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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풍속 민속놀이등, 각종기타,

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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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


줄타기는 줄광대가 줄 아래에 어릿광대와 삼현육각 악사를 대동하고 음악 반주에 맞추어 줄 위에서 다채로운 기예·재담·가요를 연행()하는 전통연희이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줄타기는 연희 장면에 적합한 가요와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재담이 다양한 기예와 어우러져, 관중의 흥미와 탄성을 자아내는 고난도의 전통연희이다. 

기예, 재담, 음악의 유기적 결합은 허공에 설치된 줄이라는 협소한 단선의 폐쇄 무대를 폭넓은 극적() 공간으로 확장시켜서, 한국 줄타기가 단순한 기예를 넘어 주제 의식을 표출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공연예술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줄타기는 고려시대 『동국이상국집()』에 주삭(), 조선시대 『성호사설()』에 답삭희()와 이승(), 『허백당집()』에 보삭(), 『오주연문장전산고(稿)』와 『성소부부고()』에 주승(), 『물보()』에는 승희(), 『역어유해()』에는 사연삭()과 무환(), 『약헌유집()』 승삭(), 『문종실록()』에는 주질(, 줄질의 이두식 표기)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줄 위에서 온갖 재주를 펼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래 

줄타기는 무예를 단련하고 자연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기예로,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우리나라 줄타기는 이러한 자생적 전통 아래 성립된 소박한 형태의 줄타기가 삼국시대 서역과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산악()·백희()의 영향을 통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변화 발전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까지는 줄타기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당시의 여러 행사에서 가무백희()·잡희() 등이 연행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줄타기의 연행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후 고려 중기에 들어와서 줄타기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나타나고, 조선시대에는 풍부한 문헌과 도상자료를 통해 국가와 민간의 여러 행사에서 줄타기가 성행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줄타기는 현재도 전통연희의 중요한 종목으로 연행 현장에서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변화에는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나무다리걷기, 방울받기, 칼재주부리기, 씨름, 수박희 등과 같은 곡예와 묘기 종목에 해당하는 연희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곡예와 묘기의 대표 종목인 줄타기·땅재주·솟대타기 등이 보이지 않아, 삼국시대 줄타기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고구려 이전 시기인 중국 한대 고분의 화상석()이나 화상전()에는 줄타기, 솟대타기 같은 종목들이 많이 그려져 있고, 앞으로 우리나라 고분을 더 발굴하면 해당 그림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시기 줄타기의 존재 가능성은 부정되지 않는다. 

특히 줄타기는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자생적인 종목이고, 줄타기가 포함된 산악·백희 종목들이 전문 연희 집단에 의해 함께 전수되고 연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줄타기의 존재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현재까지 발견된 줄타기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이규보(, 1168-1241)가 오세문()의 〈삼백운시()〉에 화답한 시다. 

여기서는 민간에서 "은하수에 닿을 정도로 줄을 높이 매달고()" 고난도의 줄타기를 연행했음을 보여준다. 


이규보가 남긴 줄타기에 대한 다른 기록으로 〈진강후 저택에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며 올린 서문과 송시(  )〉가 있다. 

여기서는 임금의 행차를 맞이할 때 줄타기를 비롯한 여러 연희를 연행했던 것을 "비단 장벽에 안개가 끼어 있고 채색 산에는 구름이 자욱하온대 솟대타기와 줄타기는 장안이 온통 구경하고, 북소리와 현악 소리는 팔가에 늘어서서 모두 듣사옵니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에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는 공식 행사와 관리들의 사적 연회() 공간에서 수준 높은 줄타기가 펼쳐졌음을 보여준다.


국가 공식행사에서 줄타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은 구축()의식이 끝난 후 연행된 나희()를 묘사한 이색(, 1328-1396)의 〈구나행()〉이다. 

여기서 "나아갔다 물러났다 가볍고 빠르기 바람결의 반딧불 같네"라는 표현은 강남 장사꾼으로 꾸민 광대의 줄타기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에 기반해 건국되었다. 

팔관회와 연등회는 자취를 감추었고 수륙재·우란분재 같은 불교행사도 약화되었다. 

대신에 나례()·중국 사신 영접행사·문희연()·지방관 환영행사·사대부가의 잔치 등에서 줄타기가 풍성하게 공연되었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나례()에서도 각종 연희가 연행되었다. 

성현(, 1439-1504)의 〈관나희()〉는 화사한 봄에 궁궐 안에서 임금과 신하들을 모아놓고 농환()(방울받기)·줄타기()·인형극()·솟대타기(竿) 등이 연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때 줄타기는 그 기예가 중국 한나라 성제()의 총애를 받던 조비연()처럼 날렵하다고 묘사되어 있어 매우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 영접행사와 일본 통신사 파견 행사, 지방관과 관련된 각종 행사 등의 공식 공연에서 다양한 연희가 펼쳐졌고 이때 줄타기도 공연되었다. 

성현은 〈관괴뢰잡희시()〉에서 중국 사신 영접행사에서 연행된 조선의 땅재주·줄타기·농환·인형극 등의 연희 수준을 "중국 사신 휘둥그레 깔보지는 못하리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문종실록()』 즉위년(1451) 6월 10일 조에는, 중국 사신 영접 행사를 위해 '나()'를 쓰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의 '나'는 구나()가 아니라 나희()를 의미한다.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것과 같이 하고, 함부로 떠들고 희학할 수 없다고 한다면, 광대·서인의 주질, 농령, 근두 등과 같은 규식이 있는 놀이는 예전대로 하고(  西  )"라는 기록은 국상을 당한 즈음이라 중국 사신을 맞이하면서, 놀이를 축소하는 방법을 의논한 것이다. 

이때 규식이 있는 놀이 가운데 주질()이 줄타기인 것에 주목해 보면, 조선시대 줄타기는 중요 국빈인 중국 사신 영접행사에서 연행되었던 대표적 연희 종목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종() 19년(1448)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의 〈조선부()〉에 의하면, 그 시절 연행되던 조선의 연희들이 매우 세련된 기교를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줄타기는 "많은 줄을 따라 내리매 가볍기는 능파선자와 같다(沿 )"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익(, 1629-1690)도 『성호사설()』을 통해 원래 중국으로부터 한반도에 전래된 줄타기는 수준 높은 쌍줄타기였고, 당시 조선의 줄타기 역시 매우 뛰어나서 중국 사신들이 찬탄해 마지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금 세상 광대에겐 답삭희() 라는 게 있는데 어떤 이는 이를 이승()이라고 한다. 

한나라 때에 두 밧줄을 양쪽 기둥에 매어 놓고 그 두 광대가 마주 서서 춤을 추면서 밧줄 위로 다니는데 서로 오가는 길에 얼굴이 마주 닿고 어깨가 서로 갈려도 넘어지지 않았다 하니 장형이 〈서경부〉에 '양쪽 손에 공과 칼을 쥐고 휘두르면서 뛰는데 밧줄 위로 달리다가 서로 마주 닿는구나'라는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에 와서는 이런 재주가 더욱 교묘해져서 마주서서 춤을 출 뿐만 아니라 더러는 능란하게 몸을 번드쳐서 재주를 넘고 손으로 해금을 퉁기는 등 흔들거리고 기울어지기도 하며 능히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니 교묘한 재주들이 이와 같다. 

혹 두 줄을 매는 이유를 물으면 '외줄타기가 쌍줄 타기보다 쉽다'고 대답한다.

 ······ 우리나라 풍속도 이런 재주는 아주 월등하게 잘 하는 바, 중국 사신이 가끔 와서 보고 천하에 없는 재주라고 한다.

『성호사설』

중국 사신 영접행사에서 줄타기가 연행되었음을 보여주는 도상자료에는 청나라 사신 아극돈(, 1685-1756)이 1725년 완성한 『봉사도(使)』가 있다. 이 작품 제7폭에는 모화관() 마당에서 공연한 대접돌리기, 땅재주, 탈춤 등의 연희들이 묘사되어 있고, 그림 내용을 소개하는 "상궁에서 풍악을 울려 맞고 온갖 놀이에 괴뢰희를 바치니, 오산()은 땅 위를 움직이고 채색 밧줄은 허공에 얽어 세웠네(   )"라는 제화시()가 실려 있다.

조선 후기 외교 문화 사절로 줄광대가 파견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에는 김인겸(, 1707-?)이 1763년 8월 3일부터 이듬해 7월 8일까지 11개월 동안 일본의 문물제도와 풍속 등을 기록한 장편 기행가사 〈일동장유가()〉가 있다. 

일본으로 향한 노정 중 대마도()와 일기도()에서 연행된 줄타기를 "삼현()을 장히 치고 소동으로 대무하며 재인으로 덕담하고 줄 걸리고 재주시켜 종일토록 단란하니 왜놈들 구경하며 기특고 장히 여겨 서로 보고 지저귀며 입 벌리고 책책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될 때 문화사절의 일원으로 줄광대도 파견되어 조선의 수준 높은 줄타기가 일본에 소개되었고, 한국과 일본은 줄타기를 포함한 다양한 연희문화를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외교 사절 영접 행사의 줄타기 공연은 개화기까지도 이어져서, 1888년 봄 외무대신 조병식()의 공관에서 펼쳐진 오찬행사에도 나타난다. 

"만찬이 끝난 후에는 ······ 먼저 공중의 외줄 위에서 곡예를 부리며 지나가는 줄타기가 있었고"라는 기록을 통해 근대에 이르러서도 외교행사에서 줄타기가 중요한 종목으로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관 환영 행사를 포함한 지방의 각종 행사에서도 줄타기를 포함한 다양한 연희 종목이 공연되었다.

1601년 허균(, 1569-1618)은 가부낭관()에서 전운판관()이 되어 삼창()에 가서 조운()을 감독하게 된다. 

