾는 사업가들에게도 화제가 되어 두 학생은 1995년 400만 달러의 투자를 받아 기업을 설립하게 된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야후(Yahoo!)의 탄생이다. 1996년 기업설립 이후 7개월 만에 야후의 시장가치는 10배나 상승했다. 


제한된 컴퓨터만 연결되어 있던 아르파넷이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인터넷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개방형 구조의 네트워크화(open-architecturenetworking)"라는 아이디어가 칸에 의해 제시된 이후다. 이는 독특한 환경과 요구에 의해 설계된 개별 네트워크들을 독특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상호 연결함으로써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다른 네트워크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메타 수준의 "상호네트워킹 구조(InternetworkingArchitecture)"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Leineretal., 1998). 이 개념은 1972년 칸이 다르파로 오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원래는 "인터네팅(internetting)"이라는 이름하에 패킷 무선 네트워크용으로 개발된 것이었는데 이를 아르파넷에 적용하고자 한 것이다. 


개방형 구조의 네트워크화에 대한 칸의 기본 가정들은 다음과 같다(Leineretal., 1998). 

첫째, 개별 네트워크들의 내적 일관성을 유지한다. 즉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해 개별 네트워크의 변경이 불필요하다. 

둘째, 패킷 오류 발생 시 소스로부터 재전송한다. 


셋째, 나중에 게이트웨이 또는 라우터라 불리게 되는 블랙박스를 이용해 네트워크들을 연결한다. 


넷째, 운용 측면에서 볼 때 전체적인 통제(globalcontrol)는 불필요하다. 이와 같은 가정들은 현재 인터넷 시스템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모뎀을 컴퓨터 통신망의 주요 장치로 활용하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우선 장거리 전화시스템을 이용해 컴퓨터 통신망을 구성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 이유는 전화가 데이터의 전송보다는 음성을 전달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모뎀은 중앙집중적 연결방식을 취하고 있어 한 전화국이 파괴되면 그 전화국이 연결해 주는 모든 통신이 두절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전시상황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 국방부는 모뎀 방식이 아닌 새로운 컴퓨터 통신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로 등장한 것은 첨단연구계획청(AdvancedResearchProjectsAgency,ARPA)이 주도한 아르파넷(ARPAnet)이었다.


ARPA는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shock)’의 여파로 국방연구를 보다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58년 미 국방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아르파넷에 대한 아이디어는 1963년에 ARPA 정보처리기술국(InformationProcessingTechniquesOfficeIPTO)의 국장으로 부임했던 릭라이더(Joseph C. R. Licklider)가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는 이미 1962년부터 모든 컴퓨터를 서로 연결해 데이터를 공유하자는 아이디어인 ‘은하간 컴퓨터 네크워크(IntergalacticComputerNetwork)’를 주장해 온 인물이었다. 당시에 아르파넷을 만들려고 했던 동기는 주로 경제적인 것이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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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PA가 지원하고 있던 13개 대학연구소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값비싼 대형컴퓨터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64년에 랜드연구소의 바란(PaulBaran)은 <분산적 통신에 대하여>라는 문건을 통해 기존의 전화나 모뎀이 채택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통신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분배 네트워크 토폴로지(distributionnetworktopology)와 패킷 스위칭(packetswitching)이라는 두 가지 개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통신시스템을 설계했다. 


전자()는 하나의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경로를 통해 접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자()는 한 메시지를 여러 개의 조각, 즉 패킷으로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란의 연구는 소련의 핵 공격에도 생존할 수 있는 통신시스템을 설계해 달라는 미 공군의 요청에 대한 대답이었다. 분배 네트워크를 사용하면 특정한 데이터를 전송하는 한 경로가 적의 공격에 의해 파괴된다 할지라도 여분의 경로를 통하여 전달될 수 있으며, 패킷 스위칭을 사용하면 데이터가 패킷으로 분할되어 전송되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 의해 데이터가 손상된 경우에도 전체 데이터가 아닌 해당 부분만 보내면 되는 것이다.



