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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을 바탕으로 발전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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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을 바탕으로 발전 천도교,

동학을 바탕으로 발전…3대 교주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칭…제57대 손범두 교령

천도교(天道敎)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대신사에 의해 1860년에 창립된 한국의 신종교로서 동학(東學)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대신사는 1860년 4월5일 경북 경주 용담(龍潭)에서 동학을 창도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외세에 의해 진압된 뒤, 제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신사가 처형되자 도통은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성사에게 전수되었다. 3대 교주인 의암성사가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해 성립시켰다. 1908년엔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상사가 4대 교주가 되어 대를 이었다.

 

의암성사는 초기에 정치와 종교 간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적인 시도를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일제에 의해 역이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정교(政敎)분리의 원칙을 내걸고 새로운 교리와 체제를 확립하였다.

 

천주(天主) 즉 한울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지상천국건설(地上天國建設)을 이상으로 하며 성(誠)·경(敬)·신(信)을 도덕의 근본으로 하고 시천주(侍天主)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 그리고 오관(五款: 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 등의 수행 방법이 있다. 동학·동학교 또는 성도교(聖道敎)라고도 했다. 전제정치의 폭압에 대한 대신사의 강력한 개혁의지 활동 이래 동학·천도교는 동학혁명, 개화운동, 3·1독립운동, 신문화운동 등 사회개혁과 민족자주력 배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세 교조 수운대신사와 창도(唱道) 정신,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새로운 가르침은 당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꿈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동학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의 이름은 최제우(崔濟愚)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字)는 성묵(性默)이다. 아명은 복술(福述), 관명(冠名)은 제선(濟宣), 호(號)는 수운(水雲)이다. '제우(濟愚)'는 35세 되던 해에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조선 말기의 종교사상가로 민족 고유의 경천(敬天)사상을 바탕으로 유(儒)·불(佛)·선(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사상을 융합해 천도교의 시원인 동학을 창시하였다.

 

대신사는 포덕(布德)전인 36년(1824) 10월28일 오늘의 경주시(慶州市) 현곡면(見谷面) 가정리(稼亭里)에서,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영남(嶺南) 일대에 그 문명(文名)이 높은 가난한 선비 최옥과 재가녀(再嫁女)인 한씨(韓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과 재가녀의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 등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대신사는 일찍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높은 뜻을 지니고, 세상의 많은 가르침을 얻고자 천하를 돌아다녔다. 이러한 대신사의 젊은 시절 구도(求道)를 위한 행각을 천도교에서는 ‘주유팔로(周遊八路)’라고 부른다.

 

주유팔로를 통해 세상의 많은 가르침과 만나보았지만, 궁극적으로 이러한 기존의 가르침들은 세상의 어지러움을 구할 수 있는 진정한 도(道)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의와 낙망 속에서 세월을 보내던 이 무렵에 대신사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대신사가 자신의 처가 동네인 울산에 머물고 있던 어느 봄날이었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근심하며 울산 인근의 여시바윗골에 있는 정자를 찾아 소일을 하던 대신사는 어느 봄 날 신비한 이인(異人)을 만나 천서(天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 천서의 내용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 안에는 ‘하늘에 기도를 하라(祈天)’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즉 세상을 구할 도를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구하라는 그러한 가르침으로 이해가 된다. 이후 대신사의 수행방법은 세상을 떠돌며 가르침을 구하던 행각을 그치고 하늘에 기도하는 수행으로 바뀌게 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천도교에서는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부른다. 즉 을묘년(1855)에 하늘에서부터 천서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후 대신사는 양산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 또는 적멸굴(寂滅窟) 등지에서 수행을 하였고, 마침내 고향인 경주 현곡면 구미산(龜尾山)에 위치한 용담정(龍潭亭)에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종교체험을 통하여 대신사는 한울님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질병에서 구하라는 ‘영부(靈符)’와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라는 ‘주문(呪文)’을 받았다. 이때가 포덕 원년(1860)인 경신년 4월5일이다. 따라서 천도교에서는 이 날을 천도교 창도일(唱道日)로 삼아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로 기리고 있다. 기존의 모든 종교들은 창도자의 탄생일을 기준 삼아 그 종교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데 비해서 천도교는 대신사가 득도(得道)를 한 그 날을 기준 삼아 가장 큰 기념일로 삼고 있다.

천도교 1세 교조 수운대신사,

대신사는 득도한 이후, 거의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수행과 수련으로 보냈다. 이러한 수행 기간을 거친 후 포덕 2년(1861) 신유년 6월에 이르러 비로소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포덕(布德)을 시작했다.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새로운 가르침은 당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꿈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게 된다.

 

그래서 대신사가 머무는 경주 용담정(龍潭亭)에는 연일 도에 입문하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북적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포덕과 세상 사람들의 많은 관심으로 인하여 대신사는 경상도 인근 유생(儒生)들의 지목(指目)과 관청의 탄압을 받게 되고, 포덕 2년 11월에는 마침내 용담을 떠나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작은 암자 은적암(隱跡庵)으로 피신하여 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이 곳 은적암에서 대신사는 동학의 중요 경전인 논학문(論學文)·권학가(勸學歌)·도수사(道修詞) 등을 저술하였다. 한 겨울을 보내고 다시 경주 용담으로 돌아왔으나, 지속되는 관의 탄압과 함께 포덕 4년(1863) 12월10일 마침내 조선조 조정에서 파견한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 일행에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포덕 5년(1864) 3월10일 대구 장대(將臺)에서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명을 쓰고 참형을 당하였다. 대신사는 도를 지키기 위하여 순순히 체포의 오라를 받고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천명(天命)을 지키기 위하여 참형의 형장으로 스스로 올라가 41세의 나이로 순도(殉道)하였다.

 

이와 같이 대신사는 당시 무너지고 있던 조선조의 전통 질서와 동양을 침범하던 서양의 근대적 질서를 동시에 비판하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신념체계(信念體系)로서의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대신사에 의하여 창도된 동학은 당시 붕괴되고 있는 봉건적인 질서와 밖으로부터 죄여오는 외세(外勢)의 침략에 의한 억압을 매우 주체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 체계를 이룩하려고 했던, 우리의 역사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생적(自生的) 근대’의 한 모습이기도 했었다.

 

이와 같은 동학은 창도와 동시에 안으로는 조선조의 봉건적인 질서와 충돌하게 되고, 밖으로는 서구의 침략과도 충돌하는 매우 지난(至難)한 고통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듯 고난의 길을 걷던 동학은 한때 조선조 사회가 지니고 있던 봉건성과 서구 열강(列强)의 침략이라는 탄압과 무력에 의해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순도(殉道)를 하게 되고, 한때 붕괴의 위기까지 맞이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동학이 지닌 자생적 근대에의 열망을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조 사회, 나아가 동양사회는 더욱 가중되는 혼란과 붕괴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서구 열강에 의해 오랜 세월 침탈을 당하는 뼈아픈 대가를 치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혼란과 위기는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이 지난 오늘에도 실은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즉 19세기 이후 새로운 모더니티로 제기되었던 양대 이념인 사회주의 체제도 무너졌고, 또한 자본주의 역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진정 살아갈 바의 올바른 향방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양식 있는 동서양의 많은 사상가들은 이러한 오늘의 시대적 현상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신사는 이미 150여년 전, 이러한 ‘위기와 절망’을 매우 선지적(先知的)으로 예감하고, 이에 대안이 될 수 있는 동학을 창도하였다.

 

대신사는 먼저 인류의 역사를 ‘우주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 인류의 역사를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나아가 우주적인 순환사(循環史)의 관점에서 인류는 이제 막 선천(先天)의 마지막 시대에 서 있음을 설파하였다. 그래서 인류는 선천의 마지막 징후인 혼란과 타락에 빠져 있으며, 이는 곧 후천(後天)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필연적인 모습임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당시 19세기 중엽이라는 문란한 조선조의 사회 모습을 대신사는 선천의 마지막 징후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대신사는 이와 같은 징후가 비단 조선조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공동으로 겪고 있는 현상임을 갈파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선천의 시대를 보내고 새로운 후천의 시대를 인류가 매우 주체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당시 사회에 팽배되어 있던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타락한 심성(心性)을 ‘한울님 마음’으로 ‘개벽(開闢)’할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어느 의미에서 대신사가 지적한 그 각자위심(各自爲心)이 어느 때보다도 극심하게 팽배되어 있는 시대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 시대는 사회적으로, 이념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지극한 혼란을 겪고 있고, 그러므로 대신사가 주창(主唱)한 ‘다시 개벽’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시대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아 대신사의 가르침은 다만 ‘지난 우리의 역사 속’에 있었던 그러한 가르침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또 절실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후천개벽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편 대신사를 천도교에서는 1세 교조(敎祖)라고 부른다.

 

종지(宗旨)를 통해서 본 천도교

천도교의 종지(宗旨)가 되는 ‘인내천(人乃天)’은 대신사의 ‘시천주’에 그 연원을 둔 것으로, 천도교는 인간과 자연과 신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우주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인내천’은 곧 ‘사람이 이에 한울’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종지는 천도교의 3세 교조인 의암성사 때에 부각된 것으로, 오늘까지 천도교 종단(宗團)의 종지가 되고 있다. 이 ‘인내천’은 의암성사 시대에 정해진 종단의 종지이지만, 대신사가 천명(闡明)한 ‘시천주(侍天主)’에 그 근원을 둔 것으로, 천도교의 종교적 핵심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대신사는 포덕 1년(1860) 4월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하여 한울님이라는 절대적 신이 다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 몸에 주체적으로 모셔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과 함께 ‘내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의미의 ‘시천주(侍天主)’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요체로 삼게 된다. 따라서 선천(先天)의 기성종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현세와 천당·지옥이 다른 차원의 공간이나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극락과 연옥·지옥이 별도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 모심’을 마음으로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에 따라 그 삶이 천당도 되고 또 지옥도 된다는 것, 이것이 곧 그 요체인 것이다. 아울러 한울님이라는 신은 어디 먼 초월적인 공간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몸에 모셔져 있으며, 동시에 이 우주에 편만(遍滿)되어 있다는 것이 대신사의 가르침이다.

 

대신사가 창시한 동학은 서학(西學)에 대립된 것으로서,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논학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의 21자로 나타냈다. 이는 “지극한 기운이 오늘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빕니다. 천주(天主)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라는 뜻이다.

 

‘지기금지(至氣今至)’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대신사는 기일원론(氣一元論) 사상에 기초해 있다. 우주 만물은 모두 지극한 지기(至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의 정성으로 그 지극한 기(氣)를 몸과 마음에 모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곧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에 따라 하늘과 사람이 일체화될 수 있다는 것으로, 대신사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그의 사상에서 천주(天主)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 천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인간은 신분이나 빈부(貧富), 적서(嫡庶), 남녀(男女) 등의 구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면 모두 군자가 될 수 있다. 시천주(侍天主)의 방법으로는 마음을 잃지 않고 기를 바르게 하는 ‘수심정기(守心正氣)’를 강조하였다.