1601년 8월 13일에 진남헌()에 나가 방백과 함께 솟대타기(竿)·줄타기()·높이뛰기() 등 잡희를 모두 구경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19세기 초반의 지방관 부임 환영 행사를 그린 작자 미상의 8폭 병풍 『평안감사환영도()』 중 1폭에는 부벽루의 대청과 마당에서 공연된 연희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 중 왼쪽 아래에 줄타기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주도의 공식적 행사뿐만 아니라, 과거급제 후 벌이는 유가()와 문희연() 등과 같은 민간의 각종 연회와 유랑예인들의 공연에서 줄타기가 연행되었다.


서종화(, 1700-?)가 1729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에 펼친 유가의 내용을 『약헌유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종화는 창우잡기()에 모두 능통한 전라도 무안 출신의 우인() 박만회()가 펼친 다양한 줄타기 연행 양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들의 좌우에 몇 길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나무 끝에 줄 하나를 가로로 걸친다. 

그러고서 펄쩍 뛰어 줄에 올라타서 앉기도 하고 무릎을 꿇기고 하며 눕기도 일어나기도 한다. 

다리를 꼬고 걸터앉기도 하고 한 발로 서기도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춤을 추기도 휘파람을 불기도 젓대를 불기도 한다. 

옷을 벗어 다시 입기도 하고 망건을 벗어 다시 쓰기도 한다. 

활보하기도 하고 급히 뛰어가기도 하며, 몸을 돌려 동쪽으로 가기도 하고, 동쪽으로 가다가 몸을 돌려 서쪽으로 가기도 한다. 곤두박질했다가 뛰어오르기도 하고 줄을 안고 돌기도 한다. 

거미처럼 휘늘어지고 학처럼 다리 들고 호미로 김매고 풀무질하며 얼음지치고 널뛰기하는 기술이 한둘이 아녀서 구경꾼들이 에워싸서 머리끝이 솟구치고 혀를 내밀며 기이하다고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다. 

참으로 빼어난 기예라고 할 만하다.

신광수(, 1712-1775)가 1750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유가 할 때의 기록인 〈연희하는 아이가 줄타기 하는 것을 보다()〉라는 제목의 시와 유득공(, 1749-1807)의 『경도잡지()』 「유가」 조를 통해서도 유가와 문희연에서 줄타기가 필수적으로 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희연에서 펼쳐진 전통연희의 연행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자료는 송만재(, 1788-1851)의 〈관우희()〉(1843)이다. 

이 작품은 문희연에서 재인()들이 산붕()을 설치하고, 어룡만연지희()·불토해내기·포구락·사자무·처용무·유자희()·요요기()·땅재주·검무·줄타기·솟대타기 등이 펼쳐졌음을 보여준다. 


〈관우희〉 50수 중 26수에서 35수는 줄타기의 도입과정, 줄타기의 연행시간, 연행 공간, 관객, 기예, 중놀이, 살판에 대한 내용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1857년에 제작된 여흥() 민()씨의 『회혼례도()』 제3-4폭에는 줄광대가 어릿광대를 대동하고 삼현육각 반주에 맞추어 장삼과 고깔을 쓰고 죽장을 허리춤에 낀 채, 줄타기의 중놀이 대목을 연행하고 있다. 

이러한 중놀이와 유사한 장면은 『기산풍속도()』에도 등장한다.


조선 후기 감로탱()의 하단부에는 유랑예인집단의 공연 장면이 많이 그려져 있다. 

감로탱에는 외줄타기, 쌍줄타기, 솟대타기와 솟대타기의 일종인 쌍줄백이, 땅재주, 방울쳐올리기, 탈춤, 접시돌리기, 인형극, 사당춤, 검무 등이 묘사되어 있다. 

감로탱에 보이는 줄타기는 줄에 밀착된 듯 붙어서 거미와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찬사를 불러올 만큼 매우 실감 나고 수준 높은 것이다.


감로탱에 보이는 쌍줄백이는 줄타기와 형식적 유사성을 지니지만, 쌍줄타기와는 분명히 다른 연희이다. 

쌍줄타기는 평행한 쌍줄 위에서 연행하는 것이므로 줄의 높이가 다르면 줄타기를 공연할 수 없기 때문에 양쪽 작수목의 높이가 같다.  

한쪽 작수목은 X자로 교차되어 있고, 다른 쪽 작수목에는 도르래가 설치되어 있어서 줄을 당기기 쉽게 되어 있다. 

쌍줄백이는 가운데 장대를 하나 세우고 그 꼭대기에는 십자형의 나무막대를 설치하여 연희자가 그 위에서 재주를 부릴 수 있도록 했다.  

장대 양옆으로 각각 두 줄을 늘어뜨렸는데, 이 늘어뜨린 줄들을 묶는 말뚝은 가운데의 장대에 비해 매우 낮다. 

쌍줄백이는 솟대와 말뚝에 매어놓은 사선의 줄 위에서 펼쳐졌고, 쌍줄타기는 양쪽 작수목에 연결된 평행된 줄 위에서 연행되었다.


감로탱에는 외줄타기와 쌍줄타기가 함께 나타난다. 이는 우리나라 줄타기의 역사적 전개 양상에 보이는 고유한 특징이다. 

중국과 일본이 17-18세기 이후부터는 쌍줄타기와 외줄타기가 혼용되는 방식에서 외줄타기로 연행 방식이 일원화되는 데 반해, 우리는 20세기 초까지 상류층을 대상으로 외줄을 타는 광대줄타기와 민간에서 공연을 펼친 유랑예인들의 쌍줄타기·외줄타기로 줄타기가 병립되었다가, 현재는 외줄타기로 통일되었다. 


유랑예인들의 연희가 묘사된 감로탱에는 19세기 초반의 〈백천사() 운대암() 감로탱〉(1801)과 〈수국사() 감로탱〉(1832)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감로탱에 모두 쌍줄타기가 그려져 있다. 

쌍줄타기는 감로탱에 이외에도 1902년 12월 16일자 『제국신문』의 논설에도 나타난다. 

이 기사는 협률사의 공연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풍악을 가초고 혹 츈향이와 리도령도 놀니고 썅쥴도 타며 탈츔도 imagefont고 무동imagefont도 잇스며 기외에 imagefont 무imagefont imagefont가 더 잇는지는 imagefont셰치 안으나"라는 내용을 통해 협률사의 공연 종목 가운데 쌍줄타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쌍줄타기의 실제 연행 양상을 볼 수 있는 사진자료가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였던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에 의해 남아 있다.


남사당패 출신의 이수영(1940-2007)도 쌍줄타기는 송순갑의 솟대쟁이패가 하던 쌍줄백이 솟대타기와는 다른 것으로, 자신이 어려서 봤던 쌍줄의 높이는 현재의 줄타기보다 높았고 이를 '개고'라고 불렀다고 제보했다.

조선 후기 들어 줄타기는 줄 아래 어릿광대를 두고 재담을 서로 주고받고 삼현육각의 탄탄한 음악 반주에 맞추어 풍성한 기예·재담·가요를 연행할 수 있는 판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줄타기가 기예 중심의 줄타기를 벗어나 연희 중심의 줄타기로 발전했다는 연희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서양식 극장이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마당 공연 방식에서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극장 공연 방식으로 연행 조건이 급격하게 변모했다. 

이러한 공연 환경의 변화는 줄타기가 독립된 종목으로 장시간 공연되는 판줄에서, 짧은 형태로 축소되어 기예 중심으로 공연되는 도막줄로 바뀌는 계기를 제공했다.

현재 파악할 수 있는 근현대 줄타기 연희자의 계보 중 최고()의 연희자는 김상봉()이다. 

김상봉은 약 200여 년 전의 인물로, 그에 의해 줄타기가 최상천-김관보-김영철·이동안-김대균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영철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 헌종() 때 궁중에 경사가 있었는데 그때 전국에서 재인들을 뽑아 들여 각종 연희를 연행하게 했다고 한다. 

이때 김상봉이 줄을 매우 잘 타자 헌종은 그의 기술을 칭찬하고 '우두머리'라는 뜻의 상봉()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것은 김영철이 스승인 김관보에게 전해들은 것으로 줄광대들의 줄타기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준다.

20세기 광대줄타기 전승 계보의 중심에는 김관보가 우뚝 서 있다. 

김관보는 1910-1930년대까지 과천을 본거지로 삼아 세습무 집단 내에서 줄타기를 전수했다. 

김관보의 문하에서 김봉업, 임상문, 이일문, 이정업 이생민, 이복남, 이돌개, 오돌끈, 이동안, 김영철 등의 남성 줄광대와 박명옥, 임명옥, 임명심, 전봉선, 한농선 같은 여성 줄광대들이 배출되었다. 


김관보의 제자 중 김봉업(, 1895-1964)은 재담과 소리에 능하고 판줄을 잘 탔다고 한다. 

〈중타령〉, 〈선녀타령〉, 〈왈짜타령〉 등 김봉업의 줄소리와 해금 연주가 녹음되어 현재 전해지고 있다. 

김봉업은 줄타기뿐만 아니라 땅재주로도 이름을 떨쳤다. 

줄광대가 이렇게 땅재주를 겸할 수 있는 것은 줄 위에서 행하는 살판, 물구나무서기 등의 기예를 연마하고자 부단한 지상 연습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이동안(, 1906-1995)은 재인청()의 여러 연희 종목에 능했고 줄타기 기예와 재담에도 뛰어났다. 

김영철(, 1920-1988)은 경기도 과천의 세습무계 출신으로 일곱 살 때부터 김관보에게 줄타기를 배웠다. 

김영철은 평생 난장, 명창들과의 극장 공연, 유랑극단 공연에서 줄타기를 연행했고,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영철은 뛰어난 기예를 보였지만 전통적인 형태의 판줄이 아닌 20세기 들어 극장 공연에 맞게 변화된 도막줄을 연행하고 있었다. 