1966년에 IPTO의 신임 국장이 된 테일러(BobTaylor)는ARPA와 계약을 맺은 연구기관들을 연결하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는 계획을 수립했다. 곧이어 합류한 링컨연구소 출신의 로버츠(LawrenceRoberts)는 아르파넷에 바란의 개념을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 


1967년에는ARPA가 주관한 회의가 미시건 대학에서 열렸지만, 참석자들은 아르파넷의 구축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회의를 마친 후 공항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워싱턴 대학의 클라크(WesleyClark)는 라우터(router, 패킷 데이터로 구성된 정보를 주고받을 때 다양한 경로를 검색하여 수신처 주소로 정확하게 전달시켜 주는 장치) 역할을 하는IMP(InterfaceMessageProcessor)를 만들어 아르파넷을 구축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1968년에ARPA는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스탠퍼드 연구소(SRI), 산타바바라 대학(UCSB), 유타 대학(UTAH)을 아르파넷의 연결 지점으로 선정했다. 


아르파넷이 실제로 탄생한 것은 1969년 10월 29일의 일이었다. 그날 오후 9시에 UCLA의 학생 프로그래머 클라인(Charley S. Kline)은 SRI에 아르파넷 명령어를 보냈다. 그가 보낸 메시지는 ‘LOGIN’이었다. ‘L’과 ‘O’는 문제없이 보내졌지만, 공교롭게도 그때 시스템이 엉켜버리고 말았다. 이에 따라 아르파넷 최초의 메시지는 ‘LO’로 기록되는 촌극이 발생했다. UCLA 팀과 SRI팀은 1시간 30분 동안 노력한 끝에 ‘LOGIN’이란 메시지를 모두 전송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아르파넷은 시험가동을 거친 후 1972년 10월에 워싱턴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컴퓨터통신학술회의에서 시연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르파넷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면서 많은 대학과 연구소들이 아르파넷에 편입하기 시작했다. 


국제컴퓨터통신학술회의에서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오늘날과 같은 인터넷(internet)의 개념이 제기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를 바탕으로ARPA의 서프(VintonCerf)와 칸(RobertKahn)은 1974년에 <패킷 네트워크 인터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프로토콜>이란 논문을 발간했는데, 그것은 인터넷계의 고전으로 꼽힌다. 


아르파넷의 시연보다 인터넷의 확산에 더욱 크게 기여한 것은 1971년에 톰린슨(RayTomlinson)이 시범적으로 개발한 전자우편(e-mail)이었다. 전자우편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이를 사용하기 위해 아르파넷에 편입하지 못한 기관들이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이 생겨났던 것이다. 


유즈넷(Usenet), 텔넷(Telnet), 엔에스에프넷(NSFnet), 에듀넷(Edunet), 비트넷(Bitnet)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자우편에 있는 ‘참조(cc)’라는 항목이 먹지(카본지)로 만든 복사본을 뜻하는 ‘카본 카피(carboncopy)’에서 유래되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다양한 네트워크들이 등장하면서 그것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ARPA의 서프와 칸은 다양한 프로토콜(protocol, 통신시스템이 데이터를 교환하기 위해 사용하는 규약) 중에서TCP(TransmissionControlProtocol)와IP(InternetProtocol)를 결합한TCP/IP를 선택했다. 

1982년에는TCP/IP를 활용한 인터넷 테스트가 실시되었고, 

1983년에 미국의 방위통신청(DefenseCommunicationAgency)은 네트워크 업자들에게TCP/IP의 사용을 강제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를 통해TCP/IP는 인터넷의 표준 프로토콜로 자리 잡았으며, 그 후 인터넷은TCP/IP를 통해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방형 구조의 네트워크 환경에 맞는 새로운 프로토콜이 개발되었다. 패킷의 전달 기능을 수행하는 IP와 흐름 통제 및 손실된 패킷의 수정 기능을 수행하는 TCP 등 두 가지 기능을 갖는 프로토콜 체제로 발전되었고, 1983년 1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여 오늘과 같은 TCP/IP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TCP/IP는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 또는 서비스들을 가능케 해 주는 범용 체제라는 데 의의가 있다(Leineretal., 1998). 검색엔진의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검색의 용이성으로 더더욱 확장하게 된 웹은 아이러니하게 되레 검색엔진으로 장악하지 못할 만큼 커져버렸다. 


