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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원효 , [元曉] 신라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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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 [元曉] 신라의 승려,

신라의 승려로 일심()과 화쟁() 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수많은 저술을 남겨 불교 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씨. 원효는 법명, 아명은 서당() 또는 신당(). 압량( : 지금의 ) 불지촌() 출신. 잉피공()의 손자이며 내마() 담날()의 아들이다. 648년(진덕왕 2) 황룡사에서 스님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650년(진덕여왕 4)에 의상과 함께 당()의 현장과 규기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하여 입당()하기 위하여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출생-사망/ 별칭/ 활동/ 분야/ 주요저서/

617 ~ 686.3.30
아명 설서당 ·설신당, 소성거사 ·복성거사
종교
《대혜도경종요》《법화경종요》

분류,

문학 > 불교체험관 > 역대고승관

속성()은 설(), 아명()은 서당()·신당()이다. 법명()은 스스로 원효()라고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한다는 뜻이며 당시 사람들은 ‘새벽[]’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617년(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쪽 율곡()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는 잉피공(, 이라고도 함)이고, 아버지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11위 내마()의 지위에 있던 담날()이다. 설총()을 낳은 뒤에 스스로 소성거사()·복성거사()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고려 숙종 때(1101년)에는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국 불교 사상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해동보살(), 해동종주()라고도 불린다.

15세 무렵에 집안의 재산을 희사()하고 출가하여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곁에 사라사()를 세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낭지()와 혜공() 등의 고승에게 불법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완산주()에 머무르며 열반종()을 강론하던 고구려의 승려 보덕()에게 열반경()과 유마경() 등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특별하게 한 명의 스승을 정해 놓고 배우지는 않았으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648년(진덕여왕 2년)에는 황룡사()에서 불경을 연구하며 수도하였다.

 

원효는 당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밤이 늦어 동굴 속에서 자게 되었어. 자다가 갈증을 심하게 느껴서 깜깜한 동굴 속에서 주변을 더듬다가 물을 발견했어. 그 물을 아주 달콤하게 마시고 갈증을 풀었지. 그런데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지난 밤에 자기가 먹은 물은 해골바가지에 고여 있던 더러운 물이지 뭐야? 우~웩! 구역질을 하면서 원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650년 의상()과 함께 현장()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에서 첩자()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였다. 661년(문무왕 원년)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 나라로 떠나려 하였으나, 배를 타러 당항성(,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으로 가던 길에서 진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왔다.

 

밤에 오래된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원효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서당화상비’ 이외에 중국의 송() 나라 때에 찬녕()이 편찬한 <송고승전()> 등에도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원효불기()’ 이외에 ‘낭지승운보현수()’, ‘사복불언()’, ‘의상전교()’, ‘이혜동진()’,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調), ‘광덕엄장()’ 조() 등에 원효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분황사() 등에 머무르며 불경의 연구와 <화엄경소()> 등의 저술에 힘쓰기도 하였으나, 이후, 655년에서 660년 사이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뒤에는 스스로 소성거사(), 복성거사()라고 칭하며 서민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으로 도구를 만들어 이를 ‘무애()’라 하였다. 

 

이 실계()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무애가()>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는 등 대중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뱅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자리()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이타()를 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상구보리 하화중행'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애()는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 )’는 화엄경()의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각지를 떠돌며 불교의 교리를 쉬운 노래로 만들어 전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원효의 활동으로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만년에는 경주의 고선사()에 머무르다가,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라 애장왕() 때에 그의 후손인 설중업()이 당시 실권자였던 각간() 김언승(, 뒷날의 헌덕왕)의 후원으로 고선사()에 서당화상비()를 세웠다. 이 비석은 오늘날에도 일부가 훼손되어 전해지는데, 원효의 전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고려 명종() 때에도 분황사에 화쟁국사비()를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사진자료 : 범어사 미륵암 벽화]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나 <대승기신론소> 등에서 볼 수 있는 일심사상() ·무애사상() ·화쟁사상() 등은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이론을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공헌하였으며,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시키려 한 대저술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일생을 참선과 저술, 대중교화에 힘쓰던 그는, 686년(신문왕 6) 3월 30일 혈사()에서 나이 70세, 법랍 38세로 입적하였다. 뒤에 1101년(고려 숙종 6)에 대성화정국사 ()라 시호했다.

 

원효의 사상 - 깨달음을 얻기까지,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와 의상
661년,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마저 점령하기 위해 한창 통일 전쟁을 치르고 있던 때였어. 배움에 목말라 있던 신라의 승려 원효와 의상은 부푼 꿈을 안고 선진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어.