현재는 김영철과 이동안의 제자인 김대균(, 1967- )이 판줄을 복원하여 광대줄타기 예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

유랑예인 계통 어름줄타기는 남사당패에 의해 전승되다가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남사당놀이에 포함되었다. 이때의 줄타기 연희자는 조송자(, 1930-2000)였다. 

현재 활동하는 줄타기 연희자는 남성 줄광대로 홍기철, 권원태 등이 활동 중이고, 여성 줄광대로는 김정순, 박진아, 서주향 등이 있다. 

이 중 권원태(1967- )는 영화 『왕의 남자』에 출현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김민중과 유진호를 지도하며 활발한 공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김대균이 이끄는 광대줄타기는 임상문과 김영철의 고향이었던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에 보존회 사무실을 두고 전국의 각종 민속축제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사당패 어름줄타기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의 남사당놀이 보존회와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에 전수관을 두고 있는 안성 남사당패 등 두 단체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연행된 줄타기는 음악, 기예, 재담이 어우러지는 판줄이었다. 

판줄은 줄광대가 어릿광대와 함께 삼현육각 악사들의 반주에 맞추어 줄타기(기예, 재담, 가요)를 하고, 여기에 관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놀이를 뜻한다. 

판줄은 전체적으로 일정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는 데 반해, 도막줄은 어릿광대와 삼현육각 악사를 대동하지 않고 줄재담이나 가요 없이 기예 위주로 연행하는 것을 뜻한다. 

근현대 들어 연행 상황의 변화로 줄타기라고 하면 기예 중심의 도막줄을 연행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통사회에서 줄타기는 통상 한나절 정도 연행되는 분량의 풍부한 내용과 형식이 갖추어져 있는 판줄이었다. 


판줄 공연을 하려면 줄광대의 기예만으로는 내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삼현육각 연주가 이루어지고, 어릿광대는 갖은 재담과 소리와 흉내 내기를 하고, 줄광대는 기예를 중심으로 현장 상황에 밀착된 가요와 재담을 펼칠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공연을 펼치는 연희자를 광대줄타기에서는 줄광대와 어릿광대(배우씨)라 하고, 남사당패 어름줄타기에서는 각각 어름산이와 매호씨라고 부른다. 

어름산이는 남사당패 어름줄타기 줄광대를 일컫는 말이다. 

어름산이에서 어름이란 줄 위에서 곡예를 펼치는 일이 마치 얼음 위를 걷는 듯 위험하기 때문에 붙여진 말로 줄타기를 뜻한다. 

산이란 전통연희를 연행하는 연희자를 뜻하는 사니를 의미한다. 어름산이와 매호씨의 기능과 역할은 광대줄타기의 줄광대, 어릿광대와 대동소이하다.


줄타기의 초반부에서는 줄광대가 처음 줄 위에 올라가서 기예를 펼칠 때 줄 위를 걸어가다 갑자기 뒤로 떨어지는 동작을 취하면서, 뒷쌍홍잽이와 같은 관중의 허를 찌르는 동작을 펼친다. 

이로 인해 관중은 줄타기의 긴장감을 맛보게 된다. 


줄광대는 삼현육각의 흥겨운 반주 음악에 맞추어 어릿광대와 재담을 주고받으며 기예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앞으로 전개될 기예를 예고해서 관중의 호기심을 강화시킨다. 

이미 연행한 기예에 대해서는 관중이 환호와 박수를 아끼지 않도록 함으로써 줄타기의 묘미를 즐기게 해준다.


줄광대는 줄 위에 올라가서 줄판 전체를 조망하며 연행을 펼치지만, 줄이라는 공간적 제약에 얽매여 있다. 

줄광대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줄재담을 통해 어릿광대와 삼현육각 악사 등과 상호 협력하여 줄을 연극적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줄광대는 자신의 줄재담이 관중의 흥미와 공감을 얻지 못하면 관중의 집중력이 약화되기 때문에, 관중의 성향과 반응을 파악하여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 재담을 지속적으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줄광대의 연행 현장에 대한 상황 파악 미숙과 관중의 성향을 읽어내는 능력의 부족은 관중을 줄판에서 하나의 공감대로 묶어내지 못하고, 연행 현장을 이탈하게 만든다. 

줄광대는 다양한 왈짜들의 모습, 양반의 걸음걸이나 앉는 모습, 부인네들의 모양새나 화장하는 모습 등 특정 인물의 동작을 흉내 내거나 우습게 표현함으로써, 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해학적 형상화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어릿광대는 줄광대가 줄을 탈 때 지상에서 뛰어놀며 익살을 부리고 줄광대와 재담을 주고받는다. 

중놀이 대목을 연행할 때 줄광대에게 장삼과 고깔, 죽장 등을 올려주거나, 왈짜놀이 대목에서는 왈짜로 분해서 줄광대와 파자놀이 등을 주고받는다. 

어릿광대는 줄광대와의 협력 속에서 줄타기를 연행하는 중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릿광대는 줄광대와 대사를 주고받으면서 관중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줄광대와 삼현육각 악사들과의 원활한 협조를 통해 줄판의 분위기를 흥겹게 유지하는 구실을 한다. 

어릿광대는 통상 줄광대와 관중의 심리를 대변하기도 하면서 줄타기가 연행되는 내내 줄광대의 기예가 돋보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줄타기 연행에서 어릿광대의 역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릿광대는 줄 아래에 있어 줄광대의 기예와 삼현육각 악사의 상태, 관중의 반응을 모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성립시키고 줄판의 흐름을 조종한다.


어릿광대는 줄광대의 흥이 약화되었을 때는 줄판의 분위기를 띄우며, 줄광대가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기 전에는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어릿광대는 줄판의 전개 방향과 상황을 고려하여 순간순간 적절한 반주 음악을 유도하고, 줄광대가 관중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재담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어릿광대는 줄 아래에서 땅줄을 타는 등 자신만의 과장된 언행과 장기로 줄판에 모인 구경꾼들을 자연스럽게 줄판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어릿광대는 놀이판의 완급을 조정하고, 줄판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유지하며 관중의 적극적 호응과 일체감을 유도해 나감으로써, 허공에 매어 놓은 고립되고 제한적인 줄이라는 물리적 연행 공간이 입체적으로 확장되어 연극적 공간으로 전환되게 해 주는 것이다. 

어릿광대가 수행하는 연행 공간의 입체적 확장의 원리는 발탈의 어릿광대나 꼭두각시놀음의 산받이가 포장막이라는 한정되고 제한적인 평면 공간을 입체적인 연행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구실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삼현육각 악사는 줄광대의 기예를 반주로 보조해 주고, 줄광대와 어릿광대가 재담을 주고받을 때는 효과음을 연출함으로써 줄타기 연행 공간의 입체적 확장을 돕고, 중간 중간의 음악 연주로 공연의 완급을 조절한다.


줄타기의 연행 양상을 비교해 보면, 현존하는 광대줄타기와 유랑예인 계통의 남사당패 어름줄타기는 계통에 상관없이 연행의 일정한 흐름이 있다. 

줄타기 연행은 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소의 생략과 첨가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줄고사 : 

줄광대는 먼저 줄판을 정화하고 줄타기 스승과 선배에게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줄을 타게 해달라고 빌고, 관중들에게는 건강과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줄고사를 지낸다. 

줄광대는 줄고사를 통해 관중과 함께 음복하고 소원을 빌면서 신명나는 줄판을 만들고자 한다.

전반기예 : 

전반기예는 줄타기의 전반부에서 행하는 기예를 말한다. 줄광대는 줄고사를 마친 후 느린 염불장단에 맞춰 줄에 오른다. 

작수목에 위치한 줄광대는 객기를 부리며 줄 위로 나아가지만, 줄 위에서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다시 작수목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관중에게 웃음과 긴장을 유발한다. 

외홍잽이, 코차기, 외무릎풍치기, 양다리외홍잽이와 같은 비교적 단순한 기예를 선보인다.


중놀이 : 

중놀이는 전반 기예를 통해 발생한 극적 긴장을 이완시키는 작용을 한다. 

줄광대는 이 대목에서 흥겨운 줄타기 가요와 재담을 구사하여 관중의 여유를 회복시킨다. 

줄광대는 근엄한 중의 파계를 통해 고답적() 윤리의 위선을 풍자하고, 욕망을 긍정하는 민중적 현실성을 부각시킨다. 

중놀이의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의 등장과 외모 형용 : 

줄광대가 줄에 오른 후 줄재담을 통해 봄철의 나른하고 향락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이루어진다. 

줄광대는 중의 이목구비를 조목조목 묘사하고 옷고름과 소맷자락을 흔들거리며 절을 내려오는 중의 유쾌한 거동을 보여준다.


중과 왈짜의 문답 : 

왈짜는 중에게 어느 절에서 내려왔는지와 중의 성명을 놓고 다짜고짜 문답을 한다. 

왈짜의 질문에 중은 순순히 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유식한 척하며 한자를 파자()해서 수수께끼 형식으로 왈짜에게 해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이렇게 해서 중이 내려온 절의 이름은 황룡사()이고, 중의 성은 송()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팔선녀 희롱 : 

중과 팔선녀가 희롱하며 즐기는 이 대목은 팔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청계수 흐르는 물에 목욕하는 모습을 육감적이고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동안 줄을 타다가 중의 역할로 변신한 줄광대는 때가 춘삼월 호시절임을 환기시키면서, 육체적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팔선녀를 희롱하게 된다.


중에 대한 양반의 징치 : 

중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팔선녀를 희롱하는 모습을 보게 된 옹생원이라는 양반이 중을 질투하고 징치하는 부분이다. 