기존 검색엔진의 시스템은 검색로봇(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해 오는 로봇)에 의존해 검색 결과를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정보가 너무 많다보니 로봇을 돌려 수집하는 것으로 전체의 웹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90년대 후반 야후는 솔직하게 선언한다. 스탠퍼드에는 이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후배들이 열성적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1996년,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은 한 연구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그들의 가설은 이랬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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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텔넷(Telnet) 서비스를 개시하게 되는데, 이것은 최초의 일반용 패킷 전송 서비스였다. 이제까지 과학 주도형 발전이었다면 아르파넷의 상업적 서비스가 가능해진 것이다(Griffiths, 1999). 그러나 인터넷으로의 확대,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요인은PC와 워크스테이션의 개발에 따른 네트워크 환경의 변화였다. 


1970년대 중반 PC와 1200bps모뎀이 등장하면서 CMC 네트워크의 탈집중화된 모델로의 추세는 가속화된다(Hardy, 1993). 연구는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논문들이 전자화되지 않은 상태라 일일이 수작업으로 논문 인용의 연결망을 파악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작업의 비효율성 때문에 우회적인 접근법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미 전자화된 웹페이지를 기준으로 연구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더넷(Ethernet)의 개발도 인터넷 이용자의 확대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근거리통신망(LocalAreaNetworkLAN) 개념으로서, 현재 인터넷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TCP/IP를 통해 인터넷의 기술적 표준은 마련되었지만, 기존의 네트워크들을 연결하는 작업은 빨리 진척되지 못했다. 당시의 인터넷 문서들은 각각 독립적인 개체들이어서 연결된 검색이 가능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한 사람은 유럽입자물리연구소(EuropeanOrganizationforNuclearResearch,CERN)의 버너스리(TimBerners-Lee)였다.그는 1980년에CERN의 방문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인콰이어(Enquire)’라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 연결된 순서에 관계없이 사용자들이 원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제공되는 텍스트)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1984년에CERN의 정식 연구원이 되면서 하이퍼텍스트와 인터넷을 결합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버너스리는 5년 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1989년에 ‘월드와이드웹(WorldWideWeb)’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프로젝트 제안서를CERN에 제출했다. 


결국 1991년 8월 6일에는 월드와이드웹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곧이어 하이퍼텍스트들을 연결하는 규약인HTTP(HyperTextTransferProtocol)가 만들어졌다. 


1970년대까지 기본 시스템들과 응용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그에 따라 네트워크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되는데, 그에 따라 1980년대 이후 인터넷의 관리 및 운용이 큰 문제로 대두된다. 이에 따라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시스템들이 개발되는데, 그 첫 번째는 도메인 네임 시스템의 정착이다. 초기에는 호스트의 수가 적어 단일한 호스트 테이블만으로도 가능했으나 호스트 수가 늘어나면서 호스트의 이름과 주소를 기억하는 것이 곤란해졌다. 


이에 1983년 위스콘신대학교에 네임 서버가 개발, 구축된다(Zakon, 1999). 그 후 USC/ISI의 폴 모카페트리스(PaulMockapetris)에 의해 DNS(DomainNameSystem)가 개발되어, 호스트 수가 1000대를 돌파하는 1984년부터 도입된다. 


그때부터 현재와 같이 기억하기 좋은 문자로 된 위계적(hierarchical)인 호스트 네임 체계를 갖게 된 것이다. 1969년 구축되어 인터넷의 기간망 기능을 수행한 아르파넷은 1983년 연구용인 아르파넷과 군사용인 밀넷(MILNET)으로 분리된다. 


이제 아르파넷이 담당하던 기간망 기능은 다른 네트워크에 의해 대체되는데, 1986년 구축되어 1990년대 초반까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미국 〈국립과학재단〉 네트워크, 즉 NSFNET이다. 



