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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풍속 민속놀이등, 각종기타,

아름다운세상 / 한국 정월대보름 연날리기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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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GwFRtf-TTs

연날리기 . 鳶.



연날리기는 오랜 옛날부터 전승되어 오는 민족전래의 기예의 하나였다. 시기는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가 본격적이다. 사진은 설날에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는 모습.

  

유형

놀이

성격

민속놀이

문화재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시도무형문화재 제4호

문화재 지정일

1992년 09월 30일

놀이시기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보름까지




연을 공중에 띄우는 놀이.

연날리기는 오랜 옛날부터 전승되어 오는 민족전래의 기예()의 하나로서 소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성들의 흥미를 끌어 제2차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음력 정초가 되면 해마다 우리 나라 각처에서 성행하여 장관을 이루었던 민속놀이였다. 

연을 날리는 데는 연실을 한없이 풀어내어야 하므로 연날리기는 주위에 장애물이 없는 데서 행하여진다.

서울에서는 옛날 청계천변()이 중심지였고, 시골에서는 대개 신작로변이나 개울가 또는 동산 같은 데서 많이 날린다.

연을 날리는 시기는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보름까지가 본격적인데, 대체로 12월 20일경이면 벌써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연을 날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정월 보름 며칠 전이면 절정에 달하는데, 구경꾼들의 성원도 이때쯤에는 한층 더 열기를 띠게 된다.

아이들은 끊어진 연실을 걷느라고 서로 다투어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갈 때도 있고, 심지어 남의 집 지붕으로 올라가는 일도 있어 말썽을 빚기도 한다. 

끊어져 나가다가 가라앉는 연을 줍느라고 논바닥 속으로 뛰어가다가 빠져서 옷을 버리기도 한다.

연날리기는 젊은이와 어른들도 많이 한다. 

다른 연과 어울려서 끊어먹기를 많이 하므로 경기가 열기를 뿜는다. 

다른 연을 끊어먹도록 하는 것을 ‘깸치 먹인다’고 하는데 이 끊어먹기는 대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청장년은 청장년들끼리 많이 한다.

연은 날리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한 곳에 머무르는 일이 없이 가로 세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갔다 급전진하는 등 자유자재로 날린다. 

끊어먹기를 할 때에 연을 잘 끊어먹도록 하는 것은 연을 얼리는 이의 기술에 달리기도 한다.

연날리기는 정월 대보름 며칠 전에 성황을 이루고, 보름이 지나면 날리지 않기 때문에 대보름이 되면 ‘액()연 띄운다.’ 하여 연에다 ‘’자 하나를 쓰기도 하고, ‘(송액)’이니 ‘(송액영복)’이라 써서 날리고는 얼레에 감겨 있던 실을 죄다 풀고는 실을 끊어서 연을 멀리 날려 보낸다. 

보름이 지나서도 연을 날리는 이가 있으면 ‘고리백정’이라고 놀려대고 욕한다.

연날리기에 대한 세시풍속은 18세기 말엽 유득공()의 ≪경도잡지 ≫와 19세기 초 김매순()의 ≪열양세시기 ≫ 및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에 그 기록이 보인다.

≪경도잡지≫ 상원조()에 “아이들이 액자를 연에다 써서 해질 무렵에 줄을 끊어 날려 보낸다. 

그 날리는 법도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종횡으로 휩쓸어 남의 연과 마주쳐 남의 연줄을 많이 끊어 쾌락을 삼는다.

실을 겹치고 아교를 문질러 매끈하기가 흰말 꼬리 같다. 

심한 사람은 자석가루나 구리가루를 바르기도 한다. 

연줄을 잘 교차시키는 능력에 따라 승부가 결정된다. 

서울 장안 아이들 중에 연싸움 잘하기로 이름난 아이는 양반집이나 부잣집에 가끔 불려가기도 한다.

매년 정월보름 전 하루 이틀은 수표교() 연변 상하를 따라 연싸움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쌓듯이 모여 선다. 

여러 아이들은 기다렸다가 연줄을 끊는데, 혹은 패하는 연을 따라 담을 넘고 집을 뛰어넘기도 하므로 사람들은 대개 두려워하고 놀란다. 

보름이 지난 다음에는 다시 연을 날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연날리기는 세계 여러 민족들 사이에 다 있는 풍속이지만, 각기 그 모습이 약간씩 다르다. 

말레이시아나 태국 같은 나라에서는 해안지대에서 주로 많이 날리는데, 연을 잠시 날렸다가는 얼마 뜨지 못하고 곧 지상으로 내려오므로 이 지역에서의 연날리기란 그저 곧이어 내려오는 연을 자주 공중으로 날려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연실을 풀어서 높이 날리기는 하여도 우리 나라에서와 같이 서로 끊어먹기를 한다든가 자유자재로 기술을 부리면서 연을 날리는 일은 없어 보인다.

일본의 빈대머리 ‘다루마()’형 연이나 ‘후카(상어)연’·‘가메고바다연’·‘분부쿠연’ 같은 것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자유자재로 또는 끊어먹기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나 태국의 물고기·새모양의 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나라 연은 크고 작은 것들을 막론하고 그 전부가 짧은 장방형 사각()으로 되어 있으며, 바람을 잘 받아 잘 뜨게 되어 있을 뿐더러 연의 가운데에 둥글게 방구멍이 뚫어져 있어 강한 바람을 받아도 바람이 잘 빠지게 되어 있다. 

바람이 다소 세더라도 연 몸체가 상할 염려가 없다.

머릿달이 유선형으로 되어 있으므로 항상 바람을 많이 받고 있는 연 이마 쪽에 바람이 강하게 부딪히지 못하게 되어 있다. 

맨 아래에는 달을 대지 않아 아래 몸체가 가볍게 되어 있으며, 머릿달 양쪽 귀와 가운데 구멍에 열 십()자로 교차되는 데와 꽁숫달 좌우에 연실을 좌우에서 비스듬히 또는 아래에서 올라와 가운데 줄과 한데 모여 느리게 매어서 날리게 된다. 

저절로 연 자체가 또는 그 일부분이 연실 조종여하에 따라 자유자재로 기동성 있게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날리는 솜씨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좌우로 우회하거나 급강하·급상승, 후퇴·전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날리는 사람도 자기 연을 전혀 볼 수 없으리만큼 얼마든지 높이 날릴 수 있다. 

이것은 연날리는 사람의 솜씨도 솜씨려니와 우리 나라 연의 형태가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 소리개의 한자 연()에서 왔다. 

소리개가 공중에서 날개를 펴고 빙빙 도는 모습에서, 바람을 타는 연을 떠올린 것이다. 

이에 관한 용례이다.

팔워릔 연 노희 니 여러 가짓 연이 잇니라[팔월리각방학아() 유기등학아()], (『박통사언해』 상 ; 17)[1677년 간]
방학아() 연 리다[방봉쟁() 상동() 혹운풍쟁()](『역어유해』 하 ; 23)[1690년 간]

연의 옛말은 열이다.

녜 당()ㅅ 이 예 와 니다가 아 열이거늘 보고 쳐 닐오 이 곳새라 니라(『남명집언해』, 상 ; 38)[1482년 간]

우리는 흔히 지연()이라 불렀으며, 유만공(, 1793~1879)의 『세시풍요()』에는 풍금()으로 올랐다.

연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삼국사기』에 있다.

647년 진덕여왕이 즉위하자, 대신 비담()과 염종()이 정사를 잘 못한다며 내쫓으려 들었다. …(중략)… 비담의 군사는 명활성()에, 왕의 군대는 월성()에 있었다. 

10여 일이 지난 날() 밤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자, 

비담은 병사들에게 “별이 떨어지는 곳에 반드시 피가 흐른다고 한다. 

이는 틀림없이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고 떠들었다. 군사들의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임금은 두려워 떨었다. 

김유신이 “길흉은 오직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중략)… 걱정 마십시오.” 하며, 

인형에 불을 붙여 연에 띄우자 별이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튿날 유신의 군사들은 “어제 저녁에 떨어진 별이, 간밤에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적군은 혼란에 빠졌다(「열전」 김유신).

연을 군사 목적에 이용한 것이다. 『고려사』 기사이다.

궁노()가 아이들의 연()을 빼앗아 충선왕에게 바치자, “어디서 얻었느냐?” 묻고, 

“왜 남의 것을 내게 주는가?” 꾸짖으며 돌려주라 일렀다 (「세가」 권33 충선왕).

임금에게 바친 것을 보면 연이 매우 호사스러웠던 모양이다. 