이때 중은 양반의 징치에 대해 자신의 근본을 말하며 계속해서 양반을 모욕한다. 양반은 중의 모욕에 심한 분노를 느끼고 중을 달아매서 귀를 뚫는 심한 형벌을 준다. 

중에게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충고를 한다. 

중이 양반에게 저항하고자 활용한 이러한 역설적 표현 방식은 줄광대가 가진 저항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의 신세 자탄과 환속 : 

중이 옹생원에게 심한 형벌을 당하고 난 뒤 호의호식하는 팔자 좋은 양반네들의 모습과는 달리, 시주를 받기 위해 걸식하며 어린아이에게까지 공손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중노릇을 그만두겠다고 자탄()한다.


왈짜놀이 : 

왈짜놀이는 중놀이에서 조성된 줄판의 흥겨움을 더욱 강화시킨다. 

줄광대는 이 대목에서 여러 개성 있는 인물들을 흉내 내서 관중의 흥미와 공감을 자아낸다. 

왈짜놀이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왈짜의 등장 : 

남사당패 어름줄타기에는 왈짜가 등장하는 대목이 없다. 

광대줄타기에서는 공통으로 왈짜가 등장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이때 왈짜가 등장하는 이유는 중이 파계하고 나서 할 것이 없어서 왈짜 틈에 끼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줄광대는 다양한 왈짜들의 모습을 열거한 뒤, 양반의 걸음걸이나 앉는 모습, 부인네들의 모양새나 화장하는 모습 등을 해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새타령 : 

줄광대는 기존 가요인 〈새타령〉을 차용하여 갖가지 종류의 새가 날아드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노래하며 공연의 흥겨움을 강화한다.


인물 흉내 : 

줄광대는 왈짜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한 다음, 본격적으로 각양각색의 인물을 흉내 내는 동작을 통해 해학과 풍자를 연출한다. 

양반에 대한 흉내는 상류층을 희화화시키고 그 권위를 추락시킨다. 

줄광대와 어릿광대는 특정 인물의 동작을 흉내 내거나 우습게 표현함으로써 웃음을 자아낸다. 

노론 양반의 기세등등한 걸음걸이와 형편이 구차한 소론 양반의 소심한 걸음걸이를 대비해서 흉내를 내고, 양반이 책상다리로 앉는 모습과 서민이 양반의 책상다리를 서툴게 따라하는 모습을 잇따라 표현해서 관중의 웃음을 자아낸다.


『성호사설()』 「유선()」 권5 하()의 「기예문()」 「이유위희()」 조의 "다 떨어진 옷과 찢어진 갓을 쓰고 꾸며낸 이야기와 억지웃음으로 온갖 추태를 연출한다"라는 기록처럼 유희()에서는 연희자들이 유자(, 선비)로 분장할 때, 유자를 조롱하고자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치장하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한다. 


이러한 예는 가면극의 양반과장에서 양반들이 언청이나 홍백가 등 비정상적인 모습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줄타기에 나타나는 양반 흉내는 이러한 유희의 영향 속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줄타기는 우희()의 일종인 유희의 영향 아래, 양반의 비정상적인 동작을 흉내 내고 양반을 향해 음담이나 비속어를 사용하여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후반기예 : 

줄광대는 전반부에 형성된 관중의 극적 긴장감을 중놀이와 왈짜놀이를 통해 이완시킨다. 

이것은 줄광대가 기예를 극적 방식에 따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줄타기의 전반부에서 펼쳐지는 기예는 비교적 간단한 외홍잽이, 코차기, 외무릎 풍치기, 양다리 외홍잽이 등이 주를 이루지만, 중놀이와 왈짜놀이 이후에 펼쳐지는 후반부의 기예로는 칠보달어치기, 허공잽이, 살판 등 난도가 매우 높은 연결 및 결합 동작이 주로 연행된다. 

이러한 고난도의 기예로 인해 압박되는 관중과 줄광대의 극적 긴장감은 줄광대와 어릿광대가 주고받는 재담과 인물이나 사물에 대한 모방 동작을 통해 반복적으로 이완됨으로써, 더 큰 극적 긴장을 준비해 나간다. 

이후 어려운 기예를 통해 극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고 살판(줄 위에서 공중제비 돌기)을 통해 이를 해소한다.


마무리 : 

줄광대는 관중의 성원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고 관중의 건강과 행운을 축원한 후에 얼음을 지치듯 줄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줄 아래에서 어릿광대와 함께 관중석과 악사석을 향해 인사를 마치고 퇴장한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을 지니는 줄타기의 실제 연행 요소에는 음악(음악 편성, 삽입가요, 활용 장단)과 기예 그리고 재담(언어적 특성, 형성 원리, 연행 기능, 주제 의식)이 있다.

줄타기 음악은 강한 현장성을 지니고 있어서 공연 현장의 상황과 줄광대의 신체상태, 연행 시간 등에 따라 즉흥적으로 음악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변성을 갖는다. 

줄타기의 연행 요소 중 음악에 해당하는 것은 삼현육각 반주와 공연 중간에 불리는 가요, 기예에 리듬감과 흥을 불러일으키는 장단을 들 수 있다. 


삼현육각으로 구성된 줄타기 반주 음악은 줄광대의 동작을 날렵하고 율동감 있게 만들어준다. 

어릿광대 없이 줄타기를 연행하는 경우에는 삼현육각 악사 중 장구잡이가 어릿광대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삼현육각은 줄타기 연행의 전() 단계에 쓰여서, 아슬아슬한 줄판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줄광대의 휴식을 위해서 단독 연주와 합주를 하는 등 줄광대가 연행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줄타기 가요는 줄소리라고도 부른다. 

줄소리는 소리의 목구성이 판소리의 목과 아주 비슷하다. 

'타령'이라고 하는 소리는 남도 판소리이거나 경기도나 충청도에서 했던 중고제 소리와 거의 비슷하다. 

이는 경기도의 마을굿에서 이른바 '산이'들이 하는 '판패개' 성음과도 유사하다. 

줄광대가 연행하는 줄소리에서는 판소리의 기본 성음법인 패기성음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판소리의 대목을 수용한다. 

이러한 판소리의 영향은 줄광대와 판소리 광대가 전통 사회에서 같은 세습무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줄타기에서 줄광대가 부르는 가요에는 〈난봉가〉, 〈돈타령〉, 〈방아타령〉, 〈양산도〉, 〈오봉산타령〉, 〈풍년가〉, 〈새타령〉 등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노래인 〈새타령〉은 사설 자체에 의미가 있어 부른다기보다는 줄타기 현장의 흥겨운 분위기를 강화하고, 오랜 시간 동안 줄만 타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므로 여러 종류의 노래와 재담을 활용하는 차원에서 수용된 것이다. 

이 가요들은 공연 상황의 전개와 맞물려 극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특징이 있다.


줄타기 음악에서 기예의 수행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음악적 요소는 무엇보다도 장단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단이 변동되면 노래·춤사위·동작·대사의 구사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줄타기 장단은 통상 염불장단과 타령장단이 주를 이룬다. 

현행 한국 줄타기의 기예와 가요는 18세기 이후 발생한 빠른 장단에 맞춰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줄타기 음악 장단은 한국 전통연희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삼분박()으로 되어 있다. 

우리의 삼분박(♩.)은 앞이 긴 삼분박(♩♪)으로, 굿거리장단중중모리장단자진모리장단, 타령장단 등 모두 삼분박을 사용하고 있다.


줄광대는 줄의 탄력과 신체부위를 이용하여 줄타기 기예를 펼친다. 

줄타기 기예는 줄의 탄력을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통상 1단계와 2단계의 동작으로 구분된다. 

1단계에서는 동작이 작으면서 섬세한 특징이 있다. 

줄의 반동이 미약하고 보폭이 작아 줄광대의 몸짓이 줄에 붙어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2단계에서는 탄력이 크기 때문에 보폭이 넓고 동작의 움직임이 크고 웅장하여 줄 위에서 새가 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현 줄타기 예능보유자인 김대균은 자신의 줄타기 기예를 개별동작, 연결동작, 결합동작, 모방동작으로 구분했다. 

개별동작은 한 호흡에 한 가지 동작을 연행하는 것으로, 종짓굽붙이기, 칠보보습빼기, 살판, 앵금뛰기, 두무릎황새두렁넘기, 깃발붙이기가 있다. 


연결동작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동작이 변한 것이다. 외홍잽이→겹외홍잽이, 쌍홍잽이→겹쌍홍잽이, 외홍잽이→코차기·양다리외홍잽이, 쌍홍잽이→외무릎풍치기·외무릎가새틀기, 옆쌍홍잽이→겹옆쌍홍잽이·칠보다래치기·칠보접난간·칠보보습빼기·깃발달기, 외무릎꿇기→외무릎풍치기·외무릎가새트름·외무릎황새두렁넘기·외무릎훑기, 두무릎꿇기→두무릎풍치기·두무릎가새트름·두무릎황새두렁넘기·두무릎종종걸음 등이 연결동작이다. 


결합동작은 두 개 이상의 개별동작이 결합된 동작을 말하며, 그 내부에는 주종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한 동작이 다른 동작에 부수되어야 하는데 예를 들면 배돛대서기를 위해 깃발달기가 전제되어야 하는 원리이다. 


모방동작은 일상의 동물이나 사람의 행위, 사물의 형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콩심기, 칠보보습빼기는 사람의 행위를 흉내 낸 것이고, 배돛대서기(물구나무서기), 깃발붙이기 등은 사물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며, 동물의 행동을 모방한 동작으로는 닭의홰타기, 닭의홰타고좌우로 가기, 외무릎황새두렁넘기, 두무릎황새두렁넘기, 책상다리황새두렁넘기 등이 있다.


