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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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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

<蘇塗>의 정화(精華):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

비류선제(沸流仙帝)의 두 왕후(王后)가 지닌 미스테리(mystery)이 벽라후(碧蘿后)의 가계(家系)가 매우 특수한 행인국(荇人國)인 것처럼 만후(曼后)의 가계(家系)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이 두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왕후(王后)의 관계를 사서(史書)를 읽는 사람들이 선뜻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벽라후(碧蘿后)는 비류왕보다 11살의 연상(年上)이시고, 만후(曼后)는 4살 연하(年下)이십니다.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왕후(王后)이신 벽라후(碧蘿后)는 “행인국(荇人國)의 딸로써 ‘배달화백’이 어떤 예술적 연극-굿에 의해서 잘 이루어지는가?” 또 “인간이 왜 서로 고집을 피우면서 싸우고, 죽는가?” 하는 갈등을 어릴때 아버지이신 조천왕(朝天王)의 6년동안의 도망자 생활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정신적으로도 깊이가 선제(仙帝)의 후(后)에 걸맞게 깊었으며,  아주 날카로운 국제정치를 통찰하는 지혜 뿐만이 아니라,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美貌)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분이 비류왕(沸流王)과 결혼하셔서 세평(世評)으로 절세미인의 평가를 받는 딸 셋을 낳으시고, 산동백제의 소도(蘇塗)인 미추홀(彌鄒忽) 개척에 진력(盡力)하시다가 젊은 34세에 운명하신 것으로 남당유고(南堂遺稿)의 비류왕(沸流王) 편에서는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벽라후(碧蘿后)가 돌아가시기 2년 전(前)에 비류선제(沸流仙帝)와 결혼한 만후(曼后) 이런  벽라후(碧蘿后)이셨기에,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는 무척 사랑하시어, 상처(喪妻)를 하자 재혼(再婚)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으로 비류왕(沸流王) 편에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이 벽라후(碧蘿后)말고 또다른 부인(婦人)이 바로 만(曼) 공주이신데, 이 사이에 낳은 양인(昜人)때에 이르러 엄사왕(淹氵虒王)으로써 고구리(高句麗)에서 봉왕(封王)을 받으신 것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 벽라후(碧蘿后)의 가계(家系)가 매우 특수한 행인국(荇人國)인 것처럼 만후(曼后)의 가계(家系)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이 두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왕후(王后)의 관계를 사서(史書)를 읽는 사람들이 선뜻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일단, 나중에 상세하게 계산하는 과정이 있습니다만,  벽라후(碧蘿后)는 비류왕보다 11살의 연상(年上)이시고, 만후(曼后)는 4살 연하(年下)이십니다. 그런데, 벽라후(碧蘿后)께서 훙(薨)하시기 -돌아가심을 뜻함- 전(前) 2년 전에 당시 17살이셨던 만후(曼后)와 비류왕(沸流王)은 결혼하셨는데, 사서(史書)에 구체적으로 적혀있지 않지만, 벽라후(碧蘿后)가 살아계실 때에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아들이신 양인(昜人)을 낳으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칠중(七重)-구지(衢地)에 있었던 엄사국(淹氵虒國)은 3대에 걸쳐서 즉 비류왕(沸流王)-양인왕(昜人王)-호력왕(虎力王)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는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원칙으로써 도성(都城)을 짖는 법도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추홀(彌鄒忽)은 바로 칠중하(七重河)를 통괄해서 ‘배달화백을 하는 왕성(王城)’이 되는 것이고, 엄사왕(淹氵虒王)이 전쟁 때 ‘전투지휘권’을 지니는 또다른 왕성(王城)이 필요합니다. 그럼 그곳이 어디냐? 바로 ‘참고용 지도’에 짐관성(斟灌城) - 다시 말하면, 관미성(關彌城)이 되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이 비류왕(沸流王)의 손자(孫子)되시는 호력왕(虎力王)때 수해가 도대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비류선제(沸流仙帝)의 또 다른 왕후(王后)를 통해서 낳은 양인왕(昜人王)을 통해서 호력왕(虎力王)때 일어난 실로 어마어마한 수해(水害)에 대한 기록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사료(史料) 다시 옮김 ***

十四年辛丑, 冬十一月, 有雷無雪. (*)是歲<淹淲>大漲,(*) <彌鄒忽(密山前坪)>盡被水害, 移其民於<西河>, (*)以 <淹淲王><虎力>爲<龍山公>(*)

 

"14년{단기2374년/AD41}신축, 겨울 11월, 천둥은 치는데 눈은 내리지 않았다. 이 해에 (*)<엄사(淹氵虒)>수가 크게 불어나,(*) <미추홀(彌鄒忽)(밀산전평)>이 수해로 초토화 되어, 백성들을 <서하(西河)>로 옮겨야 하겠기에, (*)<엄사왕(淹氵虒王)>인(*) <호력(虎力)>을 <용산공(龍山公)>으로 삼았다. *** 다시 옮김 마침 ***

 

이 대무신대제기(大武神大帝紀) 11월조 이 기사(記事)에서 “겨울에 번개와 우레는 치는데 눈(雪)이 안왔다.”는 것은 기상이변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하늘에 먹구름이 꽉 찼고, 그 결과 번개와 우레가 치면, 비(雨)가 되고 이것이 내려오는 동안 얼어서 눈(雪)이 되는데, 그러지를 않고, 계속 차 들어가기만 했다는 것이지요.  

이는 겨울이라서 추운데다가, 한낮이라고 컴컴하게 되는 아주 기분나뿐 - 말하자면 종말적(終末的)인 분위기가 오다가, 갑자기 폭우(暴雨)가 한없이 쏟아진 경우인 것이지요.

 

수해(水害)기록에서 밝혀진것 - 엄사수(淹氵虒水)는 제수(濟水), 관미성(關彌城)은 전투지휘권이 있는 엄사국 (淹氵虒國)의 왕성(王城) 우리는 이제 미추홀(彌鄒忽)의 위치를 알기 때문에, 이 기상이변을 통해서 쏟아진 폭우(暴雨)가 내린 지역을 알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산동반도 동부쪽 즉 칠중하(七重河)들의 상류가 있는 곳인 것이지요. 