 

당시 당나라에는 현장 법사가 불교의 전성기를 이끌어가고 있었어. 당나라 불교계의 새로운 바람은 신라에도 전해져서 신라의 많은 승려들은 당나라 유학을 원했고, 원효와 의상 또한 현장 법사 밑에서 공부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거야. 이들은 오직 부처를 향한 마음으로 경주를 출발했어.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어
두 사람은 몇날 며칠을 걸어 충청남도 직산 지방에 이르렀어. 어두워져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이때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게 되넜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은데, 어이하여 어제는 달디단 물이었던 것이 오늘은 구역질을 나게 하는가? 그렇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내 마음일 뿐이다. 진리는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원효는 그토록 원했던 깨달음을 해골물에서 얻었다.

 

원효는 경주로 돌아와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책 쓰기에 몰두했어. 그는 일생 동안 150여 권의 책을 세상에 남겼다. 그중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명하다.

 

불교의 대중화

영원한 자유인 원효,요석 공주와 결혼해 아들 설총을 얻다,
원효의 삶은 파격 그 자체였다. 원효의 연구와 저술 활동을 지원해 준 사람은 요석 공주로 알려져 있어. 요석 공주는 태종 무열왕의 둘째 딸로 과부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터서 요석 공주는 원효의 아이를 가지고 말았다. 그 아이가 커서 신라의 대학자가 된 ‘설총’이다.

 

설총은 학문이 뛰어나 많은 유교 서적을 번역하고, 학교를 세웠어. 또 이두라는 글자를 정리해 통일 신라의 문화를 다듬었다.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불교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설총을 낳은 후, 원효는 스스로 계율을 어겼다고 하여 승려복을 벗고 자신을 ‘소성거사()’라고 했다. 그리고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본떠서 바가지를 만들어 무애가를 부르며 신라 땅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불교를 전하러 다녔었다.

 

원효는 가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돌에 글을 새기기도 하고, 가야금과 악기를 들고 사당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는 등 세상에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어. 이러한 삶을 살면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

 

그럼으로써 백성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 백성들과 함께 하려고 했어. 그는 ‘나무아미타불(부처님께로 돌아간다)’만 외우면 누구나 극락에서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설교하며 불교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확산시켜 나갔다.

 

그래서 오두막집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 같은 염불 한마디는 할 줄 알게 되었어. 이 모두 원효의 노력 덕이었지.

 

화엄학의 대가 - 화엄종을 창설한 의상,

의상은 신라의 진골 출신으로 앞길이 창창하게 보장된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20세 전후의 나이에 승려가 되었어. 의상은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중국 화엄종의 대가인 지엄의 밑에서 10년간 화엄학을 공부했어. 그리고는 671년에 신라로 돌아와 신라 땅에 화엄종을 뿌리내렸다.

 

원효가 대중에게 다가가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불교를 전했다면, 의상은 자신의 제자와 교단 조직을 가지고 불교를 전했어. 또한 원효가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서 많은 저술을 남긴 대저술가였다면, 의상은 오직 화엄학만을 공부했고 이의 포교에 주력하여 《화엄일승법계도》 외에는 이렇다 할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60권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의 《화엄경》을 210자의 짧은 시로 정리한 《화엄일승법계도》를 보면 의상이 화엄학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으며, 그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어.

더 알아보기

일심사상과 화쟁(和諍)설화 사상,

원효의 사상의 핵심은 ‘일심()’과 ‘화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도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대승기신론소)'며 만물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삶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종파들의 서로 다른 이론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을 좀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것을 ‘화쟁사상()’ 또는 ‘원융회통사상()’이라고 한다.

 

화쟁 사상,

원효는 마음먹기에 따라 썩은 물도 꿀물처럼 느껴진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통일 신라의 불교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낸 거라고 볼 수 있다.

원효대사 초상, 

일심()’은 원효 사상,

‘일심()’은 원효 사상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원효는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마음의 근원이 바로 ‘일심()’이다. 원효에 따르면 일심은 모든 법(), 즉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거이며, 일심이 구현된 세계가 바로 정토()이다. 일심은 평등하고 무차별하며, 일심에서 보면 진여()와 생멸()이 다르지 않다. 따라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다는 것은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치고, 차별 없이 사랑하는 자비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스리는 중생은 반드시 큰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열반경종요)

‘화쟁()’은 다양한 불교 이론들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여러 불교 이론들이 서로 다투어서 쟁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집착 때문이라며, 마음의 근원을 향하면 쟁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심’과 ‘화쟁’을 강조한 원효의 사상은 당시 중국 불교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중관론()과 유식론()의 대립을 독창적으로 종합하는 의미를 지녔다.