광대줄타기가 순수한 기예(잔재비, 잔놀음)를 중심으로 하는 데 비해, 남사당패 어름줄타기의 기예는 광대줄타기의 기예보다 소략하고, 인물 모방 동작을 줄타기 기예에 포함시킨 것이 특징이다. 

남사당패 어름줄타기의 기예는 앞으로가기, 장단줄, 거미줄늘이기, 뒤로훑기, 콩심기, 화장사위, 참봉댁맏아들걸음걸이흉내내기, 억석에미화장사위, 처녀총각흉내내기, 허궁잽이, 가새트림, 외허궁잽이, 쌍허궁잽이, 양반병신걸음, 양반밤나무지키는시늉하기, 녹두장군행차 등이 있다.


줄재담이란 줄광대와 어릿광대가 주고받는 재치 있는 대사()와 상황에 맞추어 부르는 줄타기 가요의 가사()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줄타기 재담을 줄인 말이다. 

줄재담에는 비속어(), 음담(), 속담(), 수수께끼, 한문구 등이 자주 사용된다. 

줄재담은 공연장의 가변적 상황과 분위기에 맞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유동성을 본질로 갖는다.

줄재담은 일정한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재담을 생성해나가는 내재적 형성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줄재담에서는 단어, 구절, 문장 등이 빈번히 반복된다. 


반복에 의해 재담이 형성된다는 것은 줄재담이 구비문학 일반의 형성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반복에 따라 형성된 줄재담은 율동감을 형성하여 관중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게 된다. 

줄재담은 기존의 가요들을 다수 차용하고 개작해서 재담을 풍부하게 만들고, 놀이판의 신명과 흥겨움을 강화시킨다. 

줄타기 재담이 차용한 기존 가요는 판소리, 판소리 단가, 시조, 민요, 잡가 등 장르상으로는 이질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것들이다. 

줄재담은 기존 가요를 그대로 차용하는 전면적 차용 방식과 기존 가요를 변형하여 차용하는 부분 변형적 차용방식을 통해 재담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켰다.


줄재담의 기본적 연행 기능은 줄타기의 기예에 대한 설명, 앞으로 펼쳐질 기예에 대한 예고 등이다. 

한국 줄타기가 이러한 줄재담 없이 음악 반주에 맞추어 기예만 보여준다면 한국 줄타기는 서양의 서커스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한국 줄타기는 재담을 통해서 기예가 전개될 상황을 조성하고 연행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줄재담은 자연스럽게 관중들을 줄판의 일원으로 끌어들여서 쌍방향적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줄재담의 연행 기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줄타기 기예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기예마다 재담을 바꾸어 가면서, 전체적인 판의 분위기를 긴장과 흥분으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줄광대-배우씨! 조금 전에는 두 무릎훑기를 보여 드렸지만 이건 뭔고 허니 두 무릎 황새 두렁넘기라고 허는 것인데 황새 한 마리가 시골 논두렁을 타고 넘어가는디, 꼭 요렇게 넘어가겄다.

〈김대균본〉

줄광대-이제는 점점 어려워지는구나. 이건 허궁 가세트림인데 가운데 한길 이상 떠서 틀어 돌아앉는 놈이렷다. (허궁가새트림을 한다)

〈이동안본〉

둘째, 방금 연행한 기예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기예를 예고해서 관중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줄광대-이번에는 이렇게 염불타령에만 줄을 탈 것이 아니고 장단을 살짝 뒤집어서 허튼 장단으로 장단줄을 한번 타보는 것이었다. -정쿵 정저쿵-

〈김대균본〉

줄광대-조금 전에는 외무릎 가지고 잔재비를 보였는디 요번에는 두무릎 가새트름, 곱치기까지 나가던 것이었다.

〈김대균본〉

줄광대-좋지! 이놈아 입방아 닫아 걸고 어르신네 다음 재주를 보렷다. 정신 바짝 차려서 외무릎꿇기, 황새두렁넘기로 나가는데, 배우씨 꿍!(외무릎꿇기, 황새두렁넘기를 한다)

〈이동안본〉

셋째, 이미 완성된 기예에 대한 정리를 통해 관중이 찬탄과 박수를 아끼지 않도록 함으로써, 다음 전개될 기예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심어준다. 이를 통해 줄타기에서만 제공되는 짜릿한 묘미를 만끽(滿)하게 만든다.

어릿광대-자네 조상은 다람쥐인가 보네그려. 엉덩이는 가만히 있고 두 다리만 좌우로 넘나드는디 영락없이 다람쥐여 다람쥐.

〈김대균본〉

배우씨-좋지!(옆쌍홍잽이 죄우치기가 끝나면) 야, 그놈 나비 나는 것 같구나, 곰의 재주다!

〈이동안본〉

줄재담의 주제 의식은 지배 계층의 문화인 공식적 문화보다는 피지배 계층의 문화인 비공식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줄재담에는 공식적인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일상 세계에서라면 사용하기 어려운 욕설이나 저주와 같은 언어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되고, 남성과 여성의 적나라한 성애를 보여주는 음담 등이 상당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줄재담의 이러한 비속성은 전통 사회 민중 언어의 일상적인 속성으로, 서민층이 자아 발견을 통해 권위주의, 형식주의, 불평등한 신분적 특권, 관념적 허위, 남성의 횡포 등 당대의 사회적 갈등을 발산하고, 이로부터 탈출하려는 몸부림을 담고 있다. 

줄재담은 비공식 문화, 집단적 민중적 특성, 웃음과 패러디를 통해 지배 계층의 권위와 전통을 파괴하고 모든 대립하는 것이 뒤섞이는 혼성()의 세계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민중 의식의 발현, 서민적 해학의 창출이라는 줄재담의 주제 의식은 줄타기가 유희적 즐거움과 사회 비판적 의식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단순한 기예의 범주를 넘어선 수준 높은 전통연희라는 것을 보여준다.

연희본

1960년 초 김봉업의 줄타기 구술을 박헌봉이 녹음한 이후 그동안 다음과 같이 여러 연희본이 채록되었다.

(1) 김봉업 구술, 박헌봉 채록, 『월간문화재』 27, 월간 문화재사, 1974.
(2) 이동안 구술, 심우성 채록, 「광대줄타기 연희본」, 『창작과 비평』 33, 창작과 비평사, 1974.
(3) 김영철 구술, 김천흥·정화영 채록,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118, 문화재관리국, 1975.
(4) 김영철 구술, 박순호 채록, 「줄타기 민요」, 『한국민속학』 7, 한국민속학회, 1974.
(5) 김대균 구술, 심우성 채록, 『줄타기』, 화산문화, 2000.
(6) 조송자 구술, 심우성 채록,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40, 문화재 관리국, 1968.


김봉업이 사망한 1962년 이전인 60년대 초반 박헌봉이 김봉업의 줄타기 구술을 채록한 것이다. 

현전하는 줄타기 연희본 중 가장 고형()이 채록되어 있고, 전통사회 줄타기의 원형을 가장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다.


1974년 심우성이 이동안의 줄타기 구술을 채록한 것이다.

음악, 기예, 재담이 조화를 이루고 어릿광대를 활용하는 것이 특징인 광대줄타기 판줄 연희본이다. 

김대균의 판줄 복원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5년 줄타기 무형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김천흥과 정화영이 김영철의 연행 현장을 채록한 것이다. 

줄타기의 일반적 연행구조가 보이지 않고 어릿광대가 없는, 줄타기 기예가 중심이 되는 도막줄 연희본이다.


1974년 6월 아리랑 여성 농악단의 일원으로 김영철이 군산에서 공연한 내용을 박순호가 채록한 것이다. 

이 연희본에는 중타령, 왈짜타령, 새타령 대목만이 소개되어 있다. 

이 연희본에 채록된 내용은 김영철이 젊은 시절부터 해오던 줄타기가 아니라, 무형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김봉업의 줄소리 테입을 구해서 듣고,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되살리며 재구해 낸 것이다.


2000년에 행해진 김대균의 줄타기 연행을 심우성이 채록한 것이다. 

현존하는 줄타기 연희본 중 가장 최근의 것으로 기존 연희본의 장점을 수용한 종합적 성격을 띠고 있다.


1968년 심우성이 어름줄타기 연희자 조송자의 줄타기를 채록한 것이다.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유일한 남사당패 어름줄타기 연희본이다.


인접 국가 사례

중국과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줄타기 표기는 다음과 같다. 

서경부(西)〉에 주삭(), 〈평락관부()〉에 이삭(), 『문헌통고()』에는 환희()와 답삭(), 『악부잡록()』과 『당회요()』에는 희승(), 『위서』·『수서()』·『삼재도회()』에는 고환(), 『백희죽지사()』에는 사승(), 무삭(), 『동산시집()』에는 사연삭()과 승기(), 『화한삼재도회()』에는 고조()로 표기되어 있다. 

이외에 답연삭(), 삭상재(), 긍희(), 승도(), 도백삭(), 강도(), 승현(), 삭도(), 고긍기() 등의 다양한 용어도 보인다. 

이 용어들은 모두 줄 위에서 온갖 재주를 부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 한대의 줄타기는 장형(, 78-139)의 〈서경부〉와 후한 이우(, 55?-155?)의 〈평락관부()〉에서 평락관() 앞마당에서 펼쳐졌던 여러 각저()의 묘희()를 묘사한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오획() 같은 장사가 무거운 솥을 들어올리고,()
도로국() 사람들처럼 날래게 장대를 기어오르네.()
칼이 꽂혀 있는 둥근 장애물을 통과하고 물 담은 쟁반을 공중제비로 뛰어넘고,()
예리한 칼끝이 갑자기 가슴에 와닿네.()
공과 칼 여러 개를 공중에 던졌다가 받으며 재주 부리고,()
두 사람이 양편에서 춤추며 줄타기를 하고 건너와 만나네.()

西

〈서경부〉의 줄타기는 두 사람이 양편에서 춤을 추며 줄을 타다가 줄 위에서 서로 만나서 어깨를 비켜 지나가는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평락관부〉에는 줄타기를 "높다란 줄을 타면서 팔딱팔딱 뛰고 빙글빙글 돌며 춤도 추네( )"라고 표현했다. 