 

엄사수(淹氵虒水)는 제수(濟水)

 

이런 기록에 의해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관경삼국 초기에 배달화백을 할 경우, ‘아시아(Asia)의 헌법질서’를 바꾸는 경우에는 엄사수(淹氵虒水)가 바로 오늘날의 흑룡강(黑龍江)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정치-공동체’를 통합하는 배달화백을 할 때에는 제수(濟水) 전체가 바로 엄사수(淹氵虒水)가 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배달화백의 엔딩-룰(eding-rule)을 적용시키는 강(江)이 바로 제수(濟水)였음을 뜻합니다. 또 하나는 비류왕(沸流王)의 가계(家系)가 비류왕(沸流王)-양인왕(昜人王)-호력왕(虎力王)으로 엄사국(淹氵虒國) 이름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관미성(關彌城)은 전투지휘권이 있는 엄사국(淹氵虒國)의 왕성(王城)

 

첫째는 미추홀(彌鄒忽)은 엄사국(淹氵虒國)에서 ‘배달화백을 하는 왕성(王城)’ 즉 도성(都城)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짐관성(斟灌城) 즉 관미성(關彌城)은 엄사국(淹氵虒國)이 전쟁을 할 때, 전투지휘권을 지니는 그런 또 다른 왕성(王城)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김성호 선생이 제기한 ‘비류백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김성호 선생의 ‘비류백제’설은 남당유고(南堂遺稿)가 널리 읽혀지기 전에 확랍한 가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엄사국(淹氵虒國)이 “도대체 전쟁을 할 경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특수국가는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만을 담당하는 국가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수(濟水)에서 이런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을 담당하는 벅수군이 있었습니다.

 

배달화백은 진한육부(辰韓六部)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배달화백의 신성성(神聖性)을 지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벅수군>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벅수군>인육부군(六部軍)이 맡어야하는 것이 법도(法道)에 맞습니다. 또한,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인 엄사수(淹氵虒水) 게임(game)도 육부군(六部軍)이 치루어야합니다.

 

‘뿔범 철가면(鐵假面)’을 관장하는 것은 습비부(習比部)인데,  이 습비부(習比部)가 육부(六部) 안에 이미 있기 때문에 이것이 정상적인 것이지요. 배달화백은 ‘큰 공동체의 통합’가 ‘작은 공동체의 통합’을 말발이 서로 넘나들면서 동시 진행시키는 이륜구동(二輪驅動) 장체로 움직이는 화백회의입니다. 따라서 이런 배달화백을 축차적(逐次的)으로 연결시키면, 지구촌의 통일도 단 3개의 배달화백을 연결시키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즉 (1)남북한의 통일 - (2)극동의 통일 - (3)아시아의 통일 - (4)지구촌의 통일로 ‘정치-공동체’의 통합크기를 상정한다고 할때,  (1)-(2), (2)-(3), (3)-(4)으로써 배달화백을 3개 연결시키면 된다는 결론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배달화백을 군사력(軍事力)으로 자유스런 진행을 막는것이 결국은 엄사국(淹氵虒國)을 공격하는 것과같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을 총괄하는 것이 바로 이 산동반도 칠중하(七重河)지역에 있는 엄사국 (淹氵虒國) 고유의 일인데, 군사력을 강제 엔딩(ending) 시키는 것이니깐 엄사국(淹氵虒國)에 명백한 도전이 되는것이지요. 따라서 특정 가계(家系)에 엄사국(淹氵虒國)의 명칭을 준다는 것은 그것이 육부군(六部軍)올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양인왕(昜人王)-호력왕(虎力王)으로 내려오는 엄사국(淹氵虒國)으로써는 여간 부담이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 아시아(Asia)전역에 포진(布陳)되어 있는 최강예 벅수군 - 배달화백의 진행을 지키는 육부군(六部軍)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한낮 산동반도 동쪽의 칠중하(七重河) 주변에 있는 비류왕(沸流王)-양인왕(昜人王)-호력왕(虎力王)의 가계에 얹혀놓는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엄사국(淹氵虒國)의 명칭을 이 비류왕(沸流王)의 가계에 준다.”는 것 자체가 육부군(六部軍) 상위의 존재 로써 인정한다는 것이어서 그당시 사회로써는 매우 특이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배달화백을 하기 위해서는 위의 예(例)에 따라, 2개를 연결시키면 결국 아시아(Asia)의 통일을 하는 배달화백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는 오늘날의 ‘버마’에서 배달화백(倍達和白)이 일어나고, 그 주변을 통합하는 ‘큰 범위’라고 하더라도, 어떤 패권(覇權)주의적인 세력이 이를 공격하였다 하면, 이는 즉각 육부군(六部軍)이 동원되어야하는데, 이 육부군(六部軍) 위에 엄사국(淹氵虒國)이 있기 때문에, 모든 육부군(六部軍)의 작전이 엄사국(淹氵虒國)의 통제를 받어야한다는 이상한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사국(淹氵虒國) 왕(王)들은 “제발 우리를 육부군(六部軍) 위에 올려놓고, 상징적인 ‘절대권위’를 주지말라. 육부군(六部軍)은 ‘화백회의 신성성을 지키는 벅수군 답게’ 화백회의로 그 전략과 지휘관을 옹립하여야한다.”는 주장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에는 “그래도 당신들이 전권(全權)을 맡아주거나, 혹은 상징적으로라도있어야만 합니다.”고 한사코 육부군(六部軍) 위에 올려놓는 아주 이상한 현상이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우리가 칠중하(七重河)및 미추홀(彌鄒忽)에 관련된 군사 및 정치 지리를 깊게 고찰해야하는 이유인 것이지요.