그것은 어떻든 백성들도 연을 즐겨 날린 것을 알 수 있다.

이규보(, 1168~1241)도 ‘칠월 삼일에 바람을 읊는다(「칠월삼일영풍()」)’는 시를 남겼다(『동국이상국집』 「후집」 제1권).

유월 염천()에 연 보기 어렵더니
가을로 접어든지 사흘만에 한결 쌀쌀해졌네.
이웃 아이들 모여 부산하게 떠들며
좋아라 높은 하늘에 연() 날리네.

음력 7월부터 연을 날렸다는 것이다.

14세기에 최영이 제주도를 칠 때도 연을 썼다. 

섬 둘레의 가시나무 때문에 상륙이 어렵자, 연에 참억새를 잔뜩 잡아매고 이곳 저곳에 날려서 씨를 퍼뜨렸다. 

가을에 불을 붙여 가시나무를 태운 뒤 상륙하였다는 것이다. 

높이 솟은 성벽에 탱자나무가 꽉차서 병사가 못 오르는 것을 보고, 대서연에 병사를 실어 안으로 들여보냈다고도 한다. 

『동국세시기』의 “최영 장군이 탐라 정벌 때 연을 처음 만들었다.”는 기사는 이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중 왜적이 평양에 들어오자 계월향이 성안에서 연을 띄워, 김응서() 장군에게 적정()을 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네 연은 종류가 많고 날리는 재간도 뛰어났다. 

보통의 연은 약간 갸름한 네모꼴이지만 가오리연 · 방패연 · 허수아비연 등 여러 가지로 만들었다. 

크기도 곳에 따라 다르다. 

바람이 센 바닷가 연은 대문짝만큼 큰 반면, 내륙지방의 것은 한지 반장 정도이다. 

어린이연은 길이 35센티미터, 너비 25센티미터쯤이다.

네모연은 그림을 그린 것, 색종이를 오려붙인 것, 색칠을 한 것, 꼬리나 발을 단 것 등에 따라 꼭지연 · 반달연 · 치마연 · 동이연 · 박이연 등으로 불린다. 

가오리꼴의 가오리연은 낙지연 또는 가자미연이라고도 하며, 꼬리가 달린 데에서 꼬리연이라는 별명도 도 붙었다.

『동국세시기』의 연 설명이다.

연은 대나무 뼈대에 종이를 붙여 키처럼 만들고 오색칠을 한다. 

기반연() · 묵액연() · 쟁반연() · 방혁연() · 묘안연() · 작령연() · 어린연() · 용미연() 등 이름도 여럿이다. 

얼레에 연 줄을 잡아매어 공중에 띄워서 바람부는 대로 날리는 것은 풍쟁연()이다. 

중국 연은 모양이 기이하고 교묘하며, 겨울부터 늦봄까지 날리지만, 우리는 겨울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즐긴다. …(중략)…

연을 날릴 때 실을 겹쳐 꼬고 아교를 문질러 칠해서, 깨끗하기가 말꼬리 같다. 

혹 치자물을 노랗게 들이고, 그 끝에 연을 달아 종횡무진으로 세차게 날리기도 한다.

연줄은 흔히 세 곳에 매며(다섯 곳에도 맨다), 가볍고 질긴 명주실이 으뜸이다. 

실을 감는 얼레를 함경도 · 충청도에서는 연자새, 황해도 일부에서는 연패라 한다. 

형태는 둥근것 · 육모 · 팔모이며, 둥근얼레는 실이 많이 감기는 데다가, 풀거나 감기 쉽다. 

부레나 풀물에 사기가루나 유리가루를 섞어 실에 바르면, 서슬이 돋혀서 끊어먹기에 유리하다.

같은 책의 연 싸움 내용이다.

남의 연줄을 엇걸어 끊고 좋아한다. 

연싸움 때는 줄에 돌가루나 구리가루를 바르지만, 그보다 줄을 엇거는 방법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서울에서 연 싸움으로 이름을 떨친 아이는, 부자나 권세 있는 집에 이따금 불려가 시범을 보인다.

해마다 대보름 하루 이틀 전부터 수표교 근처 개천을 따라, 구경꾼이 담을 쌓은 듯 빽빽하게 모인다. 

아이들은 남의 연 줄을 끊으려고 서 있거나, 떨어져 나간 연만 보고 좇아가느라고, 방죽으로 달리다가 담이나 지붕을 뛰어넘기도 한다. …(중략)… 보름이 지나면 날리지 않는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은 이른바 액연()도 날렸다. 

불 붙인 새끼줄을 잡아매고 그 불로 실이 끊어져서 멀리 날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한 해 액운이 없어진다고 여겼다. 

16세기의 정철()은 「속전 지연가( )」 에 이렇게 읊조렸다.

내 집 모든 액을 너 홀로 가져다가
인가()에 전치 말고 야수()에 걸렸다가
비 오고 바람 불 때 자연소멸() 하거라.

『명종실록』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예부터 대보름에 연을 날렸지만, 연이 떨어진 집에 반드시 액운이 깃들인다고 한다. 

평소라면 이를 금할 까닭이 없으나, 오늘은 다르다. 

중궁이 외궁()에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여염에서 연을 멋대로 날려 궁궐에 많이 떨어졌으니, 오부 관령을 추고하여 치죄토록 하라(21년[1566] 1월 15일).

왕비에 대한 임금의 애틋한 정에 가슴이 뭉클하다. 

악운을 피하려고 연을 날린다지만, 그것이 떨어진 집에 악운이 든다면 이만저만 중대한 일이 아니다. 

명종도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 

이 풍속은 19세기에도 이어졌다. 

『동국세시기』의 “아이들이 연에 ‘집안 식구 아무개 무슨 생 몸의 액을 없앤다. ’는 글을 써서 띄우다가, 해질 무렵에 끊어 버린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열양세시기』에는 뒤웅박에 관한 기사도 보인다.

10월 초부터 사내 아이는 연을 날리고, 계집아이는 작은 뒤웅박() 세 개를 차고 다닌다. 

정월 대보름에 연은 하늘로 날리고, 뒤웅박은 길에 버린다. 

뒤웅박에 돈 한 푼씩 매달아두며 이로써 액을 막는다고 여긴다.

함경남도 북청에서는 연 줄에, 한지에 싼 쑥과 숯을 잡아매고 불을 붙여 띄웠다. 

전라남도에서는 노자()인 동전과 함께 고치나, 숯가루를 싸 맨 한지에 불을 붙여 날렸다. 

같은 도의 구례 · 승주에서는 대보름날 달집태우기 때 액막이연도 함께 태웠다. 

이 연은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으며, 대보름 뒤에 연을 날리면 ‘고리백정’ 소리를 들었다.

중국에서는 연을 풍쟁()이라 하지만, 옛 기록에는 지연()으로 적혔다. 

이는 매를 닮은 데에서 왔다.

연에 관한 전설은 적지 않다. 

다음은 단성식이 『유양잡조』에 인용한 『조야첨재』 내용이다.

춘추전국시대에 탑을 세우러 양주()에 갔던 공수반()은 나무 독수리()를 만들어 타고 집으로 왔다. 

얼마 뒤 그의 아내가 임신하자, 이상하게 여긴 부모가 물었다. 

그네는 이 내용을 설명하였다.

그의 장인이 틈을 보아 훔쳐 타고 오회()로 날아 갔다. 

그곳 사람들은 악령으로 알고 죽였다.

공수반은 나무 독수리를 또 하나 만들어 타고 가서 장인의 주검을 날라 왔다. …(중략)… 

육국() 때(서기전 444년쯤) 그가 역시 나무 독수리를 만들어 송()의 영역을 살폈다고 전한다(4권).

연을 군사적 목적에 이용한 것이다. 

『한비자()』에도 전국시대에 “묵자()가 나무 연()을 만들었다.”고 적혔다. 

유방의 협공을 받은 진의 장감()이 자신의 모자가 돌풍에 날아가는 것을 보고 소리 나는 대나무 연을 많이 만들어 띄우자, 겁을 먹고 달아났다고도 한다.

고승()은 『사물기원()』에 이와 달리 적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풍쟁()은 한()의 한신()이 만들었다. 

고조가 미앙궁()의 진희()를 칠 때, 한신은 땅굴로 성을 공격하는 종중기() 전술을 썼다. 

종이 연을 날려 미앙궁과의 거리를 잰 뒤, 땅굴을 파서 군사를 궁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독이지()』에는 양() 무제 때(549) 후경()이 대성()을 포위하자, 

간문()이 지연을 만들어 공중으로 날려서 구원군을 불렀다고 적혔다.