천도교 제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득도한 경주 용담정,

대신사는 또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을 제시하였다. 인류의 역사를 크게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했으며, 혼란에 가득 찬 선천의 종말기를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만을 위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5만년에 걸친 선천의 시대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벽했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고취하였다. 또한 “서학과 서양 세력이 이기주의에 기초한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며 “동학에 의해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대신사는 무위이화(無爲而化)에 따른 조화를 강조하였다. 자연과 인간 세계의 조화는 정해져 있다. 곧 음(陰)과 양(陽)이 조화 속에서 사계절의 변화가 나타나듯이, 인간 사회의 질서도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이로써 대신사는 사회 질서의 개혁에 대한 민중의 희망을 고취하였다.

 

이와 같은 대신사의 가르침이 집약되어 나타난 단어가 곧 ‘시천주’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시천주’라는 말씀은 천도교의 종교적 가르침을 나타내는 핵심 어휘가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시천주의 가르침은 종교적 차원을 뛰어넘어 대사회적(對社會的)인 면에서, 모든 사람들이 본원적으로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본원적인 면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근원적 평등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양반과 천민이 사회적 신분제도에 의하여 차별되고 있던 당시 조선조의 사회제도로 볼 때에 이러한 대신사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근원적 평등주의는 법 앞에서 평등을 강요하는, 또는 신 앞에서 평등을 강요하는 서구적 평등주의를 뛰어넘는 것으로, 새로운 개벽의 지평을 여는 매우 자생적이며 근원적인 평등주의가 아닐 수 없다.

 

대신사에 의하여 천명된 ‘시천주 사상’은 해월신사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시천(人是天)’으로 표명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회적 윤리로 발전, 실천되게 된다. 따라서 천도교는 인내천의 종지와 함께 바로 이 사인여천을 사회적 실천윤리로 삼고 있다. ‘시천주’에서 ‘인시천’으로, 나아가 ‘사인여천’의 윤리로 거듭 뻗어나간 천도교의 가르침은 의암성사 때에 이르러 ‘사람이 이에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을 내놓게 되었고, 이 인내천을 천도교의 종지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이에 한울’이라는 ‘인내천’을 종지로 삼았다고 하여 천도교가 인간지상주의(人間至上主義)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한울이듯이, 우주의 모든 만유(萬有) 역시 한울 아님이 없다는 것이 곧 천도교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해월신사의 말씀과 같이 “저 나무 사이에서 울고 있는 새소리 역시 시천주의 소리니라”는 가르침처럼 이 우주에 가득한 만유(萬有) 역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르침을 체득하게 되면, “한울님을 공경하듯이(敬天), 사람도 공경을 해야 하며(敬人), 나아가 만유도 이와 같이 공경해야 한다(敬物)”는 해월신사의 삼경사상(三敬思想)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삼경사상 역시 시천주의 또 다른 표현이며, 인내천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천도교의 사상은 서구의 근대화 이후 대두된 인간중심 사상이 가지고 있는 폐해를 뛰어넘어 진정한 우주공동체의 삶을 열어갈 수 있는 사상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천도교의 종지가 되는 ‘인내천’은 대신사의 ‘시천주’에 그 연원을 둔 것으로, 인류가 지향하는 우주공동체의 삶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하겠다. 곧 천도교는 후천개벽의 새로운 차원의 시대를 맞아, 인류의 가장 큰 숙원인 진정한 평등과 자유가 넘쳐나는, 오직 인간들만이 아닌 인간과 자연, 나아가 인간과 자연과 신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우주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천도교가 궁극적인 종교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지상천국 건설’이기도 한 것이다.

 

천도교의 교리와 사상

천도교의 교리는 수운대신가가 지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근거하고 있다. 《동경대전》은 포덕문(布德文)·논학문·수덕문(修德文) 등 수편의 글로 되어 있고, 《용담유사》는 교훈가·안심가ㆍ용담가(龍潭歌)ㆍ도덕가(道德歌)ㆍ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ㆍ권학가(勸學歌) 등의 가사(歌詞)로 되어 있다. 이 글들의 내용은 그 정리가 대신사 순도 후 20년 뒤였다는 데에서 약간의 첨가와 삭제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천도교의 교리사상은 이들 글에서 찾게 된다. 천도교 교리의 핵심은 천주, 지기, 시천주와 사인여천, 수심정기, 성ㆍ경ㆍ신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아울러 성신쌍전(性身雙全)과 교정일치(敎政一致)를 강령으로 하고 지상낙원 건설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천주(天主)

천주(天主) 곧 ‘한울님’은 천도교의 신앙의 대상이요 윤리의 표본이 되는 개념이다. 한울에서의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울’은 우리(울타리)를 뜻하는 동시에 무궁무한의 우주를 의미한다. ‘님’은 이 존재에 대한 인격화이다. 결국 한울님은 이 우주에 충만되어 있는 신성(神性)에 대한 지칭인 것이다. 대신사의 한울은 부분에 대한 전체적 의미로서 범신적이고 만유신관으로 풀이된다. 이 한울의 속성은 무궁하다. 무궁한고로 유일이다. 일원적(一元的) 자존(自存)이다. 다수 중의 일(一)이라는 말이 아니요 모든 다수를 포용하는 일인 것이다. 즉 유일이다.

 

타(他)에 의거치 아니하고 존재의 근거가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한울은 자체 본성에 존재의 근거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이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필연적 존재인 것이다(이돈화, 《신인철학》). 수운의 한울 즉, 신을 범재신관(汎在神觀)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범재신이란 유신론과 범신론을 극복한 자의식적인 생존으로서 세계 속에 내재하며, 영원무궁한 존재 자체이면서도, 신적 상대성을 가지고 있는 시간적 생존이다(김경재, 〈최수운의 신개념〉). 우주 자체로서 세계 속에 영원히 생존하며 살아있는 존재 그 자체가 바로 대신사가 본 한울인 것이다.

 

지기(至氣)

대신사의 지기(至氣)는 천주의 또 다른 이름으로 천주가 작용하는 모습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그가 수행방법으로 제시한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동경대전》 논학문)라는 주문(呪文)속에 천주와 지기가 언급되고 있다. 이 천주 즉 한울님과 지기는 표리적 관계로 대신사가 오득(悟得)한 동학사상의 2대 골격을 이루는 개념이다. 대신사는 ‘지기는 허령창창(虛靈蒼蒼)하여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사불명(無事不命)한 보편자로서의 혼원일기(混元一氣)’(《동경대전》 논학문)라 했다.

 

이렇게 우주의 본원적 존재인 천주의 작용을 ‘지기(至氣)’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한울님이라 하면 우주본체의 전체적인 표현이 되고 ‘지기’라고 하면 우주본체의 본질을 이적(理的)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대신사에 있어서 기는 결국 우주의 본질인 동시에 삼라만상 개체의 현상이다. 삼라만상 생멸동정(生滅動靜)의 변화가 모두 기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대신사의 지기는 일대생명적(一大生命的) 활동이요, 활동력의 단원(單元)으로서 모든 존재를 생성시키는 조화 그 자체며 우주 안에 가득 찬 모든 것들을 조화시키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원리로서 독립 자존체이며(이돈화, 《신인철학》) 대생명체인 것이다.

 

시천주(侍天主)와 사인여천(事人如天)

시천주(侍天主)란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고 받든다는 의미이다. 해월신사는 글자 ‘시(侍)’자를 풀이해 ‘모신다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기 옮기지 못할 것임을 아는 것이라’(《해월신사법설》 영부ㆍ주문)했다. 아울러 시천주는 한울님을 내안에서 키우는 것(養天主)이다. 시(侍)란 생존적 섬김, 곧 양이다. 모심은 단순한 소유, 보관과 구별된다.

 

모심은 살아계시는 것을 섬김이다. 이는 고정적 보존이나 현상유지가 아니라 키움(養)이다. 따라서 대신사의 시천주가 해월신사에서는 양천주(養天主)가 된다. 스스로 한울님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암성사의 체천주(體天主)이다.

 

사인여천(事人如天)이란 인내천(人乃天)이니 사람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 하라는 것이다. 인내천이란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의암성사 시대에 나온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으나 물론 대신사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천심즉인심(天心卽 人心)’(《동경대전》 논학문), 시천주에 근거를 두고 있는 수운사상인 것이다. 인내천 사상은 인간은 누구나 다 각자의 성 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고 이 한울님을 스스로 발견하고 깨치면 자기 자신이 한울님이 된다는 것이다. 한울님을 모시는 인간의 신적행위(侍天), 한울님을 산 채로 기르는 인간의 신적행위(養天), 한울님을 구체적으로 본받아 혁명적으로 실천하는 인간의 신적행위(體天)가 지니고 있는 뜻이야 말로 인내천의 기본사상이 된다.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 하라는 것이다.

 

수심정기(守心正氣)

수심정기(守心正氣)는 본래의 마음을 잘 보존하여 기(氣)를 바르게 한다는 의미로서 동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수양(修養) 방법 또는 그 사상을 말한다. 이는 안에 있는 신령의 마음을 잘 지키고 밖에 기화가 있다는 그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마음을 바로잡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신사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옛 성인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니라”(《동경대전》 수덕문)고 했고 해월신사는 ‘수심정기 네 글자는 천지가 떨어지고 끊어진 기운을 다시 보충하는 것’(《해월신사법설》 수심정기)이라 하여 수심정기를 대신사가 가르친 윤리의 중요 덕목으로 풀이하고 있다. 수심정기는 한마디로 ‘천지를 내 마음에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해월신사는 해석한다(《해월신사법설》 수심정기). 수심정기로 한울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 나를 구원하라는 윤리덕목인 것이다.