이는 높은 곳에서 줄을 밟고 뛰어올라 돌며 춤추는 줄타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한나라 때부터 줄타기에 음악 반주가 수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 무덤 안의 화상석()과 화상전()에도 매우 풍부한 산악·백희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도 줄타기가 묘사되어 있다. 

산둥성() 이난()의 북채촌()에서 출토된 화상석에 등장하는 줄타기()는 연희자 한 명이 줄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수평상태에서 두 명의 연희자가 긴 기()를 손에 들고 신체의 균형을 잡으며, 줄 양쪽 끝에서 중간을 향해 모여들고 있다. 

줄 밑에는 검을 세워놓아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줄타기를 펼쳤음을 보여주고 있어, 한대 줄타기의 연행 양상을 생동감 있게 살펴볼 수 있다.


중국의 산악·백희는 전한() 이후 더욱 다양해졌다. 

후대 문헌인 『진서()』 「악지()」 하()에도 후한()대 다양한 산악·백희 종목들과 함께 줄타기가 소개되어 있다.

"두 개의 큰 줄로 양쪽 기둥 윗부분을 매었는데, 거리가 몇 장()이나 되었다. 

두 여자 연희자가 마주 보고 춤을 춘 후, 그 줄 위로 걸어 나와 서로 만나 어깨가 부딪쳤는데도 떨어지지 않았다(    )"라는 기록을 통해 〈서경부〉에 나오는 줄타기와 유사한 연행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대의 줄타기는 독립 종목으로 단독 연행된 것이 아니라, 산악·백희 중 곡예와 묘기의 일종으로 여러 백희와 더불어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줄타기는 위진 남북조 시대 내내 지속적으로 연행되었다.

위대()의 줄타기는 문제() 조비()가 220년 8월 고향인 초군()에서 군사들을 위문하려고 벌인 행사에서 펼쳐진 공연을 기록한 『위대향비()』의 비문에 나타난다.


육변()이 끝나자 비희()가 펼쳐졌다. 

파유무(농환()·도검()·기무()·여도()·충협()·유봉()·상삭()·답고()·강정()·연당(무륜()·적경()·빙구축토()·희마입기() 등의 묘기()와 백호()·청록(鹿)·벽비()·벽사()·어룡()·영구()·국진() 등의 괴수()가 기괴()하게 변하여 끊임없이 연출되니, 기이한 재주가 신의 조화와 같았다.


여기서는 세발솥들기와 같은 차력, 구슬이나 칼놀리기와 같은 묘기, 희마입기()와 같은 마상재()까지 다양한 연희가 공연되었는데, 이 중 줄타기도 한 종목으로 연행되었다.

북위()의 도무제()는 천흥() 6년(403)에 산악·백희를 대대적으로 강화했다. 

이때엔 백 척 높이의 목발을 신고 재주를 부리는 나무다리걷기솟대타기 등과 함께 줄타기가 빠지지 않고 연행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위의 양현지()가 493-534년까지 뤄양()의 불사()에 대한 흥망성쇠를 기록한 『낙양가람기()』 「장추사()」 조에는 고려시대 이색()의 〈구나행()〉과 매우 유사한 연희 종목들이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사자가 앞에서 수많은 불상행렬을 인도하고, 칼삼키기()·불토해내기()·마상재·솟대타기()·줄타기() 등이 연행되었다. 

이 중 사자춤, 불토해내기, 칼삼키기, 줄타기 등은 〈구나행〉에 나오는 연희 종목들과 같은 것들로, 중국과 한반도의 전통연희가 상호 교류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남조()의 줄타기는 『진서()』 「악지()」 하()에 동진()에서는 함안() 원년(371)에 고진() 등의 상주()로 인해 고환(, 줄타기)·자록(鹿)·기행()·별식()·제왕권의()·착아() 등의 산악 종목을 금했다는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송나라 태종()의 명에 의해 983년에 완간한 『태평어람()』 권 569 「악부」 7 「우창()」에 인용된 양()나라 원제()의 『찬요()』에도 줄타기가 한대의 가무 잡희 중 하나로 양나라에 전승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수서()』 「삼조사십구설()」 조에는 양나라 궁정의 악무와 백희가 나열되고 있는데 여기에도 줄타기()가 등장하고 있다. 

두우()의 『통전()』 146 「산악()」 조에도 양나라 궁정에서 행해졌던 구슬칼놀리기·물구나무서기·장대묘기·가상동물놀이·줄타기·환술 등의 종목이 진()나라로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어서 남조에서도 줄타기가 연행됐음을 알 수 있다.

줄타기는 한대와 위진 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 당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뛰어난 기예로 발전했다. 605년 황제에 등극한 수() 양제()는 대업() 2년(606)에 산악을 동도() 뤄양()으로 모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수나라의 위엄을 떨치려고 돌궐() 염간()이 내조()했을 때 대규모의 공연을 펼쳤다. 


이 장면은 『수서』 권15 「음악지()」에 상세한 기록으로 전한다. 

이 중 줄타기에 대해서는 제45에 "세운 기둥 양쪽에 줄을 맨다. 

두 여자가 올라가 마주 서서 춤을 추며, 마주치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가무는 그치지 않는다(     )"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대 줄타기의 연행 양상과 유사한 것이다.


당대() 봉연()의 『봉씨문견기()』 중 〈승기()〉에는 줄의 양쪽 끝에서 가볍게 올라서서 마치 신선 마냥 순간적으로 왕래했고, 줄광대 두 사람이 줄을 타다가 서로 비켜 지나며 나막신을 신고 몸을 젖히거나 굽히는 기예를 펼쳤는데, 이때 줄 위의 줄광대는 어깨 위에 3-4층의 무동을 올린 채 오가기도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언사()의 〈관승기()〉에도 『봉씨문견기』와 유사한, 무동을 올린 채 연기를 펼치는 줄타기( )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여성 연희자가 줄타기 묘기를 펼치는 긴장감 넘치는 동작과 모습을 찬탄하고 있다. 당대의 줄타기 연희자는 여성 예인이 많았다. 


여성 연희자들은 가볍고 얇은 비단옷을 입고 세련되게 화장을 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줄 위에서 사뿐사뿐 춤을 추기도 하고, "줄을 타며 옥돌을 놀리기도()" 하고 두 사람이 마주하여 춤을 추기도 하며 줄 위에서 목발을 하고 걷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호가은()이 〈승기부()〉에서 줄타기 예인의 공연 양상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구당서()』에 의하면 당() 현종() 2년(713) 호승() 파타()의 건의로 열린 연등회에서 현종은 상원에 왕족과 백관들을 데리고 근정루()로 행차하여 관등()하고, 밤이 깊어 태상악부에서 연행하는 산악()이 끝나면 궁녀들의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 행해진 "줄타기()와 솟대타기(竿)는 매우 기이하고 교묘했다"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를 통해 당대 궁중에서 행해진 줄타기의 수준이 매우 높은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 현종대에는 6척 높이의 나무다리()를 착용하고 줄을 타는 광대와 줄 위에서 3-4층의 첩치기(, 무동쌓기)를 펼친 광대들도 있었다는 기록이 『당어림()』에 전하고, 현종이 개최했던 대포(, 큰잔치나 연희)에서도 줄타기가 펼쳐졌다는 기록이 『명황잡록()』에 보인다.


송대 맹원로()가 1147년에 편찬한 『동경몽화록()』 권8, 〈유월육일최부군생일이십사일신보관신생일()〉에는 신보관에서 공연된 솟대타기(竿)·줄타기()·씨름(), 북과 딱따기연주()·딱따기를 치며 부르는 노래()·닭싸움()·골계적 설창()·잡반() 등의 전통연희가 아침부터 밤중까지 공연되었고, 그 다음 날 밤 불토해내기() 등으로 끝났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줄타기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연희 종목으로 송대에도 활발하게 연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대의 줄타기는 몇 가지 새로운 방식에 의해 연행되었다. 예를 들면 물짐을 지고 줄을 타는 삭상담수()나 목발을 착용하고 줄을 타는 답교상삭() 혹은 줄 위에서 뜀을 뛰는 도삭() 등이다.


원나라 세조()는 지원() 6년(1269)에 교방사()를 설립했고 주로 성절()이나 주요 명절 또는 외국 사신을 접대할 때 연희를 공연하게 했다. 

명나라 엽자기()의 『초목자()』에도 원나라 황제 앞에서 잡희(), 솟대타기, 줄타기 등의 종목이 공연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명나라 사조제()의 『오잡조()』를 통해 명대에는 이전 시대인 송원대에 비해 여성들의 줄타기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명대 민간에서 연행된 직업희반(, 전문적 연희집단)의 공연은 일반적으로 광장() 연극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된 관중은 농민과 중소도시의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열린 공간의 자유롭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연극을 관람했다.

장대()의 『도암몽억()』에 이러한 민간 직업희반의 공연상황이 등장하는데, 이 중 민간에서 자주 공연된 대표적인 연극인 목련희() 공연에서는 탁자 뒤집기 등의 잡기와 함께 줄타기가 연행되었다.

여온숙()은 무극장면()을 공연하려고 큰 무대를 설치하고, 휘주희반()과 정양희반()의 배우() 중 동작이 민첩하고 용맹하여 씨름이나 넘어지고 때리는 동작을 잘할 수 있는 삼사십 명을 골라 목련극()을 공연했는데, 삼일 동안 밤낮으로 했다. 