통신망과 통신망을 연동해 놓은 망의 집합을 의미하는 인터네트워크(internetwork)의 약어인internet과 구별하기 위해 Internet 또는 INTERNET과 같이 고유명사로 표기한다. 랜(LAN) 등 소규모 통신망을 상호 접속하는 형태에서 점차 발전하여 현재는 전세계를 망라하는 거대한 통신망의 집합체가 되었다. 


군사용이나 연구용에 국한되어 있던 인터넷이 일반인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을 전후하여 발생한 일이었다. 


1993년에 일리노이 대학의 학부생이던 앤드리슨(MarcAndressen)은 하이퍼텍스트를 쉽게 볼 수 있는 모자이크(Mosaic)란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그것이 1994년에 넷스케이프(Netscape)로 탈바꿈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넷으로 유인했다. 



넷스케이프를 사용하면 누구나 손쉽게 몇 번의 클릭만으로 전 세계의 웹사이트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정보의 바다를 항해한다.”라는 구절도 넷스케이프의 로고가 항해사의 키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이 무렵에 미국 백악관은 홈페이지를 만들어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으며, 빌 게이츠(BillGates)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인터넷 중심으로 변모시킨다고 공언했다. 


그 후 인터넷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고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도 급속히 증가했다.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의 수는 1990년에 약 30만 대에 불과했지만, 1995년에 1천만 대를 넘어선 후 2000년에는 1억 대를 돌파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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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월드와이드웹을 항해하는 데 필요한 웹브라우저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다. 1995년만 해도 넷스케이프가 웹브라우저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는 등 절대적인 우위를 지키고 있었다. 이에 도전장을 내민 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매년 1억 달러 정도의 연구비를 쏟아부었으며, 인터넷 익스플로러(InternetExplorer) 4.0이 개발된 1998년에는 넷스케이프와 기술적으로 동등한 수준에 도달했다. 익스플로러는 같은 해에 출시된 윈도 98에서 컴퓨터 운영체제의 일부로 포함되어 제공되었기 때문에 사용자들의 접근성도 훨씬 높았다. 



1980년대 말부터 인터넷의 망(web) 자체는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으나 메일을 주고받거나 특정 목적의 프로그램끼리 통신하는데 주로 쓰였기 때문에 이용형태 및 이용 가능한 데이터의 종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1989년,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연구원인 영국의팀 버너스 리(TimBerners-Lee) 박사는 문자 및 그림, 음성 등의 다양한 데이터를 포함한 방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한 뒤,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표준 문서 형식을 규정하고 문서 속에 연결된 특정 항목은 또 다른 문서로 연결되는 정보 검색 시스템을 제시했다. 


월드 와이드 웹(WWW,WorldWideWeb)’이라는 세계적인 정보 공유공간 및 이를 구성하고 있는하이퍼텍스트(Hypertext, 서로 연결되는 문서) 방식의 인터넷 표준문서인 ‘HTML(HyperTextMarkupLanguage)’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계기가 되었다. 



WWW는 1991년 8월 6일에 처음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세계 최초의 홈페이지(HomePage)도 이날 처음 공개되었다. 


현재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인터넷’의 형태, 즉 웹 브라우저(webbrowser,HTML 문서를 화면에 표시하는 프로그램)를 구동해 각종 인터넷 문서를 읽고 검색하는 모습이 이때부터 자리를 잡았다고 할수있다. 


그리고WWW의 개념을 처음 구상한 팀 버너스 리는 그 외에도 인터넷 데이터의 위치를 표시하는 기준인 ‘URL(UniformResourceLocator)’,WWW상에서 하이퍼텍스트를 교환하는 프로토콜인HTTP(HyperTextTransferProtocol), 그리고 세계 최초의 웹 브라우저 넥서스(NEXUS)1)등의 설계 및 규격 제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WWW가 인터넷 서비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팀 버너스 리는 ‘웹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또한, 월드 와이드 웹의 확산 속도는 1993년 그래픽 기반 웹 브라우저 ‘모자이크’가 등장하면서 급속도로 빨라진다. 