 

성ㆍ경ㆍ신(誠敬信)

대신사는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니 많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별로 다른 도리가 없고 성ㆍ경ㆍ신 석자니라’(《동경대전》 좌잠)고 했다. 정성과 공경과 믿음을 도덕의 기본 바탕이 되는 윤리덕목으로 강조한 것이다. 성(誠)은 참된 마음을 잃지 아니하도록 지키고 잠시도 쉬지 아니 하고 게으르지 아니하도록 힘쓰는 모습을 말하고, 경(敬)은 서로 어울리는 인간관계의 윤리로 협력의 질서를 이루는 바탕이 되며, 신(信)은 믿음을 가리키는 말로 모든 인간과 인간, 인간과 만물 사이에 관계의 바탕이 되는 덕목이다. 이와 같이 성과 신의 정신으로 경천(敬天)ㆍ경인(敬人)ㆍ경물(敬物) 하라고 대신사는 가르쳤던 것이다.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

천도교는 편향적인 유물론(唯物論)에 반대하고 물심(物心)은 근본 일체라는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에 입각하여 개인과 사회의 한편만의 가치를 지양하고 사람을 본위로 한 원천에 돌아가 개인이 곧 사회요 사회가 곧 개인인 개전일체(個全一體)를 깨달아 동귀일체(同歸一體)할 것을 주장한다. 성신쌍전과 교정일치를 강령으로 하는 천도교의 인간격중심(人間格中心)의 정신적 생활과 육체적 생활의 완전(完全) 및 조화(調和)를 위해 정신개벽·사회개벽·민족개벽으로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또한 한울은 대생명(大生命)이요 개체는 부분적 생명이므로 개체인 인간이 전체인 한울님 위치에 도달하려면 필연적으로 신앙(信仰)과 수행(修行)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는 주문(呪文)ㆍ청수(淸水)ㆍ시일(侍日)ㆍ성미(誠米)ㆍ기도(祈禱) 등 5가지가 있다. 이상을 요약해서 보면 천도교 교리는 종교적으로는 신인일체(神人一體), 철학적으로는 개전일체(個全一體), 윤리적으로는 자타일체(自他一體)를 주장하여 우주관·인생관·사회관을 정립(定立)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단 조직과 의례(儀禮)

1965년에 확정된 천도교헌(天道敎憲)은 교회제도를 중의제로 하여 천도교전국대의원회를 교회의 최고의결기관으로 하고 있다. 대회에서는 도정·도훈·종의원의원·지방교구장·선도사를 대의원으로 구성하고, 정기대회는 교령이 소집한다.

 

중앙총부에는 자문기관인 현기사(玄機司), 집행기관인 종무원(宗務院), 의결기관인 종의원(宗議院), 감사기관인 감사원(監司院)이 있고, 종무원(宗務院)은 교회의 교무행정을 담당한다. 또한 연원회(淵源會)가 있어서 교인들을 연원의 상종관계로 결집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중앙총부는 서울에 위치해 있고 각 군에 교구, 각 면에 전교실(傳敎室)을 두고 그 밑에 부(部)라는 세포조직을 설치하고 있다.

 

천도교를 수도하는 데에는 다섯 가지 강령이 있다. 첫째, 내시천주(內侍天主)이다. 마음속에 천주를 모시는 것이다. 사람은 근본에서 한울님의 소생이므로 한울님을 믿어야 하되 자기의 심령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으로, 자기의 심령을 키우는 것이 한울님과 접촉하는 수도라는 것이다. 둘째, 통령정기(通靈正氣)이다. 통령은 안으로 정신을 키워 한울님의 큰 영과 합일되는 것이고, 정기는 밖으로 육체의 기운을 키워 천지대의를 인간에게 펴는 것을 말한다. 셋째, 제화증복(除禍增福)이다.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키우는 것으로 인생의 가장 큰 복은 장생(長生)이라 하였다. 넷째, 포덕(布德)이다. 사람에게 천도교의 도를 널리 전하는 것이다. 다섯째, 보국광제(輔國廣濟)이다. 나라를 돕고 세계 장생을 널리 건지는 것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우리나라 천도교의 총본산이다. 천도교는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3대 교주 손병희는 1904년 이용구가 일진회와 합하여 친일 행위를 자행하자, 이와 구별하기 위해 천도교로 1905년 개칭한 후 1906년 1월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교단을 새롭게 조직했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였으며, 3·1운동 당시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던 천도교는 광복 이후 북한지역 교세의 급격한 증가에 힘입어 크게 확장됐다가 6.25한국전쟁으로 다시 쇠퇴하였다. 1953년에 중앙총부를 서울로 옮겼으며, 1961년에는 최시형과 손병희의 법설(法說)이 포함된 《천도교경전》을 간행했다.

 

이러한 다섯 가지 강령은 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의 다섯 가지 정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오관이라 한다. 가장 중요한 주문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이다. 청수는 매일 저녁 9시에 모시며 온 가족이 청수상 앞에 모여 기도를 올린다. 시일은 일요일마다 교당에 모여 기도를 드리는 것이며, 성미는 한 술의 쌀로 천은에 보답하는 실행을 보이는 것이다. 수도 행위를 총칭하여 기도라고 하며, 심고(心告)·시일기도·특별기도 등으로 나누어진다.

 

천도교의 정기적 공동의례는 매주 일요일에 봉행되는 시일식(侍日式) 이외에도 교조의 득도와 승통기념일 및 운동기념일에 행하는 기념식이 있고, 개인 수행으로는 매일 밤 9시에 청수를 모시고 주문을 읽고 심고드리는 기도식이 있다.

 

각종 제례의식을 봉행할 때는 향아설위(向我設位)로 하는데, 이것은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 조상은 나를 통하여 나타난다고 보아 벽을 향해 제상을 차려 놓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차려 놓는 것을 말한다.

 

일제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던 천도교는 광복 이후 북한지역의 교세가 급격히 증가한 데 힘입어 1947년에 40여만호에 달했으나 6·25한국전쟁으로 인한 교세의 쇠퇴를 수습하지 못하였고, 1963년에는 6만호의 교세를 확보하는 데 그쳤으며, 현재에도 10만호 정도로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교역자 양성기관의 결여와 재정 수입원의 협소함, 교직자제도의 문제점, 현대사회에 부적합한 의례제도 등에 따르는 것으로 천도교가 해결해야 하는 숙제이다.

 

4대 교주 춘암 박인호 상사(上師) 시절인 1908년, 천도교단 차원에서 종교축일을 전부 양력으로 기념하기로 정하고 1909년부터 시행하였다. 그런데 이때 기존의 음력 날짜를 따로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고, 날짜를 그대로 옮겼다. 예를 들어 대신사가 1860년 음력 4월5일에 신인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양력 4월5일에 기념하는 식이다. 천도교 내부에서도 이렇게 날짜만 옮기지 말고 양력으로 환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교단이 방침을 바꿀 정도는 아닌 듯하다.

 

창립 과정과 변천사

천도교를 창립한 수운대신사는 일찍이 세태(世態)에 대한 회의가 싹트게 되어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대도(大道)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인심풍속과 정치풍물을 통찰했다. 나이 36세 때인 1860년 4월5일 경주 용담에서 대신사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상제(上帝)로부터 “오유영부(吾有靈符)하니 기명(其名)은 선약(仙藥)이요 기형(其形)은 태극(太極)이요 우형(又形)은 궁궁(弓弓)이니”(《동경대전》 포덕문)라는 말을 듣고 천도(天道)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그가 얻은 도(道)에 대해 무슨 도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천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도를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던 서학(西學)에 대하여 동학이라 불렀다. 동국(東國)의 학(學)이라는 의미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대신사의 비범한 언동에 찾아와 가르침을 바라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고 관헌의 지목도 심하게 되자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1861년 11월쯤에 전라도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서 피신생활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대신사는 동학사상의 대체(大體)를 구상했고 ‘논학문(論學文)’ㆍ‘안심가(安心歌)’ㆍ‘교훈가(敎訓歌)’ㆍ‘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다. 그 이듬해인 1862년 3월 다시 경주로 돌아온 대신사는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신도들이 많아지자 동학에 대한 관헌의 지목도 심하게 되었다. 그해 9월 대신사는 경주 진영에 잡히는 몸이 되었으나 많은 교도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바람에 곧 석방됐다. 이때 모여든 사람들이 600~700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동학의 신도는 더욱 급증하게 되어 포교활동은 더욱 활기를 띄었고 신도들이 많아지자 자연히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3년 처음으로 각지에 접소(接所)를 두고 접소에는 접주(接主)를 두어 그 지방의 교도를 다스리게 했다. 이것이 바로 접주제(接主制)인데 이는 동학의 최초 교회제도(敎會制度)이다.

 

이 무렵 교인은 3000여명, 접소 13개를 확보했다. 대신사는 포덕과 아울러 교도들의 결속과 참된 믿음의 태도를 역설했다. 한편으로는 해월신사를 후계자로 내정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동학의 신도들이 놀랍게 늘어나는 것을 보고 크게 경계하여 마침내 그해 12월 대신사는 23명의 제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1864년 1월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다가 그해 3월10일 이단사교(異端邪敎)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도난정(邪道亂政)이라는 죄목으로 참형을 당한다.

이때 대신사의 나이 만 40세였고 도를 얻은 지 겨우 5년이었다. 실제로 종교활동을 한 것은 3년에 불과했다. 대신사의 참형 이후 동학은 일시 침체되었으나 조선말 전제정치의 폭압에 대한 저항운동의 불길은 점차 번져나가 30년 뒤 동학혁명으로 폭발하게 된다. 이 기간에 교단을 이끈 지도자는 2대 교주 해월신사였다. 그는 수운대신사의 뒤를 이어 교주가 되었으나 대신사 참형 이후 정부에서 동학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숨어 포교하면서 신도들을 조직,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1893년에는 교조의 신원운동을 전개하여 동학의 신앙자유를 부르짖었으며, 1894년 동학혁명의 숨은 지도자 역할을 했다.

 

동학혁명 실패 후 지하에 숨어 포교에 전념하다가 관에 체포되어 1898년 7월18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참형되었다. 1897년 해월신사의 뒤를 이어 의암성사가 3대 교주가 되었다. 의암성사는 사태를 수습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관헌의 추적이 심해지자 1901년 3월 일본으로 피신했고, 그해 9월 일시 귀국했다가 ‘세계의 대세’를 깨닫기 위해 1902년 3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일제(日帝)의 방해로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서 망명 중이던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유(交遊)하여 새로운 인식을 얻는 한편, 국내와 연락하면서 교인들을 규합, 동학을 재정비하였다. 의암성사의 도일(渡日)과 일본 체류로 인해 사상적 폭이 넓어지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탄력성이 증대된 반면,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동학교도들의 민족적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1904년 8월말부터 전국에 걸쳐 조직되기 시작한 진보회는 원래 동학교도들이 기존 정치체제의 개혁세력으로서 참여하기 위한 기구였으나, 이용구(李容九)의 주도하에 송병준(宋秉畯)의 일진회(一進會)와 합하고 친일단체화하였다. 이에 의암성사는 교정일치론(敎政一致論)을 철회하고 정치적 관심을 포기, 종교로서의 동학을 고수하는 방침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1905년 12월1일 동학을 ‘천도교’로 바꿔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듬해 1월 귀국하여 교회를 재조직하는 데 착수했으며,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새로운 교회조직을 만들었다.