 

수리시설(水利施設) 자체가 아시아(Asia)전역에 산중호수(山中湖水) 물로써 군선(軍船)을 보낼 수 있는 구조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교래하(膠萊河)와 고하(沽河) - ‘참고용 지도’에 오회수(俉淮水)로 기입된 곳이 북두칠성 (北斗七星)의 자리로써는 파군성(破軍星)의 자리이고, 그 위에 거대한 백맥(百脉)-대수고(大水庫)가 있는 이유를짐작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백맥호(百脉湖) 혹은 백맥(百脉)-대수고(大水庫)에는 ‘배달화백을 위헙’하는 군사적 위기에 동원되는 엄사국(淹氵虒國)이 신속(迅速)파견군으로써 아시아(Asia) 전역(全域)에 군대를 보낼 수 있는 군(軍)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칠중하(七重河)에 수많은 갑문(閘門)을 설치하고, 또 짐관성(斟灌城) - 다시 말하면, 관미성(關彌城)에서는 인공(人工)으로 만든 조수(潮水)가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맥호(百脉湖)에 있는 엄사국(淹氵虒國) 군선(軍船)은 그 높은 호수(湖水)로부터 인공(人工)으로 어진 밀물을 타고 한순간에 관미성(關彌城)을 벗어나, 저 ‘버마’로까지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지요.

 

이 또한 매우 웃기는 일입니다.  신라의 경우도 오로군사(五路軍事)라는 ‘벅수군’의 신속파견군의 센터(centor)를 전략적 요충지에 두고 있는데,  왜 굳이 “모든 육부군(六部軍)은 이곳에서 파견된다.”는 좀합리한 개념에 계속 그당시 사람들이 얽매여 있으려 하였는가 하는 점이 문제됩니다. 

 

대수해(大水害)는 도대체 어떤 불길한 징조(徵兆)였던가?  

 

하늘이 대기상이변을 일으켜서 칠중하(七重河) 근처를 온갖 수리시설을 엉망으로 만드는 폭우(暴雨)가 쏟아졌고,  또한  그 전(前) 먹구름이 짙어서 한 낮인데도 컴컴한데 눈(雪)은 안오고, 번개와 우레만 친 후에 이런 가공할 폭우(暴雨)가 쏟아졌다면,  엄수사국(淹氵虒國)의 마지막 왕인 호력왕(虎力王)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세상이 무너지는’는 조짐(兆朕 : omen)으로써 받아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엄사국(淹氵虒國)이 어떤 잘못을 범(犯)해서, 일종의 천벌(天罰)을 받았나?!” 하는 느낌까지 오는 스산한 징조(徵兆)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대자연의 기상이변을 만난 후에,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의 대책이 매우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移其民於<西河>, (*)以<淹淲王><虎力>爲<龍山公>(*)” - 즉 엄사국(淹氵虒國) 사람들을 전부 서하(西河)로 보내고, 또한 엄사왕(淹氵虒王)을 용산공(龍山公)으로 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하(西河)는 오늘날 섬서성 서수(湑水)로써 바로 환웅께서 내려오신 태백산(太白山)을 남(南)쪽에서 동(東)에서 서(西)로 길게 나가다가 남류(南流)하는 곳입니다. 이곳이 바로 알천(閼川)이 있는 곳이고, 또 이것에 칠성(七星)제단(祭壇)에 ‘자두(紫桃)’인 오얏(=(李)을 심은 곳이 지요. 또 그 뒤에는 중국대륙을 사통오달(四通五達)하는 지역인 태백구지(太白衢地)가 있는 곳입니다. 결국 이는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께서 “칠중(七重)-구지(衢地)에서 수해(水害)를 입으셨다고요? 하하. 그러면 그 반대쪽의 태백(太白)-구지(衢地)에서 마음놓고 같은 일을 하시면 될 것 아닙니까?”하는 듯한 행동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용산공(龍山公)이란 칠성(七星)이 만주어(滿洲語)로 ‘나난-구리’이고 이 ‘구리’가 용(龍)이기 때문에,  “결국 같은 일을 태백구지(太白衢地)에서 하십시요”하는 안배(按配)를 하였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박(船舶)을 타고 아시아(Asia) 전역을 신속파견하는 비합리적인 의무에서 해방시켜준 것이지요. 문제는 호력(虎力)께서 왕(王)에서 공(公)으로 그 사회적 칭호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王)은 ‘세습적 우선권’이 있는 직책이고, 공(公)은 이런 ‘세습적 우선권’이 없이 임명(任命)이나, 화백회의 에 의해서 옹립(擁立)되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호력왕(虎力王)께서는 산동반도라는 중요한 해상(海上)의 요충지 즉 동양병법에서 사통오달(四通五達)의 땅 으로 지는 해상(海上)-구지(舊地)에서 수해를 만났지만, 이를 이유로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께서는 똑같이 비중이 큰 육상(陸上)-구지(舊地)인 태백산의 태백-구지로 옮겨간 것에 불과합니다.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는 소도(蘇塗)의 ‘최고 명문(名門)’에 대한 존경심으로써 태백구지를 맡기신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호력왕(虎力王)께서 “엄사국(淹氵虒國)이란 나라가 과연 필요할까? 굳이 세습왕(世襲王)을 두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는 평상시의 주장을 그당시 사람들이 극력 듣지않았지만,  “억지로 엄사국(淹氵虒國)을 육부군(六部軍)에게 올려놓은 것에 대해서 하늘이 천벌(天罰)을 내렸다.”는 것을 이유로 “국왕(國王)으로부터 해방시켜 준것”이라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 나중에 상론(詳論)되는 것처럼 만후(曼后)의 어머니이신 계후(桂后)는 아시아(Asia)최고 무가(武家)인 환나국(桓那國)의 여왕(女王)이고, 그리고 그 후손인 환나국(桓那國)의 왕실(王室)사람들은 최고급의 경호무사(警護武士)인 동시에 ‘환나(桓那) 벅수군’의 사령관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권력욕이 없이 ‘무장의 길’을 가는 그런 왕실이었던 것입니다.