 

원효는 발생과 소멸이 없는 진여()와 상대적이고 현상적인 생멸()이 모두 일심()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며, 이것들이 하나이면서도 둘이며 둘이면서도 하나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연기()’를 중심으로 하는 중관론과 ‘마음의 본체인 식()을 떠나서는 어떠한 실재()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청정한 마음을 강조하는 유식론의 대립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원효의 사상은 중국의 법장()과 징관()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불광산(佛光山) 척판암,

척판암은 673년 신라 문무왕 1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담운사(談雲寺)라 하였다. 그 뒤 원효대사의 이적으로 이름을 척판암(擲板庵)으로 바꿨다고 한다.

척판암에 얽힌 원효대사의 흥미로운 이야기는『송고증전(宋高憎傳)』에 아래와 같이 전해온다.

 

원효(元曉)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수도하였다. 어느 날 멀리 중국 땅 장안성을 투시하였더니, 마침 그곳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 대웅전에서 1천여 명의 승려들이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이 예불하는 광경을 보고 합장을 하던 원효는 대웅전의 대들보가 썩어서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원효는 위급한 사태를 알리고자 옆에 있던 소반에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이라는 여덟 자를 적어서 하늘 높이 힘껏 던졌다. 던져진 소반은 운제사의 대웅전 앞뜰 위에서 윙윙거리며 공중에 맴돌았다.

막 예불을 마친 승려들은 이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려고 모두가 재빨리 대웅전 앞뜰로 나왔다. 이때 굉음과 함께 대웅전이 폭삭 무너지고 공중을 맴돌던 소반도 땅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승려들은 땅에 떨어진 소반에 적힌 글자를 보고는 자기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신라의 원효임을 알게 되었다. 장안성 내에 있던 1천여 명의 승려들은 이로 인하여 길을 떠나 양산군 천성산 석굴에 있던 원효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원효의 오묘한 법문과 가르침을 받고서 모두 성인(聖人)이 되었으며, 모두가 끝내 이곳에서 열반을 하였는데 열반한 육신은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이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원효 화쟁 사상의 총서 격인 『십문 화쟁론(十門和諍論)』이 인도로 전해져 진나계에 의해 범어로 번역되기도 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1천여 명의 승려들이 원효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다는 다소 과장된 이야기가 첨가되면서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이 산은 1천 명의 성인들이 나왔다는 뜻으로 천성산(千聖山)이라 하였고 천성산 바위들은 그 성인들의 변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원효가 여덟 자를 적은 소반을 던졌던 곳에 암자를 지어 척판암 또는 척반암이라 하였고, 그 아래쪽에 큰절을 세워 장안사(長安寺)라 하였다. 창건 이후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938년에 경허(擎虛)가 중수한 후 장안사의 부속 암자로 있다가 최근에 독립하였다. 1972년 경운이 3층 석탑을 세우고 부처 사리 5과를 봉안하였다.

 

불광산은 장안사에서 출발하여 백련암을 거쳐 척판암 옆길로 오르는 숲길 5km,

 

장안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에 원효대사가 척반암과 함께 창건한 천 년 고찰이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 효종 5년에 중건된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 응징전, 산신각이 불광산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장안사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원효대사의 혜안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는 척판암이 나온다.

 

저술,

원효는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 한편, 불교 경전의 연구에도 힘을 기울여 당시 전해진 거의 모든 경론()들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원효가 남긴 저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모두 100여종 240여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가운데 일부만 전해진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저술은 <금강삼매경론()>3권, <기신론별기()>, <대승기신론소()>, <대승육정참회()> 등이 있고, 이 중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은 중국의 고승들도 ‘해동소()’라 칭하며 즐겨 인용되었다. <금강반야경소()>3권· <화엄경종요()>· <유마경소()>3권·<해심밀경소()>3권· <범망경소()>2권· <범망경보살계본사기 ()>2권· <발심수행장()>1권· <섭대승론소()>4권· <대승기신론종요 ()>1권· <초장관문()>2권· <반주삼매경소()>1권· <아미타경소()>1권· <무량수경소()>1권· <삼론종요()>1권 등 9부 240여권에 달한다. 이는 양으로도 남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하여 당나라의 석학들이 그의 저술을 '해동소()'라고 칭송했다.

 

특히 <금강삼매경론>은 원효가 <금강삼매경>에 대해 주석을 한 것으로, <삼국유사>에도 ‘삼매경소()’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상과 원효와의 관계?

