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Beijing北京.
베이징 Beijing北京.
베이징(北京)
정식 명칭은 베이징직할시[北京直轄市]이며, 약칭하여 '징[京]'이라고도 부른다. 화베이평야[華北平野] 북쪽 끝에 있으며, 동남쪽으로 보하이해[渤海]와 150㎞ 거리에 있다.
베이징은 중국 온대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지닌 사계절이 분명한 도시이다.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로 지정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베이징이 수도가 된 것은 명나라 때로, 처음에는 '계'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3대 황제 영락제가 베이징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후 6백 년에 걸쳐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로 자리 잡아 왔다.
전국시대에는 연(燕) 나라의 수도였으며, 초기에는 '지[蓟]'라고도 불렸다. 후에 요(遼)·금(金)·원(元)·명(明)·청(淸) 나라 등을 거쳐 중화민국 초기의 수도로서 8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1928년 시(市)로 정하고 이름을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명칭도 다시 '베이징'으로 고치고 수도로 정해졌다.
면적은 16,808㎢이다. 행정구역은 둥청구[東城區]·시청구[西城區]·충원구[崇文區]·쉬안우구[宣武區]·하이뎬구[海淀區]·차오양구[朝陽區]·펑타이구[豊台區]·스징산구[石景山區]·팡산구[房山區]·먼터우거우구[門頭溝區]·퉁저우구[通州區]·순이구[順義區]·창핑구[昌平區]·다싱구[大興區]·화이러우구[懷柔區]·핑구구[平谷區]등 16개 구와 옌칭[延慶]·미윈[密雲] 등 2개의 현(縣)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화와 대외 교류의 중심지이며 국제화된 대도시다.
1929년 교외의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발견된 60만~23만 년 전의 베이징원인[北京原人] 화석을 통하여 불을 사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북방을 포함한 전국의 정치·문화·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인재가 흥성하여 숱한 역사적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원나라 희곡의 4대 작가 중 마치원(馬致遠)·관한경(關漢卿)·왕실보(王實甫) 등 3명이 이곳 출신이며, 《낙타샹쯔[駱駝祥子]》로 유명한 현대 소설가 라오서[老舍] 등이 있다.
베이징은 일찍이 화북(華北) 대평원과 북방의 산간지대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역사상에 등장하였다. 베이징은 처음에는 ‘계(薊) )’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그 고대취락의 위치는 현재 루거우차오[蘆溝橋]가 있는 곳, 즉 예로부터 융딩강의 도하지점(渡河地點)이 되어왔던 곳에 인접한 지추[薊丘]라는 작은 언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평야지대와 산간지대 사이의 교통이 빈번해지자 그 교통로의 요충을 차지한 고대취락이 점차 발전하여, 주대(周代) 초에는 연(燕)나라의 도읍(都邑) 계성(薊城)이 그곳에 조영되었다. 진(秦)·한(漢) 이후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대체로 유주(幽州)의 치소(治所)로서 동북변방(東北邊方)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2차에 걸쳐 실패를 거듭한 한민족(漢民族)의 고구려(高句麗) 침략, 즉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의 고구려 원정 때에는 다같이 계성(薊城)을 그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당태종은 고구려에 패한 뒤 전몰장사(戰歿將士)의 넋을 애도하여 민충사(憫忠寺:지금의 베이징 외성에 있는 法源寺의 전신)를 건립하였다.
오대(五代)에 이르러 요(遼)나라는 938년에 이곳을 부도(副都)로 삼아 남경(南京)이라 하고, 요나라를 물리친 금(金)나라는 처음 연경(燕京)으로 부르다가 1153년에 이곳으로 천도하여 중도(中都)라고 고쳤다. 다시 몽골족이 남하하여 중도성(中都城)을 빼앗은 뒤 쿠빌라이(世祖) 때에 신성(新城)을 건설하고 국도로 정하여 대도(大都)라고 명명하였다.
몽골족이 중국을 통일하여 원(元)나라를 세우자 대도는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정치중심지가 되었고, 마르코 폴로는 칸발릭(Khanbalik)이라는 도시명으로 그 호화로운 번영상을 기록하고 있다. 명대(明代)에는 처음 국도를 지금의 난징[南京]에 두었다가 1421년에 영락제(永樂帝)가 이곳을 국도로 정하고 북경(北京)이라 하였는데, 베이징이라는 명칭은 이때에 비롯되었다.