당대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전열()의 군사가 임명()을 치자, 장비는 급히 연을 날려 마수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연이 전열의 군영 위로 날 때, 활을 쏘았으나 미치지 못했다. 

마수의 진영에 떨어진 연에 “사흘 안에 도와주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고 씌어 있었다. 

이에 마수가 나서서 포위망을 뚫었다(『해여총고()』).

풍쟁 유래담이다.

오대(, 907~960) 때 후한의 이업()이 궁중에서 연()을 날렸다. 

뒤에 연 머리에 대피리를 달자, 바람이 피리 구멍을 지날 때 소리가 났다. 

풍쟁()이라는 이름은 그 소리가 아쟁을 닮은 데에서 왔다. 

본디 목적은 그 소리로 귀신을 쫓는 데에 있었다(『순추록()』).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말의 천주()지방 연 풍속에 대해 적었다.

이곳에서는 돛이 선원의 혼이고, 연은 돛의 분신이라고 여긴다. 

항해에 앞서 버드나무 가지로 큰 네모꼴 연을 만들어 여덟 줄의 바를 매고 바보나 술꾼을 매달아 날린다. 

연이 높이 올라가면 바다가 잔잔하리라 믿고 떠나지만, 뜨지 않으면 아무도 배에 타지 않는다. 

항해 도중에 재앙을 만난다는 것이다(『동방견문록』).

당의 이석()은 『속박물지()』에 “종이 연에 실을 매어 하늘 높이 날리면 아이들이 입을 벌리고 쳐다본다. 

이로써 내열()이 밖으로 나온다.”고 적었다. 

연의 질병 치료 구실을 말한 것이다.

“연날리기는 청명에 끝난다.”는 말처럼, 입춘에서 청명 사이의 약 두 달 동안 날린다. 

연의 신이 청명 뒤 하늘로 돌아가기 때문에 띄워도 높이 날지 않으며, 더 날리면 화를 입는다고 한다.

액막이연 이야기이다.

청명에 조상을 위한 제사를 마친 뒤, 연을 날리다가 줄을 끊어서 멀리 띄워 보냈다. 

이것이 지붕이나 집안에 떨어지면 나쁘다고 하여, 집 주인은 연 임자를 찾아 항의하였다. 

서북 산간지방에서는 수 십 명이 큰 연을 산 위에서 날렸다. 

이로써 마을의 모든 악운을 멀리 보낸다고 믿는 것이다.

복을 비는 기복연()도 있다.

박쥐와 복숭아를 그린 연을 날려서 복을 빌었다. 

박쥐 복()과 행복의 복()은 소리 값이 같고 박쥐는 풍요를, 복숭아는 장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희() · 용() · 봉() · 부채 · 팔괘() · 꽃바구니를 그리거나 쓴 연도 마찬가지이다.

연 끊어먹기도 벌였다. 

남송 주밀()의 『무림구사』나, 청대 『홍루몽』의 연싸움 내용이 그것이다.

북경에서는 20세기에도 연을 많이 날렸다. 

돈숭()의 『연경세시기』 내용이다.

아이들은 시월부터 연을 날린다. …(중략)… 

대오리를 얽어 만든 틀에 종이를 붙이고 선학() · 공작() · 기러기() · 범() 따위를 그린다. 

그림은 그야말로 교묘하다. 

아이들은 이를 공중에 날리며 즐거워한다. 

풍금() · 징 · 북() 따위를 달아맨 것은 아름다운 소리가 나서 듣기 좋다. 

풍쟁()이라는 이름은 이에서 나왔다(「시월」).

바다로부터 동풍이 강하게 불어오는 강남지방과 복건성 일대에서는 밤에 연 줄에 등을 달아 올려 날렸다.

일본 연()에 대해서는 소우가와 쓰네오()의 글을 뽑아 옮긴 것으로 대신한다.

연 이름에 백 가지가 넘는 사투리가 있다고 하나, 간토우() 사투리 타코(タコ)가 대표적이다. 

에도시대에는 어떠하였을까? 『제국방언물류칭호()』에 따르면 후쿠시마현() · 미야기현() · 이와테현() · 아오모리현()은 덴구바다(てんぐばた), 간토우 · 도카이도() · 코치현() · 가라쓰()는 타코(たこ), 군마현() · 신슈는 타카(たか), 기나이() · 후쿠이현() · 도야먀현() · 이시카와현() · 니이카타현은 이카(いか) 또는 이카고(いかご), 서국(西)은 타쓰(たつ) 또는 후우리우(ふうりう), 나가사키() · 이세()에서는 하타(はた)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이름은 에도시대 문헌에 처음 등장하며, 그 이전의 이름은 시로우시()였다. 

이것은 나라시대 고사서()인 『변색입성()』에 처음 나타난다. 

『왜명유취초』에는 “종이()로 만든 솔개꼴”이라 적혔다. 

일반에서 사로지()라 불렀으므로, 당시(8세기 초) 중국에서 들어온 한어 지로치()의 음독 그대로 쓴 것을 알 수 있다.

시로우시는 그 뒤 지로치(, 12세기 말의 『』, 12세기 후반의 『』) 또는 지등조(,『』)라 불렸지만, 이와 별개로 중국에서 들어온 지연(,『』에 처음 보인다. 

17~19세기에는 와 함께 이카와 타코를 한자의 음을 빌려 적었다.)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19세기까지의 연 이름은 오로지 한어의 음독뿐이었다. 

주의할 것은, 이들이 모두 새(), 그 중에서도 소리개( ·  · )에서 나온 점이다. 

이 전통은 우에노() · 신슈 사투리인 타카에 남아 오늘에 이른다. …(중략)… 

연 이름은 17~19세기에 더욱 다양해졌지만 8세기부터 이어온 계통과, 새와 연관된 호칭법이 있었던 것이다. 

주변 지역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본다.

17세기 초 이토 도우가이()의 『명물육첩()』에 따르면, 중국에서 풍연() · 풍쟁() · 호아() · 풍금() · 풍응() · 지치() · 지연() · 지요() · 요자() 등으로 불렸으며, 이외에 지로치()와 지아()(『』) 등도 썼다고 한다. 

호아의 뜻은 알 수 없으며, 풍쟁은 연에 공명구()를 단 데에서 왔다. 

이 외는 모두 새의 뜻을 지녔다. 

연과 치는 소리개, 요와 응은 매, 아는 갈가마귀, 금은 새의 뜻이다. 

기원전 1천년기() 후반의 『묵자』에 공륜자()가 죽목()으로 까치를 만들어 날렸다 하였고, 『한비자』에는 묵자가 나무연을 날렸다고 적혔다. 

새와 연관된 이름을 쓰는 전통은 중국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듯 하다. 

이 전통은 한자 사용권인 일본 · 조선 · 베트남에도 들어갔다.

뽀레 마스뻬로(Porée-Maspero, E.)여사는 동남아시아 대륙부의 만족 · 룽가오족 · 스디엔족 · 크메르족 · 챰족 · 라데족 등과 도서부의 말레족과 쟈우족이 솔개(또는 솔개와 닮은 새)를 이르는 칼란(kalan)계의 말로 부른다고 하였다. 

스마트라섬의 아체족이나 셀레베스섬의 마카사르족도 마찬가지이다.

오세아니아는 어떤가? …(중략)… 라스만섬에서는 카담(かつおどり), 뉴기니아섬 파푸아만안()의 엘레마족은 오리(새), 방쿠스제도에서는 레아(솔개), 레뻬루스섬에서는 마라(솔개),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마누(새) 또는 카라(매), 쿡크 제도 망가이아섬에서는 마누(새)라 이른다. 

폴리네시아말인 마누는 셀레베스섬 뽀소도라쟈족들도 쓴다(마누마누). 또 멜라네시아어를 쓰는 피지섬에서는 연을 날리지 않지만, 이를 마누마누라 부른다.

이처럼 연을 새와 연관시켜 부르는 지역은 (사정을 모르는 라오스 및 타이와 그 서쪽을 제외하고)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 대륙 동부를 거쳐 인도네시아 · 서부 미크로네시아 · 멜라네시아 · 서부 폴리네시아에까지 이른다. 

이 새가 특정한 종류에 포함되는지 어떤지 알수 없지만, 그 중에도 솔개를 포함하는 독수리과의 맹금류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중략)… 

이 분포권을 몇 개의 집단으로 더 나누고 그들 사이의 선후 관계를 따지면 연의 원향()을 알 수 있으나, 이는 앞으로의 일이다. 