 

고구리(高句麗)의 3대가 모두 이 환나국(桓那國) 왕실에 대해서 절대적인 빚을 지었고, 따라서 이들 가계(家系)는 그당시로써 최고의 존경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토록 만후(曼后)의 가계(家系)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고, 또한 비류왕(沸流王)과 벽라후(碧蘿后)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대 때 사람들은 엄사국(淹氵虒國)을 ‘다스리는 세습적 우선권’을 환나국(桓那國)과 비류왕(沸流王)의 피가 섞인 후예(後裔)가 계속 이어가길 간절히 원(願)했으리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들 가계(家系)가 계속 모든 배달화백의 최종 엔딩-룰(ending-rule)을 엄사수(淹氵虒水) 게임(game)을 제수(濟水)에서 마치 고주몽(高朱蒙)-추모(芻牟)가 엄리대수(奄利大水)를 넘는 것처럼 계속 재현(再現)해 주길 바랐고, 이들이 배달화백을 지키는 육부군(六部軍) 상위에 실질적이든 상징적이든 계속 있기를 바랬던 것이지요.

그 당시 사람들이 “아니 소도(蘇塗) 최고의 명문(名門)에서 엄사국(淹氵虒國)의 ‘세습적 우선권’까지 안맡으시면됩니까?!”하고 한사코 거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관행을 하늘이 노(怒)하사 “왕(王)없이도 되지 않지 않는가?! 그렇다면 칠중하(七重河)의 수리시설도 이제 무의미하느니 ...”하고 폭우(暴雨)가 내렸고,  이에 의해서 사람들이 “정말 저 호력왕(虎力王) 말씀대로 최소한 ‘화백회의 엔딩-룰(ending-rule)만큼은 왕(王)없이 하고, 또 육부군(六部軍)이 주최로 해야하고, 나아가 모든 배달화백에 도전하는 것을 응징하는 것도 육부군(六部軍)의 이름으로 하라!!”는 하늘의 뜻이 저 폭우(暴雨)로 나타났다.”라고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신기할 정도로 비류선제(沸流仙帝)-벽라후(碧蘿后)-만후(曼后)로 이어 지는 이 세 사람만큼 관경삼국(管境三國) 초기 시절에 권력(權力)에 대해서 완벽히 초탈(超脫)한 입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천독(天毒)들에 대한 도덕적 충성심에 봉사한 사람들은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 가계(家系)에 의해서, 그 당시 최대의 모든 난제(難題)들이 쉽게 풀려나갔기 때문에, 당시대 사람들은 이 가계(家系)를 육부군(六部軍) 위에 얹혀놓으려는 엉뚱한 공감대(共感帶)에 강하게 결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가계(家系)에 대한 아시아(Asia)인들의 존경심이  3대(代)에 걸쳐 존재한 엄사국(淹氵虒國)이란 매우 신기한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호력왕(虎力王) 역시 가문(家門)의 정신으로 볼 때, 절대로 이 왕권(王權)이란 권력을 좋아했을 리 만무(萬無)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즉 대폭우(大暴雨)가 쏟아지자,  칠중(七重)-구지(衢地)를 복원할 동안 잠시 태백(太白)-구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성미에 맞지 않는 왕권(王權)도 날려보내라.”는  하늘의 뜻이 있었음을 다분히 활용하시고,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께서 용산공(龍山公)으로 삼자 흐믓해서 오늘날 서수(湑水)인 서하(西河)로 들어가는 호력왕(虎力王) 의 모습이 눈(眼)에 선할 정도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왜 만후(曼后)는 왕자(王子) 생산이 인정이 되지 않는가?” 하는 이상한 문제. 그런데,  비류선제(沸流仙帝)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은 기록 - ‘정성일님’의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 을 읽어보면, 우리는 결국 “아니... 만후(曼后)께서도 벽라후(碧蘿后)께서 훙(薨)하시기 전에 분명히 결혼을 하셨고,또 아들인 양인왕(昜人王)을 낳으신 것 같은데....왜 왕자(王子) 생산이 전혀 인정이 안되는 것있까?” 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게 합니다.

 

바로 이런 이상한 문제가 ‘정성일님’의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과 ‘고구리 사초’에서 등장하는 엄사국(淹氵虒國) 3대(代) 이야기와 얽혀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을 통해,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의 이야기를 음미해 보기로 합시다.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 이야기 - ‘정성일님’의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께서는 소도(蘇塗)의 ‘세습적 우선권’이 자기 대(代)에 한정시키려는 아주 명쾌한 의지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이 ‘정성일 님’의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七年戊申王后碧蘿薨. 王痛哀之, 群臣請納繼后, 王不忍之曰, 夫婦之道宜相從, 雖不得相從, 安忍昔未冷而忽復再娶乎. 太后聞而悲之曰吾有罪於沸流矣,

 

6년(B.C.13) 임신년 왕후(王后) 벽라(碧蘿)가 죽었다. 왕(王)이 원통하고 슬퍼하였다. 군신들이 (왕비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고) 왕후(王后)를 새로 모시도록 청하였다.

 

왕(王)이 참지 못하며 말하기를 “부부사이에는 마땅히 서로 따름이 도가 있다, 비록 따름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직 마음이 식지 않았는데 동정심도 없이 갑자기 장가들라고 하느냐?!” 라고 하였다. 태후(太后)가 듣고 슬퍼하여 말하기를 “죄(罪)는 비류(沸流)보다는 나에게 있다.”고 하였다. - 각설(却說)

 

비류왕(沸流王) 즉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는 왕후(王后) 벽라(碧蘿)를 지극히 사랑했고, 또 재혼(再婚)을 거부 하는 마음을 지녔던 것입니다. 이 ‘재혼(再婚)의 거부’는 엉뚱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 당시의 풍습은 소도(蘇塗)의 군왕(君王)과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군왕이나 모두 ‘세습적 우선권’이 있고, 비록 이권분립(二權分立)이 엄격하긴 하였으나, 한쪽의 군왕(君王)의 아들은 다른 쪽의 군왕(君王)의 후보로써 역시 진출(進出)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혼을 해서 ‘아들’을 낳지 않으면, 이런 ‘세습적 우선권’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음 뒷 이야기에서 보다시피, 비류왕(沸流王)은 딸만 셋인지라,  소도(蘇塗)의 군왕(君王)으로써 ‘세습적 우선권’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일반 천독(天毒)들에게서 옹립(擁立)되어 단군이 되게 하는 결정을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는 서로 하셨던 것이지요. 이런 말을 들은 소서노(召西弩) 태후께서는 “내아들 비류(沸流)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내가 재가(再嫁)를 해서 일어난 인연의 얽힘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다 나의 잘못이다.”고 말할 정도로 완강 하였던것입니다.