명대에는 남문(南門) 밖에 외성(外城)을 구축하고 북부의 성역(城域)을 대도 때보다 축소하여 내성(內城)이라 불렀는데, 그 내·외성이 지금의 베이징성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淸)나라도 1644년 이후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국도로 하였는데, 만주족과 한족의 거주지역을 구분하여 내성에 만주족, 외성에 한족을 살게 하였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시대에도 계속 이곳을 국도로 삼았으나 북벌(北伐) 완성 뒤 난징으로 천도하여, 이곳을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다시 그 수도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신과 교류한다는 뜻. 낱낱이 신께 고해바치고 백성의 안위를 약속받는다는 뜻. 베이징 황성 내에는 네 개의 제단이 있다. 남쪽의 천단(天壇), 북쪽의 지단(地壇), 동쪽의 일단(日壇), 서쪽의 월단(月壇)은 이름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각각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다르다. 이중 천단(天壇)은 가장 중요시되던 제단으로, 명청시대에 황제가 매년 이곳에서 천신에게 제를 올렸다.
이곳 넓이는 무려 자금성의 네 배. 고대규모로는 가장 큰 제단이라 할만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 최대의 제전이기도 하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1420년에 세운 이 제단은 1961년 최초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선포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건축법의 다양한 활용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 “천고지저(天高地底-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천지의 순리를 담아내기도 했다.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圜丘壇) 정중앙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천심석(天心石)이 놓여 있는데, 이 천심석 위에서는 독특한 메아리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황궁우(皇穹宇)를 둘러싼 회음벽(回音壁), 황궁우 앞에 깔린 세 개의 돌, 삼음석(三音石)에도 생기는 기이한 현상이다. 회음벽의 이쪽에서 서서 말한 작은 소리는 벽을 따라 전파되어 다른 쪽 벽에서도 들린다고 하고, 삼음석의 경우는 첫 번째 돌에서 손뼉을 치면 한번, 두 번째 돌에서는 두 번, 세 번째 돌에서는 세 번의 메아리가 들린다고 한다.
천단의 중심 건축물인 기년전(祈年殿) 천정에는 용과 봉황이 어우러진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바닥에 조각되어 있던 봉황이 밤에 천정의 용에게 놀러 갔다가 날이 밝자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라고.
대관원(大觀園)
소설 속의 배경인 대관원(大觀園)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귀공자 가보옥(賈宝玉)이 살고 있는 가상의 장소인데, 현재 베이징에는 소설을 정밀하게 재현하여 만든 [대관원]이 자리하고 있다. 1984년에서 1989년까지 홍루몽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홍학(紅學)의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원작을 재현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만든 결과, 이후 대부분 홍루몽과 관련된 영화와 TV 드라마는 이곳에서 촬영된다.
[홍루몽]의 ‘홍루’는 ‘붉은 누각’이라는 뜻. 아녀자들이 거처하는 규방을 홍루라 일컬었으니, 소설의 제목을 번역하면 ‘규방의 꿈’이라는 의미이다.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할 정도로 주인공들의 애정관계를 중심에 두고 있으나, 이들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기 이전, 전생의 인연을 중국고대신화의 하나인 여와신화로 설정하는 등 각종 신화와 유,불,도의 사상을 깊이 있게 담고 있다.
소설 속의 대관원은 황제의 귀비가 된 보옥의 친누이인 가원춘이 친정나들이를 하면서 막대한 돈을 들이부어 조성한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연못, 거대한 정원, 고급저택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천상과 인간의 경치를 모두 겸비한 고대정원건축의 집대성으로 일컬어진다. 무릉도원의 이상향으로 그려진 대관원의 동쪽에서는 미려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서쪽 편에서는 청대 귀족들의 생활모습을 볼 수 있어 홍루몽의 팬들뿐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람들의 신 섬기기, 백운관(白云觀)
신이 인간과 관계 맺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사찰, 사원, 교회를 거친다. 백운관(白云觀)은 현재에도 대규모 회합이 열리는 중국 최대의 도교사원으로, 739년 당나라 현종 때 천장관(天長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졌다. 이후 1203년에 태겁궁(太極宮)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쿠빌라이 칸 시대 국가 승려였던 구처기(丘處機)가 기거하면서 명실상부한 도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14세기 명나라와의 전쟁을 거치며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축되어 오늘날까지 백운관 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도교의 일파인 전진교의 중심으로, ‘전진교의 제일숲’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운다. 이곳에 자리한 노율당(老律堂) 앞에 놓인 청동노새는 치유의 능력이 있어 이를 만지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정기, 부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도교의 행사를 먀오후이(廟會)라 하는데, 그중에서도 백운관의 축제가 유명하다. 특히 정월 19일, 백운관이 모시는 악진인의 생일을 기념하는 회신선은 성대하다. 이날 진인이 하계로 내려와 인간들과 인연을 맺는데, 내려오는 그 모습이 일체만유의 모습인 ‘법상’이라 일반인들은 그가 진인임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날 사제들은 도교전통의식을 거행하며 화려한 시가행진을 벌이고, 사찰 앞에서는 수예품이나 과자를 판매하는 시장이 열린다. 화려한 복장과 건물장식이 볼만하다.