 

의암성사는 일찍이 동학에 가담하여 동학혁명 당시 10만의 도중(徒衆)을 이끌고 전투에 가담하기도 했다. 1901년 3월 일본에 피신하여 신문물을 익히면서 1904년에는 진보회를 조직하고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고 각종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 뒤 교육사업·문화활동에 전념했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을 계획하여 33인 민족대표로 활동하다가 채포되어 복역 중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22년 5월에 화천(타계)했다. 1920년대의 천도교는 언론출판·계몽운동·농촌운동·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앞장서 전개했다. 그러나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천도교단은 신·구파의 갈등으로 교세가 크게 위축되고 오심당사건(吾心黨事件)으로 신도 수백 명이 검거되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32만 5000호에 달하던 북한지역의 천도교인을 제외한 남한의 신·구파가 합동하여 교단체제를 견고히 하고 1972년에는 서울 종로구에 수운회관을 건립하여 포덕에 임하고 있다.

 

서울에 중앙총본부를 두고 대도주(大道主)가 다스렸으며, 지방은 72개 대교구로 분할, 교령(敎領)이 관할하게 하였다. 정당활동을 금지하여 이용구 등 60여 명을 출교시키는 한편, 교리·교체(敎體)·교제(敎制)·오관(五款: 呪文·淸水·侍日·誠米·祈禱)를 제정하는 등 교단의 면모를 일신했다.

 

또한 인쇄소인 보문사(普文社)를 설립한 후 수많은 교서를 발간하여 동학 이래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고, 1910년부터 포교활동과 더불어 출판교육 등의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교세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두어 교리와 서양의 학술을 가르치고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발간하여 국민의 사회교육을 통한 민족정신 함양에 노력한 결과 천도교는 1919년의 3·1운동 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의암성사를 비롯한 많은 교도들이 옥고를 치르고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나, 일제의 정책이 문화정치로 바뀌는 것을 이용하여 1919년 9월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설립하였고, 1920년 3월에는 이를 천도교청년회로 개편하여 전국 지부를 결성했다. 그해 6월부터는 ‘개벽(開闢)’이라는 종합잡지를 발행하고, 이어 ‘신여성’, ‘학생’, ‘어린이’ 등의 월간잡지도 발행하였다. 특히 ‘개벽’은 일제의 탄압으로 1926년 8월 통권 72호를 발행하면서 폐간되기까지 천도교 교리를 통해 민중의 주체적 자각과 근대 문물을 섭취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23년에는 천도교청년회의 조직과 명칭을 개편하여 천도교청년당을 창립하고 학술연구부를 두어 《자수대학강의(自修大學講義)》를 발행, 다방면에 걸친 대학 교양과정을 지면(紙面)강의함으로써 한국 청년의 지적 향상을 꾀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21년에는 교단의 체제를 중의제(衆議制)로 변경하였다. 1922년 5월 의암상사의 사망과 더불어 이러한 혁신운동은 분쟁을 일으켜 중의제를 주장하는 신파와 보수파인 구파로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춘암상사를 교주로 인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이를 인정하는 교인대회파(敎人大會派)와 부정하는 중앙종리원파(中央宗理院派) 및 통일기성회파(統一期成會派)가 대립, 1926년 교인대회파와 통일기성회파가 타협하여 중앙종리원으로 개칭함으로써 신구(新舊) 중앙종리원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구파 종리원에서 교인대회파가 다시 분리되어 사리원(沙里院) 중앙총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교세 확장과 교도의 단합을 위한 움직임도 일어나 1931년에는 신파측의 천도교청년당과 구파측의 천도교청년동맹이 합쳐 천도교청우당이 발족되었으며, 1932년에 500호를 1포(包)로 하고 포의 구성을 5단계의 세포조직으로 하는 교단조직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1934년에는 조선독립만세운동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천도교오심당사건이 일어나 230명이 검거되었고, 1937년에는 천도교청우당이 해체당하는 등 일제의 계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한편, 김일성은 새로운 세기와 더불어 천도교를 찬양했고, 북한 지역에서는 천도교청우당이 우파 종교정당이 되어 당초에는 막대한 당원을 바탕으로 무시하지 못할 세력이었으나, 1950년 영우회(靈友會) 사건을 비롯한 탄압과 숙청, 지도가 장악당한 끝에 어용·위성 정당으로 전락했다.

 

광복 후에는 남북 간의 내왕이 불편하게 되어 32만5000호에 달하는 북한지역 교도들과의 연락이 원활하지 못했고, 반공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많은 북한 교도들이 검거되었다. 현재 북한에는 공식적인 천도교 조직으로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와 천도교청우당이 존재한다.

 

선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북한에서 가장 신도가 많은 종교는 천도교다. 평양에는 평양교당이 있고 이곳에서 남북 천도교 합동 시일식이 집전되기도 했다. 천도교에 관한 대우도 (명목상이지만) 좋기 때문인지 남북간 교류가 가장 활발한 종교가 천도교이다. 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북한의 천도교인 숫자가 정확히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1948년에는 남한지역에서 신구파가 합동된 반면 북한지역에서는 연원제가 폐지되어 활동이 위축됐다. 1953년 서울 수복 후에 중앙총부를 서울로 옮겼으며, 1961년에는 해월신사와 의암성사의 법설(法說)이 포함된 《천도교경전》을 간행하였다. 현재 서울 종로구에 있는 수운회관은 1972년 준공된 것으로, 천도교의 상징적인 건물로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개혁운동

천도교의 사회개혁 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나 그 가운데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동학혁명운동(東學革命運動), 개화운동(開化運動), 3·1독립운동(獨立運動), 그리고 1920년대에 전개된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동학혁명운동

동학혁명은 민중으로부터의 혁명이라는데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 민중혁명의 사상적 지주역할을 한 이념이 바로 대신사의 가르침인 동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신사가 동학을 창도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다 참형을 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계속 번져 그 후 30년 동안 전국적인 확산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862년 진주민란을 필두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70여건에 달하는 대소 민란이 발생하는 등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원성이 하늘에 이르고 있었고, 때마침 중앙정부는 탄압을 계속하던 서학에 대해서 까지도 신교자유(信敎自由)를 보장하는 등 종교에 대한 완화정책을 쓰면서도 동학에 대해선 탄압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 신도들의 원성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정부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광범한 계층의 민중을 집결하는 데 성공한 동학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한 교조 수운대신사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894년 2월5일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한 농민군이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못이겨 관아를 습격,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萬石洑)를 파괴한 것이 동학혁명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ㆍ광제창생(廣濟蒼生)을 부르짖으며 항거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동학혁명을 농민들이 주축이 된 농민혁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동학신도들이 주축이 된 동학신도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동학접주들이었고, 동학신도들은 이때 전국 80개 지역에서 봉기했으며, 혁명군의 초기 성공 후 일시나마 호남지방 53개소에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었고, 동학의 포조직 339개 전체가 동원되었으며, 연인원 300만명이 이 운동에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년에 걸친 동학혁명은 20여만명의 순박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수포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 운동의 결과는 짓눌린 민중에게 자각의식의 고양과 새로운 세계사적 안목을 심어주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여진다. 당시 동학혁명군들이 제시했던 이념과 사상은 근대 민주국가의 이념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 

 

개화운동

동학혁명 실패 후 혹세무민의 종교로 규정당한 동학의 3대 교주가 된 의암 손병희성사는 일본에 피신하여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된다. 의암성사는 체계화된 개화사상과 일본의 근대화에 자극을 받아 《삼전론(三戰論)》을 저술하는 등 개화ㆍ개혁운동의 전개를 위한 준비를 했다. 1904년 의암성사는 개화혁신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교단 간부들로 하여금 대동회(大同會)를 조직케 했다. 이 조직을 통해 개화운동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중립회’, ‘진보회’(進步會)로 명칭을 바꾸면서 민회운동(民會運動)을 전개했다.

 

1904년 진보회의 조직을 통해 전국 360개소에 민회를 조직하고 16만명의 회원이 일제히 단발(斷髮)하고 흰옷을 검은 색으로 염색하여 착용함으로서 개화의 실천을 단계적으로 촉구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은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최대의 민회운동이었다. 또한 동학교도들은 360개 군에서 관찰사, 군수 등 관헌을 상대로 각종 민원에 대한 담판을 실시, 동학혁명 당시의 집강소를 계승한 듯한 활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민중개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경제적인 개량복을 입고, 개화경(안경)을 쓰고, 개화장(단장)을 짚고, 권련(담배)을 피우기도 하는 등 경향 각지와 벽지ㆍ낙도까지 돌아다니면서 의식개혁과 실천을 선전했던 것이다(이현희, 〈갑진개화운동의 역사적 전개〉).

 

개화혁신운동이 한창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30여만명에 육박하는 동학교도들이 혁신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운동은 군대를 동원한 정부의 탄압과 일진회를 통한 매수 회유작전에 말려들어 1904년 10월 일진회(一進會)로 흡수·통합됨으로써 동학교도들에 의한 진보회는 사라지고 친일 매국단체였던 일진회로 인식되어 그 오명을 씻을 수 없게 되었다. 의암성사의 선도에 따라 개화혁신운동을 담당 집행했던 진보회는 일진회에 매수·합류 당함으로써 의암성사가 추진하고자했던 혁신의 방향과는 전혀 관계없는 방향으로 빗나가게 된 것이다. 

 

교육ㆍ언론운동

의암성사는 민족의 자립정신을 기르고 개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 망명시 64명의 청년들을 일본에 불러 유학시켜 민족지도자로 양성하기도 했다. 우선 각 교육기관에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다가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동덕여학교(동덕여대 전신)를 인수·운영했다. 아울러 전국 31개에 달하는 각급 학교를 설립·운영했으며, 전국 800여개소에 교리강습소 및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의암성사는 교육사업과 아울러 언론 출판사업도 전개하였다. 1906년 활판인쇄소 ‘박문사’(博文社)를 설치하고 이 인쇄소에서 《대종정의(大宗正義)》를 비롯, 교화를 위한 각종교서를 간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6월에는 일간신문 ‘만세보(萬歲報)’ 창간호를 발행했다. 그러나 ‘만세보’는 293호를 발간하고 1907년 6월29일로 폐간 당하게 된다. 그 뒤 교단 기관지로 발행한 ‘천도교월보’는 300여호를 간행하는 동안 가혹한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족계도라는 사명을 아우르는 역할을 했다. 