미국의 전기 공학자 로버트 메트칼프는 인포월드에 기고한 글에서 “1세대 웹은 팀 버너스 리가 개발한URL,HTTP,HTML다. 이를 통해 몇몇 사람에게 웹이 고퍼 프로토콜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했다. 


2세대 웹은 마크 안드레센과 에릭 비나가 개발한 모자이크다. 이를 통해 수백만 명에게 웹이 섹스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98년 10월 20일에 미국의 법무부는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마이크로소프트를 법원에 고소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라는 강력한 운영체제를 무기로 삼아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끼워서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소위 ‘브라우저 전쟁(browserwar)’에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기업의 이미지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당시에는 ‘마이크로소프트 효과’라는 용어도 생겨났는데, 그것은 어떤 업체가 새로운 기술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하더라도 마이크로소프트가 뛰어들면 곧바로 몰락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인터넷은 새로운 사업에 대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야후!(Yahoo!)는 스탠퍼드 대학의 대학원생이던 파일로(DavidFilo)와 양(JerryYang)이 만든 목록 서비스로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적인 포털 사이트로 성장했다.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닷컴(Amazon.com)은 단지 책을 사고파는 공간을 넘어 책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다른 사람의 서평을 접할 수 있는 가상공동체로 발전했다. 


이베이(eBay) 경매 사이트는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매체의 특징을 반영한 전자상거래의 모델을 제시하여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스탠퍼드 대학의 학부생이던 페이지(LarryPage)와 브린(SergeyBrin)이 개발한 구글(google)은 원래의 페이지 링크뿐만 아니라 링크에 연결된 링크까지 계산하는 검색 엔진으로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와 같은 유행어를 낳았다. 


인터넷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 또 다른 중요한 축은 현재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상업화다. 이는 인터넷 이용자가 특정 엘리트에서 일반 연구자, 그리고 일반인으로 확대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결과다. 최초로 설립된 상업적인 인터넷 회사는 1987년 UUNET으로(Griffiths, 1999), 상업적으로 UUCP와 유스넷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다른 회사들이 잇따라 설립된다. 당시의 상업적 관심은 전자우편 서비스, 뉴스그룹 제공, 채트 서비스, 게임 등에 국한되었다. 본격적으로 이용자가 일반인으로 확대되고 그에 따라 상업화가 진전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1989년 10만을 돌파한 호스트 수는 불과 1년 후인 1990년에 30만을 돌파한다. 


1990년과 1991년은 인터넷의 전환점이라 할 만한 시기다(Griffiths, 1999). 1990년 성공에 따른 희생물처럼 아르파넷의 임무가 완료되고 몬트리올 맥길대학교에서 최초의 인터넷 검색 엔진인 아키(Archie)가 개발되었다. 또한 최초로 지금과 같은 상업적인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InternetServiceProviderISP)가 등장한다(world.std.com). 그리고 1991년 NSF는 백본 컴퓨터의 민간 이용을 금지하던 기존의 정책을 철회함으로써 상업적 이용의 길을 열어놓게 된다. 


인터넷 상업화의 결정적 전기가 마련된 때는 월드와이드웹이 개발, 배포되기 시작한 1991년 이후이며, 웹이 발전하게 된 계기는 이용자에게 편리한 브라우저의 개발이었다. 