 

溫祚慰之曰母之再嫁豈其罪哉, 兄之不再娶者亦何賞?善之善哉. 盖其愛嫂之情猶有未已故也. 온조(溫祚)가 어머니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어머니가 재혼한 것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형(兄)이 재혼(再婚)을 하지 않은 것은 또한 선(善)중의 선(善)으로 숭상하고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형수(兄嫂)를 사랑하는 마음을 덮는것은  (*)오히려 이미 아님이 있는 까닭이다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 형이 하고자 하는 대로 두는 게 좋겠다).(*) - 각설(却說)

 

그런데, 온조(溫祚)는 형님이자 백제 소도(蘇塗)의 군왕(君王)이신 비류왕(沸流王)께서 “왜 형님이 재혼하지 않는가?!” 에 대한 의미를 아주 명확히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원문(原文)의 ‘猶有未已故也.’는 한국어(韓國語)로 대응시켜 ‘딱’ 뿌러지게 해석하기 힘든 구절입니다. 이(已)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흐름’을 뜻합니다.  

 

부득이(不得已)는 이런 ‘이미 일어나고 있는 흐름을 얻지 못해서’라는 뜻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앞의 유(猶)는 ‘오히려’, ‘비록’, ‘망설이며 머뭇거리다.’는 뜻의 어조사(語助辭)입니다. 그리고 미(未)는 부정어(否定語)이긴 하나, “어떤 사태(事態)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 모자르다.”는 뜻의 부정어입니다. 따라서 <猶有未已故也>를 굳이 어색하더라도, 직역(直譯)하자면,  “비록 이미 일어나고 있는 흐름이 있다 치더라도,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져 함이 그 이유입니다.”인 것이지요. 즉 온조왕(溫祖王)께서는 “형님이 재혼(再婚)을 안하는 이유가 형수(兄嫂)에 대한 애정(愛情) 즉 벽라후(碧蘿后)가 비류선제(沸流仙帝)와 꿈꾼 세계 - 소도(蘇塗)의 군왕(君王)인 선왕(仙王)이  천독(天毒)들로부터 옹립(擁立)되는것에 대한 애정(愛情)까지 있는 것이고,  이것은 어머니이신 소서노(召西弩) 태후께서 재혼을 하면서 꾼 꿈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세습적 우선권’ 때문에 소도(蘇塗)가 질곡(桎梏)되고 척족(戚族)간에 갈등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려는 이유 때문입니다.”라고 한 것이지요.

 

碧蘿以荇人王女有傾國之色, 而太妊之德孝友戀愛能使沸流 (*)徠捨于心.(*) 當大難而不惑, 南來以後親執饋事以慰將士, 夙奧夜寢疲勞, 盖忍遂得疾以薨.

 

벽라(碧蘿)는 행인국(荇人國)의 왕녀로써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아름다움이 있고 태임지덕(太任之德)이 있으며 효도(孝道)하고 우애(友愛) 있고 연애(戀愛)에도 능(能)하여 능(能)히 비류를 부릴 수 있고, 마음을 비우는 것을 위로할 수 있었다.

 

큰 어려움을 당하여 미혹당하지 않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 친히 밥을 먹이는 일을 처리하고, 이로 인하여 장사 (장졸)를 위로하였는데, 일찍부터 밤에 잠잘 때까지 나라 안의 일을 하여 피로(과로가 겹친 상태)하였는데, 덮고 참고 견디어 마침내 병을 얻기에 이르렀는데 이 때문에 돌아가셨다. - 각설(却說)

 

위 원문(原文)에서 래사우심(徠捨于心)이란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사우심(捨于心)인데, 이는 벽라후(碧蘿后)와 비류왕(沸流王) 사이에 ‘아들’이 없자, “그래 백제의 소도(蘇塗)에는 ‘세습적 우선권’이 있는 단군(檀君)보다도 천독(天毒)들께서 직접 옹립하는 단군(檀君)이 계속 되도록 하자.”하고 마음을 비우셨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비움’에 ‘아쉬움’이나 ‘슬픔’이 곁들 때에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인데다가, 애교(愛嬌)있는 아내로써 위로하였음을 래(徠)로 표현된 것입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에 (*)닥아옴(*)을 래(來)와 길(道)을 뜻하는 두인변을 합쳐서 만든 글자가 바로 래(徠)인 것이지요. 아무튼, 벽라후(碧蘿后)는 산동백제와 하남 위례성의 소도(蘇塗) 건설을 위해서 진력(盡力)하셔서 젊은 나이에 병(病)을 얻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故群臣上下莫不痛之, 春秋三十四有三女皆絶美, 馬韓王數遣使求之而不許, 以溫祚子多婁爲子, 欲傅其國, 臨薨. 謂曰我死勿更娶, (**)以若兒輩國政可委溫祚, 而內事万委女輩王許之,(**) 時王長女葱姬年已十六, 能代后視內事故也. 三月王與葱姬北巡郡邑以慰戍卒. 命甘兒入內視事. 이런 까닭으로 (*)모든 신하(臣下)들이(*)  위아래 없이 마음아파 할 수 밖에 없었다.