 

3·1독립운동

한일(韓日)합방 후 일제의 우리민족에 대한 탄압과 착취는 급기야 1919년 3·1독립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 운동의 중심세력과 거사자금 모색이 천도교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천도교는 3·1독립운동 당시 800여만명의 신도를 확보한 거대교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교조 이래 면면히 이어져온 민중의식의 고양과 지배계급의 탄압에 대한 반발의식은 일제탄압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의식으로 승화되었고, 천도교의 이같은 양적 팽창은 인적·물적 뒷받침이 되기에 충분한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일합방 이후 의암성사는 민족을 구원키 위한 다양한 준비를 시작, 10여년간에 걸친 노력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가 전개했던 준비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단내의 민주적인 의사원제도(議事院制度)를 설치하여 지방대표를 중앙에 상주시켜 유사시에 대비시키고, 둘째 비밀히 운동기금을 준비하기 위하여 큰 교당 신축안을 병행하여 교당 신축기금 모금의 명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토록 하고, 셋째 우이동에 봉황각수도원(鳳凰閣修道院)을 설립하여 지방대표 500여명을 뽑아 7차에 걸쳐 49일간씩 수련을 실행, 정신적인 준비를 갖추도록 하고, 넷째 전국의 교도로 하여금 기미년 1월5일부터 2월22일까지 49일간 광복특별기도를 행하게 하는 등 만반의 태세를 갖춘 다음 전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거사할 방략을 세우게 되었다(홍장화, 《천도교운동사》).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 천도교인이 15명, 기독교 각파대표 16명, 불교 2명이라는 숫자와 대표가 의암성사였다는 사실이 당시 천도교의 역할을 입증해주고 있다. 3·1독립운동이 끝난 후에도 일제에 대한 천도교의 항거운동은 계속되었다. 6ㆍ10만세사건,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 오심당운동(吾心黨運動), 무인독립운동(戊寅獨立運動) 등이 천도교와 직·간접으로 깊숙이 관련된 항일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의 발족과 운영과정에서도 천도교의 역할은 컷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문화운동의 전개

천도교가 전개한 1920년대의 사회활동은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이었다. 1904년에 벌인 갑진개화운동을 시작으로 교육운동ㆍ언론 출판운동ㆍ어린이운동ㆍ청년운동ㆍ농민운동ㆍ여성운동ㆍ노동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새 운동이 전개되고 이 운동은 1920년을 넘어서면서 더욱 발전되어 갔다.

 

참고로 오늘날 어린이날은 천도교에서 시작되었고, 어린이라는 단어는 천도교에서 나왔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평등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천도교는 정성, 공경, 믿음을 중요시하는데, 그중에 하나인 공경은 사람의 언행과 관련이 깊으며, 사람 대하기를 한울(하늘)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도 나의 마음만큼이나 소중하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함부로 해치면 자신의 마음도 해쳐지기 때문에 신(한울님)을 모시는데 방해가 된다고 믿는다. 즉, 나이 많다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고, 신분이 높다고 함부로 갑질하지 말라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퇴폐적이며 저속한 사회는 지극히 암울해지며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고 본 것이다. 대신사는 말기조선 양반들의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 갑질, 허세에만 치중해 안분지족하는 모습들과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하며 비발전적인 사고방식을 슬프게 생각했다.

 

천도교 용어

천도교에서는 포교를 ‘포덕(布德)’, 집회를 여는 장소를 '교당(敎堂)', 천도교의 최고 책임자를 ‘교령(敎領)’, 중요 종교건물을 '수도원(修道院)'이라고 통칭한다. 또한 천도교 신자를 ‘교인(敎人)’이라 칭하고 교인끼리는 서로를 ‘동덕(同德)’이라 부른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천도교 교단의 지원 하에 발전했으며, 동덕여자중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가 천도교의 미션스쿨로 출발한 것이다.

 

‘포덕'이라는 말은 연호로도 사용한다. 최제우가 용담정에서 신인에게 계시를 받았다는 1860년(조선 철종 11년)을 원년(1년)으로 삼아 헤아린다. 2019년 기준 포덕 160년이다. 국궁에서 국궁인들끼리 서로를 부르는 ’접장‘이란 말도 원래는 천도교의 포접제 하에서 쓰던 말이었다.

 

수운 최제우를 대신사(大神師),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신사(神師),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를 성사(聖師), 4대 교주 춘암 박인호를 상사(上師)라 칭한다. 또한 4대 교주까지 각기 기념일을 정하여 천도교의 절기로 삼았다.

 

천일(天日): 4월5일 1860년에 최제우가 상제로부터 계시받음을 기림.

지일(地日): 8월17일 1863년에 최시형이 최제우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림.

인일(人日): 12월24일 1897년에 손병희가 최시형으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림.

도일(道日): 1월18일 1908년에 박인호가 손병희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림.

원래는 음력으로 기렸으나 날짜를 그대로 양력으로 옮겼다. 예를 들어 천일은 원래 음력 4월 5일이었는데 지금은 양력 4월5일이다.

 

천도교, 160주년 천일기념일…송범두 교령 취임

천도교는 2019년 4월5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160주년 천일(天日)기념일 행사를 열었다. 천일기념일은 천도교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가 1860년 4월5일 천도교를 창시한 것을 기념하는 천도교 최대 경축일이다. 2019년 천도교가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3·1운동 100주년이어서 더욱 특별하다고 천도교는 설명했다.

 

이날 송범두(宋凡斗) 천도교 교령 취임식이 함께 열렸다. 송 교령은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에서 보여준 화합의 정신을 재현해 각자위심(各自爲心)으로 병든 사회병리 현상을 동귀일체(同歸一體)하는 사회 공동체로 전환하는 지혜를 발휘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범두 천도교 교령

앞서 천도교 최고 지도자인 제57대 교령에 송범두 도정이 선출됐다. 천도교는 2019년 3월15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린 제39차 정기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교령으로 송범두 도정을 선출했다. 임기는 3년. 송 교령은 당선 인사말에서 “천도교인들이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각종 제도를 개혁하겠다”고 말했다고 천도교 측은 전했다.

 

1949년 경남 남해군에서 태어난 송범두 교령은 송 교령은 국내 최장수 월간 잡지인 ㈜신인간사 대표이사, 재단법인 천도교유지재단 이사, 천도교 연원회 부의장, 사단법인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을 지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 북한대학원대학교 민족지도자 총동문 부회장, 가천대 행정대학원 총동창회장, 국제로타리 3600지구 부총재도 역임했다.

 

송 교령, 동학의 원형 찾아 중앙아시아로 떠난 『고려인 숨결 따라 동학 길 따라』 출간

송범두 천도교 교령이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과 애환을 담았다. 고려인은 동학 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말 조정의 폭정과 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넜던 우리 민족이다. 송범두 교령은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역사를 날줄로, 우즈베키스탄의 고대도시 히바(Khiva)에서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거쳐 타슈켄트까지 1주일 동안의 여정을 씨줄로 엮었다.

 

고려인들의 숨결 속에서 동학 정신의 원형을 찾아 떠난 송 교령의 중앙아시아 기행 에세이, 송범두 글 『고려인 숨결 따라 동학 길 따라』(라운더바우트 2019)가 발간됐다.

 

최근 방영한 드라마 ‘녹두꽃’으로 동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졌다. 게다가 2019년은 동학농민혁명을 국가 차원에서 기린 원년이기도하다. 드라마의 중심 소재였던 동학농민운동 당시 조선 인구는 1,050만 명 정도였다. 그중 300만 명가량이 동학교도였는데 이는 인구 열 사람 중 세 사람이 동학교도였다.

 

『고려인 숨결 따라 동학 길 따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책의 저자 송범두는 뼛속까지 동학도인 천도교 교령이다. 교령에 취임하기 1년 전 그는 고려인들의 숨결 속에서 동학 정신의 원형을 찾고자 중앙아시아를 여행했다. 고려인은 동학 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말 조정의 폭정과 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넜던 우리 민족이다.

송 교령은 현지에서 만난 고려인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과 천도교의 오랜 인연을 회고하기도 하고 남북 천도교도들의 향후 역할을 기대하기도 한다.

 

중앙아시아 문화 유적에서는 우리 민족의 흔적이 드러난다. 히바 토성은 축조 방식이 신라 성곽과 유사하다.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의 '고구려사신도'는 1500년 이상 이어져온 교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책에는 송 교령의 개인사도 드러난다. 그는 간이휴게소에서 일제강점기 때 강제징용을 피해 만주로 떠났던 부친을 그리워한다. 또한 키질쿰 사막을 횡단하면서 50년 전 월남 파병에서 불의의 사고로 순국한 작은형님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100년 전 3·1운동을 함께 주도하고, 개벽을 함께 만들고, 어린이날을 함께 주창했던 남북 천도교도들의 향후 역할을 기대하기도 한다.

 

저자인 송범두 교령은 책머리에서 “사단법인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으로서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정책 중 하나인 신북방 정책의 현장을 살펴보고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과 애환을 직접 들어보고자 떠난 여행이었다. 그리고 동학혁명의 국가기념일 제정이 논의되는 가운데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에 스며들었던 동학 DNA의 원형을 찾고자 떠난 여행이었다”고 했다.

 

천도교·기독교·불교,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세웠다

100년 전 3·1운동을 주도했던 종교계가 3·1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후세에 전하는 기념비를 제막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3개 종단과 역사학계가 주축이 돼 결성한 '종교인연합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2019년 12월23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빌딩(옛 태화관) 옆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을 열었다.

 

박남수 추진위 상임대표(전 천도교 교령)는 인사말에서 "이 자리는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의 지도자 서른세 분이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 정신으로 독립을 선언한 곳"이라며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기념비를 세워 제막식을 거행하게 됐다"고 자축했다.

 

100년 전 3·1운동을 주도했던 종교계가 2019년 12월23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옛 태화관 터에서 3·1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후세에 전하는 기념비를 제막했다.

 

위원회는 건립 취지문에서 "백 년 전 그날 종교인들은 무너졌던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고, 시대의 흐름과 하늘의 뜻을 깨달아 독립선언을 실천했다"며 "종교인들은 다름과 차이를 극복하고 대동단결해 하나가 됐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오늘날 한반도는 지구상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로서, 백 년 전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꿈꾸었던 '평화 세상'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며 "종교인들의 지혜와 용기를 되새기는 기념비를 세우고자 한다"고 위원회는 밝혔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종교인연합으로 세워진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가로·세로 각각 1m 크기의 기념비 설명문에는 1919년 3월 1일 옛 태화관 터에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지도자 33인이 민족대표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3·1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 담겼다.

 

행사에는 박 상임대표를 비롯해 기념비 터를 제공한 전명구 태화복지재단 대표이사, 송범두 천도교 교령,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불교계에서는 조계종 사회부장 덕조 스님이 참석해 총무원장 원행 스님 축사를 대독했다. 위원회 관계자는 "서울 시내에 3·1운동 100주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心靈之靈(심령지령)

1. 개관

. 저술연대

앞부분은 포덕26(1885) 9월 경상북도 상주 화령 전성촌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밝혀졌으나 나머지 부분은 어느 시기에 말씀하신 내용인지 연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글의 내용을 보면 앞 뒤의 글이 연속성이 있어 같은 시기의 법설로 보인다. 이 법설은 용담가의 개벽 후 5만년에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라는 경전의 문구를 해설한 글이다.

