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솔사 , 多率寺.
절 안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天王殿), 요사채를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다솔사(多率寺)는 경남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이라는 내력보다 듣기 좋고 소리 내기 ‘다솔’이라는 예쁜 이름 때문에 쉽게 기억된다.
한글 이름만 듣는다면 소나무가 많은 곳이리라 짐작되지만 정작 한자 풀이는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소나무가 많을 것이라는 추측도 빗나가지는 않는다.
다솔사 경남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절집으로, 신라 지증왕 4년 연기조사가 처음 영악사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400m)에 둥지를 틀고 있는 다솔사는 찾아가는 길에 적요로운 시골길을 지나 원시림을 떠올릴 만큼 빽빽한 측백나무·삼나무 사이사이에 소나무가 10여 그루씩 어울려 꿋꿋한 자태를 드러내는 멋진 숲을 만날 수 있어 좋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4년(503) 연기조사가 창건해 영악사(靈岳寺)라 불리다가 선덕여왕 5년(636)에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후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 때 영봉사(靈鳳寺)로 고쳐졌다가, 경문왕(861~875) 때 도선국사가 다시 다솔사로 바꿔 불렀다.
이후 다솔사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중수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었으며, 숙종 6년(1680)에 복원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녹색 짙고 향기로운 나무 내음 속에서 첫인사를 나누게 되는 다솔사의 건물은 대양루(大陽樓)이다.
대양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에, 전체 건물 길이가 13m에 이르는 2층 누각 맞배지붕집으로 육중하면서도 고졸한 멋이 눈길을 끈다.
영조 24년(1748)에 세워졌으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이다.
그 옆에는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장하게 어울려 있다.
다솔사 대양루전체 길이 13m에 이르는 2층 누각 맞배지붕집으로 육중하면서도 고졸한 멋이 눈길을 끈다. 누 앞에 서 있는 비는 다솔사 중건비로 조선 숙종 30년에 세워졌다.
대양루로 올라가는 계단 앞 한켠에는 숙종 30년(1704)에 세운 다솔사 중건비가 얌전히 서 있다.
거북이 몸통같이 생긴 자연석 위에 비신과 이수가 차례로 놓여 있는 이 비석에는 ‘조선국 경상우도 곤양군 북지리산 영악산 중건비’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대양루를 옆으로 돌아가면 대양루보다 한 단 높은 적멸보궁 영역으로 들어선다.
적멸보궁은 본래 대웅전이었는데, 1979년 응진전에 모신 아미타여래불상 속에서 불사리 108과가 나오자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증개축한 뒤 불사리를 적멸보궁에 모셔놓았다고 한다.
적멸보궁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님 모습인 와불상이 모셔져 있다.
적멸보궁 앞에서 대양루를 바라보면 대양루의 맞배지붕이 묵직하다.
적멸보궁 오른쪽 뒤에 있는 응진전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머물며 수도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다솔사는 만해뿐 아니라 승려이면서 독립운동과 정치·교육 활동에 활발했던 김법린(1899~1964)과 최범술(1904~1979), 불교철학을 연구·교육하는 데 힘쓴 김범부(1897~1966), 소설가 김동리(1913~1995) 등이 은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최범술은 다솔사 앞마을에서 태어나 60년 가까이 이곳에 머물면서, 인근에 자생하던 차나무 씨를 받아 절 뒤쪽 비탈에 차밭을 넓게 일구어 반야로차를 만들어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솔사가 ‘다사’(茶寺)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것은 이 반야로차 때문이다.
적멸보궁 뒤쪽에는 그가 일군 차밭이 꽤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 차나무는 성장 속도가 빨라 다른 지역의 차나무가 움이 틀 무렵이면 여기서는 찻잎을 딴다.
이곳의 차나무 씨를 받아 다른 곳에서 기르기도 하는데, 차맛은 여기서 자란 것보다 떨어진다고 한다. 값이 만만치는 않지만 다솔사의 명품으로 손색없는 이 반야로차는 경내 매점에서 살 수 있다.
다솔사 길목인 다솔사휴게소 앞 언덕배기에 최범술의 부도가 있다.
다솔사와 인연을 맺은 소설가로는 김동리가 있다.
그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다솔사에 머물며 광명학원이란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때 대양루가 수업 장소였는데, 경남지방에서 모인 청년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김동리는 다솔사로 낙향하여 1963년 단편소설 「등신불」을 썼다.
「등신불」의 배경이 다솔사이다.
보안암 석굴
다솔사 왼쪽으로 난 등산로는 비교적 평탄한 능선을 타고 이어지는 오솔길이라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을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약 2㎞ 정도 올라가면 다솔사에 딸린 보안암(普安庵)이 나온다.
보안암에는 통일신라 때 건축된 경주 토함산의 석불사(석굴암)와 닮은꼴인 고려시대 석굴이 있다.
이른바 보안암 석굴이다.
보안암 석굴석굴사원이 많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고려시대의 석굴이다. 비록 규모도 작고 솜씨도 거칠지만 돌을 쌓아 만든 축조방식에서는 경주 석불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비좁은 보안암에 그나마 절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석굴은 뒷산을 의지하여 경사면을 ㄴ자로 파내고 다진 터 위에 널빤지 모양의 돌을 반구형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려 만든 석실 형식이다.
널빤지 모양의 자연석은 충격이나 비바람에 의해 결 따라 깨진 점판암 조각으로, 깨고 다듬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이 석굴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다.