뽀레 마스뻬로 여사는 한자 사용 집단보다 칼란계 어휘를 쓰는 사람들의 호칭이 더 오래 되었다고 한다.

남쪽 바다에서는 연으로 고기를 잡는다. 

어부가 배에서 여러 장의 잎으로 짜 맞춘 연을 날린다. 

연에 낚시줄을 매달지만, 그 끝은 바늘이 아니라 거미집이나 미끼를 붙인 고리로 되어 있다. …(중략)…

연은 종교에도 이용되었다. 

타이 아유타야조(14~18세기)는 연날리기를 12월(타이 달력으로는 첫 달)의 왕실 의례로 삼았다. 

이는 연이 불러오는 북동 계절풍이 우계()를 쫓고, 건계()를 불러서 논이 빨리 말라 풍년이 든다는 생각에서 왔다. 

우계와 건계의 정상적인 변화를 촉진시키려는 여러 의례가 발달된 동남아시아 가운데, 캄보디아에도 같은 풍속이 있다. 

이 보다 더 널리 퍼진 것이 연이 액을 쫓는다는 신앙이다. 

중국에는 전국에 분포하며, 특히 서북 산간 주거민들은 입춘 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마을마다 큰 연을 만들어 날리다가 줄을 끊는다.

연을 청명절에 날리는 대만의 한족()은 연에 병명() 따위를 적는다. 

이 연은 재액을 지닌 까닭에, 집 안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애쓴다. 

이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남중국에서는 연이 떨어지면 액을 쫓는 의례를 벌인다. 

캄보디아에서도 승려나 옛 일에 밝은 마을 사제에게 부탁해서 정화의례를 베푼다. 조선에서는 연을 정월에 남자 어린이들이 즐기며, 보름날 실을 끊어 날려보내거나 달집과 함께 태운다. 

연에 이름 · 생년월일 · 주문() 따위를 적으며, 이에 따라 한 해동안 무사하리라 믿는다. 

연이 떨어진 집은 그 해 액운이 낀다고 한다.

일본에는 닮은 민속이 없는 듯 하나, 예부터 액을 쫓는 날인 음력 3월 3일에 연을 날리는 데가 많다. 

대륙의 액연 날리기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984).

연에 관한 전설이다.

한 사나이()가 연을 타고 나고야()성 안으로 들어가 여러 개의 금비늘을 훔친 뒤 땅으로 내려왔다. 

아들과 함께 하치죠지마()에 유배된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연에 아들을 태워 본토로 돌려보냈다. 

연에 그의 모습을 그리는 풍속은 이에서 왔다. 

연으로 벽돌 상자를 날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연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빈송성기()』에 보인다. 

1572년 단오에 하타모토()와 이에야스()의 객신()이 성 앞에서 연()을 날렸다는 내용이다. 

40년 뒤인 1615년에는 나가사키의 어떤 이가 오징어 깃발()에 촛불을 매달아 밤중에 날렸다.

에도시대의 연 가게에서는 문어의 인형을 매단 긴 장대를 지붕 위로 세워서 간판으로 삼았다. 

밀감 상자에 붉은 종이로 꾸민 문어의 길이는 2~3미터에 이르렀다. 

연에 흔히 무장이나 영웅의 모습을 채색으로 그렸으며, 난() · 수() · 취() · 용() · 금() · 호() 따위의 글자도 썼다. 

열 장 한 묶음을 ‘한 다발’이라 일컬었으며, 석 장은 채색하고 나머지는 글자를 적었다.

18세기에는 길이 한 발에 금 150그램과 맞먹는 연이 나온 한편, 가로 33센티미터, 세로 48센티미터의 종이(西) 백 장짜리 연도 선보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연날리기가 성행하자, 1873년 도쿄에서는 교통 장해를 이유로 막았다.

연으로 복을 빌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적거나, 긴타로오() · 모모타로오() · 종규() · 반야() 등을 그려 날린 것이다. 

시즈오까현 하마마쓰()시에서는 장남이 태어나면 어머니 고향 친척들이 큰 ‘첫 연()’을 보내서, 첫 단오에 젊은이들에게 부탁하여 띄우도록 하였다. 

상점에서는 그 해 간지에 해당하는 동물을 그린 연을 입구에 걸어서 번영을 빌었고, 후쿠시마에서는 액년()을 맞은 남자는 1월 14일에 연을, 여자는 풍선을 친척들에게 돌려서 화를 막았다. 

잉어 연은 오늘날에도 띄운다.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잉어꼴 연을 집 앞의 대나무 장대에 매달아 띄우는 것이다. 잉어처럼 튼튼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서이다.

도쿄( )에는 해마다 2월 첫 소날() 연 시장이 열렸다. 

각지의 연을 길거리에서 팔았으며, 오지()의 연은 화재 예방에 효험이 높다고 일컬었다.



연 날리기의 중심지는 동 · 동남아시아이다. 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기 어렵지만 특정 인물의 창작이라기보다, 

인도네시아 부근에서 때로 바람에 날려 올라가는 카누의 돛이 연의 시초라는 영국 인류학자 해든(Haddon, A. C.)의 설명이 그럴 듯 하다. 

날려 놀라간 돛을 끌어 내릴 때의 바람의 저항이 주는 재미가 잊혀지지 않아 작은 돛을 만들어 날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은 말레이시아에서 인도로 들어갔으며, 유럽 전파는 2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15세기쯤 아라비아에서 처음 들어간 연은, 아시아의 보통 연과 로마군이 서기전 105년에 기인()으로 쓴 것을 합쳐 만들었다.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날렸고, 처음에는 작대기 끝에 직접 매달았다. 

두 번째는 16세기쯤 들어갔으며, 1558년에 나폴리에서 연 만드는 방법을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 나왔다. 

연을 평화의 상징으로 삼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마을에 연이 떠있으면 밖의 사람들이 안심하였다

연끊어먹기는 동남아시아 일대에 퍼져있으며, 인도나 파키스탄에는 직업적인 전문가도 있다. 

타이에서도 남풍이 불기 시작하는 2월에서 4월에 종이연을 날리며 연 싸움도 벌인다[한천항천(), 1998].

액연을 중국과 대만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대륙에서도 날린 것은 흥미롭다.



연을 최초로 날린 나라는 중국과 그리스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유안(BC179〜122)이 편찬한 [회남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노반()과 묵자()의 솜씨가 교묘하여 나무를 깎아서 매를 만드니 사흘을 날아다니며 내려앉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무로 날아다니는 새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사흘간 내려앉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과장이다.”

노반은 곧 공수반()으로, 묵자(B.C 480~390)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과학자다. [한비자()]에는 묵자가 직접 나무 연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대체로 중국 연의 기원은 약 2,400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나무로 새 모양의 연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 연의 기원은 그리스의 장군이자 기술자인 아르키타스(Archytas, B.C 430~365)가 나무로 새 모양을 깎아 공중에 띄우기를 시도한 것에서 비롯된다. 

공수반, 묵자, 아르키타스 모두 전쟁 관련 무기 개발자이기도 하다.

송나라 고승()이 펴낸 [사물기원()]에는 연에 관한 다음의 기록이 있다.

“한 고조()가 진희()를 공격할 때 한신(, ?〜BC 196)이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연을 만들어 띄워서 미앙궁()의 멀고 가까운 거리를 측정한 뒤 땅을 뚫고 궁중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혹은 양()나라 태청(양 무제의 연호, 547~549)시기에 후경()이란 자가 대성()을 공격해 포위하자, 양간()이 어린아이를 가르쳐 종이 연을 만들게 하여 연에 문서를 매달아 바람에 날려 연락을 취함으로써 구원병을 부를 수 있었다.”

이처럼 연은 처음부터 전쟁에 사용되기 위해서 발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유신 장군이 날린 연

우리나라의 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647년 선덕여왕 재위시기에 염종()과 비담()이 반란군을 일으켜 명활성에 주둔하고, 왕은 월성에 주둔하여 10여 일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한밤중에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 등이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고 했다.

별똥별이 떨어진 사건은 민심을 동요하게 하였고, 심지어 선덕여왕까지 불안에 떨게 했다. 

이때 김유신(595〜673)이 여왕을 뵙고, “길하고 흉한 것은 정한 것이 없으며, 오직 사람이 하기에 따르는 것입니다.”고 말하며 계책을 내었다. 

그는 곧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기고 풍연()에 실어 날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이 하였다. 

그리고는 소문을 퍼뜨리기를 어제 저녁에 떨어졌던 별이 간밤에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적군으로 하여금 의혹을 품게 만들었다. 