 

수운대신사께서 한울님을 만나 들었던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의 의미는 시천주의 진리를 알아 심령의 영함을 깨닫는데 있음을 이 글에서 밝히신다. 세상 사람들은 한울님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작용하는 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음사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고 강조하신다. 그러나 도인들은 시천주의 진리를 바르게 깨달아 도성입덕을 이루어 탁명을 면하라는 해월신사의 가르침을 받들어 수련에 정성을 쏟아야 하겠다.

 

. 대의

도인들이 심령의 영함을 깨달아 인식의 세계를 초월하고 한울님의 기운을 접하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는 종교체험을 통해 도성입덕을 이루어 탁명을 벗어나자.

 

. 같이 공부하면 좋은 편

논학문, 용담가, 천지이기, 천지인귀신음양, 견성해, 각세진경, 명리전 중 척언허무장, 성령출세설, 법문, 권도문 등

 

2. 각 절의 풀이

1

世人(세인) 不知天靈之靈(부지천령지령)하고 亦不知心靈之靈而但知雜神之靈(역부지심령지령이단지잡신지령)하니 豈非病乎(기비병호) 今俗所謂(금속소위) 城隍(성황) 帝釋(제석) 城主(성주) 土王(토왕) 山神(산신) 水神(목신) 石神(석신) 木神等(목신등) 淫祀(음사) 筆不難記也(필불난기야)니라 此是(차시) 漢武帝時(한무제시) 巫蠱餘風(무고여풍) 尙今未革(상금미혁)하고 染心成痼(염심성고)하니 非但愚婦愚夫之病根難治(비단우부우부지병근난치) 腐儒俗士(부유속사) 汪汪流入(왕왕유입)하여 習與成俗(습여성속)하니 可謂寒心處也(가위한심처야)로다 此等痼疾(차등고질) 非大方家之手段(비대방가지수단)이면 實難治療(실난치료) () 余敢論而言之(여감논이언지)하노니 明而察之(명이찰지)하여 快斷病根(쾌단병근)하고 同歸一理(동귀일리)하여 勿獲罪于天(물획죄우천)하라,

 

세상 사람은 천령의 영함을 알지 못하고 또한 심령의 영함도 알지 못하고, 다만 잡신의 영함만을 아니 어찌 병이 아니겠는가. 지금 세속에서 이르는 성황이니 제석이니 성주니 토왕이니 산신이니 수신이니 석신이니 목신이니 하는 등의 음사는 붓으로 다 기록하기 어려운 것이니라. 이것은 한무제 때에 무당이 하던 여풍을 지금까지 고치지 못하고 마음에 물들어 고질이 되었으니,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의 병근을 고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썩은 유생과 속된 선비도 왕왕 흘러들어 습관과 풍속을 이루었으니, 가히 한심한 것이라 이르리로다. 이러한 고질은 대방가의 수단이 아니면 실로 고치기 어려우니라. 그러므로 내 감히 논하여 말하는 것이니 밝게 살피어 쾌히 병든 뿌리를 끊고 한 이치로 돌아와 죄를 한울님께 얻지 말라.

 

<대의> 세상 사람들은 천령의 영함은 물론 심령의 영함을 알지 못하고 잡신의 영함에 빠져 습속을 이루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방가가 천지의 근본을 밝혀 잘못된 병의 근원을 끊고 한울님의 죄를 얻지 말아야 한다.

 

* 天靈之靈(천령지령) 천령의 영함.

** 轉至辛酉 四方賢士 進我而問曰 今天靈降臨先生 何爲其然也 曰受其無往不復之理 曰然則何道以名之 曰天道也 曰與洋道無異者乎 曰洋學如斯而有異 如呪而無實 然而運則一也 道則同也 理則非也 신유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와서 묻기를 지금 천령이 선생님께 강림하였다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대답하기를 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를 받은 것이니라./ 묻기를 그러면 무슨 도라고 이름 합니까./ 대답하기를 천도이니라./ 묻기를 양도와 다른 것이 없습니까./대답하기를 양학은 우리 도와 같은 듯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느니라.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으나 이치인 즉 아니니라.(논학문, 29~30)

 

* 心靈之靈(심령지령) 심령의 영함.

** 身體心靈之舍也 心靈身體之主也 心靈之有 爲一身之安靜也 慾念之有 爲一身之擾亂也 몸은 심령의 집이요 심령은 몸의 주인이니, 심령의 있음은 일신의 안정이 되는 것이요, 욕념의 있음은 일신의 요란이 되는 것이니라.(수심정기, 296)

** 心靈惟天也 高而無上 大而無極 神神靈靈 浩浩蕩蕩 臨事明知 對物恭之 思之則 天理得焉 不思之則 不得衆理矣 心靈思之 六官不思之 以心靈明其心靈 玄妙之理 無窮之造化可得而用之 用之則 滿乎宇宙之間 廢之則藏乎一粒之中矣 심령은 오직 한울이니, 높아서 위가 없고 커서 끝이 없으며, 신령하고 호탕하며 일에 임하여 밝게 알고 물건을 대함에 공손하니라. 생각을 하면 한울 이치를 얻을 것이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많은 이치를 얻지 못할 것이니, 심령이 생각하는 것이요, 육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라. 심령으로 그 심령을 밝히면 현묘한 이치와 무궁한 조화를 가히 얻어 쓸 수 있으니, 쓰면 우주 사이에 차고 폐하면 한 쌀알 가운데도 감추어지느니라.(수심정기, 296~7)

 

**    降話 敎 有하다하였나니, 降話 卽 心靈 니라.

* 雜神之靈(잡신지령) 잡신의 영함.

* 城隍(성황) 중국 신화에서 전해지는 영혼의 판결관이며 마을의 수호신.

죽은 사람의 혼령은 그의 판결에 따라 신에게 자신의 선행과 악행을 보고해야 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성황묘(城隍廟)에 제물을 바치면 후히 보답받는다고 믿었다. 성황숭배 의식이 일반에 널리 퍼진 이유는 나라에서 그것을 장려했기 때문이며 1382년에 나라는 성황묘의 관리를 맡으면서 수호신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전통적으로 지방관리들은 부임하러 갈 때 성황묘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그의 인도를 구했다. 또한 어려운 법률상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성황이 꿈에 나타나 해결책을 주리라고 기대하며 이곳에서 밤을 지냈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친척이나 친구가 성황묘에 찾아가 그 사실이 제날짜에 기록되도록 성황자에게 보고했다. 또한 1년에 1~2번 신상(神像)을 밖으로 내어와 성황이 마을을 감시할 수 있도록 거리를 순례하게 했다. 이때 그의 보좌관들이 앞에 서게 되는데 밤과 낮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키 큰 흑노야(黑老爺)와 키 작은 백노야(白老爺)도 그중에 있었다.

 

(618~907)의 관리들은 성황과 다른 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오래된 신들의 족보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성황은 선사시대에 요() 임금이 제사지냈다는 8신 가운데 하나인 수용(水庸)과 동일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 중국 문학에서 성황에 대해 언급한 글귀는 6세기까지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지난 날 선정을 편 지방관이 죽으면 그를 신격화하여 성황으로 삼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떤 도시에서는 원래의 성황은 없애버리고 새로운 수호신을 성황묘에 모셔 다시 성황으로 받드는 일도 얼마든지 있었다.

 

한국에서도 성황을 모셨는데 서낭이라고도 했다. 한국의 서낭은 본래의 마을수호신 신격이 여타의 신격과 결합되어 복합적 신앙대상으로 변화된 신격이라 할 수 있다. 서낭은 마을수호신·풍요신·조상숭배신앙을 함께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신앙형태로 여겨지고 있다.(브리태니카)

 

* 帝釋(제석) 1년 가운데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 밤.

제야(除夜)라고도 한다. 한 해를 마치는 '덜리는 밤'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으며, '작은 설'이라 하여 묵은 세배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예로부터 이 날에 궁궐이나 민간에서는 여러 행사와 의식을 치렀다. 한 해 동안의 거래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각 가정에서는 새해 준비와 함께 1년 동안의 거래 청산에 바빠지고, 밤중까지 빚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면 정월 보름까지는 빚을 독촉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이날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악귀를 쫓기 위한 의식으로 가면을 쓰고 제금[銅鈸]과 북을 울리며 궁궐 안을 돌아다니는 나례(儺禮)가 치러졌고, 2품 이상의 관원들은 왕에게 '묵은 해 문안'을 올렸으며, 민가에서는 손위 어른이나 가묘(家廟) '묵은 세배'를 드렸다. 또 민간에는 곳곳마다 등불을 밝히고 밤샘을 하는 수세(守歲)라는 풍속이 있었다. 각 집마다 부뚜막이 헐었으면 고치고, 여자들은 세찬과 차례를 위한 음식을 준비했으며, 남자들은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했다. 쓰레기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는데 이 모든 것은 잡귀를 불사른다는 민간신앙 때문이었다.(브리태니카)

 

* 城主(성주) 집을 지키고 보호하는 가신(家神)의 하나.

상량신(上樑神), 성조(成造)라고도 한다. 성주는 가신 중에서 가장 상위의 신이다. 한 가정의 가장을 대주(垈主)라고 하는데, 이는 가신의 대표인 성주와 더불어 한 가정의 운을 결정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 집에는 하나의 성주만이 있다.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성주신을 맞아들이는 상량식을 하며, 때로는 무당을 불러 성주를 받아들이는 성주받이굿 또는 성주맞이굿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맞아들인 성주는 집에 부정한 일이 있거나 위험한 일이 발생하면 집을 나가버리기 때문에 다시 모시는 의식을 해야 한다. 

 

성주신에 기원하는 내용은 가내평안·풍년·감사·부귀·번영·무병·장수 등 복합적이다. 신체(神體)는 한지를 접어 대들보에 묶는 경우와 독이나 항아리에 쌀을 넣어 대청 마루 한 편에 놓는 경우가 있다. 이 독은 성주독이라 불린다. 성주독의 쌀은 해마다 햅쌀로 바꾸며, 묵은 쌀로 지은 밥은 절대 다른 집 사람과 나누어 먹지 않는다.(브리태니카)

 

* 土王(토왕) 토왕(土旺)의 뜻. 오행(五行)에서, 땅의 기운이 왕성하다는 절기. 일 년에 네 번으로, 입춘·입하·입추·입동 전 각 18일 동안이다.

 

* 山神(산신) 산을 맡아 수호하고 있다는 신령(神靈). 산신령이라고도 한다.