고관상대(古觀象臺).
현인들은 별을 보면서 무엇을 읽으려 했을까. 건조한 과학지식 너머 촉촉한 목소리를 들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신이 우주를 작동하는 방식을 엿보려 한 것은 아닐까. 북경의 천문대인 고관상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기구와 천문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 천문대 자체의 천체 관측의 역사도 500여 년에 이르러 현존하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천문대로 꼽히고 있다.
처음 북경에 천문대가 설치된 것은 여진족이 통치하던 금나라 시절. 1127년 송나라는 하남에서 천문기구들을 가지고 와 북경에서 천문을 관측했고, 원나라 세조는 1279년 사천대(司天臺)를 건설하고 새 천문기구들을 제작했다. 1436년에서 49년, 명나라 시절 사천대 근처에 세운 관상대가 바로 현재의 고관상대이다. 당시에는 관성대(觀星臺)라 불리었으며, 명청시대에 이곳을 중심으로 천문관측이 이루어져 ‘명청관상대’로 불리기도 했다.
‘베이징 고대천문의기(古代天文儀器) 진열관’이 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지난했다. 기나긴 역사를 통해 하나 둘 모였던 천문기기들은 1900년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침입하면서 약탈해갔고, 결국 프랑스가 약탈해간 것은 1902년에, 독일이 빼앗아간 것은 1921년에 돌려받았다. 명대에 만들어진 기기들은 중일전쟁 때 약탈을 우려해 1931년 ‘자금산(紫金山) 천문대’와 남경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 이곳에는 청대에 제조된 대형 천문기기 8개가 전시되어 있다.
옹화궁(雍和宮).
사람을 죽인 뒤에 신에게 속죄만 하면 모든 죄가 지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속죄의 노력과 속죄의 흔적들은 지금도 남아 옛 사람의 고뇌를 엿보게 한다. 베이징 최대의 라마교 사원인 옹화궁(雍和宮)이 처음 지어진 것은 1694년. 처음의 용도는 청조 제3대 황제인 옹정제가 즉위하기 전에 머물던 저택이었다.
옹정제가 즉위하고 나서 3년 뒤에 옹화궁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나, 정식으로 라마교 사원으로 결정된 것은 이곳에서 태어난 건륭제 때 이르러서이다. 몽골과 티베트 등 소수민족과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1744년 이곳을 정식으로 라마교 사원으로 만들었는데, 그 배경은 단지 외교적 목적만은 아니었다. 스스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다고 생각한 건륭제 스스로의 속죄의 의미도 있었다.
옹화궁 내에 자리 잡은 만복각 안에는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최대의 목조 미륵불이 있다. 지상 18m, 지하 8m, 합쳐서 26m인 이 목조 미륵불은 한 그루의 백단목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티베트의 달라이라마가 건륭제에게 선물한 이 불상 이외에도 볼만한 것은 활짝 웃는 얼굴을 한 불상인 포대화상(布袋和尙). 사람들이 큰 배 미륵불이라고도 부르는 이 불상은 9세기 말 현존했던 스님을 모델로 하고 있다. 큰 자루에 온갖 필요한 일용품들을 넣고 다녀서 얻은 이름이 자루스님, 즉 포대화상인 것이다.
북경원인 유적"
신이 직접 내려와 이룬 천하인 듯 여겨왔던 중국도, 사실은 지난한 인류진화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1929년, 북경원인의 두개골 화석 발굴은 인류의 기원을 찾아내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한 발견이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화석은 두개골 6개, 두개골의 조각 12개, 아래턱뼈 15개, 치아 157개 등 상당한 분량이었으나, 1941년 일어난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최근 들어 다시 발굴이 재개되면서 2003년 6월 또 다시 인간의 화석이 대량 발굴되었다. 5~60만년 전의 인류가 불을 사용했다는 증거, 석기를 사용했다는 증거, 무덤을 만들고 장식품을 착용했다는 증거가 발견된 15개의 발굴지들과 발굴품들을 전시한 박물관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근처의 작은 산 이름은 용골산(龍骨山). 이름에서도 짐작하다시피 용의 뼈라 불리는 각종 동물의 뼈 화석들이 심심치않게 발견되었던 곳이다. 고래로 이곳에서 나온 뼈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병통치약이라 불리며 높은 가격에 팔렸다고 한다.