사방의 주위에는 부녀자들을 위한 관람석이 100여 좌석 있었고, 배우들은 무대에서 기예를 보여주었으며, 새끼줄타기·새끼줄춤추기·탁자뒤집기·사다리뒤집기······같은 잡기는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빼어났다.

『도암몽억』

명대의 전여성()은 『서호유람지여(西)』에서 청명절()에 항저우()의 서호(西)에 모여든 유랑잡기단의 공연를 기록했다. 

이를 통해 명대에는 다양한 유랑예인집단들이 명절을 맞이하여 줄타기를 포함한 여러 연희 종목을 연행하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명대 줄타기의 양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는 왕기()가 1607년에 간행한 『삼재도회』이다. 여기에는 한 여성이 외줄 위에서 긴 장대를 들어 균형을 잡는 가운데, 줄 아래에서는 악기를 치고 구경꾼들이 이를 지켜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청대 들어 줄타기에서는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밧줄이 아닌 철사줄이나 구리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중국의 전통적 줄타기가 서양 줄타기의 영향을 받아 금속줄을 타게 되었고, 그 위에서 온갖 재주를 보이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대 장조(, 1650-?)의 『우초신지()』 권2에는 여성 줄광대가 서양풍의 철사줄() 위에서 눈을 가리고 줄을 탔다는 기록이 전한다. 

청나라 궁중에서는 회족() 예인이 구리줄타기()를 벌이기도 했다. 구리줄타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황조문헌통고()』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구리줄(두께는 2촌, 길이는 1장 남짓)을 2장 5척 높이의 나무선반 위에 걸고, 거기로부터 마승()을 경사지게 단다. 

무늬 옷을 입은 곡예사는 양손에 나무 몽둥이를 가지고 맨발()로 묘기를 보여주고, 신발을 신고 구리대야나 입목(두께는 2촌, 높이는 5촌)을 타고 가는 묘기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옆에 세운 육 장 높이의 장대에 올라가서, 정상에서 가져온 활과 화살로 지상의 모구()를 맞춘다.

18세기 말 청대 궁정에서 회족의 줄타기인 회자정희()가 공연되었던 사실은 1791년 저술된 김정중()의 연행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청대 건륭 60년(1795) 이두()의 『양주화방록()』에도 긴 줄을 양끝에 묶고, 두 사람이 각각 양끝에서 출발해서 중간에서 만나 스쳐 지나가는 것을 줄타기라 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청대 줄타기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1884년 상하이에서 발간된 『점석재화보()』 「승기번신()」 편에 등장한다. 

여기에 나타나는 줄타기는 이전과 달리 네 명의 장정들이 줄을 입에 물고 있고 그 줄 위에서 줄타기를 연행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중국 줄타기는 자생적 연희 전통 아래 서역의 수준 높은 산악·백희의 전래에 영향을 받아 궁중과 민간에서 연행되기 시작했고, 그 후 육조와 수·당을 거쳐 송·명·청에 이르러 대중적 잡기로 활발하게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도 중국, 한국과 마찬가지로 산악·백희의 일종으로 줄타기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군사적 목적과 생활의 편의를 위해 소박한 형태의 자생적 줄타기가 존재했을 것이다. 

이 단순한 형태의 줄타기가 나라시대(, 718-798)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수준 높은 산악·백희 종목의 영향을 받아 변화·발전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산악을 사루가쿠()라는 명칭으로 불렀고, 사루가쿠를 연행하던 전문적 연희자들에 의해 여러 행사에서 줄타기가 연행되었다. 

나라시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산악·백희는 헤이안시대(, 794-1185)에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 줄타기는 전문적으로는 가루와자() 즉, 곡예의 일종으로 높은 곳에 달린 줄 위에서 여러 가지 묘기를 펼치는 것을 뜻한다. 

일본 줄타기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도상자료로는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산악·백희가 묘사된 두루마리 백희도()인 『신서고악도(西)』가 있다. 

『신서고악도』는 표지에 "당무회()"라고 적혀 있어, 여기에 그려진 산악과 무악이 중국 당나라로부터 전래된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 묘사된 여러 산악·백희 종목 가운데 줄타기를 묘사한 것은 나막신을 신은 세 여자가 줄타기를 하면서 방울을 놀리는 〈신왜등승농옥()〉이다. 

양쪽에 작수목을 세우고 그 위에 줄을 매고 그 줄 위를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은 세 명의 젊은 여자가 걸어가며 재주를 부리고 있다. 

두 연희자는 죽방울을 놀리면서 줄을 타고, 한 여자는 불을 붙인 향로를 들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으로부터 수준 높은 줄타기가 일본에 전래되었고, 이에 힘입어 일본 줄타기가 여러 종목이 연합하여 공연을 펼치는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산악·백희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일본 줄타기는 15세기 이후에는 구모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모마이는 나라시대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산악·백희 중에서 고환()·도로()·요요() 등의 모든 곡예와 묘기의 장점을 혼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줄타기이다.

구모마이는 무로마치시대(, 1336-1573)부터 에도시대(, 1603-1867) 중기에 이르기까지, 삼도(, 교토, 에도, 오사카)에서 번성했다. 구모마이라는 명칭은 『제국유리호색유래전()』에서 "거미줄을 치고 무사히 처마에서 처마를 타고 이동하는 것과 같이 곡예를 한다"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것이다. 16세기 말에는 구모마이가 각 지역의 절에서 헌금 모금을 위해 행해졌는데, 구모마이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인 남도흥복사()에 있는 『대반야경()』 오쿠가키() 권73 천문() 18년(1549) 음력 11월 22일 조를 통해 무로마치시대의 구모마이는 법사()의 전업이었음을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그저께부터 다섯 그루의 소나무에서 구모마이를 행했고, 다섯 그루의 소나무 위를 2, 3척 남기고, 곡예사로부터 줄을 당겨 거미집 등을 만들어 두고, 달리거나 걷지 않고 그대로 다리로 매달려서, 머리를 밑으로 거꾸로 하거나, 원래처럼 위로 올라가고 줄에 허리를 걸치거나, 또는 공중제비를 한다.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미친 사람이 육지에서 행하고, 원숭이의 묘기로 도약하는 등은, 좀처럼 드문 일이고, 또는 땅에 식사를 잔뜩 차려놓고, 그 사이를 두 칸 정도씩 띄어놓고, 식사의 위를 한 발 뛰기로, 한쪽 끝에서 도약하고, 혹은 위로 10 정도로 쌓아올려서, 그 위에서 춤추고, 몇 번이고 스쳐도, 식사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 


몸의 가벼움은 한이 없고, 힘은 3명 정도 있어 보인다. 소법사가 말하길, 구경거리로써 매일 5천에서 6천 명 정도 모여든다. 

그 법사의 춤,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닌 신기하고, 옛날에도 후에도 있을 리가 없다. 

그 후에 말하길, 높이 10척 정도 넓이 1정 정도로, 한 가닥의 줄을 당겨서 그 위를 한쪽 발 뛰기로 간다고 하고, 또 어느 때는 등려목() 두 자루를 위로 이어서, 그 정상에 배를 깔고, 부복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빙빙 몸을 돌리는 것이 풍차처럼 구경꾼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손에 땀을 쥐고 심장이 약한 자는 잘 보지 못했다.


무로마치시대의 구모마이는 법사의 전업이었지만, 에도시대에 들어와서 공연물로서 연행되기 시작했다. 

18세기 전반 에도 지신명사() 내에 우메가에()라는 여성 연희자가 나타났다. 

이는 지금까지 남성 중심의 줄타기 판에서 젊은 여성 연희자가 흥행에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이 시기 문헌인 『정보견문집()』에는 "이 시기 여성 연희자들은 막부()에서 금지한 금이 박힌 화려한 의상을 입는다는 소문이 높았기 때문에, 단속을 통해 여성 연희자들은 체포되고 가설극장은 사라졌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통해 당시 여성 줄타기 연희자의 연행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초에는 여성 줄타기 연희자의 등장과 함께 오사카에서 전해 내려오는 맹인()의 곡예가 주목을 끌었다. 

"오사카 번화가에서 아직 나이 어린 맹인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그 외에 공중제비, 줄타기 등의 묘기를 연행해서 구경꾼이 많이 모였다"라는 기록을 통해 그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곡예는 진기하다는 평판을 들으며 18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일본 줄타기에서 사용하는 줄의 수는 18세기 초반까지는 니혼쓰나(, 두 줄 밧줄) 또는 니혼나와(, 두 줄의 새끼줄)처럼 쌍줄이 일반적이었으나, 18세기 초반 이후에는 외줄을 이용해서 줄타기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쌍줄타기가 사라지게 된 것은 18세기 중엽 히토쓰쓰나 구메노스케()라는 연희자가 한 줄 밧줄 위에서 이아이누키(앉아 있다가 재빨리 칼을 뽑아 적을 베는 검술을 흉내 내는 곡예)를 연기한 이후부터라고 한다.


줄타기는 가부키()에서 관중의 인기와 흥미를 유발하는 기예로도 삽입되었다. 18세기 말에는 여성 연희자들에 의해 종이로 만든 줄을 이용하는 줄타기와, 상투를 틀 때 쓰는 가는 끈으로 줄타기를 하는 것 등이 나타났다고 한다.

1864년에는 서양 줄타기가 일본에 들어와서 요코하마에서 공연했고, 현재도 전통 공연 현장에서 일본 줄타기는 활발하게 연행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본 줄타기는 중국에서 전래한 산악·백희 계통의 수준 높은 줄타기의 영향을 받아, 대중의 기호에 맞춰 흥행과 발전을 거듭해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줄타기는 줄광대가 개방적인 연행구조 속에서 즉흥적인 변형과 생성을 통해 개성적인 창조가 가능한 전통연희 종목이다. 줄타기는 기예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연희의 대표적인 종목으로 놀이판을 통해 전승되고 연행된다.  