춘추(나이)가 34세, 딸 셋을 낳았고, 딸 셋 모두 절세미인(絶世美人)이었다. 마한(馬韓) 왕(王)이 수차례 사신(使臣)을 보내어 딸을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온조(溫祚)의 아들 다루(多婁)를 아들로 삼아, 마한이 후견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서 (다루를 보내려고 하였으나) 임하여 (벽라가) 죽었다.

 

(벽라가) 설명하여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다시 장가들지 말라, (**) 만약에 아이들의 ‘짝지음’을 통한 국제정치(國際政治)가 있게 되면  온조(溫祚)에게 맡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집안일(=소도(蘇塗))에 관한 모든 것은 딸과 ‘짝지은 자’에게 맡기라고 하였는데, 왕이 허락하였다 (**), 이때 왕의 장녀 총희(葱姬)가 이미 16살이 되었기 때문에, 능히 왕후(王后)를 대신하여 집안일을 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3월 왕(王)과 총희(葱姬)가 더불어 북쪽의 군과 읍을 돌며 이로써 경비병들을 위무 했다. 감아(甘兒)에게 들어와서 집안일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 각설(却說)

 

이 기록은 백제 초기 역사를 규명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마한(馬韓)이 아주 싱거울 정도로 백제(百濟)에 흡수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명확치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워낙 벽라후(碧蘿后) 자신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인데, 그 딸 셋 모두가 절세미인(絶世美人)인지라, 삼한(三韓)에서는 소문(所聞)이 파다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한(馬韓)왕도 이 비류왕(沸流王)과 벽라후(碧蘿后) 사이에 난 ‘딸’과 결혼하기를 그리도 원했던 것이지요. 

 

마한(馬韓)은 소도(蘇塗)의 풍습을 잘알고 있었고, 비류왕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백제의 소도(蘇塗)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려는 꿈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벽라후(碧蘿后)는 자신의 딸들이 절세미인(絶世美人)인 것까지 ‘백제의 소도(蘇塗) 개척’과 관련해서 아주탁월한 견식(見識)이 계셨던 것이지요.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   (**)以若兒輩國政可委溫祚, 而內事万委女輩王許之,(**)의 문장입니다. 이 문장의 해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배(輩)를 어찌 훈(訓)하는가?!”입니다. 배(輩)는 일반적으로 ‘무리(=군(群)’의 뜻이나, ‘짝’, ‘견주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짝지움’ 즉 결혼(結婚)의 의미로 쓴 것입니다. 따라서 아배(兒輩)는 ‘아이들을 짝지움’ 즉 ‘아이들의 결혼(結婚)’이란 뜻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의 말 국정(國政)에 대해서는 한문(漢文)이 유난스럽게 단복수(單複數)가 구분이 안되기 때문에, 이를 ‘국제정치’로 해석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  절세미인(絶世美人)들이 백제(百濟)의 소도(蘇塗)를 통해, 외국(外國)과 연결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국제정치(國際政治)가 되는 것이지요. 아무튼, 위 (**)以若兒輩國政可委溫祚, 而內事万委女輩王許之,(**)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지는 것이지요.

 

“만약 아이들의 짝지움에 대한 국제정치(國際政治) 문제가 생기면, 이는 온조(溫祚)에게 일체 위임(委任)함이 옳고, 집안일 즉 소도(蘇塗)에 관한 일은 여배(女輩) 즉 ‘딸들과 짝지은 사람’에게 위임함이 옳다.”고 하였더니 비류왕(沸流王)은 허락하였다.  이 이야기는 “온조(溫祚)에게 아이들 결혼을 위임해서 결정하도록 하되, 온조(溫祚)에게는 백제(百濟)의 소도(蘇塗)를 천독(天毒)들이 옹립(擁立) 과정 중에 있는 ‘소도(蘇塗)의 군왕(君王) 후보’들 가운데서 괜찮은 사람에게 ‘딸의결혼’을 위임케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독들이 옹립한 단군(檀君)과 온조왕(溫祖王)이 볼 때, ‘조카 딸’의 남편으로써 괜찮은 사람을 택해서 ‘국제정치’를 총괄토록 합시다.”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결국 벽라후(碧蘿后)와 비류왕(沸流王)의 이러한 결정 때문에,  마한왕(馬韓王)도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 것이지요. 왜냐?  자기자신도 마한왕(馬韓王)의 ‘세습적 계승권’을 버리지 않으면, 벽라후(碧蘿后)의 딸인 절세미인(絶世美人) 과 결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한(馬韓)은 누가 다스리지?”하는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깊히 고민하다가 “그것이야 내 아들에게 왕위(王位)를 인계하고, 다루(多婁)를 섭정(攝政)케 하면 되는 문제이고, 대신 나는 소도(蘇塗)의 군왕(君王)으로 출마(出馬)해서... 벽라후(碧蘿后) 딸인 절세미인과 결혼하고 싶다.”라는 결정을 하고, 교섭 중에 벽라후(碧蘿后)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남당유고(南堂遺稿)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진행과정을 잘 아는 온조왕(溫祖王)께서는 형님과 형수(兄嫂)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조왕(溫祖王)께 국제정치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고, 또 이런 벽라후(碧蘿后)와 비류왕(沸流王)의 백제(百濟) 소도(蘇塗)에 대한 천년지대계(千年之大計) 때문에, 마한(馬韓)이 쉽게 백제에 흡수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 아무튼, 남당유고(南堂遺稿)에 의해서 발견된 것은,  백제의 비류왕(沸流王)이 영역(領域)을 관장한 ‘아우’이신 온조왕(溫祖王)과는 달리 처음부터 백제(百濟)의 소도(蘇塗)를 당당하는 선왕(仙王)이었으며,  산동백제(山東百濟) 를 백제의 중심적인 소도(蘇塗)로써 개척하시고, 배달화백을 하는 왕성(王城)으로써 미추홀(彌鄒忽) 즉 청주(靑州) 혹은 칠중성(七重城)을 개척하섰다는 것입니다.