그렇게 잃어버린 뼈 중에 소중한 화석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 어찌나 섬세하게 작업했는지 손상 없이 두개골에 붙은 흙을 제거하는 데 4개월이 걸렸다는 고고학자들의 일화와 비교해보면 그 안타까움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이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숭문문(崇文門).
신과 인간이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북경은 용왕과 오래고도 힘겨운 싸움을 한 도시이다. 북경 지방이 전부 바다여서 ‘고해유주(苦海幽州)’라 불렸던 시절, 사람들은 용왕과 싸워 이겨 북경을 육지로 만들었다.
도망쳤던 용왕의 아들 용공은 이후 명나라 주원장의 군사인 유백온과 요광효가 북경성을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금 북경을 빼앗을 궁리를 한다. 처음엔 북경 안의 모든 물을 빼앗을 계략을 짰던 용공은 실패하자 북경을 물에 잠기게 하려고 아들 용아를 데리고 지하의 수로를 따라 북경으로 온다. 북경이 물바다가 되자 요광효는 그들과 대치하고, 힘겨운 싸움은 결국 또다시 사람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요광효는 그때 잡은 용공과 용아를 각각 북신교와 숭문문 근처에 묶어두고, “언제쯤 풀어줄거요?”라는 말에 “성문을 열 때 돌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풀어주겠노라”라고 답하게 된다. 그 뒤, 북경성의 아홉 개의 문 중 여덟 개의 문만 성문을 열 때 누각에 달아놓은 돌판을 두드리고, 숭문문 하나만이 쇠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구문팔전일구종(九門八錪一口鐘)’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다른 전설은 유백온과 요광효가 북경성을 짓기 위해 엄청난 폭우를 내리며 장난치는 용들을 잡아들이면서 시작한다. 놀라고 겁이 난 용들이 사방팔방으로 도망치자 마지막으로 남은 아버지 늙은 용이 이들과 대치하게 된다.
힘겨운 싸움 끝에 사대천왕의 도움으로 늙은 용을 이긴 이들은 그를 숭문문 근처 철탑에 가두고, “북경성이 완공되어 숭문문의 돌판소리가 들리게 되면 풀어주겠노라.”약속한다. 14년간의 대공사 끝에 북경성이 완공된 날, 늙은 용은 돌판소리가 들리기만을 학수고대하였으나 숭문문만 종을 쳐서 결국은 풀려나지 못했다 한다.
자금성(紫禁城)
명·청대의 궁전으로 중국에선 고궁(故宮)으로 불린다. 자금성은 거대한 박물관이기도 해서, 자금성 안에 있는 여러 궁들은 진열실로 사용되어 중국의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자금성을 둘러싼 성벽, 궁 안의 기와, 궁전 내부의 여러 장식들 모두 전혀 훼손되지 않고 완벽할 정도로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다.
천안문(天安門)
천안문 은 자금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자리에는 본래 명나라 영락년에 지어진 승천문이 있었는데 이후 소실되었고, 청나라 때 재건되면서 이름이 천안문 으로 바뀌었다.
1948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개국된 이래 문루 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장(國章)이 장식되어 있고, 문루의 다섯 개 문 중앙에는 마오쩌둥 주석의 초상이 걸려 있다. 문 앞에는 도랑이 있고 석조 다리가 다섯 개 걸려 있으며, 다리 양쪽에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천안문 광장
천안문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광장으로 약 1백만 명이 모일 수 있다. 광장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기가 게양되어 있고,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체조와 태극권 등을 즐기기도 한다.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정부와 충돌하여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피 흘린 곳이기도 하다. 그 후로 중국 경찰은 이곳에서 또 다른 시위가 벌어질까 봐 매우 민감하게 감시하고 있다.
교통
중국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항공·철도·버스·택시 등이 있다. 특히 철도는 중국에서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철도대국'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철도망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특색 있는 대중교통으로는 인력 삼륜차와 자전거를 들 수 있다. 인력 삼륜차는 일반 택시와 비슷한 것으로 대형 세발자전거에 뒷좌석을 붙인 형태이며, 시내의 가까운 곳을 돌아보는 데에 편리하지만 장거리 교통수단으로는 불편하다. 중국의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인 자전거는 천안문 광장과 함께 중국을 상징 한다.