1993년 일리노이 NCSA(NationalCenterforSuperComputingApplications)의 마크 앤드리센(MarkAndreesen)은 모자이크X라는 브라우저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설치를 하고 이용하는 데 편리할뿐더러 그래픽 처리 능력 또한 우수했다. 이를 계기로 1994년 동안 수만 카피가 전 세계 컴퓨터들에 설치되면서 웹 사이트의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가장 많이 링크된 페이지가 가장 좋은 페이지라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이 가장 좋은 논문이라는 것도 입증되지 않을까?” “그러게. 조사도 프로그램을 짜서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들은 곧바로 대학 내 웹페이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어떤 페이지를 링크했다는 것은 그것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뜻이고 마치 거기에 투표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가장 많이 링크된 페이지는 이를테면 다수결을 통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이, 혹은 가장 많이 팔린 제품과도 같다는 논리. 과장해 말한다면 인터넷상의 민주주의와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이 기술을 ‘페이지 랭크’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검색 기술을 대학 웹사이트에 공개하자 폭발적인 반응이 일었다. 이후 이 기술의 상용화도 가능하다는 생각에 그들은 야후를 포함한 실리콘밸리의 검색업체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팔아보려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검색엔진의 수익 모델은 광고업체에서 돈을 받고 특정 사이트를 상위에 올려주는 것이었는데,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검색의 정확도가 떨어진다며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돈이 되지 않을 사업에 투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지쳐가고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있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SunMicrosystems)의 공동창업자였던 앤디 벡톨샤임이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건넨 것이다. 


“기존의 기업들과 협력하려 말게. 자네들 스스로 사업을 해보게나. 난 자네들이 만들어낼 신세계를 보고 싶다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그때부터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사명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던 그들은 회사 이름을 구골(Googol)로 정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 도메인은 이미 선점된 상태였고 어쩔 수 없이 구골과 발음이 비슷한 구글(Google)을 차선으로 택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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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하지만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내놓는 구글은 전혀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시장점유율을 잠식해 나갔다. 구글의 이름은 점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새로운 투자자도 나타났다. 그리고 투자자의 투자를 받을 때마다 수익 모델에 대한 고민은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 둘의 머리에는 한 가지 착상이 떠올랐다. 


‘광고가 짜증나는 이유는 필요 없는 정보를 보여주기 때문이야. 그러지 말고 검색어와 연관된 광고를 선별적으로 보여주면 어떨까?’ 애드센스(AdSense)의 탄생이었다. 


선금을 받아서 페이지의 상단에 광고를 무작위로 노출시켜주던 기존의 인터넷 광고와는 달리, 실제로 클릭해서 사람들이 광고 페이지로 이동할 때마다 클릭 단위 수대로 광고비를 받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구글의 검색 시스템과 같이 사람들이 검색하려는 정보와 연관된 제품이 광고로 나타나게 해 관심 있어 할 만한 광고만을 보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었다. 


정보와 연관된 제품이 광고로 나타나게 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애드센스" 가장 좋은 성능에 가장 합리적인 수익 모델을 획득한 구글은 이후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다. 2004년 기업공개(IPO)를 한 이후 구글의 첫날 시가 총액은 200억 달러를 넘어 야후와 나란히 서게 되었고 2010년에는 전체 검색 시장의 65%를 차지했다. 

IBM 위기 상황에 영입되어 IBM 을 기적적으로 생환시킨 CEO 루 거스너애플과의 소모전으로 급격하게 가치가 떨어져서 


“추락하는 코끼리”라 불리기도 한 IBM. 그러나 위기 상황에 영입된 CEO 루 거스너에 의해 기적적으로 생환한다. 2000년을 즈음하여 PC판매보다 유지 보수와 컨설팅에 집중하며 서서히 제조업 외의 부문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2005년 결국 PC 사업부를 중국의 레노버(lenovo)에 매각하면서 PC 산업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원래 NSFNET은 전국의 슈퍼컴퓨터센터(NationalSupercomputerCenters)를 상호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원래 계획은 몇 가지 계기를 거치면서 인터넷 기간망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변경된다. 


1986년 프린스턴대학교, 피츠버그대학교, UCSDUIUC, 코넬대학교에 5개 슈퍼컴퓨터센터를 설치하고 이를 56Kbps의 백본(backbone) 체제로 구축하게 된다(Zakon, 1999). 그리고 프로토콜은 TCP/IP를 채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인터넷의 대규모 이용이 가능해졌고(InternetValley, 1998), 이후부터 인터넷은 다르파와 NSF가 공동으로 운영하게 된다.