의상과   원효

의상과 원효는 여덟 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다. 나이가 위인 원효는 원래 설씨로 6두품 출신이었고, 의상은 진골 출신이었어. 성격도 달라서 원효는 자유분방하고 천재적 기질이 있었지만, 의상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고 계율을 지키는 데 철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존경하는 단계를 넘어 거의 형제처럼 지냈어. 두 사람 모두 상대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러한 인물들이 신라 불교를 이끌었기에 신라 불교가 세계적인 불교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만드는 이가 짝을 지어 같은 시대를 산 경우가 더러 있다. 그들은 때로 협력자이고 때로 라이벌이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같았다. 원효(, 617~686)와 의상(, 625~702)은 그 같은 예의 하나이다. 저 낮은 자리에서 바보처럼 우직하게 낮은 자와 함께 한, 두 사람. 그들은 바보 성자()의 전통을 연 이들이기도 하였다.

 

전국의 오래된 사찰치고 원효와 의상 이름 들어가지 않은 곳이 드물다.원효와 의상이 창건했다는 절을 합쳐 셈하다 보면, 축지법을 쓰지 않고서 이렇게 먼, 이렇게 많은 곳을 다녀갔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이것은 역사상 이 두 승려의 영향력을 웅변한다. 우리 역사의 중요한 정신적 축을 지탱하는 불교이지만, 그 축은 다시 원효와 의상이라는 두 걸출한 승려에 의해 떠받들어지고 있다 해서 과언이 아니다. 역사의 인물이 수없이 많지만, 한국 불교 역사의 거의 전부라고도 할 만한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다 갔다는 점도, 다른 시대를 산 사람에게는 약간 섭섭한 일이다.

원효의 판비량론, 일본 교토 오타니 대학박물관 소장,

[송고승전]에 따르면, 두 사람은 당주()의 경계에 이르렀다. (‘당주의 경계’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음) 배를 얻어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하는데, 주변은 어두워지고 큰비를 만나 길가의 토굴에 겨우 몸을 숨겼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곳은 무덤이요, 그들이 자고 난 옆에는 해골바가지가 뒹굴고 있지 않은가? 목마른 원효가 그 해골바가지에 괸 물을 마셨다는 말은 아무래도 후대에 첨가된 것일 뿐 [송고승전]에는 그마저 나오지 않는다. 또 흔히 원효가 거기서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고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고 이제 중간이다. 날이 밝았으나 비는 계속 내리고 길에는 물이 가득 고여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두워지기 전 미리 헌 집을 한 채 물색해 잠을 청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도 원효는 종내 잠을 이루 수 없었다. 지난밤 토굴에서 자던 일이 자꾸만 떠오르고, 눈앞에 귀신의 눈동자가 자꾸만 오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이 샌 다음에야 원효는 탄식하며 의상에게 말한다.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송고승전]에서

원효는 바랑을 메고 발길을 돌렸다. 이 순간 원효는 이미 원효였다. 저 유명한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오.’라는 구절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송고승전]의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의상의 전기이다. 원효의 득오() 순간을 부각시키자는 목적이 아니었다. 원효가 돌아간 길을 의상은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라고, [송고승전]의 마지막 대목은 적고 있다. 의상은 그런 사람이었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원효와 달리 의상은 귀신 따위로 마음을 흩뜨릴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원효와 의상은 서로 가는 길이 분명히 달라졌다. 물론 의상의 굳은 마음을 칭송하고자 [송고승전]은 굳이 이 일화를 집어넣었겠지만, 그렇다고 원효를 낮춰보자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원효에게는 직관()을 중시한 원효의 길이, 의상에게는 통철()을 중시한 의상의 길이 있었다.

당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부석사의 무량수전(국보 18호) 

참조항목,

귀명삼보, 대혜도경종요, 무량수경종요, 미륵상생경종요, 발심수행장, 법화경종요, 보살영락본업경소, 십문화쟁론, 원효대사전집, 원효불기설화, 유심안락도, 이장의, 일심, 화쟁

 

역참조항목,

금강삼매경론, 기신론별기, 대승기신론소, 대승육정참회, 대한불교원효종, 무애가, 반야심경소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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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 > 종교 > 불교 > 한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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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원효 [元曉] (두산백과)

[범어사 미륵암 벽화] 사진자료, 

[원효대사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효 [元曉] - 불교계의 새 바람 (한국사 개념사전, 2010..,)

[철학사전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인물한국사

[원효와 의상 - 신라 불교의 전성기를 연 승려 (인물한국사)

[당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부석사의 무량수전(국보 18호)
[Hyolee2 at en.wikip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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