자전거가 대중교통으로 발달한 중국에서는 자전거 주차비를 받는 곳도 있다고 한다.
중국은 국토가 넓어 각 지방의 기후, 풍토, 산물 등에 각기 다른 특색이 있다. 그에 따라 경제, 지리,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하여 4대 요리가 형성되었는데 황허강 유역 및 기타 북방은 베이징 요리를 대표로 하고, 양쯔강의 하류는 상하이 요리를, 양쯔강의 중상류는 쓰촨 요리를, 쭈강 유역은 광둥 요리를 대표로 하고 있다.
요리"
베이징(北京) 요리
베이징이 가장 화려한 문명을 자랑한 것은 청나라 때로, 이때부터 궁중을 중심으로 중국 각지에서 명물 진상품과 우수한 요리사들이 모여 각 지역의 장점만을 받아들인 음식 문화를 발달시켰다. 중국 요리의 별칭인 '청 요리'도 이때 유래된 것이다.
밀의 생산이 많아 면류·만두·전병의 종류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대표적인 음식은 베이징 오리 요리이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집은 대부분 이 베이징 요리법을 따르고 있다.
광둥(廣東) 요리
광둥 지역은 동남 연해에 위치하여 기후가 온화하고 재료가 풍부한 곳이다. 그래서 "먹는 것은 광둥에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광둥 지역은 예부터 요리가 발달한 곳이다. 특히 외국과의 교류가 많은 지역으로 전통 요리와 국제적인 요리의 특성이 조화를 이뤄 독특하게 발달하였다.
서유럽 요리의 영향을 받아 쇠고기, 서양 채소, 토마토 케첩 등 서양 요리 재료와 조미료를 받아들인 요리도 있다. 간을 싱겁게 하고 기름도 적게 써 가장 대중적인 요리로 꼽힌다. 탕수육과 팔보채, 중국 요리의 보석으로 꼽히는 딤섬도 광둥 요리이다.
상하이(上海) 요리
양쯔강 하류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는 난징이지만, 상하이가 항구로서 발달하여 국제적인 풍미를 갖추었기 때문에 상하이 요리로 부르고 있다. 상하이 요리는 비교적 바다와 가깝기 때문에 해산물을 많이 이용한다.
음식의 색이 화려하고 선명하도록 만들며, 그 지방의 특산품인 간장과 설탕을 써서 진하고 달콤하며 기름지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9월 말부터 1월 중순에 맛볼 수 있는 상하이의 게 요리는 전 세계 식도락가들이 최고로 뽑는 진미이다.
쓰촨(四川) 요리
중국의 곡창 지대로 유명한 쓰촨 분지는 해산물을 제외한 사계절 산물이 모두 풍성해 야생 동식물이나 채소류,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한 요리가 많다. 더위와 추위가 심해 향신료를 많이 쓴 요리가 발달한 것이 특징으로, 그에 따라 매운 요리와 마늘·파·고추를 사용하는 요리가 많다.
깨끗함, 신선함, 순수함과 진함이 함께 느껴지는 저리고 매운 맛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누룽지탕, 마파두부 등이 대표적이다.
딤섬(點心)2백여 가지의 맛과 모양을 가진 딤섬은 모양에 따라 교, 파오, 마이, 쇼마이, 편 등 크게 다섯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중국의 무술
태극권
태극권은 중국 무술 중의 하나로, 최근 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유연하고 완만한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氣)를 단전에 모아 온몸에 원활하게 유통시켜 오장육부를 강화하는 것이 특징으로, 수련 과정 중에서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다고 한다.
태극권은 24개의 기본 동작과 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자세로 구성되어 있다. 일명 '건강 체조'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른 아침에 공원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움직이는 선(禪), 기공권, 감각권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쿵푸·우슈
보통 중국 무술은 쿵푸로 대표된다고 알고 있지만 원래 쿵푸와 우슈는 같은 말이다. 홍콩과 대만에서는 쿵푸로, 중국 본토에서는 우슈라 부른다. 또한 우슈는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불려 오던 각종 용어들을 통합해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제정한 용어로, 우리나라의 태권도나 일본의 유도처럼 중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를 뜻하기도 한다.