결국 연을 날려 군인들의 사기를 드높여서 비담의 반란군을 패배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연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사람을 태운다.

동국세시기()]에는 고려 말의 명장 최영(1316〜1388)이 탐라를 정벌할 때 연을 이용하여 사방이 절벽인 섬에 상륙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때 연날리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최영이 탐라(- 제주도)에서 목호(- 목축하는 몽골인)의 반란을 정벌한 것은 1374년 8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는 최영이 연 밑에 갈대씨를 담은 주머니를 달아 섬 주변 가시밭에 떨어뜨려 그 해 가을 섬 주위를 온통 마른 갈대로 뒤덮이게 한 후, 여기에 불을 질러 마침내 성을 점령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는 최영이 몸이 가벼운 소년들을 모아 연에 태워 성 안에 들어가 성을 쳐부수었다고도 하기도 한다.

연에 사람을 태운 기록은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보인다. 

신라보다 다소 늦게 연날리기 풍습이 행해진 일본 또한 연에 사람을 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은 17세기 이후 지역에 따라 연날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1993년 일본 사이타마현 쇼와마치 지역에서 열린 신춘 연날리기 대회에서는 가로 11m, 세로 15m, 무게 800㎏의 초대형 연을 수백 명이 끌어 올린 기록도 있다. 

이렇게 큰 연에는 사람이 탈 수가 있다.

마르코 폴로(1254〜1324)는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에서 배가 출항할 경우 항해가 잘 될지 안 될지를 점치기 위해, 큰 연에 술 취한 사람이나 바보를 묶어 끈을 잡아 날려 보내는 풍습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연이 하늘 높이 올라가면 배가 빠르고 순조로운 항해를 할 것이라고 믿었고, 연이 하늘 높이 올라가지 못하면 그 배에 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사람을 연에 태워 하늘에 올리려는 시도는 곧 하늘을 나는 도구의 발명을 촉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정평구라는 사람이 하늘을 나는 수레인 비거()를 만들어 일본군에게 포위당한 성안에 날아 들어가 사람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이규경(,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稿)]와 신경준(, 1712〜1781)의 [여암전서()]등에 전하고 있다. 

연이 없었다면 비거도 발명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과 새 신앙

연을 가리키는 말로 기록에 따라 방연(), 풍금() 등의 명칭이 등장하기도 한다. 풍금은 새처럼 바람을 타고 날 수 있는 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연이란 말 그대로 소리개(솔개)를 나타내는 한자어 ‘’을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이다. 

‘풍연()’ ‘요자()’ ‘요응()’이라 하여 연을 각각 솔개, 갈매기, 매로써 부르고 있는 것에서도 새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새는 단순히 동물의 차원을 넘어선,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새는 하늘에 계신 신의 말씀을 전달하거나, 신의 자식을 지상에 내려놓는 매개체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늘을 나는 새는 인간이 갖지 못한 능력을 가졌고,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연을 만들어 날리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로 즐긴 연날리기


중국에서 발명된 연을 신라에서 647년 경 날렸다면, 그보다 앞서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연을 날렸다고 추정할 수 있다. 

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장천1호 벽화고분의 앞방 서벽에는 씨름, 사냥, 술래잡기, 춤과 노래, 수레바퀴 던지는 재주 부리기 등 고구려 시대에 행해지던 다양한 놀이가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새 모양의 연을 날리는 사람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다. 초기의 연은 새의 모습이었다.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손목을 위로 올리고 고개를 젖혀 새를 바라보고 있다. 

비록 연줄은 분명하지 않으나, 연날리기 모습임이 분명하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즐긴 연날리기는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이규보(, 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칠월삼일에 바람을 읊다.’ 라는 시에서 “유월의 뜨거운 날에는 연을 보기 어렵더니, 가을에 접어든 지 사흘 만에 한결 쌀쌀해졌네. 

이웃 아이들 모여서 부산하게 떠들며, 좋아하며 높은 하늘에 지연()을 날리네.”라고 고려시대 연날리기 모습을 묘사했다.

[고려사] ‘충선왕’ 편 기록에는, 어느 날 궁노()가 동네 아이들의 지연()을 빼앗아 충선왕(1308〜1313)에게 바치자 왕이 이들 다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아이들이 연을 날리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연날리기는 임금도 즐기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가을철에도 날리던 연이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린아이들이 상원(정월 대보름)에 연놀이를 한다.’고 하였으니 연을 날리는 시기가 조선시대에 와서 변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액막이연

우리나라의 대표적 연은 방패연과 가오리연이다. 

방패는 사각형으로, 이는 땅을 상징한다. 

방패는 액을 물리는 도구()이자 상징물이다. 

방패연을 띄우는 것은 땅의 기운을 하늘에 실려 보내는 것을 뜻하며 나쁜 것을 쫓는()의 의미가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음력 12월에 들어서면 농한기에 사람들이 여유가 생기면서 연을 띄우기 시작해 정월 대보름 수일 전에 절정을 이룬다.  

정월 대보름날 밤이 되면 달맞이를 하고 난 후에 각자 띄우던 연을 가지고 나와 ‘액막이연’에다 ‘액()’자 한 자를 쓰거나 ‘송액()’ 혹은 ‘송액영복()’이라는 액을 막는 글을 쓴다. 

이렇듯 방패, 새 형상의 연을 날림으로써 땅의 기운을 담아 하늘에 올려 보내는 풍습은 우리 민중의 생산과 풍요에 대한 소망을 담아낸 것이다. 

이처럼 연날리기는 민속 신앙적 의미도 갖고 있다.

연의 추락을 기피하다

1566년 1월 15일 [명종실록]에 따르면 여염집 사람들이 멋대로 연을 날려 궁중에 많이 추락하게 된 것에 대해서 오부 관령을 추고(- 죄과를 추문하여 고찰함)하여 치죄(- 가려내어 벌줌)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당시 풍속으로는 연이 추락한 집에는 그 해에 재앙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명에 대해서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정월대보름에 연을 날리는 것은 오랜 풍속인데, 임금이 이를 의심하고 민간에 떠도는 말로 아동들의 놀이를 금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평을 하기도 했다.

1782년 1월 8일자 [일성록()]에는 파수군() 전우룡()이란 자가 몰래 종묘의 무너진 곳에 들어와 손에 종이 연을 가지고 도로 나가다가 잡힌 사건을 적고 있다. 

사람들은 연이 민가에 추락하는 것을 피했다. 권필(, 1569〜1612)이 쓴 [석주집()]에 등장하는 다음과 시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우리 집의 모든 액운일랑 네가 가져가서, 인가에 떨어지지 말고 들판 나무에 걸려라. 
그러면 봄 하늘에 비바람이 칠 때에, 자연히 액운 소멸해 찾을 곳도 없어지리.”

연싸움

우리나라의 연날리기는 높이 날리기와 연줄 끊기 두 종류로 행해진다.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은 중국의 연날리기 풍습에는 멀리 날리는 풍습만 있고, 연줄이 맞부딪치거나 잘라 먹는 법을 모른다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연줄 끊기는 한국과 일본 정도에서만 보이는 풍습이다. 

연싸움은 쌀밥이나 민어부레로 만든 풀에 유리가루나 사기가루를 섞어서 연줄에 발라 상대방의 연줄을 끊는 것이다.

장유(, 1587〜1638)는 [계곡집(谿)]에 실린 ‘지연()’이라는 한시에서 “연싸움의 열기가 더운 지방의 열대병에 걸린 것보다 치열하여 하늘을 날던 연이 허공 속으로 뚝뚝 떨어져 나가네.” 라고 연싸움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유득공(, 1749〜1807)의 [경도잡지()]에는 연싸움을 잘해 이름난 아이는 양반집이나 부잣집에 불려가기도 하였고,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에는 수표교() 주변에서 연싸움을 구경하는 이들이 담을 쌓듯이 모여 선다고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연싸움이 대단한 볼거리로 성행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연의 장점


전 세계에는 수많은 연들이 있다. 

우리나라 연은 그 종류만 100여종이 넘고, 창작 연은 그 종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 연의 대표는 직사각형 중앙에 방구멍이 있는 방패연이라 할 수 있다. 

방패연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독특한 것으로서 연의 가운데에 방구멍을 내어 맞바람의 저항을 줄이고 뒷면의 진공상태를 즉시 메워주기 때문에 연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한 바람을 받아도 잘 빠지게 되어 있어 웬만큼 강한 바람에는 연이 잘 상하지 않는다. 

날리는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 상승과 하강, 좌우로 빙빙 돌기, 급상승과 급강하, 전진과 후퇴가 가능하다. 