석굴의 크기는 정면 9.4m 측면 6.6m 높이 약 3.5m이다.
석굴의 내부는 기본적으로 돌방무덤과 같다.
정면은 양쪽에 기둥을 세워 현관을 만든 후 통로를 통하여 주실에 이르도록 만든 전실이며, 주실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벽과 천장의 뼈대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를 널빤지 모양의 점판암으로 메웠다.
예전에는 전실 앞 나무기둥에 작은 기와집이 있었다고 한다.
통로인 전실은 폭 1m 길이 1.8m 높이 1.8m이며, 주실은 폭 3.6m 길이 2.5m 높이 2.8m이다.
주실에는 향받침대 뒤로 석조여래좌상이 있고 좌우에 16나한상이 있다.
향받침대에 조각된 도깨비 얼굴이 생동감 있게 생겨 눈길을 끈다.
석조여래좌상은 얼굴이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나 전체의 윤곽은 그런대로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지는 않지만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여래임이 분명하며, 신체 각 부위는 부위별로 굴곡이 유연하게 드러나 있다.
높이는 1.9m, 무릎폭이 1.02m 정도이다.
16나한상은 모두 50㎝ 내외로 왼쪽에 8구, 오른쪽에 7구가 있는데, 자연석이라 해도 믿어질 만큼 추상적이고 대담하다.
얼굴엔 세부 표현이 전혀 없고, 몸 전체가 마치 자루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대부분 웅크리고 있다.
나한상들은 목을 움츠리거나 빼거나 팔짱을 끼거나 무릎을 세우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등 변화의 폭이 크진 않지만 제각기 다른 크기와 자세를 하고 있다.
16나한상인데 어찌된 까닭인지 1구가 보이지 않는다.
석굴 앞쪽으로 낮은 산이 연이어 가로막고 있어서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석굴은 동향하여 진주만의 바다를 향하도록 자리잡고 있다.
보안암 앞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전망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남해에 면한 사천땅의 생김새 요모조모를 발치 아래로 내려다보는 맛이 썩 감칠나다.
지형적인 이유로 인도나 중국과 같은 대규모의 석굴이 조성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석굴사원으로 명명할 만한 것은 경주 석불사뿐이다.
보안암 석굴은 비록 규모가 작고 솜씨도 거칠지만 돌을 쌓아올려 만든 석굴에 동향한 석불을 봉안하고 있는 등 경주 석불사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솔사 보안암 석굴의 석조여래좌상경남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산43.
1972년 2월 12일 경남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인공으로 마련된 대지 위에 판형(板形)의 사암질(沙岩質) 자연석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분묘형(墳墓形) 석굴로, 앞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목조가구를 짜올렸다.
석굴 입구에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2m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주실(主室)이 있다.
천장은 장대석(長大石) 2개를 동서로 걸치고 다시 그 위에 또 하나의 장대석을 걸쳐놓았다.
이러한 내부수법은 횡혈식(橫穴式) 석실묘(石室墓)의 수법과 비슷하다.
석굴 안에는 결가부좌한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좌상 뒤에는 아주 작은 돌을 쪼아 만든 16구(具)의 나한상(羅漢像)이 각 8구씩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전실(前室)의 목조가구수법은 한국의 석굴이나 마애석불(磨崖石佛)의 전면에 설치하던 전통적인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구조를 따른 고려시대의 석굴이다.
보안암은 원래 서봉사(栖鳳寺)에 딸린 암자였으나 서봉사가 폐지됨에 따라 다솔사로 귀속되었다.
일명 미륵암(彌勒庵)이라고도 했으며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전하지 않는다.
1336년경 이곡(李穀)이 쓴 기록에 ‘서봉사 남쪽 천령(天嶺) 위에 석굴을 만들어 미륵석상을 봉안한 것은 신라 신문왕 때의 두 왕자에 의해서이다.’라고 되어 있고, 17세기 중엽의 최응천(崔應天)도 미륵봉의 석실 안에 장륙석불(丈六石佛)이 봉안되어 있다고 서술했다.
이들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안암석굴의 창건연대를 신라시대로 추정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인 극락전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9호인 응진전, 대웅전·나한전(羅漢殿)·천왕전(天王殿)·요사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 건립된 2층 맞배집으로서, 건평 106평의 큰 건물이다.
1658년에 중건하고, 1986년에 수리하였으며, 2000년 1월에 다시 보수를 마쳤다.
1978년 2월 8일에 있었던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불사(改金佛事)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 절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을 본뜬 높이 23m, 30평 정도의 성보법당(聖寶法堂)을 탑 안에 설치하여 적멸보궁사리탑(寂滅寶宮舍利塔)을 건립하였다.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멸이 심한 마애불(磨崖佛)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 부도군(浮屠群) 등이 있다.
보안암석굴은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여지며, 경주 석굴암의 형태와 비슷하다.
석굴 안의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은 코 부분이 깨어져 있으며,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여 1.3m 내외의 석불좌상 16구가 안치되어 있는데,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도군에는 도명(道明)·낙화(樂華)·성진(聖眞)·풍운(風雲)·세진(洗塵) 등 5인의 부도가 있다.
이 절은 일제 때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며,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등신불(等身佛)』을 쓴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절 주위에서 재배되는 죽로차(竹露茶)는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이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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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한국의 명산대찰』(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다솔사 [多率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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