산신은 농경민에게 물이나 비를 내리는 강우신(降雨神)이나 풍산신(豊山神)의 성격을 띠고, 유목민에게는 대체로 사냥감을 풍부하게 내리는 은혜자이면서도 노여움을 내는 존재이며, 인간에게는 아이를 가져다주는 신이자 그 생명을 악귀들로부터 보호하는 수호신이다. 산신의 신체(神體)는 호상(虎像)과 신선상(神仙像)이며, 산신에게 제사하는 일을 산제(山祭),·산신제라고 한다. 한국은 일찍부터 산신제를 지냈으며, 지금까지도 그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水神(목신) 수신은 바다, , 하천, 연못, 우물 등 물을 관장한다는 신이다. 해신(海神), 용왕신(龍王神), 하천신(河川神), 독신(瀆神:나루터의 수신) 등으로 불린다. 일찍이 농경사회가 발전하면서 적당한 수량(水量)에 대한 인간의 바램은 물의 힘 자체를 신의 작용으로 믿어, 이를 관장하는 절대신에 대한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수신은 관개용수나 제방(堤防)의 수호신이 되고, 수해방지나 기우제 등에서 숭배의 신으로 섬겨져, 사람들은 이 신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때로는 친숙히 하고 또 공물(供物)을 바쳐 그 노여움을 달래기도 하였다. 더구나 생활의 터전을 바다에 의지하고 있는 어부들은 옛날부터 해신이나 용왕신에 대한 신앙이 두터워 여러 가지 제례를 행하여 왔으며, 이는 세계 여러 민족에게 공통된 민족적 의례라 할 수 있다. 

 

수신은 흔히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악령적(惡靈的)인 신과, 인간을 이롭게 하는 선신(善神)으로 구분되기도 하나 그 한계는 뚜렷하지 않다. 대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원령(怨靈) 등은 배나 사람에게 해를 주는 악신(물귀신)으로 여기는 반면, 용왕신은 가장 격이 높은 수신으로 숭앙된다. 그러나 이 용왕신이나 해신도 때로는 노여움을 받아 인간에게 해를 준다고 믿어짐으로 그 선악의 구별은 뚜렷하지 않다.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강한 수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국가에서 수신에 대한 신앙은 천신 신앙에 버금갈 정도로 성행했다. 이러한 수신신앙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와 융화하여 호국용신사상을 낳기도 하였다. 

 

신라 문무왕이 죽어서 호국용신이 되었다는 설화는 수신이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음을 말해주는 단적인 근거가 된다. 

고려조에 들어와서도 수신신앙은 쇠퇴하지 않고 더욱 고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속에 나타난 수신신앙은 신앙집단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주로 하는 어촌의 어민들은 수신에 대한 신앙이 매우 강하다. 

 

동해안 어촌에서는 마을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어 용왕신을 모시고 정월 대보름에 행하는 동제(洞祭) 때나 몇 년마다 하는 풍어제(豊魚祭) 때에 마을 전체의 행사로서 용왕제를 올린다. 또 가뭄에 마르지 않는 샘이나 깊은 웅덩이에는 영험한 수신이 있다고 믿으며, 이 수신은 아들 점지를 비롯하여 인간의 여러 가지 결핍을 해소해준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이처럼 수신은 인간의 복을 주는 신으로도 숭앙되고 있다.

 

* 石神(석신) 신으로 받들어 섬기는 돌. 돌을 신의 몸으로 보고 병을 다스려 달라거나 때에 맞게 비가 오고 바람이 고르기를 빌었다.

* 木神(목신) 나무귀신.

* 淫祀(음사) 함부로 제사지냄. 부정한 귀신을 제사지냄

* 漢武帝(한무제)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기원전 156 ~ 기원전 87)은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1 ~ 기원전 87)이다. 아명은 체()이며 자는 통()이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이다. 경제의 열번째 아들이며 효경왕후 왕지(孝景皇后 王娡)의 소생이다.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펼쳐 당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중국 역사상 진 시황제·강희제 등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16세에 부황 경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라 유학자 동중서의 의견을 수렴하여 유학을 국가의 학문으로 삼아 그 이념대로 나라를 다스리려 하였다. 그의 치세에 장건(張騫)이 서역과 통하는 실크로드를 개척하였고,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소탕케 하였으며 또한 고조선을 멸망시켜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또한 소금과 철의 전매제가 행해졌으나 훗날 이 정책은 전한의 재정적 부족과 몰락을 재촉하였다.

 

* 巫蠱(무고) 무술(巫術)로 남을 고혹(蠱惑).

* 腐儒(부유) 생각이 낡고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

* 俗士(속사) 1. 학예나 견식이 뛰어나지 아니한 평범한 선비나 평범한 사람. 2 세속적인 일에 능한 선비.

* 汪汪(왕왕) 물이 깊고 넓은 모양.

* 大方家(대방가) 세상의 현인, 강호의 군자.

 

<해의> 해월신사께서 사람의 마음의 영함을 깨달으면 잡신의 신령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리석을 짓을 하지 않게 됨을 강조한 구절이다.

 

지금 하품(下品)사람들은 보이는 데에는 강하고 무형의 세계에는 소홀한 것은 이치의 당연한 것이다.’고 해월신사께서 도결 편에서 말씀하셨듯이 세상 사람들은 천령(天靈)의 영함에 대하여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심령(心靈)의 영함도 알지 못하고 그저 잡신의 영함만을 알 뿐이니 어찌 병이 아닌가? 지금 세상에서 말하는 성황이니 제석이니 성주니 토왕이니 산신이니 수신이니 석신이니 목신이니 하는 등의 음사(淫祀)는 붓으로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런 병폐는 중국 한나라 무제 때부터 무당들이 무술(巫術)로 사람들을 정신을 헛갈리게 하던 일들이 이치가 있는 일처럼 하나의 풍속을 이루어 지금까지 이어 내려와 고치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을 물들게 하는 고질이 되었다. 

 

잡신의 영험을 구하는 일들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깊이 빠져 치료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고 생각이 낡고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와 세속적인 일에 능한 선비들도 많이 유입되어 풍속을 이루어 널리 습관화될 정도로 번져있으니 마음이 선뜩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고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현인이 방책을 내놓지 않으면 실로 고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감히 논하고 말하는 것이니 밝게 살피어 병의 근원을 끊어버리고 한 이치로 더불어 돌아가 한울에 죄를 얻지 마라.

 

이 구절에서 해월신사께서는 천령, 심령, 잡신의 영함이 다르게 작용함을 말씀하신다. 천령에 대해서는 언급만 하시고 글의 전체는 심령의 영함을 통해 잡신의 영함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잡신의 영함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대방가의 수단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는데 이를 천도교인이 해야할 일이라는 암시로 해석할 수 있다.

 

2

今此論說(금차논설) 非道成立德者(비도성덕립자) 難曉矣(난효의) 陰陽(왈음양) 鬼神(왈귀신) 造化(왈조화)(왈명)(왈기)라 하니 知陰陽之根本乎(지음양지근본호) 不知乎(부지호) 不知根本而 徒能讀而已(부지근본이 도능독이이) 可歎矣(가탄의)로다,

 

是知根本透徹然後(시지근본투철연후)라야 方可謂之知天也(방가위지지천야)니라 何以爲陰陽(하이위음양)이며 何以爲鬼神(하이위귀신)이며 何以爲造化(하이위조화) 何以爲命(하이위명)이며 何以爲氣乎(하이위기호) 視之不見(시지불견)이요 聽之不聞(청지불문)이라야 可謂成道也(가위성도야) 外有接靈之氣(외유접령지기) 內有降話之敎(내유강화지교) 丁寧透得(정녕투득)이라야 可謂立德也(가위입덕야) 不然則 未免托名矣(불연즉 미면탁명의)니라.

 

지금 이 말은 도성입덕한 사람이 아니면 깨닫기 어려운 것이니라. 음양이라 귀신이라 조화 이라 기운이라 하니, 음양의 근본을 아는가 모르는가. 근본을 알지 못하고 한갖 글 외우기만 하니 한심한 일이로다.

 

이 근본을 투철하게 안 뒤에라야 바로 한울을 안다고 이르리라. 무엇으로써 음양이 되었으며, 무엇으로써 귀신이 되었으며, 무엇으로써 조화가 되었으며, 무엇으로써 명이 되었으며, 무엇으로써 기운이 되었는가.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않는데 이르러야 가히 도를 이루었다 할 것이요,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음과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음을 확실히 투득해야 가히 덕을 세웠다 말할 것이니, 그렇지 못하면 탁명이나 하였다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대의> 인식의 틀을 뛰어넘고 한울님기운을 접하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는 도성입덕의 경지에 이르러 음양, 귀신, 조화, , 기 등의 이치를 확연히 알아 후천의 무극대도에 이름을 걸어놓는 탁명을 벗어나라.

 

* () 새벽. 밝다. 깨닫다.

* () 걸어다니다. 무리. 동아리. 다만

* 視之不見(시지불견) 보였으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상태)을 본다.

* 聽之不聞(청지불문) 들었으나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 것(상태)을 듣는다.

* 外有接靈之氣(외유접령지기)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다.

* 內有降話之敎(내유강화지교)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다.

* 透得(투득) 극도의 얻음. 확연한 깨달음

* 托名(탁명) 이름을 위탁하다.  ()과 같은 뜻.

 

<해의> 1절의 의미를 도를 이루고 덕을 세운 사람이 아니면 진실로 깨달을 수 없다. 음양(陰陽)이다, 귀신(鬼神)이다, 조화(造化), ()이다, ()다 등의 말을 사용하는데 이러 말들의 근본을 아는가? 알지 못하는가? 그 근본을 알려고 하지 않고 다만 글을 읽을 뿐이니 탄식할 일이다. 근본을 알고 투철하게 한 뒤에야 바야흐로 한울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음양이 무엇이며, 귀신이 무엇이며, 조화가 무엇이며, 명이 무엇이며, 기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즉 인식의 틀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러야 도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음을 느끼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을 확연히 깨달아야, 즉 한울님의 기운을 느끼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는 경지에 이르러야 덕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름만 걸어놓은 것을 면하지 못한다.

 

우리가 천도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수련을 통해 종교체험을 하여 인식의 틀을 뛰어넘는 무형의 세계를 들어가 보아야 비로소 한울님의 존재를 알 수 있고 근본 이치를 헤아릴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책만 본다면 이는 헛수고에 불과하다고 해월신사께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면 진실할 깨달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운대신사께서도 닦는 사람은 헛된 것 같지만 실지가 있고, 듣기만 하는 사람은 실지가 있는 것 같지만 헛된 것이니라.”라고 하여 수행을 강조하셨다. 결국 수행을 통해 내 몸에 있는 심령의 작용을 알아가는 공부인 심학을 해야 한다.