얼마든지 높이 날릴 수도 있고 빠르게 날릴 수도 있어 연싸움도 가능했던 것이다.

       

은 소리개의 한자 연()에서 왔다. 소리개가 공중에서 날개를 펴고 빙빙 도는 모습에서, 바람을 타는 연을 떠올린 것이다. 이에 관한 용례이다.

팔워릔 연 노희 니 여러 가짓 연이 잇니라[팔월리각방학아() 유기등학아()], (『박통사언해』 상 ; 17)[1677년 간]
방학아() 연 리다[방봉쟁() 상동() 혹운풍쟁()](『역어유해』 하 ; 23)[1690년 간]

연의 옛말은 열이다.

녜 당()ㅅ 이 예 와 니다가 아 열이거늘 보고 쳐 닐오 이 곳새라 니라(『남명집언해』, 상 ; 38)[1482년 간]

우리는 흔히 지연()이라 불렀으며, 유만공(, 1793~1879)의 『세시풍요()』에는 풍금()으로 올랐다.

연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삼국사기』에 있다.

647년 진덕여왕이 즉위하자, 대신 비담()과 염종()이 정사를 잘 못한다며 내쫓으려 들었다. …(중략)… 비담의 군사는 명활성()에, 왕의 군대는 월성()에 있었다. 10여 일이 지난 날() 밤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자, 비담은 병사들에게 “별이 떨어지는 곳에 반드시 피가 흐른다고 한다. 

이는 틀림없이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고 떠들었다. 

군사들의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임금은 두려워 떨었다. 

김유신이 “길흉은 오직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중략)… 걱정 마십시오.” 하며, 인형에 불을 붙여 연에 띄우자 별이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튿날 유신의 군사들은 “어제 저녁에 떨어진 별이, 간밤에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적군은 혼란에 빠졌다(「열전」 김유신).

연을 군사 목적에 이용한 것이다. 『고려사』 기사이다.

궁노()가 아이들의 연()을 빼앗아 충선왕에게 바치자, “어디서 얻었느냐?” 묻고, “왜 남의 것을 내게 주는가?” 꾸짖으며 돌려주라 일렀다 (「세가」 권33 충선왕).

임금에게 바친 것을 보면 연이 매우 호사스러웠던 모양이다. 그것은 어떻든 백성들도 연을 즐겨 날린 것을 알 수 있다.

이규보(, 1168~1241)도 ‘칠월 삼일에 바람을 읊는다(「칠월삼일영풍()」)’는 시를 남겼다(『동국이상국집』 「후집」 제1권).

유월 염천()에 연 보기 어렵더니
가을로 접어든지 사흘만에 한결 쌀쌀해졌네.
이웃 아이들 모여 부산하게 떠들며
좋아라 높은 하늘에 연() 날리네.

음력 7월부터 연을 날렸다는 것이다.

14세기에 최영이 제주도를 칠 때도 연을 썼다. 섬 둘레의 가시나무 때문에 상륙이 어렵자, 연에 참억새를 잔뜩 잡아매고 이곳 저곳에 날려서 씨를 퍼뜨렸다. 

가을에 불을 붙여 가시나무를 태운 뒤 상륙하였다는 것이다.  

높이 솟은 성벽에 탱자나무가 꽉차서 병사가 못 오르는 것을 보고, 대서연에 병사를 실어 안으로 들여보냈다고도 한다. 

『동국세시기』의 “최영 장군이 탐라 정벌 때 연을 처음 만들었다.”는 기사는 이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중 왜적이 평양에 들어오자 계월향이 성안에서 연을 띄워, 김응서() 장군에게 적정()을 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네 연은 종류가 많고 날리는 재간도 뛰어났다. 보통의 연은 약간 갸름한 네모꼴이지만 가오리연 · 방패연 · 허수아비연 등 여러 가지로 만들었다. 

크기도 곳에 따라 다르다. 

바람이 센 바닷가 연은 대문짝만큼 큰 반면, 내륙지방의 것은 한지 반장 정도이다. 

어린이연은 길이 35센티미터, 너비 25센티미터쯤이다.

네모연은 그림을 그린 것, 색종이를 오려붙인 것, 색칠을 한 것, 꼬리나 발을 단 것 등에 따라 꼭지연 · 반달연 · 치마연 · 동이연 · 박이연 등으로 불린다. 

가오리꼴의 가오리연은 낙지연 또는 가자미연이라고도 하며, 꼬리가 달린 데에서 꼬리연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동국세시기』의 연 설명이다.

연은 대나무 뼈대에 종이를 붙여 키처럼 만들고 오색칠을 한다. 

기반연() · 묵액연() · 쟁반연() · 방혁연() · 묘안연() · 작령연() · 어린연() · 용미연() 등 이름도 여럿이다. 

얼레에 연 줄을 잡아매어 공중에 띄워서 바람부는 대로 날리는 것은 풍쟁연()이다. 

중국 연은 모양이 기이하고 교묘하며, 겨울부터 늦봄까지 날리지만, 우리는 겨울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즐긴다. …(중략)…

연을 날릴 때 실을 겹쳐 꼬고 아교를 문질러 칠해서, 깨끗하기가 말꼬리 같다. 혹 치자물을 노랗게 들이고, 그 끝에 연을 달아 종횡무진으로 세차게 날리기도 한다.

연줄은 흔히 세 곳에 매며(다섯 곳에도 맨다), 가볍고 질긴 명주실이 으뜸이다. 

실을 감는 얼레를 함경도 · 충청도에서는 연자새, 황해도 일부에서는 연패라 한다. 

형태는 둥근것 · 육모 · 팔모이며, 둥근얼레는 실이 많이 감기는 데다가, 풀거나 감기 쉽다. 

부레나 풀물에 사기가루나 유리가루를 섞어 실에 바르면, 서슬이 돋혀서 끊어먹기에 유리하다.


같은 책의 연 싸움 내용이다.

남의 연줄을 엇걸어 끊고 좋아한다. 

연싸움 때는 줄에 돌가루나 구리가루를 바르지만, 그보다 줄을 엇거는 방법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서울에서 연 싸움으로 이름을 떨친 아이는, 부자나 권세 있는 집에 이따금 불려가 시범을 보인다.

해마다 대보름 하루 이틀 전부터 수표교 근처 개천을 따라, 구경꾼이 담을 쌓은 듯 빽빽하게 모인다. 

아이들은 남의 연 줄을 끊으려고 서 있거나, 떨어져 나간 연만 보고 좇아가느라고, 방죽으로 달리다가 담이나 지붕을 뛰어넘기도 한다. …(중략)… 보름이 지나면 날리지 않는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은 이른바 액연()도 날렸다. 

불 붙인 새끼줄을 잡아매고 그 불로 실이 끊어져서 멀리 날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한 해 액운이 없어진다고 여겼다. 

16세기의 정철()은 「속전 지연가( )」 에 이렇게 읊조렸다.

내 집 모든 액을 너 홀로 가져다가
인가()에 전치 말고 야수()에 걸렸다가
비 오고 바람 불 때 자연소멸() 하거라.

『명종실록』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예부터 대보름에 연을 날렸지만, 연이 떨어진 집에 반드시 액운이 깃들인다고 한다. 평소라면 이를 금할 까닭이 없으나, 오늘은 다르다. 

중궁이 외궁()에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여염에서 연을 멋대로 날려 궁궐에 많이 떨어졌으니, 오부 관령을 추고하여 치죄토록 하라(21년[1566] 1월 15일).

왕비에 대한 임금의 애틋한 정에 가슴이 뭉클하다. 악운을 피하려고 연을 날린다지만, 그것이 떨어진 집에 악운이 든다면 이만저만 중대한 일이 아니다. 

명종도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 

이 풍속은 19세기에도 이어졌다. 

『동국세시기』의 “아이들이 연에 ‘집안 식구 아무개 무슨 생 몸의 액을 없앤다. ’는 글을 써서 띄우다가, 해질 무렵에 끊어 버린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열양세시기』에는 뒤웅박에 관한 기사도 보인다.

10월 초부터 사내 아이는 연을 날리고, 계집아이는 작은 뒤웅박() 세 개를 차고 다닌다. 

정월 대보름에 연은 하늘로 날리고, 뒤웅박은 길에 버린다. 

뒤웅박에 돈 한 푼씩 매달아두며 이로써 액을 막는다고 여긴다.

함경남도 북청에서는 연 줄에, 한지에 싼 쑥과 숯을 잡아매고 불을 붙여 띄웠다. 