우슈의 색다른 점은 두 선수가 맞붙어 승부를 가리는 것이 아닌 혼자 하는 '표현 무술'이라는 점이다. 크게 태극권·남권·장권으로 나뉘며 이것을 '3권'이라 하고, 직립 자세를 비롯하여 개구리·용·뱀·기마 자세를 기본으로 한다. 쿵푸는 어떤 경지에 이르기 위해 감정을 자제하고 신중하게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무술 경기뿐만 아니라 건강법으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소림 무술
1천 5백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소림 무술은 중악 숭산의 소림사에서 시작되었는데, 인도 승려 보리달마 대사가 좌선에 지친 승려들의 심신 단련을 위해 창시했다는 전설이 있다. 육체와 정신을 두루 갖추는 것을 중요시 여기며, 자세 하나하나의 동작이 잘 어우러지고 빈틈이 없어야 하고 신체 각 부분의 균형이 잡혀 일치되어야 한다.
소림 무술은 독특한 기교가 대단히 많은데,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하는 것, 공격하면서 방어하는 것, 방어하면서 여러 가지 공격을 하는 것 등이 있다. 종류도 아주 많아서 성질에 따라 내공·외공·경공·기공 등으로 나뉘며, 기법에 따라 권술·창술·도술·검술·곤술 등 1백여 종으로 나뉘고, 소홍권·소림연환권·소림장권·통배권·나한권 등 97개의 권법이 있다.
중국은?
중국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으로 공화제를 따르고 있다. 수도는 베이징이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화폐 단위는 위안(元)이다.
'중국' 또는 '중화'라는 나라 이름의 중(中)은 중심, 화(華)는 문화라는 뜻으로 세계의 중심 또는 문화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와 캐나다 다음으로 큰 국토를 갖고 있는 중국은 동쪽으로는 북한,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 서쪽으로는 아프카니스탄·파키스탄·인도·네팔, 남쪽으로는 미얀마·라오스·베트남 등과 인접해 있다.
인구
중국의 인구는 13억 4천만 명 정도로(2012년 현재), 6년 9개월이면 1억의 인구가 늘어나는 급격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인구는 중국의 경제적·정치적 힘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 '한 자녀 갖기 정책'을 시행하게 만들었다.
인해 도시에서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한 자녀밖에 가질 수 없고, 노동력이 필요한 농촌에서만 첫째가 딸일 경우 둘째까지 낳을 수 있다. 만약 법을 어기고 둘째 아이를 낳을 경우, 아이를 호적에 올릴 수 없다.
호적에 올리지 못한 아이를 흑해자(黑孩子), 우리말로 '검은 아이'라고 한다. 반면, 도시에서 외동으로 과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들을 소황제(小皇帝)라 부르는데, 이들은 사회 적응력이 떨어져 또 다른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중국의 자랑, 시황릉중국의 넓은 땅을 최초로 통일해 진나라를 건설한 진시황의 진시황릉은 개인의 묘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이 있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 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한다.
진시황릉의 병마용갱(俑坑 : 인형이 묻힌 땅굴)은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왕이 죽으면 사람을 같이 묻는 풍습 대신, 군사들의 모습과 크기를 그대로 본뜬 도기 인형을 묻어 시황제를 호위하게 한 것이다.
8천 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얼굴이 생생하고 그 생김새가 각각 다른 것으로 보아, 이 인형들은 실제로 진시황이 거느렸던 사람들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현재까지도 발굴은 진행 중이며, 전문가들은 완전 발굴까지 1백여 년이 더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진시황릉 병마용갱거대한 크기의 병마용갱은 섬세하고 사실적인 모습의 진용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청동 마차사진의 청동 마차는 귀인이 탄 것으로 추정되며, 금·은으로 장식된 섬세한 마구가 특징이다.
중국의 넓은 땅을 최초로 통일해 진나라를 건설한 진시황의 진시황릉은 개인의 묘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이 있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 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한다.
진시황릉의 병마용갱(俑坑 : 인형이 묻힌 땅굴)은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왕이 죽으면 사람을 같이 묻는 풍습 대신, 군사들의 모습과 크기를 그대로 본뜬 도기 인형을 묻어 시황제를 호위하게 한 것이다.
8천 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얼굴이 생생하고 그 생김새가 각각 다른 것으로 보아, 이 인형들은 실제로 진시황이 거느렸던 사람들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현재까지도 발굴은 진행 중이며, 전문가들은 완전 발굴까지 1백여 년이 더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진시황릉 병마용갱거대한 크기의 병마용갱은 섬세하고 사실적인 모습의 진용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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