 

3

道人(도인) 入道後(입도후) 事天地(사천지) 不如事父母(불여사부모)하고 猶浸浸然(유침침연) 不釋淫祀之心(불석음사지심)하여 或作或撤(혹작혹철)하고 半信半疑(반신반의)하여 半信天地(반신천지)하고 半信淫祀(반신음사)하니 () 排斥天地父母者也(배척천지부모자야)니라 是故(시고) 天地父母(천지부모) 震怒(진노)하여 子孫(자손) 零落(영락)하나니 此理(차리) 的知然後(적지연후)라야 庶幾入門乎(서기입문호)인저 此是(차시)開闢後五萬年(개벽후오만년) 勞而無功(노이무공)이라가 遇汝成功之(우여성공지) 天意也(천의야) 明察深究焉(명찰심구언)하라.

 

도인이 입도한 뒤에 천지 섬기기를 부모 섬기는 것과 같이 아니하고, 오히려 음사에 빠져서 음사의 마음을 놓지 못하여 혹 만들고, 혹 걷어치우고,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여 반은 천지를 믿고 반은 음사를 믿으니, 이것은 천지부모를 배척하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천지부모가 크게 노하여 자손이 영락하나니, 이 이치를 자세히 안 뒤에라야 거의 도문에 들어섰다고 이를 것이니라. 이것이 개벽후 오만년에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하신 한울님 뜻이니 밝게 살피고 깊이 연구하라.

 

<대의> 도인이 입도 후 천지섬기기를 부모섬김과 같이 하지 아니하고 음사에 마음을 놓지 않으면 이는 천지부모를 배척하는 일이며 자손이 영락하게 되는 화를 입게 된다. 도인들이 투철하게 이 이치를 알고 도문에 들어서라. 이것이 개벽후 오만년에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한 한울님의 뜻이니 밝게 살펴라.

 

* () 잠기다. 젖다.

* () 풀다. 벗다.

* 零落(영락) 초목의 잎이 말라서 떨어짐. 쓸쓸해짐.

* 開闢後五萬年(개벽후오만년) 勞而無功(노이무공)이라가 遇汝成功之(우여성공지) 용담유사》 〈용담가의 한 구절.

 

<해의> 도인이 입도한 이후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천지섬기기를 부모섬김과 같이 하지 아니하고 이전의 습관에 잠기어 음사를 하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어떤 때는 한울님을 위하다가 또 어떤 때는 한울님을 위하는 수행을 걷어치우고, 반을 믿고 반은 의심하여 반은 한울님을 믿고 반은 음사를 믿으니 이는 천지부모를 배척하는 일이다. 이렇게 바르게 믿지 않으면 한울님이 크게 노하여 자손이 보잘 것 없어지게 되니 이 이치를 확실하게 안 연후에라야 가히 도문에 들어선 것이다 말할 수 있다.

 

용담가에서 한울님께서 대신사께 말씀하신 개벽후 오만년에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의 의미가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니 밝게 살피고 깊이 연구하라. 해월신사께서 수운대신사의 가르침의 한 구절을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새롭게 해석한 글이다. 한울님의 성공이 바로 내게 있는 심령을 통해 시천주의 진리를 깨닫고 한울님을 부모님과 같이 섬기는 것이라고 해월신사께서 가르치신다. 한울님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있는 심령이 한울님을 찾는 단서이다. 이 이치를 잘 살펴 공부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공부이다.

 

출처 ^ 참고문헌

[지상천국건설을 이상(理想)하는 천도교

[매일종교신문

[성서의 연구

[제나에서 얼나’ 다석 류영모의 생애, 사상과 신앙…깨달으면 하나인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

 

#종교 #천도교 #도인 #해의 #수심정기 #용담가에서 한울님께서 대신사께 말씀하신 개벽후 오만년에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의 의미가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니 밝게 살피고 깊이 연구하라. 해월신사께서 수운대신사의 가르침의 한 구절을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새롭게 해석한 글이다. 한울님의 성공이 바로 내게 있는 심령을 통해 시천주의 진리를 깨닫고 #한울님을 부모님과 같이 섬기는 것 #해월신사 #한울님 #심령이 한울님을 찾는 단서 #3차원적 세상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어 보편화 #정신계에서도 마음이 가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이는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었다 아직은 그것을 활용하는 이가 적을 뿐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서 손잡고 만들어낸 정신의 내비게이션 #자유와 풍요로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인에게 주어진 특혜 #연애를 옛날에는 상사(相思)라 하였다 #지상천국건설 #신과 이웃과 이성과 모든 존재에 대한 깊은 관심 #무아(無我, 자기를 초월함)'의 경지를 갖는 것이 이상적 신앙의 원형이다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몸나로 #박영호는 함석헌의 글에 감명을 받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어 오던 중에 #함석헌의 스승인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바로 그 길로 제자가 되었다 #1965년 “스스로 독립하라 #스승의 뜻을 받들어 #5년간 혼자 공부한 끝에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 #팔순이 되신 다석 선생 #졸업증서 #마침보람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사상을 통해 얼나로 솟나는 길을 가리켜 보이는 #저서 #다석 전기 #노자와 다석 #다석 중용  #다석 씨알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 #잃어버린 예수 #다석 사상 #요한복음 #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 #다석 사상으로 풀이한 도마복음 #불교인 #그리스도인 #자본주의의 핵심적 폐단인 양극화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조건들을 더욱 버겁게 만들었고 희망의 싹을 잘라 #디지털 문명의 급진전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가치 변동은 기존 삶의 질서들을 심각하게 흔들어놓고 있다 #시대야말로 신앙적 가치 회복이 절실하지만 #종교는 스스로 세상의 가치에 매몰된 듯 맹렬한 욕망의 대열의 줄 #궁극의 의미 #무수지점(無數地點) #광겁시간(曠劫時間) #억조인생(億兆人生)이 살더라도 삶의 실상은 오늘 여기 나에서 볼 뿐이다 #어제라 내일이라 하지만 어제란 오늘의 시호(諡號)요 #내일이란 오늘의 예명(豫名)일 뿐이다 #다석 류영모 어록 #사도신경은 사도(apostle)가 전해준 신경(creed)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규범을 가리킨다 #사도는 예수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메시지 전달자들을 말한다 #2세기의 교회에서 정리된 세례 #믿음고백 형식이 3세기 이래로 전해져 사도신경의 기본이 되었다 #민속에 나타난 수신신앙 #신앙집단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 #톨스토이는 교회는 죽었다 #내가 예수를 스승으로 받든 것은 예수가 하느님과 부자유친(父子有親)하여 효도를 다하였기 때문이다 #城主(성주) 집을 지키고 보호하는 가신(家神)의 하나 #상량신(上樑神), 성조(成造)라고도 한다 #성주는 가신 중에서 가장 상위의 신이다 #한 가정의 가장을 대주(垈主) #가신의 대표인 성주와 더불어 한 가정의 운을 결정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 집에는 하나의 성주만이 있다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성주신을 맞아들이는 상량식을 하며 #무당을 불러 성주를 받아들이는 성주받이굿 #성주맞이굿을 하기도 한다 #성주는 집에 부정한 일이 있거나 위험한 일이 발생하면 집을 나가버리기 때문에 다시 모시는 의식을 해야 한다 #성주신에 기원하는 내용 #가내평안·풍년·감사·부귀·번영·무병·장수 등 복합적이다 #신체(神體)는 한지를 접어 대들보에 묶는 경우와 독이나 항아리에 쌀을 넣어 대청 마루 한 편에 놓는 경우가 있다 #이 독은 성주독이라 불린다 #성주독의 쌀은 해마다 햅쌀로 바꾸며 #묵은 쌀로 지은 밥은 절대 다른 집 사람과 나누어 먹지 않는다 #브리태니카 #土王(토왕) 토왕(土旺)의 뜻 #오행(五行) #땅의 기운이 왕성하다는 절기 #일 년에 네 번으로 사계 입춘 입하 입추 입동 전 각 18일 동안이다 #山神(산신) 산을 맡아 수호하고 있다 #신령(神靈) 산신령이라고도 한다 #산신은 농경민에게 물이나 비를 내리는 강우신(降雨神) #풍산신(豊山神)의 성격 #유목민에게는 대체로 사냥감을 풍부하게 내리는 은혜자 #노여움을 내는 존재 #인간에게는 아이를 가져다주는 신 #생명을 악귀들로부터 보호하는 수호신이다 #산신의 신체(神體) #호상(虎像) #신선상(神仙像) #산신에게 제사하는 일을 산제(山祭)산신제라고 한다 #한국은 일찍부터 산신제를 지냈으며 지금까지도 그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水神(목신) 수신은 바다  하천 연못 #우물 등 물을 관장한다는 신이다 #해신(海神) #용왕신(龍王神) #하천신(河川神) #독신(瀆神:나루터의 수신) 등으로 불린다 #일찍이 농경사회가 발전하면서 적당한 수량(水量) #인간의 바램은 물의 힘 자체를 신의 작용 #이를 관장하는 절대신에 대한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수신은 관개용수나 제방(堤防)의 수호신 #수해방지나 기우제 등에서 숭배의 신으로 섬겨져 #사람들은 이 신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때로는 친숙히 하고 #공물(供物)을 바쳐 그 노여움을 달래기도 하였다 #생활의 터전을 바다에 의지하고 있는 어부들은 옛날부터 해신이나 용왕신에 대한 신앙이 두터워 #여러 가지 제례를 #세계 여러 민족에게 공통된 민족적 의례라 할 수 있다 #사회개혁운동 #천도교의 사회개혁 운동은 다양하게 전개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동학혁명운동(東學革命運動) #개화운동(開化運動) #3·1독립운동(獨立運動) #1920년대에 전개된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동학혁명운동 #사회개혁운동 #동학혁명운동 #개화운동 #동학혁명 실패 후 혹세무민의 종교로 규정당한 동학의 3대 교주가 된 의암 손병희성사는 일본에 피신하여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된다 #삼전론 三戰論 #언론운동 #천도교월보’는 300여호를 간행하는 동안 가혹한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족계도라는 사명을 아우르는 역할 #3·1독립운동 #한일(韓日)합방 #일제의 우리민족에 대한 탄압과 착취는 급기야 1919년 3·1독립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 운동의 중심세력과 거사자금 모색이 천도교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천도교는 3·1독립운동 당시 800여만명의 신도를 확보한 거대교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교조 이래 면면히 이어져온 민중의식 #고양과 지배계급의 탄압에 대한 반발의식 #일제탄압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의식으로 승화되었고 #천도교의 이같은 양적 팽창은 #인적·물적 뒷받침이 되기에 충분한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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