전라남도에서는 노자()인 동전과 함께 고치나, 숯가루를 싸 맨 한지에 불을 붙여 날렸다. 

같은 도의 구례 · 승주에서는 대보름날 달집태우기 때 액막이연도 함께 태웠다. 

이 연은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으며, 대보름 뒤에 연을 날리면 ‘고리백정’ 소리를 들었다.

중국에서는 연을 풍쟁()이라 하지만, 옛 기록에는 지연()으로 적혔다. 

이는 매를 닮은 데에서 왔다.

연에 관한 전설은 적지 않다. 

다음은 단성식이 『유양잡조』에 인용한 『조야첨재』 내용이다.

춘추전국시대에 탑을 세우러 양주()에 갔던 공수반()은 나무 독수리()를 만들어 타고 집으로 왔다. 

얼마 뒤 그의 아내가 임신하자, 이상하게 여긴 부모가 물었다. 

그네는 이 내용을 설명하였다.

그의 장인이 틈을 보아 훔쳐 타고 오회()로 날아 갔다. 

그곳 사람들은 악령으로 알고 죽였다.

공수반은 나무 독수리를 또 하나 만들어 타고 가서 장인의 주검을 날라 왔다. …(중략)… 육국() 때(서기전 444년쯤) 그가 역시 나무 독수리를 만들어 송()의 영역을 살폈다고 전한다(4권).

연을 군사적 목적에 이용한 것이다. 

『한비자()』에도 전국시대에 “묵자()가 나무 연()을 만들었다.”고 적혔다. 

유방의 협공을 받은 진의 장감()이 자신의 모자가 돌풍에 날아가는 것을 보고 소리 나는 대나무 연을 많이 만들어 띄우자, 겁을 먹고 달아났다고도 한다.

그러나 고승()은 『사물기원()』에 이와 달리 적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풍쟁()은 한()의 한신()이 만들었다. 고조가 미앙궁()의 진희()를 칠 때, 한신은 땅굴로 성을 공격하는 종중기() 전술을 썼다. 

종이 연을 날려 미앙궁과의 거리를 잰 뒤, 땅굴을 파서 군사를 궁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독이지()』에는 양() 무제 때(549) 후경()이 대성()을 포위하자, 간문()이 지연을 만들어 공중으로 날려서 구원군을 불렀다고 적혔다.

당대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전열()의 군사가 임명()을 치자, 장비는 급히 연을 날려 마수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연이 전열의 군영 위로 날 때, 활을 쏘았으나 미치지 못했다. 

마수의 진영에 떨어진 연에 “사흘 안에 도와주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고 씌어 있었다. 

이에 마수가 나서서 포위망을 뚫었다(『해여총고()』).

풍쟁 유래담이다.

오대(, 907~960) 때 후한의 이업()이 궁중에서 연()을 날렸다. 

뒤에 연 머리에 대피리를 달자, 바람이 피리 구멍을 지날 때 소리가 났다. 

풍쟁()이라는 이름은 그 소리가 아쟁을 닮은 데에서 왔다. 

본디 목적은 그 소리로 귀신을 쫓는 데에 있었다(『순추록()』).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말의 천주()지방 연 풍속에 대해 적었다.

이곳에서는 돛이 선원의 혼이고, 연은 돛의 분신이라고 여긴다. 

항해에 앞서 버드나무 가지로 큰 네모꼴 연을 만들어 여덟 줄의 바를 매고 바보나 술꾼을 매달아 날린다. 

연이 높이 올라가면 바다가 잔잔하리라 믿고 떠나지만, 뜨지 않으면 아무도 배에 타지 않는다. 


항해 도중에 재앙을 만난다는 것이다(『동방견문록』).

당의 이석()은 『속박물지()』에 “종이 연에 실을 매어 하늘 높이 날리면 아이들이 입을 벌리고 쳐다본다. 

이로써 내열()이 밖으로 나온다.”고 적었다. 

연의 질병 치료 구실을 말한 것이다.

“연날리기는 청명에 끝난다.”는 말처럼, 입춘에서 청명 사이의 약 두 달 동안 날린다. 연의 신이 청명 뒤 하늘로 돌아가기 때문에 띄워도 높이 날지 않으며, 더 날리면 화를 입는다고 한다.

액막이연 이야기이다.

청명에 조상을 위한 제사를 마친 뒤, 연을 날리다가 줄을 끊어서 멀리 띄워 보냈다. 

이것이 지붕이나 집안에 떨어지면 나쁘다고 하여, 집 주인은 연 임자를 찾아 항의하였다. 

서북 산간지방에서는 수 십 명이 큰 연을 산 위에서 날렸다. 

이로써 마을의 모든 악운을 멀리 보낸다고 믿는 것이다.

복을 비는 기복연()도 있다.

박쥐와 복숭아를 그린 연을 날려서 복을 빌었다. 

박쥐 복()과 행복의 복()은 소리 값이 같고 박쥐는 풍요를, 복숭아는 장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희() · 용() · 봉() · 부채 · 팔괘() · 꽃바구니를 그리거나 쓴 연도 마찬가지이다.

연 끊어먹기도 벌였다. 남송 주밀()의 『무림구사』나, 청대 『홍루몽』의 연싸움 내용이 그것이다.

북경에서는 20세기에도 연을 많이 날렸다. 돈숭()의 『연경세시기』 내용이다.

아이들은 시월부터 연을 날린다. …(중략)… 대오리를 얽어 만든 틀에 종이를 붙이고 선학() · 공작() · 기러기() · 범() 따위를 그린다. 

그림은 그야말로 교묘하다. 

아이들은 이를 공중에 날리며 즐거워한다. 풍금() · 징 · 북() 따위를 달아맨 것은 아름다운 소리가 나서 듣기 좋다. 

풍쟁()이라는 이름은 이에서 나왔다(「시월」).

바다로부터 동풍이 강하게 불어오는 강남지방과 복건성 일대에서는 밤에 연 줄에 등을 달아 올려 날렸다.

일본 연()에 대해서는 소우가와 쓰네오()의 글을 뽑아 옮긴 것으로 대신한다.

연 이름에 백 가지가 넘는 사투리가 있다고 하나, 간토우() 사투리 타코(タコ)가 대표적이다. 

에도시대에는 어떠하였을까? 『제국방언물류칭호()』에 따르면 후쿠시마현() · 미야기현() · 이와테현() · 아오모리현()은 덴구바다(てんぐばた), 간토우 · 도카이도() · 코치현() · 가라쓰()는 타코(たこ), 군마현() · 신슈는 타카(たか), 기나이() · 후쿠이현() · 도야먀현() · 이시카와현() · 니이카타현은 이카(いか) 또는 이카고(いかご), 서국(西)은 타쓰(たつ) 또는 후우리우(ふうりう), 나가사키() · 이세()에서는 하타(はた)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이름은 에도시대 문헌에 처음 등장하며, 그 이전의 이름은 시로우시()였다. 

나라시대 고사서()인 『변색입성()』에 처음 나타난다. 

『왜명유취초』에는 “종이()로 만든 솔개꼴”이라 적혔다. 

일반에서 사로지()라 불렀으므로, 당시(8세기 초) 중국에서 들어온 한어 지로치()의 음독 그대로 쓴 것을 알 수 있다.

시로우시는 그 뒤 지로치(, 12세기 말의 『』, 12세기 후반의 『』) 또는 지등조(,『』)라 불렸지만, 이와 별개로 중국에서 들어온 지연(,『』에 처음 보인다. 

17~19세기에는 와 함께 이카와 타코를 한자의 음을 빌려 적었다.)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19세기까지의 연 이름은 오로지 한어의 음독뿐이었다. 

주의할 것은, 이들이 모두 새(), 그 중에서도 소리개( ·  · )에서 나온 점이다. 

이 전통은 우에노() · 신슈 사투리인 타카에 남아 오늘에 이른다. …(중략)… 연 이름은 17~19세기에 더욱 다양해졌지만 8세기부터 이어온 계통과, 새와 연관된 호칭법이 있었던 것이다. 

주변 지역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본다.

17세기 초 이토 도우가이()의 『명물육첩()』에 따르면, 중국에서 풍연() · 풍쟁() · 호아() · 풍금() · 풍응() · 지치() · 지연() · 지요() · 요자() 등으로 불렸으며, 이외에 지로치()와 지아()(『』) 등도 썼다고 한다. 

호아의 뜻은 알 수 없으며, 풍쟁은 연에 공명구()를 단 데에서 왔다. 이 외는 모두 새의 뜻을 지녔다. 