줄광대는 관중들과의 정서적 일체감을 추구하고자 관중의 반응과 분위기를 고려하며 연행구조 안에서 연행 상황에 따라 연희 내용을 첨삭해 나간다. 


이것은 줄타기가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현장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는 일회적 연희로서, 같은 연희자가 연행하는 때에도 현장에 따라 공연의 성과와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줄타기가 현장성에 기초한 여러 전통연희 종목들과 가장 큰 차별성을 보이는 부분은 다른 종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난도의 기예가 고공의 외줄 위에서 펼쳐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줄광대는 줄 아래에 어릿광대, 삼현육각 악사들을 대동하고 기예뿐만 아니라 가요와 재담을 함께 연행한다.


고도의 기예를 중심으로 음악, 재담을 함께 연행하는 줄타기의 공연원리로 첫째 고난도의 기예가 재담, 음악과 통합적으로 결합하는 연행 요소의 유기적 결합의 원리, 둘째 고도의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이를 해소하는 극적 긴장의 압박과 이완의 원리, 셋째 허공에 설치된 줄이라는 협소한 단선 무대를 폭넓은 극적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연행 공간의 입체적 확장의 원리 등이 있다.

우리나라 줄타기가 이렇듯 기예의 다양성과 유연함, 장면에 적절히 부합하는 가요와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재담이 있는 수준 높은 전통연희에 이르게 된 것은 한국의 자생적 연희 전통 위에, 세련된 산악·백희의 영향을 받아 수천 년간 지속적으로 변화·발전을 거듭했기 때문일 것이다.


줄타기는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연희들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현재화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고, 아울러 어느 시기에서나 외래 기원의 연희들을 우리의 취향에 맞게 개작해서 향유하는 한국화를 진행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생 연희의 현재화와 외래 연희의 한국화가 한데 어우러져, 동아시아적 보편성과 한국적 독자성을 갖춘 우수한 줄타기가 성립된 것이다.


한국 줄타기는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된 광대줄타기와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남사당놀이의 어름줄타기가 전승되고 있다. 

현실을 살펴보면 줄타기가 보존과 흥행 모두에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줄타기의 원형 보존과 함께 시대상에 걸맞은 내용과 형식을 재창조해나가야 한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한 예로 조선 후기의 유랑예인들을 중심으로 많은 전통연희 종목들이 나오는 영화 〈왕의 남자〉의 흥행과, 땅재주의 현대적 변용인 브레이크 댄스(Breakdance)를 추는 비보이(B-Boy)들의 공연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전통연희의 충실한 보존·전승과 전통연희를 활용한 새로운 공연예술의 창작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영화, 연극, 애니메이션, 서커스, 무용 등 여러 분야의 창작 자원으로도 크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내용과 형식으로 발전한 줄타기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관중들에게 극적 즐거움을 안겨주며, 삶에서 겪는 모순과 갈등을 위무하고 생활에 활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줄타기놀이의 구성원으로는 먼저 주인공으로 줄을 타면서 재담도 하고, 소리도 하고, 기예도 보이면서 연희하는 줄광대가 있다. 

줄광대는 줄소리와 아니리를 통해서 회갑연이나 잔치에서는 축원과 화목을 빌어주기도 하고, 마을의 대동굿판에서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해준다. 


국악의 전형적인 악기편성인 삼현육각은 반주와 연주를 동시에 하며, 어릿광대는 단순히 줄광대의 대화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땅 위의 주인 역할과 지휘자역할을 하면서 줄광대의 호흡을 조절해주고 관중을 줄판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또한 관중석에서 선물이나 돈이 나오면 감사의 뜻을 즉석에서 사설화해서 판을 주도해 나간다. 

그 외에도 뒷군이라 불리며 모든 자질구레한 뒷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줄타기의 장소는 특별히 정해져있지 않다. 양반집에서의 잔치는 울 안(집안의 안마당)에서 줄타기를 벌이게 되는데 이때의 관중은 줄이 설치되어 있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로 관람하게 되며, 난장에서는 둥근 원의 형태로 자리를 잡고 관람한다. 

관중이 한쪽 측면에 자리를 잡는 것보다는 줄판을 에워싸는 원의 형태를 이루어질 때 더욱 재미있게 줄타기를 감상할 수 있다.

줄판을 세우기 위해 먼저 길이 3.6m정도의 4개의 단단한 통나무를 각각 2개씩 가위 형태로 마주보게 해서 세운다. 이 나무를 작수목이라고 하는데 재질은 보통 소나무를 많이 쓰며, 줄광대가 작수목 위에 서 있을 때 왼쪽의 나무는 손잡이 역할을 하므로 10cm정도 길다. 


그 다음에 줄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1.2m가량의 말뚝을 땅속 1m 깊이로 사선으로 박는다. 말뚝의 재료는 소나무이며 끝부분을 뾰족하게 하고 윗부분은 쇠줄로 칭칭 감아주는데 그 이유는 말뚝을 박을 때 큰 망치를 사용하기 때문에 나무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먼저 말뚝을 박을 수 있게 구덩이를 두 자 깊이로 파고 큰 망치로 사선으로 두들겨 박는다. 

먼저 앞에 박는 말뚝을 ‘앞말뚝’이라 하고 다음에 박는 말뚝을 ‘뒷말뚝’ 또는 ‘보호말뚝’이라 하며, 뒷말뚝은 앞말뚝이 뽑히거나 부러졌을 때 힘을 지탱해주는 보호말뚝 역할을 하게 된다. 

줄의 재료는 삼이며 굵기는 9푼(약 3cm), 길이는 35m이다. 

처음 줄을 만들 때의 줄의 굵기는 15푼 정도로 굵지만 그 줄을 늘여서 줄타기에 적당한 9푼 정도 굵기의 줄로 만드는 것이다. 


줄을 꼴 때의 방향은 벽사, 즉 귀신을 물리치는 상징을 갖는 왼새끼 꼬기이다. 

줄의 탄력은 줄타기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처음에는 팽팽했던 줄이 줄광대가 줄을 타게 되면 조금씩 느슨해지는데, 이때 여러 명의 뒷군이 양쪽 작수목에 달라붙어 작수목을 조금씩 세우면 줄의 높이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줄의 탄력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이련 이유로 줄타기가 끝날 때의 줄의 높이는 처음상태보다 많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줄은 줄광대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생명줄이라고 까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만큼 정성을 들였고 심지어 줄이 완성되면 고사상을 차려 예를 갖추기도 했던 것이다.

우선 줄광대는 연행이 시작될 때, 줄타기에 대한 기본 정보를 관객들에게 전해주고, 줄고사를 통하여 그 날 줄타기가 잘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줄타기의 내력을 이야기한다. 

줄고사를 끝낸 줄광대는 배우씨 또는 매호씨라는 어릿광대와 재미있는 대화를 하면서, 줄타기 연행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려준다. 

줄광대와 어릿광대의 대화는 서로 반말을 주고받는데, 서로 핀잔이나 칭찬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대화는 만담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관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한다. 

줄판이 연행되는 각 지방과 초청된 자리의 특성에 따라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덕담을 하거나 지역적 특성에 관심을 보여 연행 분위기를 띄우기도 한다. 

줄광대는 연행을 진행하는 중에 실제 줄타기 연행과 인생을 재미있게 비교해서 줄타기의 어려움과 인생의 어려움을 대비시키기도 하고, 줄 위에서 연행될 기예를 재치있고 익살스럽게 소개하기도 한다.

줄판에서 불려지는 새타령은 일제강점기부터 유행했던 소리인데, 판소리나 민요판에서 불려지던 것으로 자진모리장단으로 되어있다. 

이를 줄광대가 줄판이 벌어지는 장소의 자연경치를 칭찬하면서 새타령을 부른다. 

줄광대는 새타령뿐만 아니라 중타령을 부르기도 하는데, 이 중타령의 내용은 김만중의 구운몽에 나오는 이야기와 우리나라 탈놀이에 등장하는 파계승 이야기와 비슷하게 되어있다. 

이때 중타령을 하면서 줄위에 앉아서 스님복장으로 옷을 입고, 연극적 행위를 하게 된다. 

중타령에는 아니리와 소리가 있는데, 소리 부분은 자진모리장단과 중모리장단 등으로 불려진다.

줄광대는 예전부터 다양한 예술적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줄타기 기예뿐만 아니라, 소리, 춤, 악기를 다재다능하게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줄 위에서 여러 기량을 선보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광대줄타기의 연극적이고 음악적인 면모로 인해 우리나라의 줄타기가 단순한 기예의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높은 예술성을 가진 장르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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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겹쌍홍잽이, 겹옆쌍홍잽이, 권원태, 김관보, 김대균, 김봉업, 김상봉, 김영철, 깃발붙이기, 두무릎가새트름, 두무릎꿇기, 두무릎종종걸음, 두무릎풍치기, 두무릎황새두렁넘기, 물구나무서기, 배돛대서기, 배우씨, 쌍줄타기, 쌍홍잽이, 쌍홍잽이거중틀기, 앞먼장뒷먼장, 앞쌍홍잽이뒷쌍홍잽이, 앵금뛰기, 양다리외홍잽이, 어름산이, 어릿광대, 옆쌍홍잽이, 왈짜놀이, 외무릎가새트름, 외무릎꿇기, 외무릎풍치기, 외무릎황새두렁넘기, 외무릎훑기, 외홍잽이, 이동안, 이봉운, 이정업, 임상문, 조송자, 종짓굽붙이기, 좌우옆쌍홍잽이, 줄고사, 줄광대, 중놀이, 책상다리, 책상다리가새트름, 책상다리풍치기, 책상다리황새두렁넘기, 최상천, 칠보가새트름, 칠보거중틀기, 칠보달어치기, 칠보먼장, 칠보보습빼기, 허공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