 

"만후(曼后)의 관계 - 벽라후(碧蘿后)만치 특이한 만후(曼后)의 가계(家系)

'비류선제(沸流仙帝), 벽라후(碧蘿后), 만후(曼后)의 나이 계산,

 

비류왕(沸流王)께서는 벽라후(碧蘿后)이외에도 또 한분의 왕후(王后)가 계셨는데, 바로 만(曼) 공주이십니다. 그런데, 벽라후(碧蘿后)께서 훙(薨)하신-돌아가심을 뜻함- 기록이 비류왕(沸流王) 7년 무신(戊申) 조(條)에 ‘王后碧蘿薨’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깐,  벽라후의 탄생하신 것은 - ‘정성일’님께서 7년과 6년을 병기하고 있어약간 혼란됨 - 34세에 훙(薨)하셨기 때문에, 결국 벽라후(碧蘿后)가 태어나신 것은 (B.C.13-34= B.C. 47)이 됩니다. 그런데, 또다른 왕후(王后)이신 만(曼) 공주는 ‘고구리 사초’ 시조(始祖) 추모대제기(芻牟大帝紀) 6년{단기2302년/ BC32}을축 정월, <계>후가 딸 <만>을 낳았다.(<桂>后生女<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분의 나이 차이는 (B.C. 47- B.C. 32=15)이 되어서 15살 차이가 납니다. 이제 우리는 만후(曼后)의 가계(家系)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후(曼后)의 가계(家系) 추적 -아시아(Asia)최고의 무문(武門)인 환나국(桓那國)

 

이 만(曼) 공주(公主)의 ‘아버지’는 추모대제(芻牟大帝)시고, 어머니이신 계후(桂后)께서는 ‘고구리 사초’ 추모대제기(芻牟大帝紀) 7년{단기2303년/BC31}경인 10(?)월 조(條)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十{十一?}月, <桂>皇后, 以創毒崩, 上慟哀之, 作<吾妻曲>. 后能騎射, <荇人>·<句茶>之戰, 扈駕立功, 中流矢於 <黃山>. 春秋三十二. 葬于<眞珠山(珠河)> 子<高婁>·<曼>公主, 皆賢.

 

10월{11월?}, <계(桂)>황후가 상처가 썩어 죽으니, 상(上)은 이를 애통해 하여, <오처곡(吾妻曲)>을 지었다.

 

황후(皇后)는 말 탄 채 활쏘기를 잘하여서, <행인(荇人)>및 <구다(句茶)>와 전쟁할 때 어가(御駕)를 뒤에서 호위 (護衛)하며 공(功)을 세우다가, <황산(黃山)>에서 흐르는 화살에 맞았었다. 춘추 32세였으며, <진주산(眞珠山) (주하)>에 장사하였다. 아들 <고루(高婁)>와 <만(曼)>공주 둘 다 현명했다. 문제는 이 계후(桂后)께서 돌아가시는 추모대제기(芻牟大帝紀) 7년의 일년 전(前)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六年乙丑, 正月, <桂>后生女<曼>.

6년{단기2302년/BC32}을축, 정월, <계(桂)>후가 딸 <만(曼)>을 낳았다.

 

출산 후(後) 10달이 되면, 만(曼)공주께서 채 한 돌이 안되셨을 때, 젖먹이고 아이를 안키우고, 직접 전쟁에 나서서 그것도 추모대제(芻牟大帝)의 어가(御駕)를 책임 호위(護衛)하시다가 화살을 맞아서 훙(薨)하신 것은 매우 놀라운 기록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계후(桂后)께서 훙(薨)하시자, 추모대제(芻牟大帝)께서 “내 아내”라는 뜻의 오처곡(吾妻曲)을 부를 정도로 애정(愛情)도 두터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궁(神弓)으로 유명한 고주몽-추모대제(芻牟大帝)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계후(桂后)를 보호 하셨다면 몰라도, 거꾸로 계후(桂后)가 고주몽의 어가(御駕)를 지키다가 화살을 맞아서 훙(薨)하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만후(曼后)의 어머니이신 계후(桂后)의 정체가 무엇인가?”하는 궁금증을 우리는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이 ‘고구리사초’ 시조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 2년 2월 조(條)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二年乙酉, - 중략(中略)  二月, <桓那國(吉林)>女主<桂婁>來降, 納爲夫人. 四月, <召>后生子<沸流>, 爲人多情而懦弱. 

 

2년{단기2298년/BC36}을유, ---중략(中略)---

2월, <환나국(桓那國)(길림)>여왕(女王) <계루(桂樓)>가 항복하여 왔기에, 부인(夫人)으로 거두었다.  

 

4월, <소(召)>후가 아들 <비류(沸流)>를 낳았는데, 사람됨은 다정(多情)하나 나약(懦弱)하였다.

 

즉 이 기록은 소서노(召西弩)께서 비류(沸流)를 낳으시기 2개월 전(前)에 환나국(桓那國)의 여왕(女王)이 투항(投降) 해왔고 부인(夫人)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순노부(順奴部)와 동부(東部), 습비부(習比部)및 환나부(桓那部)의 관계

 

고구리(高句麗)의 환나부(桓那部)는 바로 ‘고구리 오부(五部)’가운데 동부(東部)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순노부(順奴部)라고도 흔히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하는 것이지요. ‘고구리 사초’ 시조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에서는 고주몽(高朱蒙)께서 고구리(高句麗)를 열기 전(前)부터 이순노부(順奴部)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즉 오늘날 흑룡강(黑龍江)인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건너신 직후(直後)의 기록이 시조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 의 첫 기록으로 나옵니다.

 

辛巳, 夏, 與四豪(烏伊,摩離,陜父,芬奴)南來, 乘玄武(方丈大龜){渡盖斯水,一作淹水,一作奄利水}, 而至<普述(穆陵河口)>.  (*)與三賢(再思,武骨,黙居), 逐虎攘<鞨>以開<順奴(□西汗□)>(*)  是年, <禮>后生<光明>. 