IBM은 예전과는 다르게 신중히 시장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10년 동안 IBM의 연구원들 600여 명은 미 서부 알마덴 연구소에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검색 시스템에 도전했으며 결국 기본적인 시스템의 완성에 이르렀다. 


시스템이란" 

인터넷 전체의 문서를 스캔해서 컴퓨터가 스스로 인공지능을 학습하게 하는 프로젝트. IBM의 모든 기술력을 동원하여 만든 슈퍼컴퓨터와 역시 10년간 연구한 알고리즘을 통해 인터넷 전체를 네 시간마다 한 번씩 훑어내고 그것을 단순히 수집하는 대신 그를 통해 사람들이 궁금해 할 질문과 거기에 적합한 답변을 학습하도록 만드는 믿기지 않는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를 웹파운틴(Webfountain)이라 부른다. 2차 격변기에 참패를 당한 마이크로소프트와 달리 IBM은 오히려 더 거시적인 시선으로 미래에 대비하고 있었다. 구글이 인터넷에 도로를 닦고 철로를 깔아냈다면 IBM은 인터넷 자체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한 것이다. 


NSFNET 구축이 갖는 의미는 첫째, 전체 시스템의 병목현상이 해소되었다는 것, 둘째, 연결되는 호스트 컴퓨터의 수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인터넷 이용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 그리고 셋째, NSF가 NSFNET 백본의 상업적 이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되면서 민간부문에서도 인터넷 제공업체가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Griffiths, 1999). 


정보기술은 컴퓨터기술과 통신기술이 결합된 것으로 모뎀에서 시작된 후 인터넷으로 진화했다. 모뎀은 방공망 시스템의 일환으로 개발되었고, 1970년대에 소비자 네트워크의 구성에 적용되었다. 인터넷의 출발점인 아르파넷은 냉전의 분위기에서 모색되었으며, 1969년에 4개의 노드로 구성된 최초의 아르파넷이 탄생했다. 


이어 1983년에는 TCP/IP이 채택되었고, 1991년에는 월드와이드웹이 개발되었다. 


인터넷은 1994년을 전후하여 일반인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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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술(informationtechnology)은

IT’라는 약어가 널리 사용될 정도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기술이다. 더 나아가 최근의 기술발전에서는 ‘IT 융합’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예를 들 어 NBIC(NanotechnologyBiotechnologyInformationTechnologyandCognitiveScience)는 나노기술, 생명공학기술, 정보기술, 인지과학의 융합에 주목하고 있다. 이처럼 정보기술은 다른 분야의 기술과 연계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보기술 자체가 일종의 융합기술에 해당한다. 


정보기술"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해 온 통신기술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모습을 드러낸 컴퓨터기술이 결합됨으로써 탄생했던 것이다. 


인터넷의 확산을 매개로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문제도 전면적으로 부상하고 있다. 


스팸 메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물론 컴퓨터 바이러스로 인해 인터넷 대란도 발생하고 있다. 


쿠키 파일로 다른 사람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악용함으로써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도 빈번한 일이 되었다. 


음악 파일의 공유를 둘러싼 냅스터(Napster) 사건에서 잘 드러났듯이, 인터넷상의 지적재산권 분쟁도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인터넷을 지나치게 사용하여 중독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도 있고, 현실세계와 사이버세계 사이에서 자기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 공간에 음란물이 얼마나 많은지 인터넷의 수요가 ‘군사에서 섹스로(frommilitarytosex)’ 바뀌었다는 지적도 있다. 더 나아가 정보에 접근하는 기회에 격차가 발생하고 정보기술을 감시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에 PC의 보급이 확대되고 통신 인프라가 확대, 발전되면서 인터넷 이용자는 연구자 집단에서 벗어나 '네티즌'으로 확대되었다. 1994년 호스트 수 3200만 개, 웹 사이트 3000개이던 것이 그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1998년에 이르러서는 3680만 개의 호스트, 4200만 개의 웹 사이트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996년 이후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사와 넷스케이프(Netscape)사 사이의 웹 브라우저 경쟁은 인터넷이 단순히 정보의 도구가 아니라 상업적 대상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다.앞으로 인터넷이 또 어떤 격변을 보이며 변해갈지, 인류는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정보에 접근하고 공유하게 될지 기대된다. 