연과 치는 소리개, 요와 응은 매, 아는 갈가마귀, 금은 새의 뜻이다. 

기원전 1천년기() 후반의 『묵자』에 공륜자()가 죽목()으로 까치를 만들어 날렸다 하였고, 『한비자』에는 묵자가 나무연을 날렸다고 적혔다. 

새와 연관된 이름을 쓰는 전통은 중국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듯 하다. 

이 전통은 한자 사용권인 일본 · 조선 · 베트남에도 들어갔다.

뽀레 마스뻬로(Porée-Maspero, E.)여사는 동남아시아 대륙부의 만족 · 룽가오족 · 스디엔족 · 크메르족 · 챰족 · 라데족 등과 도서부의 말레족과 쟈우족이 솔개(또는 솔개와 닮은 새)를 이르는 칼란(kalan)계의 말로 부른다고 하였다. 

스마트라섬의 아체족이나 셀레베스섬의 마카사르족도 마찬가지이다.

오세아니아는 어떤가? …(중략)… 라스만섬에서는 카담(かつおどり), 뉴기니아섬 파푸아만안()의 엘레마족은 오리(새), 방쿠스제도에서는 레아(솔개), 레뻬루스섬에서는 마라(솔개),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마누(새) 또는 카라(매), 쿡크 제도 망가이아섬에서는 마누(새)라 이른다. 

폴리네시아말인 마누는 셀레베스섬 뽀소도라쟈족들도 쓴다(마누마누). 또 멜라네시아어를 쓰는 피지섬에서는 연을 날리지 않지만, 이를 마누마누라 부른다.

이처럼 연을 새와 연관시켜 부르는 지역은 (사정을 모르는 라오스 및 타이와 그 서쪽을 제외하고)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 대륙 동부를 거쳐 인도네시아 · 서부 미크로네시아 · 멜라네시아 · 서부 폴리네시아에까지 이른다. 

이 새가 특정한 종류에 포함되는지 어떤지 알수 없지만, 그 중에도 솔개를 포함하는 독수리과의 맹금류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중략)… 

이 분포권을 몇 개의 집단으로 더 나누고 그들 사이의 선후 관계를 따지면 연의 원향()을 알 수 있으나, 이는 앞으로의 일이다. 

뽀레 마스뻬로 여사는 한자 사용 집단보다 칼란계 어휘를 쓰는 사람들의 호칭이 더 오래 되었다고 한다.

남쪽 바다에서는 연으로 고기를 잡는다. 

어부가 배에서 여러 장의 잎으로 짜 맞춘 연을 날린다. 

연에 낚시줄을 매달지만, 그 끝은 바늘이 아니라 거미집이나 미끼를 붙인 고리로 되어 있다. …(중략)…

연은 종교에도 이용되었다. 타이 아유타야조(14~18세기)는 연날리기를 12월(타이 달력으로는 첫 달)의 왕실 의례로 삼았다. 

이는 연이 불러오는 북동 계절풍이 우계()를 쫓고, 건계()를 불러서 논이 빨리 말라 풍년이 든다는 생각에서 왔다. 

우계와 건계의 정상적인 변화를 촉진시키려는 여러 의례가 발달된 동남아시아 가운데, 캄보디아에도 같은 풍속이 있다. 

이 보다 더 널리 퍼진 것이 연이 액을 쫓는다는 신앙이다. 

중국에는 전국에 분포하며, 특히 서북 산간 주거민들은 입춘 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마을마다 큰 연을 만들어 날리다가 줄을 끊는다.

연을 청명절에 날리는 대만의 한족()은 연에 병명() 따위를 적는다. 

이 연은 재액을 지닌 까닭에, 집 안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애쓴다. 

이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남중국에서는 연이 떨어지면 액을 쫓는 의례를 벌인다. 

캄보디아에서도 승려나 옛 일에 밝은 마을 사제에게 부탁해서 정화의례를 베푼다. 

조선에서는 연을 정월에 남자 어린이들이 즐기며, 보름날 실을 끊어 날려보내거나 달집과 함께 태운다. 

연에 이름 · 생년월일 · 주문() 따위를 적으며, 이에 따라 한 해동안 무사하리라 믿는다. 또 연이 떨어진 집은 그 해 액운이 낀다고 한다.

일본에는 닮은 민속이 없는 듯 하나, 예부터 액을 쫓는 날인 음력 3월 3일에 연을 날리는 데가 많다. 

대륙의 액연 날리기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984).

연에 관한 전설이다.

한 사나이()가 연을 타고 나고야()성 안으로 들어가 여러 개의 금비늘을 훔친 뒤 땅으로 내려왔다. 

아들과 함께 하치죠지마()에 유배된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연에 아들을 태워 본토로 돌려보냈다. 

연에 그의 모습을 그리는 풍속은 이에서 왔다. 

연으로 벽돌 상자를 날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연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빈송성기()』에 보인다. 1572년 단오에 하타모토()와 이에야스()의 객신()이 성 앞에서 연()을 날렸다는 내용이다. 

40년 뒤인 1615년에는 나가사키의 어떤 이가 오징어 깃발()에 촛불을 매달아 밤중에 날렸다.

에도시대의 연 가게에서는 문어의 인형을 매단 긴 장대를 지붕 위로 세워서 간판으로 삼았다. 

밀감 상자에 붉은 종이로 꾸민 문어의 길이는 2~3미터에 이르렀다. 연에 흔히 무장이나 영웅의 모습을 채색으로 그렸으며, 난() · 수() · 취() · 용() · 금() · 호() 따위의 글자도 썼다. 

열 장 한 묶음을 ‘한 다발’이라 일컬었으며, 석 장은 채색하고 나머지는 글자를 적었다.

18세기에는 길이 한 발에 금 150그램과 맞먹는 연이 나온 한편, 가로 33센티미터, 세로 48센티미터의 종이(西) 백 장짜리 연도 선보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연날리기가 성행하자, 

1873년 도쿄에서는 교통 장해를 이유로 막았다.

연으로 복을 빌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적거나, 긴타로오() · 모모타로오() · 종규() · 반야() 등을 그려 날린 것이다. 

시즈오까현 하마마쓰()시에서는 장남이 태어나면 어머니 고향 친척들이 큰 ‘첫 연()’을 보내서, 첫 단오에 젊은이들에게 부탁하여 띄우도록 하였다. 

상점에서는 그 해 간지에 해당하는 동물을 그린 연을 입구에 걸어서 번영을 빌었고, 후쿠시마에서는 액년()을 맞은 남자는 1월 14일에 연을, 여자는 풍선을 친척들에게 돌려서 화를 막았다. 잉어 연은 오늘날에도 띄운다.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잉어꼴 연을 집 앞의 대나무 장대에 매달아 띄우는 것이다. 잉어처럼 튼튼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서이다.

도쿄( )에는 해마다 2월 첫 소날() 연 시장이 열렸다. 

각지의 연을 길거리에서 팔았으며, 오지()의 연은 화재 예방에 효험이 높다고 일컬었다.

연 날리기의 중심지는 동 · 동남아시아이다. 

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기 어렵지만 특정 인물의 창작이라기보다, 

인도네시아 부근에서 때로 바람에 날려 올라가는 카누의 돛이 연의 시초라는 영국 인류학자 해든(Haddon, A. C.)의 설명이 그럴 듯 하다. 

날려 놀라간 돛을 끌어 내릴 때의 바람의 저항이 주는 재미가 잊혀지지 않아 작은 돛을 만들어 날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은 말레이시아에서 인도로 들어갔으며, 유럽 전파는 2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15세기쯤 아라비아에서 처음 들어간 연은, 아시아의 보통 연과 로마군이 서기전 105년에 기인()으로 쓴 것을 합쳐 만들었다.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날렸고, 처음에는 작대기 끝에 직접 매달았다. 

두 번째는 16세기쯤 들어갔으며, 1558년에 나폴리에서 연 만드는 방법을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 나왔다. 

연을 평화의 상징으로 삼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마을에 연이 떠있으면 밖의 사람들이 안심하였다.

연끊어먹기는 동남아시아 일대에 퍼져있으며, 인도나 파키스탄에는 직업적인 전문가도 있다. 

타이에서도 남풍이 불기 시작하는 2월에서 4월에 종이연을 날리며 연 싸움도 벌인다[한천항천(), 1998].

액연을 중국과 대만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대륙에서도 날린 것은 흥미롭다.


세계인이 즐기는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세계인이 즐기는 놀이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연날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다. 

연을 날리는 놀이는 생활의 긴장을 풀어줌과 동시에 즐거움을 주었기에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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