 

신사{단기2294년/BC40}, 여름, 네 명의 호걸(오이,마리,협보,분노)과 함께 남쪽으로 와서 현무(방장대구)를 타고 <보술수(목릉하구)>에 이르렀다. 세 명의 현자(재사,무골,묵거)와 함께 호랑이{虎族?}와 <갈鞨>족을 쫓아내고 <순노(□서한□)>를 열었다. 이 해에 <예>후가 <광명>을 낳았다. 그런데,  그 다음에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壬午, 春, 與<樂浪>·<卒本>, 定界.  秋, 納<召西奴>, 爲妃.

 

임오{단기2295년/BC39}, 봄, <낙랑(樂浪)>·<졸본(卒本)>과 경계를 정하고, 가을엔 <소서노(召西奴)>를 거두어 비(妃)로 삼았다.

 

"<東明>元年甲申(二二九七), 二月, <卒本>王<延陀勃>薨, <召西奴>以國獻<順奴>.  <卒本>之民推上爲皇帝, 卽位於

<沸流谷><西城山(勃利縣二龍山)>.  國號<高句麗>, 建元曰<東明>. 

 

동명(東明);원년{단기2297년/BC37}갑신, 2월, <졸본(卒本)왕 &연타발(延陀勃);이 죽었다. 소서노(召西奴) &; 나라를 <순노(順奴)>에 바쳤고, <졸본(卒本)>사람들이 상을 받들어 황제로 모시니, <비류곡(沸流谷)><서성산

(西城山)(발이현이룡산)>에서 즉위(卽位)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리(高句麗)>로 하고, 연호를 세워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이 기록은 고구리(高句麗)를 건설하기 전(前)에 순노부(順奴部)를 여셨는데,  이때 세 현인(賢人)이신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黙居)의 협력을 얻어 적극적으로 호(虎)와 갈(鞨)을 쫓고, 또 이 순노부(順奴部)에 졸본국(卒本國) 을 소서노(召西奴)가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졸본국(卒本國)의 위치를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근처임에 비해서

순노부(順奴部)가 있었던 곳은 제제합이(齊齊哈爾: 치치하얼)쪽에 있었다고 추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구리(高句麗)의 오부(五部)는 ‘진한육부(辰韓六部)’와 채널링(channeling)되어 있다.

고구리(高句麗)의 오부(五部)는 결코 이것이 ‘괄할 지역’의 개념이 아니고, 오히려 ‘관할 통로(通路)’ 즉 채널(channel)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관할 통로’는 진한육부(辰韓六部)와 관련되어서 배달화백과의 관련성에서 주로 그 기능(機能)이 ‘자리매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노부(順奴部)는 어떤 진한육부(辰韓六部)와 관련성이 있을까?”

바로 습비부(習比部)와 사량부(沙梁部)입니다. 그런데, 습비부(習比部)는 화백(和白)과 신시(神市)를 주축으로 하는 순방체제(淳庬體制)에 동원되는 ‘7개의 신시(神市)의 화폐를 구성(構成)해 주는 역할’을 하는 부서(部署)인 것이지요.

 

당시대 때 동북아 최대의 재력(財力)을 지녔던 소서노(召西奴)께서 졸본국(卒本國)의 모든 재력(財力)을 ‘신시(神市)의 화폐’로 전환하여 고주몽-추모대제(芻牟大帝)에게 맡기는 일을 하였고,  따라서 “이런 일을 하는 습비부(習比部)와 통로(通路)가 있는 동부(東部)인 순노부(順奴部)에 졸본국(卒本國)을 맡겠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습비부(習比部)와의 통로(通路)’를 지니고 있는 오늘날 제제합이(齊齊哈爾: 치치하얼) 쪽의 지역에 있는 순노부(順奴部)를 열 때,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인 호(虎)와 갈(鞨)에 대해서 현인(賢人)이었던 세 사람 즉

-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黙居)가 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순노부(順奴部)와 동일시되는 환나국(桓那國)의 여왕(女王)이 바로 계후(桂后)라는 점이 우리를 몹시도 “도대체 계후(桂后)의 정체가 무엇인가?” 함에 궁금께 합니다.

 

“여왕(女王)이 나라를 바치고, 신기하게도 사랑하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은 후 이를 안전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신궁(神弓)으로 유명한 남편의 어가(御駕)를 전쟁때 마다 지키다가 전사(戰死)하다니 ??!!” 하는 역사의 기록 자체가 매우 특이한 것입니다.

 

아시아(Asia)최고 무가(武家) 환나국(桓那國)의 깊은 영향

환나국(桓那國)이란 어떤 나라인가? 이 환나국(桓那國)은 바로 오늘날 흑룡강(黑龍江)과 목단강(牧丹江)근처에 있었던 습비부(習比部)의 다양한 기능 가운데서 한 부분을 맡는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나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엄사수(淹氵虒水)게임(game)을 할 때,  ‘뿔 범’ 철가면(鐵假面)을 한 기사단(騎士團)을 운영해서 배달화백의 신성성을 보장하는 ‘역할’인 것이지요. 또한 이 배달화백을 하는 동안의 여러 물류(物流)의 운송(運送), 또 신시(神市)의 화폐를 책임 운송하는 등의 역할도 바로 환나국(桓那國)에서 했으리라고 추측되는 것입니다. 

 

이어집니다~~~

 

#고구리 사초’에 이런 언살(言殺)의 이야기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 사람에 대한 존경심 #환나국(桓那國) 왕실 후손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 #비류선제(沸流仙帝) #환나국(桓那國) 계후(桂后)의 피가 동시에 흐르는 엄사왕(淹氵虒王) #산동반도의 해상벅수군을 지휘 #비류선제(沸流仙帝)-벽라후(碧蘿后)-만후(曼后)’가 산동반도의 칠중하(七重河) 주변에서 만들어낸 일은 감동적이었던 것 #미추홀(彌鄒忽)(밀산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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