온라인사이트" 

Griffiths, RT (1999 년). 역사 학자를위한 인터넷, 인터넷 역사.http://www.let.leidenuniv.nl/history/ivh/frame_theorie.html Hardy, Henry Edward (1993 년). 인터넷의 역사, v8.5. ftp://umcc.umich.edu/pub/users/seraphim/doc/nethist8.txt http://www.eserver.org/internet/Hardy-History-of-Net.txt Hauben, Michael & Hauben, Ronda (1997 년). Usenet 개발의 사회적 힘. 



네티즌 3 장 

유즈넷과 인터넷의 역사와 영향 . IEEE 컴퓨터 학회.http://www.firstmonday.dk/issues/issue3_7/chapter3/index.html 인터넷 밸리 (1998 년). 인터넷의 역사 : 인터넷 타임 라인 1836-1997.http://www.internetvalley.com/archives/mirrors/davemarsh-timeline-1.htm Leiner, Barry M. 외 (1998 년). 인터넷의 간략한 역사, 


v.3.1. http://info.isoc.org/internet/history/brief.html Licklider, JCR & Taylor, Robert W. (1990 년). 통신 장치로서의 컴퓨터. Memoriam 에서 재발행되는 : JCR Licklider 1915 년 - 1990 년 . Palo Alto, Calif : 


디지털 시스템 연구 센터; 

과학과 기술 , 1968 년 4 월 에서 원래 간행했다 . http://memex.org/licklider.html Rheingold, Howard (1993 년). 


가상 공동체 : 

전자 프론티어에 정착하기 . 읽기, 미사 : Addison-Wesley. http://www.rheingold.com/vc/book/ Zakon, Robert Hobbes (1999 년 -2000 년).  홉스 인터넷 타임 라인 v4.1. http://www.isoc.org/zakon/Internet/History/HIT.html . 


참고문헌"

브루스 오웬(이은미 옮김), 『인터넷과 텔레비전』 (한울아카데미, 2001). 데이비드 크라울리, 폴 헤이어 엮음(김지운 옮김),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역사: 기술, 문화, 사회』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토머스 미사(소하영 옮김), 


다빈치에서 인터넷까지』 (글램북스, 2015). 김명진, 『야누스의 과학: 20세기 과학기술의 사회사』 (사계절, 2008). 이재구, 『IT 천재들』 (미래의 창, 2011). 이재현, 『인터넷』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정지훈,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메디치미디어, 2014).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인터넷발전 에 2대의 컴퓨터를 케이블로 직접 연결해 데이터를 교환하는 방식도 도입되었지만 케이블 길이의 제한도 있고, 3대 이상의 컴퓨터와 데이터를 교환하기에는 여전히 불편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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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제한을 거의 받지 않으면서도 많은 수의 컴퓨터와 데이터를 교환할 수 있는 수단의 도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2012년 현재 약4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 또 다른 볼거리,


https://happyday6200.blogspot.com            


https://happyday2162.blogspot.com                                     


https://happyday2100.tistory.com             


https://goodlucks6200.tistory.com            


http://blog.daum.net/bumin2110/187 


http://blog.naver.com/happyday2162/221511275079


https://www.facebook.com/hyunbong


http://www.youtube.com/channel/UCfgPqvH1s_8mwfICMcBq2Zw


https://support.google.com/youtube/thread/1721344?msgid=4797194


https://www.youtube.com/channel/UCrFjsn71IQ2H96NLh4-xusg/live


https://youtu.be/HRlLFVcDdBs?t=16


www.youtube.com/channel/UCrFjsn71IQ2H96NLh4-xusg


https://youtu.be/0ezy25PUkTU


sHJs6yThSUehE1-F9wSC3w


rtmp://a.rtmp.youtube.com/live2rtmp://a.rtmp.youtube.com/live2


https://youtu.be/gR9Q6KlBp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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